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臆斷(억단)과 獨善(독선)의 식민지수탈론

이강기 2015. 9. 19. 16:32

[서평] 臆斷(억단)과 獨善(독선)의 식민지수탈론

 


『일제 식민지정책과 식민지근대화론 비판』, 신용하, 문학과 지성사, 2006

[李榮薰(이영훈) | 서울대학교 교수, 경제학]

 

신용하 교수가 지난 6월에 출간한 『일제 식민지정책과 식민지근대화론 비판』에 대한 서평을 『시대정신』의 편집부로부터 주문받고서 거절하지 못한 것은, 내가 지난 1993년과 1997년에 신 교수를 심하게 비판한 적이 있어 미안한 마음이 있고, 또 그 비판에 대해 그간 침묵해온 신 교수가 이번에 출간한 책에서 혹 어떤 대응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궁금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내가 10년 전에 행한 신 교수에 대한 비판을 잘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우선 그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다. 해방 후 한국인들이 한국인으로서 아이덴티티를 확인하고 주체성을 확립함에 있어서 반일 민족주의가 얼마나 큰 역할을 수행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새삼 지적하기도 싱거울 정도이다. 그 반일 민족주의의 핵심 내용은 일제가 식민지기에 우리 민족을 그야말로 야만적으로 수탈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수탈 담론은 해방 후부터 정치인이든 연구자든 여러 사람들에 의해 심심치 않게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중ㆍ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수탈 담론이 명확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60년대부터라고 생각된다. 1962년 역사교육연구회라는 단체가 저술한 국사교과서에 일제가 조선 농민의 토지를 절반이나 빼앗았다는 내용의 기술이 처음 나타났다. 뒤이어 1967년에는 민영규와 정형우가 지은 국사교과서에서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국토의 40%를 수탈하였다는 기술이 나타났다. 이러한 1960년대의 경과에 관해서는 『시대정신』 28호(2005)에 실린 나의 「국사교과서에 그려진 일제의 수탈상과 그 신화성」이란 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1920년대까지 한반도 연안부의 저습지와 未墾地(미간지)를 중심으로 일본인들의 토지 투자가 있었다. 그들은 헐값으로 대량의 미간지를 매수한 다음, 제방을 쌓고 저수지를 파고 수로를 뚫고 농법을 개량하여 미간지를 비옥한 논으로 개간하였다. 그렇게 생겨난 일본인의 농장이 남한의 경우 전체 농경지의 10%를 차지하였다. 거기서 생산된 쌀은 모두 일본으로 移出(이출)되었다. 일본인 농장은 식민지기 조선 농촌사회의 기본 구조를 이룬 식민지 지주제의 첨병이자 상징이었다.

실체가 이러했던 일본인의 조선 농촌으로의 진출을 두고 위와 같이 1960년대의 교과서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전 토지의 40~50%를 빼앗았다는 식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수탈 담론의 중대한 약점은 누구도 40% 또는 50%라는 수치를 증명한 적도 없고, 수탈의 과정이나 양상을 구체적으로 밝힌 적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입소문과 같았다. 누군가 최초로 일제가 토지를 수탈하였다고 속삭이자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거치는 과정에서 솜사탕처럼 부풀려진 것이 40~50% 수탈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40~50% 수탈설이 지금까지 40년을 넘도록 국사교과서의 서술로 면면히 이어져 오면서 국민적 기억으로 확고히 자리 잡는 데는 신용하 교수의 공로가 컸다. 신 교수가 토지조사사업(이하 ‘사업’으로 약칭)에 관한 연구를 시작한 것은 1977년이다. 이후 1979년에 신 교수는 3~4편의 논문을 모아 『조선토지조사사업연구』(지식산업사)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사업’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연구서라는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 신 교수는 이 책에서 총독부가 편찬한 ‘사업’에 관한 보고서를 비롯한 여러 자료를 활용하여 일제가 ‘사업’을 시행한 목적이 토지에 대한 농민의 소유권ㆍ경작권ㆍ개간권 등 일체의 권리를 부정하고 수탈하기 위함에 다름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권리를 부정당한 농민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총독부는 무장조사단을 결성하였다. 그 무장조사단의 강압적인 측량과정을 신 교수는 “한 손에는 피스톨을 다른 한 손에는 측량기를 들고”라고 문학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1982년 경상도 김해군에서 ‘사업’ 당시의 토지신고서를 비롯한 원자료들이 대량 발견되었다. 1985년부터는 그 자료를 이용한 새로운 연구 성과가 배영순과 조석곤에 의해 발표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조석곤은 ‘사업’ 당시에 국유지인가 민유지인가를 둘러싼 소유권 분쟁에 있어서 상당한 양의 토지가 민유지로 판정 받았음을 구체적인 자료를 통해 명확히 하였다. 신 교수의 주장처럼 일체의 분쟁이 피스톨을 든 무장조사단에 의해 강제적으로 진압된 그러한 야만적 상황은 아니었다.

