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近世 小農社會의 展開와 意義

이강기 2015. 9. 19. 12:14

近世 小農社會의 展開와 意義


                                                         李 榮薰(서울대교수)

一. 問題意識


1957년, 세계적 명성의 경제학자 로스토우는 당시 일인당 국민소득의 수준에서 세계 최빈국의 대열에 있던 한국경제의 미래 전망에 관해 그의 명의로 된 한 보고서에서 절망적인 진단을 내렸다.(Woo, 1991) 그렇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한국경제는 1960년대 이후 약 30년간 연평균 7~8%의 고도성장을 거듭하여 세계자본주의 역사에서 아직도 깨어지지 않은 신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30년 뒤 다시 한국을 방문한 그는 솔직히 그의 오류를 시인한 다음, 이 민족에게 어떠한 ‘문명의 저력’이 있었기에 그러한 기적적 성장이 가능하였나라는 질문을 던졌다.(모모신문, ????) 로스토우의 원래 오류는 그가 적시한 성장을 위한 ‘선행조건’이(Rostow, 1960) 1950년대의 한국사회에 구비되어 있던 정도를 과소평가하였거나, 무언가 보다 중대한 선행조건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한국사의 ‘문명의 저력’을 물었음을 상기하면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싶다. 아무래도 경제성장을 위한 선행조건은 그에 의해 기계적으로 나열된 몇 가지 요건을 훨씬 넘어 곧 ‘문명의 저력’이라 이름할 수 있는 수준의 보다 역사적이며 총괄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식민지를 경과한 후진국이 지속적이며 자기유지적인 근대적 경제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선진국의 성장경험으로 발생하는 잠재적인 ‘後發性의 이익’을 성공적으로 顯在化하지 않으면 안된다.(Gerschenkron, 1962; Hayami, 1997) 그것 이외의 다른 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진국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하고 그에 적합한 제도적 이노베이션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성장에 따른 온갖 사회적 갈등을 통합하고 경쟁적 국제시장에서 자국의 비교우위를 동태적으로 확보해 감에 유능한 정치적 리더쉽이 요구된다. 문제는 기술과 제도의 도입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오랫동안 익숙해온 방식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그 점에 관한 한 변화라 해도 그야말로 느린 속도이기 때문에, 외래의 문물에 적응할 자세와 그것들을 自己流로 변용할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후진국에 실재하지 않는다면, 기술과 제도의 도입은 많은 제 3세계에서 그러하였듯이 실패하기 십상이다. 쉽게 다른 경로로 대체할 수 없는 그러한 내재적 조건들을 총괄하여 ‘문명’ 내지 ‘문화’라고 이름해도 좋을 터이다.

이 글은 로스토우가 던진 한국사의 ‘문명의 저력’이란 화두에 대해 ‘소농사회’라는 아직 여러 면에서 불완전한 하나의 模型으로 답하고자 하는 시론이지만, 그에 전제된 문제의식은 그 화두로부터 풍겨나오는 달콤함이랄까 장미빛 낙관 이상의 것이다. 지난 1997년에 닥친 한국경제의 위기는, 국가의 강제적 청산이 가능했던 구제국주의 시대라면 식민지화의 위기로도 이어질 수 있는, 실제로 그러했던 지난 세기의 뼈아픈 민족사를 기억하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인에게 더 없이 커다란 충격이었다. 여러 가지 장단기 원인을 열거할 수 있지만, 역사적 사회과학의 시각에서 보다 구조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선진적 형태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물적 제도 내지 정신적 규범을 아직 충분히 성립시키지 못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정치적 내지 도덕적 능력의 미숙함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李榮薰, 2000) 정치적 의사결정이나 경제적 자원배분에 있어서 불투명성 내지 緣故主義를 특징으로 하는 이른바 ‘패거리문화’라 하면 보다 쉽게 대중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다. 다소 듣기 민망한 修辭이지만, 그러한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적 특질이 1997년의 일대 위기를 몰고 온 기본 요인의 하나임은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한 현대 한국의 사회조직적 특질 또한 이하에서 피력될 근세 소농사회론의 한편의 관심이면서 모든 역사적 사회과학이 그의 극복을 통해 담보코자 노력하는 사회적 실천의 구체적 과제를 이루고 있다.

二. 小農社會論

  

   1. 基本模型


1950년대까지 한국인의 대다수는 자급경제가 여전히 우세한, 예컨대 연간 총생산에서 상품화되는 것이 평균 3할 내외에 불과한(李明輝, 1992), 소규모 가족단위의 영농체로서 小農(peasant)으로 존재하였다. 小農社會(peasant society)는 이러한 소농을 지배적 구성원으로 하는 농촌사회를 말한다. 이 소농사회는 맑스주의 역사학에서 이야기하는 社會構成體에 비견될만한 전체사회가 아니다. 소농사회를 부분으로 하는 전체사회는 비농산 재화의 생산과 교역을 담당하는 상공업자사회, 농민으로부터의 지대와 공납에 기초한 왕?귀족 등의 지배계급사회, 전체사회의 행정적 통합을 책임지는 관료사회, 이데올로기적 통합과 의례를 수행하는 성직자들의 종교사회, 나아가 외국과의 외교와 통상으로 성립하는 국제사회 등등, 여러 수준과 형태의 부분사회로 구성되어 있다. "언제나 모든 곳에서 소농사회는 부분사회이다."(Hoppe and Langton, 1994) 소농사회는 다른 여러 부분사회와 상호작용하는 관계로서 존재할 뿐이다.(<자료1> 참조, Scott, et al., 1998)   

소농의 생산목적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서와 같은 이윤추구에 있지 않다. 그들은 가족과 친족의 生存을 목적으로 한다. 소농의 행동원리에 최초로 주목한 챠야노프에 의하면, 소농은 추가노동의 한계고통과 그로 인해 발생한 추가소득의 한계효용이 일치하는 주관적 판단과 기준에서 노동할 뿐이다.(Chayanov, 1966) 주변의 상황이 우호적이면 소농의 행동은 무한정 느슨해지지만, 일단 생존의 위기가 발생하면 약간의 추가적 소득을 위해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길고도 고된 자기착취적 노동도 불사하는 것이 소농의 행동원리이다. 생존이 목적이기 때문에 소농은 자급적인 다각경영을 추구한다. 모든 생활자료는 될 수 있는대로 집안에서 생산 내지 제작되는 편이 좋다. 그렇지만 지배자에게 공납과 지대를 내기 위해, 또는 자급 불가능한 생활자료를 구하기 위해, 현금작물을 일정 정도 재배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상품생산과 시장행위에 비용이나 한계 개념은 도입되지 않는다. 때로는 시장에서의 상인들의 횡포를 피하기 위해, 또는 보다 우호적인 구매자와 만나기 위해, 소농 자신이 직접 원거리를 이동하면서 판매활동을 벌리기도 하지만, 소농인 한 그같이 활발한 상행위라도 그 경제적 토대가 여전히 위와 같은 생존경제인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소농은 혼자서 생존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기 때문에 그 자신이 속하는 친족 또는 촌락의 집단적 생존을 추구하며 그를 위한 비용을 기꺼이 지불한다. 이들 공동체는 소농 혼자서 생산할 수 없는 치안?수리?산림?교육?도로?공동노동 등과 같은 유익한 공공재를 공급함으로써 소농의 생존을 위한 불가결한 사회적 조건을 이룬다. 공동체의 형태와 기능은 자연환경과 문화적 조건의 차이에 따라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소농의 공동체는 공공재 생산에 소요되는 비용을 염출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互酬(reciprocity) 내지 再分配(redistribution) 시스템을 조직한다. 소농들은 그들의 추가적 노동으로 발생한 잉여가 공동체의 재분배 시스템으로 흡수될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또는 자신의 근면한 노동이 다른 성원의 근면함으로 보답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잘 알기 때문에, 추가적 생산을 위한 투자나 남다른 근로의욕의 발휘에는 거의가 소극적이다. 그렇게 해서 자연이 허락하는 생산물은 일정하다는, 또는 한 사람의 추가적 富는 반드시 다른 사람의 희생 위에서 발생한다는 ‘부 일정의 법칙’이 자연스럽게 성립한다. 그로부터 도출된 공동체적 균등주의는 소농사회와 그를 지배하는 왕?귀족?관료?성직자 등의 부분사회를 관철하는 지배이데올로기로서 그에 합당한 각종 의례와 더불어 전체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이 같은 행동원리와 이데올로기의 특질로 인해 소농사회 내부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위한 조건이 자생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런 조건들은 소농사회 바깥의 그와 관계하는 다른 부분사회에서 성립하여 소농사회로 전달됨이 보통이다. 소농사회는 결코 그 자신의 고유한 특질로 구조화된 사회가 아니다. 전술한대로 그것은 그를 둘러싼 다른 부분사회와의 관계로서 존재할 뿐이다. 서유럽의 소농사회에 관한 몇몇 지역 연구는 소농경제적 요소가 건재한 곳이라도 자본주의적 전환에 늦지 않았음을, 오히려 보다 신속할 수도 있는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경우 결정적인 조건은 그 지방의 자연생태적 조건과 상업중심지와 얼마나 근접해 위치하고 있는가라는 지리적 조건이었다. “소농사회는 정태상태에 있든 변화과정에 있든 거의가 지리적 과정이다.”(Hoppe and Langton, 1994)

근대화를 위해 다른 부분사회로부터 소농사회로 전달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조건은, 누구도 쉽게 독점할 수 없는 대규모 경쟁적 국제시장의 출현과 거기를 주요 무대로 하는 자립적 商人團體의 성립이라고 생각한다. 브로델이 적절히 지적한대로 자본주의는 商品去來所가 매개하는 무역항과 무역항 사이의 국제시장에서 성립하였다(Braudel, 1977).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위의 두 조건이 결여되고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성립을 기대할 수 없다. 대규모 국제시장의 출현은 수출상인으로 하여금 분산적 가내공업을 先貸制 형태로 조직하게 함으로써 전통 소농사회에 프로토공업화(proto-industrialization)가 개시되는 계기를 이루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유럽 소농사회의 특수한 경험이겠지만, 동방 및 신세계와의 국제적 교역은 커피?차?비단?도자기 등, 소농의 가내공업에서 제조될 수 없는 신상품들을 소농의 필수적 생활자료로 수입함으로써 소농의 행동원리를 불가피하게 상품생산자로 전환시키는 효과로 작용하였다. 유사한 효과를―이른바 Z상품효과―다른 소농사회에서도 기대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자립적 상인단체의 존재는 왕?귀족 등의 지배계급과의 협상을 통하여 지적 재산을 포함한 포괄적 범위의 사유재산제도를 성립시킴에 크게 기여한다. 지배계급이 상인들의 수지맞는 상업활동에 자의적으로 과세할 수 있다면, 거기서 자본주의의 발흥을 기대하기란 무리이다. 사유재산제도가 성립함에 따라 시장에서의 각종 去來費用을 감축하는 운송?금융?보험 등의 여러 시장기구가 또한 성숙된다. 상인단체의 역사적으로 보다 중요했던 역할은, 최근의 新制度學派 경제사 연구가 강조하고 있듯이, 아직 국가에 의한 사유재산제도가 미확립인 단계에서 각종 규칙위반자에 대해 ‘다각적 징벌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시장의 질서와 거래의 안정을 자율적으로 확보하였다는 점이다.(Greif, 1993, 1994; 岡崎哲二, 1999)

이윤추구를 정당화하고 나아가 개인주의적 생활자세를 보급하는 종교사회에서의 일대 전환은 소농사회에 전달되어야 할 근대화를 위한 필수적 조건의 하나이지만, 그 역시 상인사회의 성숙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기대하기 힘든 조건이다.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전환이 이루어진다면, 왕과 귀족들이 흉년이 들었을 때 균등주의의 명분 하에서 부유한 농촌지주와 상인들의 창고를 뒤지는 행위도 종식될 터이다. 정치?종교와 경제가 서서히 분리되면서 중세적 道德社會와 구분되는 근대적 經濟社會가 성숙하기 시작한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최초로, 유일하게 자생적으로, 자본주의를 성립시킨 영국의 역사적 경험에 의거하여 소농사회의 근대적 이행을 위한 조건으로서 농업자본주의의 성립을 대단히 중요하게 평가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많이 다르다. 전술하였듯이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상공업자사회에 그 기원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못지 않게 중요한 한 가지 이유는 영국이 지금의 일반모형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소농사회에 전형적으로 속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후술하듯이 영국에서 소농사회의 성립은 의심스러운 일이며, 세계사에서 매우 독특한 개성을 과시한 이 나라는 처음부터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개인주의에 입각한 도덕과 사회조직의 충분한 토양을 특징으로 하였다.(Macfarlane, 1978, 1987)


   2. 分布와 類型


경제인류학자 울프는 소농의 존재 요건에 대해 생존에 필요한 최저 수준의 熱量을 확보하고 재생산에 불가결한 종자의 확보와 농구의 수선 등과 같은 감가상각비를 지불할 수 있는 기초적 능력뿐 아니라, 종교 및 공동체가 요구하는 의례비와 더불어 지배계급에 의해 강요되는 지대나 공납을 감당할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을 지적하고 있다.(Wolf, 1966) 이러한 요건을 국가 성립 이전의 미개인들은 충족할 수 없으며, 또한 현대의 기업농들은 그 같은 여건을 초월해 있다. 그렇게 울프가 관찰한 소농은 미개인과 현대 기업농 사이에 분포한 세계 도처의 오래된 문명사회의 기초 단위를 말한다. 그에 의해 그려진 소농의 세계지도는 <자료2>와 같다.(거기서 한국이 비소농지역으로 그려진 것은 명백히 인쇄상의 실수로 보인다). 울프의 정의가 꽤나 포괄적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준한 소농의 세계적 분포는 의외로 제한된 범위임을 이 지도로부터 알 수 있다.

