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일본은 ‘한반도 영구분단’을 노린다 - “조선 확보가 일본 국방요체” 주장한 일제 연상…

이강기 2015. 9. 23. 22:20

특별기고 

 

일본은 ‘한반도 영구분단’을 노린다


북한과 수교→북한 기아 탈출→거액 달러 제공→산업화 완결→영구분단 ‘시도’
“조선 확보가 일본 국방요체” 주장한 일제 연상…
응전 능력 없는 정부도 마찬가지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

 

주간조선 2003년 6월19일


‘주간조선’이 식자들의 중론을 받아 “21세기 초 한반도의 모습은 19세기 구(舊)한말과 닮았다”면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 19세기 말의 비극적 운명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19세기 말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다. 해방조국에서 잔뼈가 굵어진 어느 누군들 민족자존에 눈뜨면서 나라가 왜 망했던가 하고 한번쯤은 몸부림쳐 물어보지 않았을 것인가.

우선 20세기의 마지막 해에서 1년 지나 21세기가 되었다고 갑자기 세계화라든지 지구 그물망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신기한 관념들이 적응을 강요할 만큼 실체를 갖고 민족국가 앞에 등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짚어 두겠다. 21세기가 다 가도 인간들의 이해상관이 궁극적으로 귀납되는 틀로서의 국가는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국가는 국가라는 시스템을 영속케 하는 장치를 내장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21세기에도 인간 혹은 민족집단의 운명은 국제권력정치(파워 폴리틱스)의 장에서 근원적으로 규제 당할 수밖에 없다.

오늘의 한반도 상황이 한말과 비슷한 점은 무엇보다도 김정일의 핵 도박과 함께 반도 위에 국제권력정치의 대목 장이 100년 전 수준으로 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전제 위에 필자는 오늘이 한말과 비슷한 모습을 세 가지 점에서 감지한다.

첫째로 21세기 우리 민족의 운명의 침로가 타자에 의해 심대하게 틀어질 가능성이 고도로 높아져 있다는 것.

둘째로 시스템으로서의 우리 국가사회가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시스템이 적응해야 할 환경의 변화에 대한 인식능력을 심히 결하고 있다는 것.

셋째로 오늘 반도 위에 벌어져 있는 국제권력정치의 대목 장에서 민족의 운명을 개척해 내야할 주체인 정부가 한말의 정부처럼 그 같은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등이다.

국제 환경변화와 인식능력

명치의 원훈으로 일본군벌의 원조로 일컬어지는 총리대신 야마가타(山縣有朋)가 명치헌법이 제정된 다음해 제일회 제국의회에서 일본열도를 ‘주권선’이라 하고 조선반도를 일본의 ‘이익선’이라 선언한 것은 1890년이었다. 야마가타는 국방의 요체는 주권선의 방위뿐만이 아니고 이익선의 확보에 있다고 역설하면서 군비확장을 요청했다. 이는 신흥일본이 장차 조선을 침략하겠다는 공적 선언이었던 것이다. 1890년이면 당시 도쿄에는 조선공사관도 있었을 터인데 서울의 조야에서 야마가타의 발언에 주목하고 경계한 흔적은 없다.

4년 뒤인 1894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지만 그 도입부는 일본 군대에 의한 조선왕궁 점령이었다. 청일전쟁은 조선이 먼저 싸웠어야 하는 전쟁이었지만 당시 정부는 생각도 못내 보고 나라를 일본 패권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말았다.

평생을 일제로부터의 독립운동에 바친 이승만의 경우 한국 데모정치의 원조였던 청년시절에도 그는 나라의 자주 독립정신에 투철했지만 일본의 조선 침략의도를 경계하기 시작한 것은 1904년의 일러전쟁이 임박해서였다. 개화파 지식인의 한계이기도 하지만 조선사회 전체가 어느 귀신이 자기를 잡아갈지를 알아보는 데 시간이 걸렸다. 시스템이 적응해야할 환경에 일어난 변화를 제때에 인지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은 어떤가.
이번의 노무현 대통령 방일은 노 정권의 국제권력정치에의 대응수준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드러냈다. 노 대통령의 일본 도착 한 시간 전에 국회를 완전 통과한 유사법제 문제와 북한 문제에 대한 대응에서 그랬다.

유사법제의 성립으로 일본 사람들은 보디가드 집단 정도로밖에 여기지 않던 자위대가 드디어 군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일본 국회의원의 90% 이상이 찬성했고 전체 국민여론의 지지 속에 있었다. 오랜 냉전기간에는 자위대 어느 구석에선가 법제에 대한 연구만 한다 해도 책임자가 문책 당하는 사안이었다.

일본의 이같은 표변을 불러온 배경으로 그들 스스로의 관측통들은 김정일의 핵 도박과 일본 경제의 장기불황을 들고 있다. 지난 세기의 1930년대 초, 일본은 그때까지의 대미·대영 국제협조 노선을 집어치우고 만주 침략으로 시작되는 군국주의 노선으로 질주했는데 일본의 이 같은 표변을 사가들은 당시의 세계 공황에 연동한 경제불황에 대한 일본형 반응으로 재단하고 있다.  빈집에 황소 들어가듯이 일본이 오늘의 장기 불황 끝에 잠재적으로는 세계 제2위의 군사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표변이 일어났으면 선린우호를 서로 내걸고 있는 마당에서는 한번 그들의 이 시점의 역사인식을 묻고 확인하는 것은 필수적인 조치인데 이번 방일에서 노 대통령은 피했다.

