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명치유신 성공비결은 ‘청렴한’ 주도세력 - 조선의 실패와 일본의 성공, 무엇이 명암 갈랐나

이강기 2015. 9. 23. 22:23

 

 

조선의 실패와 일본의 성공, 무엇이 명암 갈랐나

 

명치유신 성공비결은 ‘청렴한’ 주도세력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정치학

 

 


여러 해 전에 안방극장을 장식했던 「대원군」이라는 역사 드라마가 있다. 조선 말기의 풍운아 대원군이 일련의 개혁과 함께 쇄국정책을 취하다가 민비 세력에 밀렸다. 이어 청나라, 일본, 러시아 세력이 밀려 들어오고 조정은 친청, 친일, 친러로 사분오열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 드라마는 전주 이씨, 민씨, 풍양 조씨, 개화당 사이에서 어떤 외세를 업고 누가 권력을 잡느냐가 주된 테마였다.

 

당시 「대원군」이 끝날 때쯤 채널을 NHK 위성방송으로 돌리면 「날아 가는 것처럼」(翔ぶが如く)라는 대하 드라마가 시작됐었다. 공교롭게도 이 드라마의 시대 설정도 대원군 시대와 같은 시기였다.

당시 일본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도쿠가와 막부 체제가 조직 피로, 체제 피로를 보이는 가운데 서구 제국주의가 진출해와 풍전등화의 처지에 있었다. 이때 명치유신을 성공시킨 하급 지방무사 출신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陸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근대화, 즉 부국강병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의 방법을 놓고 대립 갈등하는 내용이었다.

똑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 두 나라의 드라마는 조선이 실패하는 모습과 일본이 성공하는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이유도 극명히 보여주었다. 서구 제국주의의 충격 속에서 똑같이 전근대적이었던 두 나라의 어떤 차이가 불과 반세기도 지나기 전에 한 나라를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또 한 나라는 열강의 일원이 되게 했는지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은 왜 성공했을까?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근대화」 즉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에 있었다. 세계역사상 일본만이 유일하게 근대화를 성공시켜 식민지화를 피하고, 심지어 제국주의의 일원이 되었다. 앞의 글(98년 6월호)에서는 조선의 실패 원인을 주자학의 도그마에서 찾았다. 이번 호에는 일본이 어떻게 근대화에 성공했는지 명치유신을 통해 살피기로 한다.

우리는 일본의 근대사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명치유신에 대해서 막연하게 조신침략의 시발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우리로서는 명치유신의 부정적 측면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정도 있겠지만, 명치유신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면 일본이 왜 성공할 수 있었는지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명치유신은 1백년만에 찾아온 질서의 대 변혁기를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고구려, 백제, 일본은 형제국가?

일본의 외교평론가 오카자키 히사히코(岡崎久彦)는 한국주재 외교관 시절에 쓴 한 수필집에서 고대의 한일관계에 대해 흥미로운 관찰을 소개했다. 과거 유럽을 통치하는 정통성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혈통에 있었다. 예를 들어 스페인 국왕이 죽으면 스페인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혈통을 갖는 오스트리아 왕자를 데려다가 왕으로 모셨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고대 동아시아 지배의 정통성은 부여족에 있었다. 부여는 북만주 송화강 유역의 넓고 비옥한 평원에 자리잡았던 고대 국가였다. 부여 왕자인 주몽은 이복 왕자들과의 경쟁에 패한 후 남하해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 그리고 주몽의 두 아들인 온조와 비류도 왕권 경쟁에서 패하자 남하해 온조는 백제를 세우고 비류는 계속 남하한다. 오카자키는 비류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비류가 천황가의 시조라는 주장도 있다. 결국 부여의 혈통이 부여를 비롯해서 고구려와 백제, 일본을 다스린 셈이다.