아프리카와 남미 대륙에서 소농의 분포는 국소적이다. 이들 미개지역은 백인들이 그 곳에 진입하기까지 아직 사회경제생활의 기초단위로서 개별 家計(household)의 성립을 보지 못한 상태가 일반적이었다. 이들 지역에서 가계는 백인들이 지입한 자본주의에 의해 창출되었다.(Smith and Wallerstein, 1992) 백인 농장주들은 농장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농장 주변에 부속 토지가 딸린 소규모 가옥을 건설하고 거기에 원주민들을 입주시켰다. 이들 지역에서 소농의 역사는 이렇게 출발하였으나, 지금도 여전히 소농의 농업은 자립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영세한 규모에 머물러 있음이 보통이다.

앵글로색슨족이 주체가 된 영국과 북미의 농업이 자본주의 성립의 초창기부터 대규모 상업적인 기업농으로 전환하였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여기서는 농업자본주의가 산업자본주의에 선행하고 그것의 성립을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영국의 이러한 경험은 2차대전 후 많은 신생 후진국으로하여금 자국의 자원과 농업에 바탕한 內包的 발전전략을 취하게 만들었지만, 그 결과는 무참한 실패였다. 농업자본주의를 성립시킨 앵글로색슨의 예외적 경험은 어떠한 역사적 요인에 기인하는가. 자본가적 토지귀족과 소농과의 계급투쟁에서 소농이 패배하였기 때문이라는 브레너의 주장은(Brenner, ????) 계급투쟁의 윤곽을 결정한 영국의 생태적 내지 사회적 요인에 대한 이해가 처음부터 결여된 결과론적 해석에 불과하다. 차라리 이 나라에는 역사가 쓰여진 처음부터 법치에 입각한 개인주의의 사회였다는, 소농은 처음부터 보잘 것 없는 비중이었다는, 맥팔레인의 당돌한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확산해 가는 도중이 아닌가.(Macfarlane, 1978, 1987)

위의 지도에서 확인되는 소농의 주요 분포지역은 유라시아대륙의 구문명권으로서 일본?중국?인도와 슬라브 동부를 포함한, 북해권은 제외된, 유럽이다. 이들 제지역이 오늘날 세계자본주의에서 차지하는 국민경제의 위상은 너무나 상이하여 이들 지역에 역사적으로 존재한 소농과 그들의 사회를 동질적인 범주로 묶는 것이 어떠한 실용성을 지닐지 참으로 의심스럽다. 여러 연구자들이 참가한 슬라브 동부를 포함한 유럽 각지의 소농에 관한 공동연구는 만화경과 같은 다양성의 폭팔에 놀라고 말았다.(Scott, et al., 1998) 그들은 <자료1>에서처럼 자원의 이용방식을 규정한 물리적 농업입지를 주요 기준으로 하여 소농들의 生態型(ecotype)을 세 가지로―Champion, Bocage, Forest― 구분하였지만, 보다 유용한 다른 구분법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울프는 그의 고전적인 ??소농??에서 농민의 가족형태가 그들의 사회화 방식과 사회적 분업의 정도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됨을 지적하였다.(Wolf, 1966) 그의 인상 깊은 지적에 따르면 농민가족은 核家族과 擴大家族의 두 유형으로 분류된다.(이른바 直系家族은 확대가족에 포함되어 있다). 부부의 緣組와 미성년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은 인류의 경제생활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확인되는 자연적이며 일차적인 가족형태이다. 이 소규모의 취약한 경제단위는 대규모 집단노동과 조직적 분업을 요하는 생산형태가 발달함에 따라 확대가족으로 발달하였다. 중국?인도?근동 등과 같은 가장 오래된 문명권의 기초를 이루는 이 확대가족은 가족내의 분업과 협업으로 대부분의 생활자료와 안전?보험과 같은 공공기능을 확보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시장형태의 사회적 분업과 법치에 입각한 사회적 통합을 성숙시킴에 저해적이었다. 확대가족에 내재한 부자간, 형제간, 고부간의 일상적 긴장과 갈등은 그들을 위계적 질서로 편성하는 강압적인 문화에 의해 봉합되지만, 그로 인해 개인주의의 발달이 늦어지는 비용을 치러야 했다. 또한 개인을 억압하는 문화는 확대가족 내에 포섭된 비혈연인구나 유약한 핵가족 형태의 하층민을 대상으로 그들의 사회적 억압을 정당화하는 예속신분제를 발전시켰다. 

반면, 핵가족이 표준적 형태을 이루는 사회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 본질적으로 취약한 경제단위에 추가적 소득의 기회와 재난과 폭력으로부터의 보험과 안전을 보장하는 기구가 사회적으로 융통성있게 발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린이들은 관습에 따라 일정한 나이에 달하면 부모의 슬하를 떠나 남의 집의 고용살이에 들어감으로써 노동시장이 탄력적으로 발달한다. 핵가족에 요구되는 추가적 소득과 노동은 이 노동시장을 통해 확보되며, 노동시장의 발달은 사회적 분업과 시장관계를 성숙시킨다. 재난과 폭력으로부터의 보험과 안전은 엄격한 법치주의의 발달로 성취되며, 그러한 문화는 인간 제관계를 경제적 계약관계 이외의 다른 것이 되지 않도록 강한 힘을 발휘한다. 주민간의 진정한 수평적인 공동체적 연대는 오히려 이러한 개인주의 사회에서 더 성숙한 자태를 드러낸다.

인간사회가 그들의 자연환경과 인종적 특질에 규정되어 선택한 가족형태가 그들의 사회화 방식에까지 깊은 규정력으로 작용한다는 울프의 가설은 근년에 이르러 토드에 의해 보다 정치한 형태로 다시 제출되었다.(Todd, 1990, 1998) 그가 막대한 노력을 기울여 그린 세계적 범위의 가족지도에서 가족형태는 동거여부와 상속방식에 따라 네 가지 형태로절대적 핵가족, 평등적 핵가족, 직계가족, 공동체가족―구분되고 있다. 이 가운데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범위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되는 형태는 “유라시아의 대부분, 즉 핀란드와 항가리를 거쳐 러시아, 중국, 그리고 인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을 점하는” 공동체(확대)가족이다. 여기서는 상속이 분할방식인 가운데 아버지의 생존 시는 물론, 사후에도 일정 기간 결혼한 형제들의 가족이 하나의 世帶로 동거한다. 그 사회조직적 특질에 관한 토드의 서술은 앞서 소개한 울프의 연역과 비슷하게 예속과 무기력의 반개인주의적 분위기를 특징으로 한다.

반면 구대륙에서 가장 소수를 이루는 가족형태는 영국과 서북프랑스, 그리고 북해로 연결된 북부유럽이 주요 무대로 되는 핵가족이다. 이 그룹은 상속방식이 단독이냐 분할이냐에 따라 다시 두 개의 소그룹으로 나뉘어지는데, 부모와 미혼의 자녀 이외의 어떠한 경쟁적 연조도 가족 내에서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인의 조속한 자립과 그에 상응하는 사회조직의 발달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주지하듯이 바로 이 지역에서 농업자본주의가 예외적으로 발전하였는데, 토드는 그 역사적 기원을 이 지역에서 카로링거시대부터 발달한 영주의 직영지 대경영에서 찾고 있다. 말하자면 이 지역에서 소농은 역사적으로 영주의 대경영에 동원되는 노동력을 위하여 생활자료의 일부를 공급하는 부차적 의의의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토드의 이해는 영국사에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소농사회가 성립한 적이 없다는 맥팔레인의 주장과 사실상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

세 번째의 중간적 형태는 남부프랑스?독일?네델란드?스웨덴, 그리고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끝에서 발견되는 일본과 한국의 직계가족이다. 여기서 세습재산은 가계를 영구히 계승하기 위해 부모와 동거하도록 선택된 한 명의 자식에게 차등적으로 상속된다. 토지귀족에 대항하여 농민적 토지소유를 발달시킨 대부분의 지역에서 이 직계가족이 지배적 형태로 발견되고 있다. 직계가족에서 동거하는 부모와 자식부부 간에는 권위주의적 통합원리가 발달한다. 그렇지만 상속에서 배제된 나머지 자식은 일정한 나이에 달하거나 혼인을 계기로 부모를 떠나야 하기 때문에 사회적 분업의 발전과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의 보급에 있어서 직계가족은 공동체가족만큼 저해적이지는 않다.

가족형태의 인류학적 구분을 시도한 토드의 원래 의도는 가족형태의 차이로 인한 제반 사회적 문화적 특질의 차이가 현대 자본주의의 유형을 가르는 기초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실험적 가설을 제기함에 있다. 그는 현대 자본주의의 주요 유형을 핵가족을 토대로 하는 앵글로색슨형의 개인적 자본주의와 직계가족을 토대로 하는 독일?일본형의 총합적 자본주의로 구분한다. 연후에 토드는 앵글로색슨형에 비해 독일?일본형의 자본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문명능력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그의 문명능력은 한 국가의 인구수에다 평균적인 교육훈련수준을 곱하여 계산된 지표를 말한다. 그 예증으로서 그는 세계 주요 국가의 교육경력 7~8년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數學능력시험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이 톱을 차지한, 앵글로색슨 제국보다 직계가족 전통의 독일계 국가들의 점수가 높은, 1996년 OECD에 의해 발표된 한 통계를 소개하고 있다. 이렇게 인류학적으로 그 秀越性이 입증되는 직계가족이 드물게도 유럽 밖에서, 아시아의 가장 활발한 경제성장 국가인 한국과 일본에서 발견되는 것은, 그의 실험적 가설에 대단히 시사적인 의미를 제공하고 있다.(이상 Todd, 1998)

필자가 보기에 직계가족에 있어서 소농의 생존 목적은 추상적인 종법원리에 입각한 혈통의 계승이나 家職의 세습이라는 형태로, 곧 비인격적으로 제도화된 家長의 임무로까지 발전한다. 그 임무의 수행을 위해 가장은 그의 가계경영에 있어서 우수한 상속자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인다. 직계가족에 내재한 이 같은 성향은 정치적 종교적 여건의 변화에 따라 소농사회 내부에 적절한 환경이 조성되면 교육에 대한 격렬한 사회적 수요로 폭팔한다. 교육비는, 마치 Z상품효과처럼, 소농의 세대간 재생산에 요구되는 감가상각비의 정상적인 항목의 하나를 구성하게 된다. 널리 알려진대로 18세기중엽 이후의 일본은 대중적 교육기관의 보급에 따라 대중의 文算능력에 있어서 세계 최고수준을 자랑하였으며, 그러한 전통으로부터의 유산은 明治維新 이후 이 나라로 하여금 세계에서 가장 빨리 국민적 의무교육체제를 정비한 나라의 하나로 만들었던 것이다. 조금 뒤늦었으나마 같은 시기 조선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전개되고 있었다.

요컨대 같은 소농사회라 하더라도 가족형태의 인류학적 구분에 따라 독일?일본의 직계가족형과 중국?인도의 공동체가족형의 두 유형이 있다. 핵가족 형태의 앵글로색슨형은 소농사회에서 제외되거나 부차적으로 간주된다. 직계가족형은 근대화를 위한 충격이 주변의 부분사회로부터 주어질 때 그에 보다 능동적이며 효율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구조와 역량을 지니고 있음에서 공동체가족형보다 선진적 유형이다. 18세기이후 20세기전반까지 조선의 소농사회는 직계가족형에 속하였다.


三. 小農社會의 成立


현대 한국의 문명은 고려말기 14세기이래 5세기간에 걸쳐 누적적으로 이루어진 국가?사회의 ‘유교적 전환’을 주요 기초로 하고 있다. 그 이전 시대의 한국인들은 그들의 의복?주거?가족?촌락과 같은 일상생활의 제측면에서는 물론, 사회?국가의 여러 공식적 내지 비공식적 제도의 면에서 이후 조선시대의 그들의 후손과, 이들이 과연 같은 민족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심하게 달랐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진보는 가족제과 친족제에서 있었다. 14세기이래 5세기간 인간사회의 인류학적 토대가 다른 문명형태로 전환하였음은, 아마도 동기간 세계의 다른 민족에서 유사한 예를 찾기 힘든, 대단히 특수한 경우임에 분명하다. 앞서 소개한 토드가 강조하고 있듯이, 동서유럽에 분포한 다양한 인종들의 인류학적 기초는 15세기이래 20세기까지 매우 안정적이었다.

