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춘원 이광수의 예술관 - 김태준

이강기 2015. 9. 30. 16:49

춘원 이광수의 예술관 - 김태준




Ⅰ. 서론

이 글은 춘원의 예술관의 일단을 정리하여 보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 이것은 그의 작품들에 보이는 구체적인 예증보다는 그의 예술에 관한 소논문들을 중심으로 엮어졌기 때문에 하나의 가설로서의 범위를 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오는 헛점은 다른 곳에서 계속하여 쓰고 있는 실제 작품들을 다루는 글들에서 보충 될것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그가 발표한 시대를 거의 무시해 버린 태도이다. 이것은 그가 가진 예술론의 변화는 시대의 변천에 크게 영향을 입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에서였다.

그는 자기의 예술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톨스토이 선생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으며, 톨스토이에게 있어서는 인생은 곧 종교요,예술은 그것의 표현이었기 때문에 춘원과 톨스토이의 예술관을 비교하면서, 종교와 일체로서의 예술관을 살피는 일은 뜻이 있는 작업일 것이다.

이것은 춘원의 전 예술에 있어서의 작가 자신의 중심 사상과 내용 및 작가적 태도를 이해하는 데에, 나아가서는 춘원을 중심한 시대의 한국문예의 상황과 입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작업은 한국 소설의 전통을 규정하는 데에 이바지할 것으로 기대한다. (여기에서‘예술’과‘문예’는 별로 구별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Ⅱ. 종교와 일체로서의 예술관

예술의 목표는 무엇인가? 춘원은‘이상(理想)을 현실적으로 표현한 것’1) 이라고 대답한다.‘이상’이란 무엇인가? 그에 의하면‘이상이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진리이다. 2) 따라서 작가의 예술적 목표는 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진리를 현실적으로 표현해 내는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밟아야 할제?계단은, 적어도, 자신으로서는 진리라고 확신하는 바를 독자에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것에서 모티브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었다.

그러면, 그‘가장 순수한 형태의 진리’인 동시에‘작가가 독자에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모티브를 발견하게 하는’‘이상’이란 어떠한 것인가? 그것은 진(眞)과 선(善)과 미(美)를 동시에 표현해 놓은 것’3)이며, 이러한 때에 예술품은 가장 훌륭한 가치를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진선미(眞善美)를 일체로 결합하는 일이란‘인생 생활 자체를 전부 예술화(藝術化)’4)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인생 최고의 이상(理想)이기도 하다. 춘원이 말한 바, 인생을 예술화한다 함은 얼마쯤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영향이라 생각되거니와 그는 이러한 생의 예술화 속에서만 생의 기쁨은 생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예수의 가르침이라 하여, 그 생의 예술화는 도덕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사랑’을 첨가하였는데 이로써 도덕과 예술이 하나임을 강조하고 있다.

"형제여 그러면 어찌하면 이 人生을 즐겁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사랑하라’

하였고, 톨스토이는 이 가르침을 敷衍하여,
‘제마다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살아라’

하였고…(중략)…나는 생각하기를 人生을 幸福되게 하는 길은 첫째는 예수의 가르침대로,
‘人生을 道德化하라’

타고르의
‘人生을 예술화하라’

함에 있다 합니다…(중략)…人生의 生活을 예술화하되 도덕적으로 한다 하면 人生의 生活은 예술적이 되고 말고, 또 人生의 生活을 道德化하되 藝術的으로 한다 하면 人生의 生活은 道德이 되고 마는 것이외다. 이러한 生活은 ‘愛와 기쁨의 생활’이라 하겠고 더욱 緊功이 말한다면, 愛와 기쁨이라 함은 道德은 愛요, 藝術은 기쁨이외다.

逆德과 藝術은 하나이니, 道摠的 아닌 褻術은 참 藝術이 아니요, 藝術的 아닌 道德은 참 道德이 아니외다.

<藝術과 人生>(1922. 1. 개벽 19호)

이싱에서처럼 예술과 도덕을 일체로 보았는데 여기서‘도덕’이란 말은‘종교’와도 동의어(同義語)로 쓰고 있다. 이는 여러곳에서 발견되는데 이 때마다 ‘종교’라는 말로 대신해 쓰고 있음을 본다.5) 그러므로 예술의 내용은 자연히 종교직인 것이어야 하며, 예술가의 창작 태도는 종교가와 같이 엄숙하여야 한다. 따라서 예술가는 종교가와 마찬가지로 민중의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망각하여서는 아니된다. 예술의 기능에 대해서까지도 그는 이를 종교와 일치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춘원이 말하고 있는 바 종교적 성격의 예술관을 규명하기 위해 예술의 내용과 예술가의 창작 태도 및 예술가의 위치 등에서 각각 살피는 것이 필요한 작업이겠다.


1) 예술의 내용면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인생을 도덕화하고 예술화 한다고 할 때, 그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이는 인간의 내적 개조(內的 改造), 즉 개인의 주관적 개조에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인간은 끝없이 자신을 개조해 가야 하는데‘너 자신을 개조하라’하는 외침은 성경에 보이는 바‘거듭나라’6)하는 예수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 유대 관원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재생해야만 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바와 같이‘사람아, 애(愛)와 미(美)로 너를 개조하라’고 춘원은 주장한다. 이‘애와 미의 세계’야 말로 신세기의 서광이며, 종교와 예술의 세계이며, 이야말로 창세전(創世前)부티 약속된 시지라고 생각한 것이다7). 따라서 그의 예술의 내용 중에서‘사랑’은 인간의 모든 생명현상(生命現象)중 가장 숭고한 것이었다. 사랑 중에서도 모든 육욕적(肉慾的)인 요소가 배제된 순수한 사랑을 최고의 이상으로 생각하였음이 확실하다.8)

"나는 사랑이 일체 유정물의 생명 현상 중에 가장 숭고한 것임을 믿는다. …(중략)…육체의 결합과 아울러 정신에 대한 사모를 짝하는 사랑이야말로 비로서 인간적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질 자격을 가지겠지마는, 한층 더 올라가서 육체에 대한 욕망을 전연 떼어버린 사랑이 있는 것이 인류의 자랑이 아닐 수가 없다."

≪사랑≫단행본의 자서(自序) (1939)

인생의 이 方面[有情然의 生活]이야 말로 人生生活의 本流요, 主流征, 뿌리요 줄거리여서 이 方面을 위하여 종교가 생기고 예술이 생기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文學과 文士와 文章>

위의 인용에서 보듯, 이러한 사랑에 대한 확고한 그의 신념은 물론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연유한다. 그는 자신의 신앙 고백이 라는 전제하에 발표한 글에서‘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혁명사상이 전 인류를 풍미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믿는다고 강조한 바 있거니와.9) 그는 이러한 견지에서 생의 긍정적 입장을 계속 견지하고 강조하여 왔음이 사실이다.

<문예쇄담(文藝鎖談)>이란 글에서 그는 주 요한씨의 시를 칭찬하면서,

"이 詩人이 어떻게나 人生을 肯定하고 어떻게 희망과 힘의 기쁨을 느끼는 시인인지 안 것이요,…조선의 희망과 光明을 朝鮮의 아기들에게 가르치어주는 會貴한 詩人이라는 찬사를 이끼지 아니한다."

고 말하여 문예의 내용으로 생의 긍정적 입장을 취항에 대하여 크게 고무하고 있음을 본다.

