[동서양 사상비교] 푸코의 무위론과 노자의 무위론 |
푸코를 도가적으로 읽는 것이 가능할까 |
김형효 _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철학 |
철저하게 서양적인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20세기 프랑스의 철학자 푸코(Michel Foucault·1926~1984)를 동양적인 도가(道家)철학의 시각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할까? 서양철학자라도 동양적인 사유와 깊이 만나는 철학자도 있고, 별로 동양의 사상과 인연이 두텁지 않는 철학자도 있다. 나는 푸코가 이 후자의 편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그가 동성연애자로서의 후유증 때문에 불행히도 에이즈(?)에 걸렸다고 한다. 이 점도 서양의 철학자들이 가끔 동양의 현자적인 철인의 생애와 다른 면모를 풍겨주는 한 대목이기도 하다. 더구나 푸코를 현대철학사는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구조주의자로 분류하고 있다. 20세기의 구조주의(structuralism)의 철학적 사유를 기원전 7세기 경으로 여겨지는 노자의 도가적 사유와 회통시킨다는 것은 억지 춘향의 냄새를 피우는 것 같기도 하고, 인위적인 짜깁기의 구성처럼 여겨져서 자연스럽게 솟는 철학적 사유의 흐름 같지도 않는 것 같다. 더구나 내가 그 전에 도가의 사유를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의 시각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마당에, 다시 구조주의의 입장으로 도가적 사유를 음미한다는 것은 이 주제가 비록 《넥스트》의 편집진에 의하여 내게 주어진 것이라 하더라도 비교철학의 사유에서 봐도 필연성이 진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왜 노자와 푸코를 비교하나? 노장의 도가사상은 확실히 해체적이다. 즉 인간의 의식을 해체시키고 인간중심적 사유를 용해시키면서 인간을 자연의 기(氣) 속으로 분산시키면서 도덕적 선악과 인식론적 시비를 초탈하려는 점에서 도가사상이 하이데거(Heidegger)와 데리다(Derrida)를 잇는 해체주의적 사유의 흐름과 유사한 맥락을 엮고 있음이 사실이다. 해체 철학으로 도가를 읽어야만 도가사상이 더 분명하게, 그리고 지성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와닿는다. 그런데 다시 구조주의적으로 노자를 읽는다? 여기서 나는 노자를 푸코의 구조주의적 철학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푸코의 철학은 철두철미 서양적 사유의 역사와 그 지평 위에서 태어난 철학자이므로 동양적 사유와 그 도(道)의 맥락과 특별히 강한 인연의 고리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의 철학은 동양적 유교의 이성주의의 사유와 결이 애시당초에 맞지도 않는다. 그래도 유교보다는 도가적 사유와 대화가 가능한 대목이 있다. 그러나 푸코의 철학이 해체주의처럼 도가적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구조주의가 해체주의의 철학적 선구자의 위치에 서 있기 때문에 구조주의와 해체주의 사이에는 일말의 철학적 공통성이 깃들어 있다. 즉 의식주체의 사유와 존재를 부정하면서 자연의 무의식적 심층 깊이를 거의 불변적 장(場)으로 여기고, 언어활동을 의식주체의 대신으로 등장시키는 것과 이성과 비이성을 선악으로 대비하는 이성주의를 부정하는 점에서 푸코의 구조주의는 해체주의와 일맥상통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역시 푸코의 철학적 사유가 노자의 도가적 무의식의 담론과 상호 연관되는 측면을 어느 정도 인식론적으로 함의하고 있다 하겠다. 