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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울에 비추어 보기
본지에서는 창간호부터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금기중의 하나인 민족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데 역시 논란이 뜨겁다. 이 글에서는 우리의 강한 민족주의가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진단을 해보려고 한다. 사람들의 사고 습관 중에는 '무엇이 당연하다'고 생각되면
그때부터는 그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민족주의에 있어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민족주의에 입각한 생각, 행동을
당연시 하다보니 그것이 얼마나 이성적이지 못하고, 때로는 인도주의에 어긋나고, 진실에서 쉽게 벗어나는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한발 떨어져서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는 작업이 의미가 있다. 민족주의에 몰두해 있는 우리의 모습을 거울에 한번 비추어보자는 것이다. 이때 반드시
'민족주의는 당연하다'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서, 만약 그렇지 않으면 눈에 안 보이는 것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족주의의
속성은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에 그 전체를 한꺼번에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편의상 우리의 민족주의의 여러 모습을 성질이나 사안별로 몇 개로
나누어서 살펴보려 한다. 민족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은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이다. 이 배타성과 동전의 양면관계에 있는 것이 자기민족
우월주의이다. 민족이 다르게 되면 언어, 문화, 신체적 특징 등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구분할 수 있는 근거는 있게된다. 그런데 민족주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민족간의 '차이'를 우(優)와 열(劣)로 등위를 꼭 매기려고 한다. 속이 좁아서 타민족을 배타시 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민족과 열등한 민족이 어떻게 같이 놀 수 있는냐는 나름의 논리가 민족주의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결국 민족주의는 그 생존논리상 필연적으로
자기민족의 우월성과 타민족의 열등함을 증명하기 위해 집요한 열정을 보이게 된다.
그 결과는 불을 보듯이 뻔하다. 마치 자의적으로
범인을 찍어놓고 그 증거를 수집하는 것처럼 거기에서는 이미 무엇이 진실인가에 대한 관심은 설자리가 없게된다. 흔히 이를 두고 '목적론적'
접근이라고 부른다. 민족주의가 '사실'이나 '진실'로부터 멀어져 '허위'와 '왜곡'의 세계로 향하는 날개를 달게되는 것은 자기민족과 타민족은 그
질이 다르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다른 민족에 대해 어떤 거리감이나 부자연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있을 수 있다. 특히 우리 민족처럼 매우
예외적으로 단일민족국가의 경험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을 경우 '고쳐야 할 습관' 정도로 이해할만하다. 그런데 더 나아가 타민족과 교류하고,
협력하고, 함께 섞여 사는 것에 대해 마치 불순물과 어울리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사태는 심각해진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 코소보 등지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인종청소'는 민족주의의 이런 속성이 얼마나 큰 비극을 몰고 올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럼 이제 우리의 모습이 나치 치하의
독일(게르만)민족, 현재의 유고(세르비아)민족과 크게 다른 것인지 보도록 하자.
2. 과거속에 사는 민족
고구려의 존재가 우리 민족의 우월성의 증거일까?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사람들 사이에 가장 인기가 있는 시대는
먼 과거에 속하는 고조선과 고구려 등의 고대사이다. 특히 고구려라는 말만 들으면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뛴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 나라들은
만주를 비롯한 북방의 영토를 차지하며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으니 역시 국제적인 열강이었다는 것이다. 북방지역의 고대사에
대해 관심이 높은 것은 '영광의 시대'라고 부를만한 사실도 있지만 우리 민족의 본래모습을 거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매력이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흔히들 하는 '왕년에 나도 어땠었다'는 심리와 유사하다. 그런데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토가 현재 중국땅의 어디까지였는지, 그
나라들의 문화수준은 어떠했는지, 공자가 동이(東夷)족일 가능성이 있다든지 하는 등의 논란은 역사학자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고조선이나 고구려의
존재가 과연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말해줄 수 있는지 따져보자.
우선 그 나라들은 현재의 기준으로 본다면 다민족국가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가 고조선이후 단일민족국가를 유지해온 것을 상식으로 알고있지만 이는 편의적인 생각이다. 적어도 당시 북방지역에는 거란족, 여진족
등이 많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주류를 형성했다고 하여도 결코 단일 민족국가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그 시대의 '영광'은
우리 민족만이 독점 할 수 없게되는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북방의 여러 민족들 중에 거의 유일하게 우리만이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에
머물렀을 뿐 타민족들은 한번쯤은 중원을 경영하였다. 거란족은 요나라를, 몽고족은 원나라를, 여진족은 청나라를 세웠다는 평소에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고조선과 고구려에 열광할 때 아주 쉽게 잊어버린다. 과거사에서 중국과 얼마나 대등한 관계를 이루었는지를 그 민족 평가의
하나의 기준으로 삼는 논리에 충실한다면 오히려 우리 민족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어야 옳다.
만약 현재의 몽고사람들이 과거
칭기즈칸 시대의 향수에 빠져 우월감에 집착하고 있다면 비웃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며, 애정이 있는 사람은 '과거는 과거일 뿐이니 이 시대의 발전을
위해 충실하라'는 충고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칭기즈칸 시대와 지금의 몽고와는 아무런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그러나 몽고인들이 더 열심히
사는데 있어서 몽고제국에 대한 자부심은 좋은 동기부여가 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론을 할 지도 모른다. 물론 '본래 우리 민족은 싹수가 있다'는
자신감이나 '조상들 낯을 보아서라도 잘 하자'라는 책임감은 아무 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만이 사람들의 열성을
끌어내는 것은 아니다. '내 자신을 위해서 나아가 다음 대를 위해서'라는 생각이 훨씬 더 현실적이다. 더구나 민족의 과거사에서 끌어온 우월성을
당대 발전의 동력으로 삼는 경우 반드시 그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도 커져가기 때문이다. 오히려
'민족간에 우열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지금 우리 민족이 비록 뒤쳐져 있지만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실에도 맞으며 부작용도 없다. 다시 몽고의 예를 들면 몽고와 중국은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닌데(한국사람이 몽고에서 중국사람으로 오해받아 봉변을
당할 정도이다), 몽고사람들이 과거사에 집착한다면 '한때 우리 밑에서 지배받던 놈들이 감히'하는 생각을 키워나갈 것이다. 그런데 몽고와 중국이
사이가 나쁘면 나쁠수록 더 손해보는 것은 약한 몽고일 수밖에 없다. 소련이라는 비빌 언덕도 없어진 마당에 이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과거를 미화하는 현상은 근대의 일제식민지 경험을 의식한 측면이 크다. 만약 이런 아픈 경험이
없었다면 그 집착의 정도는 좀 더 약해졌을 것이다. 북방영토에 대한 강한 집착은 오히려 중국보다는 일본을 더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동북아시아에서 우리 민족의 위상이 중국과 일본의 양자구도 하에 곁다리가 아니라는 강한 절규를 듣는다면 지나친 것일까? 조선조 효종의
'북벌계획'에 대한 묘한 흥분과 그 무산에 대해 아쉬움을 갖거나 '위화도회군'을 한 이성계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는 경우들을 볼 때 우리의
민족주의는 약소민족의 방어적, 생존권적 민족주의인 만큼 긍정적이며, 강대국의 패권적 민족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항변이 억지가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비판은 정당한가?
