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대만사람들이 보는 '일제식민지'

이강기 2015. 9. 19. 10:33
 
 2005년 여름 臺灣에서 있었던 일

                                                                                          홍순권(동아대학교 교수)
  

    대만 여행이 있기 얼마 전의 일이다. 어느 학회에서 일제시기 일본인 사회에 관한 주제로 발표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토론 자리에서 한 대만현대사를 공부하는 동양사 연구자로부터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 질문의 요지는 왜 한국에서 일제시기 연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일제시기 식민통치를 부정적으로만 다루느냐는 것이었다. 즉, 그는 타이완의 많은 연구자들은 일제시기를 대만 역사상 본격적인 근대화가 이루어진 시기로써 매우 긍적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한데, 똑같이 일제의 식민통치를 받은 한국의 경우는 사정이 정반대라며 이러한 양국 국민간의 역사인식의 차이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에 대하여 강한 문제제기를 하였다. 사실 그 때만해도 대만의 역사 연구에 대하여 거의 문외한인지라 특별히 의견을 낼 처지는 못 되었고, 막연히 대만은 일제의 식민통치기 이전에도 사실상 중국의 식민지나 다름없었으니, 한국과 동등하게 비교될 수만은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였다. 그 뒤에 대만근대사에 관한 논문을 접하면서 대만 사학계의 사정을 다소 이해하게는 되었으나, 그래도 그 때 그 학회에서 받은 질문에 대한 속 시원한 해답은 오랫동안 얻지 못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지난 해 여름 뜻밖에 대만을 여행할 기회가 생겼다. 지난 2005년 8월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는 서울대 정근식 교수가 이끄는 한센인 인권조사팀과 함께 한국, 일본, 대만측 관계자들이 공동으로 개최하는 <<동아시아 평화·인권 국제학술회의 : 2005 타이페이>>에 공식 참가하기로 한 것이다. 학술회의는 8월 4일 타이페이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고, 이를 위해 우리 한국 측의 참가자 일행은 2005년 8월 3일부터 동월 7일까지 4박 5일의 대만 방문을 계획하였다. 이번 여행의 목적 중 중요한 것은  물론 학술회의에 참가하는 것이었지만, 우리 연구회측의 대부분 사람이나 나로서는 이번 여행을 통해 대만현대사의 제노사이드와 관련된 현장을 답사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었다. 물론 한센인 인권조사팀은 학술회의에는 참가하지만, 나머지 일정은 대만의 한센인 인권현실을 조사하기 위해 우리와는 별도로 행동하기로 하였다.


   첫째 날(8월 3일) : 우리 일행이 탑승할 비행기는 오후 2시 인천공항에서 출발 예정이었다. 출발에 앞서 우리 일행은 공항에 미리 나와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내가 속한 제노사이드 연구회팀에서는 창원대 도진순 교수를 비롯하여, 장완익 변호사, 조선대 김하림 교수, 전남대 대학원 박사과정의 한혜경 씨 국가인권위원회의 박강배 씨 등이 참가하였다. 한센인 인권조사팀에서는 팀장 정근식 교수를 비롯하여 여러 명이 참석하였고, 또 팀과는 무관하게 개인 자격으로 참가한 사람도 여러 명 되었다. 일행은 모두 15명이었으며, 그 가운데는 특별히 기억에 남는 홍성담 화백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 일행은 오후 2시에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오후 4시에 대만의 中正공항(장개석 공항)에 도착하였다. 중정공항에는 대만 방문 기간 중 우리 한국측 일행을 위해서 통역과 안내를 맡을 화교인 ‘장 선생’이 마중을 나왔다. 장 선생은 한국에서 성장기를 보낸 30대 초반의 젊은이로 한국말과 중국말이 모두 유창하였다.  

   학술행사는 대만 도착 이튿날 오후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착 첫 날의 공식 일정은 타이페이 변두리 가까운 곳의 학살 현장을 답사하기로 계획이 잡혀 있었다. 우리는 일단 예정된 숙소인 장경국호텔에 짐을 풀었다. 장경국 호텔은 장개석의 아들인 장경국의 이름을 딴 것으로 타이페이에서 가장 유명한 호텔인 원산반점 언덕의 바로 아래에 있었다. 간단히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니 6시 반이 되었다. 우리 일행은 곧장 택시를 타고 장 선생의 안내를 받아 첫 번째 답사 현장인 마장정으로 이동하였다. 마장정은 계엄시기 수난자들이 끌려가 총살당하였던 사적지이다. 대만의 역사에서 계엄시기는 국민당 정권이 1947년 2·28사건에 이어 1949년 타이완으로 정부를 옮겨 1987년 계엄을 해제할 때까지의 시기를 일컫는다. 일제시기에는 경마장이었던 이 곳 학살터가 백색테러의 기념공원으로 조성된 것은 불과 5년전의 일이었다고 한다. 마장정 기념 공원에는 학살터를 상징하는 거대한 묘가 조성되어 있으며, 매년 2월 28일에는 1년 딱 한번 추모식을 위해 사람들이 찾는 그런 곳이라고 한다.  



