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은 중국 내몽고 자치구에 있었다” |
고고학적 발굴과 중국 사료로 추적한 고조선의 비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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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군은 백두산에 고조선을 세우지 않았다 ● 하가점에서 요서지방으로 내려온 고조선 ● 기자조선과 낙랑국은 고조선의 거수국 ● 마한은 고조선,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거수국 ● 고조선 문명은 중국 문명보다 먼저 청동기시대 열었다 ● 고조선도 춘추시대 겪으며 붕괴해갔다 ● 문헌 고증주의와 반도사관이라는 족쇄 ● 단조(鍛造)술 개발에서 뒤졌던 고조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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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준비해온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실체가 속속 드러나면서 ‘그 대책을 마련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호 ‘신동아’는 동북공정이 펼쳐진 중국 현지를 취재하며, 중국은 ‘단군이 신화 속의 인물이니 단군조선은 실재하지 않았고 기자조선부터 실존하는데, 기자는 주나라의 무왕이 조선왕에 봉한 인물이니 기자조선의 역사는 중국 역사의 일부이다. 고구려는 한4군(郡)의 하나인 현도군 고구려현에 일어난 왕국이니, 고구려도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변방정권 중의 하나다’라고 주장한다고 밝힌 바 있다. 고조선과 고구려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에 있었다. 그래서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한반도 북부를 그들의 역사 영토이고 장차 회복해야 할 정치 영토로 보고 있다. 중국은 한민족을 한반도 남부에서 생겨난 마한 진한 변한이라고 하는 3한의 후예로 보고 있다. 따라서 한민족의 역사와 정치 무대는 한강 이남이어야 한다는 것이 동북공정을 펼치는 중국측 주장의 핵심이다. 중국은 한국보다 월등히 많은 사료를 근거로 이러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지난 호 신동아가 발매된 후 적잖은 독자가 “사료를 갖고 덤벼드는 중국의 공세를 막을 수 있느냐. 중국 주장을 봉쇄할 방안이 없느냐”고 물어왔다.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를 깰 비책은 없는 것일까. 단군이 신화 속의 인물이고 평양에서 활동했다는 고정관념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단군으로부터 시작되는 우리의 역사를 멋지게 복원할 수 있다.
유럽 국가 vs 동북아 국가 국가란 무엇인가. 학자에 따라 정의가 조금씩 다르지만, 일반적으로는 법치(法治)를 할 수 있는 권력체를 가진 공동체를 국가라고 한다. 법치는 혈연공동체보다는 지역공동체를 기반으로 한다. 혈연공동체에서는 대체로 서열이 높은 사람이 권력자가 된다. 그러나 지역공동체에서는 서열보다는 객관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이나 세력이 권력자가 된다. 혈연공동체는 한 가지 산업을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지역공동체는 여러 가지 산업을 도모한다. 지역공동체로 대표적인 것이 도시국가인 아테네다. 아테네는 농업을 할 수도, 목축을 할 수도 없는 지역이었다. 그런데도 이곳이 발전한 것은 항구의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항구가 되기 위해서는 배를 만드는 기술자가 있어야 하고, 배에 실을 농산물이나 축산물을 제공해줄 농부나 목부(牧夫)가 있어야 한다. 배에 실려온 물건을 받아 필요한 사람에게 판매하는 장사꾼도 있어야 한다. 항구에는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만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이 갈등을 서열보다는 좀더 객관적인 것, 즉 법으로 해결해주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법치가 시작되는데, 법치를 할 사람은 모두가 인정할 실력이나 권위를 갖고 있어야 한다. 1800년대 후반 미국의 루이스 헨리 모건은 인디언 사회를 연구한 후 인디언 사회는 혈연공동체적
요소가 강하고, 그가 살고 있는 백인 사회는 지역공동체적 요소가 강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지역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사회를 ‘문명사회’로
정의했다. 헨리 모건이 말한 문명사회를 ‘국가’로 바꾼 이가 엥겔스다. 엥겔스는 ‘국가 이전 단계’와 ‘국가 단계’라는 말로 ‘문명 이전’과 ‘문명’을 정의하면서, 국가라는 말을 등장시켰다. 따라서 ‘국가라고 하는 문명사회는 법을 가진 사회’로 정의되었다.
