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삼천리 제4권 제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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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
제4권 제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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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월일 |
1932-08-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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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鳴呼, 地方熱의 慘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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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元世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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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형태 |
논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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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略-원문) 『諸君 今日 후에 寧復 各西東가』하는 一句詩는 壬辰亂에 鴨綠江邊
국경까지 避禍하섯던 宣祖대왕께서 還都하실 때에 諸臣에게 지여 보이신 글이라고 한다. 이 얼마나 침통한 一句의 驚詩이냐 님금의 몸으로서도 그들의
四色派爭에서 얼마나 상심되고 얼마나 痛忿하고 얼마나 애닯엇스면 『모든 신하는 오늘날 이후에도 또 다시 저마다 西人이니 東人이니 하겟느냐』는 글을
지어 보이섯겟는가? 이러케 침통한 경계의 一句詩를 남기게 한 그들의 四色派爭은 그 뒤에도 그대로 계속되엿다. 또 다시 丙子胡亂이라는
外患을 당하야 城下의 盟까지 매즈면서도 그 派爭의 罪過를 改준할 줄을 몰낫다. 朝鮮근세사에서 所謂 某年某年의 무슨무슨士禍라는 것은 總히
나라를 亡케 하던 派爭의 罪過史들이다. 이 派爭은 光武년대까지 所謂 세도싸훔이라는 싸홈으로 계속되다가 (略-원문) 넘어가게 된데서 그만둔
턱이다. 만일―국가에 붓을 대인다면 班族들의 四色派爭史가 거의 그 전부를 차지할 것이라 하여도 과언이 안일 것이다. (旅順獄中의 申?浩는
『10년 징역을 살고 餘年만 잇스면 四色派爭史를 짓겟다. 朝鮮에서 나만치 이 당쟁사를 지을 사람이 업을가 한다』 云云하엿다 한다. 이것은 그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노라는 자랑보다 과거의 四色당쟁과 해외20년의 派爭에서 기막히고 痛忿하던 온갓 설음에서 나온말인 줄 생각된다.)
이러케 史적으로 고찰하여 본다면 국권을 잡고도 국가를 이저버리고 自私와 自利를 위하야 당쟁의 禍가 3백년간에 ?하게한 四色의 派爭이
죄악이엇을지언정 국정에 대하야 말만하면 『黨漢干政』의 罰을 밧게 된데서 국가관념을 이저버리게 된 常民에게 국가적 책임감이 적엇다고 責할 수는
업을 것이다. 『국가흥망에는 匹夫도 責이 有하다』는 논법으로는 물론 責할 수도 잇는 것이다.
派爭은 地方熱의 産母
급격한 시대의 변천을 따라서 향토적 관념은 드듸여 지방적 관념으로 範圍가 확대되고 이 지방 관념은 봉건식 영웅심리의 派爭에게
一種工具로 化하고 그 결과는 맛츰내 지방열이라는 병적 작용까지 하는데 일으럿다. 그럼으로 지방열이라는 病兒의 산모는 봉건적 派爭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派爭이라는 산모에게서 탄생된 지방열은 그 派爭을 일층 더욱 강화케하야 交互작용을 하다가 결국은 시대 思潮에 의하야 청산되고
지금은 그 여파가 얼마쯤 잇을 뿐이라 할 것이다. 이제 이 규정을 이하에서 다시 해설하기로 하자.〈26〉 향토관념이란 것은