조선왕조 초창기인 1397년(太宗6)에 제정된 호구조사의 규식을 보면, 호를 이루는 구성원이 子?壻?弟?姪?族親으로 광범하고 복합적이다. 그 이전 고려왕조에 있어서 국가구성의 기초단위인 丁戶가 그러한 구성이었다. 남겨진 고문서로부터 추정되는 정호의 형태와 구조는 8결(半丁) 또는 17결(足丁)을 평균규모로 하는 하나의 들판(坪?員)을 공동으로 점유하고 경작하는 위와 같이 복합적인 구성의 공동체가족이다. 정호는 고려왕조에 예속된 농노로서 각종 공납과 부역을 담당하였다. 이후 조선왕조에 의해 다시 정의된 호의 구성원은, ??經國大典??의 ?戶口式?이 그것인데, 호주 부처와 사위를 포함한 자녀, 그리고 비혈연의 노비와 雇工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게 제?질 또는 막연히 족친으로 이야기되던 방계친족들이 호의 구성원에서 배제되었다. 이로써 오랜 역사의 공동체가족이 해체되고 새로운 형태의 직계가족이 성립하게 되는 중대한 계기가 마련되었다.(이상 李榮薰, 1995a, 1995b, 1997)

그렇지만 직계가족이 사회?경제의 기초적 생활단위로 보편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좀더 오랜 세월을 기다릴 필요가 있었다. 사위가 호구원으로 인정되고 있듯이 친족집단은 고려이래로 여전히 쌍계적이었다. 이러한 유형의 친족제 하에서 상속은 남녀균분의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결혼 이후의 거주율도 妻方거주가 일반적이었다. 국초에 夫方거주를 강요하는 親迎禮가 제정되지만, 15세기내내 왕실에서조차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였다.(池斗煥, ????) 이러한 과도기적 상황에서 부계원리에 바탕한 직계가족의 성립은 아직 단초적인 수준에 불과하였다. 사위의 가족(family)이 호라는 법제적 형식 하에 처의 부모와 하나의 세대?가계(household)로 통합되어 있는 고려이래 공동체가족의 주된 특질이 17세기전반까지 강인하게 존속하였다.

직계가족의 정착에 요구되는 집약농법의 수준에도 아직 커다란 한계가 있었다. 국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분출된 많은 직계가족이 그 생산력적 기초의 취약함으로 인해 곧바로 몰락하고 말았다. 가령 새로운 규칙에 입각하여 1461년(세조7)에 이루어진 대대적인 인구조사는 이전의 20만 전후에 불과한 전국적 호총을 무려 130만으로까지 급증시켰다.(李榮薰, 1995b) 구래의 공동체가족을 부정하고 소규모 직계가족이 강압적으로 조사된 효과가 그러하였다. 그렇지만 50년 뒤 16세기초의 中宗조에서 다시 확인되는 전국적 호총은 80만 전후로 대폭 감소해 있었다. 그 사이 대량의 하층 인구가 노비나 婢夫의 신분으로 몰락하여 양반신분의 세대로 포섭되었던 것이다.(김성우, 2001)

17세기이래 조선 소농사회가 선진적 유형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알리는 한 가지 지표로서 이들 광범한 예속인구의 소멸을 지적할 수 있다. 1660년대 顯宗조부터 그러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그 때까지 노비제의 존속을 완고히 옹호하던 왕조의 입장이 갑자기 반전하여, 奴가 良妻에서 낳은 자식들을 양인신분으로 해방시키기로 하였던 것이다. 西人들의 집권기에 제정된 이 從良法은 지배정파가 교체됨에 따라 한동안 동요하였으나, 1730년 老論의 영구집권과 더불어 항구적으로 정착하였다. 이후 노비인구가 급격히 감소하기 시작하였음은 여러 지방의 잔존하는 호적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 구체적 사례연구에 의하면 종량법 이후, 일반적으로 양처와 결혼하게 될 노는 더 이상 신분을 세습시키지 않은, 그 예속이 당대에 한하는, 사실상의 반자유인으로 변질되었다. 신분의 세습은 모계로 이어지는 婢 신분에 한정되었으며, 그것도 여러 명의 딸 가운데 한 명에 국한됨이 관례적이었다.(李榮薰, 2000)

무엇이 노비제의 해체를 가능케 하였던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일차적으로 중요했던 요인은 국제적 긴장관계로부터 유발된 정치적인 것이었다. 서인의 영수 宋時烈에 의해 제기된 北伐大義는 이후 노론의 장기집권을 지킨 樞要의 정치적 명분이었다. 북벌을 위해서는 다수의 노비인구를 양인군정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당초 그렇게 시작된 노비를 위한 사회적 개혁은 그 어머니가 천한 신분이었던 英祖조에 이르러 일층 가속적으로 추진되었다.(全炯澤, 1989) 가령 그가 제정한 노비를 함부로 죽일 수 없다는 법은 더 이상 문투가 아니었다. 扶安 愚磻洞의 김씨 양반가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동가의 주인이 노비를 함부로 죽였다가 관에 구속되어 敗家의 지경에까지 몰린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전경목, 2001) 이처럼 사민평등의 국가이성이, 그에 상응하는 관료제적 행정체제와 더불어, 농촌사회의 구석까지 침투함으로써 전통사회가 “고도로 조직된 사회”로 변모하기 시작하는 것은 18세기의 일이다.

정치적 요인이 계기로 작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실은 보다 총괄적인 사회경제적 요인으로서 인구증가의 효과를 배제한다면 노비제의 해체를 제대로 설명하기 곤란할 것이다. 兩亂의 위기가 마무리된 후 18세기중반까지 조선왕조의 인구는 크게 증가하였다. 일례로 1634~1720년간 대구부 租巖面의 경우 토지소유자의 수가 338명에서 833명으로 2.5배나 증가하였다. 토지에 대한 인구압의 증대는 불가피하게 예속인구의 경제적 가치를 떨어뜨리게 마련이다. 노비가격에 관한 조사에 의하면, 1690년대를 전후하여 이전의 구당 100냥 전후의 노비가격이 10~20냥대로 폭락하였다.(鄭奭鐘, 1983) 사실상 이 언저리에서 노비제는 크게 허물어지고 있었다.

인구의 커다란 증가를 가능케 한 요인으로서 무엇보다 다양한 형태의 생계수단을 제공하는 시장경제의 발달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듯이, 남부지방에서 동전의 유통이 일반화하고 정기시의 그물망이 촘촘히 짜여지기 시작하는 것도 위 기간의 일이다. 지배계층의 경제생활에 있어서 시장경제가 구래의 호수나 재분배 체제를 대신하는 것도, 직접적으론 大同法이란 재정개혁의 덕분인데, 역시 같은 기간의 일이다.(이헌창, 2000) 이 같은 시장경제의 발달과 관련해서도 동아시아의 중심부 淸 제국으로부터 주어진 국제적 요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을 새롭게 장악한 청의 황제들은 明의 유민이 저항을 계속한 臺灣을 봉쇄하기 위해 바다에서의 자유항행을 금지하였다. 덕분에 일본이 수입한 중국의 白絲는 조선의 중계무역을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수지맞는 중계무역이 조선에 떨어뜨린 은의 양은 막대하였다. 청의 海禁조치는 1684년에 풀리지만, 조선의 중계무역은 이후에도 한동안 번영을 누렸다. 예컨대 1684~1710년간 조선과 일본의 무역 규모는 연평균 은 22,500kg의 거액에 달하였다.(田代和生, 1982; 鄭成一, 2000). 종래 거의 주목받지 못했지만, 17세기중반 이후 조선왕조가 이룩한 정치?사회?경제의 제반 성과는 처음부터 이 같은 세계적 범위의 동시대적 근세성을 전제하였다.

종법원리에 기초한 부계 친족집단과 그 구성단위로서 직계가족이 확대 보급되고 있었음은 조선의 소농사회가 새로운 유형으로 진보하고 있음을 알리는 무엇보다 직접적인 지표이다. 양반신분을 선두로 하여 父系친족집단이 한 곳에 영구히 정착하고 族譜?族祭?族畓 등을 요건으로 하는 族? 형태의 門中조직을 결성하기 시작하는 것도 1660년대부터인 경우가 많다. 상속관행이 여자를 그 대상에서 배제하고 나아가 장자를 우대하는 차등방식으로 바뀌기 시작하는 것도 대체로 그 언저리부터이다. 18세기중엽이면 도처에서 이들 부계친족집단으로 구성된 양반신분의 동성촌락이 농촌사회의 새로운 주도세력으로서 확고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더불어 가족형태가 직계가족으로 변모하고 있었음은 일찍이 崔在錫 교수에 의해 선구적 으로 입증된 바 있다.(崔在錫, 1983)  그는 17~19세기 경상도 4개 지방의 호적을 비교 분석하는 커다란 수고를 통하여 시간이 흐를수록 직계가족이 확대 보급되는 장기추세를 성공적으로 제시하였다. 최근에는 같은 기간 4개 식년의 丹城縣 호적을 테이터베이스화한 西江大팀에 의해 같은 추세가 발견되었다.(정지영, 2002) 최재석 교수의 업적에서 크게 주목되는 한 가지는 19세기초반까지 다수의 상민이나 천민에서 직계가족이 보급된 정도는 아직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1955년에 시행된 전국적 센서스에 확인되는 한국인의 지배적 가족형태는 夫婦家族과 直系家族으로서 각각 60.4%와 34.3%의 비중이었다. 이와 비교할 때 19세기초반 양반신분에서 직계가족의 비중은 대체로 같은 수준이지만(41% 또는 32~34%), 일반 상민과 천민의 신분에서 그것은 지방에 따라 거의 없거나(4%) 많이 떨어지는 수준에(18~23%) 불과하였다. 다중의 하층민에 있어서 직계가족의 보급은 주로 19세기후반 내지 20세기전반의 일이었음을 이로부터 알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 1912년 日帝가 도입한 戶主制를 근간으로 하는 가족법은 이 같은 역사적 추세에 박차를 가하는 중대 계기였다고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자녀에 대한 父權 또는 처첩에 대한 夫權 이외에 특별히 家의 구성원과 재산에 대한 포괄적인 지배권으로서의 가장 내지 호주의 권리는 없었다.(朴秉濠, 1976) 일본에서처럼 호주권의 초세대적 상속을 통해 영속해야 할 집단으로서 가의 개념은 조선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민지기에 도입된 일본식의 호주제가 순조로이 정착하고, 나아가 지금까지 그에 대해 일본 이상의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것은, 그것이 가계계승의 조선적 방식으로서 祭祀相續의 원리와 잘 부합하였기 때문이다.(李勝雨, 2001)

말하자면 조선시대의 가는, 지금도 대체로 그러하지만, 제사의 상속을 통해 영구 계승되는 혈통의 단위 세대를 그 본질로 하였다. 이 조선의 家가 일본의 家(いえ)가 아니라 해서 일반 家의 사회적 자립을, 그 경제사적 표현으로서 ‘소농자립’을, 이야기 못할 바는 아니다. 계승의 대상이 단체이든 혈통이든 그것은 본질적이지 않다. 문명사에 있어서 막상 중요한 것은 가의 내용이 무엇이든 그 계승의 주체가 일반 대중으로 확산되는 것, 또한 계승 자체의 성립에 요구되는 가정경제의 자립과 안정이 대중의 일상적 경제의지로 자리잡는 것이라 생각한다.

1861년의 일이다. 경상도 예천군 大渚里 박씨 양반가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던 崔有彦은 6년 전에 죽은 生子를 대신하여 養子를 들였다.(李榮薰, 2001) 죽은 뒤에 제사밥을 얻어 먹기 위한 개인적 목적에서이지만, 그 때문에 그는 양자를 먹이고 입히고 나아가 그에게 물려줄 최소한의 재산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같이 19세기후반 노신분에까지 확대 보급된 종법적 가계계승은 일정 수준의 가정능력과 경제의지가 다중의 하층민에게까지 일상화된 현실을 전제하고 있다. 가계계승의 의지가 얼마나 강박적인 것이었는가는 1959년에 이루어진 전국의 6개 촌락에 대한 사회학자들의 조사에서 잘 드러나 있다. 그에 의하면 남자의 58%가 妾을 얻어서라도 자식을 보아야 함을 주장하였고, 여자의 65%가 그 정당성에 동의하고 있었다.(高皇京 외, 1963) 이처럼 20세기전반의 소농사회는 여성에겐 더없이 암울한 가부장제 문화를 특징으로 하였지만, 동시에 가부장들의 우수한 상속자를 확보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 사회적 신분의 새로운 척도로 등장한 교육에의 폭팔적인 수요로 나타남으로써 세계적 수준의 문명능력이 축적될 수 있었던 일대 성취기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四. 安定, 그리고 危機


현대 한국의 역사적 전제로서 근세 소농사회는 17세기후반의 그 성립기 이래 20세기전반까지 약 3세기간 번영과 안정, 위기와 파국, 뒤이은 회복과 성취의 상이한 국면들을 다이나믹하게 경과하여 왔다. 이 점은 근년에서야 겨우 발족한 물가?임금?토지생산성과 같은 주요 경제지표의 장기추세에 관한 연구에 의해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한 새로운 사실이다. 특히 제국주의가 이 땅에 들어와 오랫동안 닫혔던 문을 열어졌혔을 때, 조선왕조는 그 너무나 오래된 체제의 노후함으로 인한 피로감이랄까, 말하자면 제도의 실패로 인한 사회?경제의 모순이 더 없이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몰아오고 있던 한 가운데에 있었다.