이번에는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과거역사를 왜곡하는
현상에 대해서 보자. 대표적인 사례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 당나라라는 외세를 끌어들였다면서 비판하는 시각이다. 이때 그 대가로 고구려를 당에게
내주어 미완성의 이국(二國)통일에 그쳤다는 성토도 덧붙여진다. 물론 이 비판의 이면에는 고구려 주도로 삼국통일이 이루어졌어야 했다는 판단이
깔려있다. 과거역사에 대해 단순히 사실의 확인뿐 아니라 나름의 평가를 할 수 있는 권리가 후대사람들에게는 있다. 그런데 이 평가가 후대의
자의적인 기준에 의해 이루어질 때는 왜곡의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평하는데 있어서 그 전제가 되는 기준에 착각이
하나 있다. 삼국시대에는 우리 민족 내에서 '우리'라는 의식이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약했다는 사실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 신라가 본래 하나의 뿌리를 갖고 있다는 명분을 세워 삼국의 통일을 도모하였고 언어가 대체로 통했다는 사실 등에서 미루어 볼 때(삼국사이에
통역이 필요했다는 기록은 아직까지 없음) 삼국사이에 어느 정도 동질성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반면 백제의 유민들이 대거 일본으로
이주하고, 고구려의 유민들이 중국에 흡수동화되는 과정을 볼 때 타민족에 대해 경계선을 분명하게 긋는 사고를 가졌다고 추측할 근거도 발견하기
어렵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당나라와 동맹을 맺은 신라는 물론이고 고구려나 백제 또한 이를 '감히 외세를 끌어 들였다'고 보지 않았다. 삼국사이의
상황에 따라 이런 저런 연합이 이루어졌던 것과 나당(羅唐)연합과의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를 느꼈을지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삼국시대에 타민족에 대해 구별하는 관념이 어느 정도 형성되었는지 여부를 떠나서 민족내부의 분쟁에는 타민족의 개입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절대적인 도덕처럼 보아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우리는 한국전쟁에서 남과 북이 각각 미국과 중국 등의 지원을 받았다. 서로 상대방만이
외세를 끌어들였다고 비난하지만 남북 모두 외세의 도움을 받았다. 이것은 어떻게 평해야 하는가? 같은 민족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분쟁을 할 수
있으며 이 해결과정에서 일반적인 국가사이의 분쟁처럼 얼마든지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나라의 개입이 가능한 것이다. 외부의 개입이 분쟁의 해결에
방해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역으로 도움을 줄 수도 있다. 민족내부의 분쟁이라고 해서 무언가 특별한 해결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 평가절하 하는 시각은 민족이나 민족의식도 신비하게 주어진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혹시 유전자에 민족에 대한 정보가 담겨 유전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로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결국은 역사의 상대적인 산물이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예컨대
부족단위의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민족을 몰랐고 이 부족 또한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소멸했듯이 긴 역사의 과정에서 보자면 민족이라고 해서 특별히
절대성을 부여 할 근거는 없다.
현재 우리의 민족주의가 너무나 당연시되다 보니 오랜 옛날부터 우리가 그래왔던 것처럼 생각하는데
사실은 강한 민족주의의 역사의 시작은 아무리 멀리 올라가도 구한말을 넘기는 어려울 것이다. 조선조까지만 해도 크게 보면 우리도 중국의 일부라는
의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이를 두고 잘못된 모화(慕華)사상이니, 조선은 사실상 청의 속국이었다는 평가도 하는데 이 또한 수긍하기
어렵다. 조선의 입장에서 문화가 발달하고 나라가 큰 중국에 대해 가능한 거리감 없이 대하는 것이 안정과 발전에 유리한 것인지 아니면 불리한
것인지 판단해 보면 그 답은 분명하다. 오히려 청나라에 대해 초기에 이른바 오랑캐라고 해서 배타시 하고 그로 인해 엄청난 화를 자초했던 명분론을
문제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큰 나라와 작은 나라 사이에 조공이 이루어지고 세자책봉, 왕비간택 등에 비록 형식적이나마 간섭이 있었던 것은 그
당시 국가관계를 맺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이제 와서 이를 제국주의와 식민지관계와 비슷한 것으로 본다면 인류사를 하나의 평면위에 놓고 재단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3. 한일관계
일본의 식민지배는 가장 악독했는가?
