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民族史 千年의 반성 - 趙光祖의 꿈

이강기 2015. 9. 26. 15:59
民族史 千年의 반성 - 趙光祖의 꿈
 
실행방법은 과격했고 때와 역량의 헤아림도 부족했다
 

韓姬淑 숙명여자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道學이란 이름으로 시작한 개혁
 燕山君(연산군) 재위 기간은 조선왕조가 표방한 유교정치의 이상이 사라지고 유교 지식인의 생존이 위협을 받는 암흑의 시대였다. 戊午士禍(무오사화)와 甲子士禍(갑자사화)로 견제세력이 없어진 연산군은 더욱 방종해졌고 이에 빌붙은 勳臣(훈신)세력들도 더욱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勳舊界(훈구계)에 의해 연산군이 축출되고, 成宗(성종)의 2子인 晉城大君(진성대군)이 中宗(중종)으로 옹립되었다(1506년).
 
  왕위에 오른 中宗은 연산군代의 弊政(폐정)을 개혁하기 위해 연산군代에 시행되었던 모든 정책을 혁신하고자 노력하였다. 먼저 성균관을 수리하고 다시 경연을 개설하고 억울하게 화를 당한 사람들을 풀어주었다.
 
  중종은 전대에 문란해진 儒敎(유교)정치를 바로 잡고 儒學(유학)의 진흥을 꾀하여 유교정치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되자 道學(도학)정치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났다. 자연스럽게 사림들이 재등장하게 되었고 특히 金宏弼(김굉필)의 제자인 趙光祖(조광조)가 등용되어 그를 중심으로 하는 젊은 사림들은 훈신들의 비리를 계속 비판하면서 유교적인 도덕정치 실현에 힘썼다.
 
  趙光祖는 누구보다 백성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가 내세운 爲民(위민) 愛民(애민)은 道學정치의 근본이념이기도 하였다. 道學정치란 道學을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와 堯舜(요순)시대를 지향하는 정치형태로 모든 군주가 요순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를 이룩하자는 것이었다. 또한 至治(지치)가 이루어지는 사회 그것이 趙光祖가 갈망하던 이상사회였다.
 
  당시는 훈구파의 대토지 소유, 부역의 증가, 軍役(군역)의 과중 등 세금의 증가로 백성들의 고충이 심해지고 있었다. 훈구파들의 권력 독점에 따른 부작용이 심화될수록 趙光祖의 목소리도 커져만 갔다.
 
  道學이라는 이름으로 趙光祖는 중종에게 修身(수신)정치를 강조하였고 임금이 자신의 마음을 밝힘으로써 君子(군자)와 小人(소인)을 분별해 줄 것을 주장하였다. 또 유교 윤리에 위배되는 도교 민간신앙을 배격하여 國初부터 있어 왔던 昭格暑(소격서)를 폐지했다.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하는 실천의 하나로 향촌에 鄕約(향약)을 보급하고 士林들을 등용하기 위해 賢良科(현량과)를 실시하였다.
 
  趙光祖의 개혁정치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僞勳削除(위훈삭제)였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고도 급진적인 개혁으로 호랑이의 코털을 뽑고자 하는 격이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둘러싼 개혁세력과 反正功臣(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勳臣들과의 마찰은 불가피하였다.
 
 
  때와 힘을 헤아리지 않은 실패한 개혁
 
 
  趙光祖는 1519년(中宗14) 11월에 궁문밖에 엎드려 中宗 反正功臣 가운데 공을 지나치게 인정받은 76명의 관작을 빼앗기를 요청했다. 사실 中宗이 反正할 당시 그다지 큰 공이 없었음에도 공신 칭호를 받았고 이들 공신은 反正 후 정권의 핵심이요, 원로대신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소인배로 몰아세운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끈질긴 요구 결과 총 76명을 훈적에서 삭제하기에 이르렀다.
 
  趙光祖의 이런 행동은 중종으로 하여금 道學정치에 대한 염증을 느끼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道學정치를 표방한 그의 과도한 개혁 주장은 王으로 하여금 위기의식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이러한 기미를 눈치챈 훈구파는 中宗을 움직여 趙光祖를 비롯한 士林(사림)세력을 제거하였다. 中宗은 趙光祖, 金淨(김정) 등 네 사람에게 死藥을 내리고 나머지는 귀양을 보내게 하였지만 鄭光弼(정광필) 등의 간청으로 趙光祖는 능주로 귀양을 갔다.
 
  趙光祖가 귀양가 있는 한달 동안에도 사림에 대한 공격은 끊이지 않았다. 마침내 王은 趙光祖를 賜死(사사)하라는 전교를 내렸고, 애끓는 絶命詩(절명시)를 남기고 죽은 趙光祖는 그때 나이 38세.
 
  道學정치를 외치며 理想(이상)사회 건설에 노력했던 趙光祖의 꿈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후일 退溪(퇴계)는 조광조의 개혁정치에 대해 『君民이 요순시대의 군민과 같고 또 비록 군자의 덕이 있다 하더라도 때와 힘을 헤아리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己卯(기묘)의 실패는 여기에 있다』며 안타까워하였다.
 
  趙光祖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지만 도학정치는 많은 것을 남기고 갔다. 우선 학풍이 일변되어 문장보다는 經學(경학)을 중시하는 풍토가 조성되었고, 이후 退溪나 栗谷과 같은 큰 儒學者도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새롭게 들어서는 士林세력 역시 儒學으로 무장하고 토지를 기반으로 성장하는 지주로서의 성격을 지닌 양반지배층이었다.
 
  개혁가는 시대적인 요구를 잘 읽어야 한다. 시대를 너무 앞서도 안되고 너무 뒤쳐져서도 안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혁을 뒷받침해줄 세력을 키우고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조금은 느려 보일지 모르지만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점진적인 개혁도 필요하지 않을까.●
 
월간조선 1999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