이후 1992년 나는 ‘사업’ 당시의 총독부 官報(관보)를 검토하다가 1911년 3월, 곧 ‘사업’의 초기에 총독부가 국유지로 조사된 토지 가운데 민유지가 혼입된 것을 원소유자에게 돌려주라고 도장관에 명령을 내리는 기사를 발견하였다. 나는 이를 단서로 1910~1918년에 걸쳐 국유지의 면적이 연도별, 도별, 지목별로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추적해 보았다. 국유지는 1910년 9월에 11만 8천여 정보, 1918년 12월에 12만 7천여 정보였다. 이 두 수치에 근거하여 신 교수는 ‘사업’ 기간에 발생한 소유권 분쟁이 일체 억압된 것으로 보았다. 수많은 분쟁이 일어났음에도 국유지의 면적이 오히려 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와 같이 국유지의 면적을 세밀히 추적한 결과, 同 8년간 놀랍게도 9만 9천여 정보의 국유지가 추가로 조사되고 9만 1천여 정보의 국유지가 민유지로 돌려졌음을 발견하였다. 이에서 명확하듯이 일체의 분쟁이 억압되고 말았다는 신 교수의 주장은 국유지의 면적이 연도별, 도별, 지목별로 어떻게 변하고 있었는지에 관한 그야말로 기초적인 演算(연산) 작업조차 행하지 않은 가운데 제출된 臆斷(억단)에 불과하였다. 나는 그러한 취지로 신 교수를 비판하는 논문을 1993년 『역사비평』22호에 「토지조사사업의 수탈성 재검토」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이어 1997년 김홍식 교수를 대표로 한 ‘사업’에 관한 공동연구서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연구』(민음사)가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우리는 ‘사업’의 구체적인 실태에 대한 실증적 이해를 심화시킴과 동시에 조선시대 토지제도와의 관련성에서 ‘사업’이 지닌 연속적이면서도 단절적인 역사적 의의를 추구하였다. 이후 지금까지 ‘사업’에 관해서는 별다른 논문이나 연구서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자화자찬일지 모르나 위 책은 ‘사업’에 관한 현재의 연구수준을 대변하고 있다.

이 책에서 신 교수는 다시 한 번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신 교수가 피스톨과 측량기를 든 무장조사단이 민유지를 국유지로 약탈했다면서 애써 제시한 여러 사례는 ‘사업’의 보고서에 소개된 분쟁을 제멋대로 각색한 것에 불과하다는 취지의 비판이었다. 예컨대 ‘사업’의 보고서는 구황실의 內需司(내수사) 장토에서 343건의 분쟁이 발생하였는데, 민유의 주장은 어떻고, 국유의 주장은 어떻다는 식으로, 1918년 말 당시까지도 진행 중인 분쟁의 내용을 객관적으로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신 교수는 그 343건의 분쟁지가 모두 국유지로 강제 편입되었다고 단언하였다. 그러면서 세력 없는 농민들이 총독부의 무단정치에 맞서 민유임을 주장했기 때문에, 그 주장은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라고 해설하였다. 그렇지만 아무리 세력 없는 사람들의 주장이더라도 그것은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그 점을 전제하지 않으면 역사학자가 굳이 먼지 묻은 자료를 뒤지며 실증 작업에 몰두할 이유가 처음부터 없다고 하겠다.

