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 韓.日 關係

日帝, 마구잡이 발굴로‘임나일본부說’조작 - 신라·가야 유물 발굴비화

이강기 2015. 9. 23. 22:24

日帝, 마구잡이 발굴로‘임나일본부說’조작

신라·가야 유물 발굴비화

 

 

 

 

 

 

 

 

趙由典<국립민속박물관장>

 

 

 

 

《일본 고고학자들은 김해지역의 유적에 제일 먼저 눈독을 들였다. 소위 「임나일본부설」을 학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한국을 고고학 「실습현장」으로 삼아 일본 고고학을 꽃피웠다.》

 

    신라와 가야의 무덤은 일제시대부터 도굴의 대상이 되어 많은 고분이 파헤쳐져 파괴되고, 출토된 유물들은 일본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특히 신라무덤보다 가야무덤들의 피해가 더욱 컸다. 그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소위 임나일본부설, 즉 4~5세기 일본이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직할식민지를 두고 있었던 곳이 김해를 중심으로 한 가야지역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도굴 외에 일본제국주의의 어용학자들을 동원해 김해패총을 비롯하여, 고령 함안 진주 창녕 고성 등에 분포하는 수많은 고분을 발굴했던 것이다. 김해패총이 발굴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들의 발굴동기를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신라의 경우 경주에 있는 신라무덤이 조사되어 금관을 비롯한 수많은 유물이 함께 출토되었다. 특히 금관이 출토된 무덤으로 금관총·금령총·서봉총을 들 수 있고, 이 밖에 금동관이 출토된 무덤은 대구달성 고분을 들 수 있다. 이들 신라지역과 가야지역을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에는 초기 철기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패류를 잡아먹고 버림으로써 이루어진 패총, 즉 조개무지가 구릉의 비탈에 묻혀 있으며 일부는 노출돼 있다. 이 패총은 이마니시 류(今西龍)란 일본인 학자에 의해 1907년 8월 발견되어 일본인 학자간에는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910년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게 빼앗긴 뒤, 총독부 조선고적조사위원회에 몸담고 있던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1914년과 1917년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발굴을 했고, 1915년에는 구로이다(黑板勝美)가 한 차례 발굴을 했다. 이처럼 세 차례나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나 거기에 따른 정식보고서는 없고, 1920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으로 있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와 사무촉탁 우메하라(梅原末治), 세키노(關野貞), 야쓰이(谷井濟一) 등이 다시 조사하게 된다. 발굴조사를 하게 된 이유에 대해 『유적의 성격과 연대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여 과거 도리이와 구로이다 양씨의 조사사업을 돕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앞선 두 사람의 발굴을 통해서는 유적과 출토 유물만이 관심의 대상이어서 유적의 성격은 전혀 밝힐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마다 등에 의해 이루어진 제3차 발굴조사(1920년 12월23일~12월29일)는 보충조사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1922년에는 후지다, 우메하라, 고이츠미(小泉顯夫)가 조사했고, 마지막으로는 1935년 12월29일부터 1936년 2월 중순까지 가야모토 리히토(榧本杜人)가 이곳에서 우연히 발견된 독무덤(甕棺墓)과 돌널무덤(石棺墓)을 수습, 조사하게 된다. 목적이야 어쨌든 우리나라 최초의 학술적인 발굴조사가 일본인 손에 의해서 김해패총에서 실시되었던 것이다. 패총 발굴조사에 관여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자. 1907년 최초로 유적을 발견한 이마니시는 도쿄제국대학 사학과를 졸업한 뒤 1910년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경주의 신라 고분을 발굴하는 등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깊이 연구 활동을 하면서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광복 후 일본으로 귀국해 교토대학에서 강의했다.

 

일본 고고학 실습현장 된 한국

 

    1914년과 1917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했던 도리이는 독학으로 공부한 후 역시 경술국치 이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전국의 유적을 찾아 헤매었다. 나중엔 범위를 넓혀 만주까지 돌아다니면서 고대 유적을 조사한 사람으로 조선총독부의 어용학자로 손꼽히는 사람이었다.