  둘쨋 날(8월 4일) : 학술행사는 오후 2시 40분부터 시작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날의 오전 시간은 대만 시내를 둘러보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그러나 아침 일찍부터 태풍을 예고하는 비가 세차게 내렸기 때문에 바깥나들이에는 적당한 날씨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고 싶을 때 언제나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정된 일정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 아침 식사 후 첫 번째 방문지는 시내 복판에 있는 2·28공원(정식 명칭은 타이페이 2·28평화공원)이었다. 2·28사건은 1947년 2월 27일 타이페이에서 밀수를 단속하던 전매국 직원이 상인을 폭행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발생하였다. 이로 인하여 그동안 쌓여있던 대만 민중들의 분노가 일시에 폭발, 대만 전역에서 관민간의 충돌이 일어났다. 사건이 확대되자 3월 8일 대륙에 주둔하고 있던 국민당 군대가 대만에 상륙 진압에 나섬으로서 대량학살로 이어진 것이다. 이후 국민당 정부가 중국공산당에 쫓겨 대만으로 옮겨 온 1949년 5월부터 1987년 7월 계엄을 해제하기까지 “반공항소 사상을 확립, 대만 사회의 사상과 문화, 교육을 통치궤도 안에 넣으려는” 국민당 정부의 국가폭력이 장기간의 군사계엄령 상태에서 자행되었다.  


   이른바 백색공포로 불리우는 계엄시기에 국민당 정부는 국가보안법 등 각종 악법을 제정하고, 정보국 등 각종 폭압기구 등을 만들어 지식인과 문화계 인사, 노동자, 농민 등 ‘애국주의’ 인사들을 반란과 간첩 등의 죄목으로 무차별 체포, 투옥하였다. 체포된 애국주의자들은 타이페이 시내 하천가 마장정으로 끌려가 총살을 당하거나, 타이페이 인근의 新店군인감옥, 타이페이 시 외곽의 토성, 지금은 타이페이 시가 된 內湖, 대동 부근의 국방부 泰源感訓감옥 등에 투옥되었다. 그들은 여기서 이른바 “受訓”이라는 이름의 정치세뇌를 강요당한 후 “新生”해야 했다.  


   2·28공원에서   2·28공원은 지하철을 타고 가서 臺大의학원 역에서 하차하니 바로 찾을 수 있었다. 공원에는 2.28기념비 등 여러 기념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었는데, 때마침 비가 심하게 내려 이들 조형물들을 자세히 살펴 볼 수는 없었다. 공원 안에 2·28 기념관이 있었다. 이 건물은 원래 타이페이 라디오 방송국으로 1930년 일본인 구리야마 슌이치가 설계하였는데, 해방 이후에도 1987년까지 계속 방송국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시에서 관리하다가 타이페이 시 정부의 2·28기념관 설립 계획에 따라 개조공사를 거쳐 2.28사건 50주년이 되는 1997년 지금의 ‘타이페이 2·28기념관’으로 탈바꿈하였다.

   마침 기념관은 비를 피하기에 안성맞춤이어서 우리는 공원보다 기념관 내부를 관람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총 건평 820평의 2층 건물 내부를 30분 넘게 둘러보면서, 우리는 2·28 사건과 관련된 여러 가지 자료와 유물들을 접할 수 있었다. 기념관에는 약 1만 3천여 건의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2·28 사건 및 계엄시기 희생자들의 각종 유품, 학살터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이는 총탄과 학살 기구, 사건 관련 책자와 국민당 정부의 홍보물 등 다양한 자료가 포함되어 있었다. 기념관의 내부는 일제 식민통치시기부터 계엄 해제 때까지를 몇 개의 소시기로 구분하여 각 소시기의 전시실을 특색 있게 꾸며 놓았다. 특히 계엄시기는 감옥의 이미지와 공포를 느낄 수 있도록 특별한 장식과 조명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일종의 제노사이드 기념관인 이 기념관을 둘러보면서 내가 받은 특별한 인상은 백색테러의 제노사이드보다는 오히려 일제시기 식민통치에 대한 ‘지나친’ 미화에 있었다. 즉, 기념관의 전시물들의 ‘컨셉’은 한마디로 일제시기 근대화에 대한 대만인들의 긍지와 이들 대만인들에 대한 외성인들[국민당]의 야만적인 탄압의 대비였다. 이는 나에게 약간의 지적인 충격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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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날 오전의 나머지 일정은 대만인들의 최고(?) 자랑거리이기도 한, 그러나 외성인들이 가져온 중국 본토의 문화재인 고궁박물관의 유물 전시를 관람하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오후에 열리기로 된 학술회의는 2시 40분부터 시작되었다. 참가자는 우리측 15명, 일본 리츠메이칸 대학의 서승 교수와 동행한 일본측 일행이 약 15명, 그리고 타이완 측에서는 林書揚 민주노동당 명예주석을 포함하여 주로 민주노동당 관계자들과 연구자들이 참석하였다.

