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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正日의 전속 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氏. 보안문제 때문에 정면
사진 촬영을 하지 않고 옆모습을 찍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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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金正日의 料理人」이란 책을
발간하여 화제를 불러일으킨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氏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책을 출간한 후쇼사(扶桑社) 측은 처음엔 『著者가 책 발간
후 조총련이나 북한 첩자들로부터 어떤 위해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인터뷰에 응할 수 없다』고 했다. 거듭된 인터뷰 요구에 『그렇다면 著者와
상의한 후 시간을 내 보겠다』는 연락이 왔다. 인터뷰 장소도 모른 채 일본으로 날아가 도쿄(東京)에 도착하자 인터뷰 장소가
일본의 유명한 휴양도시인 나가노현(長野懸)의 가루이자와(輕井澤)라는 곳으로 정해졌다는 연락이 왔다. 다음날 아침 도쿄역에서 신칸센(新幹線)을
타고 한 시간 20분 정도를 달려 가루이자와로 갔다. 가루이자와는 해발 1000m의 고원지대라서 그런지 푹푹 찌는 도쿄와는 달리 서늘하고
청량했다. 약속장소인 가루이자와의 한적한 호텔에 단단한 체구의 사나이가 나타났다. 펑크 스타일의 머리에 변장을 위해서인지
얼굴의 3분의 1쯤을 가리는 두툼한 안경을 쓴 그 사람이 「金正日의 요리인」이었던 후지모토 겐지(藤本健二)氏였다.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氏는 북한 지도자 金正日의 전속 요리사로서 13년여 동안 金正日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온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는 金正日과
함께 술 마시고 노래하고 도박과 스포츠의 파트너였으며, 심지어 벌거벗고 사우나를 함께 할 정도로 인간적인 情을 나누었다. 그런 존재가 일본으로
탈출하여 「金正日의 料理人」이란 책을 통해 金正日의 私生活, 북한 최고 지도부의 생생한 裏面史(이면사)를 털어놓은 것이다.
후지모토氏는 1982년 8월 평양에 문을 연 安山館(안산관)이란 일본 식당의 요리사로 처음 북한에 들어가 이듬해 5월까지 일을 했으며,
1987년 8월 다시 북한에 들어가 고려호텔 지하식당 요리사로 취업했다. 이 과정에서 金正日에게 불려가 초밥 요리를 해 주다가 전속 요리사로
발탁되어 그의 측근에서 활동하게 된다. 후지모토氏는 1996년 9월 일본으로 요리 재료를 사러 나왔다가 일본 경찰에
입국관리법 위반 방조죄로 체포되어 한동안 일본에 머물다가 1998년 6월 다시 북한에 돌아가 金正日 요리사로 일했다. 이 와중에 스파이 혐의로
가택연금을 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다가 2001년 4월24일 일본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후지모토氏는 대화 도중 급하면
한국말이 튀어나왔는데, 13년 정도 북한에 머문 것 치고는 한국말을 그다지 잘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유를 묻자 『통역이 있어 한국어를 굳이
배워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부인 嚴正女(후지모토氏는 金正日의 배려로 북한의 인기가수 嚴正女씨와 결혼했다)씨가
일본어를 약간 했기 때문에 자신의 한국어 실력이 늘지 않았다고 한다. 긴자의 유명 요리점 「스시센」에서 정통 일본요리 배워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본에서 「金正日의 요리인」이란 책을 낸 이후 북한이나, 북한과 관련된 세력들로부터 협박을 받은 적은 없습니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만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불안한 것은 사실입니다』 ―책에는 후지모토氏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거의 없더군요. 고향은 어디이며 요리는 언제 어디서 배웠습니까. 『이 책은 내가 북한에 간 다음부터의 이야기를
다루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신상은 다루지 않았습니다. 고향은 일본 북쪽 지방인 아키타현(秋田懸)이고 요리의 기초를 공부한 곳은 도쿄의 긴자
8丁目에 있는 스시센(壽司淸)이라는 유명한 요리집입니다』 스시센이란 요리집에 대해 묻자 『일본에서는 초밥으로 유명한
집으로서 일반 손님은 거의 없고 財界, 政界의 유명 인사와 같은 고급 손님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처음으로 초밥을 먹어 본 때가 도쿄에서 고등학교 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입니다. 같이 일한 선배가 초밥을 사 주겠다고 해서 요리집에 갔는데
초밥 한 접시 당 100엔이었어요. 그 무렵 스시센에서는 한 접시에 3000엔을 받았습니다』 후지모토氏는 『스시센은 내가
요리사로서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추억이 있는 집』이라며 옛 기억을 더듬었다. 『제가 요리를 배우기로 작정하고 친척의
소개로 스시센에 들어갔습니다. 처음 몇 년간은 카운터 옆에서 요리사를 돕는 견습을 하는데, 요리사 곁에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현장 학습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견습 시절에 직접 요리를 해 보고 싶은 열망이 너무나 강했습니다. 하루는 일찍 일이 끝나 할 일도 없었는데, 내 옆에 도미
머리가 눈에 띄었어요. 그래서 도미 머리를 가져다가 칼로 이리저리 자르면서 요리를 만들어 보려고 했어요. 이 모습을 본 주인이 「후지모토, 너
지금 뭐하는 거야!」 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어요. 그 다음 말이 나를 폭발하게 만들었습니다. 「너는 아직 도미를 만질 준비가 안 되어 있어」라는
것이었어요.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가게를 박차고 나왔는데, 다음날 어머니가 가게 주인을 찾아가 「후지모토가 철이 없어 그런 것이니 다시
일하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요리사가 되기 위해 일본 최고의 요리집인 스시센에 들어가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웠거든요』
이런 증언을 종합해 보면 후지모토氏는 평범한 요리사가 아니라 일본 최고급 요리집에서 정통 일본 요리를 제대로 배운 셈이고, 세계적인
美食家 金正日은 일본 최고의 요리집 출신인 후지모토氏의 격조 높은 요리 세계의 열성 팬이 된 셈이다. 35세에 미지의 나라 북한으로 ―처음 평양으로 간 때가
1982년인데, 그때 후지모토氏는 몇 살이셨습니까. 후지모토氏는 약간 어눌한 한국 발음으로 『개인의 사생활 부분은 질문을
삼가 주셨으면 좋겠다』면서 『나는 1947년생』이라고 답했다. 그러니까 인생으로서는 최고의 황금기인 35세에 후지모토氏는 「북한」이라는 미지의
