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화 - 이화여대 국어국문과 교수
11월12일 서울 서소문 중앙일보사 6층 고문실에서 대담하는 두 사람. |
이어령 정말 그래야 할 텐데 근래는 더 바빴습니다. 사퇴한 것이 아니라 새로 데뷔한 꼴이 되었어요. 후진들에게 민망해.
이인화 선생님의 빈 자리가 너무 커서 그런 것이겠지요. 아프간 전쟁을 전후해 ‘문명의 충돌’ ‘문명의 융합’ ‘문명 전환기의 한국’ 이런 논제들이 저널리즘에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만큼 큰 이야기가 나오면 선생님을 빼고는 달리 물어볼 사람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 분과 학문의 전문가가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머리로 사유하는 대지식인이 더욱 소중해지는 시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단단히 준비해서 다섯가지 정도의 화두를 들고 왔습니다.
이어령 부담 주지 마세요. 그런 이야기라면 며칠전 후배들에게 일장 강의도 했는데 지금은 다 잊어먹었어. 지금은 아무 것도 몰라요.(웃음)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 세계화와 반세계화 |
이인화 2001년에는 이제까지 우리가 당연한 상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가운데 상식으로 통하지 않게 된 문제들이 있습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세계화’ 이념이 ‘반세계화’의 강력한 반동을 만난 사태가 그런 예가 아닐까 합니다. 올해 2월24일 반세계화 이념을 전파하는 IFG, 즉 세계화에 대한 국제포럼(International Forum on Globalization)이 제레미 리프킨·제리 맨더 같은 쟁쟁한 지식인들의 주도로 출범했습니다.
9월11일에는 오사마 빈 라덴의 뉴욕테러처럼 미국 중심의 세계화를 폭력적인 수단으로 저지하겠다는 움직임도 나타났고, 이런 움직임은 현재 아프간전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IFG는 다양한 입장이 섞여 있지만 대체적으로 환경문제를 강조하면서 세계를 자원고갈의 무한경쟁으로 몰아가는 다국적기업들의 기업권력에 반대한다는 반시장개방주의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의 경우에는 미국 중심의 세계화가 이슬람 문명의 종교적 정체성을 파괴한다고 보고 여기에 저항하려는 반미주의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한국은 이같은 반세계화 문제에 지금 당장 Х永퓸?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세계화와 반세계화의 갈등은 한국의 미래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어령 그렇습니다. 그동안 한국인들은 세계화라고 하면 불가피한 문명의 진로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세계화를 먼저 국제화라고 했지요. 정치적인 입장의 편차에도 불구하고 국민 중 국제화, 세계화에 반대한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그 말의 깊은 의미에 대해서는 유보한 채 말이죠. 김영삼 정부 당시 방송에서 나에게 국제화와 세계화가 어떻게 다른 것이냐 하고 묻기에 농담삼아 ‘국제화를 더 세게 하면 세계화’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지요. (웃음)
그런데 2001년에 들어서면서는 반세계화의 움직임이 급진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의 덫’이라든지 ‘20대 80’이라든지 하는 책들이 출판되면서 반 세계화에 대한 새로운 목소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001년은 우리에게 내 개인이 이렇다 저렇다가 아니라 한 민족과 국가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큰 화두, 거시적 담론의 주제로써 반세계화 문제를 던져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화·반세계화 화두는 한국인들에게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사자의 몸뚱이에 상반신은 여자인 괴물 스핑크스가 테베시로 들어가는 길목의 바위 위에 웅크리고 앉아 길 가는 사람을 막아 세우고 수수께끼를 내지 않습니까? 수수께끼를 푸는 자는 통과할 수 있으나 풀지 못한 자는 생명을 잃고 맙니다.
20세기를 넘어 우리가 이제 평화와 희망과 번영의 아름다운 나라로 가고자 하는 21세기 첫해의 길목에서 뜻밖에도 스핑크스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의 폭력화한 반세계화의 시위였으며 9월11일의 슈퍼 테러 사건이었고 중국·일본 등의 급격한 변화였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낯선 현상들이 던지는 수수께끼 같은 물음에 답변할 수 없으면 곧 바위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인화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이나 마음을 바꾸는 패러다임 시프트를 하지 않고서는 21세기로의 진입이 어려워진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리고 너무나 성급한 질문입니다만 수수께끼를 푸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지, 과연 그 해답은 어떻게 구할 수 있는지요?