법은 추상적인 것이므로 어딘가에 이를 기록해놓아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기록이 유실된 경우이다. 실제로는 법이 있었는데 기록으로 전하지 않는다면, 그 사회를 국가 이전 단계로 보아야 하는가? 그런데 고고학적 발굴을 해보니 지역공동체적 특성이 발견되는 시기는 대체로 청동기가 등장한 시기와 겹쳤다. 그리하여 서양의 학자들은 청동기시대를 법치 국가가 등장한 시기로 본다. 일반적으로 인류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를 거쳐 철기시대로 왔다고 한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청동기와 철기 시대를 거의 동시에 맞이한 곳도 있다. 일본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일본은 한반도 등에서 청동기와 철기 문명을 경험한 사람들이 건너갔기에 청동기와 철기시대가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 그러면 일본에는 청동기와 철기가 들어가기 전에는 법으로 다스리는 국가가 없었을까.
신석기 후기에도 국가가 있었다 아테네의 사례처럼 서양에서는 도시를 중심으로 국가가 생겨났다. 그러나 동양은 달랐다. 한국 중국 등 동양에서는 법치가 출현한 다음에는 물론이고 산업사회가 열릴 때까지도 농촌에서는 성씨(姓氏)별로 모여 사는 혈연공동체를 유지했다. 하버드대에 봉직했던 고고학의 대가인 중국계 장광즈(張光直·작고) 박사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며 “서양 잣대로 하면 동양은 혈연 중심이니 산업사회가 올 때까지 국가가 아니었느냐”고 반문한 적이 있다. 농업은 물을 필요로 하므로 대개 강가에서 이뤄졌다. 강물의 범람은 농업을 위협하니 이들은 공동으로 둑을 쌓았을 것인데, 이러한 일을 하는 데는 경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강가에서는 어업이 이뤄지고 어업과 농업 생산물의 교환에 의해 원시적인 상업이 탄생한다. 배를 비롯한 어업도구를 만드는 산업도 시작된다. 산과 사막과 짐승이 우글거리는 육로보다는 강으로 물자를 운반하는 게 쉬웠을 터이니, 강가의 취락지는 교통의 요지가 된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법이 등장할 수밖에 없다. 신석기시대 후기 농업이 시작된 동양의 강가에 있는 취락지에서는 이미 국가가 등장한다. 신석기 후기에 나타난 법치는 청동기의 출현으로 가속화한다. 청동기를 가진 사람은 간석기(마제석기)를 가진 사람보다 노동력과 전투력이 강할 수밖에 없으므로 쉽게 지배자가 돼, 그 권력을 대대손손 전하면서 권력을 강화한다. 청동기는 이들의 권력을 보장하는 보증수표이므로, 이들은 피지배층에게 청동기 제작법을 가르쳐주지 않으면서 오랫동안 국가를 운영해 나간다.
단군은 백두산에서 건국하지 않았다 ‘한민족을 형성한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대부분 ‘단군’이라고 대답한다. 한민족을 형성했다면 단군은 실존 인물이어야 한다. 그런데 ‘단군이 실존 인물이냐’고 물으면, 단군신화를 이야기하며 ‘신화에 나오는 비실존 인물이다’는 대답이 주류를 이룬다. 신화 형태로 거론된 인물이라고 하여 실존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주몽과 혁거세는 알에서 태어났다는 신화를 갖고 있지만 그들은 고구려와 신라를 건국한 실존 인물이다. 따라서 곰이 변해서 사람이 된 여인에게서 태어났다는 신화가 있다고 하여, 그리고 1908년을 통치하다 산신령이 됐다고 하여 단군을 비실존 인물로 단정할 수는 없다. 일부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한민족을 형성한 시기의 ‘지도자’ 전부를 단군으로 불렀다고 대답하기도 한다. 단군은 특정인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우리 민족을 이끈 지도자 자리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은 1675년 ‘북애(北厓)노인’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이 고려 초 발해의 유민이 쓴 ‘조대기(朝代記)’를 토대로 작성한 ‘규원사화(揆園史話)’의 내용과 맥을 같이한다. ‘규원사화’는 환웅의 아들인 ‘환검(桓儉)’이 최초의 단군이 되고 ‘고열가(古列加)’가 마지막인 47대 단군이 돼 1195년간 나라를 이끌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문헌 고증 과정을 거쳐 작성된 역사책이 아니라 고유신앙의 견지에서 쓴 역사 이야기(史話)인지라 역사학계에서는 사료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단군을 거론할 때마다 기계적으로 나오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환인의 서자인 환웅이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에 내려와 신시(神市)라고 이르렀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내용이다. 한민족은 백두산을 좋아하고 숭상한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은 태백산은 틀림없이 백두산을 뜻한다고 해석해왔다. “환웅이 백두산 꼭대기 신단수에 내려와 신시를 열었다…”라고. 합리적인 상상을 해보기로 하자. 지금도 백두산은 여름에만 올라갈 수 있는 산이다. 9월이면 벌써 눈이 내려 입산이 통제됐다가 5월이 돼야 다시 올라가볼 수가 있다. 물론 전문 산악인이라면 한겨울에도 올라갈 수 있겠지만, 과학이 발달한 지금도 그곳에 도시를 만들 수는 없다. 도시를 만들려면 물이 있어야 하는데, 물이 필요할 때마다 꽁꽁 얼어붙은 천지의 얼음을 깨고 물을 확보할 것인가. 태백산을 강원도에 있는 태백산, 평양 인근에 있는 묘향산으로 환치해봐도 같은 결론이 도출된다. 예루살렘처럼 낮은 산이 있는 곳이 아니면 산꼭대기에 도시를 만든 사례는 없다. 태백산은 눈을 이고 있는 흰 산일 수도 있지만 흰 바위산일 수도 있다. 흰 바위산은 도처에 있기에 태백산을 흰 바위산으로 이해한다면, 환웅과 단군을 백두산에 연결시킬 이유가 사라진다.