    그 역시 우리나라가 광복이 되자 귀국해 도쿄제국대학, 국학원대학에서 교수생활을 했으며 당시 국제적으로 알려진 인류학자가 되었다.

    1920년 네번째로 발굴조사한 하마다는 도쿄제국대학를 졸업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으로 있으면서 우리나라 고대유적을 많이 조사한 사람이다. 일본으로 귀국해 교토대학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일본 고고학계 교토파(京都派)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교토대학 총장까지 지냈다.

    역시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우메하라는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에 관여하면서 청동기 유적을 나름대로 많이 조사한 사람이다. 광복 후 교토대학에서 고고학을 가르치며 일본 고고학계 교토파의 초창기 주도자로 활약했다.

    이들 어용학자들은 광복 후 본국으로 돌아가 근대 일본 고고학의 기초를 세웠고 모두 대가가 되었다. 결국 우리나라를 고고학 실습의 현장으로 삼아 그 토대 위에서 일본 고고학을 꽃피게 했던 것이다.

    어쨌든 김해패총은 이들의 손에 의해 조사·발굴되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위원회에 관여하면서 일본의 대륙진출을 위한 전위대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다른 유적보다 임나일본부설을 확립시키고자 제일 먼저 김해지역에 눈독을 들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발표된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돌로 만든 유물, 짐승뼈로 만든 유물, 토기류, 철기류 등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특히 1920년 하마다 등이 조사할 때 중국 동전 1개가 출토되 었는데, 이 동전이 출토 유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중국 한나라 때 통용되던 화폐의 하나로서 서기 1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선시대에 사용된 상평통보(常平通寶)와 형태가 비슷하며 한면에 「貨泉(화천)」이라 씌었다.

    이와 같이 제조 시기가 분명한 동전이 출토되어 발굴유물 중 가장 귀한 유물로 대접받게 되었다. 일본인 학자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서기 1세기경에 형성된 패총으로 추정했다. 나아가 석기류와 함께 철제도끼, 철제손칼 등이 함께 출토된 것을 근거로 철기와 석기를 함께 사용한 시기, 즉 금석병용기시대의 유적으로 규정하고, 우리나라에는 청동기시 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광복 후 1950년대 북한에서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유적발굴조사를 통해 주장하게 되고 남한에서는 196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밝히게 된다.

 

일본으로 가져간 출토유물들

 

    고령 지산동 고분군은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에 있는 주산(主山)의 남쪽 능선상에 분포된 대가야시대의 무덤들로 현재 사적 제79호로 지정·보호받고 있다.

    이 지산동의 대가야 고분 일부를 최초로 발굴조사한 것은 1910년의 일로, 당시 조선총독부 고적조사 촉탁으로 있었던 세키노에 의해서였다. 그는 1895년 도쿄제국대학 공학 부를 졸업하고 1908년 모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09년에 우리나라에 들어와 1914년까지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 책임을 맡아 활약했던 사람이다.

    그는 1910년 야쓰이, 쿠리야마 순이치(栗山俊一) 고적조사촉탁과 함께 이 대가야 고분군에 대한 수습발굴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출토된 유물로는 뚜껑바리(有蓋鉢), 귀 달린 작은 항아리(耳付小壺), 뚜껑접시(蓋杯), 굽다리 뚜껑접시(有蓋高杯), 목단지(長頸壺), 가락바퀴(紡錘車), 쇠화살촉(鐵鏃), 쇠창 등이 있다. 특히 뚜껑접시는 소라고동 껍질이 가득 담긴 상태로 출토되었다. 이들 출토 유물 가운데 뚜껑접시 3점과 굽다리 뚜껑접시 1점은 당시 도쿄대학 공대에 옮겨 보관했으며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지산동 고분은 이후에도 역시 조선총독부 촉탁으로 있던 구로이타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상세한 조사내용은 알 수 없으나 출토된 유물 가운데 직경 1.5cm 미만의 금반지 1쌍과 소라고동이 가득 담긴 뚜껑접시 1점, 쇠뿔손잡이가 달리고 뚜껑이 마련된 잔(牛角形把手附有蓋盞), 항아리(土器壺), 양손잡이가 있는 뚜껑바리(兩耳附有蓋鉢) 1점, 그리고 양손잡이가 달린 뚜껑잔(有蓋兩耳附杯) 1점이 소개되고 있다. 이들 유물은 모두 일본으로 가져갔으나, 현재 어디에 보관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진주 수정봉·옥봉 고분군 발굴