그는 이 세상이‘살아 갈 만한 세상’임을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우주는 상명의 세계며 상명은 곧 사랑과 기쁨이므로, 사람들이 괜스레 불행을 만드는 일만 아니하면, 이 땅은 살아갈 만한 곳"이라고 말하고,10) 좀더 깊이 관찰한다면, 이 세상은 "기쁨과 노래 밖에 아무것도 있을 수 없는"11) 천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생의 긍정적 입장에 섰던 그의 이러한 사상은 1920년대를 기준으로 생각할 때 세기말적 퇴폐사상을 배격하는 시대적인 한 요구라고도 생각된다. 그는 신이상주의적(新理想主義的) 예술을 요구한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다만 조선은 지금…思想으로나 情調로나 進取的 努力的 軍歌的인 人生肯定, 現實肯定의 사상과 情調가 人心을 支配하기를 要求하는 時機에 있단 말이다.

이런 意味로 나는 世紀末的 藝術을 咀呪하고 朝鮮人의 希望과 自信과 함께 男氣를 노래하는, 말하자면, 新理想主義的 藝術을 要求한다는 말이다. 12) 그러면, 위에 말한 바 그의‘신이상주의’의 뜻은 무엇인가? 그는 월탄(月灘)의 문학을 논하는 곳에서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인류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며 "인류의 거룩한 의무에 대한 엄숙한 긍정"이라고 하였다.13) 따라서 이러한 신이상주의는 인도주의(人道主義)를 그 내용으로 한다고 말함으로써, 14)그가 말한 바 신이상주의의 성격을 뚜렷이 한정하였고, 결국 우리는 여기에서 인도주의적 톨스토이즘의 강력한 영향을 발견한다. 춘원에 의하면 톨스토이에게 있어서 인생은 곧 종교요, 예술은 그것의 표현이었다. 15)

한편, 신이상주의 자체가 근본적으로 자연주의 경향에 대항하는 정신적 입장임은 물론이거니와, 이에 비추어, 춘원은 온갖 정신적영적(靈的)인 것에 배치되는 문예의 내용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반박한다.

인상의 만반활동(萬般活動)은 모두 인생의 이상의 실현, 즉 인생의 신화(神話)로 향하지 아니하면 안되며, 이러한 점에서 영(靈)대한 반역의 표징인 육체예찬(肉體禮讚)·정욕예찬의 감정적 자연주의(感情的自然主義)는 사견(邪見)이라고 통박한다.16) 그러므로 구태어 인생의 어두운 일면, 수성(獸性)의 면만을 자연으로 보고 인생의 불완전성과 추한 점만을 당연(當然)으로 그리려는 자연주의의 태도 대신에 인간을 이상화하는 의미에서 신적(神的)인 데로의 향상하려는 노력의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가 바라는 우리 문단의 장래이며, 이상주의적 자연주의의 방향이었다. 또한 인도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이상주의, 이것은,그대로의 세계문단의 대세임을 다행하게 여기고 있었다.

자연주의 경향에 대해서 뿐 아니라, 전통적인 문예작품에 대해서도 그는 영적인 요소가 부족하다는 점을 들어 일침을 가하고 있다.

"우리나라 옛 時調 중에,
달뜨게 오마던 임이 달이 져도 아니 오네
이제 누은들 어느 잠이 하마 오리
차라리 앉은 곳에서 긴 밤이나 새오자.

한 것이 있다. 이것은 女子가 情郎이 오기를 기다리는 情을 읊은 것이니 戀愛歌 중에서 아름다운 것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도 純全히 肉的인 것을 免하지 못하였다. 곧 靈的인 要素가 不足하다…(하략)…"

<文藝鎖談>

이어서 그는 주 요한의 시를 예로 들어 영적으로 충만하고 종교적이라고 할 만큼 육취(肉臭)를 벗은 점을 차탄하여 마지않는다.

"주 요한군의 이 시[기다림]는 거의 종교적이라할 만큼 肉臭를 脫하였다.
‘님이여 이런 밤에 나는 사람없어 풀만 돋은 저 길가에 흐르는 달빛을 마시면서 안오는 그대를 기다립니다. ’하는 것이나,
‘그때 나는 그대 말을 생각하고 만족하여 흰 길을 보고 또 찬 달을 향하여 웃읍니다.’

하는 것이나 얼마나 眞情되고도 간절하고도 그리고도 점잖은가? 이 점잖음은 지어서 하는 점잖음이 아니요, 高潔한 人格에서 흘러나오는 自然의 점잖음이다. 우리는 이 노래를 읊는 靈이 어떻게 純潔한 靈인 것을 ?嘆하지 아니할 수 없다."

<文藝鎖談>

이상의 장황한 인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주장하고자 했던 영적인 것에 대한 강조와, 인류의 거룩한 의무에 대한 엄숙한 긍정이 끝없이 계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35년 4월《조선일보》에 실린"≪그여자의 일생≫을 계속하는 말"에서도, 이 소설 속에서 사람의 영혼의 움직임을 그리려 하였다고 말하고 지금까지 자기는 대개도덕문제 특히 민족과 사회에 대한 개인의 도덕문제를 취급하였으나 이 소설에서는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서 영혼 문제를 취급하려 한다고 쓰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작가로서의 그의 초기에서보다는 그의 사상적 난숙기라 할 수 있는 40대 이후로 가면서 그 농도를 더 짙게 하고 있음을 본다. 물론 그의 초기의 소설들에서도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 등이 크게 논의되고 있음이 산견된다. 그러나 초기에 있어 그의 피는 청년작가로서의 우국충정에 끓고 있었으며, 특히 도산 안창호의 애국연설과 오산(五山)학교 시절 이 승훈의 영향 등으로하여 국가와 민족을 중심으로 한 생의 가치에 발견에 더 몰두하고 있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의 사색의 범위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국한된 부면으로 제한되어 갔고, 따라서 이것이 그로 하여금 생에 대한 종교적 관조의 세계로 그를 이끌고 간 기기가 된 것이라 하겠다. 자신의 생의 문제는 영원한 수수께끼로 이것을 하나 하나 해결해 나아가는 길은, 저 스핑크스의 질문을 푸는 오이디푸스와도 같은 심정으로 그대로 종교의 경계로 들어가는 길이여, 이리하여 생을 최고 방면으로 이끌어 올리는 것이 곧 예술임을 그는 알게 되었다. 40세 때에 쓴 그의 심경기(心境記)는 이것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재료가 된다.

"전에는 국가니 社會니 民族이니 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한「라이푸」에 대하여 가장 머리를 많이 썩었지마는 只今은 그것보다 나 自身에 對한「라이푸」를 모르니까 그것부터 알아보려 하는 것 입니다. 최근 내가 느낀 바를 말하오면 生活의 最高 方而一보다 높은「라이푸」의 殿堂은 예술과 宗敎에 있다고 생각합니다.「라이푸」를 최고 방면으로 끌어 올리는 것은 예술입니다.

예술가 종교는 그 境界가 멀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나의 最近 心境>

이것은 또한 예술이 종교와 같은 경계에 있는 것임을 강조하는 말인 동시에 예술의 내용에 사상적 배경이 근거를 이루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이인직(李人稙)이≪혈의루≫ 등을 통하여 현대의 조선생활을 그린 작품을 써서 최초로 구미풍(歐美風)의 소설이 일기 시작한 점을 크게 평가하고 있으면서도 그 작품들이 현대적 사상적배경의 근거를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신문학 운동과는 하등 관계를 가지지 못하였다고 비판하고 있다. 17) 이렇게 시작되는, 전통과 문단 현실에 대한 춘원의 비판은 자신의 문예관의 다른 일면을 보여 주는 글들임에 다름없다. 그것은 참된 예술은 민중의 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함이다.

그는 일인(日人) 島村抱月씨의 감상문 <朝鮮たより>를 소개하는 글에서, 먼저, 민족정신과 문예의 내용과의 관계에 언급하기를,

"첫째 祖上적부터 傅하여 내려 오는 民族精神이 그 民族의 精神生活의 주류, 즉, 그 文學의 中心이 될 것이요. 둘째 비록 祖上적부터 傳하여 오는 民族精神이라도 現代에 生命을 가질 資格이 없는 것은 버린다 함이니. 이 句節은 극히 의미 심장한 것인가 한다.

