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는
재일동포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신동아 2005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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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센징도
싫다 쪽발이는 더 싫다” |
정체성
고민 ‘민단’ 제3의 길 모색 … 민족단체 성격 유지하며 사회단체로 변모 추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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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우리 같은 사람은 한국적을 갖고 있긴 하지만 한국에 가면 모든
것이 서툴고 어색합니다. 한국 사람들과는 공감할 수 있는 분야가 적어요. 이런 우리가 한국적을 가진 재일교포로 살아가는 게 좋겠습니까, 아니면
일본적을 취득하는 게 낫겠습니까?”
민단을 중심으로 한 재일동포 사회의 변화를 취재하기 위해 도쿄에 온 기자가
길 안내를 해주던 젊은 동포에게서 거꾸로 질문을 받았다.
“글쎄…. 당신이 남자로, 재일 한국인으로, 대학을 다닐 수 있는 중류
가정에서 태어나게 된 것은 당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겠지. 하지만 그 조건이 이미 당신 운명의 95% 이상을 결정해놓은 것은 사실 아닌가. 그것을
팔자라고 해야 할지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피할 수 없는 것만은 분명하오. 그렇다면 이미 주어진 운명을 놓고 ‘내 운명은 왜
이런가’ 탓하기보다는 어떻게 잘 운영해나갈지 고민하는 게 현명한 선택 아닌가.
한국적을 유지한다고만 해서 더 행복해질 리 없을 것이고, 일본적을
취득한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돼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비교하기 힘든 문제를 놓고 고민하기보다는 빨리 적절한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 위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고서 일관성 있게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오?”
취재 초입부터 재일 한국인 사회가 흔들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일본의
행정기관에 외국인으로 등록할 때 올리는 일본식 이름인 ‘통명(通名)’을 쓰지 않고, 명함에도 한국의 본명을 쓴 뒤 이를 한국 발음으로 읽을 수
있도록 가타가나까지 써놓은 또 다른 민단 청년은 “한국 여성은 너무 거세서 결혼 상대자로 삼기 싫다”는 말을 던졌다.
일본 학교에서 일본 여학생을 겪으며 성장한 이들은 한국 여학생한테서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 분명했다. 일본에서 성장했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이질감을 느끼고, 조국을 찾아갔을 때도 또다시 문화적 이질감을 느끼는 이
현상을 또 다른 동포는 ‘조센징과 쪽발이’ 현상이 아니겠냐고 자조했다.
한국영사관이 입주해 있는 도쿄의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중앙본부 정몽주 사무총장 방 칠판에는 ‘광복 60년(8월15일), 한일국교 정상화 40년(6월22일), 을사조약 100년(11월17일),
모국사업 30년(총련계 동포 모국 방문, 9월11일), 망향제 30년(10월), 일본 최고재판소의 재일동포 지방참정권 용인 10년(2월29일),
고베 대지진 10년(1월17일)’이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내년의 일이라 써놓진 않았지만 그 밑엔 더욱 중요한 메모가 이어져 있을 듯했다.
‘민단 창설 60주년(2006년
10월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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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단은 한국 국적을 갖고 일본에서 살아가는 재일 한국인의 집합체다. 이
단체는 제1번 강령을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시를 준수한다’라고 할 정도로 지극히 한국적이다. 이들은 총련과의 험한 싸움을 이겨냈을 뿐만 아니라,
주일 한국대사관을 비롯해 일본에 있는 10개 한국 공관 중 9개 공관의 터를 제공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해왔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인들이 비난의 목소리를 던진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당신네들은 대한민국 국민이라지만 병역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에 세금을 내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는 등의 비난이 있다는 것을.
1번 강령 “한국 국시 준수” … 한국 문화
더욱 강화
이러한 변화가 한국 일변도로 기울어 있던 민단을, 한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닌 제3의 길로 향하게 하고 있다. 지금까지 민단은 한국적을 가진 재일동포의 연합체였지만, 앞으로는 귀화한 한국인을 포함한 한국계 단체가
되겠다는 것이다. 한국인과 한국계를 불문하고 일본으로부터 차별을 받으면 이에 대해 항의하는 사회단체가 되겠다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시를 준수한다는 1번 강령을 수정할 의사는 없어 보인다.
민단은 오히려 한국 문화에 대한 의식의 고양을 강화한다는 생각이다. 이를 위해 청년회를 중심으로 1세대 민단원들이 어떻게 일본에 뿌리내렸는지를
취재해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두 번째로는 매년 여름방학 때마다 3, 4세 동포 어린이들을 한국에 데려가는 ‘어린이 서울 잼버리’ 행사를 열고
있다.