확실히 18세기중반까지 초기의 약 1세기간은 볼만한 번영의 시대였다. 전술한대로 동기간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고 시장경제가 크게 발달하였다. 1748년(영조24) 黃景源은 사신으로 중국에 가는 친구에게 경망스럽게 중국의 재화를 탐하지 말 것을 권하면서 “지금 국중의 갈포?모시?무명?비단으로 족히 입을만 하고, 조?쌀?보리?콩으로 족히 먹을만 하고, 冶鐵의 넉넉함으로 족히 器物을 만들만하고, 銀幣의 편리함으로 족히 致用에 당할만 하니, 무엇 때문에 천리타국의 재화를 가져올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이후 시대에 들어보기 힘든, 넉넉한 자신감을 표하였다.(유봉학, 1995) 당시 조선왕조가 구가한 경제적 번영과 안정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을 이 넉넉한 자신감은, 은폐의 편리함이 언급되어 있음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중국을 중심부로 하는 동아시아의 번성한 銀貿易의 덕분이기도 하다. 재삼 강조하거니와 근세 소농사회는 그 성립에서부터 세계적 범위의 동시대적 근세성을 전제하고 있다.

더불어 지적해 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시장경제가 사회의 경제적 통합에 있어서 불가결의 범주로 성장하였지만, 주곡인 쌀에 관한 한 국가적 재분배의 도덕경제가 여전히 지배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還穀의 규모는 17세기후반에 500만석(미, 1석=약100ℓ) 정도였다가 18세기중반에 1,000만석의 절정에 달하였다. 동시대 청조가 경영한 상평곡의 규모는 약 4,000만석(미, 1석=100ℓ)이었다.(黑田明伸, 1994) 당시 청의 인구가 조선의 약 25배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조선 환곡의 인구당 실질규모는 중국 상평곡의 약 6배에 해당한다. 주곡의 수급에 있어서 이처럼 거대 규모의 국가적 재분배체제를 성립시킨 나라를 18세기 지구상의 어디에서 찾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18세기 조선사회의 경제적 통합형태는 기본적으로 均平과 安定이란 성리학적 이데올로기에 바탕하여 구축된 거대 규모의 도덕경제였다.

이후 1세기간, 정확히 말해 1830년대까지, 소농사회의 안정 기조는 그럭저럭 유지되었지만, 지방별 차이는 적지 않았다. 북부 변경인 평안?함경도에서는 이 기간에도 경제적 확장이 지속되었다. 예컨대 1720~1808년간 평안도의 결총은 9.1만결에서 12.0만결로, 함경도의 결총은 6.1만결에서 11.7만결로 상승하였다. 더불어 중국과의 국경무역 덕분인지 상업경제가 번성하였다. 그로 인해 이 두 도의 장시는 1770년의 162기에서 1830년대의 185기로 증가하였다. 20세기초에 조사된 인구당 書堂의 밀도는 이들 두 도에서 가장 높다. 짐작컨대 이들 지방에 유교적 사회윤리가 일반화하는 것은 위와 같은 경제적 확장에 뒷받침된 주로 19세기의 일이 아닐까 싶다. 반면 동기간에 전라도에서 관찰되는 것은 경제적 침체였다. 우선 결총이 37.7만결에서 34.0만결로 전국적 범위에서 예외적으로 감소하였을 뿐 아니라, 장시도 1770년의 216기에서 1830년대의 188기로 적지 않게 감소하였다.

드디어 위기가 전국적으로 본격화하는 것은 1845년을 전후한 10년간부터이다. 남부 선진지대인 충청?전라?경상의 3도에서 1830년대에 614기이던 장시가 1872년에 이르러 511기에 불과할 정도로 감소하였다.(韓相權, 1981) 18세기의 번영과 안정의 시대에 바다와 강을 따라 지방간에 그런대로 잘 통합되었던 농촌시장권이 19세기중반부터 근 50년간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는 모습을 전하는 數量經濟史的 지표는 적지 않다. 일례로 전라도의 靈巖邑과 海南邑의 장시는 37㎞에 불과한 거리이지만, 두 장시간 쌀값 변동율의 相關係數는 1819~54년간 0.889의 상당히 높은 수준에서 1855~82년간에는 0.693으로, 나아가 1883~1910년간에는 0.203으로까지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결국은 어떠한 수준의 시장통합도 논할 수 없을 지경으로 완전히 분열된 모습을 전하고 있다.(李榮薰?朴二澤, 2001)

다른 한편 환곡을 통한 국가적 재분배체제가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것도 1840년대부터이다.(文勇植, 1998) 1862년에 그 규모는 여전히 막대한 800만석으로 보고되지만, 실제로는 절반 이상의 500만석이 장부상의 허수에 불과하였다. 흉년에 면세지 災結을 급부함으로써 미곡의 시장공급을 신축성 있게 조절했던 국가재정의 통합적 역할도 마비되고 있었다. 1856~1873년간 여러 지방의 추수기에서 확인되는 지방별 작황과 도단위로 중앙정부가 지급하는 재결 사이의 상관계수는 극단적으로 음의 관계로 돌아서 있었다. 이렇게 작황과 무관하게 강압적으로 징수되는 왕조의 조세는 농촌 미곡시장을 더욱 위축시켰다. 이윽고 1855년부터 쌀값이 연간 3~4%의 높은 상승률로 다락처럼 오르기 시작하였으며, 이로 인해 시장에의 의존도가 남달리 컸던 다수 하층민의 생계는 일층 곤궁해지기만 하였다.

주지하듯이 이 같은 제반 모순의 누적적 효과라 할 수 있는 농민반란이 남부 농촌사회에서 폭팔하는 것은 1862년의 壬戌年부터이다. 이후 1894년의 東學農民革命으로 그 대미를 장식하기까지 농민반란의 거듭된 파동이 농촌사회에 가한 충격의 심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지방장시를 순회하는 행상들의 자취는 거의 두절되고 말았으며, 그 결과 영암과 해남에서처럼 아주 근접한 장시간에도 더없이 지독한 시장분열이 초래되고 말았다. 인간사회의 질서와 통합을 담보한 각종 공식적 내지 비공식적 규칙과 의례도 크게 허물어져 갔다. 사회가 통합과 조절의 능력을 상실해 간 병리적 현상은 상민에 대한 양반의 지배력이 그런대로 강력했던 반촌에까지도 파급되고 있었다. 경상도 예천군 대저리의 박씨 양반가가 남긴 이 시기의 일기는 머슴들의 공연한 사보타지에 대한 한탄으로 가득차 있다. 노동의 의욕과 규율이 감퇴하고 무너진 가운데 촌락의 하민들은 술과 노름으로 날을 지새고, 반면 양반 상호간의 결사체인 洞?마저 해체되고 말았음이 위기 한 가운데에 놓인 대저리의 적나한 모습이었다. 촌락의 질서가 재건되기 시작하는 것은 동학농민혁명이 진압된 이후부터이다.(李榮薰, 2001)

전술한 농촌 미곡시장의 해체와 관련해서는 미곡의 생산성 감소로 인한 공급애로가 직접적 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이 확인되고 있다. 다음의 <자료3>은 1748년이래 약 2세기간 경상도 경주부의 玉山書院의 답, 전라도 영암군 望湖里 이씨 일족의 답, 광주군 良瓜洞의 동답에서 수취된 두락당 도조량의 장기추이를 보이고 있다. 이전에 이와 동질의 사례로서 경상도의 漆谷, 大邱, 醴泉과 전라도의 靈巖, 南原, 靈光의 것들이 소개된 적이 있는데(金建泰, 1999; 鄭勝振, 1999; 李榮薰?朴二澤, 2001), 이번에 위의 세 사례가 추가된 셈이다. 이전의 여섯 사례도 공통으로 그러하였지만, 이번의 새로운 사례들도 18세기중엽부터 두락당 지대량이 장기적으로 감소하다가 19세기말을 지나면서 회복되는 추이를 보이고 있다. 광주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살피면, 1860년대에 두락당 10두 전후의 도조(벼)가 1890~1900년대까지 6두 전후로 하락한 다음, 1930년대말이 되면 12두로까지 상승하고 있다.

이제 어느 정도 일반화해도 좋을 지대량의 이 같은 장기추세는, 첫째 量器 斗의 부피가 변화하였거나, 둘째 中畓主나 마름과 같은 중간적 존재 때문이거나, 셋째 생산량과 地代率의 어느 한 쪽에 변화가 있었거나, 넷째 양쪽 모두가 변화하였거나 등에 그 원인이 있을 터이다. 이 가운데 첫째와 둘째의 가능성은 배제해도 좋으며, 생산량과 지대율 모두가 변화하였다는 넷째가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위의 광주 사례의 경우 지대량의 감소가 근 40%인데, 그 모두를 생산량이나 지대율의 어느 한쪽만의 변화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18세기중반 이후 남부 선진농업지대에 있어서 畓作의 생산성은 장기적으로 감소하고 있었다. 이 시대에 관한 지난 세대의 지배적 연구성과와 경향에 비추어 무척이나 낯설고 당혹스럽기까지 한 이 같은 결론은, 그러나 여타 재화에 대한 미곡의 상대가격이 상승 추세였다거나 미곡으로 표시된 농촌 실질임금이 저하하고 있었다는 다른 한편의 수량경제사적 연구성과에 의해 보완되면서 그 신뢰도를 높히고 있는 실정이다.(차명수, 2001; 李宇衍, 2001; 朴基炷?李宇衍, 2001))

19세기후반의 파국적 위기는 결국 이 같이 소농사회의 생산적 토대에서부터 전개된 정체와 위기를 궁극적 배경으로 하였던 셈이다. 무슨 운명과도 같은 근본 요인의 작용으로 그토록 파국적인 위기가 초래되었던 것일까. 기후나 산림 등, 소농을 둘러싼 생태형의 조건에서 무언가 심각한 불가항력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中年 이상의 한국인이면 누구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그토록 벌거벗은 山地는 언제부터 그러하였으며, 그 역시 근본 요인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1천만 석이나 되었던 환곡을 거덜내었던 관료들의 부정부패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의 하나였을 터이다. 위기의 와중에서 소농사회의 인류학적 토대가 직계가족형으로 전환한 것은 어떠한 인과관계인가.

연속적인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19세기 위기의 역사적 의의는 그 과정에서 성립한 소농사회의 구조적 특질이나 여타 부분사회와의 전체적 상호관계가 20세기에 들어 시작된 근대화과정의 한국적 유형을 결정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하 소농사회의 사회조직과 정치?이데올로기의 면에서 그 점을 확인한 후, 마지막으로 20세기의 근대화 과정에 관한 고찰로 들어가기로 한다.


五. 緣網 또는 共同體


미국?독일?일본 등에 비해 한국이 低信賴의 사회라는 후쿠야마의 지적은 당초 한국인들로부터 그리 우호적인 대접을 받지 못하였다.(Fukuyama, 1995) 그렇지만 그의 저작이 나온지 얼마 뒤에 터진 1997년의 경제위기는 그가 옳음을 입증한 셈이었고, 이후 그의 그러한 지적에 이의나 불쾌감을 공연히 드러내는 한국인을 찾아 보기는 힘들게 되었다. 저신뢰의 사회는 시장에서의 거래에 쓸데 없이 많은 비용을 요구하거나 규칙위반자?무임승차자 등을 퇴출시킬 능력이 약하기 때문에 선진적인 시장경제로 발전하기 힘들다. 결국 그의 지적은 경제위기 이후 한국인들에게 강요된 고통스런 개혁이 인간관계의 사회조직적 특질과 연관된 매우 장기적이며 문화적인 차원의 것임을 명확히 해주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다.

짐작컨대,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비전문가인 후쿠야마가 그 같이 正鵠을 찌르는 진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헨더슨 저작의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헨더슨이 바라본 한국의 전통사회는 조직되지 않은 개인들로 구성된 일종의 ‘大衆社會'(mass society)로서, 일찍이 뒤르켐이 묘사한 바 있는 유기적 諸器官이 결여된 環形動物과도 같은 간단하며 유치한 구조이다. 그러한 무연의 고독한 개인들이 유일의 사회적 통합력으로서 서울의 중앙권력이 발휘하는 구심력에 휘말리는 양상을 그는 ‘소용돌이'(vortex)에 비유하였다.(Henderson, 1968)  헨더슨의 이론과 비유는 우선 미국의 동료 연구자들로부터 논박되고 말았다.(Cumings, 1974) 그들은 한국의 전통사회는 친족 또는 촌락과 같은 연망 또는 공동체가 풍부히 발달한 사회라는 익숙히 들어온 이야기를 그 근거로 내세웠다. 헨더슨에 대한 한국 내부의 반응은 아예 없었던 편이다. 그들의 전통사회가 공동체적 미덕과 우월한 자치능력으로 가득차 있음에 대한 한국 지식인들의 확고한 믿음이 그의 저작에 대한 차라리 의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철저한 무관심을 유도하였던 셈이다.

과연 한국의 전통사회는 공동체적인가? 솔직히 필자는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하기 힘들다. 이 질문과 관련하여 가장 우선적인 검토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촌락과 그의 洞? 조직이다. 우선 쉽사리 지적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그것이 말단 행정단위로 성립한 17세기후반이래 19세기말까지 동리는 지속적인 분열 과정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가령 경기도 廣州府 慶安面의 경우, 동리의 수가 1757년에 8개였다가 1790년에 11개로, 나아가 1912년까지 19개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이른바 分洞의 전국적 양상은 19세기의 것만 알 수 있는데, 예컨대 1790년 ??戶口摠數?? 상의 총 39,465개였던 동리는 20세기초에 이르러 1.6배나 많은 63,845개로 증가해 있었다. 충청?전라?경상도의 경우, 상대적으로 적은 1.4~1.5배의 증가이지만, 그래도 19세기에 걸쳐 전 동리의 4~5할이 분동의 몸살을 앓았던 셈이다.