평양은 만주 땅 여러 곳에 있었다 ‘삼국유사’는 단군이 도읍지를 평양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사기’는 단군을 거론하지 않고 평양을 ‘선인 왕검의 땅(仙人王儉之宅)’으로 묘사해놓았다. 대체로 단군은 임금, 왕검은 제사장으로 해석해왔으므로, 왕검은 선인(仙人)과 통한다. 그로 인해 단군이 평양에 고조선을 세웠을 것이라는 해석이 많았다. 평양이 있는 대동강 유역에서는 기원전 2000년쯤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하지만 그 유물은 국가 단계의 것으로 보기에 무리가 있어, 고조선은 신화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힘을 발휘해왔다. 그러나 평양이 대동강가에 있는 평양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편평한 땅’을 뜻하는 보통명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평양은 도처에 있을 수 있다. 고대에는 주민이 이주하면 그들이 살던 곳의 지명도 그대로 갖고 가는 경우가 많았으니, 대동강의 평양은 다른 곳에서 옮겨온 지명일 수도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박지원(1737~1805)은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잔치를 축하하는 진하사가 된 집안 형을 따라 북경에 가면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해 ‘열하일기(熱河日記)’란 책을 남겼다. 열하는 북경 북쪽에 있는 난하(欒河)의 지류인 무열하(武烈河)를 뜻하기도 하고, 무열하가 난하를 만나는 곳에 있는 도시를 가리키는 지명이기도 했다. 이곳은 도처에 온천이 있어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아 ‘열하’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열하는 지금 승덕(承德)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열하는 북경에서 400여 리 떨어진 곳으로 청나라 황제의 별장이 있었다. 박지원 일행이 북경에 도착했을 때 청나라 조정은 열하에서 건륭제의 칠순잔치를 치른다고 통보해, 박지원 일행은 급히 열하로 찾아갔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열하일기에는 만주 땅(요동지역)에 평양이 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평야지대인 요동지역에 평양이 있었다면, 평양은 넓은 땅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일 수도 있다.
강가에서 일어난 문명 또 한 번 합리적인 상상으로 세상을 돌아보기로 하자. 지금도 세계사 교과서는 세계 4대 문명 발상지로 황하·인더스·유프라테스·나일 강을 꼽는다. 세계 4대 문명은 산꼭대기가 아니라 전부 강가의 평지에서 발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선을 한반도로 돌려보자. 부산 동삼동의 조개무지처럼 한반도에서 발견된 신석기 유적터도 강가나 강에서 가까운 곳에서 발견됐다. 서울에서도 움집을 비롯해 신석기인의 문명 터가 발견되는 곳은 북한산 꼭대기가 아니라 한강 부근인 석촌동 일대이다. 청동기 문명은 신석기 문명을 누리던 곳에서 나온 것이지, 엉뚱한 곳에서 갑자기 생겨나지 않았다. 청동기를 가진 세력이 이동하더라도 이들이 찾아가는 곳은 대개 신석기인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청동기인은 신석기인을 정복하는 형태로 그곳에 정착하니, 청동기 문명은 신석기 문명이 있는 곳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환웅과 단군은 신석기 후기나 청동기 문명을 가진 세력의 대표였을 것이다. 이들은 근처에 흰 바위산이 있는 강가의 편평한 땅에 살던 신석기인을 정복하는 형태로 이주해 왔을 수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것은 기원전 2333년이다. 이 시기 동북아에서는 이미 농업을 하는 신석기 후기 문명이 발달해 있었으므로, 단군이 세운 나라는 이보다 발달한 청동기 문명을 누렸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한반도는 물론이고 한반도 북쪽의 만주지역에서는 기원전 2300여 년에 만들어진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한국에서는 강원도 춘천시 신매리에서 기원전 1510년쯤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가 출토됐다는 보고(최몽룡 외, ‘동북아 청동기시대 문화연구’, 주류성, 2004)가 있으나 이는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것보다 1000년 정도 후대의 것이다. 중국문화와 중국인은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라고 하는 황하 중류에서 생겨났다. 이곳에는 농업을 하는 신석기 후기 문명이 있었는데 이 세력을 이끈 것은 전설로 전해오는 3황5제이다. 이들에게 가장 큰 도전은 황하의 범람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3황5제는 둑을 쌓았을 것으로 보인다. 3황5제는 이 지역을 다스린 통치자였지만 그들의 왕위는 세습되지 않았다.