발표는 각국에서 1명씩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우리 측에서는 도진순 교수가 <한국전쟁 중 산성리 오폭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였고, 일본측과 타이완측에서도 각각 <동아시아 냉전과 일본 전후사>(長志珠繪, 神戶外國語大), <The Cold-War Subjectivity in Taiwan>(I-Chung Chen, 타이완중앙연구원)라는 제목의 발표가 있었다. 이 중 타이완 측의 발표는 한편으로는 냉전과 반공권력인 국민당독재의 피해자로 자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과 일본에 기대어 타이완 문제를 해결하려는 민진당 대만독립파의 모순된 냉전의식을 분석한 글로 오늘날 타이완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하는데 좋은 참고가 되었다고 생각되었다.

   원래 이번 학술회의에서는 민중화가로 알려진 홍성담 화백의 ‘인권 미술’ 전시회가 열릴 예정이었으나, 사정상 열리지 못하였다. 그 대신 심포지움이 끝난 뒤 ‘미술가의 눈으로 본 오키나와 평화공원’이라는 내용의 홍 화백의 간단한 강연이 있었다. 이야기인즉, 한마디로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세워진 오키나와 평화공원이 오히려 전쟁에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으로 이는 야스쿠니 신사의 ‘컨셉’을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였다.

  공식 학술회의와 저녁식사를 마친 다음 특별행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것은 까오친 수메이(高金崇
梅) 대만 입법원 의원의 특별 강연이 있었다. 그녀는 원래 타이완의 인기있는 여배우로 원주민 출신이다. 나로서는 기억이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결혼 피로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녀는 또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대만 원주민의 위패 송환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국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이날 그녀의 강연도 주로 그녀가 주도해온 야스쿠니 신사 원주민 위패 송환운동에 관한 것이었다. 강연을 통해 그녀는 일제시기 대만 원주민이 일제로부터 어떻게 박해를 받았는지, 일제 말기 그들이 어떠한 연유로 원주민 의용대라는 이름으로 강제 징병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들의 위패가 일본에 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일본으로부터 송환되어야 마땅한 것인지 등에 관한 내용을 사진 자료와 함께 소개하였다. 한 때 300-400만명에 이르던 원주민은 지금은 고작 30-33만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다른 설명 없이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이들 타이완 원주민들이야말로 타이완 식민역사의 가장 큰 희생자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셋째 날(8월 5일) : 이 날은 이번 대만 여행의 핵심이라고도 할 만한 것으로 타이뚱 앞바다의 녹도 섬을 방문하기 로 한 날이었다. 주지하다시피 녹도는 장개석 통치기의 정치범 강제수용소(新生訓導處 1951-1965년, 綠洲山莊 1972-1987)가 있었던 곳이다. 대만 본섬에서 배로 1시간 거리에 있는 아주 작은 섬으로 일제에 의해 부랑자 수용소가 설립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또 절해의 고도라는 점에서 영화 빠피용의 감옥을 연상케 한다. 1987년 계엄해제 이후 일부 시설은 범죄자들의 출소 후 사회적응을 돕는 직업교육 훈련소로 쓰이고 있고, 나머지 일부는 陳水扁 정부의 국가인권정책에 따라 인권기념공원을 건설하기 위하여 옛 모습 그대로 남겨져 있다고 한다.  

   아침 일찍 타이뚱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서둘러 타이페이 공항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태풍의 접근
으로 인한 기상 악화로 출발이 지연되던 비행기를 몇 시간이 기다렸으나 끝내 결항되어 출항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일정에 큰 차질이 빚어졌다. 결국 우리는 12시가 거의 다 되어서 비행기 대신 버스를 전세 내어 타이뚱을 향해 출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태풍 피해로 인하여 지름길인 동쪽 해안 도로가 파손되어 서쪽 해안 남단의 까오슝을 거쳐 타이뚱으로 돌아가는 우회로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그 날 밤 늦게 간신히 타이뚱에 도착할 수 있었다. 녹도 방문은 다음날 아침으로 미루어졌다.