엇지하야 어데서 생겻는가! 상반에서 논술한 四色派爭의 역사적, 정치적 영향도 잇섯지만 그와 동시에 물질문명의 영향이 더욱 컷든 것이다. 日淸전쟁
이전의 교통의 便은 백리박을 먼-ㄴ길이라 하야 왕래가 드물엇다. 따라서 그 시대 인간의 사교적 범위는 너무나 狹搾하얏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한갓
道와 道 사이의 사람들의 語聲과 習俗이 서로 달너젓을 뿐만 아니라 심하면 郡과 郡 사이의 말하는 사투리까지도 서로 달너젓다. 그때 그 사회의
인간들이 역사, 정치, 교통 등 모든 관계로 인하야 一郡 一鄕을 활동적 사교적 범위로 하고 全道나 전국에 대한 관념이 薄弱하엿던 것은 자연의
勢이며 무리라고 할 수도 업다. 그러나 日露전쟁 전후를 벗하야 朝鮮사회는 정치, 경제, 군사, 교통, 문화, 思想 등 온갓 방면에 ?하야
중대한 변화가 급격히 일어낫다. 그 중에도 교통방면부터 논한다면 半島天地를 멧날 동안에 넉넉히 一週할만치 되여젓다. 전국 各道사람들의 왕래와
접촉은 旣往의 一道內 各郡 사람들의 왕래와 접촉보다 멧 배나 더 頻頗하게 되엿다. 이 사회의 인간들에게는 그 활동과 사교의 범위와 전보다 비교할
수 업슬만치 넓어젓다. 그리하야 그들은 비록 국가적 관념온 완전히 가지지 못하얏다 하더라도 그 활동과 사교의 범위를 따라서 그들의 향토적 관념은
드듸여 一道 혹은 數道를 一구역으로 하는 지방적 관념으로 확대되엿다고 할 것이다. 동시에 시대적 先驅로는 半島의 山河만을 舞臺로 하기에는 심히
狹搾하다하야 가까우면 接壞한 隣國과 멀면 歐米까지를 舞臺로하고 활동할여는 前衛분자도 적지안케 생겻다. 其次에 思想방면을 논한다면 멧
백년동안에 班族의 四色派爭과 惡政으로 인하야 국가가 日非하다가 (略-원문) 悲運을 당케 되엿다. 여기에서는 憂X유지의 士가 배출하야 국가의
애국사상도 고취하며 班族의 史적 罪過와 當路者들의 非行을 痛擊하면서 발서 기우러진지 오란 국가의 운명을 挽回할여고 하엿다. 애국의 思想과 민족적
관념은 보통화하게 되엿섯다. 그런데 불행이라할 것은 그때의 사회적 배격을 밧던 班族은 그 다수가 畿湖以南에 世居하던 사람들이오 그 배격陣頭에
섯든 유지의 士는 그 다수가 班族이 稀少하던 西北의 사람이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가지고 지방열의 기원을 여기에서부터 논할여는 이도 업지안엇다.
그러나 그것은 지방열의 기원이 아니엇다. 그때의 그 배격은 지방열에서 나온 배격이 아니엇고 역사적, 정치상 罪過에 대한 배격이다. 設或 그
시대에서 지방적 색채를 띄엿던 듯한 西北학회, 畿湖학회, 喬南학회 등의 상대가 有하엿드라도 그것은 지방 대 지방의 派爭을
고취하자던 것이 아니오. 도로혀 相依相助하야 교육열을 전국지방에 고취하자는데서 생겻던 것이다. 그때 정치적 派爭의 분야는 애국과 非애국으로
대립되엿고 지방적 대립은 업섯다. 憂國憂時의 士논 지역의 別이 업시 同一 戰線에 섯던 것이다. 新民회, 自强회, 其他 모든 결사에는 지역과 班常의 別이 업시 민족적
애국사상에 결합되엿던 것이다. 얼마 뒤에 時局은 또 다시 한번 격변하얏다. 유지의 士로서 해외에 망명하는 者가 不少하게 되엿다. 그들은 그 어느
한지방의 人士들만이 아니엇고 전국 각지방에서 나아가게된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가장 크게 유감되고 불행이라할 것은 그들이 통읊?된 주의, 思想,
정책하에서 그 무슨 조직체를 형성하야 가지고 해외로 나아가지 못하엿다는 것이다. 그들은 彼此에 공통되는 그 무슨 공약이나 굿은 ?契를 가지고
못하고 봉건적 영웅의 심리가 아니면 首陽山義士의 氣節을 가지고 各 自圖生이라할만한 단순한 망명의 길을 떠낫다할 것이다. 만일 그때의
그들이 현재에서 고조되는 일정한 주의와 政綱을 가지고 운동의 유일黨 혹은 통일戰線을 취하여 가지고 그 망명의 길을 떠낫더면 해외사회에서
지방열이라는 名稱부터 생기지 못하엿을 것이다. 따라서 半島사회에도 상당한 영향을〈27〉 주엇을 것이다. 그들은 그러치못한 異域의 망명객이
되엿지만 그래도 半島에 잇는 대중은 그들이 잇는 滿洲, 西伯里, 米洲를 향하야 적지안이한 기대를 가지고 잇섯으며 해외에 移住民은 그들을 민족적
선구자며 운동의 지도자로써 환영도 하고 우대도 하엿다. 그런데 이 망명지사들은 내외의 기대와 대우의 본의와는 서로 맛지 못하는 생활도
하고 지도도 하게 되엿다. 그들의 해외생활은 思想과 견문이 孤陋한 해외이주동포를 유일한 대중으로 하야 各地에서 그들만을 상대로 하며 토대도 하야
활동을 개시할여고 하엿다. 이러한 모든 점에서 지방열의 기원이 시작되엿다. 인정상의 필연이라고 할넌지? 역사적, 향토적 관념의 所以라고 할넌지?