고하여, 현대적 생명을 가진 민족정신이 문학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청춘) 잡지 현상 문예에 응모한 二十여편의 단편소설을 동독하고 이것들이 조선인의 실생활을 재료로 하였으며 동시에 十세기간의 생활을 정지하였던 조선인의 정신의 소리를 듣게 된 것을 최절(最切)하게 기뻐한다고 쓰고 있다. 18) 이렇게 민중의 생활을 그리고 민중의 정신의 소리를 듣는다 함은 이것이 곧 민중의 예술이 됨을 기뻐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민중의 갈망하는 바, 민중이 골고루 향락할 수 있는 내용의 예술을 창작함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술은 雨班的  士的이어서는 못씁니다. 그것은 우리 民衆主體의 亨 할 만한 主質의 것이라야 합니다.특히 우리  民衆의  하는 것이외다. 무식하고 빈궁한 조선 민중의 골고루  할 예술이야 말로 오늘날 조선이 갈망하는 예술이외다.

이렇게 말하는 그는 민중의 예술이 되기 의한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네가지를 내세우고 있다. 19)

㉠ 내용을 중시하되 민중 생활을 그려 감흥을 일으키게 할 것.
㉡ 민중의 전통적 이상에 접촉하여 민중의 기호(嗜好)에 합하게 할 것.
㉢ 우리 민중의 감정은 단순 소박하며 선이 굵고, 굴곡이 분명하며 색으로는 농후한 순색(純色)이니,
    섬세한 묘사보다는 굵은 선적(線的)으로 하되 통속적이 아닐 것.
㉣ 쉽게 쓸 것.

이상은 문예의 내용이 개혁되어야 할 점인 동시에 작가가 창작태도에서 충분히 고려하여야할 점이기도 한 것이니, 이에 대하여는 아래에 다시 언급키로 한다.

위에서 보인 바, 민중의 예술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고려할 때, 1920년대 중반에 있어서의 신문예는 20년도 채 못되는 역사 위에서나마 신사상의 주임에 훌륭한 공헌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구도덕·구관습에 대한 반항심·개성의 해방·인생에 대한 신자각(新自覺)과 신해서 및 민족적 인식 등으로 민중에게 침율시킨 사상을 말하는 것이다.20) 더구나 춘원은 한국에 있어서 과거 10세 기간 정신생활은 완전히 정지하였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특히나 유교의 패습에 대하여는 ‘저주할 유독(遺毒)’21)이라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구도덕에 대한 그의 비판정신은 날카로왔음을 알 수 있다.

"나는 朝鮮人이로소이다. 사랑이란 말은 말만 듣고 맛을 못본 朝鮮人이로소이나. 朝鮮에 어찌 男女가 없으오리까 마는 朝鮮 男女는 사랑으로 만나 본 일이 없나이다. 朝鮮人의 愛精에 어찌 愛精이 없으오리까 마는 朝鮮人의 愛情은 두 잎도 되기 전에 社會의 習慣과 道德이라는 바위에 눌리어 그만 말라 죽고 말았나이다……"

<어린 벗에게>

이것은 애정의 윤리에 대한 사회관습과 구도덕에의 도전이다. 이에 대하여는 김동인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22)

"그가 처음에 던진 文學은 反逆的 宜言이었다. 실로 勇敢한 동?키호테였다. …온갖 道德·온갖 制度·온갖 法則·온갖 禮儀一이 勇敢한 동키호테는 在來의 ‘옳다’고 생각해 온 것에 反逆하였다."

춘원의 이러한 반동성은 그대로 근대적 혁명성으로서의 그의 신구적 의치에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형성한다.
아래의 인용문은 우리에게 보다 흥미있는 한 결론을 제시해 준다.

"그러나 형식의 생각에는 우선과 같이 ‘영채의 이번 행위가 가장 옳은 일’이라고 생각지 아니한다. 사랑의 생명은 우주의 생명과 같다. 우주가 만물을 포용하는 모양으로 인생도 만물을 포용한다.…이와 같이 사랑의 생명도 결코 일 의무나 일 도덕률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요, 인생의 만반 의무와 우주에 대한 만반의무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충이나 효나 정절이나 명예가 사랑의 생명의 중심은 아니니 대개 사랑의 생명이 충이나 효가 사람의 생명에서 나옴이라……

그러므로 생명은 절대, 도덕 법률은 상대니 생명은 무수히 현시의 그것과 상이한 도덕과 법률을 조출(造出)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형식이가 배워 얻은 인생관이다. 그러므로 영채가 정절이 깨어짐을 인하여 목숨을 버리려 함은 효와 정절이라는 일 도덕률을 인생인 여가의 전체로 오인한 것이라 하였다. 효와 정절이 현세에 있어서 여자의 중심되는 덕이라, 그렇다 하드라도 그는 여자인 인생의 생명의 소산이오 일부분이라 하였다. ≪無 情≫

이것은 봉건적 가치관에 대한 하나의 새로운 인생관의 각성인 동,시에,≪무정≫이 보여 준 가장 중요한 사상적 혁명성이다. 봉전적 도덕률 암에서 생명같은 것은 초개같이 버리는 것을 아름답게 여겨오던 고대 문학적 관념의 질곡에서 해방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대로"사람의 목숨은 친하 보다 더 귀하다"23)고 한 예수의 사상과 같은 것이다. 다음으로 예술의 내용이 종교적이기 위하여서는 그것이 종교악(宗敎樂)과 같이 경건하고 용감한 것이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므로 종래까지의 한국의 예술의 내용이 애절하고 데리키트한데 대하여 비판을 가하고, 앞으로의 예술은 그 내용을 개조하여 가야한다고 생각하였고 그 자신은 그렇게 노력하였음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그는, 현대 기생(妓生)들로 대표되는 민중예술이라 할 만한 민요라든지 ‘카추우사’‘표백가(漂泊歌)’‘심순애가’ 같은데 들어난 정서와 같은 예술은 갖고 싶지 않다고, 구체적인 작품들을 예시하고 있다.

따라서 신홍의 기상을 가지야 한 우리에게 있어서 필요한 예술은 데리키트한 것보다는 순박(淳樸)한 것을, 우미(優美)한 것보다는 용감한 것을 슬픈 것 보다는 상쾌한 것을 필요로 하며, 원컨대는 고선인에게 쾌활한 웃음과 발랄한 활기와 용감한 기력을 주는 예술을 주고 싶다고 말한다. 24) 여기에서 춘원의 예술관은 한층 적극적인 방면으로 발전하는데,그러면 그가 예술은 결국 종교와 멀지 않은 것이라 했을 때, 그가 말하는 종교의 의미는 무엇인가?


2) 예술과 입체로서의 종교관의 면에서

춘원이 말하는 종교는 사회적 일반 통념에서 벗어나지 않는 개념의 범주에 있었으며, 단지 그의 종교관이 확실한 신앙적 근거 위에 세워진 것이었던가 만이 문제의 대상이 될 수 있겠다. 그는, 1932년≪三千里≫ 신년호에 실린 글에서, "기독의 사상에 다가 석가의 사상을 거친 제 三사상이 자기의 사상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의 후기 작품들에서 보아도 순전한 불교가 아닌 불교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신앙으로서의 종교는,그 자신이 고백하고 있듯이 기독교의 강한 영향을 경험하고 난 뒤의 불교정신을 생각하면 좋겠다. 그는 공산당에 피납당했을 당시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유교집안에서 태어나서 천도교·기독교·불교의 세계를 거쳐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살아온 내가 이제 유물사관을 신봉한다면 당신들은 믿겠소?"