  일정의 차질로 공항에 대기하는 도중 우리는 오랜 세월을 정치범이란 이름으로 수용소에 갇혔다 나온 민주노동자 관계자 할아버지들로부터 2·28사건에 대하여, 그리고 장개석 정부 시기의 백색테러에 대하여, 또 수용소 생활에 대하여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70세를 훨씬 넘은 ‘노혁명가’는 자신의 정치적 경험에 관한 증언을 통해 백색테러가 일제시기 민족해방운동세력과 해방 이후 노동자 농민의 민중운동세력에 대한 탄압이었다는 것, 그리고 본래부터 자신들은 대만독립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물론 장개석 정권에 저항한 자들은 내성만 아니라 외성인들도 있었다는 것, 오히려 장개석 독재정권에 대한 민주화 투쟁의 다수는 외성인 출신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가운데는 공산주의자도 있었고, 자신도 학창 시절 운동을 하면서 당에 가입한 적이 있었다는 것 등에 대해서도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특히 그는 백색 테러의 희생자 가운데는 공산당과 관계없는 일반인들도 많았으며, 바로 그 때문에 장개석 정권에 대한 민중들의 반감이 생긴 것도 사실이나, 민진당의 주장처럼 그것이 단순히 내성인과 외성인간의 싸움은 아니었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증언을 통해 나는 타이완 독립/중국 통일을 둘러싼 오늘날 타이완내의 정치 지형과 정치노선상의 갈등 양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넷째 날(8월 6일) : 아침 날씨가 개어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아침 식사를 서둘러 마치고 숙소인 悅園대반점을 나와 버스를 타고 맨 먼저 향한 곳은 태원감옥이었다. 일정이 하루 미루어진 대신 오전에 시간적 여유가 생겨 타이완측의 제안으로 새로운 일정을 마련한 것이었다. 태원감옥은 본래 정치범을 수용하였던 감옥이었는데, 1970년 태원감옥에서 정치범들에 의한 ‘혁명’사건이 발생하자, 1972년 봄, 녹도 신생훈련처 인근에 국방부감훈감옥(녹주산장)을 만들어 태원감옥과 타이완 각지 감옥의 정치범 400여명을 이송하여 수용하였다고 한다. 태원감옥을 찾아가는 길은 멀고 험하였다. 버스로는 1-2시간 거리였지만 아직 포장이 되지 않은 길도 있었고, 험준한 산 속에 은폐되어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아 보였다. 지금도 감옥으로 이용되고 있는 이 시설은 깊은 계곡이 흐르는 절벽 위에 세워져, 수형자들의 탈주 를 막기 위해 일부러 그러한 장소를 선택한 것 같았다.

   태원감옥의 답사를 마치고 곧장 타이뚱 녹도행 선착장으로 이동하였다. 출항 시간에 맞춰 12시 경 선착장에 도착하고 보니, 실망스럽게도 부두에 있는 녹도행 여객선 매표소의 문은 닫혀 있었다. 태풍은 지나갔으나 파고가 높은 관계로 이 날은 배가 출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학수고대했던 녹도 방문은 끝내 이루지지 못하고 말았다. 나는 이번이 첫 번째 대만 방문이었으나, 일행 중에는 오직 녹도 탐방 하나 때문에 이번 여행에 합류한 사람도 있었으니, 그 실망은 이루다 말할 수 없었다.

   녹도 방문을 포기한 우리 일행은 타이뚱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타이페이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타이페이로 돌아와 오후 시간이 남는 관계로 우리 일행은 백색 테러로 인한 희생자 유골이 무더기로 발견된 타이페이시립공원묘지를 단체 방문하는 것으로 모든 공식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저녁 식사 이후는 타이페이에서의 마지막 자유시간이었다.

   돌아오는 날(8월 7일) 그리고 그 이후 : 귀국 비행기가 이륙한 뒤 창을 통해 타이페이 시내를 내려보는 순간 짧고 아쉬웠지만 인상 깊었던 지난 몇 일 대만에서의 순간들이 머리 에 떠오른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일본에 의한 식민지지배의 역사를 지닌 대만이지만, 너무나 많은 것이 우리와 다르다. 아직도 식민지시기의 총독부 건물을 그대로 정부청사로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건물을 포함하여 거리 곳곳에서 일본식 분위기와 일본풍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곳이 대만이다. 그러면서도 중화문명의 우수성에 자긍심이 깊게 배어 있는 타이페이 고궁박물관은 어떠하며, 한편으로 일제의 식민지 근대화를 미화하는 듯한 2·28 기념관과 그와는 정대조적으로 식민통치시기 일제의 만행과 항일투쟁의 전통을 강조하는 듯 한 손문기념관의 여러 전시물들은 다 무엇인가.

   타이완의 역사를 잘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이 모든 것들은 모순과 혼란 그 자체일 수 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우리가 좀더 제대로 동아시아의 역사를 성찰할 수 있다면 바로 이러한 대만의 현실 속에서 동아시아 사회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읽어낼 수도 있으리라......  (역사시평 6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