그의 주장이 옳다면, 부여와 고구려, 백제, 일본은 부여계 형제국가로 볼 수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의 제럴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유명한 과학전문지인 『디스커버』 지에 실린 「일본인의 뿌리」라는 최근 논문에서 유전자 정보와 골상구조를 분석한 결과에 입각, 『일본인은 유전학적으로나 골상학적으로나 한국 이민족들의 후예임이 분명하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천황가가 한반도에서 건너갔다는 것은 이미 일본 내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북방 기마민족인 한민족의 조상들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이민족과, 때로는 같은 민족끼리 사투를 벌이면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흘러들었다. 고도의 철기문화를 갖고 있던 진한의 경우에는 철을 얻는 데 쓸 땔감을 얻기 위해 바다를 건너기도 했다. 고대 기술로 철을 얻으려면 엄청난 양의 땔감이 필요했다. 커다란 숲을 모조리 태워야만 철을 얻을 수 있었다.

 

한·일 차이는 독·불 차이

숲을 태우며 남하하던 진한 사람들은 숲을 찾아 드디어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민족들은 만주와 한반도에서 경쟁에 패퇴하여 쓰라린 마음을 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구려에 밀린 일부 부여족이, 멸망한 가야인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내부 권력투쟁에서 밀린 자들이, 그리고 나당(羅唐)이 멸망케 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이 차례로 일본으로 건너가 원주민을 정복하고 일본 국가의 초석을 심었다. 특히 백제가 멸망했을 때에는 20만명에 달하는 백제 유민이 일본으로 건너 갔다는 평가도 있다.

이번 주제에는 벗어나지만, 조국인 한반도의 생존경쟁에서 패퇴해 쫓겨난 한민족의 후예인 고대 일본인들은 권토중래의 꿈을 가졌을 것이다. 절치부심하던 한민족의 후예들은 일본이라는 국가를 세우고 나라 만들기에 피눈물나는 노력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한풀이」에 나섰다. 임진왜란, 한일병합, 만주침략을 그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일본인들이 왜 그렇게도 한반도와 만주에 집착했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일제시대 일본은 서울 용산으로 수도를 천도하려는 계획도 갖고 있었다. 그것은 1천여년 전 한반도에서 쫓겨난 후예로서 본능의 표현일 것이다. 「우리의 후예」들이 와신상담한 끝에 오늘날 「본국」을 능가하는 세계적인 경제대국을 이룩했다고 본다면, 일본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 조금은 누그러질 수도 있지 않을까.

거의 모든 일본 문화는 한반도에서 건너갔다고 단정짓는 한국인들의 인식에 일본인들은 거부감을 갖고 있다. 『일본 문화는 전부 한국에서 건너간 것이다』 『일본은 한국인에 의해 건설됐다』는 주장은 과거 일본의 황국사관만큼이나 위험하다. 사실 우리 문화도 외부로부터의 끊임없는 자극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문화란 그런 것이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분명히 같은 조상을 갖고 있지만, 같은 민족이라고는 할 수 없다. 서로 지구상에서 가장 가까운 민족임에는 분명하지만, 언어도 민족성도 가치관도 분명 다르다. 같은 씨에서 다른 꽃이 핀 격이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초래했는가? 부여계로 이어지는 한반도와 일본의 연계고리가 중앙아시아 황금문화를 갖는 스키타이계에 속하는 신라에 의해서 끊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1천3백여년 전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은 한반도와 일본의 연계고리를 끊었고, 이후 한국과 일본은 왕래가 끊어진 채 각각의 길을 걸었다. 각기 다른 풍토와 자연환경에 적응하면서 반도나라 한국과 섬나라 일본은 각기 다른 민족이 된 것이다.