나라에 도전한 셈이다. ―「金正日의 요리인」 책에 「8번 연회장」 이야기가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8번 연회장은 어떤
용도의 방입니까. 『25명 정도가 들어가 모임을 하는 간단한 연회장입니다. 물론 당 간부나 金正日 측근 외에는 이용할 수
없는 곳이죠』 후지모토氏의 책에는 金正日을 위해 처음 요리를 만들어 주었을 때의 첫 장면이 인상 깊게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金正日은 후지모토氏에게 팁을 준다고 봉투를 던진 것이 그만 바닥으로 떨어졌다. 당시 정황을 후지모토氏는 책에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나는 그 봉투를 줍지 않았다. 당연히 팁이겠지만 집어던진 것을 주우면서까지 갖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 광경을
보고 임상종(일본어 통역)이 황급히 주워 내게 주었지만 나는 불끈한 채 인사하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내가 북조선에 온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돈을 벌러 온 것이다. 하지만 팽개치듯 내던진 것을 주워 가질 만큼 궁색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것은 거지나 마찬가지다. 나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이 대목에 대해 질문을 하자 후지모토氏는 이렇게 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金正日이 고의로 봉투를 던진 것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의 자리가 나와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봉투를 건네주려고 툭 던진 것이 그만
탁자 아래로 떨어진 것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 후에 金正日을 유심히 관찰해 보니 아랫사람들에게 무엇을 던지고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날 사건 이후 金正日은 내게 팁을 줄 때 반드시 일어나서 봉투를 직접 주었어요』 ―金正日은 최측근
부하들에게 자상하게 대하는 편인가요. 『평소에는 친절한 편인데 참모들이 일을 잘못하는 경우 가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과격하게 화를 내기도 합니다. 그가 북한의 최고 지도자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북한에 거주하면서 귀국자들 외에 최근
일본에서 문제가 됐던 일본인 납치자들을 보거나 들은 적이 있습니까. 『전혀 없었어요. 1996년 9월에 제가 일본에
입국하려다가 경시청에 체포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조사 과정에서 일본인 납치자를 본 적이 있느냐고 집중적으로 묻더군요. 나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은커녕 들은 적도 없다」면서 「일본 사람을 납치하는 것이 북한에 무슨 플러스 요인이 됩니까?」라고 말할 정도로 나는 북한 실정에 대해 전혀
몰랐어요』 후지모토氏는 『작년에 고이즈미(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방북했을 때 金正日이 일본인 납치를 시인한 것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북한에 납치돼 북한에서 영화를 찍는 등 공개적으로 활동했던 최은희씨나 신상옥 감독에 대해서도
『전혀 들은 적이 없고 만난 적도 없다』고 했다. 외국 요리사가 북한에 출장 와서 金正日 요리사들을 지도
―후지모토氏처럼 金正日 요리사 중 외국인이 더 있었습니까. 『제가 직접 본 외국 요리사는 프랑스 요리사(이름 기억 못
함)로 스테이크 요리를 지도하기 위해 평양에 와서 金正日 요리사들을 한 달 정도 지도하고 갔습니다. 마카오에서 온 중국 요리사(이름 기억 못
함)는 평균 석 달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와서 한 달 정도 요리를 지도하곤 했어요』 ―그런 사람들에 비해 후지모토氏는
10년이 넘게 金正日 전속 요리사로 활동했습니다. 후지모토氏가 오랜 기간 金正日 곁에 있었던 것은 후지모토氏의 요리가 金正日의 입에 맞았거나,
아니면 후지모토氏의 요리 기술이 독특해서 다른 사람이 흉내를 낼 수 없었거나 둘 중의 하나가 아닐까요. 『金正日은 내가
만든 요리를 먹으면서 「후지모토 요리가 세계에서 넘버 원」이라는 말을 자주 했어요. 내가 만든 요리가 장군님 입맛에 맞는다는 얘기를 측근들로부터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본인 스스로 요리 솜씨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최고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어요. 일본에는 나보다 요리를 훨씬 잘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이 만족하지 못하는 요리, 스스로 창피하다고
생각되는 요리, 최선을 다하지 않는 요리는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후지모토氏는 1982년 8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평양에서 일을 하는 중에 金正日에게 불려가 여러 차례 요리를 해 주었고, 그때마다 金正日로부터 많은 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북한을 떠난
다음에도 계속 북한에 다시 가고자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은 돈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북한에서 만난 권력자 金正日에 대한 매력
때문이었습니까. 『金正日은 통이 큰 사람입니다. 그냥 큰 정도가 아니라 보통 사람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커요. 나는 언젠가 金正日이 북한의 넘버 원(최고 권력자란 뜻)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사람을 위해 초밥을 만든다는 자부심도 느꼈던 것이
사실입니다』 金正日의 별장도 전기 나가 고생 ―후지모토氏는 북한에서 살던
시절 金正日이 제공하는 안락한 삶 속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절 북한 주민 300여만 명이 굶어 죽는 「고난의 행군」이 진행
중인 와중에도 북한의 최고 권력자가 주최하는 도박에서 부하들에게 주는 선물이 피아노, 金貨, 벤츠 승용차였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굶어 죽는 사람들은 지방 사람들 아닙니까. 평양에선 그런 보고가 金正日에게까지 올라오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1997년 黃長燁씨가 한국으로 탈출할 때 金正日이 金日成대학 창립 50돌을 맞아 연설을 한 연설문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문건을 보면 金正日이 「지금 인민군대도 굶어 죽고 있는데 당 간부들이 너무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다」는 연설을 했어요. 또 黃長燁씨도 북한에서는
상당한 고위층이었는데 그분이 1996~1997년 겨울에 자신이 살던 당 간부 아파트에도 난방과 전기가 끊겼다고 합니다.