우리의 일본에
대한 인식이나 태도는 무척 높은 수준에서 통일이 잘 되어 있다. 그런 만큼 이 다수의 공감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는 문제제기는 종종 험한
욕까지 듣기도 한다. 세계를 돌아보면 인접한 나라들 혹은 민족들 사이에 사이가 안 좋은 경우가 무척 많다. 알바니아와 세르비아, 이란과 이라크,
독일과 프랑스, 그리스와 터키 등을 우선 떠올릴 수 있는데 인접하다보니 그만큼 분쟁이 많았고 이 과거에 대한 앙금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우리 나라와 일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복잡 미묘한 한일관계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여기는 일제 식민지문제부터 생각해보자. 일본이 우리 나라를
식민지로 삼아 지배한 것이 부당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인정해야 할 사실은 당시에 강대국이라면 어떤
예외도 없이 식민지 쟁탈전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만약 입장을 바꾸어서 우리 나라가 먼저 근대화가 되었다면 우선 가까이에 있는 일본을 식민지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지금은 식민지정책이 나쁜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심지어 식민지배를 받는 민족
내에서도 보통은 상당수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제국주의정책을 폈던 영국, 미국, 독일, 프랑스 등과 비교하여 일본을 특별하게
더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직접적인 피해자와 가해자사이니까 그렇다고 할지 모르지만 필리핀, 인도 등의 국민들이 미국이나 영국에
대해 심한 악감정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을 보면 식민지배 피해자들의 보편적인 정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군국주의를 표방했던 일본은
민주주의국가였던 미국이나 영국보다 더 악독하게 식민지배를 했기 때문에 우리의 대일(對日)감정은 당연한 인과응보(因果應報)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서양인들은 동양인에 대해 인종적인 편견을 갖고 있었고 문화적인 차이도 심했기 때문에 식민지 민중들을 인간이하로
취급하였다. 일본은 그에 비하면 결코 심하지 않았다. 어차피 비슷한 문화권에서 서로 대등한 관계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일제시대를 경험한 노인들 중에는 자신들이 겪었던 공장주, 교사, 상점 주인이었던 일본인들에 대해 좋은 기억을 말하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게 있다. 그리고 최근 황장엽씨의 자서전을 읽어보니 일본 현지에서는 거의 차별이 없었다고 한다. 물론 전쟁기에 접어들면서 착취와 압박이
강해졌는데 으레 어느 사회나 전쟁기에는 그렇듯이 정도차이는 있었지만 이때는 일본인들도 고통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해 결코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특별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생각하든 과거에
얽매어 서로 나쁜 감정을 계속 갖는 것이 합리적인 태도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반일(反日)의 부메랑 효과
한일관계는 평소에는 잠잠하다가도 일본 정치인들의 식민지 미화발언이 나오거나 독도분쟁이 표면화되면 온 사회가 끓는 물처럼
되어버린다. 조금이나마 개선되었던 한일관계도 다시 원점으로 회귀한다. 이때는 일본에서 먼저 자극을 했으니 우리의 대응이 강력해야만 다시는 넘보지
못한다는 논리가 우세하다. 허나 우리는 정작 중요한 점들을 놓치고 있다. 하나는 일부 정치인들의 망언은 일본다수국민들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사실이다. 제국주의의 길을 걸었던 서구의 다른 나라들의 국민들처럼 일본 국민들도 식민지배가 옳지 않았다는 생각을 할 정도의 양식은 갖고 있다.
또한 우리의 과잉대응은 일본내의 민족주의에 불씨를 지피는 작용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한쪽의 민족주의는 관계되는 다른 쪽의
민족주의를 상승시키는 속성이 있다. 그런데 동북아에서 민족주의가 고조되면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우리 민족이 가장 손해를 보게되어 있다.
초강대국인 일본이나 중국의 민족주의는 대외적인 패권정책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지나친 흥분보다는 좀더 점잖게 행동하자는
품격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이익을 위주로 좀더 냉정한 계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본 고대문화 전파를 둘러싼 논란
일본에 대한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찾는 작업은 고대사와 스포츠라는 두 가지 영역에서 주로 이루어진다. 한반도를 통해 일본에 문화가
전해졌다는 증거가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나오면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뿌듯한 기분을 느낀다. 이와 관련된 사학(史學)계의 논쟁거리도 꽤 있다.
대륙의 발전된 문화가 일본으로 전파되는데 있어서 한반도를 통했다는 사실과 우리 민족의 일본에 대한 우월성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일본에
전해주었다는 문화가 우리 민족만의 창조물이 아니라 중국을 포함한 여러 민족이 함께 만들고 발전시켰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이 답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본에는 우월감을 중국에는 열등감을 느끼면 일관성있는 태도가 될까? 전근대사회에서 문화의 발전은 주로 지리적인 요인과 인구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다. 지리적으로 타 지역과 교류가 용이하고 인구가 많아(주로 농업과 상업이 번성한 곳) 다양한 경험이 가능한 곳으로 선진문화가
축적되어 여타지역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이나 오세아니아 원주민들의 문화수준이 그들의 열등함 때문이 아니라 지리적인 고립 때문에
낮은 상태에 놓여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고대문화의 전파문제를 놓고 아무 상관도 없는 민족간의 우열을 논하지 말자. 더구나 일정기간(통일신라이후
일본은 중국과의 직접적인 문화교류의 비중을 더 높였다) 일본에 대륙문화를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일본인들이 잘 기억하고 우리에 대해
존경심이나 고마움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기대 또한 갖지 말자. 일본에 대한 유난한 우월감 찾기는 사실 지독한 열등감을 해소해 보려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역사란 흥망성쇠가 다 있게 마련인데 어떤 특정시대를 비교해서 민족간 우월을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진실에 의지해서만 가능해 보인다.
한일간의 스포츠 전쟁
운동경기에서는 '일본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지상명제가 있다. 운동선수, 중계아나운서, 응원하는 국민들이 정말 하나가 되어 우승보다도 대일(對日)전 승리를 더 원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운동경기에서 자국(自國)팀이 이기면 기분이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어차피 이길 수도 있지만 질 수도 있는 스포츠에서 어떻게 '절대'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지 생각해 볼일이다. 재미있는 것은 멕시코 사람들은 미국과의 운동시합에서 미국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한다. 이유는
미국이 자신들을 많이 도와주었기 때문에 고마움의 표시로 그렇게 한다고 한다. 미국과 멕시코는 전쟁의 경험도 있고 텍사스주 등 멕시코의 많은 땅이
미국으로 넘어간 어두운 과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현재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인간관계도 그렇듯이 나라관계도, 민족관계도 과거에 집착할 때
발전은 어려운 것이다. 사실 해방이후 일본은 한일협정시 청구권(請求權) 자금을 비롯한 차관을 제공하여 우리의 산업화에 긴요한 지원을 하였고,
우리가 서양의 근대문명을 도입하고 산업사회 건설의 경험을 익히는데 있어서도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주력업종의
유사성으로 인해 국제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는 관계이지만 해방이후 일본은 우리에게 해를 끼친 것보다는 득을 더 많이 주었다고 보는 것이
공정하다. 그래서 우리도 이제 한일전에서 일본을 응원하자는 말은 아니다. 그거야 아무래도 좋다. 다만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고, 설사 가능하더라도
우리의 격이 높아지는 것도 아닌 '절대승리'라는 주문에서 풀려나자.