사과 요구는 역사인식 확인 절차

그 동안 역대 대통령들이 방일 때마다 이런저런 모양으로 사과를 받았지만 그것은 사과를 통해 미래행동의 준거가 되는 역사인식을 확인하는 절차이기도 했다.

그 동안 한·미 관계가 탄탄하고 미국 맏형 밑에 함께 엎드려 있던 시절에는 한 번 사과 받으면 됐지 두 번 세 번 요구하여 허명을 챙겨야 할 현실적 필요는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과가 일본인들 내면의 역사 감각과 윤리관에 변화를 수반하지 않는 무의미하고 맹랑한 것이었음을, 사과 때마다 터져나온 일본 집권층의 망언, 이번에는 2차대전 후 일본의 경제대국화를 설계하고 한국에 대해 오만했던 A급 총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손자이자 집권 자민당의 제 3인자 아소(麻生太郞)의 “창씨개명은 한국 사람들이 원해서 했던 것”이란 망언을 통해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준다. 사과는 이번 노 대통령의 방일이 어느 때보다 더 필요했던 경우이다. 그것은 군사대국 옆에 사는 자에게 필수적인 최소한의 파워 폴리틱스 감각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번 방일을 통해 후세에 중대한 영향을 남길 외교조치 하나를 의식도 없이 취하고 돌아왔다. 북핵 문제에 대한 양국의 대응자세의 차이를 여기서 거론하지는 않겠다. 그것은 일본과 북한의 수교와 관련된 문제이다.

일본은 지금 북핵이 몰고 온 한반도 국제권력정치의 대목 장에서 그들이 성취하려는 국가전략의 종국적 목표물을 무엇으로 하고 있을까. 그것은 한반도의 영구분단으로 보여진다.

답에 접근하기 위해 북핵과 관련한 현 상황을 한번 거시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미국이 이라크전쟁을 결행해 보임으로써 북핵 문제 해결은 전망이 섰고 단시일은 아닐지라도 일정이 잡혔다고 보아 틀림없을 것이다. 일본의 한 전략문제 전문가 오카자키(岡崎久彦)는 5월 초의 한 강연에서 김정일이 핵을 손털게 될 방식으로 대화해결이 60%, 경제제재 35%, 군사조치 5%로 그 가능성을 보았다. 달리 다른 방식이 있을 수 없으므로 어느 쪽이든 해결은 불가피한 것이다.

우리는 핵문제에만 몰두해 있지만 일본은 지금 핵상황 다음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바둑을 두고 있다. 지난 5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미국에 갔을 때, 작년 10월 일본·북한 평양 수교 선언의 일본측 교섭자로 수행한 다나카 히토시는 미·일 정상회담의 결과 발표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북핵에 대해 ‘대화와 압력’이라고 표명한 것을 ‘압력’을 지우고 ‘대화’만을 남겨 혼선을 빚게 한 장본인이었는데 그는 방미 전 북측으로부터 부탁을 받았던 모양이다. 다나카의 혼선 작전을 통해 일본측은 미국에 협조하는 한편에서 북한에 대해 면피 작전을 했던 것 같다.

일본이 한국의 통일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에서는 그간에 일반적 반일정서의 연장에서 막연한 감으로 입에 오르는 얘기였지만 미국의 키신저 같은 전문가는 21세기 초두의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분석하면서 일본이 한반도의 분단 유지를 국가전략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논거를 들어 지적해 보였다. 일본에 와 있는 서방 저널리스트들은 더러 기사를 써 지적하기도 한다.

작년 10월의 일본의 평양 수교 선언은 핵문제를 확인하지 않고 서둘렀다고 당장 미국으로부터 제동이 걸렸으나 기본 줄거리가 살아있는 것임을 일본 정부는 핵상황 속에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확인했다. 그 줄거리는 일본이 북한과 수교하여 북한이 기아에서 벗어나 산업화를 완결할 만큼 거액의 달러를 북한에 제공한다는 것이다.  평양선언이야 말로 한반도 영구분단을 향한 일본의 국가전략을 만천하에 드러낸 선언이라 할 것이다.

19세기 야마가타의 의도와 유사

19세기 말에 당시의 일본 총리 대신 야마가타가 조선을 그들의 ‘이익선’이라 선언하여 반도에의 침탈의도를 공적으로 표명해 보인 것이나 21세기 초두에 고이즈미 총리가 김정일 체제에 국가대접을 하여 수백억달러를 들이밀어 죽어가는 김정일을 살려내고 산업화를 완결하여 한반도의 영구분단 체제를 고착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은, 100년을 사이에 두고 일본인들이 구사 가능한 그때 그때의 힘으로써 한민족의 운명의 침로를 그들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려 드는 심보가 닮아 있다.

그리고 이 같은 환경변화의 본질을 인지하여 제대로 응전하고 극복하여 자기를 관철해 낼 의지와 능력을 갖춘 정부가 우리나라에 없다는 것도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보도를 보면 정상회담에서 노 대통령은 일·북 국교정상화 관련, 일본 정부의 기본방침에 지지를 표명했다 한다. 이 사항에 언론은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언론이 한 사회의 인지 수단이라면 이 점도 100년 전과 닮았다. 노 대통령은 핵상황이 끝나고 나서 일본 돈이 평양에 가는 것이 스스로의 대북 평화번영정책을 기관차 불통으로 밀어주는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허문도 전 통일원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