둘 다 무의식의 불변적 사유를 철학적 담론의 바탕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노자의 도가가 푸코의 구조주의와의 사이에 철학적 교환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비교를 통하여 노자와 푸코를 철학적으로 더 선명하고 풍부하게 자각하는 계기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모든 선명한 인식의 자각은 늘 타자와의 비교를 통하여 대자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푸코의 구조주의와 인식의 고고학 앞에서도 밝혔듯이 푸코는 철두철미 서양적 사고의 울타리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의 철학은 서양철학사의 한계 안에서 서양철학사를 현재적 시각에서 어떻게 인식해야 할 것인가를 다룬다. 그런 비판적 시각이 서양의 전통적인 의식적 정신주의와 이성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이론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독일의 하이데거와 프랑스의 데리다의 철학적 사유에 비하여 유사성의 비율에서 약하지만 그래도 노장사상과 닮은 물학(物學)의 공통성을 띠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나의 이 글은 물학적 사유인으로서 기원전 7세기 경의 노자와 20세기의 푸코를 간략히 비교해 보려는 것이다. 푸코는 서양사를 조명하면서 역사의 시대적 변이를 헤겔(Hegel)이나 마르크스(Marx)의 지성사처럼 이성이나 계급의 변천사로 보기를 거부한다. 헤겔이나 마르크스의 철학은 인간 정신이라는 이성이나 사회적 계급의식이 역사를 통하여 어떻게 다양하게 전개되어 온 것인가를 규명하는 역사와 같다. 그래서 그들의 역사철학은 이성과 계급이 어떤 불변의 실체로서 먼저 존재했고, 이어서 그것이 각 역사의 시기마다 어떻게 변천하여 작동해 왔는가를 보편적 논리로써 밝힌다. 흔히 마르크스의 철학은 유물론이기에 의식과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계급의식의 자각이 없이는 그의 역사철학과 사회철학이 성립하지 않는다. 헤겔이나 마르크스가 다 주체의 의식을 역사 속에서 첨예화했다. 그러나 푸코의 역사 개념은 이처럼 어떤 불변의 실체가 가변적으로 역사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인간이 만든 하나의 신화로 규정한다. 왜냐하면 역사는 동질적 실체의 다양한 변화를 읽는 연속사가 아니라, 다양한 구조의 지층으로 층층을 이루고 있는 단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역사의 지층에는 그 시기에 모든 생각과 문화를 공통적으로 가로지르게 하는 ‘역사의 선험적 인식성’(l'episteme transcendental de l'histoire)이 있다고 여겼다. 역사의 다양한 지층이 앞 시대와 연속된 것이 아니라, 단절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역사에는 연대기적인 시기의 기록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지층의 독특한 세상인식의 틀이 중요해진다. 이 틀이 역사의 무의식적 구조이다. 이런 푸코의 생각은 대상의 인식에서 개별적인 경험보다 앞선 선험적인 도식을 중요시하는 점에서 칸트(Kant)의 구성주의와 유사한 대목이 있다. 그러나 칸트의 철학은 의식의 선험적 도식을 먼저 구상하기에 어디까지나 의식철학인데, 푸코의 역사진단은 그런 개인적 의식이 아예 증발된 무의식적 지층의 구조를 선험적 사유의 틀로 본다는 점에서 현대 프랑스의 철학자 리쾨르(P. Ricoeur)가 잘 지적했듯이 푸코의 철학은 ‘주체가 없는 선험주의’(le transcendentalisme sans sujet)라고 읽어도 된다. 이런 역사의 진단법을 푸코는 고고학이라 불렀다. 고고학은 중세기 교부시대의 대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나 근대의 역사철학자들인 헤르더(J. Herder), 헤겔, 랑케(L. Ranke)나 마르크스의 사관과는 다르다. 푸코에게 역사를 관통하는 사관이 없다. 다만 각 고고학적 역사의 단층마다 달리 성립하는 역사의 선험적 인식성이 있을 뿐이다. 모순 안에 있는 심층적 유사성 이 인식성은 각 단층마다 살아 온 사람들의 익명적 언어활동(le langage anonyme)으로서 각 지층의 담론들(les discours)과 실천방식들(les pratiques)을 가능케 하는 구조적 무의식과 같다. 