『북한 電力 사정이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장군(金正日)이 묶는 초대소는 그 지역 발전소에서 특별 送電을 해 줄 정도로 관리가 잘 되고 있었는데도
저녁 식사 도중 자주 전기가 나가 별장 내부 발전기를 돌리는 등 야단이 난 적이 많았습니다』 ―1996년 당시 주민들이
식량난으로 고생한다는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까. 『지금 생각해 보니 아내 嚴正女는 한 달에 한 번 쌀을 배급받으면 반
정도만 먹고 나머지는 지방에 사는 처가에 갔다 주곤 했어요』 후지모토氏는 1987년부터 2001년까지 일본에 체류한 시기를
제외하면 13년 정도를 북한에 살다 온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金正日과 북한 지도층의 생활을 제외한 북한 사회의 보편적 현상에 대해서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아는 것이 없었다. 북한의 현실에 대한 후지모토氏의 無知는 金正日 주변에서 金正日을 위해 요리를 하고, 金正日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노력했던 요리사였을 뿐이라는 기준에서 본다면 이해가 갈 듯도 하다. 후지모토氏는 자신의 북한 생활에 대해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저는 정치적인 얘기는 하고 싶지도 않았고, 정치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도 없고, 끼어들 머리도 없습니다. 내가
정치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면 아마 의심을 사서 오랜 기간 장군의 주위에 머물 수도 없었을 겁니다』 金正日 성격은 왔다 갔다 하는 편 ―부인 嚴正女씨와 결혼한 후
몰래 처가를 방문했을 때 초라한 그들의 살림살이에 충격을 받은 사실을 증언하셨습니다. 처가를 방문하기 전에는 북한의 실상을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까. 『처가에는 여섯 식구가 사는데도 방이 한 칸밖에 없었습니다. 처가에 가기 전까지 북한 사람들의 집은 간 적이
없었어요. 그때 북한의 일반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1988년부터 매달 세 차례 정도 金正日에게
불려가 金正日과 도박을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됐는데, 金正日이 후지모토氏를 신임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저도
그게 늘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金正日이 나를 자기 손아귀 안에 두고자 하는 어떤 계획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1988년 5월에 연회장에서 金正日이 「내 옆에서 10년 동안 일을 하지 않겠는가. 만약 10년 동안 있어준다면 초밥집을 하나 차려 주겠다.
월급은 한 달에 50만 엔이고 수입은 후지모토가 모두 가져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50만 엔이면 그 시절에는 정말 대단한 액수였고
게다가 초밥집 수익금도 모두 가지라니, 이런 제안을 받고 거절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1988년이면 아버지 金日成이
살아 있을 때입니다. 혹시 金正日은 자신이 후계자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는
완전히 자신을 후계자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위치에 대해 불안을 느끼는 기색을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어요』 ―金日成이
살아 있을 때 그를 위해 요리한 적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저는 오로지 金正日을 위한 사람이었을 뿐입니다』
―후지모토氏는 1988년 어느 날 도박을 하다가 金正日에게 벤츠 승용차를 선물로 받았고 야마하 오토바이 등을 선물 받은 이야기가 나와
있더군요. 金正日이 어떤 때는 팁을 집어던지는가 하면 마음 내키면 벤츠를 선물하는 등 종잡을 수 없는 인간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金正日의 성격이 좀 왔다 갔다 하는 편이긴 합니다. 金正日에게서 벤츠를 선물로 받았을 때는 정말 놀랐습니다. 일본에서
요리사를 계속 했다면 벤츠 같은 승용차를 탈 기회가 없었겠죠』 ―부인인 가수 嚴正女는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분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아내는 민요가수였습니다. 1988년 북한의 최고 인기가요였던 「첫 동요, 반갑습니다」라는 농요풍의
노래를 불러 거의 매일 북한 텔레비전에 나왔습니다. 남한에서 유행한 「반갑습니다」와는 다른 노래입니다』 유혈 낭자한 여성 권투 중단시키다
―嚴正女씨를 처음 본 느낌이 어땠습니까. 『아주 예뻤어요. 내가 먼저 嚴正女에게 반한 것입니다. 여성 복싱은 「9번
연회장」에서 했는데, 金正日은 심리파악의 도사였습니다. 내 눈길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를 주시하다가 내가 嚴正女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嚴正女와 결혼하도록 명령을 한 셈이죠』 ―아무리 사회주의 독재국가라고 하지만 북한 최고 여가수들에게 글러브를 끼워 유혈이
낭자한 권투시합을 시키는 북한 지도자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嚴正女가 권투를 하다가 펀치를 맞고 쓰러졌을 때 내가
처음으로 그녀 옆으로 갔어요. 「수고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하며 악수를 나눴어요. 金正日이 나에게 「여자 권투가 어떤가」 하고 묻기에 내가
「여성이 피를 흘리며 치고 받는 것이 정말 싫습니다」 하고 말하자 그 후로 여자 복싱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습니다』
―후지모토氏가 북한의 엽기적인 여자 복싱 제도를 폐지한 셈이 됐군요. 金正日이 특별히 좋아하는 스포츠는 무엇이었습니까.
『乘馬입니다. 덕분에 북한 여기저기에 승마장이 많습니다』 ―1992년 金正日이 落馬로 크게 다친 사건은 그동안 우리
정보기관이나 언론에서 추측만 했을 뿐 증거가 없어 애를 태우던 것이었습니다. 후지모토氏가 책자를 통해 이것을 직접 확인해 주신 셈이 됐는데요,
그런 차원에서 한국에서 몇 가지 나도는 說에 대해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장 궁금한 것은 1994년 金日成이 사망했을 때 金正日이 아버지를
암살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金日成은 죽기 전에 아들 金正日에게 자주 전화를 했는데 金正日은 전화를 받을 때마다
극존칭어를 써 가며 깍듯하게 대했습니다. 이런 일로 미루어 볼 때 장군이 아버지를 암살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정보기관 관계자의 증언에 의하면 1998년 무렵 스위스에 살고 있던 金正日의 부인 高英姬(注-高英嬉로 표기하는 이도 있으나
후지모토氏의 표기법에 따랐다)의 여동생인가 언니인가와 그의 남편이 미국으로 망명했다고 합니다. 『高英姬의 여동생 부부(이름
기억 못함)가 金正日이 주최하는 연회장에 자주 나와 인사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高英姬 여동생의 아들이 金正日의 둘째 아들 正雲 왕자(기자
注-그는 金正日의 가족을 이야기할 때 아들은 왕자, 딸은 공주라고 호칭했다)와 나이가 비슷해 둘이 잘 어울렸습니다. 그런데 내가 1998년
6월에 다시 북한에 돌아가 보니 高英姬 여동생 가족이 보이질 않더군요』 후지모토氏는 『북한에 있을 때는 이들이 망명했다는
사실을 상상도 못 했는데, 지금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들이 눈에 보이지 않은 이유가 망명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金日成 죽자 당황한 金正日 ―미국에 망명한 高英姬 여동생 가족의
말에 의하면 이들은 金正日을 미국으로 망명시키는 공작을 자신들이 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이 실제로 가능할 것으로 보십니까.