 

    진주 구시가지의 동편에는 북에서 남으로 병풍처럼 뻗은 구릉지역이 있는데, 1910년 당시 이곳에는 가야시대 고분 7기가 있었다. 북쪽편의 봉우리인 수정봉에 무덤 3기가 있었고, 남쪽편의 봉우리 옥봉에도 무덤 4기가 있어 모두 7기의 무덤이 능선을 따라 분포하고 있었다. 이 일대의 고분 발굴조사 역시 일본인 세키노에 의해서였다.

    다음은 이 고분들을 조사한 세키노가 1941년 9월에 상부에 보고한 내용이다.

    『진주 동편에 솟아 있는 수정봉 및 옥봉 종상부에는 커다란 고분이 여러 개 있고 산성은 석축으로 고구려의 대성산성(大城山城)에 비하면 규모는 매우 작은 편이다.

    고분 4~5기를 조사한 바 다른 가야지역의 것과 같은 형식으로서 석곽 및 연도(널길)가 있고 평면이 장방형임과 동시에 그 구조는 일본고대의 능·묘와 흡사하다. 내부에는 목조의 관을 안치한 흔적이 있고 부장품으로는 각종 토기, 도검(刀劍), 창, 도끼, 재갈 등의 무기류 및 마구류 그리고 구슬, 가락바퀴 등이 있고 특히 토기는 그 형태 및 구워낸 수법이 일본 고대에서 출토된 것과 흡사하다. 또한 낙랑, 대방, 고구려의 고분과 구조 및 부장품 등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점을 볼 수 있다.

    이로써 가야 민족이 일본과 깊은 연유가 있고 고구려 혹은 한민족과의 관계가 매우 드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야지역 발굴이 소위 그들의 과거 식민지였다는 억지 사실을 증명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출토된 유물로는 말재갈, 발걸이, 그릇받침과 목단지, 뚜껑바리, 굽다리뚜껑접시, 가래날, 가락바퀴, 청동바리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 수정봉 3호분에서 출토된 유물만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 보관되고 있으며 나머지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일본 도쿄공과대학에 옮겨 보관했기 때문에 지금도 그곳에 소장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일대에는 조사 당시만 해도 모두 7기의 가야고분이 있었으나 지금은 옥봉에만 2기의 고분만이 남아 경상남도 지방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나머지 고분은 개간 등 지형의 변화로 없어졌다.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에는 말이산의 능선을 따라 옛 가야시대의 대형고분이 50여기가 분포하고 있으며 사적 제84·8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들 무덤은 일제시대에 대부분 도굴되었거나 일부 발굴조사됨으로써 무덤에 부장되었던 유물이 거의 도난당하고 지금은 외형의 봉토만 일부 정비된 채로 옛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가운데 현 함안군청 뒤편의 아라공원 내에 있는 제34호분의 봉분이 외형상 가장 높고 큰데 1917년 당시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으로 있던 이마니시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발굴조사는 그해 10월14일부터 26일까지 2주간에 걸쳐 실시되었다. 당시 이 34호분 외형의 규모는 높이가 약 10m, 밑지름 약 40m에 달했다.