고조선은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시작 기원전 2070년쯤 이곳에서 우왕(禹王)이 순(舜)으로부터 왕위를 넘겨받아 하(夏)나라를 세웠는데, 이것이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세습왕조이다. 아들에게 권력을 넘기는 세습왕조는 그렇지 않은 왕조보다 권력이 강하다. 학자들은 하나라가 순을 비롯한 3황5제가 다스리던 나라와 달리 청동기 문명을 열었기 때문에 세습왕조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한민족의 뿌리인 고조선은 하나라보다 300년 정도 앞서 세워졌으면서 황하의 청동기 문명과 다른 청동기 문명이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반도 북쪽을 광범위하게 조사해보면, 중국 내몽고자치구에서 중국 고고학자들이 발견한 ‘하가점 하층문화’에 주목하게 된다. 중국 요녕성을 가로지르는 요하(遼河)는 요녕성 북부 지역에서 동요하와 서요하로 갈라진다. 이중 서요하의 물줄기가 내몽고자치구로 뻗어 올라가는데, 서요하에 합류되는 한 지류가 ‘노합하(老哈河)’이다. 노합하는 지금 적봉(赤峰)시가 있는 지역에서 ‘영금하(英金河)’를 지류로 받아들인다. 영금하가 노합하로 막 합수되는 지점쯤에 ‘홍산(紅山)’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기원전 3500년쯤에 형성된 신석기 후기 유적이 대량 발굴되었다. 그리고 홍산에서 걸어서 30분쯤 걸리는 곳인 ‘하가점(夏家店)’에서는 기원전 2400여 년의 것으로 보이는 청동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하가점에서는 여러 시대의 유물이 발견됐는데 기원전 2400여 년경에 제작된 청동기는 세월의 흐름에 따른 퇴적작용으로 아래층에서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홍산지역에서 꽃핀 신석기 후기 문명을 ‘홍산문화’, 하가점 하층에 꽃폈던 청동기 문명을 ‘하가점 하층문화’로 이름지었다. 홍산문화와 하가점 하층문화가 발견됨으로써 황하를 비롯한 4대 강가에서만 문명이 일어났다는 세계 4대 문명발상지론은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하가점 하층문화를 이끈 세력은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하나라보다 먼저 청동기시대를 열었다. 고고학적 연구를 토대로 고조선의 자취를 좇는 학자들은 홍산문화와 하가점 하층문화를 고조선의 출범과 연결시키고 있다. 즉 홍산문화를 환인이 이끄는 신석기 후기의 국가체로 보는 것이다. 이 국가체에서 청동기를 개발한 환웅이 3000여 무리를 이끌고 하가점 지역에서 신석기 후기 문명 단계에 있는 곰족과 결혼동맹을 맺고 새로운 국가체를 세운다. 환웅은 곰족 여성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을 단군으로 명명해 왕위를 넘겨줌으로써, 왕위를 세습하는 고조선을 만들게 했다…. 하가점 지역은 평야지대이니 이곳을 평양으로 명명할 수 있다. ‘삼국유사’ 등에 따르면 단군은 아사달-평양-백악산 아사달-장단경-아사달로 옮겨갔다가, 아사달에서 산신령이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고조선이 도읍지를 여러 번 옮겼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고조선이 도읍지를 옮길 때마다 평양이라는 이름이 따라 갔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태백산으로 표기한 흰 바위산은 어떤 산일까. 하가점 동쪽으로 150여 km쯤 떨어진 곳엔 산맥에 가까운 ‘노노아호산(努魯兒虎山)’이 있다. 그리고 그 너머 다시 200여 km 떨어진 곳에 역시 산맥 형태인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있다. 노노아호산과 의무려산은 해발 500~700m 높이이지만, 평야지대에 있는 까닭에 우뚝해 보인다. 이 산은 고대인을 불러들이는 신령스러운 장소였을 것이다. 하가점 하층문화를 시작한 세력은 이 산에 올라가 성스러운 나무(神檀樹) 밑에서 청동기 문명을 가진 신시가 열렸음을 선포할 수가 있다. 다음으로 남는 것은 환웅이 결혼동맹을 맺은, 곰을 숭상하는 곰족의 실존 여부이다. 일본 사이타마(埼玉)현에는 고구려가 패망한 후 일본으로 건너온 고구려인이 세웠다는 ‘고려신사(高麗神祠)’가 있다. 고구려는 종종 고려로 표기됐는데, 일본인은 이 신사를 오래전부터 ‘코마진쟈’로 읽어왔다. 일본식 한자 읽기에 따르면 고려(高麗)는 ‘고우라이’가 돼야 한다.
