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삼천리 제8권 제6호 | |||
호수 | 제8권 제6호 | |||
발행년월일 | 1936-06-01 | |||
기사제목 | 査問會, 安基永·金顯順 戀愛事件 | |||
필자 | 一記者 | |||
기사형태 | 대담·좌담 | |||
명예와 지위를 버서버리고 모든 세상의 비난과 조소를 거더차면서 「노래」로 매저진 정렬의 「로맨스」를 실고 멀니멀니 방랑의 길을 떠낫든 두 젊은이가 4년이란 세월이 흘너간 오늘 바로 봄소식을 따러 다시금 이 땅의 품 속에 안겨 버린지도 멧츨이 지낫다. 4년 전에 어느 봄날 세상 사람들의 눈을 피하야 「사랑의 개선가」를 부르든 이 두 남녀가 새삼스럽게 4년이 지난 오늘 또한 아무도 몰내 고토를 밟게 되는 그 동안에는 실로 여러 가지 고난의 길도 걸어 보앗슬 것이며 또한 순정에 타오르는 사랑의 복음자리도 펴 보앗슬 것이다. 또한 어떤 때는 「노스탈치아」의 야릇한 회포도 떠올낫슬 것이며 고향의 하날 밑에서 가치 손목을 잡든 동무들도 그리웟섯슬 것이다. 유랑 4개년간! 이들은 멧 번이나 눈물을 흘녓든가? 멧 번이나 「멩랑코리」한 심회를 노래로 씻처버렷든가. 그뿐이랴! 사회의 모든 세파(世波)를 얼마나 배움이 잇섯스며 얼마나 깨달음이 많엇든가? 한 마듸로 말하면 방랑의 사개성상에서 이 두 젊은이들은 어든 것이 무엇이며 또한 금후에 장차로 거러갈야는 길은 과연 무엇인가? 한때의 이 사회를 넘우나 소란케 하든 이 「방랑의 가인」들을 차저 이들이 과거에 걸어온 평탄치 못한 길을 더듬어서 널니 세상에서 흥분과 초조ㅅ속에 지내오는 이 땅의 젊은이들 앞에 알니일가 한다. 한양성에 꽃소식을 재축하는 부드러운 봄비가 소리 업시 내리는 4월 초순 어느 날 나는 안긔영씨와 김현순씨 두 분이 사랑의 복음자리를 틀고 잇는 1간 초옥으로 서슴지 안코 차저 들어갓다. 미국에서 음악을 연구하고 금의환행하여 리화녀자 전문 음악과 교수로 잇스면서 반도의 젊은이들의 흠모를<168> 한 몸에 모으고 잇든 안긔영씨. 백만장자의 긔애하는 따님으로 태여나서 세상의 아무런 물정도 몰으고 곱다라케 잘아가며 수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투근거리게 하든 김현순양! 이러한 말이 4년 전 이들에게 불니워젓다면 오늘의 생활은 넘우나 빈약하고 쓸쓸하지 않은가? 나는 서대문 박 관동 31번지로 안김 양인이 머물너 있는 애의서(愛의 巢)인 단간 오막사리 문을 뚜다리면서 이러한 생각이 문득 지나침을 깨달엇다. 오랜 방랑의 생활에서 몹시 시달니운 듯한 창백하고 파리해 보이는 안긔영씨의 너글너글 복스럽게 생긴 얼골에다 상글상글 미소를 지우며 주부(主婦)답게 수수하게 차린 김현순씨와를 한 자리에 마주 앉을 긔회를 어더. 지난 달 걸어온 길 방랑 4년의 추억담을 듯기로 하엿다. 나 - 두 분이 다-방랑 4개년 간에 퍽으나 고생도 않이 하엿겟지요? 물론 행복스러운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엿섯겟지요는... 김 - (약간 미소를 지우며 두 눈을 내뜬다) 안 - 물론 고생도 많이 하엿지요. 그러나 우리 두 몸이 오랜 동안의 방랑 생활에서 어든 것도 많고 배운 것도 만헛지요. 나는 미국에 가서 음악 공부할 때에도 늘 고학을 하엿기에 세상의 고생이란 일즉부터 맛보앗섯지마는 이 현순이야 어데 생전 고생이라고 알엇나요. 그러한 몸이 어떤 때는 수중에 돈 한 푼 업시 지내오면서 그 고생을 감당하는 것을 보니 여자의 마음이란 약한 것이 안이드군요...