이 무의식적 구조는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안 보이는 어떤 결정된 역사의 밭과 같다. 따라서 연대기가 다르더라도 같은 역사의 인식 밭을 공유하는 경우가 생긴다. 같은 시기에 서로 모순적인 것같이 보이는 생각들도 다른 고고학적 지층의 인식에서 보면 서로 유사한 것들의 하찮은 외적 대립에 불과하게 된다. 그래서 헤겔의 유심론적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변증법이 각각 나타내는 동시대 안에서의 모순대립의 투쟁의 싸움은 심층적인 유사성을 알지 못하고 표면에서 덧없이 날뛰는 일시적인 감정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간단히 예를 들어 본다. 서양사에서 15~16세기의 르네상스의 시기와 17~18세기의 고전주의시대와 19~20세기 인간주의 시대의 근대적 인식성을 간략히 생각해 보자. 푸코에 의하면 르네상스 시기의 고고학적 인식성은 닮음의 모습으로 이 세상을 인식한 ‘구형’(球形·la sphere)이라는 것이다. 마치 호두알이 두뇌의 모습을 닮았기에 호두알을 많이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사고방식은 동심원의 중심으로 모든 구형들을 다 묶어 두려는 인식의 태도를 연상시킨다. 그런 시기에는 대립의 개념이 없다. 모든 것이 서로의 우정을 나누는 친구로서 동심원으로 묶으려 하는 틀 속에 들어간다. 그래서 그런 언어활동이 그 당시의 담론과 실천방식에서 지배적이 된다. 이것은 개인의 의식의 자유선택과 전혀 무관하다. 돈키호테가 웃기는 사람으로 등장하는 까닭은 그의 사고방식이 르네상스 시대의 것인데, 이미 그가 살고 있는 고전시대에 적응이 안 되어서 일어난 비분별적 닮음의 사고를 무의식으로 노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맛이 간 짓만 하였다. 고전시대는 엄격하게 분별적이고 정확히 쪼개어서 주객이 서로 수학적으로 대응되는 균형의 사고를 담은 그런 지층이다. 그래서 의식이 대상을 분류학적으로 표상하는 시대에 속하기에 그 시대의 담론과 실천방식은 대단히 분류학적 질서개념으로 짜여져 있어서 ‘자연사’(自然史·l'histoire naturelle)의 연구에서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Linne)의 분류학적 유(類)와 종(種)에 의한 질서구분이 ‘부(富)의 분석’(l'analyse de richesse)의 방식과 서로 교응한다는 것이다. 즉 부의 분석에서도 자연의 분류처럼 상품의 전체적 가치가 어떻게 서로 교환되며 대응되는 것인가를 알려주는 기호체계로서 화폐를 척도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런 부의 분석은 또 포르 루아얄(Port royal)이 중심으로 연구한 ‘일반문법’(la grammaire generale)의 이론과도 인식성에서 무의식적으로 상통한다는 것이다. 일반문법은 주어와 술어가 계사인 ‘etre’(to be)을 중심으로 어떻게 상호 상관성을 맺고 있는 것인가를 다루는 문법연구이다. 이 세계를 상호교응하는 ‘수학적 상관표’(le tableau a double entree)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고전시대의 고고학적 지층의 인식성이라는 것이다. 그런 인식성이 명증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기에 고전시대가 광기를 불명료하고 비이성적인 혼몽(昏?)으로 규정하여 광인을 알코올 중독자나 중범죄자나 동성애자와 같이 명증한 인간의 세계로부터 영원히 차단시켜야 할 비이성적 짐승으로 분류했다. 이 고전시대의 지층이 지나면 근대의 지층이 나타난다. 이 근대의 지층은 철저히 인간의 의식을 중심에다 두는 휴머니즘 시대로서 서양사에서 비로소 인간의 의식이 모든 세상보기의 핵심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중심주의적 지층이 형성됨으로써 역사가 질서와 분류의 시대를 대신하여 지식의 생명으로 여겨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식을 역사적으로 해석하게 됨으로써 시간과 인과론의 개념이 근대의 인식성의 와중에 군림하게 되었다. 