‘곰족은 고구려족, 환인족은 한민족’ 그런데 이곳에서는 ‘코마’로 읽고 있는데, ‘코마’는 고구려인을 따라 들어간 고대 한국어일 가능성이 높다. 코마진쟈가 있는 곳엔 ‘코마무라(高麗村)’ ‘코마가와(高麗川)’ 등 고려를 코마로 발음하는 지명이 도처에서 발견된다. 이곳에 상당히 많은 고구려인이 들어갔기에 이곳에서는 유독 고려를 코마로 읽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코마는 일본어로 곰(熊)을 가리키는 ‘쿠마’와 발음이 아주 비슷하다. 그렇다면 高麗는 곰을 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고구려인은 곰을 숭배하는 곰족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고구려가 곰족이라면 고구려족은 기원전 2400년쯤 하가점 부근에 존재하고 있어야 한다. ‘삼국사기’는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시기를 기원전 37년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때 주몽은 고구려라는 국호를 쓰지 않았다. 그러나 한4군의 하나인 현도군에는 ‘구려현(고구려현)’이 있었다고 하니 기원전 37년 무렵에 고구려라는 이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고구려는 고구려현을 흡수하고 난 다음인 6대 태조왕 때부터 고구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주몽은 고구려족의 후예였기에 그의 후손은 고구려라는 국명을 사용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고구려족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을 수 있다. 황하 중류에 세워진 중국 하나라의 17대 왕인 걸왕(桀王)은 대단한 폭군이었다. 이를 보다 못한 상족의 대표인 성탕(成湯)이 걸왕을 몰아내고 기원전 1600년경 상(商)나라를 세웠다. 상나라의 31대왕인 주왕(紂王)도 유명한 폭군이었으므로 기원전 1046년쯤 주족의 대표인 무왕이 그를 쫓아내고 주(周)나라를 세웠다. 주나라는 호경(鎬京)을 첫 도읍지로 삼았는데 호경은 지금 섬서성의 성도인 서안(西安)이다. 주나라를 개국한 직후 주왕조는 주변에 있는 종족 대표를 초청해 잔치를 열었던 모양이다. 주나라의 역사서인 ‘일주서(逸周書)’는 기원전 12~11세기(BC 1100~1000년)쯤 호경에서 주나라를 세운 것을 축하하는 ‘성주모임(成周之會)’을 열었는데, 여기에 고구려인인 고이(高夷)가 참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고구려를 주나라에 복종한 종족인 것처럼 묘사하긴 했지만 일주서는 기원전 1100~1000년에 고구려족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주나라의 수도인 호경에서 가까우려면 고구려족은 요하의 동쪽, 즉 하가점이 있는 요서지역에 포진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환웅 세력과 동맹을 맺으려다 곰족에 밀려난 호랑이족은 어떤 종족이었을까. 한민족을 이룬 고대 종족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는 것이 예(濊)족이다. 예족은 맥(貊)족과 인접해서 난하와 대릉하 사이에서 살았는데 ‘일주서’는 이들의 대표도 성주모임에 참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족은 고구려족만큼이나 오랜 종족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예족은 호랑이를 섬긴다’는 기록을 남겨놓았다. 그렇다면 호랑이족은 예족을 의미할 가능성이 높다. 예족은 환웅족과 결혼동맹을 맺지 못했기 때문인지 곰족과 다른 길을 걸었다. 고조선이 힘을 잃은 후 예족은 만주 지역으로 이동해갔으나 그곳에서 일어난 부여족에 밀려 상당수가 사라지고 일부가 동쪽으로 이동한다. 이들은 함경도 지역에 옥저와 동예를 세웠으나 곧 고구려의 지배를 받다 사라져버렸다. ‘나라 국(國)’자는 고서에서 ‘’ 또는 ‘’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있다. 오래전부터 국사학계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발견된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환국(桓)’으로 적혀 있었는데 일본인 학자가 덧칠해 ‘환인(桓因)’으로 바꿔놓았다는 주장이 있었다(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동아일보, 2005년, 제7장 참조). 