그러므로 그는 만년으로 가면서 불교가 체질에 맞는다고 말하고 있으나, 젊어서부터 기독교의 영향이 너무 강력하였기 때문에, 그 중 어느 하나도 아닌 채 두 종교의 마음에 맞는 장점들만을 모아 자기의 종교로 삼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여러번에 걸쳐서 기독교와 같은 종교를 우리 민족에게 심어주고 싶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가 주장해온 민족주의 운동이라는 것도 신앙을 떠난 도덕적 수양으로는 헛것임을 깨달았다고 말함으로써25) 조선민족의 살 길이 신앙에 기초한 인격개조 운동에서만 가능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예술관이 종교적인 것으로 굳혀진 것은 순전히 톨스토이의 강력한 영향 하에서였고, 톨스토이의 예술관은 기독교의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므로 춘원이 그의 후기에 불교적 색채를 띄운것과는 상관없이, 춘원의 예술관은 기독교적 토대 위에 세워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예술과 일체로서의 종교, 종·교와 일체로서의 예술을 운위할 때의‘종교’는 기독교가 그 중심이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그가 주장한 바 참된 문학의 내용일수 있었던 생에 대한 긍정과 지극한 사랑의 실천에 있어 가장 모범적인 종교일 수 있었고, 춘원이 거듭하여 저주하고 있는 유교적인 전통을 부숴 버리기에 가장 적당한 종교였고, 민중을 평등과 사랑으로 계몽하기에 가장 적절한 바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일생에 있어서의 종교적 편력이 화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예술론을 살필 수 있도록 씌어진 글들에 나타난 그의 종교는 기독교였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겠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는 남아 있다. 그가 기독교에서 파문을 당하고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진 이후에는 불교에 귀의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불교라는 것이 참된 신앙으로서의 종교였던가? 이 점에 대하여는 가끔 부정적인 결론이 내려지고 있다. 송욱교수는 춘원의 작품에 대한 한 연구에서,26) "춘원의 불교가 모든 현세적 저항을 포기하는 노예, 혹은 피학대중(被虐待症)에 걸린 패배자와 정치적 변절자의 자기합리화를 위한 도구로써"이용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춘원 자신이 비로소 소설다운 것을 하나 썼다고 말하고 있는 작품≪無明≫에 나타난 그의 불교는"허탈상태에 빠진 노예, 혹은 나약한 부녀자에 적합한 극락세계의 추모사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송 교수는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만해 한 용운의 작품과를 비교하여 결론을 내고 있거니와, 이런 점에서 생각한다면, 춘원의 불교는 그 자신의 일종의 호신책 이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가능하다. 춘원은 불교가 자기 체질에 알맞는 종교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있으나, 위와 같은 이야기가 가능하다면, 결국은 어떤 뚜렷한 한 종교도 갖지 못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에 도달할 수 있다. 단지 기독교는 비교적 순수한 태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보다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말하고 있는 소위"선입권(先入權)"27)란 말을 상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종교적 편력과 관계되는 연령적 순서의 조건과 관계없이 그는 도덕적인 입장에서 종교를 자기화하고 편리하게 이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나이 30대에 쓴"예술과 인생"이란 글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을 발견할 수 있다. 28)

"우리를 新世界로 인도해 줄 자는 宗敎와……藝術이외다. 종교라 함은 지금 있는 그대로의 종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의 靈 속에 있는 純一한 宗敎를 이름이니, 이 의미에서 종교는 예술과 일치하는 것이외다. "本然한 人性을 道德的 見地에서 볼때 그것이 宗敎가 되고 우리 생활에 기쁨의 전견에서 볼 때 그것이 예술이 되는 것이외다. "

여기서 보면, 그 자신은 일반적 의미에서의 종교를 말하고 있으나, 사실은 그의 종교는"도덕적 견지에서 본, 본연의 인성(人性)"이며 앞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기독교 사상에다 불교의 사상을 거친 제三의 도덕률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가 공자를 성인으로 생각하면서도 유교의 "저주할 만한 폐해"를 여러 곳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을 보면, 종교가 가진 도덕적 효용을 주로 생각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는 기독교의 공적을 극구 칭찬하면서도 철저하게 현세에 있어서의 효용만을 크게 중시하고 있었음을 상기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춘원의 종교와 일체로서의 예술관은‘종교’란 말 대신예 ‘도덕’이라는 말을 사용함이 훨씬 타당한 편이며, 그는 결국 예술이 도덕적 이상을 현실적으로 나타낸 것이라는, ‘효용’의 입장에서만 의의를 발견하려 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소설의 수법면에 착안하는 것이 좋겠다. 그가 이조시대 소설이나 신소실과는 다른 새로운 수법으로 소설을 제작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음을 자타가 인정하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에 나타나는 인물설정의 유형성이나 권선징악적인 주제의 설정으로 대단원을 이루고 있는 것에 우리는 주의를 기우리게 된다. 인물설정의 유형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도 오히려 권선징악적인 주제에 접근하기 위함이라 생각하면 사실 그가 <文學이란 何오>라는 글에서 문학이 권선징악적이어서는 안된다고 말한 바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권선징악적인 주제의 중시야말로 그의 소설을 규정하는 중요한 자료로 등장된다. 이것은 전술한 바 도덕적효용성을 그의 문예에서 크게 문제 삼은 그의 예술관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동시에, 사회 교화로서의 문예의 효용성을 중요시했다는 점에서 이조시대 소설이나 신노설과 일맥 상통하는 바, 한국소설의 한 진통이 맥락지어 있음은 시사적이다. 단지, ‘선(善)’의 기준 문제만이 각 시대 소설의 차이로 등장한 뿐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따로 소논문이 마련되고 있음을 밝혀둔다)


3) 예술가의 창작태도 및 작가의 위치 면에서

예술가의 창작 태도에 대해서도, 춘원은 예술가가 종교가와 같이 엄숙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종교가가 사상적으로 민중의 신생이요 지도자이듯, 예술가도 그러하며, 이러한 자세만이 예술가의 취할 태도라고 생각하였다.

"우리가 예술을 창작하는 태도는 극히 엄숙한 것이어서 종교적이라 할 만하거든……"
"시인의 임무는 그가 가진‘최선’을 민중에게 보여줌에 있다.……이점에서 시인은 민중의 선생이요, 지도자다.


<소설가가 되려는 분에게>

그러므로 예술가가 되려는 이는 먼저 문장도(文章道) 수련을 쌓아야 할 것이지만, 그 문장도의 수련이란 바로 종교적 수련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환언하면, 문학은 종교요, 인류에게 전하는 ‘큰 가르침’이므로, 그것은 종교처럼 엄숙한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도 문장도의 수련을 종교적 수련이라고 보는 것이다.

"문학은 종교다. 인류에게 하는‘큰말’이다. ‘큰 가르침’이다…(중략)…문학은 오락도 아니다. 문학은 종교다. 문장도의 수련은 종교적 수련일 것이다". <문학과 문장>

이러한 수련의로 요긴으로 우선 춘원은 건전한 인격을 위한 덕성(德性)의 수양을 들고 있다. 덕성이란 민족적 생존 후영(厚榮)을 조장하는 성질의 것이어야 한다고 부연하고 있다. 이것은 문학이 민족의 생활을 위하여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지(知)·예(禮)의 수양이 필요하니, 이것은 앞의 덕성의 수양과 함께 인격 건설의 유일한 도정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의 건전한 인격자란 도덕적인 기준에 의거함은 물론이다.