이런 근대성의 인식성은 비록 연대기적으로 고전시대에 속하나 사유방식에서 근대성을 잉태시킨 칸트(Kant)가 효시라고 푸코가 지적했다. 칸트가 인간을 고고학적 사유의 중심테마로 채택하고 인간의 유한성을 부각시키면서 동시에 인간을 시간적 인과론의 개념으로 파악하고 역사를 진보와 발전의 의미로 읽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의 분석 대신에 ‘경제학’이 창설되어 아담 스미스(Smith)나 리카도(Ricardo)나 마르크스가 다 노동을 부의 창출의 원인으로 보기 시작했고, 일반문법도 ‘역사언어학’(la philologie)으로 치환되면서 어원을 따지면서 언어의 발달을 따지는 비교문법학과 동사의 굴절이론 등을 중심으로 하는 언어생성론을 중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사도 ‘생물학’으로 변환하면서 생명의 진화와 유한성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래서 경제학과 비교언어학과 생물학이 고고학적 인식의 ‘삼면각’(la triedre)을 구성하여 모든 지식을 재단하는 척도로 작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근대의 지층에서는 역사발전주의, 유한주의, 인간주의가 근대 서양의 고고학적 인식성의 특성으로 부각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미스의 자본주의나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나 다 근대 시기의 고고학적 지층 안에서만 등장하는 같은 인식성의 반대적 양상에 불과하지 서로 불구대천의 모순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근대적 지층을 떠나면 저 두 사상은 다 사라지면서 단지 같은 지층 안에서 자란 형제처럼 외적 반대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근대의 지층이 끝나가려는 조짐이 보인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도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푸코의 물학(物學)과 노자와의 유사성 그러면 푸코 자신의 적극적 사상은 무엇인가? 그는 서양사를 통하여 일관되게 강조되어 온 이성주의를 싫어한다. 그는 서양적 이성주의가 근대기의 인식성인 유한한 인간, 역사의 진보를 위하여 현재를 늘 불행하게 생각하도록 하는 우울하고 우수에 찬 내면성의 인간을 만들어 놓았다고 비판한다. 이성주의의 횡포는 서양사가 고고학적으로 지층을 달리해 오면서 다른 인식성으로 담론화되고 실천양식으로 각각 굳어지면서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근대성의 휴머니즘과 진보적 역사주의라는 허황된 세계관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컨대 르네상스 시기에는 광기와 광인이 그래도 사회생활과 이성의 가장자리에서 밥을 먹고 살았다는 것이다. 광인들은 종말론적인 죽음의 초월적 상상처럼 두렵고 외경스런 존재로 간주되어 그들의 천국에서 살도록 광인들을 배에 태워 자유롭게 한곳에 정착하여 살도록 방임했다는 것이다. 고전시대가 오면서 광인들을 비극적인 공상가로 여기던 생각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오로지 침묵과 복종으로 일관되도록 강요하기 시작했다. 데카르트(R. Descartes)의 철학이 그런 강요의 예찬이었다. 왜냐하면 광인은 비이성적인 오류와 환상의 대명사에 불과하다. 이성은 보호되어야 한다. 인간은 불행히도 미칠 수 있는데, 이성적 사유는 절대로 미칠 수 없다. 이성과 광기는 한자리에 앉을 수 없다. 그래서 광인들을 유폐시키는 것은 사회를 명증하게 만들고 도덕적으로 개조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여겨졌다. 광인들은 술주정뱅이, 성병환자와 색골들과 동성애자들과 함께 감금제도(l'enfernement)에 유폐되었다. 이것이 그 시대의 지배적 인식성의 실천양식에 해당했다. 감금제도는 의학적인 발상이라기보다 오히려 더 도덕적인 발상의 소산이었다. 