만일 삼국유사에 환국이 있었다고 적혀 있었다면 홍산문화를 이끈 것은 환국이라고 더욱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우리 민족을 ‘한민족’이라고 자칭한다. 한민족이라고 할 때 ‘한’을 ‘韓’으로 적기 때문에, 국호도 ‘大韓民國’이 되었다. 우리말 ‘한’과 한자 ‘韓’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순 우리말 한은 ‘밝다’ ‘크다’ ‘하늘’ ‘하나’를 뜻하는 단어로 두루 쓰인다. 밝은 것은 아침이고 동쪽과 관련이 있으니, 한은 아침과 해가 뜨는 동쪽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밝은 것은 하늘이고 하늘은 하나이다. 이러한 ‘한’을 이두처럼 발음을 따라 한자로 표기한다면 ‘韓’으로 적을 수 있다. 환국 조선 한국은 하나 환인의 환(桓)자 뜻은 ‘푯말’이다. 역과 역 사이의 거리를 가리키는 이정표로 쓰이는 푯말을 桓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환이 나라를 상징하는 이름이 될 수 없다. 중국은 이민족에 대해서는 좋은 뜻의 한자를 붙이지 않았다. 그들이 자칭하는 이름에 가까운 한자어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桓은 ‘韓’과 마찬가지로 순 우리말 ‘한’을 이두식 한자로 적은 것일 수 있다. 환인국, 또는 환국은 한민족이 이끄는 나라, 한국이다. 이 한국에서 3000여 명을 이끌고 나온 환웅이 곰족 여성과 혼인해 단군을 낳았다. 단군의 檀자는 ‘박달나무 단’자인데, 박달은 ‘밝다’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단군은 ‘밝은 나라의 군왕’, 즉 ‘한국의 임금’이 된다. ‘밝은 나라’를 한자로 옮기면 ‘朝鮮’으로 표기할 수 있다. 환인국(또는 환국)과 환웅, 단군과 조선, 그리고 한국은 맥을 같이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옛날 큰 나무는 하늘과 통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하늘과 통하는 나무는 신목(神木)이다. 신목은 밝은 곳인 하늘을 지향하니 ‘밝은 나무’, 즉 박달나무가 된다. 신령스러운 박달나무를 한자로 옮겨 적으면 ‘신단수(神檀樹)’가 된다. 고고학적 발굴과 문화사적 추론을 토대로 삼국유사 등에 있는 고조선을 다시 풀어본다면 이런 해석이 나올 수 있다. ‘멀리 노노아호산이 있는 영금하 부근의 평지에서는 오래전부터 농업과 어업, 상업, 그리고 운수업(江上 물류)이 이뤄지는 신석기 후기 문명의 나라 한국(환국)이 있었다. 이러한 곳에 청동기 문명을 가진 환웅이 3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일어나 곰족과 결혼동맹을 맺고 이 지역을 장악했다. 노노아호산에 올라간 그는 신령스러운 나무 밑에서 신시(神市)가 열렸음을 선언했다. 그는 왕위를 아들인 단군에게 넘김으로써 왕위 세습제를 만들었는데 단군은 나라 이름을 조선, 즉 한국이라고 했다.’ 단군이 세운 조선을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으로 표기한다. 황하를 비롯한 네 곳에서만 문명이 발생했다는 세계 4대 문명발상지론은 허구이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고고학은 4대 문명권 외에도 독자적으로 청동기 문화를 꽃피운 60여 개의 문명권이 있었음을 밝혔다. 고조선을 우리 문명의 시원으로 삼는 나라가 교과서에 4대 문명발상지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고조선 문명을 부정하는 자가당착이다. 하나라의 출범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초기의 중국인을 ‘화하족(華夏族)’으로 부른다. 화하족은 황화 문명의 주역이다. 화하족은 기원전 2000년쯤에 청동기시대에 들어갔다. 반면 영금하 부근에 있던 환인족과 곰족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족은 기원전 2400년경 청동기 문명을 열었다. 그러나 자연변화로 인해 영금하(하가점) 일대에 있던 고조선족이 남하했다. 고조선족의 이동은 단군이 아사달-백악산아사달-평양-장당경으로 옮겨갔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고대의 종족은 자주 옮겨 다녔다. 