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왜 그렇게 매사에 쉽게 흥분합니까”
1941년 10월 일본 오사카(大阪)시 출생. 64년 교토(京都)대학 경제학부 졸업. 같은 해 교도(共同)통신 입사. 80년 한국특파원 겸 서울지국장. 88년 이후 지금까지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한국인 당신은 누구인가” “한국인은 한국인이다” “좋은 한국인 나쁜 한국인” “판문점의 벽은 무너질까” 등 한국 관련 서적 다수 집필, 93년 한·일간의 가교(架橋)적 보도 공로로 외신기자들에게 주는 권위있는 국제언론상인 ‘본─ 우에다상’수상….
우리 나이로 올해 예순살. 구로다 가쓰히로 “산케이(産經)신문” 서울지국장(이하 구로다 국장)은 일본인 가운데 몇손가락 안에 들 만큼 대표적 지한파(知韓派)로 꼽히는 인사다. 언론사를 가릴 것 없이 일본에서 신임 특파원이 부임해 오면 누구보다 먼저 찾아와 인사를 ‘드린다’고 할 만큼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그의 위상은 높다.
한국 땅에서의 꼬박 20년 동안 그는 숱한 글을 쓰고 말을 토해 내면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윤활(潤滑)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일해 왔다. 기자의 보직 중에서도 꽤 선망되는 해외 특파원인 데다 한국에서만 20년이라는 연륜이 보태져 그만큼 발도 넓다. 한국의 정경사문(政經社文) 각계에서 백발 성성한 그 얼굴과 이름이 두루 통한다.
구로다 국장은 만37세 들어가는 기자로서는 한참 올려다봐야 하는 언론계 대선배다. 후배 기자가 그런 대선배를 소개하는 기사를 쓸 경우 십중팔구 좋은 얘기만, 그러니까 언론계 속어로 ‘빨아주기’ 십상이다. 밖에서 보면 ‘지들끼리 다 해먹는다’는 소리가 나올 수 있다. 그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구로다 국장을 ‘탐험’하기로 한 것은 위상이나 역할 그리고 지명도에 비해 정작 그에 관한 사실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착안됐다.
기자라는 직업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병아리 시절부터 줄곧 ‘야 임마, 니 얘기는 빼고 사실만 정확하게 전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으면서 자란다는 점이다. 사실은 기사에 이름 석자 박히는 것 말고는 자기 얘기, 자기 소개를 할 기회가 세상의 어떤 직업보다 적다. 다른 사람들 얘기를 또 다른 사람들에게 노상 전하기만 하다 청춘이 가기 일쑤다. 구로다 국장 역시 지금까지 그런 류(類)였다.
한국과 일본의 대충 중간지점에 서 있으면서, 양국간 어떤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 이름이 어김없이 등장하는 환갑(還甲)의 현장기자, 구로다 국장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나아가 그는 한·일간의 굵직굵직한 갈등의 이슈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째째한 잣대라고 할지 몰라도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중 어느 쪽을 더 편드는가’를 기준으로 우리가 ‘일본인의 종류’를 가른다면 그것은 반드시 다음 4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일본 편, 한국 편, 둘 다 편 그리고 DK그룹(D’ont Know, 모르겠다, 혹은 아무렴 어떠랴)이다. 구로다 국장은 이 가운데 어디쯤 속할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일본을 ‘우호’하는 입장이고, 일본에 대해서는 한국을 ‘우호’하는 입장이죠. 어떤 일에 대해 양국간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어느 한쪽 입장을 편들지 않고 실제(實際)를 그대로 전달하고 이해시키려고 애씁니다.”
어떤 특파원이 말해도 별 차이가 없을 지극히 표준화된 얘기다. 그것이 두 나라 사이의 중간지점에 선 특파원들의 ‘오랜 생존의 제1조건’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구로다 국장 주변에서는 그를 딱히 친한파라거나 혐한파(嫌韓派)로 가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것보다 ‘한국을 잘 아는 사람’이라는, 좀 차갑게 들리는 ‘지한파’라는 말을 붙인다. 그러나 그가 한국을 알기 위해, 그야말로 ‘지한파’가 되기 위해 일찍부터 들여온 남다른 정성을 보면 한국인들이 그를 아주 ‘친하게’느낄 만한 구석들이 있다.
구로다 국장이 한국을 처음 ‘목격’한 것은 지난 1971년. 교도(共同)통신 사회부 동료기자와 함께 관광차 한국을 찾았을 때였다. 며칠 동안 한국에 머무르면서 그는 이전까지 한국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과 정반대(?)되는 인상을 받았다.