    이 고분에서 특이한 것은 동서의 긴 벽에 각 2개소, 북벽 1개소에 어떤 물건을 놓을 수 있는 감실(龕室)이 마련되게 벽면을 쌓았다는 점이다. 또한 벽면의 윗부분에 돌아가면 서 못이 박혀 있는 것으로 보아 휘장을 쳤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부장품으로는 토기, 마구, 갑옷, 칠기 등 신라유물과는 뚜렷이 다른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특히 수레바퀴장식토기(車輪飾土器)는 당시 가야지역에서 최초로 출토된 특수 토기로 기록되었다.

    발굴을 통해 밝혀진 이 무덤의 규모와 유물로 볼 때 함안지방이 기록에 아라(阿那), 안라(安羅) 등으로 불리는 아라가야의 본거지로 추정되었고 아울러 이들 대형의 봉토 고분들이 5세기 아라가야 지배계급의 무덤으로 추정되었다.

    이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다행히 일본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광복 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1984년 11월 개관된 진주박물관에 그중 일부가 진열·전시되어 관람객을 맞고 있다.

 

도굴품 거래 성행

 

    양산 부부총은 경상남도 양산군 양산읍 북정동 산에 있는 고분군(사적 제93호) 가운데 하나로 6세기경 신라시대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이 무덤은 1920년 11월13일부터 25일까지 일본인에 의해 발굴조사됐다. 당시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으로 있었던 우마즈카 제이치로(馬場是一郞)와 총독부 기수였던 오가와케이키치(小川敬吉)가 발굴 조사를 담당했다.

    이들이 왜 이 무덤을 발굴조사하게 되었는지 이유를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다만 총독부 명을 받아 조사하게 되었다고만 하고 있을 뿐이다. 발굴조사 전 두 사람이 협의한 내용에 「효과적인 고분을 선택하고 기간은 10일 전후로 완료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유물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무덤을 선택적으로 발굴하게 되었음을 읽을 수 있고, 또 짧은 기간내에 발굴을 끝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발굴 당시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발굴조사 2일째 되던 1920년 11월14일 고분의 소유자라고 자칭하는 사람이 나타난 것. 그는 부근의 소규모 묘지가 선대 묘역이므로 이 고분 역시 자신의 조상묘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발굴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사람은 당시 일본인 모씨에게 이 고분군에 매장된 유물을 팔겠다고 상담한 적이 있었으나 가격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당시 일본인과의 도굴품 거래가 있었음은 물론 공공연히 도굴이 자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11월17일, 석실 벽 일부를 뜯어내고 마련된 구멍을 통해 들어가 조사했다. 널길 부분을 찾지 못해 기간 내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봐 벽면을 일부 제거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조사 당시 벽이 무너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과 위험을 참고 용기를 내어 무덤 속에 들어가 부부 및 5인의 시신을 확인하고 나왔을 때는 공교롭게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고 한다. 일단 철수하고 다음날 사진사를 불러 내부 촬영을 했는데 내부가 어둡고 광선이 부족했을 뿐 아니라 섬광기가 없어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어쨌든 11월 25일에는 유물수집과 함께 새로운 항아리를 마련해 유골을 담아 다시 안치하고 조사를 완료했다.

    이 무덤은 동서로 길게 축조된 돌방무덤으로 서편에 널길이 조금 높게 마련되었고 내부의 중앙단에는 주인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이 동쪽으로 머리를 둔 채 나란히 안치되어 있었고, 발치의 낮은 단에는 남쪽에 머리를 둔 3인의 유골이 역시 같은 간격으로 나란히 누워 있었다.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관을 비롯해 장신구류, 토기류 등이 많았다. 특히 신라 금동관의 출토는 우리나라 고분발굴사상 최초의 일로 기록되었다. 조사자들은 이 무덤의 중앙에 안치된 두 유골을 무덤 주인공 부부로 판단해 「양산 부부총」으로 이름짓고 그 보고서를 발간했다. 지금 이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일본 도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나라에 반환되어야 할 것이다.