이 질문에 후지모토氏는 『간단히 답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면서 『그 사람들이 편안한 일상을 팽개치고 망명을
했다는 사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후지모토氏의 책 내용 중에 金正日은 金日成 死後에 권총을 앞에 놓고
고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를 보고 부인 高英姬가 놀라서 『당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하고 고함을 치면서 말렸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金日成
死後에 金正日이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심하게 동요한 것 같은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金正日이란 사람은
아버지 金日成의 철저한 보호 아래, 그의 머리 밑에서 움직였던 사람인데, 어느 날 자신의 거대한 보호자의 머리가 뚝 잘려 나갔는데 왜 고민이
없었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이제 내 차례가 돌아왔다」 하고 기뻐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제가 보기엔 국가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엄청난
고민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후지모토氏는 남북 頂上회담과 관련하여 『그 무렵 평양 시민들은 만나기만 하면 「金大中이가
꼬리를 치러 오는구나」 하는 말을 주고받았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남북 頂上회담 때 후지모토氏는 『내 존재가 외부에
알려질 것이 염려돼서 그런지 원산초대소에 머물렀다』고 말했다. 후지모토氏는 북한에서 스파이 혐의로 의심을 받고 있을 때
金正日의 부인 高英姬의 도움을 받은 사실을 증언했다. 또 그가 일본에서 입국방조죄로 체포되어 오키나와로 사라졌을 때 金正日이 후지모토氏를
암살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高英姬가 말리는 바람에 자신이 목숨을 건진 사실도 증언했다. 그렇다면 북한 최고 권력자의 부인이 후지모토氏를 도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후지모토氏의 답변을 들어 보자. 『高英姬는 재일교포 출신이기 때문에 자신이 일본에서
나서 일본에서 자란 사실을 떨쳐 버리지 못했습니다. 내가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심정적으로 친근감을 가졌던 것 같아요. 만약 내가 100% 북한
사람이었다면 金正日의 암살 지시를 반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金正日 후계자는 2男 金正雲 高英姬의 인간성에 대한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북한 여성의 이상형이랄 수 있는 인물이 사모님(기자 注-후지모토氏는 高英姬를 호칭할 때 꼭
사모님이라고 불렀다)입니다. 대단한 美人인데다가 참을성과 인내심이 강하고 다른 사람들 말에 끼어들지 않는 그런 여성입니다』
후지모토氏는 어렵게 단어를 생각해 내어 『한마디로 賢母良妻』라고 답했다. ―金正日은 高英姬 외에도 여러 여자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金正日 주변에 다른 여자가 있다는 사실은 일본에서 체포됐을 때 경시청 사람들에게 처음 들었습니다. 저는
金正日의 부인은 高英姬 하나뿐인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성혜림이 낳은 金正日의 아들 金正男은 내가 북한에 있을 때 그 존재조차 몰랐을 정도로
최고 권력층이 모이는 연회장에는 절대 부르지 않았습니다』 ―月刊朝鮮 취재반이 입수한 북한 측 자료에 의하면 북한에서는
高英姬의 장남 金正哲(김정철)을 후계자로 내세우기 위한 일련의 작업이 진행 중이라 합니다. 후지모토氏는 金正日이가 오히려 차남 金正雲에게 더
많은 애정을 주고 있으며, 북한이 現 체제로 계속 나간다면 金正雲이 金正日의 후계자가 될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金正日은
장남 金正哲을 「성격이 여자 같아서 안 된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金正哲과 金正雲은 앉는 자리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金正日의 가족이 어떻게
앉는지 그림으로 그려 보겠습니다. 일단 金正日의 위치가 가운데이고 그 왼쪽이 사모님(高英姬)입니다. 正雲 왕자가 사모님의 왼쪽에 앉고 공주는
金正日의 오른편에 앉습니다. 高英姬 부인이 빠질 경우 金正雲은 金正日의 바로 옆자리에 앉습니다. 그러나 金正哲 왕자는 늘 金正日 옆에 앉지
못하고 공주의 오른쪽에 앉습니다. 누가 봐도 후계자는 金正雲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94~1995년 무렵 高英姬 프랑스에서
암수술 ―金正日이 기쁨조들에게 옷을 벗고 춤추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혹시 金正日은 性도착자가 아닙니까.
『金正日의 부인 高英姬는 몸이 약하다고 알려졌는데 1994년인가 1995년 무렵 사모님(高英姬)이 암에 걸려 수술을 받으러
프랑스로 나가고 없었습니다. 그 무렵 金正日이 무척 외로워서 우울한 기분을 풀려고 디스코를 추던 기쁨조들에게 옷을 벗으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기쁨조들이 머뭇거리면서 브래지어와 팬티만 걸쳤는데 갑자기 金正日이 「다 벗어!」라고 소리치는 바람에 나도 놀랐어요. 간부들에게도 같이 춤을
추라고 하더니 마지막에는 「후지모토, 너도 함께 춰!」 이러는 거예요. 하하하! 디스코를 추려면 상대를 마주 봐야 하는데 앞에는 알몸이 된
기쁨조가 있으니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결국 벽만 보고 췄죠. 그러더니 金正日이 「춤을 추되 여성들 몸을 만지면 안 돼! 만지면
도둑이야」라고 했어요. 이런 일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金正日이 高英姬를 사랑한 것은 사실인가요.
『金正日은 사모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제 생각엔 金正日의 마지막 여자가 高英姬라고 생각합니다』 ―金正日이가
보천보 악단의 남녀 단원들을 일렬로 세우고 키스를 하도록 하는가 하면, 이들을 약혼시키는 장면, 부인 嚴正女씨에게 코냑을 한 병 다 마시면
1000달러를 주겠다 해서 억지로 마시다가 쓰러지도록 하는 장면, 월드컵 축구 예선에서 참패하고 귀국한 선수들을 농장에 보내 감자를 캐도록 한
사실 등을 보면 金正日은 정상적 인물이라기보다는 약간 변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축구선수들이 출국할 때는 환송을 하느라 난리를 쳤어요. 그들이 예선에서 나가 떨어지자 공항에 감자 캐는 농장으로 그들을 싣고 갈 트럭들이 미리
대기하고 있었어요. 그러더니 체육담당 간부가 나와 「야, 여기에 타라」 이랬다는 거예요』 ―그런 것을 보면 金正日이
정상적인 유형의 인물은 아니지 않습니까. 『金正日이 축구선수들을 농장으로 보내 감자를 캐라고 직접 지시한 것 같지는
않아요. 金正日 아래의 체육담당 간부들이 金正日 보기가 황송해서 미리 조치를 취한 것 같습니다. 나중에 이 간부가 金正日에게 「지금 축구선수들을
농장에서 혼내주고 있습니다」고 보고하자 金正日이 「잘 했어」라고 하더군요』 전쟁을 체스 게임으로 보는 金正日 ―한국에 망명한 黃長燁씨는 최근
북한의 제2인자가 金正日의 여동생 김경희의 남편 張成澤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북한 체류時 張成澤과의 인연은
없으셨는지요. 『연회장에서 자주 만났습니다. 張成澤은 북한 권력 핵심부 누구도 그를 반대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張成澤이
연회 도중 「다 한잔씩 마셔! 잔 돌려!」라고 외치면 간부들이 일제히 서서 술을 돌리고 원샷으로 마십니다. 張成澤은 한 시간에 한 번꼴로 잔을
돌리라고 합니다』 ―張成澤이 그만큼 권력이 세다는 뜻인가요? 『그 사람의 성격이 그런 스타일입니다.