일본에 대한 무지(無知)
우리가 일본을
강하게 의식하는 만큼 당연히 일본에 대해 잘 알 것 같지만 의외로 일반인들의 일본에 대한 지식은 매우 피상적이다. 개인적으로 약 3년 전 오랜
일본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김현구 교수의 [일본 이야기]를 읽고서 내 자신의 일본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일본사람들은 목욕을 자주한다고 들은 적이 있었는데, 정작 그 이유가 습기가 많은 기후 때문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이때 처음 알 정도였다.
이 당시만 해도 민족주의에 대해 별다른 문제의식을 갖고 있지는 않았던 만큼 일본에 대한 몰이해를 민족주의와 관련시켜서 생각해보지는 못했다. 이제
와서는 민족주의의 타민족에 대한 배타성은 이들에 대해 잘 알아보려는 노력을 방해한다는 점에서도 그 해악이 있다는 생각이다. 다른 나라에 대해 몇
가지 이미지로 규정해 놓는 것으로 충분하며 더 이상 알아볼 것이 없다는 폐쇄적 태도는 우물안 개구리와 같다.
사실 일본은 우리와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 아니라 혈통, 문화, 언어 등 많은 부분에서 가장 유사한 관계에 있다. 일본문화의 표절 시비가 흔하게 일어나고, 일본에서
성공한 신(新)업종은 우리 땅에 상륙하여 대체로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 내곤 한다. 이는 한일 양국 국민의 비슷한 취향을 말해주는 사례이다. 이런
점만 보더라도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갖는 이질감은 분명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닮은 점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일본하고만 특별한 관계를
맺는 것 또한 바람직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국민들 사이의 정서적 거리를 좁혀나가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일본도 민족주의가 강한
편이지만 우리의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다. 한국인들 중에서 야구, 축구, 바둑, 연예계 등 여러 분야에서 일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일본 팬들이 그들에게 박수를 아끼려 하지는 않는다. 그 반대의 경우가 있다면 우리의 태도가 과연 어떨지를 상상해보면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4. '우리'에 대한 착각
조선족은 외국인이다
근래는 좀 시들해졌지만
한·중 수교이후 중국의 조선족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은 매우 뜨거웠다. 남북한뿐만 아니라 조선족까지 합류시켜 통일구상을 짜면 오랜 숙원이었던
북방영토의 회복도 가능할 것이라는 은근한 기대를 하는 사람들조차 있었다. 40년 이상 교류가 없었고 이미 중국인, 즉 외국인이 되어버린 조선족에
대해서 아무런 거부감 없이 '우리'라는 범주에 포함시키는 엄청난 포용력을 보여준 것이다. 같은 민족이라는 인연을 중심으로 보는 우리의 상식은
국가단위로 기본적인 삶이 이루어지고 아(我)와 타(他)가 구분되는 현실의 질서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람들은 하나의 집단을
이루는데 있어서 맹목적인 동기가 아니라 이해관계의 공통성을 바탕으로 삼는다. 그런데 조선족은 비록 우리 민족이지만 중국사회의 발전에 대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조선족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경제위기는 남의 일이지만, 중국에 경제위기가 온다면 그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된다. 따라서
조선족은 민족은 다르지만 한족이든, 위구르족이든 관계없이 같은 중국인들과 한 배를 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조선족에 대한 태도는 형제가 각각
다른 팀에 속해서 운동경기를 하면서 여기에 형제라는 인연을 개입시키려고 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한중간의 축구경기에서 조선족이 중국팀을 응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섭섭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국의 소수민족 화교(華僑)
같은 맥락의 문제가 한국내의
화교와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에서 나타난다. 한국사회의 발전과 상관이 없는 조선족에 대해서는 '우리'라는 테두리에서 생각하고 정작
이 사회에서 자기 몫을 하고 있는 화교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거리를 두려고 한다. 한국의 화교들은 한국인들의 배타성과 이에 영향받은
정부의 차별정책 때문에 태어나고 자라서 정이 든 이 땅을 지금도 떠나가고 있다. 현재 44세인 한 화교는 자신의 화교중학교 동창생 156명 중
아직 한국에 남아 있는 사람은 72명으로 채 반이 안 된다고 한다. 한 잡지의 인터뷰에서 젊은 여자인, 한 화교는 "옛날처럼 '장꼴라'라는
손가락질을 받지는 않지만 사회생활을 하면 할수록 한국사회의 두터운 벽이 느껴진다"고 말한다. 화교가 비록 적은 숫자라고는 하지만(약 1만
5000명으로 추산) 대만이나 미국으로 가지 않고 우리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것이 분명히 우리에게 득이 된다. 이민자들도 한국문화에 익숙한
관계로 심지어 대만에서조차 적응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외국인 노동자 문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한국사회의
차별을 넘어선 멸시는 아주 유명하다. 선진국으로 모여드는 후진국 노동자들은 대체로 불법 체류자들이기 때문에 한국뿐만 아니라 개방적인 미국이나
서구에서도 그 불리한 처지를 악용하는 사례는 적지 않다. 더구나 경제가 어려워져 실업이 늘게되면 현지인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눈총도 받게된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현상은 매우 특이하다. 다른 선진국처럼 도덕적인 문제가 있거나 인종차별주의자들만이 아니라 다수의 고용주들이 일반적으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반(反)인권적인 행동을 거리낌없이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한때는 10만이 넘었던 외국인 불법 체류자들은
사장이나 관리자들로부터 폭언, 구타, 월급체불, 산업재해에 대한 무책임한 대응 등에 시달려왔다. 한국 고용주들이 돈에 혈안이 되어서 그랬다고
설명하려는 의견도 있겠으나 장시간 노동강요, 열악한 작업환경, 임금 체불 등은 돈하고 관계가 있지만 일상적인 욕이나 폭력은 돈하고 별 관계가
없다. 이것은 노동착취가 아니라 인격에 대한 멸시이다. 타(他)민족에 대해 정서적인 거리감이 크고 아래로 보려는 의식이 강하다는 우리의 속성을
고려하지 않고는 충분한 설명이 안 되는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그들도 여느 국민들과 같이 이 사회의
발전을 위해 공헌하고 있는 하나의 구성원이다. 돈을 벌겠다는 그들 나름의 필요성도 있지만, 현지인들은 취업을 기피하고, 그러나 사회 전체적으로는
필수적인 업종의 유지라는 우리의 이해관계도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일할 기회를 주었다고 해서 결코 우리가 일방적으로 베푸는 것이 아니고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맡아준다는 점에서 우리도 받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돌아갈 사람들이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평가는 민간외교의 문제로
이어진다. 실제로 한국을 경험한 동남아 사람들의 좋지 않은 기억 때문에 그 지역에서 우리의 이미지가 나빠지기도 했다. 한국인권단체의 도움을 받아
외국인 노동자들이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현장에 'WE ARE HUMAN. NOT ANIMAL!'이라는 구호가 내 걸렸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화교나 외국인노동자들은 우리와 이 사회를 함께 만들어 간다는 점에서 조선족과는 애초부터 비교가 되지 않는다. 굳이 비교한다면
조선족이 '우리'가 아니고 바로 그들이 '우리'인 것이다.