이 행사에는 일본 각지에서 일본 학교를 다니고 있는 민단계 어린이들이
참여한다. 그리고 일본 각지의 대학교를 다니는 청년들이 가이드로 참여한다. 이들은 서울의 각급 학교를 찾아가 함께 놀고 공부한다. 민단 아이들은
한국어를 전혀 못하고, 한국 학생들은 일본어를 전혀 몰라도 공감하는 게 있는지 금방 친해진다. 이어 놀이시설도 가보고, 한국 가정에서 자보기도
한다.
이 행사가 끝나면 아이들은 눈에 띄게 조국을 의식한다. 일본인들에게서
차별을 받아본 부모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학교에서 통명을 쓰지 않겠다. 본명을 쓰겠다”고 고집하는 등 확연한 민족의식을 갖게 된다.
민단은 이런 식으로 아이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단체에서 한국계 단체로의 변화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왜 민단은 제3의 길로 들어선 것일까. 첫째 이유로는 김영삼 대통령 이후
한국 정부의 무관심을 든다. 군인 출신 대통령이 있을 때만 해도 남북 대결 때문에 한국은 민단을 적극적으로 잡아끌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냉전이
끝나고 남북관계가 호전되고 한국에서는 민주화가 정착되면서 한국 정부는 더 이상 민단을 적극적으로 유인하지 않았다. 민단으로서는 홀로서기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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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는 이들의 법적 지위 문제가 풀린 것이다. 재일교포들은 오랫동안
법적 근거 없이 일본에 살아왔다. 그러다 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되면서 한국적을 취득한 사람에 한해 일본 정부로부터 25년짜리 영주권을 받게
되었다(협정영주권). 한국적을 가져야만 영주권을 주었기 때문에 이 시기 재일동포 사회는 민단을 중심으로 강하게 뭉쳤고 한국 정부가 하는 일에도
적극 협조했다.
91년은 이 협정영주권이 만료되는 해였다. 이때 한일 양국은 다시 ‘일본
정부는 협정영주권자에 한해서는 자자손손 일본 영주를 허가한다’는 합의를 도출해냈다. 이로써 민단계 동포들은 일본에 영원히 거주할 수 있는
권리(특별영주권)를 확보하게 되었다.
민단은 오랫동안 ‘거류민단’으로 약칭돼왔다. 94년 민단은 일본을 계속해서
생활무대로 삼겠다는 단원들의 의지를 반영해, ‘일시적으로 거주한다’는 뜻을 갖고 있는 ‘거류’를 떼어내고 그냥 민단으로 결정했다. 91년의 한일
합의가 거류민단을 민단으로 변모케 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 결정이, 민단원들에게 ‘영원히 일본 속 한국인으로 남을 것’인지를 묻는 질문이
되고 있다.
법적 문제가 풀린 뒤 민단은 민족단체 성격을 유지한 사회단체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민단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한국적자는 물론이고 한국계 일본인도 포함하는 쪽으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일본사회에서 이들의 권익을 지키는
운동을 점화시켰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로부터 지방선거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판결을 받아내고 이를 허용하는 법률을 만들라고 촉구하는 것. 그리고 91년엔 외국인 등록증에 지문을 찍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도 받아냈다.
이러한 승리는 형식상으로는 일본인에게서 받아오던 차별을 종식시킨 것이기에, 민단은 더 이상 일본과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기 힘들어졌다.
총련과의 힘겨웠던 싸움도 일방적인 승리로 귀결되었다. 그러니 민단은 변화를
맞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재일동포 사회의 소멸로 이어질지, 아니면 또 다른 길을 찾아낼지는 아직은 불분명하다. 분명한 것은
재일동포 청년들은 고민을 하고 있고, 한국인과 정부는 이 문제에 아무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동경한국학교 3개 국어 수업 … 민단계
거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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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단의 변화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동경한국학교(교장 김용만)이다. 초·중·고 학급이 함께 있는 이 학교에서 주력 학생은 ‘뉴커머’로 불리는 새로운 한국인
자녀들. 민단계 어린이는 찾기 힘들고 상사 주재원이나 언론사 특파원, 공관원, 유학생으로 온 사람들의 자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부모들의 수준이 높다 보니 이곳에서는 서울 강남에 있는 학교 못지않은 고급 수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초등학교 학급에는 한국인
교사와 영어를 쓰는 교사가 모두 담임으로 있어 한국어, 일본어와 함께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때문에 학교 수준이 비약적으로 높아져 학년당 2개
학급밖에 없는 고등부에서 매년 4, 5명이 게이오와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왜 민단계는 이
학교에 거의 자녀를 보내지 않을까. 이유는 한국어로 진행되는 이 학교의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만큼 민단계는 일본화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일본 유수의 사립학교를 따라잡을 정도로 발전한 동경한국학교 뒤에는 한국식 문화와 한국식 교육을 따라오지 못하는 민단계의 안타까움이 깔려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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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ㅣ조선적 재일교포 조경희씨 일본…
조선… 한국… 삼중 고삐에 묶인 자유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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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희씨(32·가명)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하지만 한국 사람이다. 1995년 스스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기 전까지
‘조선 사람’으로 살았던 조씨는 어린 시절 총련계 초·중등학교를 다녔고, 더 자라서는 일본계 대학을 졸업했으며, 이제는 한국을 드나들며 일하고
있다. 한국, 조선, 일본 세 나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그의 삶에는 60만 재일교포들의 역사가 담겨 있다.
