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년 음력 1월25일,
남한산성에서 나온 仁祖(인조)는 송파진의 三田渡(삼전도)에 마련된 降伏式場(항복식장)으로 나아갔다. 그는 푸른 빛의 藍衣(남의)를 입고 청나라
太宗(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올렸다. 그것은 이른바 三拜九叩頭(삼배구고두)였다. 세 번 큰 절을 올리고, 매번 절을 할 적마다 세 번씩
머리를 조아리는 오랑캐식 항복法이었다. 청 태종 紅泰豕(홍태시)는 단상에서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반면 朝鮮의 역사책에서는
이 날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라고 적었다. 1636년 12월 淸軍(청군)의 침략으로 시작된 丙子胡亂(병자호란)이 조선의 항복으로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1627년, 朝鮮은 이미 後金(후금·淸의 전신)軍으로부터 침략을 받은 적이 있었다. 丁卯胡亂(정묘호란)이
그것이었다. 朝鮮은 정묘호란을 끝내는 대가로 後金과 형제관계를 맺었고, 해마다 곡물과 면포 등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1630년대로 접어들면서 後金의 힘은 더욱 커졌다. 그들은 明을 계속 압박하는 한편 明의 배후에 있는 朝鮮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1636년엔 국호를 淸으로 바꾸고, 황제를 칭하면서 朝鮮에 대해 臣服(신복)할 것을 요구했다. 朝鮮 조정에서는 『오랑캐와
화친하는 것은 대의에 어긋나는 것이니 죽음도 불사해야 한다』는 척화파와 『일단 종묘사직을 보전한 뒤에 설욕을 도모해야 한다』는 주화파의 논쟁이
치열해져 갔다. 이 와중에 1636년 12월10일 淸軍은 전격적으로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 내륙 깊숙이 진입했다. 침략
소식이 조정에 알려진 것은 13일이었다. 위기상황에서 보고 체계도 엉망이었다. 淸軍은 14일에는 개성을 지나 서울로 향해 치달렸다. 엄청난
속도였다. 원래 「鐵騎(철기)」로 불릴 정도로 기동력에서 발군이었던 淸軍 앞에서 朝鮮軍은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首都를 내주고 말았다. 결국
왕실 가족들은 강화도로 인조 자신은 천신만고 끝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山城(산성)에는 1만4천여 명의 잔약한
병력에, 군량은 채 50일을 버틸 분량도 되지 않았다. 인조와 조정은 三南(삼남)으로부터의 近王兵(근왕병)이 오는 것을 고대했지만 淸軍은 이미
판교를 차단하여 三南으로의 연결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斥和派와 主和派의 論戰(논전)은 남한산성에서도 의연히 계속되었다.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사기가 떨어진 병사들 사이에서는 斥和派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고 급기야 농성은 한계 상황으로 치달았다. 1637년
1월15일, 淸軍은 자신들이 끌고온 서양식 紅夷砲(홍이포)를 발사했고, 포탄은 성 안으로까지 날아왔다. 책임
방기한 公人들의 斷罪도 없어 조선 조정이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한 것을 간파한 淸軍은 항복을 종용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항복을 받아주는 조건은 가혹해져 갔다. 1월17일 淸軍은 강화도를 함락시켰고, 이어 척화파 세 사람을 묶어 보내야 항복을 받아 줄 수
있다고 했다. 극한 상황으로 치달으면서 臣僚(신료)들 사이에서는 생존 본능과 이기심이 터져나왔다. 『斥和臣을 묶어 보내느니 결사항전하자』는
주장의 일각에선 『좀 더 많는 수의 斥和臣을 묶어 보내 적의 마음을 풀어 주어야 한다』는 주장까지 대두되었다. 1월22일,
강화도 함락 소식에 낙담한 仁祖는 항복을 결심했고 25일 결국 성을 나섰던 것이다. 조선은 항복했으며 「오랑캐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정신적
자괴감이 무거운 충격으로 퍼져 나갔다. 朝鮮은 과연 이 전쟁을 피할 수 없었을까? 어떻게 해서든 朝鮮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後金의 집요함과 『오랑캐와 화친할 수 없다』는 당시 조선 지식층의 사상적 대세를 고려하면 전쟁 자체를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斥和派나 主和派를 막론하고 위기 상황에서 朝鮮의 지배층이 보인 태도는 많은 것을 되돌아보게 한다.
우선 당시 지배층의 국가경영 능력에 문제점이 있었다. 1636년 3월, 조선 조정은 「후금과 主戰(주전)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諭示(유시)를
평안도 관찰사에게 내렸는데 그 문서가 전달 과정에서 당시 조선을 다녀가던 淸사신 일행에게 강탈되었다. 척화냐 주화냐의 논쟁의 와중에 중앙에서
변방으로 이어지는 방어 체계가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위기 상황에서 보여준 고위 신료들의 무책임한 태도 역시
문제였다. 돌격해 오는 淸軍을 막으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都元帥(도원수) 金自點(김자점) 같은 인물은 아예 적을 피해 결전을 회피했다. 그럼에도
그는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다. 오히려 훗날 영의정까지 올랐다. 비단 金自點만이 아니었다. 병자호란 당시 불거져 나왔던
척화, 주화의 담론은 분명 당시로서는 나름대로의 정당성과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담론의 와중에서 국가의 기본적인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고, 그에 따른 피해는 온전히 하층 백성들에게 전가되었다. 그럼에도 책임을 방기하고 「公人(공인)」으로서의 자세를
저버린 고위 신료들에 대한 단죄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병자호란을 통해 교훈을 얻으려 한다면 이런 측면들에 대한 반성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