혼혈인(混血人)은 이방인?
덧붙이자면 우리는
혼혈인에 대해서도 무척이나 냉담하다. 때로는 외국인보다 더 강한 거부감을 갖기도 한다. 단일민족의 전통을 더럽혔다고 은연중에 생각하는 것 같다.
생김새는 다른데 한국말을 똑같이 하고, 김치도 잘 먹고(그들이 한국인이니 너무나 당연하지만)하는 것이 아주 부자연스럽고 심지어 불쾌한 것이다.
그래서 혼혈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냉대 때문에 한국을 떠나 '아버지 나라'인 미국으로 가는 것을 최대의 꿈으로 삼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는 '한국혼혈인협회'라는 단체가 있는데 아마도 세계적으로 혼혈인협회가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할 것이다. 혼혈인들이 이방인 취급을
당하다보니 자구책으로 그들끼리 뭉친 것이다. 하나부터 열까지 명백히 한국인인 혼혈인들이 이 사회에 섞여 살지 못하고 물위에 뜬 기름같은 신세가
되는 원인도 결국은 우리의 민족주의에서 찾아진다. 혼혈인 중에서 연예계 등에서 유명세를 타면 기사거리가 되는 것도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일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함께 살고 있는 타민족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보면 우리의 민족주의는 강대국의 민족주의와는 다르게 우리에게나
타민족에게나 거의 해가 될 것이 없다는 변호는 통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현재의 민족주의의 강도를 보건데 만약 우리 나라에도 소수민족 문제가
존재했다면 포용하여 하나로 섞이도록 하기보다는 '인종청소'식의 방법을 동원했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비록 적은 숫자여서 집단적인 저항을 하고
이에 무력을 동원하는 양상이 아니기때문에 다르게 보일 뿐, 화교 2세, 3세들의 다수가 이 땅을 떠날 수밖에 없도록 우리가 '강제'하지 않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같은 감기에 걸렸지만 누구는 기침을 하고 누구는 콧물을 흘린다고 해서 다른 병을 앓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민족주의를 일반적인 것과 다른 무엇인 것처럼 보려는 것은 대단히 편의적이다.
5. 우리 문화의 기준
다른 경우는 몰라도 문화에 있어서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은 타민족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주체성을 찾는 것이니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민족주의는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에게 손해가 되기 때문에 고쳐나가야 한다는 입장에서 문화적
민족주의 현상에 접근해 보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대목이 적지 않다. 문화적 민족주의의 출발점인 '우리 것'이라는 아주 쉽고도 분명해 보이는
이 말부터 다시 생각해보자. '우리 것'과 '남의 것'이라는 구분 혹은 그 사이의 갈등은 기존문화에 이미 있는 어떤 요소에 대해 경쟁 혹은
대체관계에 있는 새로운 외래문화가 등장했을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TV, 전화와 같이 아예 기존에는 없던 것에 대해서는 이러한 시비가 거의
일지 않는다.
바나나는 남의 것?
한때 바나나를 제사상에 올리는 것을 개탄하는 목소리가 나온 적이 있었다.
제사는 전통적인 의례이니 음식도 '우리 것'을 써야 맞다는 의견이다. 그런데 이 때 사과, 배, 밤 등과 바나나를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바나나는 우리가 먹기 시작한 지가 얼마 안 되는 과일이라고 말하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이제 제주도에서 바나나를 생산하고 있으니 한국에서 생산이
가능한가의 여부를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수입품이냐 토종이냐의 구분 또한 맞지 않다. 바나나는 수입품의 비중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토종일
확률도 있고, 다른 과일 또한 수입품이 있다. 더구나 종자의 국적을 따지면 사과나 배 등은 대체로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의 육종학(育種學)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개량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한국에서 개발한 종자를 많이 쓴다해도 그 뿌리는 외국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과나 배라
하더라도 과거 우리 조상들이 먹던 것과 지금 것은 매우 다르다.
문화는 독점될 수 없다
'우리 것'이라는
기준이 하나로 분명하게 통일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여러 가지로 쓰고 있다. 보통은 '순수한 우리 기술로'라는 어떤 광고 문구대로 '우리
민족의 노력만으로 만든 것' 아니면, '우리 민족에게만 있는 것'으로 '우리 것'이라는 기준을 삼는다. 그런데 애초에 문화라는 것은 완전하게
어떤 민족이나 집단의 것이 될 수는 없다. 지역에 따라 문화적 차이가 있다는 것과 문화는 여러 집단의 교류와 영향 속에서 함께 만들어지고
발전된다는 사실을 잘 구분해야 한다. 우리 옷인 한복과 일본 옷인 기모노는 분명한 차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각자가 만들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반론이 있을 것이다. 물론 두 가지 옷의 형태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적어도 이 대목은 각자의 창의성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옷감을 만드는 기술, 바느질 솜씨 등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지금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외부의 보다 선진적인 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옷의 형태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 한일간에는 물론이고 더 넓은 범위의 영향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못한다. 외부의
영향을 인정하여도 옷의 형태이든, 바느질 솜씨든 우리의 독창성이 발휘된 부분, 즉 다른 것과 차별성을 가지는 부분은 '우리 것'이라고 해야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문화는 크게 보면 인류공동의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고 이른바 순수한 의미의 '우리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사용하는 알파벳은 언어에 따라 약간씩 다른 문자들이 있다. 만약 이를 놓고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이 각자 이를 '우리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우습지 않을까? 자기 언어에만 있는 몇 개의 문자를 떼어서 '우리 것'이라고
하는 순간 그 문자는 불구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알파벳을 만들었다는 페니키아 사람들은 '우리 것'이라고 말할 권한이 있는가? 아라비아
숫자, 한자, 종이 등 원조(遠祖)가 알려져 있는 문화라고 해서 그것들이 원조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류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원조를
찾는 것이 의미가 있겠지만 원조도 그 문화를 만든 한 참가자일 뿐이다. 한자만 해도 중국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일본 등이 함께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한자를 '중국 것'이라고만 보는 것은 아라비아 숫자가 '아랍인들의 것'이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근래 개발된 개량한복을 '우리
옷'이라고 부르는데 그 재료나 제조방식은 말할 것도 없고 디자인에 있어서도 명백히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 한복을 현대적인 감각이나
생활방식에 맞게 개량했다는 바로 그 점에서 우리의 현대생활이 순수한 우리 것이 아닌 만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만약 개량한복을 입고 조선시대의
조상들을 만나면 십중팔구는 '남의 옷'을 입었다고 할 것이다.