그런데 김해에서 발견된 ‘사업’의 원자료를 통해 김해의 내수사 장토를 둘러싼 분쟁에서 민유임을 주장한 사람들의 면모를 확인하면, 당시 김해에서 최대의 지주인 許發(허발) 진사를 비롯하여 1904년 이후 이곳에 들어와 토지를 매수한 일본인 등의 대지주들이 수두룩하였다. 그들은 결코 세력 없는 농민들이 아니었고, 오히려 농촌사회의 지배계층으로서 일제의 협력자라 불릴 만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현장 수준으로 내려가 분쟁의 실태를 확인하면, 사례마다 복잡 다양한 가운데, 세력 없는 농민의 토지가 무장조사단에 의해 강탈되었음과는 실로 무관한 복잡한 이해관계의 충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점을 연구실에서 상상의 날개를 펼친 신 교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 신 교수의 ‘사업’에 관한 연구는 거의 소설과 같은 수준이었다. 그렇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1997년의 위의 책에서 나는 그러한 취지로 신 교수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한 연구자에게 가해질 수 있는 비판으로서는 더 이상의 다른 예를 찾기 힘들 정도로 통렬한 것이었다.

그러한 민망함이 있었기에, 앞서 이야기한 대로, 나는 신 교수의 최근작 『일제 식민지정책과 식민지근대화론 비판』에 대한 서평 부탁을 사양하지 못했다. 이 책에서 ‘사업’에 관한 부분은 제7장 「일제의 ‘토지조사사업’ 실시와 토지약탈 및 농촌 사회경제의 변화」이다. 나는 당연히 그 章을 먼저 읽었는데,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참으로 크게 실망하였다. 신 교수가 ‘사업’에 관해 지금까지 주장해온 것들이 거의 그대로 옮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전의 그 유명한 著作(저작)으로도 충분할 터인데, 무엇 때문에 100쪽에 가까운 지면을 낭비해 가며 위와 같은 제목의 글을 새로 쓴 것인지가 잘 납득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가 ‘사업’에 관한 기존의 論著(논저)들을 나열 소개하고 있는 대목(동서, 182쪽)에서 앞서 언급한 1997년 출간의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연구」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한 ‘사업’에 관한 연구서라면 1991년 일본에서 나온 미야지마 히로시(宮嶋博史) 교수의 『朝鮮土地調査事業史の硏究』(동경대학 동양문화연구소)를 빼놓을 수 없는데, 그 책 역시 빠져 있다. 다시 말해 신 교수는 ‘사업’에 관한 1990년대 이후의 연구 성과를 무시하고 있으며, 그런 식으로 그간 자신에게 제기된 일체의 비판에 귀를 막고 있다.

이제 독자들에게 내가 왜 이 글을 통상의 서평 형식으로 쓰고 있지 않은 지 양해를 구할 차례이다. 통상의 서평이라면 먼저 책의 구성과 내용을 압축적으로 소개한 다음, 그것의 의의를 평가해 주고, 연후에 評者의 의문을 조심스럽게 제기하는 순서로 쓰인다. 그런데 나는 신 교수의 위 책에 대해 그런 통상의 형식으로 예의 바르게 비평할 별다른 유인을 발견하지 못한다. 연구자는 자신의 학설에 가해진 비판에 성실히 답변할 의무가 있다. 비판이 틀렸음을 논박하거나, 약간의 과오가 있지만 나의 학설은 여전히 타당하다거나, 아니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이러저러한 문제가 남아 있다든가 등으로 대응해야 함이 연구자가 취할 마땅한 자세이자 직업윤리이다. 아니면 끝까지 침묵함으로써 더 이상의 혼란을 야기하지 않는 최소한의 미덕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신 교수는 이상의 어느 것도 아니다. 내가 그의 최근작에 대해 통상의 서평을 포기한 이유가 이와 같음에 대해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부탁드린다.