중국의 상족도 상나라를 세우기 전 주거지를 8번 옮겼고 상나라를 세운 후에도 도읍을 5번이나 옮겼다. 그러나 고조선족의 이동은 결과론적으로 고조선을 화하족에 뒤처지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가점에서 발원한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2000년이 되자 남쪽으로 내려와 난하와 소릉하 대릉하 지역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하가점 청동기의 특징을 가진 청동기가 난하~대릉하 일대로 확산된 것이다. 그리고 하가점의 청동기 문화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왜 하가점 하층문화는 쇠퇴한 것일까. 그 이유로는 기후변화가 거론된다. 하가점 하층문화 위에 쌓인 하가점 상층문화에서는 마구(馬具)가 많이 출토되었다. 하가점 유적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온 한 학자는 “기원전 1000년 무렵 지구적인 기후 변화가 일어나 하가점 일대가 추워졌다. 이곳은 농업에 부적당한 초원지역으로 변했다. 그로 인해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가고 남은 사람들은 유목생활에 들어갔다”고 분석했다. 고조선족과 고조선 문화의 동진 청동기 문명을 연 세력이 난하~대릉하 지역으로 이동하자 이들이 살던 땅은 퇴적작용으로 덮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위에 유목문화가 생겨나면서 하가점 상층지역엔 유목문화의 유물이 쌓이기 시작했다. 난하에서 대릉하 지역은 요하의 서쪽이라 ‘요서지역’으로 통칭된다. 요서지역으로 확산된 청동기 문명에서는 한반도에서 많이 발견되는 비파형 동검(銅劍)이 출토된다. 비파형 동검은 황화 유역의 청동기 문명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한민족 특유의 동검이다. 요서에 나타난 비파형 동검은 요동지역에서 확대되다가 기원전 800년쯤 한반도로 전래된다. 비파형 동검의 동진(東進)은 영금하 일대에 있던 고조선 세력이 난하~대릉하 지역의 요서지역으로 내려왔다가 요하를 건너 만주와 한반도로 세력을 넓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 나타난 유물 가운데 하나가 고인돌이다. 한반도와 그 북쪽의 만주는 전세계에서 발견된 고인돌의 절반 정도가 몰려 있는 ‘고인돌 천국’이다. 한반도와 그 주변에 고인돌이 많다는것은 이곳에 대단한 청동기문명이 꽃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이 고인돌은 요서·요동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온 청동기 문명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 고조선족이 중원(中原)이라고 하는 중국의 심장부로 세력을 확대하지 못한 것은 황하 중류에서 일어난 화하족이 중원을 포함하는 황하 중하류로 세력을 확대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중원은 하남성을 중심으로 산동성 서부와 섬서성 동부를 합한 지역을 가리킨다). 지금 중국의 심장부는 북경인데 북경은 중원이 아니라 중원의 북동쪽에 있다. 기원전 1000년 무렵 화하족과 고조선족은 북경 근처를 경계선으로 삼아 마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가깝게 경계를 맞대고 있었기에 그 시절에 열린 성주모임에 고구려족과 예족의 대표가 참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주나라는 제국주의적 영토 확대 방법인 ‘봉건제도’를 통해 빠르게 영역을 확대해갔다. 청동기 문명인 만큼 주나라는 ‘당연히’ 장자 상속제를 채택했다. 장자 상속제에서는 똑똑한 차남 이하 자식을 어떻게 대접하느냐가 문제가 되는데, 주나라는 권력 분배의 스트레스를 봉건제도로 풀어갔다. 즉 차남 이하는 주나라 인근에 살고 있는 다른 종족의 땅을 쳐들어가 차지하게 했다. 그 전쟁에서 이기면 주나라 왕실은 그를 그곳을 다스릴 제후로 봉(封)하고, 그곳에서 나오는 소출을 독식하도록 했다. 주나라 주변에는 노(魯)·진(晉)·성·초·괵·형·제·한·조·장 등 이민족이 사는 나라가 많았는데, 주왕실 사람들은 이곳으로 쳐들어가 장악했다. 주왕실은 이민족의 땅을 장악한 제후에게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으로 등급을 나눠 작위를 수여했다.