마치 신성로마제국이 프랑스와 독일로 나뉘듯, 지금 나타난 한국과 일본의 차이도 유럽에 비유한다면 독·불 정도의 차이로 볼 수 있다. 프랑스와 독일은 뿌리는 같지만 각기 다른 언어를 가졌으며 같은 민족이라고 하지 않는다. 1천3백년이라는 세월은 고대 한국어를 한국어와 일본어로 진화시켰으며, 한 민족을 다른 민족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한국인은 이상적, 일본인은 현실적

도자기는 한·일 양 민족의 기질과 문화의 차이를 극명하게 설명해준다. 박물관에 시대별로 진열돼 있는 우리의 도자기를 보면, 왕조별로 전혀 다른 개념의 도자기가 나온다. 신라시대의 토기, 고려시대의 청자, 조선시대의 백자가 그것으로, 역사의 흐름 속에 도자기 모습이 계승되면서 진화됐다기보다는 과거 왕조의 것은 철저히 부정되면서 전혀 다른 개념의 도자기가 나온다.

고려청자는 엄청난 것이었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었던 비취색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졌다. 그러나 청자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자취가 사라져버렸다. 청자를 만드는 방법조차도 완전히 잊혀졌다. 대신 백자가 조선시대를 지배했다. 혁명적인 변화다.

반면 일본 도자기도 시대에 따라서 어느 정도 차이는 있다고 하지만, 그 변화과정은 한국의 경우와는 달랐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초래한, 조몬토기에서 야요이 토기로의 급격한 변화를 제외하고 일본 도자기는 점진적으로 진화 개량돼갔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도자기 역사는 양국의 국민성을 잘 대변해준다. 한국인의 가치관은 세상 일을 정의와 불의로 양분하고, 불의에 대해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것을 제일로 본다. 중간이 존재할 수 없고, 이상주의적 색채가 강하다. 한국인들은 왕조나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거를 부정한다. 새로운 왕조나 정권의 정통성은 과거 왕조나 정권을 부도덕한 것으로 부정함으로써 강화된다. 따라서 왕조나 정권이 바뀌면 모든 것이 철저하게 변화한다.

반면 일본인의 국민성은 상황에 순응하면서 눈앞의 일들을 점진적으로 해결해나간다. 매우 현실적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큰 변화는 없다. 우리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지만, 최고 지도자인 일본 총리가 말단 관리 하나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일본의 국민성이 그러하다면, 봉건제 국가를 하루 아침에 근대 국민국가로 탈바꿈시킨 명치유신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나 명치유신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바로 일본 국민성의 발로임을 알 수 있다.

18세기 말 영국 프랑스 등 유럽에서는 시민혁명을 거쳐 「근대 국민국가」가 등장하고, 이어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때까지 앞서 있던 동양 문명은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에 성공한 서양에 추월당했다. 압도적인 과학기술과 생산력을 가진 서구 제국은 19세기 중반부터 식민지 확보를 위한 경쟁을 벌였다. 레닌은 자본주의 국가의 내재적 모순 때문에 제국주의로 치닫게 된다고 봤다. 부의 편중으로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생산력을 따르지 못하게 되고, 그 결과 국내에서 소비되지 않은 잉여 생산물과 잉여 자본도 생긴다. 이를 소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장이 필요하고, 새로운 해외시장을 찾아 나서는 것이 바로 제국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본에는 잉여 자본이나 잉여 생산물은 존재하지 않았다. 스페인이 남미를,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를 식민지화한 것도 레닌의 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결국 제국주의는, 징기스칸이 유럽을 식민지화하던 상황과 영국이 중국을 유린한 것과는 그 이유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 서구 제국들은 19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를 식민지화하기 위해서 몰려 들었다.

 

명치유신의 원동력, 존왕양이

1842년 아편전쟁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잠자는 사자라고 여겼던 중국이 사실은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중화질서의 지배자였던 중국이 영국에 여지없이 패퇴했다는 사실은 조선과 일본에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모험심이 강한 서양 오랑캐들이 연일 조선과 일본 연안에 나타났다.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 앞에서 조선, 일본, 중국 등 동양 3국이 내건 대책은 놀랍게도 똑같은 것이었다. 존왕양이(尊王攘夷), 즉 왕에 충성하고 오랑캐를 몰아내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동양 3국 모두가 유교, 특히 주자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유교국가였기 때문이다.