분동은 강원?함경도와 같은 후진지대에선 인구증가의 효과일지 모르겠으나, 경기 이하 下三道에서는 동민 상호간의 신분격차와 그에 따른 여러 수준의 갈등이 기본 요인이었다. 특히 동리민에게 부과된 賦稅의 배분을 둘러싼 班常간의 알력이 중요한 요인이었다.(정진영, 1998) 동리민의 신분이 반상의 대립을 특징으로 하였음은 그들 모두가 1년에 한 두 번씩 모이는 洞會의 양상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18세기중반 安鼎福이 지은 廣州府 慶安面 2里의 동계 규약을 보면, 주민은 그의 신분에 따라 동회에서의 자리배치가 堂-階-庭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다.(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0) 그러한 신분갈등이 잠복하였기에 18~19세기의 동리는 지속적으로 분동을 지향하는 유동적 상황에 있었다. 18~19세기의 동리가 굳건한 결속의 공동체라는 이미지는 몇몇 유명한 班村으로부터 도출되어 아무런 매개없이 전 촌락으로 일반화되었던 데에 그 기원이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반촌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洞?=洞約은 그 사회조직적 특질에서 단일기능적인, 울프의 표현을 빌리면 單索的(singlestranded)인, 結社體라고 할 수 있다.(金弼東, 1992) 동계는 孝悌를 기본으로 하는 유교적 사회윤리로 동리민을 馴致시키기 위한, 그렇게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효율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양반신분의 持分聯合으로서 결사체임을 그 본질로 하고 있다. 가장 모범적으로 운영된 동계라 하더라도 그 기본 기능은 동리민의 인간 제관계를 반상의 신분질서로 규율하거나 부모의 喪葬을 당한 성원에 대한 부조를 넘지 않음이 보통이었다. 동리민의 사회적 재생산에 있어서 불가결한 수리?산림?교육 등의 공공재는, 현실적으로 동계와 중첩되는 경우가 많지만, 원리적으로 별도의 단색적인 洑??松??書堂? 등에 의해 공급되었다. 그러한 시각에서 18~19세기의 동리는 여러 단색적인 계들의 多層異心的 중첩으로 그 구조적 특질이 묘사될 수 있다.(李榮薰, 2001)

族?는 여러 동리의 양반 친족집단의 연합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활발성이나 공공성은 동계의 그것을 능가하거나 아예 대체할 수도 있을 정도로 강력하였다. 가장 튼튼한 혈연으로 맺어졌기에 족계야말로 종합기능적인, 역시 울프의 표현을 빌리면 多索的(manystranded)인, 공동체였다는 주장이 쉽사리 성립할 듯하지만, 그 역시 단색적인 결사체임에 별다름이 없었다. 예컨대 崔在錫이 일찍이 답사하였던 경남 咸陽의 어느 친족집단은 그토록 많은 문중재산으로부터의 수입을 아낌없이 제사봉행이나 爲先사업에 투입하였지만, 대조적으로 경제적으로 곤궁한 족원에 대한 공동주의적 지원에 대해서는 단 한푼의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崔在錫, 1975)

18~19세기 동리 구조의 異心性과 관련해서는 독특하게도 동리 주변의 삼림이 동리의 공동소유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유력한 방증례로 들 수 있다. 삼림은 많은 경우 동리의 유력 친족집단의 私養山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해 친족집단은 大宗에서 小宗으로 끊임없이 분화하기 때문에 크고 작은 宗家의 사실상의 사유림이었다고나 할 것이다. 그 때문에 산림의 분할을 둘러싼 친족집단 내부의 갈등은 어떠하였으며, 아예 그 이용을 차단당한 촌락의 하민들이 받은 서러움과 느낀 분노는 또한 어떠하였던가. 이로 인해 18~19세기 농촌사회가 분열하고 갈등했던 양상은 산더미처럼 많은 山訟에 관한 재판기록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확실히 18~19세기의 농촌사회를 인간 제관계가 ‘쟁반 위의 모래알’과 같은 ‘대중사회’로 비정함에는 많은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견고한 공동체적 결속이 바탕을 이루는 공동체사회라는 대안적 진단도 곤란하다. 그것은 조선 고유의 계 형태로 맺어진 緣網(network)의 사회였다. 족히 ‘수십만’은 되었을(文定昌, 1942) 각양각종의 계가 농촌사회의 인간 제관계를 촘촘히 엮은 가운데 비교적 잘 조직된 주민집단과 자치질서를 거기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鈴木榮太郞이 관찰한 바와 같은, “개인의 位座가 현저히 고정되고 개인의 위자가 엄격이 지켜지는 의미에서 개인주의적”인(鈴木榮太郞, 1943) 농촌사회의 분위기도 다른 한편의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러한 사회조직의 이중적 특질은 모든 계는 계일진대 단일한 목적과 기능을 위한 성원들의 자발적 결사체라는 속성에 기인하고 있다. 그러한 사회조직은 외부의 상황변화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융통성을 자랑으로 하지만, 동시에 이해관계의 내부적 분열을 조정할 능력이 취약한 데 따른 불안정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공동체와 연망을 구분할 기준이 연구자에 따라 애매하다는 문제점은 比較史를 통해 해결될 수 있다. 동남아시아 제국의 촌락공동체에서 관찰되는 노동의 호수적 교환이나 수확물의 재분배체제를 18~19세기 조선의 촌락사회에서 발견하기는 불가능하다. 여기서는 공동체적 호수와 재분배가, 환곡제로 상징되는 바, 국가에 의해 조직되고 관리되었다는 비교사적 특질을 지적할 수 있다.(金載昊, 2001) 촌락사회 내에서 개별 가족의 생계는, 놀부에게서 쫒겨난 흥부처럼, 개별 가족의 책임으로 영위될 수 밖에 없었으며, 그러했던 한 18~19세기 조선사회는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적 사회였다.

어떠한 형태의 호수나 재분배에 뒷받침되지 않으면서도 개별 가족의 강한 공동체적 결속을 과시한 사례로서 근세일본의 촌락을 들 수 있다. 근세일본의 촌락은 주거?경지?산림?하천?神社 등의 구조적 결합으로서 주민의 일상적 재생산에 요구되는 제반 공공기능을 다색적으로 수행하는 공동체였다. 촌락은 주민의 생득적인 귀속대상이자 개별 주민으로부터 분리된 독자의 가부장적 권위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촌락공동체가 17~18세기에 걸쳐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은, 村請制 방식의 年貢 수취가 말하듯이, 국가에 의한 사회의 일종의 군사적인 편성에 그 기원이 있었다. 대조적으로 조선왕조의 경우는 18~19세기를 거치면서 軍役이나 還穀의 수취에서 면?리를 단위로 한 공동체적 수취가 점진적으로 확대되긴 하였으나, 국가재정의 기간을 이룬 結稅의 수취에 관한 한, 개별 농민과 토지에 대한 직접적 지배체제는 끝까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조선 소농사회가 19세기의 위기과정에서 그 사회조직적 특질을 어떻게 바꾸고 있었던가는 앞으로의 중대한 연구과제이다. 위기에 대한 사회의 자율적인 방어능력이 감퇴하고 있었음은 지방관에 접수된 소송의 빈발을 통해 관찰되고 있다. 예컨대 1790년 호수 8,214호의 전라도 靈巖郡에 1838~1839년의 3개월간 월평균 200건(연평균 2,400건)의 소장이 접수되었다.(金仁杰, 1990) 1790년 호수 12,691호의 영광군의 경우는 1870~1872년의 26개월간 월평균 254건(연평균 3,408건)의 소송이 제기되었다.(鄭勝振, 2001) 이와 대비될 중국에서의 好訟의 풍조는 乾隆년간 호수 23,366호인 湖南省 寧遠縣에서 연간 9,600여건, 호수 77,750호인 湘鄕縣에서 연간 14,400~19,200건의 규모였다.(夫馬進, 1993) 호당 소송의 빈도를 계산하면 양국이 거의 동일하다. 그렇게 19세기의 위기과정에서 조선 소농사회는 중국형의 저신뢰사회로 접근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역설적이게도 이 소농사회가 안정을 회복하는 것은 20세기전반 일제하 식민지기의 일이다. 동기간 소농사회의 사회조직에 가해진 충격의 기본 효과에 대해선, 여전히 불명확한 점이 태반이지만, 각종 계 형태로 영위되던 구래의 자치질서가 일제가 강압적으로 포진한 관료제와 관변 조합으로 흡수되고 말았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사회가 그 자율성을 상실하고 국가기구에 매몰됨에 따라 ‘강한 국가’와 ‘약한 사회’라는 현대한국의 기본틀이 식민지기에 형성되었다. 그 결과 1950년대에 사회학자들이 농촌를 답사하였을 때 그들이 발견할 수 있었던 농민단체는 보통 족계로 맺어진 친족집단과 전국적 정당조직 등의 관변단체를 제외한다면, 사친회?교회?4H클럽 정도의 지극히 빈약한 실정이었다.(李萬甲, 1960) 이후 朴正熙政權의 새마을운동이 파악한 전국 34,665개 마을에서 내부 리더쉽이 결여된 ‘기초마을'은 18,415개로서 절반을 초과하였다. 헨더슨이 막상 관찰하였던 것은 이 같이 유기적 제기관이 결여된 1950년대의 농촌사회였다. 그의 대중사회론은 1950년대에 관한 한 꽤나 그럴듯한 설명력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六. 이데올로기


18세기중엽을 넘기면서 이 소농사회는 그 대외관계에 있어서 점차 폐쇄적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東萊 倭館에서의 개시율은 1722~1726년에만 해도 74%의 비교적 높은 수준이었으나, 易地交聘이 있었던 1809~1812년에 이르러 18%의 아주 낮은 수준이었으며, 이후 다소 회복되지만 1844~1849년에도 24%에 불과하였다.(鄭成一, 2000) 이처럼 일본과의 무역이 쇠퇴해 갔던 것은 조선의 주된 수출품인 人蔘을 일본이 輸入代替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銀을 벌어들이던 가장 유력한 창구가 닫히고 있었지만 조선왕조는 다른 대체적 수출품을 개발함에 뜻이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중국으로부터 사치품 帽子를 확대 수입함에 열중함으로써(李哲成, 2000) 대량의 은을 유출시키고 있었다. 그로 인해 1742년에만 해도 100만 냥에 달하던 중앙정부의 은 시재고는 1세기가 경과한 다음 고작 20만냥에 불과한 소량으로 고갈되고 말았다.(李憲昶, 1999) 이윽고 1876년, 제국주의가 重砲의 압력으로 들이닥쳤을 때 조선왕조의 연간 對日?對中 수출입 규모는 추정 총국민생산에서 1%도 되지 않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전망과는 거의 무관한, 폐쇄적인 자급경제를 영위하고 있었다.

역사는 변화하는 내외 상황에 대응하는 인간들의 불확정적 확률적 선택과정에 다름아니다.(Wallerstein, 1991) 지배계급이, 이데올로기를 담당하는 지식인이, 좋은 선택을 거듭하면 역사는 발전하며 인민의 복지는 증대된다. 반면에 나쁜 선택이 거듭되면 그 국가와 민족은 패망할 수 밖에 없고, 인민은 도탄에 빠지거나 침입자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 어떠한 선택을 하는가, 좋은 선택이 이루어지는 확률은 어떻게 높아지는가는, 주로 인간들의 선택 범위와 방향을 결정짓는 이데올로기 영역의 문제이다.

스스로 만민의 君師로서, 나아가 삼라만상의 皇極으로서 ‘萬川明月翁’을 자처했던 正祖조에 이르러 朝鮮性理學은 그 이론적 수준에서나 사회적 통합력에서 절정기에 도달해 있었다. 성리학이 가르치는 사회통합의 원리를 星湖 李瀷은 사탕을 정제하는 원판의 회전에 비유한 적이 있다. 거기서 모든 물체는 안쪽으로 이동하며 돌아가다가 중심에 이르면 움직이지 않는다. 성리학의 사회는 그렇게 중심이 발휘하는 구심력에 의해 통합되는 동심원적 질서이다. 중심을 이루는 것은 군주의 大德에 다름아니다. 그것만 굳게 바로 서면 만사는 형통이다. 사회에 대한 이 같은 도덕주의적이며 근본주의적인 자세가 현실 사회의 안정?번영과 결부될 때 고도의 낙관적이며 관념적인 질서감각을 양산하게 됨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예컨대, 1797년 정조가 農書를 구하는 윤음을 전국에 내리자, 洪州의 幼學 申在亨은 殿下가 진실로 大德을 밝혀 능히 天心을 기쁘게 하신다면 농사는 저절로 풍년이 들것이며, 수리나 농기 등의 일들은 한갖 有司의 책무에 불과하다는 취지의 상소를 올렸다.(亞細亞文化社, 1981) 비슷한 근본주의적 사고방식은 한참뒤 高宗조 초년에 異樣船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衛正斥邪派의 종장 華西 李恒老가 修身齊家를 하여 나라가 바로 잡히면 서양의 奇技淫巧한 재화를 사용하지 않아 교역이 끊어지게 되고 그러면 저들 洋人들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도적주의적 대책을 건의하기까지 鄕儒들의 정신세계에선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화서의 위정척사론이 小中華라는 국제적 질서감각을 전제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일이다. 淸의 入關으로 빚어진 華夷變態의 17세기 국제사회는 조선뿐 아니라 일본?베트남 등의 동아시아 제국으로 하여금 나름의 소중화론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조선의 소중화론은, 다른 나라의 경우 그것이 독자의 文明自存에 바탕하였음과 대조적으로, 청이나 일본과 같은 주변국의 문명성을 부정하였다는 점에서, 그것도 의복이나 두발과 같은 外樣에 문명성의 기준이 두어졌다는 점에서, 동아시아 제국의 소중화론 가운데서도 돌출적인 것이었다.(岸本美緖, 1998) 그러했던 이상, 조선소중화론은 그것이 정치적 명분으로 내건 北伐大義와는 모순적이게도 은둔주의적 지향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고(朴忠錫, 1982), 전술한대로 이 나라가 그 대외교역에서 있어서 점차 폐쇄적으로 되어 간 것도 사상계 일반의 이 같은 趨向과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대외교역과 국제정보를 독점하고 있던 서울의 지배정파와 京華士族들의 동향에 관해서는 보다 복선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그들에게 조선 성리학계의 지적 헤게모니를 안겨다 준 湖洛論爭에 있어서 경화의 洛論은 인간사회의 동심원적 질서를 자연세계로까지 확장함으로써 倫理를 物理로까지 보편화, 추상화시켰다는 공로를 남겼다. 조선성리학이 그 자신의 내재적 발전과정에 있어서 절정기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낙론의 사유체계는 인간들의 차등적 품성을 부정함으로써 노비신분제를 해체시킨 진보적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지적되고 있다.(趙成山, 2000) 인륜을 물리와 동질시함으로써 촉발된 名物度數之學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중국이 더 이상 오랑캐가 아니라는, 오히려 중국의 번성한 문물을 공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北學派의 성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유봉학, 1995)