문화적 민족주의에 대해 그 비현실성을 지적하는 다음 글이 참
재미있어서 길지만 옮겨본다.
<미국의 어딘가에서, 누군가 출근 준비를 할 때>
"우리들 건전한
미국 시민들은, 근동에서 시작되었지만, 미국으로 전해지기 전에 북유럽에서 수정되었던, 특정 양식에 따라 만들어진 침대에서 잠을 깬다. 그는
인도에서 처음으로 재배된 면, 아니면 근동에서 재배된 린넨, 혹은 중국에서 발견된 비단으로 만들어진 이불을 젖힌다. 모든 이러한 침구들은
근동에서 발명된 일련의 과정을 거쳐 실로 만들어지고 천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동부 삼림지대 인디언들이 발명한 모카신을 신고 욕실로 간다. 욕실의
비품들은 유럽과 미국의 발명품들이 섞여 있다. 양쪽 모두 최근의 일이다. 그는 인도에서 발명된 의복인 파자마를 벗고 옛 프랑스의 골 사람들이
만든 비누로 세수를 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수메르 혹은 고대 이집트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보이는 매조키즘적 의식인 면도를 한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그는 남부 유럽풍의 의자에서 옷들을 집어들고 입기 시작한다. 그는 원래 아시아의 스텝지방 유목민들의 동물가죽옷에서 유래한 의복을 입고,
고대 이집트에서 발명된 일련의 과정에 의해 가공되어 지중해의 고대문명에서 유래하는 양식으로 잘라낸 짐승가죽으로 만들어진 신발을 신는다. 그리고는
그의 목에 17세기 크로아티아인이 입던 어깨걸이의 흔적인 한 조각의 밝은 천을 둘러 묶는다. 그는 아침식사를 하러 나가기 전에 이집트에서 발명된
유리로 만들어진 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리고 나서 비가 오고 있으면, 중앙 아메리카 인디언들에 의해 발견된 고무로 만든 덧신을 신고 동남
아시아에서 발명된 우산을 쓴다. 그는 아시아의 유목민들이 발명한 물질인 펠트로 만든 모자를 쓰고 있다. 아침식사를 하러 가는 도중에 신문을 사기
위해 멈춰 서서 그는 고대 리디아인들의 발명품인 동전으로 신문 값을 지불한다. 레스토랑에서 그는 새로운 일련의 빌려온 요소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접시는 중국에서 발명된 일종의 도자기로 만들어졌으며, 칼은 남부 인도에서 처음 발명된 합금인 강철로 만들어져 있다. 포크는 중세 이태리인의
발명품이며 스푼의 기원은 로마이다. 그는 동부 지중해로부터 온 오렌지와 페르시아로부터 온 그물멜론, 아니면 한 조각의 아프리카산 수박으로
아침식사를 시작한다. 그는 크림과 설탕을 넣은 아비시니아산 커피를 곁들인다. 과일과 커피를 먹고 나면, 그는 아시아 소수원주민들이 처음 재배한
밀로 만들어진 스칸디나비안 방식의 케이크인 와플을 먹기 시작한다. 그는 와플 위에 동부 삼림지대의 인디언들이 발명한 단풍 밀 시럽을 붓는다.
주(主)요리에 곁들여 그는 인도-차이나에서 나는 특정 새의 알을 먹거나 북유럽에서 개발된 조리법으로 절여지고 구워진 어떤 동아시아산 동물의 얇은
살 조각을 먹을는지 모른다. 우리의 친구가 식사를 마치고 나면, 그는 편안히 기대고 앉아 아메리카 인디언의 취향인 담배를 피울 것이다. 담배는
버지니아 인디언들이 쓰던 파이프에 브라질산 연초를 넣었을 수도 있고, 멕시코 산 담배일 수도 있다. 만일 그가 매우 건강하다면, 안데스
산맥으로부터 스페인을 경유하여 우리에게 전해진 시가를 피울 수도 있다. 담배 피우면서, 그는 그날의 뉴스를 읽을텐데, 그것은 독일[조선]에서
개발된 인쇄기에 의해 중국인들이 발명한 물질에 고대 셈족이 완성한 문자들로 인쇄되어 있다. 다른 나라의 재난에 대한 기사들을 읽을 때, 만일
그가 건전하고 보수적인 시민이라면, 그는 100퍼센트 미국인임을 인도-유럽語로 한 히브리 신(神)에 감사할 것이다." - 랄프 린튼(Ralph
Linton)의 'The Study of Man' 중에서
'우리 것'과 '남의 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우리 것'의 개념을 놓고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고 있지만 남겨 둔 문제가 또 하나 있다. 앞서 외래의 것이지만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의 여부를 '우리 것'의 기준으로 삼는 사례를 들었는데 사실은 이 기준에도 맹점은 있다. 오래되었다든지, 익숙하다든지 하는 기준도
결국 당대 사람들의 판단이기 때문에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바나나만 해도 이미 지금 어린이들은 '남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감자,
고구마, 옥수수를 '남의 것'이라고 한다면 웃음거리가 되겠지만 이것이 전해졌던 조선후기의 사람들은 한 때는 이 걸 먹으면서 이국적인 정서를
느꼈을 것이다. 김치를 비롯하여 오늘날 우리 음식의 특색을 만들어 낸 고추 또한 조선조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전래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애초에
'남의 것'도 세월이 흐르면 '우리 것'이 되는 것이고 한때 '우리 것'이었지만 사람들의 실제 생활에서는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한복은
조선시대의 것이니 고려시대의 우리 옷은 언젠가 없어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적어도 몇 년 이상은 지나야만 '우리 것'으로 인정한다든지 하는
기준을 세울 수도 없다. 커피처럼 '남의 것'이라는 정서가 오래가는 것도 있지만 대중음악의 경우 매우 빠른 시간 내에 외국의 유행이 우리 사회에
정착할 수도 있다.