    이밖에 1931년경에는 창녕의 가야고분이 거의 전부 도굴되었는데 1백여기의 가야무덤에서 꺼낸 유물이 마차 20대, 화차(貨車) 2대 분량이었다고 한다. 현재 이들 유물의 행방은 알 수 없지만 대부분 일본으로 흘러 들어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천년고도인 경주의 유적 발굴은 1910년 우리의 주권이 일본에 강탈되기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는 일본인의 손에 의해 지하에 매장되어 있던 신라의 문화유산이 발굴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경주의 평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시대 고분들에 대한 인식이 없어 무덤이 아닌 인공의 산으로 생각할 지경이었다.

    일제시대 발굴유물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금관을 들 수 있다. 금관이 출토된 무덤발굴을 보면 금관총·금령총·서봉총이 있다. 금관총은 경주시 노서동의 도로변에 그 유지(遺址)가 있는데, 1921년 9월의 이 무덤 발굴은 신라고분 발굴사에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다. 당시 경주 노서리에 있던 주막(酒幕)집에서 뒤뜰을 확장하려고 터파기 작업을 하던 중 우연히 유물이 발견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노서동에 분포하고 있었던 고분군 가운데 폐고분을 의지한 곳에 주막이 들어서 있던 것인데, 그런 줄도 모르고 봉토를 제거해서 낮은 곳을 메워 뜰을 넓히고자 했던 것이다. 택지조성 작업중인 1921년 9월23일경에 이 금관총의 매장 주체부에서 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했다.

    이 소문은 경주경찰서에 근무하고 있던 순경의 귀에 들어갔다. 그 순경은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가 즉시 작업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그는 이 무덤이 신라의 왕 또는 어느 귀족 의 무덤으로 여겨진다면서 경찰서장에게 유물 발견 경위를 보고서로 제출했다.

    보고를 받은 서장은 당시 경주주재 총독부박물관 촉탁으로 있던 모로시카 히로오(諸鹿央雄)와 함께 현장에 나가 상황을 살펴보고 경찰서장 입회하에 발굴조사를 하기로 결정했다. 모로시카를 비롯해 당시 경주보통학교(현 계림초등학교) 교장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그리고 고적보존회 촉탁 와타리 후미야(渡理文哉) 등과 함께 9월27일부터 유물 수습을 시작해 9월30일에 작업을 마침으로서 4일 만에 유명한 금관총의 발굴은 완료된다.

    고분의 분포도와 현황 파악이 되지 않은 당시 상황에서 만약 그러한 소문을 조사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거나 아니면 하루라도 늦게 현장에 나타났다면 중요한 유물이 여기저 기 흩어졌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은 이 고분이 신라시대의 금관이 최초로 출토된 무덤이었다는 것을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사가 단 4일 만에 끝났다는 사실은 바로 목곽의 바닥부가 완전히 드러난 상태에서 유물만 수습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금빛 찬란한 순금제의 금관이 출토되어 이를 기념하여 「금관이 출토된 무덤」이라는 뜻에서 발굴 후 「금관총」으로 부르게 되었고 고(古)신라시대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최초로 금관이 출토된 무덤으로 기록되 었다.

 

금방울장식 금관 출토

 

    두번째로 금관이 출토된 무덤은 금령총이다. 이 무덤은 경주시내 중심에 있는 봉황대 바로 곁에 그 터만 현재 남아 있다. 금령총의 발굴조사도 일본인의 손에 의해 이루어져 금관총에 이어 신라의 금관이 두번째로 출토된 무덤이 되었다. 우연히 발굴된 금관총은 교란된 상태에서 비전문가에 의해 감자 캐내듯 4일 만에 끝났기 때문에 무덤의 구조 를 정확히 밝히는 데 부족한 점이 많았다. 관심있는 학자들은 고신라시대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와 성격을 학술적으로 구명하기 위해서 또 다른 무덤을 발굴조사할 욕심이 있었다.