■ 知名度에 비해 덜 알려진 사람
“군사정권, 김대중씨 납치사건, 쇠약한 경제, 일본인을 보면 돌을 던진다는 등 한국에 대해서는 아주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소위 제3세계의 후진국 가운데 하나로, 아주 어둡고 음울하고 숨막히는 나라로 알고 있었어요. 한마디로 ‘어둠의 나라’였죠.
그런데 한국에 와서 며칠 돌아다니고, 사람들을 만나고 하면서 보니 그게 아니더란 말이죠. 사람들이 그렇게 활기차고 밝고 인상들이 좋아요. 내가 일본 사람이라고 해도 돌을 던지거나 달려와 멱살을 잡는 게 아니라 다들 웃으면서 반갑게 맞아주고요. 아하, 이게 사실과 이미지의 차이로구나 하고 깊게 생각하게 됐죠.”
당시만 해도 한국은 일본인들에게 ‘주목할 만한 외국’이 아니었다. 후진국, 오지 정도로 여겨졌다. 일본내 공식 외국어가 영어·중국어·불어·러시아어 같은 것이었던 데 비해 한국어는 특수지역 언어로 분류돼 있을 정도였다. 언론사에서 한국을 담당한 부서도 외신부가 아니라, 사회부나 간혹 정치부였다. 한국에 대한 취재원이 주로 재일 한국인 교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외국 통신사로부터 한국에 대한 정보를 전해 듣는 경우도 있었지만 주된 취재원은 역시 재일교포들이었다.
사정이 그러했으니 구로다 기자가 한국에 대해 ‘어둠의 나라’라고 생각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일본의 주요 언론사 기자가 그러했으니 일반인들이야 어땠을까. 그런데 구로다 자신이 한국에 와서 직접 ‘현장’을 보니 딴판이더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현장을 직접 보지 못하고 중간(재일교포)을 통해 알게 되는 데서 오해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을 잘 알기 위해서는 한국을 직접 겪어야 한다. 문제는 언어다. 언어가 안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한국은 발전 가능한 나라이고 이웃나라다. 이제부터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해 두면 나중에 독자적인 영역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런 생각이 현실로 구체화된 것은 그가 30대 후반의 고참 기자가 된 1978년.
“아직 그때까지 회사(교도통신)에 어학연수 프로그램 같은 게 없었거든요. 그런데 내가 강력하게 기자들의 어학연수, 해외연수를 건의했어요. 특히 앞으로 성장하게 될 중동지역이나 한국같은 특수지역 언어 연수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죠. 사실은 내가 한국에서 공부하고 싶어서 그랬던 것인데(웃음), 어쨌든 그게 받아들여졌어요. 어학연수 제도가 생기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한국어 연수 신청을 냈습니다. 연수를 신청할 때 벌써 한국행 수속까지 다 밟아둔 상태였으니 정말 성급했죠.”
장기간 해외에 나갈 때 대개의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떠나게 마련이다. 당시 구로다 기자 역시 아내와 두 딸을 거느린 가장(家長)이었다. 그러나 그는 1년짜리 어학연수를 떠나면서 혼자 비행기를 탔다. 어학을 공부하는 데 가족은 큰 장애(?)가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저의 아주 이기주의적인 생각에서 그렇게 된 것인데, 이 나라 이 민족 이 사회를 배운다고 할 경우 가족들이 있으면 절반밖에 못해요. 하루 중 절반을 식구들과 지내면 일본식으로 생활해야죠, 일본어를 써야죠, 그러니 제대로 안돼요. 24시간 한국을 아는 일과 싸우고 싶은데, 그만큼 시간이 낭비되는 것이죠. 특히 외국에 어학연수를 갈 때는 식구들이 있으면 절대로 안되죠. 언어를 못 배워요. 식구들에게 미안하지만 그들이 희생해 준 것이죠. 지금 젊은 기자들은 좀 달라지기는 했지만 적어도 우리 세대 때는 그런 의식이 일반적이었어요.”
그 결심은 그로부터 2년 뒤인 80년 한국 특파원으로 발령받은 이후 지금까지도 독하게 지키고 있다. 20년 동안 그는 한달에 한차례 정도 일본의 집에 다녀오는 것 말고는 줄곧 혼자(한국에서 파출부도 없이) 생활해 왔다. 부인(黑田洋子)과 대학생인 둘째딸은 현재 일본에 거주하고 큰딸은 대만으로 건너가 일하고 있다. 구로다씨는 20여년 전 어학연수 시절 머물렀던 서울 신촌의 바로 그 동네를 다시 찾아들어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