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民族史 千年의 반성 - 朝鮮朱子學의 말로

이강기 2015. 9. 26. 16:04
民族史 千年의 반성 - 朝鮮朱子學의 말로
 
儒敎의 강점을 산업화와 접목시킬 수 있다면…
 


朴忠錫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韓日의 주자학 수용 양식 차이
 한국의 근·현대사를 돌이켜 보면, 한국은 1875년 일본군함 雲揚號(운양호) 사건 이래 당시의 개화지식인들에 의한 文明開化(문명개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청일 전쟁, 러일 전쟁을 거쳐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1960년대 이래의 산업화로 인한 경제발전, 1980년대 이래의 민주화로 인한 정치발전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정치·경제적으로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세계체제 속에 편입해 가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도정은 거시적으로는 동양의 전통적인 儒敎文明(유교문명)으로부터 서구의 近代文明(근대문명)에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중엽 이후의 한·일 근대사의 도정은 매우 대조적이다. 일본이 서구의 충격에 適時的(적시적)으로 대응하여 서구열강의 대열에 편입하였지만, 한국은 조선주자학의 中華(중화)주의적인 세계인식을 바탕으로 서양을 禽獸(금수)라 하여 攘夷(양이)론을 고수함으로써 구미열강과 이를 추종하는 일본의 권력정치에 눈뜨지 못하여 失機(실기)하는 불운을 맞게 된다.
 
  물론, 한·일 근대사의 이와 같은 樣相(양상)의 차이에는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여러 가지의 변수를 상정할 수가 있다. 그러나 朝鮮朱子學이 지배이데올로기로서 朝鮮 5백년의 역사를 주도해 온 것을 생각해 보면, 한·일 양국에 있어서의 주자학 수용 양식의 차이가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근대 일본의 개국론자인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1811∼1864)은 『淸朝(청조)의 학문은 紙上(지상)의 空談(공담)이 많아 實用(실용) 면에서는 부족함이 막대하다』, 『이와 같이 실용면이 부족한 것을 추론하여 보면, 근자에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대패하여 전세계의 웃음거리가 된 것도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그에게 있어서는 朱子學이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논의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구열강을 힘(Power)으로 인식하고 있다. 위정척사론을 이념적으로 주도한 李恒老(이항로·1792∼1868)는 상소문을 통해 도덕적으로 타락을 초래하는 기묘하고 음탕한 서양의 문물을 임금이 솔선수범해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이 克己正心(극기정심)의 계기가 되어서 攘夷가 달성될 것이라는, 주자학의 도덕적 가치이념을 그것 자체로서 받아들이기를 주장하고 있다. 이와 같은 대조적 차이는 대외인식에 있어서 일본의 경우가 역사적으로 華夷(화이)의 사상적 기반이 미약했던 데 반해서 한국의 경우에는 역사적으로 宋時烈(송시열) 이래 주자학자들의 세계 인식에 있어서 華夷관념이 점차 심화되어 李恒老의 단계에 이르러서는 그것을 理氣(이기) 철학의 차원에서 기초 지우고 있을 정도로 확고부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당시의 급변하는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온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것이 아니었다.
 
 
  유교+자본주의=한국식 경제 발전
 
 
  주자학은 12세기 宋(송)대에 구축된 학문·사상으로서, 理氣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古代儒敎(고대유교)를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것이다. 이러한 주자학이 한국에 전래된 것은 고려 말기로, 주자학 이론에 대한 儒者(유자)들의 개념적 이해를 거쳐 李滉(이황), 李珥(이이)의 단계에 이르러서 철학적 원리의 차원에서 주자학에 대한 체계적 인식이 구축되면서, 이른바 朝鮮朱子學이라는 것이 형성되고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른바 사상이라는 것은 그 사상이 개척한 영역이라는 것이 있다. 조선주자학은 유교의 철저한 도덕적 규범주의의 심화, 사상에 있어서 正統(정통)과 異端(이단)의 엄격한 구분, 禮(예)문화의 숭상, 中華주의적인 세계인식의 固定化 등 朝鮮朱子學의 독자적 영역을 개척해 갔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이래의 전통을 보면, 현실세계의 문제를 항상 유교적인 도덕규범의 차원에서 해결하려고 하였고, 또 그 해결의 근원을 인간의 心性(심성)에 추구하는 사고방식, 정통-이단관념이 낳은 교조주의, 家族共同體(가족공동체)주의적인 禮문화, 중국-조선=中華를 바탕으로 하는 華夷的(화이적) 세계 인식이 하나의 구조를 이루어 조선시대의 역사의 방향을 고정화시켜갔다.
 
  이와 같은 사고와 문화의 틀 속에서는 근대 이래 현실 세계를 주도해온 법, 권력주의, 사회적 기술, 과학의 영역 등을 개척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19세기 중엽 이래 이러한 주자학적 세계관은 한국사에 있어서 체제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이 점차 상실되어 사상체계로서, 주자학이 해체되는 도정을 걷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현대 사회에 있어서도 斷片化(단편화)된 관념·문화로서 생동하고 있어, 한편으로 한국의 경제 발전에 동력이 되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 한국의 정치·사회 발전의 저해적 요소가 되고 있다. 1960∼70년대에 걸쳐서 한국 자본주의 형성이 유교의 전통적인 가족 공동체주의 문화와 자본주의 경제정책의 훌륭한 합작이라고 한다면, 1945년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정치 발전은 가부장제적인 정치문화의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다.
 
  전통 문화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을 통하여 유교의 美德(미덕)을 우리 산업사회의 민주화 프로그램에 접목시키는 데 성공할 때 우리 한국 사회의 미래는 더욱 건강하고 더욱 활력적인 사회를 지향할 수 있게 되리라 생각한다.●
 
(월간조선 1999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