따라서 문사가 되는 수련은 의사가 되려는 수련과 준비 태도가 같다고 말하고,그러나, 의사가 개인의 육체적 생명을 구함에 비하면 문사는 민족과 세지를 움직이지 되는 것이므로, 진정한 의미의 문사는 위대한 공부에서만 기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29) 그리하여 항상 경건하고 진지한 태도로 자기 수양에 힘쓰되 종교가가 일생을 두고 쉬임없이 기도하고 성경을 보며 전도함과 같이 하여야 하며 이를 위해 생명을 바칠 천직으로 알고 행동해야 한다고 말한다.30)

다음으로는 예술적 양심의 수양이 필요한데, 이는 곧 도덕적 양심과 마찬가지여서 청명한 양심이 예술세계에 발동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적 양심으로 수양된 문사만이 예술품을 제작할 때에, 그가 최선(最善)이라고 믿는 바가 아니고는 말하지 아니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의 대 예술가란 도덕세계의 성인과 같아야 하며, 역사상의 위대한 예술가는 다 위대한 인격자들이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것은 생의 이상의 길을 발견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들에게 도덕적으로 단 한치라도 그 수준을 높여 주어야 하는 책임이 예술가에게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문사(文士)는 종교가와 같은 사람이므로, 글을 쓰는 활동을 돈을 바라는 직업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뿐만 아니라 대중의 칭찬을 바라서도 안되고 오직 대중을 위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을 글로 씀에 의하여 대중을 교화하고 지도하여야 하는 것이다. 또한 문학이란(다른 예술도 그러하지만) 우리의 생명이 또는 영(靈)이 느낀 바가 있을 때, 그것이 대단히 커서, 암만해도 일반 인류에게 천만대 후손에 까지라도, 또 지구 외에 다른 별에 사는 사람들에게까지라도 전하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는 일종의 강박감을 느낄 때에만 짓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것은 목사나 승려가 직업화할 수 없음과 마찬가지며, 종교가가 돈의 보수를 바라거나 청중의 칭찬을 위하여 설교해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하고 있다. 31)

그러기 위하여는 작가는 인격자이어야 할 것을 이상으로 삼았고, 그 자신 종교직으로나 예술적으로 인격자이기를 원한다고 쓰고 있다.32)

춘원은 문예작가를 가리켜‘문사(文士)’라는 말로 사용하였다. 여기에 그가‘사(士)’라는 말을 쓴 것도 그가 가진 의도로서의 이러한 작가의 위치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면서도 춘원 자신이 문사임을 자처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자신을 낮추려는 의도 외에도, 자신이 쓰는 작품이 한 개의 예술작품으로서 보다는, 큰 사상을 전달하는 하나의 설교 내지는 교화의 한 방편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일반적인 문예작가에 대한 그의 작가관(作家觀)보다는 훨씬 그 범위를 한정하여 춘원 자신의 작가적 태도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문사이기 보다는 민족 계몽가로서 또는 민중의 지도자로서 헤야 할‘큰 말’을, 작품의 형식을 빌려 쓰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는, 곧 종교가와 같이, 민중의 지도자요, 스승이어야 한다고 극히 강조하고 있는 점도 오히려 여기에 연유한다고 하겠다.

여기서, 그의 작가적 태도를 밝힌 글의 일단을 보는 것은 그의 예술관을 살피는 산 재료가 될 것이다.

"나는 일찍기 文士로 自處하기를 즐겨한 일이 없었다. 내가≪무정≫ ≪개척자≫를 쓴 것이나. ≪再生≫≪혁명가의 아내≫를 쓴 것이나, 문학적 작품을 쓴다는 의식으로 썼다기보다는 대개가 논문 대신으로 내가 보는 당시 조선의 중심계급의 실상?그의 이론과 현실의 乖戾, 그의 모든 약점을 여실하게 그려 내어서 독자의 鑑戒나 感奮의 材料를 삼을 겸 朝鮮語文의 發達에 一剌激을 주고, 될 수 있으면 靑年의 文學慾에 下健全치 아니한 讀物을 提共하자?

이를테면, 이 政治 아래서 自由로 同胞에게 通情 할 수 없는 , 心懷의 一部分을 말하는 方便으로 小說의 붓을 든 것이다. <余의 作家的 態度> (1931.4≪東光))

그러므로 그는 민중의 지도자로서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렇게 하여 몸을 바치려는 순교자적 각오로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오히려 이러한 바쁘고 고된 생활 중에서 피가 말라 쓰러지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아래의 인용문은 그러한 그의 입장을 설명하는 한 좋은 예가 된다.

"나는 사 년간, 영양 부족과 과로와 심려로 무척 몸이 약하게 되었다. ……몸이 마르고 기침까지도 났다. 의원들은 몸이 약해졌으니 쉬고 복약하라고 권하였으나 나는 쉬일 새도 없고 복약할 돈도 없었다. 여름방학까지도 나는 하기 강습 교사로 다녔다.

나는 강습회 다녀오던 길에 차 중에서 졸도한 일도 있었다. 나는 이렇게 피곤한 생활을 하다가 피가 말라서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自敍傳>

이처럼 춘원은 예술가는 종교가와 같이 민중의 지도이어야 하며 그러므로 그들은 직업화하여서는 아니된다고 주장한다.

다음으로 그가 주장하는 것은 작가는 자기의 작품을 쉽게 쓰지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것이다.

예술가가 민중의 지도자이며, 민중의 지도자로서 민중을 교화하기 위하여는 민중이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글로 쉽게 쓰지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글을 짓는데 기초가 되는 몇 요건’이라는 글에서, 글의 첫째로 좋은 것은 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누구나 얼른 알아보게 하는 것이 글의 첫째 효능이요, 또 그 환경에 꼭 들어 맞아서 어색한 구석이 없는 것이 글의 둘째 효능"이라 하여, 쉽고·맞고·똑똑하고·힘있고·아름답게 써야 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중 가장 중요한 수 사법의 제일 원리는 쉽게 쓰는 것이라고 말하였다.33)

그러나 쉽게 쓴다는 것은 문예가 극만의 통속화할 염려를 동반하고,통속화는 예술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작가가 일부러 민중의 저급 취미로 끝없이 내려가기 보다는 차라리 민중의 교양을 끌어 올리는 것이 작가의 사명이며 책임이 아니겠는가 하는 질문은 정당하게 받아 드려져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춘원은 대단히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사회적현상은 자연적 현상의 일부이므로 의식적 노력이 미치는 범위가 극히 적다고 하여, 34) 톨스토이와 같은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35)



Ⅲ. 춘원의 예술관에 미친 톨스토이 예술론의 영향

위에서 보아온 바, 춘원의 종교적 예술관은 이것이 특히 톨스토이의 예술관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사실을 좀더 구체적으로 증명하기 위하여 본고는 톨스토이의<예술론>을 중심하여 춘원의 예술관에 어떻게 영향되었는가를 고찰하고자하며, 논술의 순서는 편의상, 앞에서 보아온 춘원의 경우에 역순으로 언급코자 한다.


1) 예술가의 창작 태도 및 작가의 위치면에서

위에서 보아온 바, 쉬게 써야 하는 문제는 톨스토이에게 있어서는 가장 심각하고 중요하게 다루어진 문제의 하나다.

톨스토이는 "대부분의 민중에게 이해될 수 없는 예술이라면 그것은 전혀 그 예술이 나쁘기 때문이거나 흑은 예술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만일 예술작품의 목적이 예술가의 체험한 정서를 대중에게 전하는데 있다면 이해할 수 없다는 일이 있겠는가고 반문한다. 그리고 예술이 인간의 종교심에서 흘러나온 감정의 전달이라고 한다면, 종교 즉 인간의 신에 대한 관계에 근거를 둔 감정이 어찌하여 알 수 없다는 것인가고 묻고, 인간의 신애 대한 관계는 다만 하나이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을 기록한 예술이라면 언제나 반드시 대중에게 이해되어야 하고 또 실제로 이해되어 왔으며, 만약 이해될 수 없다면 그것은 나쁜 예술이거나 예술이 아닐 것이라고 못 박았다.36)

따라서 그는, 볼테에르가 말한 바 "어떠한 문체라도 다 좋다. 그것이 지루한 문채만 아니라면"에 따라 예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어떠한 문체라도 다 좋다. 이해할 수 없는 문채만 아니라면," 옛날에는 시(詩)는 라틴어로 씌어졌기 때문에 어렵다는 문채가 타당화될 수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각각 자국어로 씌어짐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마치 싼스크리트로 씌어진 것처럼 일반대중에게는 불가해의 것이 되었다고 지적하고, 이 문제를 두 개의 방향에서 고찰하고 있다.

