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삼천리 제7호 |
|
호수 |
제7호 |
|
발행년월일 |
1930-07-01 |
|
기사제목 |
春園 石松노래의 作曲과 나의 苦心 |
|
필자 |
梨花專門學校 敎授 安基永 |
|
기사형태 |
문예기타 |
|
내가 조선에 도라와서 처음 작곡하여 발표하여 본 것이 가요협회에서 보낸
李光洙씨의 『우리 애기날』과 金炯元(호는 石松)씨의 「그리운 江南」이란 두 가지엇슴니다. 고심끗헤
작곡하여 노코 내가 책임을 마터서 지도하는 聲友會員을 잇글고 작년 가을에 처음 公會堂에서 음악연주를 하엿든 것이외다. 그때 나는 의외에 이 두
작곡에 찬사를 보내어 주는 여러분이 잇는 것을 발견하고 붓그럽다할만치 감격에 찻든 것이외다. 그 뒤로 늘 게속하여 處處의 연주회에서 혹은
독창으로 혹은 합창으로 불럿은데 그때마다 간데 족족 호의를 표하여 주는데는 한쪽으로 수집으면서 깁분 마음을 금할 길이 업섯슴니다. 그런데 엇든
음악비평가 한 분이 「그리운 강남」과 「우리 아깃날」을 이러케 비평하여 줍데다. 「그리운 江南」은 조선 사람의 심금을 가장 몹시 울니는
아리랑조을 醇化식혀 논 것으로 그 곡조가 野卑하지 안코 淸新하며 또 알기 시워서 어린 애들로부터 나먹은 어른들까지 부르게 된 것이 장점이라고요.
또 한가지 「우리 애기날」에 대하여는 樂句가 부드럽게 홀너서 마치 봄날가튼 후눅후눅한 風情이 잇다고 합데다. 이 비평이 가장 나의 마음을
붓잡는다할 것이외다. 그런데 「그리운 江曲」의 작곡은 몬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하는 후렴부터 생각하여 지엇든 것이외다. 그 동기는
나는 내 집이 서대문밧 애오개 넘어에 잇는데 학교에서 일을 다 마치고 석양을 등지고 하로는 무심히 그 고개를 훨훨 너머가다가 「라라라...하는
詞를 생각하고서 한참 그 고개에 안져 소리를 내어 불너 보앗지요. 그랫드니 자신이 醉하리 만치 맬로듸-가 생겨 집데다. 그 길로 곳 집에 가서
曲譜를 써 두어서 지은 것이 이것엇슴니다. 그러고 春園의 「우리 애기날」은 여러날 고심하엿슴니다. 내 딴으로는 예술적 가치를 집어 너흐려 애써서
거이 여러 날을 허비하엿든 것이외다. 처녀작곡의 上演 그는 작곡가로 안저 퍽으나 아름다운 기억이 될 것이외다. 그런데 나는 以上 2곡을
모다 호평아래에 발표한 것을 한끗 만족하게 생각함니다.〈5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