그런 제도 안에서 이성은 그들을 교정시키고 참회시키는 구실을 발견했다. 근대기에 와서 이제 인간의 사회의 생산성 향상이 시급해졌다. 그래서 광인을 제외한 다른 낙후자들은 사회의 경제적 향상과 역사의 진보를 위하여 인력 보완의 측면에서 재투자되었다. 그러나 광인들은 정신이 비이성적이어서 근본적으로 교정되어야 하므로 병원(l'hopital)에 수용되어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이른바 정신병원이다. 광인의 배(la nef des fous)에서 감금제도(l'enfernement)에로, 다시 정신병원(l'hopital)으로 지식의 고고학적인 제도가 이전되었다. 이 정신병원과 함께 광인은 정신의학적 치료의 대상으로 다루어졌다. 이런 근대성의 지층과 함께 인간은 역사발전과 이성적 의식의 주체로서 등장했고, 광인은 역사의 진보와 생산성이 없는 한에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인간은 자기의 시간적 유한성을 자각하는 존재인데, 그 유한한 존재의식은 늘 내부의 채워지지 않는 유한의 불안과 우울증으로 주름진 공허를 진보라는 발전의 이데올로기로 대신하려 한다고 푸코가 비판했다. 그래서 푸코는 이성과 인간의 종말을 선언하면서 니체(Nietzsche)와 같은 초인(le Surhomme)의 힘을 그리워했다. 그래서 그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처럼 이성과 몰이성의 칸막이가 나누어지기 이전의 원초적 진실을 그리워하였다. 그는 세계를 이성의 진리와 몰이성의 광기로 나누기를 거부하면서 척도의 로고스(Logos)가 몰척도의 히브리스(Hybris)와 서로 대립하지 않는 세상을 상정했다. 그래서 그는 로고스가 모든 전쟁과 모순과 판단 이전에 원초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그런 고대 그리스의 세계에 대한 향수를 느꼈다. 이런 고대 그리스의 세계는 노자의 《도덕경》에 비친 무위(無爲)사상을 연상시킨다. 노자의무위사상은 허공의 무(無)를 무한대의 힘으로 표상한다. 그래서 무한의 허공은 결코 지치거나 고갈되지 않는 힘을 의미한다. 무위사상은 무한대의 힘을 지닌 자연을 닮기를 종용한다. 푸코의 초인적 힘은 유한성으로 쭈그러진 내면의 의식세계를 부정하고 무한의 역동적 힘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 힘은 노자가 말한 자연의 무처럼 그런 허심자조(虛心自照)하는 맛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초인사상이 허무주의적 광란으로 미끄러질 위험성을 안고 있다. 인간이 모든 창조적 가능성을 오직 자기 생각으로부터만 인출해 내려고 하면, 하이데거가 잘 지적했듯이 종국적으로 인간은 미친다. 니체가 그러했고 푸코도 이와 유사했다고 보여진다. 최근의 인간의 초인적 해방을 외친 천재적 철학자들인 들뢰즈(G. Deleuze)나 알튀세르(L. Althusser)가 다 광기(?)로 목숨을 끊은 것을 보면, 광기는 인간의 해체적 부정을 부르짖은 사람이 자연으로 인간을 물화(物化)시키지 않으면 자기의 부정과 같은 역설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뜻함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해체는 자연성의 긍정으로 이어져야 하리라. 푸코, 그는 보통 서양철학자들처럼 무를 영 이해하지 못했다. 노자의 무는 허무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 세상에서 인간이 행복하기 위하여 이성과 몰이성으로 이분화하는 사고를 떠나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여기서 그의 사유가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빛과도 화합하고 먼지와도 동거함)의 사유와 만난다. 도가적 물학을 닮은 푸코의 사유 ‘화광동진’을 푸코의 개념으로 풀이하면, 그것은 자연의 도(道)가 빛의 이성과 먼지의 몰이성을 결코 이분법적으로 대립시키지 않고 다 친하게 지내고 있음을 가리킨다. 