이어령 그 수수께끼의 해답은 바로 괴물과 마주해 있는 ‘인간’ 자신이었지 않습니까. 세계화 대 반세계화, 미국 대 빈 라덴의 싸움이 바로 남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이며 한국인의 문제이며 그리고 당연히 새롭게 대두한 인류 전체의 문제라는 생각과 그런 마음을 갖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화는 어느 한 나라나 몇몇 사람의 의도된 구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연생태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역사를 만들어온 인간, 인류 문명의 과정 속에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점입니다. 정보의 민주화, 기술의 민주화 , 금융·투자의 민주화가 만들어낸 지구 전체의 변화이지요. 반세계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다국적기업이나 미국 같은 일부 세력, 소수의 힘 있는 사람들이 꾸며낸 음모라면 해답도 아주 간단하고 분명할 것입니다.
세계화를 몇몇 강대국이 가난한 나라를 착취하던 지난날의 그 식민주의 문맥으로 읽는 한 그 수수께끼는 풀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필리핀 같은 아시아 변두리 작은 나라의 한 개인이 러브 바이러스로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통신 시스템을 뒤흔들어 막대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것이 오늘의 현상입니다. 그리고 그를 추적하고 잡아낸 것도 역시 한 소년 해커였지요. 이번 빈 라덴이 초강대국인 미국과 세계 전체의 생활양식을 바꿔놓는 충격도 역시 기술·정보·금융 시스템에 의한 세계화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한 일들입니다.
한마디로 세계화로 덕만 보는 나라가 따로 있고 손해만 보는 나라가 별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서로 연동되어 있어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피해갈 수 없는 자연현상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박은 가난한 자의 밭에만 떨어진다’는 속담처럼 세계화는 가난한 나라에 액운을 더 많이 떨어뜨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지요.
세계화는 숙명 |
이인화 선생님, 정보와 기술과 투자가 세계화되었다는 현상과 그것이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이라는 해석 은 약간의 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글로벌화가 반드시 정치적으로 의도적인 행동과 결부되지는 않는다는 것은 납득할 수 있지만 그것이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변화라는 해석에는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아까 말씀드린 IFG는 기술개발과 자유무역까지 다국적기업들의 무분별한 경쟁이 만든 세계전략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새로운 러다이트(Luddite) 운동가들, 18세기말 영국에서 일어났던 기계파괴운동의 재판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만…. 선생님 같은 의견에는 현상추수적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어령 그렇지요. 그런데 러다이트와 같은 기계파괴의 대중운동이 산업화를 막을 수 있었나요? 물론 실패했지요. 결국 모든 나라들은 산업화를 지향했습니다. 아다 시피 산업화는 영국에서 일어난 것이지만 그 기술 헤게모니는 세계로 퍼져 독일·미국 급기야 일본 같은 곳으로 옮겨왔지요.
IT의 민주화는 더 말할 나위가 없어요. 오늘날의 인터넷망과 위성통신망 같은 것은 미국과 소련의 냉전시절 군사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지요. 인터넷의 전신인 아르파넷(arpanet)은 워싱턴에 집중해 있는 군사정보를 소련의 유도탄 공격을 피해 분산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컴퓨터 네트워크였습니다.
인공위성을 발사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그 네트워크는 원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대학과 기업 그리고 급기야 개인의 공간으로까지 이어지면서 네트워크의 네트워킹이라는 새 날개를 달고 전 세계로 거의 자생적으로 증식해 갔습니다. 인터넷이 비록 영어로 통용되고 있기는 하나 미국이 인터넷을 지배하여 세계에 정보제국을 수립하였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보화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인터넷은 분산체제이기 때문에 권력이나 메시지를 중앙집권화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그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문·라디오·텔레비전과 같이 일방통행의 정보가 아니라 쌍방향으로, 마음만 먹으면 개인이라 하더라도 전 세계를 향해 자기의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정보의 습성은 물질의 소유와 달리 독점이 아니라 공유하는 데 있습니다.