문화적 배타성은 문화 선진화의 걸림돌
문화에 있어서 '우리 것'과 '남의 것'을 가능한
구분하여 한쪽에는 애정을, 다른 쪽에는 배타성을 보이는 태도에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사고방식에 익숙해있기 때문에
우리의 경직된 태도가 나오는 것이다. 어떤 사회에서도 새로운 문화나 산물이 정착되는 과정에서는 그 낯설음 때문에 특히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것' 과 '남의 것'을 철저히 구분하는 습관은 신문화의 도입이나 정착에 더 오랜 시간을 걸리게
한다. 심지어 이미 대중 속에서 일반화되어 버렸는데도 불필요한 거부감의 찌꺼기를 남겨둔다. '새로운 것' 혹은 '외래의 것'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이니 덮어놓고 받아들이자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적 배타성은 '우리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는 그 자체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여기에 좋다, 나쁘다는 우열의 판단을 개입시키는데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예컨대 커피에 대해 어떤 성분이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에 자제하자는
의견이라면 모르겠지만 서양 것(커피의 원산지는 아프리카이고 대중화시킨 것은 아랍인이고 현재의 주산지는 남미이기 때문에 서양 것이라는 생각도 별로
정확하지는 않다)이기 때문에 배척한다는 기준은 커피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방해한다. 어떤 문화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취사선택(取捨選擇)하지
못하면 우리의 문화수준을 높이고 선진문화를 과감히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뒤떨어지게 되니 결국 우리의 손해가 되는 것이다.
문화수준의 차이는 민족 우열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우리 것'이기 때문에 좋고, '남의 것'이기 때문에
나쁘다는 생각은 결국 우리 민족은 우수하고 타민족은 열등하다는 사고의 연장이다.
그리고 흔히 '문화적 상대주의'라고 해서 문화적
차이에 대해 우열을 논하지 말자는 견해가 있다. 이는 서양에서 타 지역의 문화가 자신의 근대문화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열등하다는 낙인을
찍는 교만한 현상에 대한 반론으로 등장한 것이다. 근대이전의 문화는 대체로 자연 환경 등 우연적인 요소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나, 실제로
밥을 주식으로 하는 것과 빵을 주식으로 하는 것 사이에 우열을 가를 수 없다는 점에서는 문화적 상대주의가 타당하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에서
선진과 후진이 구분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 이집트, 이스라엘, 그리스 등의 고대문화 전시회를 각각 본 적이 있는데 비전문가의 눈으로
보아도 정교함, 집중력, 기발함 등에서 상당한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그 차이는 민족의 창의성에 대한 우열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예컨대 유목민족이야 늘 이동하다보니 농경민족처럼 문화를 발전시킬 수 없었다고 보아야지 유목민족은 머리가 나빠서, 아니면 게을러서 문화가
정체되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는 국제적으로 문화에 대한 정보교류가 활발하기 때문에 전근대시대처럼 문화적인
우열에 대해 '운'에만 그 책임을 돌릴 수 없게 되었다. 의지나 노력과 같은 주체적인 요소가 더 결정적인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비록
우리가 수 천년 동안 익숙해진 문화라도 그것이 현대사회에 맞지 않거나 아니면 후진적인 것이라면 고쳐나가려는 개방적이고 능동적인 태도가 중요할
것이다. 문화는 현실의 사람들과 호흡하기 때문에 아무리 벽을 쌓아도 종국에는 선진적인 요소가 우월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의식적인 요소를 얼마나 강화하느냐가 문화선진화의 관건이 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현실이라는 힘에 밀려서 어떤 문화를 택하는 것보다는,
문화수준을 높이려는 열의를 갖고 접근하는 것이 더 낮다는 뜻이다.
이미 대중문화의 영역에서 밀려난 전통문화에 대해 지나치게 정력을
쏟는 태도도 생각 해볼 점이 있다. 어떤 문화가 대중적이지 않다고 해서 가치가 없다거나, 틀려 있다거나, 후진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기의 임무를 다하고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난 문화 또한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이를 연구하고 보존하는 작업은 필요하지만, 이것을 대중문화 속에
살아남아 있는 것처럼 하려는 시도는 부질없어 보인다. 해마다 정부에서 주관하는 도별 전통민속놀이 경연대회가 있는데 정책적인 배려로 장시간의
TV중계까지 한다. 민속학자들이 필요하다면 한번 재연시켜 영상기록을 남겨두는 보존작업이면 족한데, 이미 실생활에서는 사라져버린 민속놀이를 흥도
느끼지 못하고 오직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장시간 연습한다는 것이 딱하다.
6. 우리 내부로 향하는 민족주의
우리의 민족주의가 유난히 강한 이유를 찾자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해방이후 민족주의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를 끌고
나갔다는 주체적인 요인이 결정적이지만, 우리 민족의 경험적인 토양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우리 민족은 대부분의 다른 민족과는 달리 여러 민족과
함께 섞여서 한나라를 구성하고 살아간 경험이 거의 없다. 그래서 하나의 민족은 반드시 하나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전형적인 민족주의 논리를
우리의 예외적인 경험 덕분에 쉽게 당연시 해버린다. 이외에도 농경민족의 폐쇄성 또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민족의 전근대사는 세계역사에서
보면 가장 전형적인 농경생활에 속한다. 유럽에서는 목축, 상업 등이 농업과 병행되었고, 중국에서도 농업이 중심이기는 했지만 외곽의 유목생활이
있었고, 상업은 우리에 비해 상당히 활발하였다. 특히 우리의 기후가 벼의 북방한계선에 위치하고, 벼농사하기에는 강수량이 적은 편이라서
동남아시아나 중국남부의 미작지대와는 달리 훨씬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만큼 농업에 대한 집중도가 높았다는 것이다. 농업은 그 속성상 목축이나
상업에 비해 생활의 변화가 거의 없고, 이동이 적고, 외부와의 접촉이 드물기 때문에 비교적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정서를 갖게된다.
