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삼천리 제1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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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
제1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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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년월일 |
1930-1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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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제목 |
朝鮮 大財閥 總解剖(一), 金性洙系의 500萬圓, 事業體系=京城紡績, 京城商工,
海東銀行, 東亞日報, 中央學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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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
柳光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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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형태 |
소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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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에서 자못 近代式으로 事業을 버리인 財産家가 잇다면 누구든지 人村
金性洙氏를 첫 손에 곱지 아니치 못할 것이다. 學校로 新聞社로
紡績會社로 여러 가지 事業에 손을 내밀어 朝鮮經濟界에 한 王國을 세운 金性洙氏는 全南 扶安 茁浦의 한 地主의 아들이다. 封建的 春睡가
方濃한 中 더욱 急激한 外來資本이 들어와서 朝鮮의 産業革命을 밀고 나갈 때에 모든 封建的 蓄積인 地主가 漠然히 그 所措를 알지 못하고 枕을
列하야 넘어지면서 그 蓄積한 財産의 正比例로 蓄妾과 遊蕩을 일삼을 때에 微弱하나마 外來資本家와 相對하야 一矢를 應酬하는 것이 金氏外 幾人뿐이다.
氏는 地主의 아들로 오래 家庭에서 舊學에 힘썻고 느께야 ?을 負하고 東京에 渡하야 早稻田學窓에 螢雪의 功을 싸흐니 當時 20內外의 多感하든 氏는
滿目荒凉한 故國을 돌아보며 時時로 深慮에 잠기고 感情에 激하엿섯다. 學業을 마치고 그의 平生莫逆인 安鎭禹氏와 歸國하니 一妙小한 25,6歲의 靑年이며 歸國하자 곳 着手한
것이 敎育界이니 그것이 現在 中央學校이다.
中央高等普通學校 兩氏가 京城에 돌아오자 곳 自由學校를 經營키로 하여 그 設立願을
當時 尖頭總督 寺內氏에게 提出하엿스나 그때는 日韓倂合된지 얼마 안되여 私學에 대하야는 警戒할 때이며 몃개 잇는 私學도 財政難 其他로 一種
受難時代이엿다. 學校認可가 容易히 되지 못한 것을 본 兩氏는 그때 몹시 財政難에 빠지엇던 中央學校를 引繼하게 되엿다. 中央學校는 前畿潮學校
後身이니 一時 熱血志士의 손으로 校運이 隆盛하엿스나 一陣霜風에 萬華가 俱*하듯이 或은 亡命 或은 ?伏하고 經營이 困難케 되엿섯다. 兩氏가 이를
引繼는 하엿스나 元來 靑年이라 巨大한 財政을 投함에는 父兄의 承諾을 엇지 아느면 안되게 되엿다. 守成에 長한 父兄이 뉘-巨萬의 大金을
投하야 不生産的 學校를 經營하는데 질겁게 許諾하리요. 이에 金氏는 몃칠 조르다 못하야 畢竟 最後的으로〈24〉 身命을 睹하며 待命하엿다. 븨인房에
門을 疊疊히 닷고 몃칠을 굶으며 自殺할 뜻을 보이엿다. 그의 父親은 體面上으로라도 가만히 잇서 버틔여 보앗스나 慈愛깁흔 그 母親은 『미음』그릇을
들고 감긴 門고리에 매달리여 『성수야-』를 連呼하며 盡日 痛哭하야 집안은 亂家가 되엿섯다 한다. 이리하야 承諾을 어든 氏는 松林이 鬱蒼한
現桂山에 校舍建築을 計劃하고 또 父親 압헤 가서 數日을 痛諫하야 8萬圓의 巨額을 어더 新築하엿다. 以來 春風秋雨 十餘星霜에 數千의 英俊을 社會에
보내고 7,8百의 健兒가 校庭에 뛰게 되엿다. 이 靑年敎育家 金氏가 經營하는 中央學校에는 海外에서 돌아온 敎育家들이 만이 모히여 一時는
新思想 鼓吹의 叢林이 되엿섯다. 年前에 30萬圓의 財團法人을 만들어 萬年不敗의 基礎가 完成하엿다.
東亞日報社 東亞日報社는
株式會社이라. 氏의 單獨事業이라 할 수는 업스나 現在 70萬圓 株式會社에 그 株數過半이 金氏의 一門 또는 姻戚, 同志의 所有이니 氏의 事業이라
하여도 過言이 아니다. 己未年 三一運動이 朝鮮의 山河를 震憾한 後 10年?日하엿던 朝鮮의 言論界는 길고 긴 冬眠期를 지나 一陽來復의 春光을 보게
되엿다. 言論界의 元老 ?瑾, 新進 李相協, 靑年政論家로 名聲놉흔 張德秀氏 等이 모히여 發刊하엿스나 元來 數字的 採算에 어두운
老士書生의 일이라 一年有餘에 10餘萬圓이 들어가고 經營은 困難하게 되엿다. 돈을 대이다가 지치인 金氏는 家用金 幾千圓을 들고 와서 『여러분! 이
돈을 내가 家用쓰는 마지막 돈을 털러 왓스니 이것을 다쓰면 나는 어쩔수 업소』라고 最後의 말까지 하엿섯다고 한다. 이때에 그의 莫逆인
安鎭禹氏는 己未事件으로 服役을 마지고 出獄하자 이 經營困難한
東亞日報社를 復興키 爲하야 東奔西走하야 畢竟 株式會社를 完成하엿다. 이리하야 幾多의 劫運을 지나며 奮鬪한 結果 이제는 光化門通에 **한
4層社屋을 建築하고 朝鮮言論界의 一大權威가 되엿다. 10年을 자란 이 新聞은 風雨을 지나며 힘잇게 그 步武를
옴기인다.