96년 사망한
조씨의 할아버지는 30년대 일자리를 찾기 위해 고향(경남)을 등지고 일본으로 건너간 교포 1세. 할아버지는 조선 출신의 ‘일본인’으로 여겨졌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뒤 외국인등록법이 생기자 할아버지와 그 사이 태어난 조씨의 아버지는 ‘조선 국적’으로 외국인 등록을 했다.
이제 ‘조선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남북이 서로 다른 정부를 세우고 65년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뤄지면서 재일교포들은 ‘조선’ 국적을
‘한국’ 국적으로 바꾸어야 하느냐 하는 선택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때 조씨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선택은 국적을 바꾸지 않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국적 ‘조선’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뜻하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의 ‘조선’, 이제는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린 자신의 본국을 뜻하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북한이 정부를 세우면서 ‘고려’나 ‘아리랑’ 같은 국호를 썼다면 ‘조선적’ 재일교포들이 모두
‘친북인사’라는 오해는 생기지 않았을 거예요. 아버지의 국적은 ‘북조선’이 아니라 ‘조선’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한국인들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니
답답하죠.”
사실 일본에서 조선적 사람들은 무국적자 취급을 받는다.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의 국민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여권도 없고, 해외에 나가려면 일본에서 ‘재입국허가증’을 받은 뒤 그것을 근거로 외국 비자를 받아야 한다. 남과 북 모두에 속하면서 동시에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며,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지만 일본에도 속하지 않는, ‘삼중의 고삐에 묶인 자유인’ 그게 바로 ‘조선적’
재일교포다.
조씨가 뒤늦게 한국 국적을 취득한 것은 이런 불편 때문이다. ‘조선’에 대한 기억을 갖지 않은 그로서는 굳이 여러
어려움을 참아가며 그 이름을 지켜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의 삶은 분명히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그것과 다르다.
조씨에게
‘당신의 조국이 어디라고 생각하느냐’는 ‘우문’을 던져보았다. 그의 ‘현답’은 “‘조국’이 도대체 무엇이냐”였다.
“나는
한국인들과 자유롭게 어울리고, 총련에 속해 있는 친구도 많다. 일본은 내 삶의 본거지다. 왜 내가 그 가운데 굳이 하나를 택해야 하는 거냐.”
상당수 조선적 재일교포들은 한국 언론과 인터뷰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그들은 재일교포의 눈을 통해 남북 간의 우열을 가늠하려
드는 수많은 시도에 이미 충분히 지쳤다고 말했다. 조씨 역시 얼굴 사진과 본명을 공개하는 것만은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적
재일교포 청년의 정체성 혼란을 다룬 영화 ‘GO’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이름이란 게 뭐지? 장미라고 부르는 꽃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그 아름다운 향기는 변하지 않는데.”
어쩌면 이것이 바로 조선적 재일교포들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조선’
‘한국’ ‘일본’ 어느 이름을 붙여도 그 중간 어디쯤 혹은 어느 곳 하나에도 속하지 않는 저 먼 곳에 자리한 자신들의 삶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묵묵히 말하는 듯했다.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 (끝)
도쿄=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
발행일 : 2005 년 03 월 08 일 (475 호) |
쪽수 : 14 ~ 16 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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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정책
vs 동포정책 국적 선택 갈림길 |
한·일
재일교포 잡아당기기 경쟁 … 日 국적법 개정 후 태어난 사람들의 선택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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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10월3일 오사카에서 열린 민단 설립 1주년 행사.