19세기에 들어서 조선성리학이 이룩한 사상사적 진보는, 솔직히 지적하여, 빈약하다. 군사 정조가 그토록 정성을 다하여 길러낸, 대체로 벌열 가문의 자제로 충원된, 奎章閣 출신의 학자들은 정조 사후에 볼만한 학문적 성과를 생산하지 못하였다. 京鄕으로부터의 어떠한 도전에도 노출되지 않았던 그들의 정치적 사상적 헤게모니는 그들의 정신세계를 도시생활의 화려함 속에서 퇴영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었다. 고리타분한 理氣道學은 더 이상 그들의 주요한 논쟁거리가 아니었다. 북학을 통해 중국 사정에 정통해지자 이들은 결국 國亡으로 이어지는 慕華思想으로 서서히 경도되어 갔다.(이상 유봉학, 1998)

볼만한 사상사적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영혼에서 이미 西學으로부터의 깊은 상처를 안고 있는 茶山 丁若鏞이 18년간의 유배생활을 통해 집대성한 經學과 經世論에서 관찰되는 사상사적 특징은 중세적 보편질서의 해체와 도덕?정치?경제의 근대지향적 분열로 요약될 수 있다.(李榮薰, 2000c) 惠岡 崔漢綺의 氣學은 그 기본 철학소에서 이미 현저히 경험주의적인 근대사상의 영역에 진입해 있었다.(權五榮, 1999; 한형조, 2001) 그렇지만 이들 불우했던 천재들이 역사에 남긴 족적은 그리 깊지 못했다. 폐족의 위기에 처한 다산이나 그 처지가 委巷之士에 불과했던 혜강 모두 마땅한 제자를 만나지 못하였으며, 그들의 저작은 광주리에 담겨 오랫동안 먼지만 쌓였거나(다산), 사방으로 흩어져 겨우 최근에야 그 온전한 수습을 보게 되었을 뿐이다.(혜강)

이 같은 동향의 19세기 지배계급사회가 개항 이후 이 땅에서 손님으로 들어온 열강을 어떠한 자세로 영접하였던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1883년에 체결된 영국과의 조약은 조선왕조의 국제적 위상을 반식민지로 추락시킨 불평등조약의 완성판이었다. 당초 영국 公使가 요구한 內地通商權은 조선왕조의 완강한 저항을 예상하면서 제시된 협상카드에 불과하였지만, 의외로 손쉽게 그들에게 양보되고 말았다. 그렇게 된 데는 협상과정을 배후에서 조종한 閔妃의 투항주의적 태도가 결정적으로 역할하였는데, 그녀의 생각으론 우호적인 손님과 商利를 두고 심하게 다투는 것은 東方禮義之國의 떳떳한 처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요컨대 그녀에게 있어서 조선왕조는 완벽한 道德社會였다. 외상의 내지통상이 서울의 시전상인이나 지방의 보부상에 가할 경제적 타격은, 그들 상인단체가 왕조의 정치적 선택을 제약할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민비로선 심각하게 고려할 대상이 못되었다.

지방장시의 褓負商들이 그들 나름의 사회 단체를 구성하기 시작하는 것은 19세기중엽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보부상단이 남긴 규약은 그들 상호간에 長幼有序의 질서를 바로 잡고 喪을 당하거나 병에 걸린 동료를 상호부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商團이 결성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대조적으로 시장에서 거래를 안정시키고 비용을 줄이기 위한 경제적 약속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회원의 자격이나 가입을 제한하지 않음으로써 상단이 배타적 권리로서 관리하는 상업의 기화나 이윤이 전제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막 성립을 보기 시작한 상인들의 사회는 유교적 사회윤리에 바탕한 道德集團임을 본질로 하였다.

서울의 상인단체인 육주비전의 사회조직적 특질도 지방의 보부상단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주비[矣]는 都家를 중심으로 동종의 영업권을 가진 상인들이 정부가 부과한 國役을 공동 수행하기 위한 단체였다. 보부상단과 달리 영업권이 매매되었음은 이들 상인집단이 배타적인 상업상의 특권을 향유하였음을 말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시장거래를 규범하기 위한 각종 약속이나 신뢰기구가 관찰되지 않기는 보부상단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상인을 천시한 직업관 탓인지 상인들의 부는 세습되지 않았다. 그 점은 시전상인들의 명부에서 영업권의 계승이 서로 다른 성씨간에 이루어짐이 거의 일반적인 현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須川英德, 2002) 요컨대 서울의 육주비전이라 하더라도 19세기말까지 그것이 국역체제의 일환으로 성립하였다는 그 당초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이윽고 일제가 이 땅을 식민지로 접수한 초기, 1908년의 사회적 분업관계를 보면, 전국 289만 4천여호 가운데 광?공업에 종사한 호는 2만 4천여호로서 0.9%에 불과하였다. 또한 전국 총 4,362개 면 가운데 호의 10% 이상이 광?공업에 종사한 면은 하나도 없고, 5~9.5%의 가장 공업화된 면이라 하더라도 47개에 불과하였다.(李榮薰, 1996) 신뢰성이 매우 부족한 추정이긴 하지만, 1910년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58불 수준이었다.(溝口敏行?梅村又次, 1988) 19세기의 사회경제적 위기와 이데올로기의 정체를 경과한 나머지, 그를 위한 弔鐘이 울려 퍼질 때 조선왕조는 이토록 더없이 순수한 형태의 농본주의사회를 20세기 역사의 출발점으로 남겼다.


七. 近代化


日帝가 1940년에 행한 國勢調査에 의하면 1939년 8월 1일 현재 각종 재화의 판매업에 종사한 업체는 전국적으로 총 246,688개로서 여기에는 개인상점부터 합명?합자?주식회사와 公私의 조합 및 단체까지가 총괄되어 있다. 이들을 창립연대별로 분류하면 1899년 이전이 587개(0.24%), 1900~1909년이 1,584개(0.64%), 1910~1919년이 8,280개(3.36%), 1920~1929년이 32,595개(13.21%), 1930~1939년이 203,634개(82.55%)이다. 업체가 상속자 이외의 타인에게 양도되거나 다른 府邑面으로 이동한 경우는 새로운 업체의 창립으로 간주되었다.(朝鮮總督府, 1940) 이 통계는 1909년 이전의 상인사회가 20세기의 근대화 역사에 이바지한 정도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나아가 한국에서 근대화가 개시된 것이 1920년대와 주로 1930년대부터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시기가 식민지기임을 고려하면 그것은 두드러지게 일본인 지주?상인?기업가를 주체로 한 이식형의 근대화였다.

이식형이기는 해방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韓國戰爭이 끝나면서 여러 지방에서 자생한 농촌공업과 재래 상인사회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현재 필자는 1949~1959년 충청도 洪城?大川?廣川의 장시에서 활동한 보부상과 동 지방의 상공업자의 명부를 대조하고 있다. 결과의 일부를 미리 밝히면, 홍성의 경우 58명의 상공업자 가운데 보부상 출신은 2명, 광천의 경우 30명 중 3명에 불과하고, 대천의 경우는 55명 중 아예 한 명도 없었다. 아주 적절한 사례는 아니지만, 농촌 공업과 재래 상업이 상호간에 그렇게 무관하였다면, 이로부터 1950년대에서도 이른바 재래적 발전에 기초를 둔 공업화의 모형은 거의 전망이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요컨대 한국의 근대화=공업화 유형은 두드러지게 이식형이었으며, 그 점에서 일면 이식형이면서도 재래적 농촌공업의 발전을 통한 복선적 공업화의 유형을 보인 일본(黃完晟, 1992) 및 대만(安秉直, 1997)과도 상이하다고 하겠다.

곧이어 1962년, 당대 일류의 자본가 李秉喆은 경제개발의 의지로 충만한 젊은 군인들이 정권을 장악하자 모 일간지를 통해 발표한 글에서 우리는 경제발전의 고전적 코스를 밟을 시간이 없으며, 과감히 그 순서를 바꾸어 대기업에서 출발하여 중소기업으로 내려가는 방식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李秉喆, 1986) 강단사회를 점한 많은 민족주의적 경제학자들의 비생산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후 한국자본주의는 이병철의 제언에 충실하여 외국의 기술과 자본으로 창설된 대기업을 선발주자로 하면서 그와 기술적으로나 소재적으로 계열관계를 맺는 많은 중소기업이 뒤를 따르는 방식으로 건설되었다. 그렇게 移植型은 동시에 下向式이었다. 공업화의 그러한 유형적 특질은 대량의 농업인구를 도시로 유인하였으며, 그로 인해 전통 소농사회의 해체도 離村型의 특수한 경로를 밟게 되었다.  

그렇다면 전통 소농사회가 지난 20세기의 근대화 과정에 기여한 몫은 그야말로 무시해도 좋을 정도인가. 그것은 과연 일본과 미국에 의해 ‘초대된 발전’에 불과한 것일까. 또한 전통 소농사회와 현대 한국의 중간기인 식민지기는 그 역사적 의의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긴 역사에서 볼 때 불과 35년 내지 40년에 남짓한 짧은 기간에 너무 많은 역사적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이다. 이 기간 소농사회의 촌락 레벨에서 펼쳐진 일상생활은 그 기본 리듬에서 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소농사회는 식민지자본주의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그 외연을 확장하였다. 열량의 섭취 수준이 다소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생여건이 크게 개선되어 인구가 거의 배증하였음이 주요 원인이었다. 소농들의 재생산 여건을 규정한 생태형과 생산시스템에서, 나아가 지대를 수취한 지배계급의 존재양태에서(<자료1>) 큰 변화가 없었음도 동기간 소농사회가 확장할 수 있었던 다른 한편의 여건이었다. 식민지자본주의의 발전은, 근년의 연구성과들이 분명히 하고 있듯이, 조선인 자본가의 동참과 역내 시장관계의 확장을 유발하면서, 당시 세계자본주의의 일반적 동향에서 이례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높은 연간 3~4%의 성장률을 거듭하였다.(安秉直?中村哲, 199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농촌의 과잉인구를 흡수함으로써 소농사회의 해체 자체를 견인할 정도의 전망을 확보한 것은 아니었다.

이 같은 일반적 전제 위에서 식민지기가 20세기의 근대화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의를 앞서 제시한 소농사회의 일반모형에 준하여 다시 규정하면, 소농사회와 그를 둘러싼 여러 부분사회의 상호작용, 그 전체적 구조가 근대화에 적합한 형태로 재배치되었음을 두드러지게 강조할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식민지기는 세계자본주의가 전통 소농사회와 순조로이 접합할 수 있도록 제도적 이노베이션이 일어난 시기였다. 여기서 統監府시절부터 1940년대의 戰時統制期에 이르기까지 간단없이 추진된 화폐?금융?재정?소유?회사?시장 등에서의 제도개혁에 대해 자세히 소개할 필요는 없을 터이다. 총독부가 커다란 재정적자를 무릅쓰면서 건설한 철도?도로?항만의 인프라는 전국적으로 나아가 朝日간에 잘 통합된 商品市場을 조성하였다. 아직 勞動市場은 성립할 여건이 못되었으나, 1937년 이후 軍需工業化 정책에 따라 대량의 자본이 일본에서 유입되고 그에 맞추어 시장기구가 정비되자 資本市場도 꽤나 그럴듯하게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제도적 이노베이션의 주체는 두 말할 것도 총독부권력이었다. 한 마디로 그것은 ‘개발권력’이었으며,(Kimura, 1995) 그 점에서 조선왕조의 도덕권력이 결여한 체계적인 산업정책을 그 자신의 고유한 직무로 하였다. 총독부의 일련의 지배정책이 오로지 수탈을 지향할 뿐이라는 거칠은 주장에 대해선 굳이 논박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나, 첫째, 그것이 조선인의 재산과 소득을 폭력적으로 탈취한 행위라면, 그러한 야만적 행위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고, 둘째, 그것이 마르크스경제학이 이야기하는 자산계급에 의한 노동잉여의 착취를 가리킨다면, 그것을 증명될 수 없는 이념의 영역이고, 셋째, 그것이 지역단위의 경제적 순환에서 잉여의 域外 유출을 이야기한다면, 조선반도의 무역수지가 적자이고 자본수지가 흑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거꾸로였다고 말할 수 있다. 셋째와 같은 대외 수지구조가 장기간 지속되면 조선의 토지와 공장 등의 실물자산은 거의 일본인의 소유가 될 터이며, 총독부가 입버릇처럼 되풀이하였던 ‘영구병합’도 결국 실현되었을지 모른다. 수탈론이 막상 지적하고 싶었던 것도, 논리가 통하지 않지만, 결국 이 점이 아니었던가 싶다.

