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거덜 낸
YS경제 각료들 부총리 6회 교체… 대부분 현장감각 떨어지고 팀워크도 엉망 | |
과거 한국 축구의 성적이 부진할 때마다 「감독이 자주 바뀐다」는 점이 늘 폐해로 지적돼 왔다. 우리 경제부문에선 한 감독밑에서 주전선수들이 너무 자주 바뀐게 탈이었다. 감독 임기 4년9개월 동안 「대표팀」이 여섯차례나 바뀐데다 팀워크도 엉망이었다. 최전방의 투톱(부총리와 경제수석)이 「먼저 골을 넣겠다」는 볼썽사나운 풍경이 너무 자주 벌어졌다. 감독의 작전지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관객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니 성적이 좋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우리 경제분야에서 감독과 대표선수들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더듬어 보는 것도 우리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경제 신탁통치를 받게 된 원인을 알아보는 한 방법일 것이다.
△제1기 경제팀(93년 2월26일~94년 10월3일)
김영삼대통령이 집권 직후인 93년 2월26일 단행한 조각에서 구성한 경제팀. 주요포스트의 면면을 보면 이채롭다. 이경식가스공사사장이 부총리로 전격발탁됐고, 홍재형외환은행장이 재무장관, 김철수무역진흥공사사장이 상 공부장관에 기용됐다. 이들 상당수는 관료 출신들로 「제 고향」으로 금의환향한 케이스이지만 정책현장에서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인 물들. 이들의 발탁에는 민주계들의 천거가 있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1기 경제팀의 경제운용은 청와대 박재윤경제수석의 주도로 이뤄졌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인 박수석은 92년 대선당시 김영삼캠프에 합류해 대통령후보 경제특보로서 집권후 김대통령의 경제구상인 「신경제」를 미리 확립해놓았기 때문. 박수석은 초기 사무실에 야전침대를 갖다놓고 지낼 정도로 의욕적으로 일했다. 그러나 현장경험이 없는 그의 신경제는 문민정부의 경제부문 마스터플랜인 「신경제 5개년계획」으로 자리잡았으나 중도에 용도폐기 되고 만다.
1기경제팀의 첫작품은 「신경제 1백일구상」. 침체된 경제부터 회복시킨 뒤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다소 「군대식」 발상이었다. 이어 93년 8월 금융실명제란 메가톤급 개혁을 순식간에 추진, 우려됐던 부작용을 그런대로 잘 해소하 고 실명제를 정착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경제팀을 주도했던 박수석은 실명제준비과정에서 완벽하게 배제됐다. 김대통령이 박수석을 건너뛰어 홍장관에게 지시해 이부총리와 협의하에서 극비리에 준비했던 것. 이때부터 이부총리와 박재윤수석간에 불협화음이 생기면서 팀워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93년말에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에 의해 국내 쌀시장이 개방되면서 흉흉해진 민 심을 달래기 위해 실시된 그 해 12월21일 개각에서 부총리가 정재석 당시교통부장관으로 전격교체됐다. 정부총리기용은 본인 스스로 『의외다』고 말할 정도로 예상을 빗나간 인사였다. 3공시절 경제정책현장에 있다가 학계에 몸담아왔던 정부총리는 취임초기 「공공요금 현실화」「왜곡된 가격구조 개선」 등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가 인플레 심리를 부추기는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고, 독선적이란 비판을 받는 행동으로 화제를 뿌렸다.
△2기 경제팀(94년 10월4일~95년 12월19일)
정재석부총리가 신병을 이유로 돌연 사의를 표명함에 따라 94년 10월4일 개각에서 경제팀이 전격교체됐다. 홍재형재무부장관이 「금융실명제」를 정착시킨 공로로 부총리로 발탁됐고 박재윤수석이 재무장관, 한이헌기획원차관 이 경제수석으로 영전했다. 경제팀 중 역시 컬러가 뚜렷한 한수석의 목소리가 컸다. 한수석은 경제기획원차관 공정거래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재벌규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작 주요 재벌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2기 경제팀이 했던 일 중 주목할 만한 것은 당시 「뜨거운 감자」였던 삼성승용차진출을 쉽게 허용했던 것. 이들은 출범 두달만인 94년 12월 전임 경제팀이 8개월전에 결론을 내린 삼성그룹의 승용차진출불허 방침을 뒤집어버 림으로써 오늘날 국가적 재난의 씨앗을 잉태케 했다. 민주계를 중심으로 정치적 입김이 거세게 작용한 결과였다. 94년 12월 정부조직개편으로 경제기획원과 재무부가 재정경제원으로 통합됐다. 이어 단행된 개각에서 홍재형총리가 초대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장관으로 자리를 이었고 박재윤재무 장관이 통상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3기 경제팀(95년 12월20일~96년 8월7일)
김대통령은 전두환 노태우비자금사건으로 감정이 악화된 재벌을 달래고 경제팀에 포진한 실세들을 96년 총선에 내보낼 필요성에 따라 95년 12월 경제팀을 대폭 교체했다. 고향 청주에 출마했던 홍재형부총리에 이어 경제팀수장을 맡은 나웅배부총리는 상공부 재무부 경 제기획워장관 겸 부총리 통일 등 장관만 다섯번째인데다 해태제과 한국타이어 사장 등 다양한 경력을 갖고 있었다. 경제수석엔 구본영과기처차관이 발탁됐고 박재윤 통상장관은 유임됐다. 나부총리는 물가안정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면서 「고비용 저효율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단기적 대증적 처방보다는 중장기적인 대책을 강조했다. 예상과 달리 재벌계열기업간 채무보증축소방안 등으로 재계와 다소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다 경기침체 경상수지적자 폭 확대 물가불안 등 거시지표가 하향곡선을 그리면서 나웅배팀은 몰락하고 말았다.
