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가는대로

日帝 植民主義史觀의 족쇄

이강기 2015. 9. 22. 22:39

日帝 植民主義史觀의 족쇄

(2002년 5월7일 - 에머지)

 

 

근대적인 학문으로서 한국인들에 의한 한국사 연구는 일본인 학자들의 도움으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관이든, 백남운의 사회주의 사관이든, 혹은 진단학회의 실증사학이든, 어느 것 없이 일본인들이 연구한 한국사에서 자극을 받았든지, 영향을 받았든지, 혹은 그 연구 방법론적인 면을 전수 받았든지 했기 때문이다.

서양에 뿌리를 둔 현대적인 학문 치고 어느 것 하나 그렇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근대사학도 일본을 통해서 들어왔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까지 일본 사학자들의 한국사(특히 고대사) 연구는 마치 그들이 죄다 한국사에 매달려 있기나 한 것처럼 가히 폭발적이었다. 그 가운데는 일제의 식민지정책과 관련된 의도적인 것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주로 일본 역사의 뿌리가 한국과 관련이 깊다는 사실에서 온 호기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제는 국내 학자들의 연구실적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게 되어, 신진 학도들이 그것에만 의존해도 어느 정도 연구를 해 나갈 수 있게 되었지만, 좀 전만 해도 일본서적을 참고하지 않고는 한국사를 연구하기가 힘들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그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도 한국사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연구를 철저히 했는지 놀라 자빠질 지경이라는 말을 역사학도인 지기로부터 들은 적도 있다.

문제는, 그들의 한국사연구 열풍이 일제 식민지정책의 도구역할이었든, 학자들의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 때문이었든 상관없이, 그리고 한국의 연구자들이 그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받았는지 와는 상관없이, 일제의 한반도 강점이라는 역사적 현실과 맞물리게 됨으로써 한국인들에 의한 한국사 연구에 족쇄가 되어, 역사연구발전에 큰 장애물이 돼 버렸다는 점이다.  

다른 학문들도 물론 마찬가지지만, 한국사 연구에도 당연히 비판을 필요로 한다. 비판이 허용되지 않고 자화자찬만 허용된다면 이미 그것은 학문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다. 좀 심한 표현으로, 역사가 마치 비석에 새겨진 송덕문이나 빈소에 바쳐진 헌사나 헌시, 아니면 열변을 토하는 연사의 웅변원고처럼 묘사돼 가지고는 학문으로서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나라 역사도 마찬가지겠지만, 한국사에도 비판받아야 할 점이 수없이 많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과거 일본인 학자들은 주로 비판적 시각에서 그것을 다루었다. 개중에는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악질적인 것도 있지만, 순수하게 학문적인 양심의 바탕 위에서 비판한 것도 있을 것이다. 역사의 당사자가 아닌 제 3자의 입장이 되고 보니 결점이 더 뚜렷하게 보여 양심적으로 그것을 지적한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식민주의 사관이라는 꾸러미에 한꺼번에 집어넣어 팽개쳐버린다. 더 큰 문제는, 그 꾸러미에는 일본인들의 것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한국인들에 의한 한국사의 비판도 같이 들어간다는 점이다. 걸핏하면 식민주의 사관이라며 매도하는 바람에 한국사에 대해서는 칭송 이외에 도무지 입도 벙긋 할 수 없는 게 우리 역사학계의 현실이다. 이래 가지고 무슨 제대로 된 한국사 연구가 되겠는가? 일본인들이 한국엔 민주주의도 없고 학문의 자유도 없다고 빈정거리는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원인은 일본이 제공했지만, 분명 한국인 스스로 채운 이 족쇄에서 언제쯤 벗어날지 지금으로선 요원해 보인다.

 

이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