근대적으로 재배치된 부분사회로부터 소농사회에 전달된 근대화의 조건은 일차적으로 정신세계에 관한 것이었다. 普通學校로의 취학율은 1910년대만 해도 추정학령인구의 5%에 불과하였으나, 3?1운동 이후의 민족적 자각과 더불어 급상승하기 시작하여 1943년에는 47%에 달하였는데, 남자만을 따로 보면 61%의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 같은 취학율은 실제의 취학희망율에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었다. 특히 1933년 이후 취학희망자가 급증하자 시설 부족으로 인한 실제 취학율은 1937년의 경우 희망자의 52%에 불과한 실정이었다.(이상 古川宣子, 1996) 이러한 소농사회의 교육열에 밀리어 패망 직전의 총독부는 1946년부터 의무교육제도를 시행할 계획이었다.

1933년 釜山日報는 당시의 폭팔하는 교육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주민은 無學文盲의 자라고 해도 자녀교육을 父兄의 책무로 알고, 먹고 살기 곤란한 赤貧者라고 해도 자녀교육에 의해서 지출한 학비는 당연한 의무로 알고, 매년 신학년이 도래하야 자식의 입학에 광분해서 침식을 잊고서 교문을 두드리는 상황이다.”(同上) 이러한 일종의 敎育革命이 경제인류학적으로 直系家族 고유의 경쟁력에 기인함에 대해선 앞서 지적한 바 있다. 인간을 班常으로 가르는 전통적 신분제는 아직 일소되지 않았지만, 사회적 성공의 지표로서 學歷이 우대받는 신시대로 접어든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역설적이게도 식민지기는 일반 상민으로서는 신분의 해방과 상승의 시기였다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다.

1950년대 농촌사회를 방문한 사회학자들은 농민의 대다수가 인간의 행복과 성공이 ‘학식의 유무’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고 있음을 확인하였다.(李萬甲, 1960) 그렇게 자녀의 교육비가 소농의 가계에서 감가상각비의 정상 요소로 자리잡게 되자, 이후 어떠한 사태가 벌어졌는지는 대체로 그 사회 출신인 중년 이상의 한국인들에겐 대단히 친숙한 이야기이다. 말하자면 소 팔고 논 팔아 자식을 대학에 보내는, 아마도 다른 소농사회에 유례를 찾기 힘든, 珍風景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높이 세워진 牛骨塔에서 배출된 人的資本이 외래 자본주의를 이 땅에 성공적으로 정착시킴에 이바지했던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단순한 하향식 이식만이 아니었다. 그것만이라면 성장의 벽은 조만간 불가피하다. 이식된 기술은 적지 않게 선진국이 선점하고 있는 기술개발의 정상적인 경로를 뛰어 넘어 보다 우월한 기술로 개량되고 성공적으로 상업화되었다. 마치 개구리가 점프하듯이 그러한 도약이 가능했던 것은 오로지 이 땅에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인적자본의 덕분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바로 그 점에서 18세기 이래의 소농사회가 현대한국의 자본주의와 관계하는 가장 중요한 고리를 확인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현대한국의 자본주의가 드러내는 비교제도사적 특질에 대해 간단히 언급한다. 일반적으로 한 나라의 경제체제는 그 자신의 고유한 역사적 전통과 문화적 특질을 기초로 하여 구축된 市場과 共同體와 國家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Hayami, 1997) 이러한 三者鼎立에서 민간의 신뢰조직인 공동체가 1950년대의 한국사회에서 취약했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런 위에 일제에 의해 조직된 식민지자본주의가 해체되자 시장경제의 수준은 거의 1920년대 이전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이러한 역사적 제약조건 하에서 1960년대 이후의 경제성장과정이 정부가 시장과 공동체를 지배하고 지도하는 이른바 정부주도형으로 이루어졌음은 거의 필연적이었다. 정부주도형 성장모델이 성취한 기적적인 경제성장과 그에 지불된 정치적 사회적 희생에 대해선, 널리 알려진 사실이고, 또 추론 가능하기 때문에, 여기서 서술을 그치도록 한다.


八. 맺음말


(맺음말은 좀더 읽고 생각하고 토론한 한참 뒤에나 쓸 작정입니다. 이하는 본 논문의 맺음말이 아니고 월간 신동아에서 최윤오 교수와 저의 논쟁을 발췌해서 게재하겠다기에 본 논문의 내용과 순서와 무관하게 별도로 작성한 것입니다. 일반 독자를 위해 쓴 글이니 다소 엄밀하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양해해 주십시오. 본 논문에서 명확히하지 않은 한 두 가지도 있게 해서 이 글을 맺음말로 대신하겠습니다. )


        새로운 제안: 근세 한국의 역사상으로서 소농사회


기독교인들은 인간세상의 종말을 믿는다. 그 날에 예수가 강림하시고 천년왕국이 열린다. 또한 그 날에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심판을 받는다. 선한 사람은 예수와 함께 천년왕국에 머물지만, 악한 사람들은 영겁의 지옥불로 떨어진다. 종교가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했던 중세시절에 사람들은 그들 사회의 과거와 미래를 이 같은 종교적인 역사관으로 이해하였다. 그렇게 역사는 천년왕국을 향하는 고난의 여행길이다. 그리고 결국은 선이 악을 이기리라.

이 같이 목적론적이며 도덕주의적인 중세의 역사관은 근대사회가 되어서도 한 동안 맥이 끊어지지 않았다. 헤겔의 철학과 역사학을 좌파적으로 계승한 맑스주의역사학이 그 가장 훌륭한 본보기이다. 맑스주의역사학에서 인간사회는 공산주의라는 유토피아를 지향한다. 인간사회의 역사는 원시공산사회에서 노예제사회, 봉건제사회, 자본제사회를 거쳐 다시 보다 높은 차원의 공산주의사회에 도달한다. 마르크스 자신은 이 같은 이야기를 똑 부러지게 한 적이 없지만, 그의 후계자들은 마르크스의 권위를 빌리기 위해 그가 그런 주장을 하였다고 단정하였다.

특히 러시아혁명 이후의 소비에트역사학에서 그러한 억측이 심하였다. 예컨대 스탈린은 인간사회가 위와 같은 다섯 단계를 거쳐 공산주의에 도달하는 것을 두고 ‘철의 법칙’이라고 하였다. 절대로 어긋남이 없는, 세계 도처의 어느 지역과 모든 민족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한 역사의 발전법칙이란 뜻이다. 마치 신의 섭리와도 같이 절대적으로 진리인 이 법칙을 거역하거나 비판할 수는 없다. 그런 이유로 스탈린은 그 자신에 반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숙청해 버렸다. 그 자신이 역사의 선을 대변하고 있다는 믿음이 너무나 확고하였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근대 역사학은 이 같이 목적론적이며 도덕주의적인 맑스주의역사학에서 출발하였다. 1920~30년대 일제 하 식민지기에 일본과 중국으로부터 근대 역사학이 수입될 때 맑스주의역사학이 가장 먼저 들어왔다. 제국주의가 온 지구상의 약소민족을 식민지로 억압하였던 그 당시 맑스주의역사학은 약소민족의 입장에선 해방의 약속이었다. 그런 이유로 맑스주의의 지적 영향력은 너무나 압도적이었으며, 맑스주의가 현저히 쇠퇴한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력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필자까지 포함하여 많은 역사학자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맑스주의역사학이 펼쳐놓은 구도 내에서 그의 언어와 논리로 토론하고 논문을 쓰고 있음이 오늘날의 솔직한 실정이다.

역사를 선과 악의 투쟁으로 보는 맑스주의역사학의 도덕주의적 성향도 지금까지 극복되지 않고 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대한제국의 멸망과 식민지로의 몰락, 해방과 뒤이은 남북분단의 지난 세기를 실패의 역사로 단정한다. 이 실패의 역사에서 주역을 담당하였거나 조연으로 동참한 사람들은 악으로 규정된다. 반면 그에 저항하였거나 불참한 사람들은 역사의 선으로 찬양된다. 이름을 대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의 대단히 유명한 어느 역사학자는 얼마 전에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호언하였다. “이선생, 식민지기는 독립운동의 역사요, 다른 것은 역사라고 할 수 없어요”. 이러한 도덕주의적 역사관의 도도한 풍조는 심지어 민족분단을 초래하였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의 건국까지 차라리 없었으면 좋았을 역사로 치부하는 소수의 극단적인 연구자까지 공공연히 배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제 그러한 목적론적이며 도덕주의적 역사학은 지양될 필요가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는 이른바 보수와 진보의 대립에도 그러한 비생산적이며 관념적인 역사학이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다소 오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필자는 역사에 있어서 필연은 없다고 생각하며, 마찬가지로 선과 악도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오로지 불확정적이며 확률론적인 선택과정일 뿐이다. 내외의 상황변화에 대응하여 지도자와 지식인이 유익한 선택을 거듭하면 그 국가는 발전하고 인민의 복지도 증대된다. 반면에 지도자와 지식인이 유해한 선택을 거듭하면 그 국가는 패망하고 인민은 침입자의 노예가 된다. 한 사회의 전반적인 지적 수준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유능한 지도자가 나오면 그 사회는 위기를 탈출할 수 있다. 거꾸로 대중의 지적 수준이 높더라도 지도자가 무능하면 마치 흑자도산의 기업처럼 그 사회는 실패할 수도 있다. 

한 사회가 그러한 공리주의적 선택에서 실패한 역사를 필자는 19세기 조선왕조에서 발견한다. 당시 조선왕조의 위정자들은 열국이 대치하는 약육강식의 국제정세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하였다. 그들에게 중국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었으며 중국에 의존함으로써 국체를 보전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반면에 세차게 중국에 도전하고 있던 일본의 국력을 너무나 과소평가하였다. 당시 재정규모나 통화량 등의 경제지표에서 일본은 조선보다 근 20배 규모의 대국이었다. 그렇지만 조선의 위정자나 일반 지식인들은 일본을 바다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야만국으로 간주하였다.

사상의 자유가 없었던 것도 조선왕조가 실패한 중요한 원인의 하나였다. 18세기초 노론의 장기집권이 성립한 이래 성리학 이외의 다른 학문이나 사상은 허용되지 않았다. 성리학자 상호간의 활발한 논쟁도 19세기가 되면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정권과 직접적으로 결탁되어 있는 서울의 지식인만이 아니라 지방도 마찬가지였다. 가령 퇴계의 사상이 절대적이었던 영남의 경우 19세기말까지 그에 대한 어떠한 도전도, 약간의 윤색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사회가 사상적으로 동맥경화증에 걸리게 되면 그 사회는 조만간 패망하게 마련이다.

요컨대 일본의 식민지로서 20세기전반에 우리 민족이 겪었던 치욕의 역사는 조선왕조의 위정자와 지식인들이 공리주의적 선택에서 실패한 결과이지, 일본이 역사에 있어서 강포한 악의 세력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필자는 바로 이 점에서 우리가 후세에 전할 역사의 교훈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일제가 이 땅에서 펼친 식민지 지배정책을 두고서도 그 때문에 우리의 정상적인 역사 발전이 왜곡되었다든가, 그 때문에 오늘날의 남북분단을 포함한 온갖 역사적 모순이 발생하였다고 단정하는 것도 무리라고 생각한다. 정상적인 역사 발전이란 것 자체가 논리적으로나 실증적으로 증명될 수 없는 선험적인 명제이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앞서 비판한 도덕주의적 역사관이 작용하고 있다. 지금 필자와 논쟁을 벌리고 있는 최윤오 교수와 필자 사이에는 바로 그 점에서 기본 입장의 중대한 차이가 있다.


지난 1960년대이래 역사학계에서는 자본주의맹아론이란 학설이 주류의 입장을 차지하여 왔다. 18~19세기 조선사회에서도 그냥 두었으면 언젠가 자본주의로 발전하게 될 여러 가지 싹들이 농업에서, 공업에서, 상업에서 발생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농업에서 발생한 싹에 대해 좀더 부연하면 농민들이 자본가적 부농과 노동자적 빈농으로 분해되고 있었음이 가장 중요한 논거로 제시되었다. 19세기가 되면 이러한 자본주의의 싹들은 사회?정치의 구조를 근대적으로 개혁하려는 힘으로까지 성장하였다. 민란과 동학농민혁명이 밑으로부터 제기된 근대적 개혁의 요구라면, 그에 대응하여 지배계급이 부세수취제도와 관련하여 취한 개량주의적 정책은 위로부터의 근대적 개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같은 위?아래로부터의 자주적 개혁은 일제의 침략에 의해 좌절되었으며, 이후 조선의 근대화는 일제에 의해 비정상적인 형태로 왜곡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상이 이른바 맹아론의 주요 내용인데, 지금 필자와 논쟁하고 있는 최윤오 교수의 입장도 대체로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0년간 필자는 이러한 맹아론에 대해 일관되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여 왔다. 가장 중요한 실증적 논거는 자본주의적 공업의 초기형태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초기형태라 함은 상인들이 농민들의 가내공업을 대상으로 도구와 원료를 임대하고 공산품을 제작하게 한 다음, 일정한 가공임료를 지불하고서 제품을 회수하는 관계를 말한다. 이를 보통 선대제라고 하는데, 서유럽의 역사를 보면 이러한 선대제 형태를 한참 경과하다가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본격적인 자본주의적 형태로서 공장제 생산이 성립하였다. 그런데 18~19세기 조선 농촌사회를 아무리 훑어보아도 선대제나 그와 유사한 공업형태가 상인들에 의해 조직된 적이 없었다. 이처럼 맹아론은 그의 가장 중요한 핵이 실증되지도 않은채 널리 주장되었던 셈이다.