金正日이 빨리 죽으면 張成澤이 제2인자가 될 수 있겠지만 만일 金正日이 長壽한다면 金正日의 자식들이 성장할 것이기 때문에 그때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金正日은 張成澤을 어떻게 대합니까. 『金正日은 張成澤을 「張부장」이라고 불렀는데, 언젠가
무슨 일 때문에 張成澤의 계급이 한 단계 떨어진 적이 있어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회장에서
張成澤이 큰소리치면 다른 간부들이 그를 따르는 것을 보면 계급이 떨어져도 張부장의 위엄은 그대로인 것으로 보였습니다』
―지금 黃長燁씨가 「張成澤이 북한 내의 2인자」라고 말한 것은 그가 빨리 일(쿠데타)을 저지르라고 하는 메시지로 해석될 수도 있는데요.
『張成澤의 부인 김경희는 金正日의 여동생입니다. 김경희는 애교가 많고 연회장에서 보면 金正日 옆에 앉아서 연신 「오빠,
오빠」 하며 金正日을 굉장히 따랐어요』 ―군부 인사들이 張成澤을 많이 따르는 편인가요. 『그가 軍을
제압할 수 있을지 없을지의 문제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북한에서 쿠데타가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내가 북한에서 한참 권총사격에 몰두할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밤에 자다가 쿠데타가 일어나는 꿈을 꾼 적이 있어요. 쿠데타군이 내 머리에 총을
쏘는 장면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더군요. 꿈에 대한 기억이 너무도 생생해서 다음날 장군(金正日)에게 「사실은 어젯밤에
쿠데타가 일어나는 꿈을 꾸었다」고 하자 장군이 하하 웃더니 「우리 공화국에는 사람들이 좍 깔려 있어도 100명 중 두 명은 감시자들이야. 걱정
마」 이렇게 말하더군요. 측근들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1995년엔가에 쿠데타를 하려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사전에 다 잡혔다고 하더군요』
―혹시 金正日이 「미국이 우리를 공격할지 모른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金正日은
전쟁을 체스처럼 생각합니다. 체스를 두다 보면 상대편 말을 죽이기 위해서는 내 말도 어느 정도 희생을 각오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金正日은
「전쟁이 나면 인민군대의 30만~35만 명이 희생되겠지만 그래도 최후의 승리는 우리 것」이라고 늘 말했습니다』
金正日의 체형은 일본 스모 선수와 비슷
―북한이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던 1993년에 金正日 가족이 유럽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기내에서 먹을 도시락 준비를 위해
모스크바까지 날아가 도시락을 만든 사례를 증언하셨습니다. 과일 사러 싱가포르에, 철갑상어알을 사러 러시아와 이란에, 그리고 요리 재료 구입을
위해 중국, 유럽, 일본 등지를 돌아다닌 이야기를 책에 쓰셨어요. 金正日이 이렇게 호사스런 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드셨습니까.
『세계 어느 나라고 그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됐다면 그 정도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金正日이
유별나게 호화로운 식사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후지모토氏가 2001년 4월 중순 북한을 탈출하기 위해 일본으로
성게알 요리 재료를 사러 나갈 때는 金正日이 1만5000달러를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한 번 해외 출장을 나갈 때마다 음식 재료 구입비로 어느
정도 돈을 썼습니까. 『요리에 필요한 재료를 컴퓨터로 찍어 金正日에게 보여 줍니다. 金正日은 그 리스트 중에서 불필요한
것을 뺀 나머지 품목을 해외에서 사 오라고 하는데, 한 번 갈 때 재료비가 200만~300만 엔 정도 됩니다. 일본의 직장인들이 매달 30만 엔
정도 받는다고 볼 때 그 열 배 정도 되죠. 1991년경에 일본에서 다랑어(참치)를 사 올 때는 400만 엔을 들인 적도 있습니다. 그 무렵
보통 다랑어 한 마리가 80만 엔쯤이었는데 400만 엔이면 대단히 고급이었던 셈이죠』 ―金正日은 비행기 타는 것을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혹시 金正日 전용기인 216호에 金正日이 탑승한 것을 보거나 들은 적이 있습니까. 『金正日이 전용기나
비행기를 이용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요. 러시아를 방문할 때도 철도를 이용하지 않았습니까. 216호는 金正日의 가족이나 측근들이 이용하는
전용기입니다』 후지모토氏는 북한에서는 金正日 측근들이 외국에 다녀오면 반드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는다고 썼는데, 주로
性病(성병)에 걸리지 않았는지 검사를 받는다고 말했다. 金正日과 벌거벗고 함께 사우나를 한 사실도 책에 써 놓았다. 북한 지도자의 알몸을 본
유일한 외국인인 셈인데 그 때 기분이 어땠을까. 여기에 대한 후지모토氏의 답변. 『사람도 별로 없는 사우나장에, 북한
사람도 金正日과 함께 사우나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내가 북한 최고 권력자와 벌거벗고 사우나를 한다는 현실 자체가 영광이라기보다 이상한 일이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옷을 벗고 보니 金正日은 일본 스모 선수와 체형이 비슷했다고 한다. 『책에 나온
대로 金正日의 바지는 허리가 80cm인데 배가 부르면 120cm까지 늘어날 수 있도록 고무 밴드로 되어 있습니다. 金正日로부터 받은 바지를 입어
보니 허리띠가 가슴 부위까지 올라올 정도로 컸어요』 金正日은 아랫사람의 심리 꿰뚫어 보는 데 일가견 있어 ―일부 한국
언론에서 金正日의 건강이 안 좋다는 보도도 있었는데요. 『金正日은 시간에 맞춰 약을 복용하고 있습니다. 당뇨병은 없고,
신장은 좀 안 좋다고 하더군요』 金正日의 식욕에 대해 묻자 『많이 먹는 편은 아니다』면서 이렇게 답했다.