그 하나는 주로 상류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예술 창작을 해놓고는, 대중도 교양정도가 높아지면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하며, 그러한 예를 현재의 대중집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예술의 형태 속에서 증거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주장에 대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예술이 인간 전체의 예술이 될 수 없는 것은,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술이 그렇게 중대한 것이 아니거나, 혹은 우리들이 예술이라고 부르고 있는 예술 자체가 그렇게까지 중대한 가치를 가지지 못하였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데, 진자의 경우, 그 예술이라는 것이 대중에 의하여 제작된 것도 아니요, 그들에 의해서 선택된 것도 아니요, 다만 대중에게 친하기 쉬운 공개장소에서 그들에게 강요되거나, 아니면, 반은 타락한 도시의 대중이 그 취미가 악화되어 있어, 어떠한 종류의 예술에도 용이하게 동화될 수 있다는 증거에 불과한 것이어서 대중과는 결국 인연이 멀다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것이 대중을 위해 창작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진 예술자체가 결함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타당화 시키기 위하여 ‘머리가 좋은 부도덕한 사람들은, 대담하게도 그것을 즐길 민중의 권리를 부정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 다.37)

톨스토이는, 예술이, 가령, 대중에게 이해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수한 예술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은 온당치 못할 뿐만 아니라 예술을 파괴로 이끄는 결론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고, 유망한 예술작품이 좋기는 하지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극히 곤란하다는 말은, 마치 어떤 종류의 음식이 맛 있기는 하지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먹을 수가 없다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빵과 과일이 일반의 마음에 당기는 것이기 때문에 맛이 좋다고, 하는 것과 같이, 예술에 있어서도 그러하여, 좋은 예술은 항상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위대하다고 하면서도 대중에게 이해되지 못하는 작품이란 있을 수 없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 수 없다고 한다면 이해하기에 필요한 지식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창세기≫의 서사시와≪복음서≫의 우화,민간전설, 민요 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다고 그는 말했다. 이것은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것으로, 민족간의 차이도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고, 가령 중국인의 눈물과 웃음은 러시아인의 눈물이나 웃음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이 자신에게 감명을 주었다고 첨부하고 있다. 따라서 위대한 예술의 위대성은 모든 사람이 그것에 접근해서 그 정서를 알 수 있게 되기 때문에 훌륭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38)

여기에 예술의 직능이 있는 것으로, 논리적인 형식으로는 이해할 수도 없고, 또 접근할 수도 없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접근시키는데 예술의 직능이 있는 것이다. 보통 진정한 예술적인 인상을 받으면 그것을 받은 자에게는, 이전에 안고는 있었지만 다만 말로 나타낼 수가 없었다는 느낌이 들며 우수하고도 고상한 예술은 언재나 그러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39)

이러한 톨스토이의 생각은 앞에서 본 춘원의 ‘쉽게 써야 하는 문제와 같은 것으로 예술가가 대중의 스승이요 지도자로서, 민중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쉽게 써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며, 이것이 예술을 위대하게 하는 한 조건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은 예술가와 직업의 문제이다. 춘원은 ‘예술가’라는 것이 직업화 되어서는 안된다고 함을 극히 강조하고 있음을 앞에서 보았거니와, 이는, 그대로 톨스토이의 예술관과 같은 것이다.

톨스토이는, 우리 사회에 있어서 위조예술품(僞造藝術品)을 낳게 하는 세가지 조건을 예시하고 있는 곳에서 그 첫째의 것으로 작가의 직업화 문제를 들고 있다.

예술이 직업이 되자, 예술의 가장 존귀한 성질?곧 그 진실성은 힘을 잃고는 드디어 파괴되어 버리고 말았다고 지적하고, 40) 예술가가 직업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예술 작품 창작으로 인해서 상당한 보수를 받는 것까지도 위조예술을 조성하는 조건이 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예술가가 만일 생활이 완전하면 좀 더 좋은 작품을 내고 좀 더 많은 작품을 산출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우리들 사이에서 예술이라고 생각되는 것이 실은 예술이 아니고, 단지 僞造에 지나지 안는다고 하는 것을 거듭 명백히 표시하는 증명밖에는 되지 안는다."

"그리고 건전한 감정은 인류애게 구유되어 있는 자연스러운 생활의 모든 면을 사람이 맛볼 때에만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에게 생활의 안전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인간 고유의 감정을 맛볼 기회와 가능성을 잃고 마는 것이다."

톨스토이:≪예술론≫ 제19장 p.168

예술가는 자기 마음 속에 일어난 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하려는 뜻에서 창작을 하는 것이므로 되도록 많은 사람에게 전달되었다면 그 자체로써 기쁨도 되고 보수도 받는 셈이 된다고 그는 말하고, 그러므로 그 이외의 보수를 바랄 때, 예술은 필연적으로 타락하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예술가는 인간으로서 보통 생을 유지하면서 어떤 종류의 노동으로 자기 생계를 유지해야 하며, 예술가로시의 보수는 자기의 작품이 널리 퍼지는 즐거움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다음으로 수련문제에 대하여는≪예술론≫에서는 별로 언급한 바가 없으나 예술이란 예술가가 체험한 어떤 특수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므로, 예술학교 같은 곳에서 가르치는 일은 예술의 모방과 위조예술을 조장하는 결과 밖에는 얻을 수 없다고 비난한다. 41) 그러나 톨스토이는 진정한 예술 창작의 조건으로, ‘재능’, ‘욕구’, ‘능력’과 함께 ‘자기 시대에 비해 한층 높은 세계관의 수준에 서 있지 않으면 안될 것’을 강조하고 있음에 비추어, 작가가 새로운 시대의 세계관을 보여 주어야 할 점에 대해서는 춘원의 경우도 다름이 없음을 보게 된다.

또 하나는 작가의 진실성 또는 진지성의 태도다. 그는 진정한 예술이 될 수 있는 조건으로 예술의 감염성(感染性)을 들고 있는데, 이 감염성의 정도는 예술의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고 하고 또 이 감염력의 정도를 결정하는 제일조건은 예술가의 진지성이라고 말한다. 예술가가 직업인이 될 때 이 가장 존귀한 성질은 파괴되어 버리는 것이므로 직업인으로서의 작가는 되지 말아야 한다고 한 말을 상기할 수 있다.