그들은 맛당히 死生과 甘苦를 한가지로 하여야 할 동지보다도 同道 同郡 혹은 同鄕의 사람끼리만 서로 친밀하며 他道의 동지와는 疎遠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엿다. 그리고 내 자랑하고 남의 허물보는 것이 一種의 본성이라고 할넌지? 인물비평에 취미를 가지는 것이 政客들의 본색이라고
할는지? 그들은 서로서로가 해외동포에게 제자랑도 하며 남의 허물도 보며 인물의 비평도 하는 것이 만엇슬 뿐이오 자기들의 사명을 수행하기에 적응할
주의, 政綱과 운동의 方略상에 관한 선전은 적엇다. 여기에서는 각각 제 지방의 인물을 중심으로하며 他지방의 人士를 냉대하며 그 향토적 관념을
이용하는 가소롭고 可憐可憎한 지방열적 派爭이 생기고 말엇다. 이와 가티 향토적 관념은 드듸여 그 無주의 無政綱한 봉건적 영웅심리와 策動을
가진 그들의 이용의 공구가 되엿고 점차로 지방열이라는 병적 작용까지 하게 되엿다. 말하자면 남붓그럽고도 가소롭은 병적 작용이다. 그 누가
他道사람과 교제가 친밀하다던지 某청년이 他道의 某선배를 師友로 한다면 곳 그 누구와 某청년을 某道에 養子갓다. 또는 某道派의 노예가 되엿다는
등의 言詞로써 조롱도 하며 排斥도 하엿다. 자기의 잘못으로 他道사람들이 사는 농촌에 갓다가 매를 맛고 와서도 口實만도 지방열로 따리더라 보고도
선전도 하며 누구의 딸이 他道사람에게 시집간다면 혼인이 잘못되엿다고 말하는 者들까지 잇게 되엿다. 이러한 類의 例를 들자면 너무도 창피하여서
그만두기로 하려니와 그 마즈막 해독으로는 그 서로서로 사이에 말할 수 업는 유혈의 慘劇까지 비저내고 말엇다. 이러한 것을 가라처 지방열의 병적
작용이라고 한다. 시대와 사회는 이 병적 작용의 해독을 根治하기에 노력하얏다. 지방열의 병적 작용은 1919년으로부터 1924년간을
一期로 전성기로 하고 반면에 근절되기를 시작하얏다. 무슨 까닭이던가? 하면 처음에 지방열을 생산하고 그것을 이용하야 존재하던 派爭은 결국
歐洲大戰 후의 시대와 思潮에 의하야 사회주의와 혹은 민족주의 其他를 근거로 하는 주의운동의 黨적 대립으로 변하게 되엿다. 其後에
派爭이라고 할 것은 지방열을 이용하던 派爭이 아니라 민족 혹은 사회운동의 그 각자의 진영내에서 각각 분립된 派閥들의 분쟁이다. 그런데 한가지
주의할만한 현상은 그 뒤에 멧해동안은 민족운동의 방면은 그 존재를 의문할만치 되엿고 따라서 그 자체의 분쟁도 적엇거니와 사회운동의 방면은
獨覇시대이면서도 派爭이 심하엿던 것이다. 이것은 그 초창시대의 기분적 一현상이라 볼 것이다. 지금은 사회운동방면의 派爭도 청산되여진 외관은
呈하고 잇다.
지방열의 필연적 청산과 其後방향 이제 지방열적 派爭은 엇지하여 필연적으로 청산되고 그 代에 어떠한 방면의
전환이 생겻는가를 이하에 논하기로 하자. 첨단화한 현대적 물질문명은 한갓 일국내에 잇는 지방적 장벽을 께트릴 뿐만아니라 국가사이에 잇는
국경이라는 모든 장벽을〈28〉 여지업시 깨트리고 말 것이다. 서울의 노래소리를 런돈에서 華盛頓의 이야기소리를 東京에서 즉시 그대로 들을 수 잇게
한다. 이밧게 온갓 것이 한아도 세계이나 국제성을 띄지안코는 현대적 班列에 들지 못하게 되얏다. 長津 江界에서 산출되는 獸皮의
가격은 뉴욕의 市勢를 따라서 올으고 나리게 되며 伯林에서 제조하는 주사침을 가지고 金剛山에 잇는 女僧의 팔둑에도 주사하게 되엿다. 보아라!