주나라의 제후국, 고조선의 거수국 노나라와 진나라를 장악한 제후에게는 ‘공’이라는 작위를 주었기 때문에, 노나라와 진나라의 대표는 ‘노공’과 ‘진공’으로 불렸다. 초(楚)나라를 장악한 제후는 ‘자’라는 작위를 받았기에, ‘초자’로 불렸다. 이러한 제후들은 주왕실과 혈통이 같다. 주왕조를 세운 무왕은 성이 ‘희(姬)’이고 이름은 발(發)이다. 지금 중국과 한국에서는 성(姓)과 씨(氏)를 같은 것으로 사용하나 주나라 때는 성과 씨가 달랐다. 주왕실의 핏줄을 이은 사람이 제후가 되면 그는 희(姬)라는 성과 별도로 씨를 갖는데, 성보다는 씨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제후도 장자에게 자기 자리를 넘겨준다. 그리고 차남 이하에게는 새로운 영지를 개척케 하고 새 영지를 개척하면 이들을 ‘대부(大夫)’로 임명하고 새로운 ‘씨’를 내렸다. 고조선은 어떤 방법으로 영향력을 확대했는지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비파형 동검의 출토지역이 확대된 것을 보면 고조선은 요서와 요동 한반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을 지배한 것이 분명하다. 이 지역에는 미개한 여러 이민족이 있었다. 이들은 고조선의 통치를 받는 자치국 형태를 유지했는데 고조선 문화권에선 이러한 나라를 ‘거수국(渠帥國)’으로 불렀다. 고조선이 거느린 거수국에는 고구려·부여·기자조선·고죽((孤竹)·예·맥·추(追)·숙신(肅愼)·청구(靑丘)·양이(良夷)·양주(楊州)·발(發)·유(兪)·옥저(沃沮)·진(辰)·비류(沸流)·행인(荇人)·낙랑·임둔·진번·현도·해두(海頭)·개마(蓋馬)·구다(句茶)·조나(藻那)·주나(朱那)·한(韓, 삼한) 등이 있었다. 고조선의 거수국 가운데 낙랑 임둔 진번 현도와 기자조선이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고조선을 멸한 한나라가 고조선 땅에 설치했다는 한4군과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가 고조선의 거수국으로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많은 사람이 기자조선을 단군조선을 대체한 정권으로 알고 있는데 왜 기자조선을 고조선의 거수국으로 분류하는가. 이 의문을 풀려면 먼저 중국 사서에 나온 기자(箕子)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기자는 상나라 마지막 왕인 걸왕의 작은아버지이다. 걸왕은 학정을 한 폭군으로 유명한데, 기자는 걸왕을 향해 바른말을 했다가 투옥된 저항가였다. 상나라가 주나라 무왕에 의해 망하기 직전 무왕은 기자를 감옥에서 풀어줬다. 풀려난 기자는 주 무왕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법을 들려주었으므로 주 무왕은 그를 우대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자가 자신은 상나라 사람으로 주나라의 녹을 먹을 수 없다며 조선 땅으로 망명했다. 이를 섭섭하게 여긴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것이 기자조선의 근거이다. 이러한 기록은 사마천이 쓴 ‘사기’ 등 여러 곳에 나온다. 중국은 기록을 근거로 ‘단군이 이끈 고조선은 실체가 없고, 기자가 이끈 조선만 있었다. 그런데 기자가 이끈 조선은 주나라가 임명한 제후국이고 기자도 중국인이니, 고조선은 중국의 일부이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동주는 넓은 직할영지를 갖고 있었으므로 동주의 왕은 여기서 나오는 소출로 강력한 상비군을 편성했다. 그러나 서주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낙읍으로 쫓겨 온 서주는 직할영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소출을 받지 못하고 제후국의 지원으로 근근이 연명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부터는 주왕실을 등에 업은 제후국이 힘을 쓰는 시대가 되었다. ‘수렴청정’을 하듯이 권력을 확보한 제후는 주왕실의 권위를 이용해 다른 제후국에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된 것. 그로 인해 제후국들은 ‘주왕실을 받든다’는 명분을 내걸고 패권을 노리는 전쟁에 들어갔는데, 이를 가리켜 ‘춘추시대’라고 한다. 춘추시대의 갈등이 지속되던 기원전 475년쯤 주나라 제후국 가운데 하나인 진(晉)나라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다. 진공 밑에 있던 한(韓)씨, 위(魏)씨, 조(趙)씨의 3대부 가문이 진공을 쫓아내고 진나라를 3등분해,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다른 제후국들도 주왕실이 내린 작위를 버리고 왕을 자처했다. 이로써 유명무실한 주왕실이 해체되고, 자칭 왕을 내세운 국가끼리 싸우는 시대로 들어갔는데, 이를 가리켜 ‘전국(戰國)시대’라고 한다. 전국시대는 ‘7웅’이라고 하는 일곱 나라의 힘이 셌다. 7웅 가운데 하나인 연(燕)나라는 지금의 북경 부근에 있었다. 상시적으로 전쟁을 치러온 연과 고조선 사이에 긴장이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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