존왕양이 사상은 주자학의 본질이다. 주자학은 일명 송학(宋學)으로 중국 송나라가 처한 특수 상황 하에서 형성, 발전된 학문이다. 송나라는 주변 이민족 국가들의 팽창 때문에 고통받았다. 여진족인 금나라의 침략으로 화북지역을 빼앗기고 양자강 이남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따라서 오랑캐(夷)를 몰아내고 왕을 존중하는 사상에 입각한 주자학이 송나라에서 발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일본이 내건 존왕양이는 조선과는 다른 효과를 거뒀다. 1854년 미 해군제독 페리는 2백50문의 대포로 중무장한 10척의 현대식 군함을 이끌고 도쿄만에 진입했다. 이에 놀란 도쿠가와 막부는 미국과 화친조약을 체결해 오랜 쇄국을 풀고 개국하기에 이른다. 특히 1858년 맺어진 미일 수호통상조약은 가혹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후 일본은 차례로 열강들과 비슷한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무력한 막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존왕양이의 기치 아래 막부타도 운동으로 불붙었다. 지방 번(藩)들의 하급 사무라이들이 막부타도 운동의 주축이 됐다. 그들에게 서양에 대한 지식이 있을 리 없었고, 있다면 다소의 주자학적 교양이 있었을 뿐이었다.

존왕양이 사상은 막부타도의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것이었다. 일본에서 존왕의 대상은 막부의 장군이 아니라 천황이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일반 국민들은 천황에 대해서 아예 그 존재를 모르거나, 안다고 해도 교토에 있는 제사장이라는 정도였다. 일반 국민에게는 막부의 장군이 군주였으며, 조선을 비롯된 외국들도 천황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명치유신은 도쿠가와 막부를 부정함으로써 성립했다. 그런데 막부 밑에 있는 번의 무사들이 장군을 부정하려면 그 이상의 권위가 필요했다. 여기서 그들은 천황에 주목한 것이다. 형식적이나마 장군은 천황의 신하였기 때문이다. 하급 무사들은 존왕을 내걸어 막부를 천황에 대해서 불충(不忠)이라고 공격하고, 불충인 막부를 타도하는 것은 반역이 아니며, 정통성은 자신들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양이 슬로건도 또한 막부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소재였다. 막부가 천황으로부터 부여받은 직위가 바로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었다. 정이대장군이란 바로 오랑캐(외세)를 토벌하는 장군이다. 그런데 그 정이대장군이 오랑캐는 무찌르지 않고 오히려 오랑캐와 내통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존왕양이 슬로건은 막부를 막강한 외세와 국내의 존왕양이파 사이에서 진퇴양난에 처하게 했다. 더욱이 존왕양이 사상은 일본 민중들 사이에서 민족주의라는 극히 가연성 높은 감정에 불을 지피는 역할을 하기에도 충분한 것이었다. 막부타도의 에너지, 즉 명치유신의 에너지는 존왕양이론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사진도 없이 시작한 혁명

명치유신의 유일한 이데올로기가 존왕양이였다면, 명치유신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대단히 보수반동적인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로 치자면 「위정척사(爲政斥邪)」의 대표격인 최익현이 정권을 잡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존왕양이라는 슬로건으로 막부타도의 에너지를 극대화시켜 명치유신을 성공시킨 사람들은, 천황을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킨 단 한 가지 일만을 제외하고는 1백80도 돌변한다. 양이는커녕 서양 오랑캐에 철저히 협력하고, 심지어 서양 오랑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우리로서는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일본의 국민성은 눈 앞에 닥친 일을 하나씩 점진적으로 해결해나가는 매우 현실적이다. 일본은 장기적 비전이나 철학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그때 그때 최선의 것을 선택해나가는 타입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선택이 쌓여서 큰일을 성취하기도 하고, 군국주의처럼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명치유신도 한 가지씩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큰일을 성취해낸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명치유신은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막부를 타도한다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청사진도 없이 시작됐다. 뚜렷한 지도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규슈 지역의 사쓰마와 조슈, 두 번이 중심이 됐지만, 번주(영주)가 전면에 나선 것도 아니었다. 명치유신의 리더들은 사무라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로 낮은 지방 사무라이 출신이거나 관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번주들을 움직여 막부를 타도하는 데 성공한다.