京城紡績會社」 朝鮮人의 衣服次로 年 5千萬圓이 海外로 流出한다. 이에 着眠한 金氏는 大正 8年에 紡織會社를
發起하야 第1回 拂? 25萬圓으로 事業을 始作하엿다. 그러나 이것도 這間에 어떠한 事情으로 當時 企業의 責任을 마탓던 李康賢氏는 븨인 손을 털어 쥐게 되엿다. 이에 金氏는 다시 第2回
拂?을 劃策하야 50萬圓으로 現在는 年産額 220萬圓으로 氷登浦 넓은 별판에 ??히 그 工場煙氣를 吐하고 男女職工 450名이 일을 한다. 그
製品은 全朝鮮布木商에게 퍼지엿스며 6種의 廣木은 朝鮮人의 衣服次로 需用된다. 不遠에 第3回 拂?을 하야 明年부터는 年額 500萬圓의 産品을 내여
朝鮮總供給量이 10分의 一을 占領하리라 한다. 同時에 全朝鮮에 朝鮮人經營의 紡績會社는 이 會社 하나뿐임을 附記한다. 만일 金氏가튼 朝鮮人 財産家
10人이 잇섯드랴면 衣服次로는 朝鮮人이 外來品을 안쓰게 되엿쓸가?
海東銀行 이 銀行은 원래 貴族 尹德榮 外 諸氏가 創立 經營하엿스나 中途에 經營困難에 빠진 것을
金氏의 令弟 金秊洙氏가 마튼 것이니 資本金 100萬圓의〈25〉 株式會社이다. 一時
失하엿던 信用도 漸次恢復하고 現在는 文尙宇氏가 ?配를 쥐고 堅實하게
經營하야 昨年도에는 6分의 配當을 하엿다 한다. 不幾年에 朝鮮財界에 相當한 地盤을 占할 것이다.
京城商工會社 이것은 ?木町에
잇서 織紐 등을 經營하던 것을 金秊洙氏가 마타 經營케 되여
고무신 製造와 貿易을 經營하게 되엿다 한다.
결론 學校, 銀行, 新聞社. 紡織, 貿易 等에 손을 내민 金€§洙 一門에 對하야 貧弱한 朝鮮에서는 그를 가르처 財閥이라 한다.
그러면 그의 財産은 얼마나 되는가? 金性洙씨는 長子로셔 出系하야
養家로는 約 100萬圓의 財産이 잇다 하며 生家인 現 金年洙 압흐로 約 400萬圓의
財産이 잇서 約 500萬圓 財産이 兄弟에게 잇스니 可謂 『君家 兄弟는 莫能當』이라 하겟다. 그리고 그의 姻戚의 財産家를 합하면 約
1,000萬圓의 財産은 事業을 위하야 動員시킬 後備兵들이라 한다. 朝鮮에 眞實로 資本家다운 資本家가 잇다면 이를 가르친 말이다. 또는 現代
靑年들이 金氏를 가르처 『부르쪼아』=怜悧한 『부르쪼아』라는 것도 無理는 아니다. 이 財閥을 中心으로 人物을 보면 亦是 그 大頭는
金性洙씨, 令弟 金秊洙氏일 것이나 終始一貫으로 顧問役을 하는 것이 宋鎭禹氏이다. 그리고 新聞에 張德秀, 李光洙, 梁源模, 銀行에 文尙宇, 紡織에 李康賢, 李泰魯, 學校에 崔斗善氏 等은 모다 錚錚한 人物들이다. 또는 將來에 €¥進靑年과 이
資本家的 勢力과 必然的으로 어떤 摩擦이 잇슬 것이 豫想된다. 끄트로 實업슨 말 한마듸 하나 하자. 어떤 總督府 管理가 東京에 갓슬 때 마츰 當時
總理大臣 加藤高明氏가 죽엇는데 朝野吊客이 門이 메이엇섯다. 그때 齋藤總督도 그 자리에 잇섯는데 未幾에 朝鮮 東亞日報社에서 贈呈하는 花環이
들어와서 안젓든 齋藤氏도 그 機敏에 놀래엿다고 한다. 이를 親日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넘우나 皮相的 觀察이다. 그만큼 이 財閥 속에 움직이는
사람들은 百怜百悧하게 外交에 機敏하다, 多難하리라. 그들슝? 前途에도...祝福과 咀呪는 應當 아울러 바들 것이다.( 閔泳?氏와 崔昌學氏系는 紙面關係로 次號에
미룸니다)〈26〉 〈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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