    그래서 금관총 발굴 3년 후인 1924년 당시 경주읍 노동리의 민가 사이에 있는 무덤을 택해 조사하기로 하고 나름대로 학술적인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발굴을 주관했던 사람은 조선총독부 촉탁이었던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 그는 출토된 유물을 정리하여 1931년 보고서를 펴냈다. 발굴 결과 순금으로 만든 금관을 비롯해 서 신라시대 생활을 알 수 있는 다량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당시 출토된 중요유물을 보면 금제 허리띠 및 장식품, 백화수피로 만든 관모, 금구슬, 유리구슬이 달린 목걸이, 금제 귀걸이, 금제 팔찌, 금제 가락지, 금동제 신발, 다량의 토 기, 큰칼(大刀), 마구류(馬具類)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며 특히 토기 중 다리 달린 배 모양 토기와 신라토기로서는 최초로 국보 제91호로 기마인물형 토기도 출토되었다.

    금령총 역시 금관총과 마찬가지로 발굴 조사 결과 금관을 비롯해 대단한 유물이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왕이나 귀족 이상의 무덤이란 심증은 있지만 주인공을 밝힐 수 있는 단서가 아무것도 출토되지 않아 왕릉으로는 부를 수 없게 되었다.

    발굴자들은 이미 금관총이라고 이름을 붙인 고분이 있기 때문에 또다시 금관이 출토되었다고 제2금관총이라 이름할 수도 없어 고심했다. 그러다가 무덤에서 출토된 금관에 그때까지 보지 못했던 금방울 한쌍이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보고 「금방울이 금관에 장식되어 출토되었다」는 뜻에서 「금령총」이라 부르기로 했던 것이다.

    세번째로 금관이 출토된 것은 서봉총이다. 이 무덤은 경주 노서동 고분군에 있었는데 현재 그 위치에 비석단을 만들고 우리글과 영어로 쓴 기념비를 세워 두었다. 서봉총은 금관총에서 서쪽으로 불과 50여m의 거리를 두고 있던 쌍분으로서 조사결과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으로 밝혀졌다.

 

스웨덴 황태자가 발굴조사 참여

 

    서봉총의 발굴조사는 금령총의 발굴조사 2년 후인 1926년에 역시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금관총·금령총이 발굴됨으로써 경주 노동리·노서리 일대에 분포한 신라 무덤에는 금관이 함께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 그때 당시 조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예비지식으로 되어 있었다.

    1926년 5월, 대구에서 경주·울산을 경유하여 부산에 이르는 협궤철로를 광궤철로로 개수할 때 경주역에는 기관차 차고를 함께 짓기로 되어 있어 그 용지를 매립해야 했다. 매립할 흙이 필요하게 되자, 현재 경주시에서 고분공원으로 가꾸어 놓은 황남동 일대의 고분군 가운데에 있는 밭의 흙을 옮겨 매립하기로 하고 토목공사를 벌였다.

    이 토목공사 중 신라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급보를 받고 당시 조선 총독부 촉탁으로 근무하고 있던 고이츠미가 경주로 급파되었다. 밭을 갈아 경작하고 있는 야트막한 능선들 은 모두 신라시대 무덤들이었기 때문에 공사 도중 유물이 출토되는 것은 뻔한 이치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봉분이 파괴된 것을 모르고 그저 땅에서 유물이 나온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6월 말경에 이르러서도 기관차 차고를 짓기 위한 용지가 매립되지 않자 또다른 토취장을 찾아 나섰다. 그 결과 노서동에 있었던 서봉총이 발굴된다. 동서 폭 35m, 남 북 길이 52m, 높이 7m의 규모였던 서봉총도 역시 봉토가 깎여나가 경작지로 변해 있었기 때문에 토취장이 되었던 것이다. 토취는 하되 학술적인 발굴조사를 하는 조건이었다.

    경주에서 서봉총 발굴이 진행되고 있을 때 당시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 황태자 부부가 일본을 방문중이었다. 황태자 부부는 일본의 고도(古都)인 나라의 옛 사찰과 쇼쇼인(正倉院)에 보관되어 있는 보물들을 관람하고 우리나라를 경유, 중국을 방문할 계획이었다. 황태자가 그리스, 로마 등의 고분 발굴에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어 발굴에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안 일본은 마침 경주에서 발굴되고 있는 신라고분 발굴현장을 방문할 수 있도록 계획했다.