그러나 이러한 지난 날의 쓸데업는 이야기를 해여야 세상사람들에게<169> 반감을 사고 문제나 일으키엿지 소용 잇나요! 나의 지금의 일거일동 한마듸 말에 이 사회에서는 늘 주시를 하는 모양이니 이런 이야기를 다시금 들추어내기는 십지 안허요. 그러나 우리들의 거러온 길이 「사랑」으로서의 결합만이 아니고 예술(음악)에다 두 몸을 바치랴는 순정에서 끌어오르는 결합이엿기에 우리는 「예술」에 대한 정렬을 한시라도 이즌 적이 업섯다는 것만은 말하고 십허요! 나 - 바로 4년 전 봄날 두 분이 서로 압스며 뒷시며 굿게 굿게 서로 약속하고 방랑의 첫 신호를 부른 때는 장차로 어느 곳으로 갈 작정이엿든가요? 김 - 글세요...(안긔영씨를 말끄럼이 처다보며) 말 하세요. 내가 말하나 이이가 말하나 일반이니까요...호호. 안 - 허허허...우리들의 길이 방랑의 길이요. 사랑과 예술을 찻는 도피(逃避)의 길이엿스니 돈인들 많엇슬 리가 잇나요. 그래서 우리 두 몸이 다만 예술만을 공부하겟다는 생각에 한번은 긔어히 이태리 「미라노」로 갈 작정이엿지요...참으로 그 때의 우리들의 희망이란 컷담니다! 예술의 나라 이태리 음악의 도시 「미라노」에 건너가서 우리들은 열심히 음악을 연구하여 구라파 악단에서 조선 사람의 존재를 빗내이리라. 그런 뒤에는 반듯이 내가 난 땅인 이 조선으로 돌아와서 조선의 악단을 위하야 우리 두 몸을 밧치리라! 이러한 열이 잇고 힘 잇은 굳은 약속과 빛나는 희망과를 가슴 속에 가득이 품고 세상의 소란할 물논드 몰으는체 방랑의 길을 떠난 것이지요!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이란 어데 뜻한 대로 됩뎃가? 나 - 방랑 4년 동안의 거러온 코-스는 어데어데 엿나요? 안 - 경성을 떠나서는 나는 그 길로 「하루빈」에 잠간 들여 잇섯지요. 그 때의 내 생각에는 돈이 업시 떠난 몸이니 「러시아」에는 가기만 하면 돈 업서도 음악을 연구하리라는 생각에 얼마 동안은 하루빈에서 「러시아」로 갈야고 힘을 써 보앗지요. 그러나 그 때의 시국도 다단하고 도저히 가능성이 업고하니 그 길로 신경에 와서 현순이를 맛나 갓치 북경으로 갓섯지요. 우리들이 북경에 들닌 것은 현순이의 오라버니 되는 이가 그 곳에서 병원을 하기에 그이한데서 돈을 좀 어들야고 하엿지요. 그러나 그이는 우리들을 넘우나 냉정히 대하기에 그냥 멧츨을 려과에서<170> 묵다가 나 혼처 먼저 상해로 떠나버렷지요. 현순이도 그 뒤 곳 나려왓지요. 우리는 상해에 잇스면서 이태리 「미라노」로 갈 여러 가지 활동을 하엿섯지요. 우리가 상해에 잇게 된 것도 이태리로 갈야는 생각 때문이요. 1년 반이나 이 곳에서 가진 고생을 다-격근 것도 이 때문이지요...실로 방랑 4개년 간에 그 중 많이 고생한 때도 이 상해시대이지요. 어떤 때는 하루에 불과 멧 푼 돈을 가지고 생활하여 갓섯스니 오직햇겟서요! 나 - 그러케 고생을 하는 동안 눈물도 여러 번 흘니엿겟군요? 김 - 네-(고개로 폭 숙으린다) 안 - 여자란 눈물이 많으니까요! 눈물을 흘닌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지요. 나 - 그런 때는 「우리들의 지금 거러가는 길이 잘못이엿구나! 차라리 이 길을 택하지 말걸!」하는 후회한 때는 업섯나요? 안 - 우리는 물질상 정신상으로 여러 가지 고난이 많엇스나 한번도 「우울」하다거나 후회하여 본 적은 업섯서요. 나 - 가장 고생을 많이 하든 때는 어느 때이엿나요? 김 - 이번 동경에서 조선으로 나올 때 배에서 그 중 고생을 많이 하엿지요...