『요리 한 접시마다 두세 점 집어먹는 정도입니다. 金正日이 한 접시에 놓인 음식을 세 번 이상 먹으면 합격입니다. 한 번만 먹고 두
번 다시 젓가락이 안 가면 다음부터 그 음식은 식탁에 오르지 않습니다. 金正日 곁에서 그가 무엇을 몇 번 먹었는지 기록하는 사람이 별도로 있어
이런 것을 일일이 체크합니다. 金正日은 내가 만든 일본식 생선조림 요리를 대단히 즐겼는데, 이 요리는 국물까지 남김없이 먹을 정도로 좋아했어요』
―金正日은 술을 많이 먹는 편입니까. 『시간을 길게 두고 마시는 편입니다. 장군은 코냑을 즐겼는데
자기는 작은 잔에 술을 따라 찔끔찔끔 마시면서 측근 부하들에게는 큰 잔에 가득 따라 주고 「원샷」을 강요합니다. 연회 때마다 이렇게 원샷을 하다
보면 나중엔 코냑 냄새만 맡아도 어질어질할 정도가 됩니다』 후지모토氏의 책에는 金正日이 자신이 총애하던 金昌善(당 중앙위
조직지도부 부부장)이란 심복을 내쳐버리고 한동안 부르지 않다가 나중에 그를 불렀을 때 金昌善의 부인이 눈물을 흘렸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보면
金正日과 그를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북한 핵심 지도부는 일종의 馬賊(마적) 집단, 혹은 야쿠자 집단의 두목과 부하 관계와 흡사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여기에 대해 질문하자 이렇게 답했다. 『북한 최고위층들은 멀쩡한 직책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안심하지
못합니다. 아래에서 상관을 넘어뜨리고 올라오려는 아첨꾼이 너무 많기 때문이죠. 부하들이 金正日에게 상관을 거세하기 위해 거짓 보고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김용순도 이런 모함에 걸려 한동안 보이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핵심 측근을 고자질하는 보고가 들어오면 金正日은 몇 달 동안 조사를 시켜
이상이 없으면 믿습니다. 金正日은 누가 자신에게 아부하고 있는지도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아랫사람들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술적 감수성 풍부, 자주 눈물 흘려 ―金正日이 예술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다는 말도 있던데요. 『제가 金正日과 함께 공연을 자주 봤는데 金正日은 감정이 풍부해서 자신의 수준에 만족하면 박수도
잘 쳐 주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손에 들고 있는 펜으로 탁자를 탁탁 두들기면서 나가라고 합니다. 퇴장시키는 이유를 물으면 「화음이 맞질 않아」
혹은 「노래에 감정이 들어가질 않았어」라고 평을 합니다. 장군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한국 가수 김연자씨처럼 온몸을 동원해 격정적인 감정을 호소하는
스타일을 좋아했어요(기자 注-김연자씨는 2001년 4월 하순 북한을 방문해 공연을 했고, 평양공연 장면은 북한 중앙TV로 방영됐다)』
후지모토氏는 또 『金正日은 미각도 끝내 주는 인간으로서 요리사인 내가 金正日을 능가하는 美食家를 만나 보지 못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가 한편으론 통이 큰 인물이지만 실상은 겁이 많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던데 후지모토氏는 어떻게 보십니까.
『겁이 많은 건 사실입니다. 또 金正日은 눈물이 흔한 사나입니다. 감성이 풍부해서 그런지 이야기를 하면서도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해요. 이럴 때면 옆에 있는 부하들이 아부를 하려는 마음에서 서로 손수건을 꺼내 그의 눈물을 닦아 주려고 경쟁을 합니다』
이런 증언을 들으면서 기자는 자칭 시인 겸 가수였고 예술적 감성도 풍부해 자주 눈물도 흘렸던 인물, 예술적 감성으로 제국을 통치하다가 로마를
벼랑으로 내몰았던 폭군 네로와 닮은 꼴이란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로마의 네로 황제를 예로 들어 보면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은 정치를 못한다고 하는데, 金正日은 북한의 지도자로서 예술적 감수성으로 정치를 하다가 우왕좌왕하면서 인민들을 굶겨 죽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1983년경 金正日이 북한을 개방해야겠다면서 합영법을 만들어 재일교포 기업인들을 끌어들였다가 실패한 적도 있거든요.
『그 시절 북한이 개방을 위해 일본 기업인을 부른 것이 아니라 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재일교포들이 세운 기업이
망할 것은 눈에 보이는 일이었어요』 ―후지모토氏는 2000년 여름에 鄭周永 회장이 가져온 한국 막걸리를 金正日과 함께
마셨다는 증언을 하셨습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데 어느 날 金正日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어요. 「후지모토, 뭐하고
있는가. 빨리 와라」 그래서 허겁지겁 자전거를 타고 장군이 계신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랬더니 남한에서 가져온 막걸리를 함께 마시자는
것이었습니다』 ―金正日은 최고급 술인 헤네시 XO 코냑 등을 즐긴 것으로 아는데, 이런 미식가가 한국의 서민층들이 마시는
막걸리에 대해 어떤 평을 하던가요. 『좋은 선물을 잔뜩 가져온 분이 준 막걸리인데, 그 술이 맛이 없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북한에도 막걸리가 있었는데, 鄭周永 회장이 가져온 막걸리는 북한 것과는 맛이 좀 달랐어요』 ―후지모토氏는 북한에
있을 때도 늘 감시를 당했고, 요리 재료를 사러 일본에 가서도 조총련들에게 감시당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고도 또다시 1998년 6월9일
북한에 들어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본에 입국하는 과정에서 체포됐을 때 경시청에 「북한에 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거짓이었어요. 저는 정말로 북한에 다시 가고 싶었다는 것이 본심이었습니다』 북한 고위층, 간첩 혐의로 여러 명 희생돼 ―북한에서의 호화로운
생활도 생활이지만 후지모토氏의 요리 실력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서 북한으로 간 것은 아닙니까. 『맞습니다.
요리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나이 대장부는 자기가 하는 일이 진정으로 가치가 있다는 사실, 자신의 진짜 실력을 인정해 주는 사람과 일한다는 것이
최고의 행복일 수 있죠』 ―후지모토氏는 책에서 金正日의 금고지기라 불리던 崔奉滿(前 당 중앙위 39호실 실장), 중앙당
조사부장이었던 權熙京, 조선노동당 당 제1부부장 文成述 등이 스파이 혐의, 이중장부 작성 용의 등으로 체포당한 사실을 증언했습니다.