두번째, 기술의 세계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요. 물은 높은 데서 얕은 데로 흐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낮은 곳에도 물이 차 수평을 이루려고 하지요. 무서운 것은 오히려 고립된 웅덩이 물이지요. 반세계화는 물이 흘러들어오는 것을 막고 웅덩이를 만들자는 주장이지요. 곧 썩거나 말라버립니다. 하지만 흐르는 물과 우물물은 기술 개방의 민주화를 부릅니다.
우물물처럼 퍼내야 새 물이 솟는 것처럼 기술민주화는 퍼서 남에게 이전해야 새 우물이 나오게 됩니다. 반도체 기술은 미국에서 발명된 것이지만 그것이 일본으로 흘러오고 다시 한국으로 와서 꽃을 피웠지요. 이제는 대만·중국·동남아로 퍼져 갑니다. 물론 의도해서 기술을 이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는 한 기업이 자체개발한 기술을 독점하고 있으면 이윤이 보장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림도 없어요. 이렇게 설비투자가 과잉되고 구매력에 비해 생산력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커진 세계에서는 한푼이라도 인건비가 더 싼 나라에서 만들어야 합니다. 기술을 이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오늘날 실리콘밸리의 정보통신 기술은 물밀 듯 인도로 이전되고 있습니다. 덕분에 인도의 IT산업이 미국에 연동해서 발전하고 있어요. 이것이 미국 사람들이 인도를 밀어주려고 작정해서 이루어진 일입니까? 아니에요. 미국과 인도가 정확하게 12시간의 시차가 난다는 우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실리콘밸리의 기술자들이 저녁 9시까지 일한 뒤 그 결과를 이메일로 인도로 전송하면 인도는 그때가 아침 9시입니다.
인도 노동자들은 그때부터 또 저녁 6시까지 일을 하고 다시 그 결과를 미국으로 전송하면 미국은 그때부터 또 하루를 시작하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진행되는 것이 기술의 민주화에 의한 세계화입니다.
이제 웬만한 기술에는 국경이 없어지고 있어요. 미국 자동차산업의 메이저 회사들, 즉 빅 스리는 인터넷에 합동으로 홈페이지를 만들어 놓고 전 세계에서 그 부품을 경매해 함께 쓰고 있습니다. 핵심기술만 자기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이 기술의 세계화, 기술의 민주화입니다.
세번째가 금융 투자의 세계화, 투자의 민주화입니다. 달러를 미국돈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달러는 어느 나라 돈이기 이전에 국제무역을 만드는 기축통화(基軸通貨)라는 것이죠. 투자할 수 있는 안정성만 갖춰주면 달러가 미어터지게 모일 수도 있고, 투자가 불안해지면 있던 달러가 다 나갈 수도 있습니다. 돈에는 국적이 없습니다. 많이 벌게 해주는 나라가 제 나라예요.
어느 나라에 얼마가 투자되는 것은 전적으로 그 나라의 투자여건을 파악한 자본의 합리주의가 결정할 문제이지 자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죠. 미국 역시 금융·투자의 민주화에서 손해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번 테러 사건으로 주식이 안정되지 않고 경제적 패닉이 오면 달러화의 폭락을 미국 정부나 시티은행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게 되지요.
이미 국가 통제의 범위를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정보, 기술 그리고 돈의 민주화에 의한 세계화는 선택적인 변화가 아니라 마치 계절 같은 문명의 한 흐름과도 같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겨울이 춥다고 주먹질해 봐야 소용없어요. 얼어 죽기 전에 솜옷을 장만하는 것이 현실적이지요. 그래야 겨울은 다시 봄으로 변해요.
이인화 말꼬리 잡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방금 말씀하신 투자의 세계화는 별로 자연스러운 것 같지 않은데요. 확실히 반세계화 운동가들의 논리에는 전산업사회에 대한 낭만적 동경의 감상주의라든지 기술공포증, 테크노포비아 같은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국 화폐를 기축통화로 가지고 있다는 미국의 이점은 너무 큰 것이고 그런 미국 중심의 세계화는 자본 투자 면에서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까 투자의 민주화라는 부분에서 말씀하신 세계화의 순기능은 맞습니다. 유권자들이 좋은 정부를 뽑아 국가의 거버넌스(governance)만 잘 갖춰놓으면 달러가 들어올 수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 달러라는 것이 핫머니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국의 IMF 사태가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1997년 당시 제이 피 모건(J.P.Morgen)은 한국에 TRS라는 파생상품을 팔았습니다. 투자제안서만 보면 TRS는 환상적인 파생상품이었습니다. 한국돈 100원을 투자해 그 100원을 담보로 금리가 가장 낮은 일본의 엔화를 100원 빌리고, 합계 200원으로 달러를 사서 그 달러로 태국의 바트화를 사고, 그 태국 바트화로 달러화 표시 태국 채권을 산다는 구조였지요. 금리와 환율 차이 때문에 1년 후에는 앉아서 80%의 수익을 얻을 전망이었습니다.