어떤 문화학자가 유목민족은 누구를 만나면 평생 못 만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할 이야기를 한꺼번에 다하는 반면, 농경민족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이야기를 푸는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스에서 최초의 민주주의가 생겨난 것은 상업에 종사하면 평등의식이
발전하기 쉽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처럼 전근대사회에서는 3대 업종 중에 어디에 속하느냐가 그 문화나 사고방식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지역감정과 민족주의
농경생활의 배타성이 곧바로 현재의 민족주의로 된 것은 아니고
'민족'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에는 마을이나 지역 혹은 가문단위로 뭉쳐서 외부에 대해 배타성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민족주의는
민족내부에서도 소(小)집단끼리 서로 배타성을 보일 가능성을 갖게된다. 민족주의는 적어도 그 민족을 하나로 단결시킨다는 장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들 생각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의 지역감정을 보자. 일부에서는 본래 없었던 지역감정이 박정권 이래의 지역차별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말한다. 정부의 정책이나 정치인들의 이용 때문에 지역감정이 때로 증폭되거나 잘 없어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지역감정이
근대에 들어와서 생긴 것이라는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 지역감정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많은 나라들에서 그 현상을 볼 수 있는데, 교류가
적고 고립되어 살던 전근대사회 경험의 잔재라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지역감정의 정도가 통상 나이에 비례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더라도
지역감정은 산업사회 이전의 산물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과거에는 그것이 집단적으로 표출 될 계기가 없었거나 오히려 더 작은 단위인 마을과
마을끼리 앙숙(怏宿)으로 지낸다든지 했을 뿐이다. 이 지역감정 자체는 전근대적인 지방분권적 생활의 산물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그것이 끈질기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원인 중에 하나는 민족주의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왕따'와 '이지메'
'왕따'
현상이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데 '왕따' 또한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기성세대도 직장내에서 '왕따' 문화가 있고, 그들의 청소년 시절에도
학교생할에서 '왕따' 현상은 있었다. 다만 과거에는 '왕따'를 당해도 그 사실을 부모나 교사에게 잘 털어놓지 않았었고, 이런 문제를 사회적
관심사로 삼을 만한 정신적인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흥미있는 사실은 우리의 '왕따' 문화와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의 '이지메' 문화가 아주
유사함과 동시에 다른 나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권리에 투철하고 의사의 표출이 자유로운 서구 선진국의 경우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면
금방 사회적 이슈가 되었을 것이다. 이들 나라에서 인종문제와 연관되어 특수하게 나타나는 경우는 있겠지만 하나의 '문화'라고 할만큼 일반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런데 '왕따'나 '이지메'의 핵심은 생활을 하는 단위에서 집단적으로 특정인을 따돌리고 괴롭힌다는데 있다. 이유야
어떻든 개인들끼리 잘 사귀지 못하는 것과는 그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왕따' 현상은 '우리'라는 소속감과 일체감을 느끼는 집단을
이루려는 의식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학급, 부서 등 이미 자기의 논리가 있는 집단에 특별한 일체성을 부여하려고 할 때 일탈자는
생기기 마련이고, 일탈자가 없더라도 억지로라도 만들어 내고야 말게된다. 배타하는 대상이 없는 폐쇄적인 집단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특별한 우리'를 확인시켜 줄 이질적인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왕따'와 '이지메'가 한국과 일본만의 특이(特異)현상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보여진다. 단일민족국가로서 민족주의가 강하다는 두 나라의 공통점이 이 유사현상의 원인을 찾는 실마리가 된다. '왕따'
현상을 민족주의까지 거슬러 올라가 관련 짓는 것에 대해 지나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한국과 일본은 서구에 비해 아직은 개인주의가 약하고 집단주의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충분하다는 반론도 예상된다. 그러나 한국은 물론이고 특히 일본은 이미 개인주의가 상당한 정도로 퍼져있다.
그리고 아직 개인주의가 덜하다는 중국에는 '왕따' 현상이 없다. 개인주의가 강화되면서도 그에 잘 어울리지 않는 '왕따'나 '이지메'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논리로는 잘 설명이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청소년시절의 일시적 현상이라면 철이 덜 들어서 나타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다 알고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단일민족의 우수성과 결속력에 대해 배우고 동시에 타민족에 대해 배타시하는 태도에
익숙해지면서(이미 초등학생만 되면 특히 일본에 대해서는 특별한 감정을 갖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모여서 생활하는 곳 어디에서나 특별한 집단을
만들려고 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일체감이 느껴지는 집단에 속해있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것이다.
7. 이성의 강화
이외에도 민족주의 현상에 포함되는 사례는 얼마든지 더 있겠지만 부족하나마 여기서 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이제 민족주의와
관련된 우리의 모습을 어느 정도 살펴본 만큼 어떤 모습이 더 좋은 것일까라는 판단이 남아 있다. 민족주의에 집착하는 우리의 모습들은 인간의
정신활동 중에서 지식이나 이성보다는 무지와 맹목의 쪽에 더 가까워 보인다. 자기 민족에 대해 애정을 갖는 것이 어떻게 비이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반론할 지 모르지만, 민족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애정표현이 될 수 없다. 민족주의는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무엇이 유리한 것인지를 알게
하는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민족주의의 억제는 이성적 능력의 강화와 직결된다.
그리고 민족주의가 약화되거나
없어지면 한국은 무엇을 근거로 동질성을 확인하고 뭉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 될 수 있다. 우리는 국가와 민족을 거의 구분하지 못하는
사고체계에 익숙해있다. 그런데 이 둘은 엄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예컨대 화교는 타민족이지만 한국민이고(법적으로는 귀화(歸化)여부를 따지겠지만),
반면 조선족은 우리 민족이지만 타국민이다. 사회의 진보가 여전히 국가단위로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의 시대에는 국가를 중심으로 한 '우리'의
확인이면 족하다. 그래서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민족주의 없이도 잘 살아가고 있듯이 우리가 민족주의를 버린다고 해서 큰 일이라도 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민족주의의 기세가 워낙 등등하다보니 민족주의를 건전한 방향으로 순치(順治)하자는 견해도 있으나 아무리 좋은 수식어를 앞에
붙이더라도 민족주의는 다 같은 민족주의이며 그 비이성적 속성은 변화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 홍진표(시대정신
편집위원) * 이 글은 시대정신 [1999 05-06월호] 제4호에 수록되었던
글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