2) 예술과 일체로서와 종교관의 면에서

우선, 우리는 톨스토이의 종교관을 간단히 살펴 보는 것이 순서이겠다. 그는 자기의≪예술론≫에서 종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 사람이 표현하는 인생의 의의와, 보통 그 사람의 기억을 중심으로서 생긴 미신(迷信)과 전통과 의식(儀式) 따위가 한대 엉켜서 종교라고 하는 것이 된다. " 톨스토이:≪예술론≫ 제6장

또 그는, ‘예술이 인간의 종교심에서 흘러나온 감정의 전달’이라 정의하고 여기서 말하는종교심 또는 종교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서로 형제라는 동포의식’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동포의식’이란‘인간의 신에 대한 관계에 근거를 둔 감정’이며, 인간의 신에 대한 관계가 다만 하나인 것과 같이,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가지는 바 동포의식도 역시 하나인 것이며, 이것은 곧 인간이 서로 형제라는 사실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다는 이‘최고의 인생관’은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이를 피할 수도 변경할 수도 없는 것이며, 다만 그것에 접근해 갈 밖에 딴 방도라곤 없는 것이며, 따라서 이 종교만이 항상 인간 정서에 대한 평가의 기초가 되어 왔고 또 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42)그러므로 종교의식은, 언제나, 어떠한 인간 사회에서도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를 결정하는 근본 개념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며, 따라서 이 종교의식이 예술에 의해서 전달되는 감정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의식은 인간이 세계에 대하여 가지는 새로운 관계의 지표이며, 앞에서 지적한 바, 인간의 신에 대한 관계와 인간이 인간에 대한 관계의 총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종교가 진보하는 인류의 전진의 방향을 이끄는 지표의 인도자"라고 말하고, 어떤 구체적인 종교를 가리키기보다는 오늘날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진보의 기수(旗手)로써의 종교’를 말한다고 쓰고, 종교적 지각은 "예수와 그 전시대에 가장 우수한 사람들에 의하여 표명되고 있을 뿐아니라…인류의 모든 복잡한 사업을 이끌어 가는 실마리가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기독교 이의의 종교까지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해설할 수도 있겠으나, 여기에서 말하는 톨스토이의 종교란 주로 신약성서에 기초한 기독교에 중심하고 있다고 봄이 타당한 견해다.

그는 기독교 사상이 인간의 감정 전체에 색다른 새로운 방향을 주었음을 강조하고, ‘기독교 사상’이란 것이 복음서 요한복음 17장21절에43) 적힌 것처럼, 인간 각자가 자기 자신을 신의 아들이라고 시인하고는, 거기서 나오는 인간과 신, 또는 인간 상호간의 결합을 시인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인간과 신 또는 인간 상호간의 결합’이라고 하는 말에 대하여도 실명을 가하고, 이것은 아주 명백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로써 이 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의 결합이라는 것이 흔히 있는 몇 사람만의 결합과는 반대로 한사람도 빠짐없이 만인을 결합한다는 뜻임을 천명하고 있다.44)

그가 딴 여러곳에서 설명하고 있는 바 "기독교적인 예술 즉 현대예술은……45)" 이라든가 "현대에 있어서 참으로 청신한 감정은 종교적 기독교적 감정뿐이고……46)"한 것도 모두 이러한 견해의 뒷받침을 해주고 있다.

오늘날 인간에게 공통된 종교의식은 인간이 서로 형제라는 동포 의식이며, 또한, 우리들은 인간의 행복이 인간의 동포적인 결합에 합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따라서 예술은 이러한 인간의 의식을 성서로써 표현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예술은 곧 종교적 의식의 표현이란 곳으로 귀일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47)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예술과 종교의 위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으며, 따라서, 예술가치의 평가기준은 곧 종교적인 가치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는 예술이 인간최고의 정서를 전달하는 것이며, 이 인간의 정서는 항상 종교만이 그 평가의 기초가 되고 있는 것이므로, 자연히 종교가 예술의 가치평가의 기준이 되고 있음도 명백해진다. 그러므로 톨스토이는 어떤 민족에서도 그 민족 전체에게 공통된 종교의식에 의하여 선(善)이라고 생각된 정서를 전달한 예술은 좋은 예술로 장려되고, 이 공통된 종교의식에 의하여 나쁜 예술이라고 인식된 것은 배척을 받아 온 것이라고 쓰고 있다.

여기에서, 인류가 애써 도달할 수 있었던 종교적 지각(宗敎的 知覺)에서 나온 최고의 감정을 전달함을 목적삼는 예술활동 대신에, 어느 한정된 계급에게만 쾌락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곡해된 예술론이 예술 자체를, 약화시키고 그것을 거의 파멸시키고 말았다고 동렬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다. 48) 종교의식이란 인간이 세계에 대하여 가지는 새로운 관계의 지표 외에 다른 아우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종교의식에서 생겨난 성서야말로 항상 청신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쾌락이라는 것과 비교하여 보면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쾌락 이상으로 진부한 것은 다시 없다. 쾌락은 욕구에서 흘러 나오는 감정이므로 한정된 것일 뿐아니라, 옛날부터 모든 사람들이 낱낱이 경험했고 또 진부하게 되이 버린 것이며, 인간의 쾌락에는 그 본성에 의하여 각기 한정된 제한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리하다. 반대로 종교의식 속에 나타나는 인류의 진보에는 재한이 없기 때문에 종교심이 점점 분명해짐에 따라 생기는 인류의 진보의 걸음걸이는 인간으로 하여금 한층 더 새로운 감정을 경험하게 한다. 그러므로 어떤 시대의 사람들이 도달하는 인생관의 최고 수준을 가리키는 종교심을 근저로 하는데에서만 아직 인간이 아무도 맛보지 못한 새로운 정서가 생기게 되며, 이러한 고도한 예술작품만이 그 소기의 목적인 바, 인류가 완성으로 행해서 전진하는 운동의 활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다시 문제로 등장하는 것은 예술의 내용의 문제가 된다.


3) 예술의 내용면에서

톨스토이가, 예술을 가리켜‘인류가 완성으로 향하여 전진하게 하는 인류운동의 한 수단’49)이며, 이러한 일을 추진하는 ‘위대한 사업’50) 이라고 말했을 때, 이 사업이란, 한편으로는 인간의 상호결합에 대한 육체적 내지 정신적인 방해물을 파괴하는 것이며, 다든 한편으로는 모든 인간을 하나의 전세계적 동포로 결합시킬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만민에게 공통적인 원칙을 수립하는 일이다. 51)

이러한 위대한 사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필요한 예술의 내용은 그에 의하면 다음의 두 종류가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신의 아들이며 인간은 서로 형제라고 하는 인류의 동포관계를 의식하는데서 흘러나오는 정서이고, 다른 하나는, 빠짐없이 모든 사람에게 친하기 쉬운 일상 생활의 단순한 감정, 예를들면 희열·연민·쾌활·안정 등의 정서를 말하는 것이다. 52)그는 이 두길이 전혀 동일한 것임을 부연하고 있다.

진자의 경우, 예를 들면, 진리에 대한 확신, 신의 의지에 대한 복종과 자기 희생, 인간에 대한 존경과 사랑 따위처럼 기독교의 종교사상에서 나오는 감정이며, 후자의 경우, 극히 단순한 감정, 예를 들면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노래와 재미있는 농담, 마음 끄는 이야기, 그림, 인형 따위에서 받는 부드럽고 즐거운 기분 같은 것은 동일한 작용, 즉 사랑에서 오는 인간의 결합을 낳게 한다고 말한다. 이어서, 그는, 앞의 것을 협의의 종교적 예술, 뒤의 것을 보편적인 예술이라고 규정하고, 이 두 종류의 예술만이 오늘날의 좋은 예술로 간주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내용적 기준에 의하여 대부분의 고전들을 위대한 예술의 예에서 제거하고, 극소수의 훌륭한 예술 작품을 예시하면서 자신의 작품도, 제一부류에 속할 ≪신은 사실을 아시나 때를 기다리신다(God sees the truth but Waite)≫와 제二부류에 속할≪가우카스의 포로(A Prisoner of the Gaucasus)≫외에는 나쁜 예술의 범주 속에 넣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주를 붙이고 있다. 53)

종교적 의식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에는 새로운 것이 얼마든지 있다고 하여 새로운 예술의 청신한 내용이 될 수 있는 자료들과 그 처리의 각도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현대에 있어서 참으로 청신한 정서는 종교적 기독교적 감정뿐이고, 이러한 종교적 의식에서 흘러나오는 기독교적 감정에는 새로운 것이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은 것들이다.