빛이 먼지와 다투고 싸운다면, 그 빛이 먼지를 완전히 소탕하지도 못할 뿐더러 먼지가 없는 빛은 반사가 없어서 밝아지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빛은 먼지 밖에서는 어둠과 같기 때문이다. 서양의 전통철학이 이성을 위하여 몰이성의 광기를 완전히 유폐시키거나 차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사상이 서양철학의 한계이다. 선이 악과 싸워서 악을 뿌리째 뽑아야 한다고 서양의 실천이성이 줄곧 주장했다. 그러나 이성은 몰이성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고, 선이 악의 역할을 무시하고 자기 존재를 선보일 수 없다. 진리가 허위를 늘 전제해야 진리의 가치를 밝히게 된다. 이것이 세상의 양가성이고 이중성이다. 그런데 서양의 인식론과 도덕론은 너무 택일적 사유를 강요했다. 이것이 서양의 이성철학의 한계였고 푸코가 그것을 감지했다. 14세기 독일의 에카르트(Eckhart)와 17세기 네덜란드의 스피노자(B. Spinoza)가 20세기의 하이데거에 앞서 이미 그것을 통찰하였고, 니이체와 데리다와 푸코와 들뢰즈가 그것을 또한 간파했다. 그러나 무를 전제해야만 인간의 이성적 판단의 이분법을 극복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은 에카르트와 하이데거처럼 독일 신비주의의 전통에 서야만 가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프랑스 철학은 저런 무의 신비주의를 채택하지 않고 실체적 합리주의적 지성 대신에 환영(幻影·le simulacre)과 같은 애매모호성을 존재로 보는 연기적(緣起的)인 사유를 가까이하는 것 같다. 그렇게 보면 이성의 빛과 몰이성의 먼지도 독자적인 대립의 질서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같이 동거하는 공존의 환영으로 보게 된다. 노자가 무를 말하지만, 동시에 그는 무의 본체와 함께 유(有)의 현상을 말한다. 그 유의 현상은 홀로 짓는 자작(自作)이 아니라 타자와 함께 하는 병작(竝作)의 상호 연기(緣起)에 다름 아니다. 연기법은 불교의 진리이나 노자도 그런 사유를 하였다. 노자가 말한 병작이나 유욕(有欲), 그리고 자빈(自賓·자기와 손님이 서로 어울림)과 승승(繩繩·새끼꼬기처럼 꼬여 가는 것)의 어휘가 다 그런 뜻을 함의한다. 푸코의 반(反)이성주의와 반(反)휴머니즘은 인간의 이성적 판단의 분별심에 대한 신뢰와 인간이 역사의 주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인간의 능위적(能爲的) 사유를 벗어나기를 종용하는 것과 같다. 푸코가 근대기에 와서 왜소해진 인간의 자각증세를 비판하면서 초인과 같은 힘의 발산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내적 의식의 자성(自省)을 팽개치고 그의 사유를 ‘외부에서 보는 사유’(la pensee du dehors)로 규정하면서 심학적 반성철학을 경멸했다. 그렇게 보면 그의 사유의 스타일은 역시 유가적 심학(心學)을 좋아하지 않는 도가적 물학(物學)을 닮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씌어진 물학의 개념은 물질학의 의미가 아니고, 인간을 본능과 본성의 괴리가 없는 자연의 묶음으로 해체시키려는 사유를 말한다. 그래서 심학은 의식의 주체를 중심으로 하여 노력하는 능위학(能爲學)이지만, 물학은 의식을 배제한 자연의 무위학(無爲學)과 통한다. 그러나 푸코의 무위학은 자연의 무위성을 너무 성욕적 차원으로 한정시킨 자승자박의 결과를 초래한 감이 있다. 성욕(la sexualite)이 성과학(la sexologie)적 담론의 언어활동은 아니지만, 인간의 모든 행복이 건전한 성욕으로 수렴되는 것만도 아니다. 우리가 푸코를 하이데거와 데리다와 달리 노자의 사유에 적극 편입시키기를 주저하는 이유가 바로 그의 사유가 이성주의와 인간주의의 한계를 비판하는 일에 너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적극적 사유를 더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행히도 오래 살지는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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