런돈은행에서 金수출을 정지한다는 소리가 들니더니 드듸여 朝鮮의 米價와 滿洲의 粟價까지 폭락케 하고 말지 아니하는가? 물질방면 뿐만아니라
녜로부터 국경과 인종의 別이 업다고 하던 思想계는 더욱히 전세계 인류를 단위로 하고 격변되며 약진한다. 국제공산당 국제연맹 이밧게 국제2字를
冠詞로 하는 모든 조직과 회합이 總히 이 격변하며 약진되는 思想계의 반영이다. 이제 西歐와 北歐에서 탄생한 맑스와 레닌의 주의를 위하야 上海와
大阪의 노동자가 殉節도 하며 東洋의 震災나 혹은 水災를 위하야 歐米의 사람들이 義捐金을 보낸다. 그나 그 뿐이랴! 서울 큰집 가정에는
獨逸미인인 며누리와 日本인 사우도 잇으며 咸北농촌 가정에는 露西亞 어미에게서 난 친손자와 中國人 아비에게서 난 외손녀도 잇다. 연애에 자유와
국경이 업다는 이론 분 안이다. 실제가 표현식혓다. 이와 가티 물질, 思想 양방면이 모다 첨단적으로 세계적이며 국제적인 성질을 띄고
一瀉千里의 勢로 격변하는데서는 국가, 민족, 其他의 모든 狡小한 장벽은 깨여지고야말 운명을 당하고 잇다. 다만 新陳이 代謝하는 곳에서 필연적으로
요하게 되는 시간상의 문제로서 엇던 종류의 장벽만은 과도기적 존재가 容認되여잇는 현실 뿐이다. 국가와 민족적 장벽은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과도기적 장벽일 것이다. 그리고 국가보다도 민족적 장벽은 더 오란 시간을 요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과도기적 장벽의 존재를 부정하고
오즉 국제적이며 세계적인 그 방면의 이상을 가지고 猛進하는 그 활동을 시대적이라 할 것이다. 이러케 격변되여가는 시대에 처한 민족운동자 방면도
지방열적 派爭을 청산하고 과도기적 민족주의를 가지고 시대적 이상과 현실을 대조하며 숙고하면서 전 민족을 단위로 하는 그 무슨 黨的 생활을 하자는
것이 새롭은 경향이라할 것이다. 그들의 이러한 새롭은 경향에 대하야 그 思想이 孤陋하다. 또는 그 활동이 局限이라는 비우슴과 비난이 잇는
것도 그럴 듯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손바닥만한 朝鮮半島를 4分5裂로 지역의 界線을 그어노코 畿湖派니 北派니 西派(2) 하던 지방열적 派爭에
비하면 과도기적 민족주의하에 단일을 조직하고 사회운동 방면과 함게 나가자는 것은 진보된 방향전환이라할 것이다. 지방열적 派爭을 청산하고
전민족 단일X으로의 방향전환에 대하야 아래와 갓흔 비난을 加하는 論者도 업지안이하다. 곳 과도기적 현실이 만일 국가와 민족적 장벽의 존재를
容認한다면 一국가내의 지방파도 容認될 것이다. 국가는 전세계에 대한 한 개의 지방이오 민족은 전인류에 대한 한 개의 支派이다. 그러타면 전세계
전인류에 대하야 국가적, 민족적, 一정당을 만드는 것이나 전국 전 민족에 대하야 一지방의 사람이 지방파를 만드는 것이 나다. 그 相距가 50步와
백步의 사이이다」라고 云云한다. 물론 그러하다. 전국 全族에 대한 지방적 偏黨이 잘못이라 할진대 전세계 인류에 대한 민족적 偏黨도 잘못일
것이다. 그럼으로 국가와 민족의 境域을 초월하는 정당이나 단체가 이 시간에 미래의 이상적 사회를 위하야 가장 이론이 당당하고 권위잇는 역할을 다
하고 잇다. 그러나 다만 과도기적 현실이 민족적 살님의 全廢를 不許한다는 것과 이 현실을 부정하며 혹은 좌우하면서 돌진하기에는 朝鮮사람의 力은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과 지방적 偏黨과 민족적 偏黨이 相距가 不遠인 듯 하여도 세계는 민족을 단위로하는 건설과 연합 혹은 회합을 요할 시간이
상당히 오랄것이라는 것 뿐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비록 純正이론에 조금 맛지 안이하는 듯하고 권위가 얼마쯤 모자라는 듯 하드라도 朝鮮의
민족운동자는 그대로 방향을 확정하지 안이치 못하게
되엿다.(下略-원문)〈29〉 〈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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