남은 지면을 활용하여 신 교수가 최근작에서 제기한 총독부가 국토의 50.4%를 수탈하였다는 주장이(21, 271쪽) 안고 있는 문제점을 간략하게 지적해 둔다. 이 주장은 신 교수의 이전 저작에는 없던 것이다. 신 교수의 새로운 주장은 일제가 임야조사사업을 통해 518만여 정보에 달하는 대량의 민유림을 국유림으로 수탈하였음을 주요 근거로 삼고 있다. 우선 신 교수 자신과 국사교과서가 지난 40년간 일제의 토지 수탈을 이야기해옴에 있어서 그 중심 대상은 임야가 아니라 농경지였음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논의의 대상을 슬그머니 임야로 옮기는 것은 옳지 않다.

일제가 ‘사업’을 통해 파악한 전국의 농경지는 487만 정보이다. 그 가운데 국유지는 1918년 말 현재 12만 7천여 정보이다. 이 2.6%의 국유지는 앞서 설명한대로 무장조사단에 의해 강탈된 것이 아니다. 그것조차 1924년까지 연고 소작농에게 법정 地價(지가)로 불하되어 이후 국유 농지는 사실상 소멸하였다. 신 교수는 이 토지들이 동양척식주식회사나 일본 이민에 불하되었다는 지난 40년간의 교과서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으나, 믿을 만한 사례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전체 농지의 97.4%가 되는 민유 농지에서 무장조사단의 약탈상에 관한 신 교수의 설명은 궁색하기 짝이 없다. 신 교수의 설명대로 민유지 총 1,910만여 필지 가운데 99.5%가 소유자가 신고한 대로 소유권이 사정되었다. 그렇게 무장조사단이 설칠 여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신 교수는 전국적으로 9,355필지(0.05%)의 無신고지가 발생하여 국유지로 편입되었음을 수탈의 표본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때보다 소유권 의식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전국의 토지를 신고하게 하면 분묘지나 잡종지를 중심으로 그 정도의 無신고지는 발생하기 마련이므로 처음부터 논리가 서는 주장이 아니었다.

신 교수가 이러한 窮迫(궁박)한 모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새롭게 개발한 논리가 바로 임야조사사업을 통한 민유림 518만여 정보의 수탈이다. 또한 지난 40년간 국사교과서의 권위를 빌려 국민적 기억으로 자리 잡은 농지 40% 수탈설이 심각한 비판에 직면하자, 그 수탈설의 성립에 가장 공헌이 컸던 신 교수가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임야를 포함한 국토의 50.4% 수탈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새로운 수탈설은 과연 성립하는 것인가.

1908년의 삼림법 제정, 1911년의 삼림령 공포, 1917~1924년의 임야조사사업의 실시를 경과하면서 한반도의 임야제도가 舊來(구래)의 무주공산 체제에서 근대적인 소유제도로 이행하였음은 이에 관한 기존의 연구가 대체로 수긍하는 바이다. 그 과정에서 창출된 국유림과 민유림은 1927년 현재 총 1,616만여 정보 가운데 각각 955만여 정보와 661만여 정보이다. 다시 국유림은 ‘연고자 없는 임야’ 618만여 정보와 ‘연고자 있는 임야’ 337만여 정보로 나뉜다. 후자의 ‘연고자 있는 임야’는 연고자가 소유권을 입증할 객관적 근거가 부족하여 국유림으로 편입된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의 국유림을 신 교수는 수탈의 근거로 중시하고 있다.