『文成述에 대한 이야기는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라 1998년 6월에 다시 북한에 입국한 후 북한 고위 관리들에게서 들은 겁니다.
崔奉滿은 金正日 자금의 경리장부에 문제가 생겨 체포조가 자택을 급습하자 자살하려고 4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는데 다리만 부러져 붙잡혔어요』
―북한 최고 권력자의 측근들 중에 스파이 혐의로 체포된 사람은 없었습니까. 『權熙京이 스파이 혐의로
체포됐습니다. 체포된 후 한국 안기부와 접촉한 물증이 많이 나왔다고 하더군요. 金正日은 어떤 인물이 눈 밖에 나면 연회나 파티에 부르지 않는데,
權熙京도 1990년대 초반에 3년 정도 떨어져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내가 金日成 장례식에서 權熙京과 만났는데, 그가 쓸쓸한 표정으로 혼자 서
있더군요. 이 사람은 간첩 혐의로 체포된 후 사형을 당했는지 옥중 자살을 했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죽었습니다』
후지모토氏는 기억의 저편에서 崔龍海의 이름을 건져 올렸다. 『崔龍海(사회주의 노동청년동맹 제1서기)도 한국 안기부와 관련된
간첩활동을 하다 체포됐어요. 나중에 집안의 쌀자루에서 10만~15만 달러와 무슨 용도인지는 모르지만 로봇도 발견됐습니다. 崔龍海의 아버지는 영웅
중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사람이었는데, 그런 영웅의 아들이 한국 간첩이었다는 사실에 평양 시민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崔龍海는 자기가 한국의 안기부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자백했습니까. 『했을 겁니다. 그의 부인이 무용수 출신으로 얼굴이
아주 예뻤는데, 가족 전원이 섬으로 유배됐다고 합니다』 ―서관히 북한 노동당 농업담당 비서가 1997년 9월 평양시내에서
수만 명의 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리에 총살됐는데, 그 무렵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위원이었던 이봉원 대장, 金日成사회주의 청년동맹 간부 7명이
한국 정보당국에 매수돼 반역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함께 처형됐다고 합니다. 『그 무렵은 내가 일본에 있던 시절(후지모토氏는
입국관리법 위반 문제로 1996년 9월부터 1998년 6월까지 일본에 거주)이었기 때문에 총살 장면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1998년 6월에 다시
북한에 들어가서 들어 보니 내가 일본에 있던 무렵에 많은 사람이 총살을 당한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노는 척하며 새벽 3~4시까지 집무
후지모토氏의 증언에 의하면 金正日은 대단한 美食家로서 상어지느러미 요리 등 최고급 요리와 고급 술을 탐닉하고 낚시, 乘馬, 제트스키
타기 등 雜技를 즐기는가 하면 파티와 娛樂을 자주 했다. 盧武鉉 대통령처럼 열정적으로 國事를 챙기다 보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에 金正日은
즐길 것 다 즐기면서 경제나 국방, 외교 등을 돌볼 시간이 있었을까. 그러나 후지모토氏의 증언은 뜻밖이었다. 金正日은 초대소 등지에 가서 휴식을
취하면서도 팩시밀리로 보내진 서류를 밤늦도록 꼼꼼히 챙기고 전화로 지시하는 등 한시도 國事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증언을 직접
들어 보자. 『장군이 부하 참모들과 초대소에 가서 휴식을 취할 때도 엄청난 분량의 서류가 팩시밀리로 날아왔습니다. 장군은
참모들이 술에 곯아떨어지면 그때부터 새벽까지 집무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영화를 보라고 하고는 슬쩍 빠져나와 팩스로 날아온 서류를 하나씩
확인하고 검토하는 등 새벽 3~4시까지 일을 했어요. 얼마 전부터는 컴퓨터를 익혀서 늘 컴퓨터를 통해 보고를 받고 지시를 하는 등 노는
척하면서도 할 일은 반드시 했습니다』 후지모토氏는 인터뷰 도중 『金正日은 정말로 간단치 않은 사람』이라는 말을 여러 차례
되풀이했다. ―金正日은 심장이 좋지 않아 약을 먹는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입니까. 또 건강을 위해 음식을 가려 먹는
편인가요. 『장군은 의사가 하는 말은 철저히 따르는 스타일입니다. 그는 다랑어 뱃살로 만든 초밥을 즐겨 먹었는데 한번은
의사가 다랑어, 참치, 고등어는 지방 성분이 많으니까 드시지 말라고 처방을 하자 입에도 대지 않더군요. 어느 날 참다 못한 장군이 「죽을 때
죽더라도 먹고 죽자」 이러면서 다랑어 초밥을 다시 먹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에는 화제를 金正日의 비자금 쪽으로 돌려 보았다.
서방 정보기관에 의하면 金正日은 스위스 은행에 약 40억 달러를 비밀 예치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후지모토氏는 著書에서 자신의 일본 여권을
갱신할 때면 스위스로 보냈는데, 이것은 스위스 은행에 예치한 비자금 때문에 스위스 정부가 북한 정부와 협조관계가 잘 이루어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에 대해 후지모토氏는 이렇게 답했다. 박용무가 스위스 은행에 金正日 비자금 예치 책임자 『비자금 규모가 얼마인지
금액은 잘 모르겠지만 金正日의 비자금을 스위스 은행에 예치해 두고 있다는 말은 북한에 있을 때 장군의 측근에게 여러 차례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金正日의 측근 비서인 박용무란 사람에게서 직접 들었어요. 이
사람은 술을 대단히 좋아해서 나와 술을 마시면서 자기가 스위스 은행에 비자금 예치 업무를 담당하는 책임자라고 하더군요. 이 사람은 도미니카
패스포트로 외국을 자주 다녀왔는데, 한번은 외국의 호텔 미니 바에 있는 술을 몽땅 꺼내 먹고는 낭패를 당했습니다. 엄청난 술값이 적힌 청구서가
金正日에게 들통 났기 때문이죠』 ―북한에 계실 때 金正日이 후지모도씨를 일본으로 돌려보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공포를 못 느꼈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러나 장군이 자신의 입맛을 위해 요리 재료를 구입해 오라고
요구하는 일이 잦기 때문에 참고 있으면 언젠가는 일본으로 갈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1998년 11월 요리 재료를
구입하기 위해 중국 北京에 나왔다가 일본 경시청 간부에게 전화한 것이 도청되어 1년이 넘도록 가택연금을 당하셨는데요.