호호. 나 - 아니요. 그런 고생도 고생이겟지요마는 이역으로 전전하며 수중에는 돈 한푼 업고 누가 하나 돌보아 주는 이 업스면 얼마나 고생이 되며 쓸쓸하겟서요? 안-우리는 처음 떠날 때 약간의 돈이 잇섯스나 북경에서 상해로 오자 돈이 떠러젓지요. 그래서 상해의 1년 반은 그야말로 퍽으나 고생을 하엿지요. 상해 잇슬 때가 가장 고생이엿지요. 그러케 고생을 하든 때는 어떤 「땐스홀」에서는 마침 흑인 가수가 월급을 더 많이 주는 다른 데로 옴겨가고 자리가 비엿는데 나에게 엇던 사람의 소개로 월급 450원을 줄테니 오라는 것을 나는 딱 거절하여 버렷지요. 그 곳 사람은 나를 바보로 알드군요. 그러나 그 때의 내 리상이란 이태리에 가서 예술을 연구할야는 욕심뿐으로 아무리 생활이 궁하기로서니 나의 예술가적 양심을 극러케 쉽사리 팔어버릴 수야 잇느냐 하는 생각에서엿지요? 그러나 지금만 갓해도 좀 생각해 볼 여지나 두렷마는 그 때에는 생각치도 안엇섯지요. 나 - 상해에 잇는 동안 가장 유쾌하게 지내든 때는 언제인가요?<171> 대개 어떠한 생활을 하엿나요? 안 - 상해시대에는 「쩨스필 公園」으로 황혼만 차저오면 단둘이 늘 산보를 하엿지요. 나무 숲 욱어진 그늘 밑에서 우리는 고향의 하날도 그리여 보앗고 우리가 즐기는 노래도 늘 나즈막하게 불너 봣지요. 어둠의 공원길을 둘이서 거닐며 차이콤스키-의 『트로이카』(러시아썰매)-일명 「11月」(북국 11月)-라는 노래를 늘 불넛지요. 또 일흔 봄 「서가회」(이곳은 상해의 교외) 넓은 벌판 파란 잔디밭 우에서는 단둘이 딍구불면서 남양의 야자수 욱어진 그늘 밑도 그려 보고 아라비아의 광막한 사막 별판도 그려 보고 또 어떤 때는 눈나리는 북국의 시베리야도 그려보면서 끝없는 공상의 나라를 무한히 달음질처 보앗섯지요. 그러다가는 우리들은 잔디밭 우에서 작곡도 하고 늘 즐기는 노래도 부르면서 먼-ㄴ하날 저편으로 고향의 산천도 그려보앗지요. 또 어떤 때는 나는 작곡하고 현순이는 벌판에서 냉이, 시굼치, 달내갓흔 것을 뜯어 가지고는 그날 저녁 돌아와서 뭇치고 지저서 먹기도 하엿지요. 김 - 참말로 우리들의 생활은 「우울」이 업고 「불평」이 업고 「고민」이 업섯담니다. 한갓 쓸쓸한 때가 잇섯다면 그것은 고향의 부모와 친하든 동무의 얼골이 보고 십고 꽃 피고 새 지저귀고 물소리 맑은 아름가운 조선의 산천이 그리운 때이지요. 그러나 상해의 가을은 참으로 조왓서요. 「서가회」 천주교당에서 들여오는 종소리 은은한 저녁 때엔 황혼의 붉은 노을을 물끄럼이 처다보며 노-란 잔디 밭 우에서 하루 종일 지내든 일은 지금도 서언해요. 나 - 그래. 이태리로 갈야든 일은 어찌 되엿나요. 안 - 상해에 잇는 조선 사람이란 넘우나 미미해서 서양 사람 중국 사람들과 여러 번 교섭을 하엿 보앗스나 모든 것이 돈 때문이니 어찌하는 수가 잇서요! 이때에 우리는 비로서 오늘날 세상에서 황금의 세력이 얼마나 큼을 깨달엇지요. 그러나 우리는 허는 수 업시 다시 발길을 돌닌 곳이 「동경」이엿지요. 그러나 정작 동경에 와 보니 역시 우리들의 생활이란 고달프지요. 내가 미국게통의 사람이라 동경 악단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업고 또 이 곳의 성악게(남자)란 오히려 우리들 보다도 떠러지는 듯 하기에 나의 희망이란 이 곳에서 차즐 수 업섯서요. 그런데 또 멧멧 동무들은 이제라도 조선에 나가 과거의 걸어온 길을 다시금 음악으로 보답하여야 한다는 충고도<172> 잇고 해서 다시금 고향의 땅에다 발을 듸려 노케 되엿지요. 