그런데 신 교수는 여기까지만 주목하였다. 이후 식민지 말기까지 이 연고 국유림을 중심으로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에 관해 신 교수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신 교수도 지적하고 있듯이 총독부는 국유림을 일정한 조림 실적을 거둔 사람에게 불하하는 造林貸付制度(조림대부제도)를 실시하였다. 총독부의 산림정책은 당시 너무나 황폐한 산지를 푸르게 만들기 위한 綠化主義(녹화주의)를 기본으로 하였으며, 조림대부제도는 그에 부응한 국유림의 관리 정책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최근에 나온 이우연의 박사학위논문 『조선시대-식민지기 산림소유제도와 林相(임상)변화에 관한 연구』(성균관대학교, 2005)를 유익하게 참조할 수 있다. 이 제도에 따라 대량의 국유림이 민유림으로 불하되었다. 그에 따라 1934년 현재 국유림은 남부지방에서 44만여 정보(8.0%)의 작은 비중에 불과하였고, 강원도와 함경도 등의 북부지방에서는 530만여 정보로서 여전히 적지 않은 48.8%의 비중을 점하였다. 조림대부의 민족별 실적을 보면, 총 건수 8만 건에서 조선인이 97.1%의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였는데, 면적에서는 일본인의 단위 조림면적이 커서 조선인의 비중은 52.9%에 그쳤다.

요컨대 총독부가 조선인의 민유림을 대량으로 수탈하였다는 신 교수의 주장은 총독부 산림정책의 기본 지향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가운데 조림 실적에 따라 다수의 연고 국유림을 민유림으로 불하한 임야조사사업 이후의 산림정책의 실태에 대한 하등의 검토 없이 성급히 제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조선시대의 무주공산 체제하에서 사실상 사유림으로 성장해 온 농민들의 임야에 대한 권리는 총독부의 단계적 정책과 농민 스스로의 주체적인 대응, 곧 조림을 통해 오늘날과 같은 사유림으로 전환하였다.

1910~1942년의 기간 동안 한반도 전역에 걸쳐 약 82억 본의 묘목이 심어졌다. 그것은 해방 이후 지금까지 한국 정부가 심어온 묘목의 수를 능가하고 있다. 총독부는 그가 조선왕조로부터 인수한 황폐한 산지를 녹화하는 데 실로 적지 않은 노력과 비용을 들였다. 그 점에서 비록 바깥에서 들어온 점령 권력이라고 하나 총독부는 근대적 의미의 공권력이었다. 그 公의 세계에서 펼쳐진 산림정책을 신 교수는 모리배들이 날뛰는 私의 세계로 묘사하였다. 1910년의 조사에 의하면 한반도 임야의 26%는 그야말로 벌거벗은 無立木地(무립목지)였고, 42%는 1정보당 입목축적이 10㎥ 미만의 穉樹發生地(치수발생지)였다. 그렇게 황폐한 산야는 원래 탐욕스런 모리배들이 도모할 대상이 못 되었다.

나는 신 교수에게 18세기 이래 조선의 산야가 어떤 상태였는지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그는 식민지기의 산림정책에 관한 사료를 끝까지 다 읽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역사적 전제인 조선시대의 산림에 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성급하게도 국토의 50.3% 수탈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제기하였다. 반복되고 있지만, 내가 그의 최근작에 대해 통상의 서평을 쓰지 않은 것은 그 책에 담긴 14개 章 모두가 그렇게 지독한 선입관과 부족한 조사와 성급한 억단과 비판을 무시하는 독선으로 쓰인 것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시대정신 2006년 겨울호)

"이영훈 : 서울대학교 한국경제사 박사. 現 다산학술문화재단 이사,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 경제사학회 연구이사. 저서로는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 『해방전후사의 재인식(공저)』,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공저)』 등이 있음" -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