『그때 北京의 호텔에서 전화를 하기 전에 방 안에 도청장치가 설치되어 있을까 염려되어 침대 밑, 천장, 탁자 아래 등을 샅샅이 뒤졌습니다만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심하고 전화를 걸었던 것이죠. 설마 전화기 수화기 안에 도청장치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중에 내가 통화한 내용을 도청한 녹음테이프를 들어 보니 내용이 너무 생생하더군요. 그래서 물어 보니 수화기 안에 도청장치를
넣었다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저들이 깔아 놓은 멍석 위에서 내가 놀아난 것인지도 모르죠』 ―마카오에도 요리 재료를 사러
자주 갔던 것으로 아는데,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후지모토氏는 마카오와 관련해 흥미로운 추억을
소개했다. 『한번은 金正日이 나를 부르더니 「후지모토, 도박을 잘하는가?」 하고 묻기에 「그렇습니다」 하고 답했더니
「그러면 집사람하고 마카오에 가서 도박을 하고 와」 이러는 겁니다. 출발하는 날 金正日이 직접 비행기 표를 주는데 받고 보니 편도였습니다. 표를
받아들고 의아해하자 「돌아오는 비행기 표는 도박을 해서 딴 돈으로 타고 와」 이러는 겁니다. 결국 돌아오는 비행기 표는 북한 대사관에서 구해
주었습니다. 그때 비행기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이 상당히 많았는데, 대사관 직원들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더니 자리를 만들어 주더군요』
『기쁨조는 몸을 주지
않는다』 ―마카오에 있는 북한의 조광무역상사는 일종의 스파이 회사로 알려졌는데, 이 회사에 대해서 들은
것이 있습니까. 『조광무역이 마카오에서 스파이 짓 이외에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북한을 탈출하여
일본에서 체류하면서 金正日에 대해서 나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때 그를 변호해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까. 『우선
기쁨조에 대해 변호를 하고 싶습니다. 북한의 어떤 탈북자가 기쁨조에 대해 언급한 인터뷰 기사를 봤는데, 그 기사를 보면 기쁨조가 북한의 고위
간부들에게 몸을 바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체험한 바로는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북한 고위 간부가 매춘을 한 사실이
밝혀지면 金正日이 그 간부를 1~2년 정도 정신교육을 위해 어디론가 보내 버렸을 겁니다. 기쁨조에 대해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토론하기 위해 서울까지 갈 용의가 있습니다』 ―일본으로 탈출한 후 북한에 두고 온 부인 嚴正女씨에 대한 소식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이 질문에 후지모토氏는 『私的인 질문이라 대답하기 어렵다』고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후지모토氏는 2001년 4월24일 金正日로부터 『일본에서 성게덮밥 요리 재료를 사 오라』는 명령을 받고 일본으로 탈출했습니다. 그때 심정이
어땠습니까. 『내가 탈출하기 얼마 전에 金正日은 일본 텔레비전을 보면서 「후지모토, 너는 일본에 못 가겠구나」 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를 일본에 보낼 마음이 없으니 귀국을 포기하라」, 혹은 「너는 여기에 발이 묶였다」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일본에 갈 기회가 생긴 겁니다』 후지모토氏는 『결과론이지만 2001년 4월24일에 일본으로 귀국한 것은
라스트 찬스고, 베스트 찬스』였다고 말했다. 『내가 북한을 탈출한 지 두 달 후에 金正日의 아들 金正男이 도미니카
패스포트를 가지고 일본에 입국하려다가 체포됐습니다(기자 注-金正男이 일본에 밀입국하려다 체포된 것은 2001년 5월1일인데 후지모토氏가 날짜를
착각한 것 같다). 저녁식사를 하다가 NHK를 통해 金正男이 체포되는 장면을 보면서 내가 4월에 탈출한 것이 정말 행운이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이듬해 9월에는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평양에서 金正日과 頂上회담을 할 때 金正日이 일본 납치자 문제를 시인했습니다. 제가
만약 북한에 계속 있었다면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희박해졌을 겁니다』 이데올로기 없는 관점
―후지모토氏의 책 내용 중에 1987년에 金賢姬가 대한항공 비행기를 폭파시켰을 때 金正日의 부인 高英姬가 『이런 일만 벌어지면 늘 우리가
그랬다고 난리들이에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결과적으로 대한항공기 폭파는 金正日의 지령에 의해 북한이 저지른 사건이란 것이 밝혀졌고, 그
명백한 증거가 한국에 살고 있는 폭파범 金賢姬입니다. 이런 사례를 보면 후지모토氏가 북한 지도부 사람들에게 들었던 진실과 지금 일본에 와서
체험하는 진실과는 상당 부분이 다르지 않습니까. 『북한에서 살 때는 몰랐습니다만, 일본에 나와 북한에 대한 여러 가지
보도를 접하면서 생각해 보니 북한은 뭐든지 숨기고, 거짓과 비밀이 너무 많은 사회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말로 적절하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정상적인 국가는 아닌 것 같아요. 저는 북한이 하루 빨리 국제무대로 나와서 정상적인 국가로 활동하기를
바랍니다』 그는 또 『金正日에 대한 책을 출판함으로써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아마 이 책을 내지 않았다면 계속 꿈을 꾸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요리사로서 다시 요리를 하고 싶다고도 했다. 그러나 자신이 金正日의 치부를 드러내는 책을
발간했기 때문에 다시는 요리사로 활동하기는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자신이 요리사로 일하는 사실이 밝혀지면 북한이나 조총련이 보낸 스파이들이
어떤 보복을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후지모토氏에게 『마음 놓고 요리할 수 있는 기회가 오려면 金正日이 빨리 사라져야 할 것 같다』고
하자 크게 웃더니 『그전에 내가 먼저 죽을지 누가 압니까』 하고 말했다. 月刊朝鮮은 후지모토氏의 「金正日의 요리인」을 9월
초 한국에 번역 출간할 예정인데, 마지막으로 이 책이 한국에서 발간될 경우 한국의 독자들에게 著者로서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면 말해 달라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제가 일본에서 이 책을 발간한 후 한 언론과 인터뷰할 때 「북한에서 체류하는 동안 일본인 납치문제에
대해 듣거나 본 일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그런 말을 들어본 적도 없고 전혀 몰랐어요. 오히려 제가 일본으로 탈출한
후 일본 경시청 사람들이 납치자 문제를 집요하게 물어봐서 북한이 일본인을 납치해 갔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책에는 단 하나의 허위도
없습니다. (이데올로기에 의한) 색칠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북한에서 체험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적은 것입니다. 한국 국민 여러분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이 책을 읽어 주기 바랍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매스컴에 의해 윤색된 金正日이 아니라 북한 지도자 金正日 본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