    당시 일본 교토대학 고고학과 교수인 하마다가 황태자를 안내하여 발굴현장에서 함께 작업을 하게 된다. 이로써 이 무덤은 국제적인 발굴이 되었다. 신라 무덤이 일본의 외교적인 수단에 이용된 셈이다.

    발굴 결과 금령총보다 많은 신라시대 유물이 출토된다. 그러나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출토되지 않아 역시 이름을 짓는 데 고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스웨덴의 황태자가 발굴에 참여한 것을 기리고자 스웨덴의 한자표기인 서전(瑞典)에서 「서」자를 취하고, 출토된 신라금관 장식 가운데 금관총이나 금령총 의 금관과는 달리 봉황새 모양 장식이 있어 봉황(鳳凰)의 「봉」자를 취해서 「서봉총」이라 이름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서봉총의 봉토 흙은 제거되어 경주역 기관차 차고지의 매립에 사용되었고, 지금은 그 위치에 발굴 후 작명된 이름과 함께 간단한 내력을 알 수 있는 비석이 마련 되어 찾는 이를 맞이하고 있을 뿐이다.

    이밖에 금동관이 출토된 무덤으로 대구 달성고분을 들 수 있다. 1920년대만 해도 현재의 대구시 서구 비산동·내당동 일대의 구릉지대에는 무려 87기나 되는 무덤이 군집되 어 있었으나 지금은 시가지로 변해 모두 없어졌다.

    이 87기의 고분 가운데 34호 고분의 발굴조사는 1923년 7월에 실시되었다. 그해 봄 달성공원의 서남 후사면 구릉 아래에 새로운 시장을 개설하기로 결정하고, 대지 조성에 필요한 흙을 채취하기 위해 일대의 구릉지를 토취장으로 하였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당시 구릉인지 무덤인지 구분 못할 정도로 큰 고분 7기가 파괴되어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신라 유물 발견이 작업인부의 입을 통해 퍼져나가게 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대구경찰서장이 즉각 토취에 따른 고분 파괴행위를 중지시키고 총독부에 조사원 파견요 청을 하게 된다.

 

청동으로 만든 정강이가리개

 

    총독부에서는 당시 경주지역 유적조사를 하고 있던 고가와 케이기치(小川敬吉)과 고이츠미를 조사차 파견했다. 고이츠미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무덤들은 완전히 파괴되어 봉토와 석실의 석재가 산란한 가운데 토기 조각이 박살난 채로 흩어져 처참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미 많은 고분이 파괴되고 흔적만 남기고 있었다는 얘기다.

    대구경찰서에서 중지시켜 토취가 중단된 고분도 이미 봉토의 상반부는 파헤쳐졌고 무너진 돌방의 일부가 노출된 채 내부가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이미 부장된 유물의 일부도 보이고 있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경관의 보호에 의해 그나마 현상태로 유지될 수 있었다.

    조사자 중 고가와는 당시 구릉 일대에 남아 있는 고분군을 측량해 모두 87기가 분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무덤마다 번호를 부여하여 분포도를 작성했다. 이때 경찰에서 중지시킨 무덤이 고이츠미가 책임맡고 조사한 34호분이다.

    34호분은 발굴 당시 외형으로 보아 직경 약 11m, 높이 약 4m 정도의 원형봉토분이었다. 조사된 돌방은 대개 봉토의 중앙부에 만들어졌고 크기는 길이 4.9m, 좁은 폭 1.32m, 넓은 폭 1.55m, 높이 약 1.7m, 바닥에는 16cm두께로 작은 돌들이 깔려 있었다. 이 무덤은 통로인 널길이 없는 순수한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墳)으로 판자형태의 돌 5장을 잇대어 올려 천장을 만들었다.