막부 타도의 최대 공신은 도쿠가와 가문의 마지막 장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인지도 모른다. 막부군은 몇 차례 전투에서 패했지만, 그 막강한 군사력은 아직 건재했다. 그러나 요시노부는 시대의 대세를 읽고 미련없이 정권을 천황에게 반환했고, 2백40년을 이어온 도쿠가와 막부체제는 붕괴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다.

장래에 대한 청사진 없이 막부 타도에 성공한 지도자들은 외적을 막는다는 다음 단계의 과제를 안았다. 그들은 무사출신답게 손자병법에 따랐다. 지피지기후(知彼知己後)에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고 했던가, 명치유신의 지도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새 나라의 일은 팽개치고 구미로 출발했다.

조선과는 달리 일본은 쇄국 하에서도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와 교역을 계속해왔으며, 이를 통해 서양 문물을 접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세상 물정에 완전 까막눈은 아니었다. 난학(蘭學)이라 하여, 네덜란드(和蘭)의 문물을 연구하는 학문도 있었다. 난학자들 중에는 서구 문명을 수용해 국방을 튼튼히 하고 외적을 막아야 한다는 논의도 나왔다.

양이운동의 선봉에 서서 막부와는 물론 일본에 진출한 열강들과도 격렬히 충돌한 조슈 번은 그 와중에도 몇몇 유능한 청년을 은밀히 영국으로 보냈다. 그 중 한 명이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 당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이토 등은 유럽에 와서 그 부강함에 압도됐고, 양이운동의 무모함을 깨달았다. 이들은 조슈가 열강과 충돌할 경우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보고, 귀국하여 사력을 다해 번의 방침을 바꾸었다.

 

                               천황제는 국민통합의 수단

1868년 출범한 명치정부는 서양 문물을 시찰하기 위한 대규모 견학단을 파견했다. 이를 통해 명치 지도자들이 내린 결론은 압도적으로 강력한 서구 제국주의를 물리치려면 일본도 철저하게 서구를 모방해서 「근대 국민국가」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진 유럽제국에 뒤지지 않는 근대국가만이 식민지화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은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론(脫亞論)은 명치 일본의 길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견학단이 보고온 서양 제도와 법률은 차례차례 새 나라 일본에 적용됐다. 헌법과 육군은 프러시아를, 해군은 영국을, 민법 형법과 경찰은 프랑스를 각각 요즘 말로 벤치마킹(benchmarking)해서 도입했다.

그러나 명치 일본이 근대화된 국민국가로 거듭나는 데에는 중대한 걸림돌이 있었다. 겉모습만 서구화된다고 해서 근대 국민국가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드웨어를 움직이려면 소프트웨어도 바뀌어야 한다. 즉 법률과 제도가 바뀌어도 국민이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데, 수천년간의 봉건제도에 익숙해진 일본 국민이 새 정부의 선진 제도와 법률에 따라 움직일 리 없었다. 요는 시민의식의 성숙이 필요했다.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려면 시민의식 발달과 국민적 통합을 의미하는 「국민형성(naton-building)」이 필수적이다. 구미 열강을 견학한 오쿠보 도시미치, 이토 히로부미 등 명치유신 지도자들은 구미 선진제국에서 교회가 국민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유럽의 기독교와 같은 역할을 일본에선 천황제가 수행할 수 있음에 주목했다. 오쿠보와 이토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천황을 정치의 정점으로 부활시킴으로써 국민통합을 위한 상징으로 활용한 것이다.

일본은 건국 이래 전근대적 봉건사회였고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명치유신 직전에는 장군을 정점으로 2백70명의 번주인 다이묘(大名)가 있었으며, 그 밑으로 1백90만명의 사무라이 계급, 그 아래 평민과 천민이 있었다. 시민의식과 국민통합을 이루기가 어려운 체제였다.