나 - 4년 전 처음 경성역을 떠날 때와 4년 후에 다시 경성역에 나릴 때의 감상이 엇더하엿서요? 이 때 저쪽 방에서 어린 아이의 울음 소리가 들닌다. 아마도 방랑 4년 동안에 어든 귀여운 따님의 울음소리가 분명하엿다. 애기의 어머니는 이여 자리를 일어서 나가 버린다. 안 - 그 때의 우리들의 행동이야 보통 때의 생각은 아니엿스니까요. 「예술」이 맺어 노흔 불 붓는 정렬과 두 사람의 똑갓흔 방랑성이 그러케 식힌 것이니까요! 지금에 안저서 내가 거러온 길이 잘못이엿다고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 잇겟서요! 그러나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치도 안허요. 우리는 그 동안 「사랑」만을 속삭인 것이 아니고 음악을 또한 연구하엿스니까요! 나 - 금후에는 장차 어떠한 길을 밟으럄니까! 안 - 「예술」(음악)을 위하야 우리 두 몸은 일생을 밧치기로 굿게 맹세하엿서요. 이것만이 우리들이 조선 사회에 보답하는 오즉 한가닥 길이니까요. 그러기에 「모성애」의 철윤으로 말미아마 음악에서 그 열이 어린 것으로 옴겨지랴는 「현순」을 늘 부축해가며 서로 번가러 어린 것을 보아가면서까지 두 몸의 앞길을 개척할얌니다. 다만 조선의 사회가 우리들에게 얼마나한 대우를 하여주겟는지? 어떠케 우리들의 행동을 귀정지울지는 우리들의 알 바가 아님니다! 금후의 우리들의 걸어나갈 길은 조선의 악단을 위하여 목숨을 밧치는 것 뿐이지요. 이번에도 우리 두 사람이 출연하는 음악회를 열기로 하엿슴니다. 이것을 벌서부터 비난하는 사람들이 잇지마는 우리는 이번 음악회도 「내가 잘낫노라!」고 얼골을 처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동안 이만치 음악 공부도 하엿다」하는 것을 일반에게 알니우자는데 잇슬 뿐이지요. 나 - 그러고 전 부인에게 난 자식들이 인제는 커다란 아이들도 잇서 늘 아버지를 차즈며 눈물을 흘닌다는데 그 자식에 대해서는 어떠케 생각하시는가요. 안-세상에서 생각하는 거와 갓치 그러케 몰인정한 사람은 아니여요. 물론 방랑 4년 간이야 어데 조금의 여유가 잇섯나요? 그러나 나는 얼마 전에도 맛딸(금년 녀자고보에 입학 한)을 보고 「조금도 섭섭히 생각하지 말고 공부나 잘 해라! 내가 애비로서의 도리를<173> 이저야 버리겟늬?」하는 말을 하여 달내엿지요. 그리고 요사히는 우리 집으로 큰 애들은 자주 놀너도 오지요. 그에 말매듸는 자비한 부성애(父性愛)에 가득차 잇다. 그러나 한편 가정, 부부애, 모성애, 법률, 도덕 이 모든 문제를 뒤저볼 때 그에 얼골에는 한가닥 우울한 구름짱이 떠도는 것을 역역이 볼 수 잇섯다. 나는 이 「戀愛」의 히로인을 차저 批判하려고 하엿다가 참아 못했다. 諸君은 엇더케 査問하려는고?<174> <168-174> |
'解放前 雜誌記事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鳴呼, 地方熱의 慘禍 - 元世勳 (0) | 2015.09.27 |
---|---|
朝鮮 大財閥 總解剖, 金性洙系의 500萬圓, 事業體系=京城紡績, 京城商工, 海東銀行, 東亞日報, 中央學校 - 柳光烈 (0) | 2015.09.27 |
一千二百萬圓이라는 閔泳徽 財産은 어듸로 가나? (0) | 2015.09.27 |
딴스하여 보섯서요? - 김활란, 허헌, 박은혜 (0) | 2015.09.27 |
朝鮮民族의 全盛時代 - 申采浩 (0) | 2015.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