    피장자는 목관 내에 안치되어 있었고 출토된 유물로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관모(冠帽), 은으로 만든 허리띠 및 장식, 금귀걸이, 수정으로 만든 구슬 등 장신구류, 고리 달린 큰 칼, 철창 등 무구류, 말재갈·발걸이 등의 마구류, 굽다리접시·토기항아리 등 옹기류, 목관에 사용된 못 등 다양했다.

    출토 유물 가운데 처음 발견된 것으로 청동으로 만든 정강이가리개가 있다. 이 정강이가리개는 무구(武具)의 일종으로 발목에서 무릎까지 감싸 다리를 보호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이 구덩식돌방무덤에서 정식으로 출토된 것은 우리나라 발굴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출토된 유물이 무구 등인 것을 보면 주인공은 남성이며, 또한 무덤을 축조한 연대는 5~6세기경으로 추정될 수 있다.

    이 무덤을 직접 발굴한 고이츠미는 1922년 우리나라에 와서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근무하면서 광복 전까지 전국의 유적·유물을 발굴했고, 1934년에 개관한 평양박물관 초대 관장이 된 사람이다. 서봉총 금관과 허리띠 장식을 평양기생에게 씌우고 매게 한 장본인이다.

    달성 34호분 조사가 완료된 후에도 공설시장 부지를 매립하기에는 흙이 부족했다. 그래서 부지조성을 위해 보존이 어렵게 된 무덤들을 발굴조사 후 원형대로 복구하지 않고 봉분의 흙을 매립토로 사용하게 된다.

 

고대사 규명에 필요한 유적 훼손

 

    당시 토지소유자의 고분 발굴의뢰와 대구시가의 발전에 따라 달성고분군을 전부 보존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1923년 10월23일부터 12월31일에 걸쳐 일대의 고분 중 봉토가 비교적 큰 6기를 다시 발굴조사하게 된다.

    조사된 고분은 원형의 봉토를 갖춘 무덤으로 중앙부에 돌방을 마련한 후 위에서 시신을 돌방으로 내려서 안치하는 소위 구덩식돌방무덤이었고, 규모가 작은 돌방을 함께 마련하여 부장품을 넣은 무덤도 있었다.

    대부분 강돌과 할석을 이용해 돌방 벽을 구축했고 천장은 판자모양의 화강암 여러 개를 아귀맞춰 덮었다. 재미있는 것은 벽면이나 천장의 틈새를 짚이 섞인 점토를 발라 벽면을 고르게 한 점인데 이것이 바로 이 고분의 특징이기도 하다.

    6기의 무덤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관, 귀걸이 등 장신구류와 둥근고리큰칼 등 무구류, 말재갈멈치 등 마구류, 토기 등 용기류 등이 수습되었다. 특히 37호분에서는 주곽과 부곽에서 각기 금동관이 출토되어 무덤 피장자의 신분을 이해하는 데 중요유물이 되었음은 물론 1920년 양산 부부총에서 금동관이 출토된 이후 대구지방에서도 출토 예를 보여준 것이다.

    금동관에 버금가는 중요한 유물로 55호분에서 출토된 둥근고리큰칼을 들 수 있다. 둥근고리큰칼은 매우 독특한 금동제품으로 하나의 칼집에 두 자루의 칼이 각기 들어갈 수 있도록 했으며, 각각의 칼집 밖으로 보다 작은 칼집을 덧대어 실제로 사용하지는 않았고, 의식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아무튼 대구 달성고분군은 1923년 조사 당시 총 87기가 확인되었으나 이것은 외형상으로 봉토가 확실한 것에 국한된 것으로 봉분이 없었던 무덤도 많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은 완전히 시가지로 변하여 그 흔적조차 없어져 버렸지만 정확히 어떤 경로로 없어진 것인지 확실치 않다. 당시 작성된 고분 분포도를 보면 이 6기가 조사된 후에 토취 때문에 나머지 고분도 그 시기에 대부분 없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대구를 중심으로한 고대사 구명에 있어서 중요한 유적을 완전히 인멸시킨 것이다.

 

趙由典<국립민속박물관장>


신동아 1997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