△4기경제팀(96년 8월8일~97년 3월4일)
흔들리는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96년 8월8일 단행된 개각에서 한승수전대통령비서실장이 부총리로 기용됐다. 이석채정보통신부장관이 장관급으로 격상된 경제수석으로 옮겼다. 4기 팀도 청와대수석이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다.이수석은 취임초 『비서는 야사(野史)에만 나오는 것이지 정사에는 나오지 않는 법』이라면서 목소리를 낮췄으나 「경쟁력 10% 높이기 운동」을 주도했고 노동법개정문제에 대해서도 강한 소신을 펴 정부내 반발을 무릅 쓰고 밀어붙였다. 경제팀은 현대제철소 설립 불허,금융기관에 대한 한국통신주매입 강권,은행연합회장 선거개입,금리인하강요 등 대증요법을 선호하고 정치적 고려를 앞세우는 발상이 많았다. 이들은 고단위 경제정책을 양산하며 의욕을 과시했지만 대책이 자리를 잡기 전에 노동법전격처리에 따른 총파업으로 연말부터 국정이 마비되고 생산활동까지 큰 차질을 빚었다. 96년엔 235억달러에 달하는 사상최대의 경상수지 적자를 냈다. 게다가 올해초 한보철강 부도로 자금시장마저 얼어붙고 환율급등 등 난기류가 형성됐다. 올해초 금융개혁위원회 출범을 둘러싸고 이수석과 재경원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한총리와 이수석간의 표면적 관계 마저 껄끄러워졌다. 이수석은 한보사태에 대한 재경원의 미지근한 대처방식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냈고 재경원은 이수석의 앞뒤를 재지않는 원론을 비판했다. 96년 12월20일 연말개각에서 그동안 조직장악력이 약하다는 지적을 받았던 박재윤통산부장관이 경질돼 「신경제」는 사실상 용도폐기됐다.
△5기경제팀(97년 3월5일~11월18일)
지난 3월 한보사태에 대한 문책성 인사에 따라 강경식-김인호 경제팀이 출범했다. 5공때 재무부장관, 대통령비서실장과 12, 14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강부총리는 김대통령으로부터 「경제살리기」의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 다. 그러나 3공때 경제기획원시절 시장경제론을 주장하면서 단기처방보다는 장기방향 제시에 강점을 보여온 최전방공격수는 요동치는 현실 에는 맞지 않았다. 강부총리는 취임 일성으로 금융실명제 보완을 주장했다가 밀렸고, 금융개혁위원회에 힘을 몰아 차기정권의 과제로 여겨지던 중앙은행독립 등 금융개혁작업을 추진하는 의욕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원칙론적인 시장경제론만 되풀이하다가 기아사태를 제때 처리하지 못한 채 기업연쇄도산에 따른 금융공황사태를 막기 위해 부 도방지협약을 실시하고 이 협약의 부작용으로 멀쩡한 기업들이 나가떨어지자 제2금융권 대표들을 불러 자금회수를 중단할 것을 강요하 는 등 소신과 다른 행동을 했다. 이러는 사이 우리 외환사정은 급격히 나빠져 부도위기에 몰리고 있었다.
△6기경제팀(97년 11월19일~ )
우리 경제가 벼랑에 몰리고 있던 11월19일 강부총리-김수석이 전격 경질되고 임창렬통산장관과 김영섭관세청장을 부총리와 경제수석에 임명해 불끄기에 나섰다. 이렇게 많은 대표팀이 거쳐갔는데 이들의 인선에는 문제가 없었을까. 문민정부의 경제 부총리들은 대부분 거시적 안목과 뚜렷한 소신, 풍부한 행정경험, 경제철학을 갖췄다는 평을 듣는 인물들. 그러나 이들은 오랫동안 경제정책 현장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70, 80년대와 판이하게 다른 90년대 상황에 적응하는 데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후반부 부총리 3명이 모두 관료출신이지만 현직 국회의원이거나 최근까지 정치를 해온 사람들로 기용된 것은 경제논리보다는 상황돌파를 선호한 대통령의 의지가 작용했기 때문으로 해석되고 있다. 또 주전선수들과 감독관계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경제팀들은 경제에 무지할 뿐 아니라 무관심한 대통령을 어떻게 이해시키고 설득시키냐 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지만 최근 위기상황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재경원 관계자는 『대통령이 최근 사석에서 경제팀이 위기상황을 제대로 알려주지않았다고 불평하면서 책임을 떠넘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밤을 세워 만든 경제난에 대한 보고서를 라인을 통해 보고했는데 대통령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면 뭔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 고 말했다. 문제의 핵심이 어디 있는지를 잘 시사하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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