1월17일 정부가 한일협정 체결에 관한 문서를 공개하자 많은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협정은 굴욕적이었다”고 비판했다. 한일합방부터 따지면 36년, 강화도조약(1876년)을 기점으로 하면 무려 70년간 일본
영향 아래 있었던 한국민으로서는 과거사를 털고 일본과 국교를 회복한 이 협정을 좋게 보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각은 지극히 국내적이다. 재일교포 처지에서 본다면 이 협정은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들의 숨통을 터준 매우 중요한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없었다면 민단은 지금처럼 총련을 압도하지 못했고, 재일교포의
경제활동과 그들의 대한(對韓) 투자도 가속화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협정은 재일교포를 놓고 한국과 일본이 잡아당기기 경쟁에 들어가는,
당시엔 누구도 듣지 못한 날카로운 ‘출발신호’이기도 했다.
<표>에서처럼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조선인) 수는 제2차
세계대전 때(1941년 12월8일~1945년 8월15일) 폭증했다가 일제가 패망하면서 급감했다. 240만명에 이르렀던 재일 조선인 중 무려
140만명이 해방과 함께 한반도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본인과 결혼하는 등 갖가지 사연으로 90만명 이상이 일본에 남아 1세대
재일교포가 됐는데, 이중 약 28만명이 순차적으로 일본에 귀화했다. 그리고 6·25전쟁이 일어난 1950년 이후 대략 60여만명이 민단계와
총련계로 남게 되었다.
일제 시절 일본에 온 조선인은 법적으로는 일본인과 똑같은
‘황국신민’이었으나, 실제로는 주로 3D 업종에 종사하는 하급신민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일제가 패망하는 순간 잠시 ‘전승국인(戰勝國人)’
대우를 받았다가 곧 패전으로 먹고살기 힘들어진 일본인으로부터 배급을 축내는 ‘군식구’ 대우를 받았다. 이 시기 다수의 일본인은 ‘군식구’의
90%를 차지한 재일 조선인을 밀어내기 위해 혈안이 됐는데, 이때 중요한 기준이 된 것이 호적이었다. 재일 조선인의 호적은 한반도에 있으니
일본에서 이들은 무호적자일 수밖에 없었다.
‘호적전쟁’으로 재일 조선인 일본 사회로 대거
흡수
그로 인해 일부 재일 조선인이 취적(就籍)신고를 함으로써 일본인이
됐다(귀화). 대표적인 사람이 역도산(본명 김신락)이었다. 역도산은 51년 2월19일 나가사키현 오무라시를 본적지로 삼아 모모타
미쓰히로(百田光浩)란 이름의 호적을 만들었다. ‘호적전쟁’은 먹고살기 힘들어진 일본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재일 조선인들을 차별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지만, 역도산 경우에서처럼 재일 조선인을 일본 사회로 강력히 빨아들이는 구실도 한 것이다.
재일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갈등이 커지자 49년 1월26일 일본 외무성은
‘연합국과의 강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재일 조선인의 국적은 일본이다’라는 해석을 내려, 재일 조선인 차별을 금하게 했다. 그러나 ‘해석상으로만’
일본인이었기에 재일 조선인은 일본 공무원 사회는 물론이고 일반 기업체에도 진출할 수 없었다. 일본 여권을 받아 해외로 나갈 수도 없었고 그저
배급을 받아 겨우 입에 풀칠하는 문제만 해결할 수 있었다. |
50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특수가 일어 일본 경제에 활력이 생기자,
야박했던 일본 인심이 다소 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52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강화협정을 맺자,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이 ‘외국인등록법’을
공포하며 “이날부로 재일 조선인에게서는 일본 국적이 상실된다”고 선언했다. 이어 재일 조선인에게 외국인 등록을 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때
민단계는 한국을, 총련계는 조선을 기입하면서 재일동포 사회는 둘로 나뉘게 되었다.
당시 남북한은 일본과 수교하지 않았다(북한은 지금도 수교하지 않았다).