농촌사회가 자본가적 부농과 노동자적 빈농으로 분해되고 있었다는 주장도 실증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를 보통 양극분해설이라고 하는데, 최초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성립시킨 영국의 농업에서 그러한 양극분해가 전형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양극분해가 증명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범위의 경지에서 적어도 2~3세대의 장기간에 걸쳐 농민들의 경작규모의 차이가 위 아래로 확대되고 있음이 밝혀져야 한다. 그렇지만 당초 양극분해설을 주장한 연구자가 제시한 증거를 보면, 어느 특정 연도에 한하는 정태적인 자료 뿐이었다. 원래 그러한 자료에서 동태적인 양극분해설은 주장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필자는 동태적인 시계열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하였으며, 19세기말까지의 것으로서 대략 30여 사례를 모을 수 있었다. 분석 결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농민들의 경작규모는 양극으로 분해되기는커녕, 위 아래가 수렴하는 평균화 경향에 있었다. 이어 20세기전반 식민지기의 농촌사회를 보니 역시 그러하였고, 나아가서는 1950년대까지도 그러하였다.

돌이켜 보면, 맹아론은 농업의 발전방향을 규정한 생태적 조건의 차이를 무시하고 서유럽의 한전농업과 아시아의 수전농업이 동일한 방향과 형태로 발전할 것이라는 단순한 전제에 입각하였다. 그렇지만 저기서는 경지면적을 확대하는 것이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유력한 수단이지만, 여기서는 보다 적은 경지면적에 면밀하고 반복적인 제초노동을 행하는 것이 생산성을 높이는 첩경이었다. 명청시대의 중국이나 근세 일본의 농업 발전을 보아도 그 점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위와 같이 농민들의 경작규모가 하향 평준화하였던 것이다. 소농계층은 해체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전하고 있었다. 한국의 농업에서 서유럽처럼 경지면적의 확대가 생산성의 상승을 동반하기 시작하는 것은 제초제가 보급되어 고된 김매기 노동으로부터 농민들이 해방되기 시작한 극히 최근의 일이다.

이 같은 맹아론에 대한 비판은 필자만이 아니었다. 국내외의 많은 연구자들이 맹아론의 실증적 근거에 회의를 표명하였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에커트 교수는 한국의 민족주의적 역사학자들이 부질없이 오렌지밭에서 사과를 찾고 있다고까지 신랄하게 꼬집었다. 이들 비판이 모두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당초 제기된 맹아론 그대로는 더 이상 곤란함이 어느 정도 명확해진 것만은 사실이며, 그에 관한 학계 일반의 공감도 어느 정도 성립해 있다고 봄이 필자의 관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 교수에 의해 당초 제기된 그대로의 맹아론이 완고하게 계승되고 있음은 결국 최 교수와 필자의 입장 차이가 역사적 사실인식의 수준을 넘어 전술한 바와 같은 역사관의 근본적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저어기 생각이 미치는 것이다.


맹아론의 대안으로서 새로운 역사상을 건설적으로 모색하기 위해서는, 새 포도주는 새 푸대에 담아야 하듯이, 새로운 사고틀로서 새로운 역사관이 필요하다. 몇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것 가운데 첫째는, 역사는 반드시 일국사적으로만 발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솔직히 말해 일국사적인 폐쇄된 공간에서는 역사가 정체하기 쉽고 나아가 실패하기 마련이다. 오늘날의 북한이 더 없이 좋은 실례가 아닌가. 역사는 개방적인 국제환경에서 다양한 문화와 사상의 조류가 자유롭게 넘나드는 가운데, 외래 문물과 전통의 접합으로서 발전할 뿐이다. 그런 취지로 필자는 역사의 발전이란 생물학적으로 이종교배라는 표현을 즐겨 쓴다. 한국사도 크게 보면 몇 차례 국제환경이 개방적이거나 외부로부터의 강한 충격이 가해진 시기에 큰 발전을 이루었다. 지난 20세기전반 일제와 미군정의 지배 하에 있었던 시기도 그러한 관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둘째, 역사는 성공과 실패가 되풀이되는 드라마라는 점이다. 실패의 쓰라린 고통은 성공을 위한 귀중한 교훈을 선물하며, 성공의 달콤함은 인간들을 교만하게 만들어 실패로 이어지는 선택을 유도한다. 필자가 보기에 17세후반부터 18세기까지의 조선왕조는 번영과 성공의 역사였다. 그렇지만 19세기의 조선왕조는 너무 관념적이고 폐쇄적인 이데올로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 실패의 역사를 일본인들이 지적하였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강변할 필요가 조금도 없다. 긴 역사에서 35년에 불과한 짧디짧은 기간의 식민지 경험에 너무 강박되어 역사가의 자유로운 의식과 사고가 제약될 필요는 없다. 오늘날 한국자본주의의 번영과 민주주의의 성숙을 두고 세상의 어느 역사학자가 이 민족이 천성적으로 열등한 민족이라는 잠꼬대같은 소리를 하겠는가.

셋째, 앞서 한 이야기의 반복이지만, 목적론적이고 도덕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부터 해방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고방식과 역사의 발전은 한 가지 근본 요인에 의한다는 근본주의적 사고방식과는 보통 밀접한 연관성을 보인다. 역사의 발전 동력은 흔히들 그렇게 생각하듯이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다. 정치도,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무엇보다 전술한대로 개방적인 국제환경이 중요하며, 그와 관련해서는 그것을 선택하는 정치적 리더쉽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그렇게 역사는 다양한 층위의 다양한 요인들의 상호작용으로 발전한다. 요컨대 근본주의 대신에 다원주의를, 도덕주의 대신에 기능주의를 새로운 역사관의 틀로서 권장하고 싶다. 필자가 보기에 최 교수는 너무 근본주의적이다. 예컨대 최 교수는 해방 후 남북 분단의 비극까지도 맹아론이란 틀의 사정권에 넣어 설명코자 한다. 그렇지만 역사학에 있어서 그러한 만능이론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넷째, 한국만큼 인종적으로 동질적인 다른 나라를 찾기 힘들어 참으로 넘기 힘든 장벽이겠지만, 민족주의의 굴레를 벗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역사의 발전에 필수적인 개방적 국제환경과 다원적이며 기능주의적인 이데올로기도 민족주의로부터 자유로울 때 비로소 확보할 수 있는 역사의 혜택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의 골품 신분제가 싫어 당나라로 건너간 사람이 있다. 오늘날도 대한민국이 싫으면 다른 나라로 이민갈 수 있는 법이며, 그런 사람을 욕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민족이란 것 자체는 근대 국민국가가 그의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기획한 정치적 상징일 뿐이다. 15~19세기 조선왕조의 온 백성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통합되어 있었다는 생각만큼 비역사적인 유치한 발상도 없을 터이다.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들이 추구해야 할 기본 과제는 이 땅에 사는 주민들 상호간에 자유롭고 공정한 시민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이다. 민족통일을 현대 역사학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 대해 필자는 도저히 찬성할 수 없다. 민족통일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북한의 마성적인 수령체제가 해체된 다음, 이 땅의 주민들이 정치적으로 취할 수 있는 여러 선택지의 하나일 뿐이다. 진정한 통일에 요구되는 이러한 선후관계에 혼란이 발생한다면, 그로 인한 역사의 실패와 희생은 이루다 형용할 수 없을 터이다.     


맹아론의 대안으로서 18세기부터 1950년대까지의 근세 한국을 소농사회라는 새로운 역사상으로 바라보자는 필자의 제안은 이상과 같은 새로운 틀에 입각하고 있다. 1950년대까지 인구의 대다수는 자급자족경제가 우세한 농촌에서 소규모 가족단위의 농업체인 소농으로 존재하였다. 소농이 구성원의 다수를 이루는 사회를 소농사회라고 이름할 수 있다. 농민들의 가족은 부모와 큰아들 부부가 동거하는 직계가족이 표준적인 형태를 이루었다. 조금 전에 필자는 역사란 외래 문물과 전통의 접합으로서 발전한다고 말하였는데, 바로 그 전통의 핵심적 내용을 소농사회라고 요약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토착 전래의 소농사회와 20세기에 바깥세상에서 들어온 자본주의가 결혼함으로써 오늘날의 한국자본주의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간단하지 않다. 첫째, 오늘날 지구상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영위하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 자본주의는 그들 고유의 전통과 세계자본주의가 접합함으로써 성립하였다. 그렇게 접합 과정을 거치지 않은 순수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를 최초로 자생적으로 성립시킨 영국이나 그에 해당할까,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접합을 이룰만한 능력이 없는 민족과 지역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성립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도 적당한 수분, 온도, 자양분이 갖추어진 토양이 아니고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원리이다. 자본주의가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사회적 조건이 불가결하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두 가지를 꼽으라면, 우선 사람들 하나하나가 경제의지, 말하자면 자립과 효율을 추구하는 지적 능력으로 훈련되어 있을 것, 다음 사유재산제도가 성립해 있을 것을 들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이들을 종합하여 사회적 능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한 사회적 능력을 갖추지 않은 나라에서 자본주의는 아무리해도 성립하기 힘들다.

그러니까 18세기이후 1950년대까지의 한국 전통사회에 그러한 사회적 능력이 풍부히 축적되어 있었기에 오늘날의 번영하는 한국자본주의가 성립할 수 있었다는 것이 필자가 이야기하고 싶은 소농사회론의 핵심적 내용이다. 그까짓 소농이 무슨 대수냐, 그것은 아득한 옛날 원시공동체가 해체된 뒤로 줄곧 있어온 것이 아니냐, 그리고 무슨 경제의지니 사유재산제도니 하는 것도 보통의 문명사회에서 늘상 찾아 볼 수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가지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결코 그렇지 않음을 힘주어 이야기하고 싶다.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직계가족 형태의 소농이 성립한 지역을 꼽으라면 서유럽에서 남부프랑스, 독일, 네델란드, 스웨덴,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한국과 일본 정도가 고작이다. 나머지 대부분의 구문명권으로서 중국, 인도, 러시아 등은 훨씬 규모가 큰 공동체가족이 지배적 형태였다. 거기서는 개인의 자립도와 경제의지의 수준이 떨어진다. 직계가족의 가장 두드러진 경쟁력은 우수한 상속자를 확보하기 위한 아버지의 노력이 자식교육에 대한 맹렬한 수요로 나타남으로써 대중의 지적능력이 세계적 수준에 달한다는 점이다. 20세기 식민지기에 대중교육기관이 보급되기 시작하자, 특히 3?1운동 이후의 민족적 자각과 함께, 교육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폭팔하였다. 남자의 경우 1940년대에 이르면 취학희망율이 70%를 넘어섰으며, 시설이 부족하여 일부 학생은 입학도 못할 지경이었다. 해방 이후 국민의 의식수준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은 학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대답이 압도적이었다. 그렇게 해서 소 팔고 논 팔아 대학에 다니는,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진풍경이 벌어지게 된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이다. 1996년 OECD가 발표한 한 통계에 의하면, 교육경력 7~8년생을 대상으로 한 수학능력시험에서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톱을 차지하였다. 비록 범용성의 표준화된 지식이라 경제성은 그리 크지 않지만, 그래도 그만한 국민적 범위의 지적 능력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세계시장에서 11위 전후의 교역규모를 갖는 한국경제는 처음부터 기대하기 힘들었을 터이다.

바로 그러한 경제인류학적 능력을 갖춘 직계가족이 한국사에서 일반적으로 성립하는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 약 천년의 오랜 기간은 공동체가족이 가족의 기본형태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15세기에 이르러 유교적 질서의 국가체제가 성립한 이래, 차츰 가족제와  친족제 수준의 사회조직마저 유교적으로 변형되기 시작하여 17세기후반이 되면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부계 종법의 가족과 친족집단이 성립하게 되었다. 그렇게 보면 현대한국의 직접적인 문명사적 배경은, 흔히 유구한 반만년이라고 하지만, 실제론 3~4세기 정도가 고작인 셈이다. 바로 그 문명사적 전환 가운데서 20세기후반 한국자본주의의 고도성장을 가능케 한 문명능력의 소농사회가 무르익었다. 

한 시대를 조망하는 역사상이 한 개인의 힘만으로 구축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문제의식에 공감하거나 비판적인 연구자간의 생산적인 토론의 장을 거쳐서야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 과정에서 필자의 문제제기가 산산조각이 나서 무참히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오히려 그렇게라도 될 수 있다면야, 생산적인 토론의 장을 조직했다는 보람 하나만으로도 만족하리라. 그런 이유로 우선 필자와 토론을 시작한 최윤오 교수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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