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民族史 千年의 반성 - 壬辰倭亂

이강기 2015. 9. 26. 16:01
民族史 千年의 반성 - 壬辰倭亂
 
中·日 양국을 견제할 국가적 역량부족이 불러온 비극
 


韓明基 서울대학교 규장각 특별 연구원
日本軍에게 국토유린, 明軍에게 自主權 유린당한 뼈아픈 교훈
 1592년에 시작된 壬辰倭亂(임진왜란)은 朝鮮과 日本 사이의 전쟁은 아니었다. 明軍(명군)의 참전을 계기로 동북아 차원의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을 벌였으면서도 오늘날 韓中日(한·중·일) 3국이 이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은 현저히 다르다. 그것은 우선 이 전쟁을 부르는 명칭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일본의 침략으로 빚어진 이 전쟁을 壬辰倭亂, 丁酉再亂(정유재란)으로 부르지만 일본에서는 「문록·경장의 역(文祿·慶長の役)」이라 부른다(문록은 1592~1595년, 경장은1596~1614년까지 일본의 연호-注). 「役(역)」이라는 말이 「정벌」의 의미를 강하게 담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일본인들은 그것을 「침략」이라고 반성하는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에 대한 「손 봐주기」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중국은 이 전쟁을 「抗倭援朝(항왜원조)전쟁」, 혹은 「東援之役(동원지역)」으로 부른다. 중국인들은 「援朝(원조)」와 「東援(동원)」, 즉 「朝鮮을 도왔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관점은, 전쟁이 끝난 뒤 조선에 대해 「자신들의 은혜」에 보답하라고 요구하는 수순으로 이어진다. 1950년 毛澤東(마오쩌뚱)이 참전했던 한국전쟁을 「抗美援朝(항미원조)전쟁」으로 부르는 것을 보면 「항왜원조」와 「항미원조」 라는 명칭 속에 담긴 중국인들의 역사의식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한반도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개입 의지」 그 자체를 보여준다.
 
  明의 참전은 「朝鮮을 돕는다」는 구호 아래 이루어졌지만 속마음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국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참전했던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공공연히 「假道入明(가도입명:朝鮮 길을 빌려 明을 친다-注)」을 표방했거니와 일본의 궁극적인 공격 목표가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국의 참전을 朝鮮의 간곡한 「구원 요청」을 받아들이는 목적에서 단행한 것으로 꾸미려 했다.
 
  1593년 1월 평양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明은 자신들의 참전 목표(어떻게 해서든 일본군을 한반도 내에 묶어두어 그들이 본토로 진입하는 것을 막는 것)가 달성되자 더 이상 외국(朝鮮)을 위해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퍼져갔다.
 
  明軍 지휘관들은 오히려 일본군에게 적의를 품고 그들과 결전을 벌이려 했던 朝鮮軍을 강화협상의 「걸림돌」로 여겨 견제했다. 朝鮮軍 지휘관 權慄(권율)은 明軍 지휘부에 끌려가 곤장을 맞을 뻔했다. 그가 明軍의 허락 없이 일본군을 공격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朝鮮은, 日本軍에게는 국토를 유린당하고 明軍에게는 自主權을 유린당했던 것이다.
 
  강화협상은 결국 결말을 맺지 못하고 지루하게 진행되었다. 조선 민중은, 남해안 일대에 장기간 주둔하면서 조선인 포로 사냥과 문화재 약탈에 광분했던 일본군과, 싸우려는 의지 없이 군량만 축내고 극심한 민폐를 끼쳤던 明軍 사이에서 참혹한 생존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과정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반성해야 하고, 또 어떤 점을 오늘날의 역사적 교훈으로 삼아야 할까.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책임을 역사적으로 추궁하는 것이 우선이지만 우리 스스로도 반성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 조선은 우선 일본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 世宗(세종)代에 申叔舟(신숙주)가 일본을 다녀온 이래 1백50여년 동안 일본에 使臣(사신)을 한 번도 보내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일본에서는 정권이 교체되고, 戰國時代(전국시대)가 시작되는 등 격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본의 내부 변화와 지향을 탐지하는 데 소홀했던 것이야말로 왜란을 불러온 중요한 원인이었다.
 
  일본은 달랐다. 그들에게는 對馬島(대마도)가 있었다.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던 대마도인들은 조선을 무시로 드나들면서 조선말을 배우고, 조선의 내부 정보를 빼내는 데 광분했다. 왜란 당시 그들은 통역으로, 혹은 嚮導(향도)로서 고스란히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었다.
 
  오늘날 한반도의 지정학적 조건은 임진왜란 당시의 그것과 달라진 것이 없다.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마주치는 전략적 요충이다. 해양세력의 입장에서 한반도는 자신들을 노리는 대륙세력의 「칼끝」으로, 대륙세력의 입장에서는 해양세력이 대륙으로 쳐들어 오는 「다리」로 인식되어 왔다. 이같은 측면에서 임진왜란을 통해 韓中日 삼국이 맞닥뜨렸던 경험은 오늘의 우리에게 여전히 시사를 준다.
 
  통일이라는 미완의 과제를 놓고 南北이 여전히 헤매고 있는 사이에 中國은 개혁개방, 홍콩 반환 등을 통해 성장하면서 동북아의 패권을 추구하는 국가로 거듭 나고 있다. 日本은 막강한 경제력과 미국의 은근한 방임을 배경으로 군사대국으로 등장하여 우리를 불안케 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양국의 각축 사이에서 어느 쪽에도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굳건히 지킬 수 있으며 나아가 중국과 일본을 조정할 수 있을 만큼의 민족적 역량을 갖출 수 있을까.●
 
월간조선 1999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