그러니 외국인 등록을 해도 여권이나 주민등록 같은 국적을 증명한 자료가 없어 여전히 해외로는 나가지 못했다. 어찌어찌해서 나갔더라도 다시는
일본에 돌아올 수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에서 5·16정변으로 등장한 박정희 정부가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가속화하자
민단계 재일교포들이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당시 한국인들은 6·3한일회담반대운동을 통해 이 회담에 반대했지만, 국적
없이 살아온 재일 한국인들은 박정희 정부에 ‘이 회담을 조기 타결하라’는 요망서를 보내고, 협상지지 시위를 벌였다. 65년 6월 마침내 타결된
한일협정에는 ‘일본 정부는 재일 한국인들에게 25년짜리 영주권을 준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동포끼리 결혼보다 일본인과 혼인 비율 훨씬
높아
당시 재일교포 중에는 한국에 아내와 자녀를 두고 일본에 건너와 돈을 벌다가
눌러앉아 일본에서 만난 여성과 결혼해 자녀를 낳은 남성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새로 얻은 아내와 자녀를 호적에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남성은 대개 한국에 있는 아내가 사망한 다음에야 호적을 정리할 수 있었는데 이 일을 민단이 대행해주었다. 이로써 한국적을 얻으려는 사람은
자동으로 민단원이 됨으로써, ‘회색’ 지대에 있던 사람들이 대거 찾아와 일약 민단은 2대 1의 비율로 총련을 누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영주권은 5년짜리인데, 일본은 왜 협정영주권의 시한을 25년으로
인정해주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속설이 있는데, 다수설은 ‘당시 일본 정부는 25년이 지나면 재일교포들이 일본으로 귀화하거나
한국으로 돌아가 그 존재가 미미해질 것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민단계에 협정영주권을 준 일본은 그 후 5년마다 갱신하는 일반영주권제를
도입해 총련계에도 영주권을 주게 되었다.
이 시기 일본은 부계(父系) 중심의 국적법을 갖고 있었다. 이 법에 따르면
한국적의 남성이 일본적 여성과 결혼해 낳은 자녀는 자동으로 한국적을 갖도록 돼 있었다. 그런데 80년대 들어 세계적으로 여권이 신장되면서
남녀차별을 금지하는 국제협정이 만들어졌다. 85년 그에 따라 일본은 ‘아버지와 어머니 중 어느 한 명을 일본인으로 하고 일본에서 태어난 아이의
국적은 일본으로 한다. 그리고 이 아이는 21세 때 일본 국적과 타 국적 중 어느 하나를 선택케 한다’는 쪽으로 국적법을
개정했다.
80년대 이후 재일교포 사회에서는 동포끼리의 결혼보다 일본인과의 혼인
비율이 월등히 높아졌다(80% 이상). 그런데 새로운 일본 국적법이 등장했으니, 한국적을 갖고 태어나는 2세들이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가운데 협정영주권의 만료 시한(91년)이 다가왔다. 이 문제를 놓고 한일 양국은 다시 협상을 벌여 협정영주권을 받은 재일교포에 한해서는
대대손손 영주를 허가한다는 합의를 도출해냈다(특별영주권).
이로써 재일동포는, 동포끼리만 혼인해 대대손손 재일교포 사회를 유지할
것이냐, 아니면 일본인과 결혼하여 한국적을 없앨 것이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민단 창립 60주년이 되는 내년은 신국적법 제정 직후 태어난
아이가 21세가 돼 국적을 선택하는 해가 된다. 과연 얼마나 많은 젊은이가 한국적을 선택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민단 측은 크게 자신
있어하지 않는다. 민단을 한국적을 가진 사람들 단체에서 한국계 사람 조직으로 변모시키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日 귀화 정책 대응은 국회, 재외국민
투표권 여전한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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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귀화 정책에 대한 대한민국의 대응은 이들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이다. 현재 선거법에 따르면 한국적을 갖고 있는 재외 교포는 한국 선거에 출마할 수는 있어도 투표권은 갖지 못한다. 때문에 재일교포를 포함한
재외 한국민들은 오래전부터 투표권을 달라고 요구해왔다.
이 문제와 관련, 국회에는 두 개 법안이 제출돼 있다. 유기준
의원(한나라당)은 한국 내에 주소지를 둔 재외 국민에 한해서는 투표권을 주자는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그리고 홍준표 의원(한나라당)은 한국
국적을 갖고 국외 부재자 신고를 한 사람에게도 대통령 투표권을 주자는 법안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재외 국민에게 투표권을 주자는
문제는 ‘게리멘더링’화하고 있다. 이유는 재외 국민들의 성향이 대체로 보수적이기 때문. 그렇다 보니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재외 국민에게 투표권을
주는 데 오히려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반대로 한나라당은 재외 국민이 보수적일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개정안을 내놓고 있다. 한나라당은
민단계 교포 40만명 중 20만명 정도가 유권자로 투표에 참여한다면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6개 회원국 중 외국 영주권자나 이중국적자 등 재외 국민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는 나라는 한국,
터키, 헝가리 등 3개국뿐이다. 한국은 언제까지 당리당략 차원에서만 재외 국민 투표권 문제를 다룰 것인가.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 |
(끝)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
발행일 : 2005 년 03 월 08 일 (475 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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