천황제는 막부를 타도하는 데에도 유용했지만, 신분차별을 없애고 국민통합을 이루는 데에도 유용한 것이었다. 천황 앞에서는 모두가 신하다. 장군도, 다이묘도, 사무라이도, 농민도, 상인도, 천민도 모두 천황의 신민이 된다. 소위 일군만민(一君萬民) 사상이다. 천황을 정치의 정점에 서게 함으로써 신분의 귀천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평등한 신민이 됐고, 여기서 근대국가에 부응하는 시민의식과 국민통합을 이룰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된 셈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성공 원동력

또 한 가지, 명치 일본의 발목을 잡고 있던 것은 열강들과 맺은 불평등조약이었다. 명치유신 직후에 대규모 해외 견학단을 파견한 데에는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모색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동양에선 도덕이 법보다 우선했다. 그러나 서양에선 법이 도덕에 우선했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면서 법대로 죽음을 택했다. 유교적 가치관에서는 대의명분을 우선시해서 대의에 어긋나는 일에 저항하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불평등 조약이 대의에 어긋난 이상 이에 저항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일본은 유교권 국가이면서도 묘하게도 도덕보다 법이 우선되는 사회였다. 일본도 주자학을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학문으로서 수용했을 뿐 조선처럼 사회를 속박하는 보편적 사상이 아니었다.

우선,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게 된 것에는 열강들의 제국주의적 의도도 작용했지만 일본측의 문제도 있었다. 바로 여기서 개선의 여지가 생긴다. 예를 들어 불평등조약의 대표적 사례가 치외법권인데, 외국인이 일본에서 죄를 범해도 국내법으로 벌을 줄 수가 없었다. 재판제도, 수형제도, 태형, 사형 등에서 일본은 인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전근대적인 형법체제였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인식한 명치 일본은 삼권분립에 의한 근대적 헌법, 프랑스식 형법 등을 도입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명치 일본이 조약 개정에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지금도 일본 외무성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를 대외 조약을 다루는 조약국에 배치하는 전통에서 알 수 있다. 일본 외무관료는 조약국을 거치지 않고서는 출세할 수 없다. 관료로서 가장 높은 지위인 외무차관에 오르려면 반드시 조약과장, 조약국장을 거쳐야 한다. 이것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려고 전력을 기울였던 명치시대의 유산이다. 불행히도 조선정부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명치유신을 성공시킨 원동력은 무엇보다 지도세력의 철저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였다. 즉 신분이 높을수록 사회에 대한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는 것이다. 명치유신은 근대 국민국가를 성립시켜 일본을 식민지화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일거에 봉건사회를 부정한 혁명이었다. 봉건제가 일시에 부정됐기 때문에 명치유신으로 이익을 본 계급이 없으며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사회 전체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례로 명치 지도자들은 중앙집권체제를 도입하기 위해서 번을 폐하고 현으로 대치하는 「폐번치현」을 단행했다. 이로써 번주 다이묘들은 하루 아침에 대대로 물려온 영지를 잃었고, 사무라이들도 실업자로 전락했다. 또 명치정부가 도입한 조세제도는 농민들이 세금을 현물로 내는 것이 아니라 현금으로 지불하도록 한 것이었다. 경제가 성숙하지 못한 단계에서 갑자기 현금으로 세금을 내라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불만이 폭발할 듯 했지만 예외는 없었다.

명치유신을 주도했던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등의 번주들과 사무라이들도 예외없이 영지를 빼앗기고 실직했다. 명치유신을 주도했던 사람들 중에는 생활고 때문에 딸을 사창가에 파는 사람도 생길 정도였다. 명치 정부에 들어간 소수를 제외하고, 개국 공신들이 자신의 특권을 포기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봉건제도를 일거에 부정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불만을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계속> (신동아 1998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