그것은 소위 모든 아비트리지(차익거래) 펀드, 무위험 거래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무위험 거래는 위험범위라는 것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최대의 위험범위는 이 정도라고 생각한 그 한계 안에서 설계된 거래입니다. 금리·환율·원유·주식·선물·옵션 등 무수한 변수들 가운데 하나가 그 위험범위를 벗어나게 되면 무한대의 이익이 발생하거나 무한대의 손실이 발생해요.
TRS의 경우에는 국제적인 환 투기꾼들이 태국 바트화를 공격해 달러당 24.5바트였던 바트화가 폭락, 20년만에 처음으로 달러당 39.1바트까지 치솟는 상상을 초월하는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TRS는 무한대의 손실이 발생했지요. 거기에 300억원을 투자했던 한국의 모 대기업은 원금을 다 까먹은 것은 물론 3,000억원, 즉 원금의 10배에 해당하는 손실액을 청구당했습니다. TRS에 투자했던 한국기업들의 손실은 모두 6조원이 넘었습니다. 무수한 기업이 도산했고 그 여파는 IMF라는 한국의 국가부도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선생님이 말씀하신 투자의 세계화, 투자의 민주화 안에 이런 상상을 초월하는 핵폭탄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TRS의 경우 폭탄은 바트화가 깨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당시 바트화는 철저한 고정변동환율제도 아래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지요. 제이 피 모건은 어린아이 팔을 비트는 식으로 한국의 투자자들을 속였습니다. TRS가 바트화 선물을 매입하게 한 뒤 제이 피 모건 자신이 국제적인 투기꾼들과 함께 바트화 선물을 매도했지요. 선물투자라는 것이 어차피 누군가는 잃어야 누군가가 버는 구조니까요.
핫머니는 소수의 야비한 투기꾼들이 움직이는 돈이 아닙니다. 세계 굴지의 신용을 자랑하는 투자회사가 입에 침도 안바르고 태도를 바꿉니다. 고객이 손해를 보도록 자기쪽에서는 적 진영에 가담하면서도 투자 결정은 투자자가 한 것이지 제안한 사람이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150페이지가 넘는 투자제안서에 한 줄, 그것도 아주 모호한 말로 위험을 암시하고는 자기는 미리 다 경고했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입니다.
확실히 국제적인 투기자본은 변화를 만들어 주고, 그런 변화가 없다면 세계 자본주의는 불황과 침체의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핫머니 때문에 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많은 사람들이 노숙자가 되어 거리를 방황했습니다. 생계가 막막해진 가족들이 함께 자살했구요.
이런 상황은 기본적으로 제조업이 약한 미국이 막대한 무역적자를 안고 있으면서도 금융자본에 의한 투자수익을 가지고 그 적자를 보전하려다 발생한 사태입니다. 아무리 무역적자를 내도 미국은 기축통화 국가이니 달러를 자꾸 찍어 지불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찍어낸 달러를 중국 같이 활발하게 성장하는 신흥공업국이나 발전도상국에 투자해 그 투자수익으로 대외채무를 메워 가겠다는 전략입니다.
그 결과 미국은 계속 달러를 흘려보내고 달러는 선물 옵션·스와프 같은 파생금융상품, 헤지펀드 같은 규제외 금융상품이 되어 점점 더 빠르게 이동합니다. 바로 이같은 자본 유동성의 과잉이 항상 세계 어느 곳에선가는 금융위기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태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1994년에는 멕시코, 95년에는 아르헨티나, 97년에는 태국·말레이시아·한국, 98년에는 러시아, 99년에는 다시 중남미…. 이렇게 금융위기는 지구를 일주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