(전략)…부부 상호간의 관계, 어버이와 지식에 대한 관계, …동국인과 이국인과의 관계, 공격과 방어에 대한 관계, 소유권, 토지, 생물에 대한 관계이상으로 세상에 진부한 것이 있을까? 그러나 사람이 이러한 것을 기독교적 견지에서 보기만 한다면 그 즉시로 얼마든지 다채롭고 가장 복잡하고 가장 굳센 정서가 그 속에서 생기기 된다. …(중략)…민중예술과 아동예술의 온갖 광대한 영역?농담과 격언과 수수께끼와 민요와 무용과 아이를 장난과 흉내 따위는 예술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는 인정되어 있지 않았다. 미래의 예술가는 동화라든가 사람을 감동시키는 민요라든가, 자장가라든가, 재미난 수수께끼라든가, 사랑을 웃기는 농담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만들거나 혹은 몇세대에 걸쳐서 수많은 아동과 어른을 즐겁게 하는 그림을 그리는 편이 비교도 안되게 중요하고 실질적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톨스토이:≪예술론≫제9장

쾌락적인 내용은 예술의 건전한 내용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예술이 그대로 있기보다는 차라리 예술 전체가 근절되어 버리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강경한 어조로 말하는 그는, 현재 사람들의 감정은 거의 모두가 보잘 것 없는 간단한 세가지 감정, 즉, 교만과 성욕과 피로감에 귀착한다고 저적하고, 실제로 이 세가지 감정중에서도 현대 예술작품의 주제가 되어 있는 것은 가장 저급하여 모든 동물에게도 있는 육감(肉感)이 그 대표가 된다고 지적한 점을 상기함이 좋겠다.


4) 종교와 일체로서의 예술관

예술이란 무엇인가? 다시 이 문제로 돌아갈 때, 톨스토이는, 예술을 정확히 정의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을 쾌락의 수단이라고 생각지 말고, 인생의 하나의 조건이라고 생각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견지에 서면, 예술은 인간 상호간의 교제의 한 수단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술이란 인간을 서로 동일한 감정 속에 끌어 넣어, 인간 동지의 일치를 꾀하는 수단이며, 여기서 말하는‘동일한 감정’이란 종교적 의식을 말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인류에게 공통된 종교의식은 인간은 시로 형제라는 동포의식이며, 인간의 행복은 결국 인간이 동포와의 결합에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서다. 54) 이짐에 대하여는 K.Jaspers교수의 이론을 첨가하는 것이 좋겠다. 그는 그의 지서에서55)"하나님은 간접적으로만 나타나시는데56) 인간으로부터 인간에로의 사랑 없이는 나타나시지 않는다"고 전제하고, 진리는 ‘두 사람’으로 시작하며, 그러므로, ‘Kommnuikation’은 가장 중요하여 "교통 가운데서 실현되지 않은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요, 궁극에 가서 교통에 근거하지 않은 것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예술은 인류가 완성으로 향해 전진하는 인류운동의 한 수단이며, 이를 위한 인간의 감정의 상호 소통이 예술이므로, 이러한 인류 전진운동의 방향과 지표로서의 종교는 항상 그 인도자가 되어왔다는 것이다. 인류 전체의 역사가 보여주듯, 인류의 진보가 종교의 지도 없이 이루어진 때는 일찌기 없었고, 산 진보의 기수로서의 종교만이 예술의 방향일 수 있으므로, 예술은 종교와 일체로서, 예술의 방향의 지표가 되고 있다고 본 것이다.



Ⅳ. 결 어

지금까지 본고는 춘원의 문예관을 살펴보고 그것에 영향을 준 것이라고 생각되는 톨스토이의 예술론들을 찾아보았다. 춘원의 문예관 내지 예술관은, 그 자신이 고백하고 있듯이 그 대부분이 톨스토이에게서 온 것임을 우리는 보아온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톨스토이를 통하여 받아 들인 예수의 근본사상이 그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아버지께서 네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안에 있게 하사…"57)하는 예수의 말씀에서 기인한다. 그것은 K.Jaspers의 "인간으로부터 인간에로의 사랑없이는 신은 나타나지 않으며", "진리는 두사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58)라 함을 상기할 때, 예술의 내용과 예술의 지향점이 모두 여기에 귀일함은 망연한 귀결이겠다. 이리하여 톨스토이는 "신은 너희 마음속에 지시다"고 하였고 춘원은 이로써 지상에 천국을 이룰 수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춘원에게 있어서 예술은 종교와 일체로서의 것이었으므로, 그의 예술의 내용은 종교적인 것이어야 하였으며, 예술가의 창작태도 억시 종교가와 같이 엄숙한 것이어야 했다. 그는 예술의 기능에 대해서도 종교의 경우와 일치시켜 생각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술을 통하여 인간을 예술화하는 구체적 방안으로, 그는, 인간의 내적 개조를 내세웠다. 이것은 예수의 가르치신 바 "거듭나라" 하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그는 기성 가치관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생명과 영(靈)에 대한 각성을 선언하며, 용감하고 긍정적인 인생을 작품의 내용으로 할 것을 궐기한다. 이것이야말로 톨스토이가 말한바 ‘인간 상호간의 결합’을 의미하며 이때야만 춘원의 이상처럼 지상에 천국은 이루어 지는 것으로 이는 예수의 가르치신 기도문대로 "주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것이다. 다음으로 그의 예술관을 형성하고 있는 예술과 인체로서의 종교는 어느 완전한 하나의 종교라고는 할 수 없으나, 대개 기독교의 강한 영향 속에서 그의 예술관이 이루어진 것만은 확실하다.

또한, 그가 사회교화로서의 문예의 효용성을 중요시한 점에서 그의 문에는 권선징악적 주체성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이런 점에서 그가 한국소설의 한 전동을 맥락지워 주고 있음은 시사적이다. 인물설정의 유형성에 사로잡혀 있음도 또한 그러하다. 신소설과 춘원에 와서 한국소설의 전통은 끊어졌다고 하는 지금까지의 전통불모론은 수성되어야 마땅하다.

다음으로, 예술가는 종교가와 같으므로, 그 수련과 창작태도에 있어 생명을 바칠 각오로 임해야 하며, 최선이라고 믿는 바가 아니고는 말하지 말아야 하는 민중의 지도자임을 강조한다. 따라서, 예술가는 직업인이어서는 안되며 보수나 심지어는 명예까지도 바래서는 아니된다고 주장 한다. 이점은 톨스토이가 그의 예술론에서 가장 힘주어 말하고 있는 바로써, 직업인이 되면 벌써 예술가의 가장 중요한 성질인 진실성은 힘을 잃고 드디어는 예술 자체가 파괴되어 버리고 말 것이라고 한 주장과 같은 것이다.

다음으로 춘원은 톨스토이와 같이 예술은 대증에게 이해되도록 쉽게 표현되지 않으면 안된다 함을 강조하고 쉽게 쓰는 것이 곧 예술의 질적 저하를 의미, 함이 아니라고 생각하고있었다.

<文學이란 何오>에서 그는 문학의 목적이 "미감(美感)과 쾌감(快感) "에 있다고 말한 바 있으나 이것은 ‘쾌락설’에 동조함이 아니고, 오히려 인생을 즐겁게 하고 예술화 한다는 의미로 해설함이 좋을 것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크게 마음 썼음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국 춘원에게 있어서는 ‘종교(도덕이란 말이 더 적당한 것이나)와 일체로서의 예술’이 있을 뿐이었다. 종교란 ‘신과 인간과의 결합의 원리’이며 예술은 ‘인간과 인간과의 결합의 원리’라고 보면 이러한 생각은 타당한 것이었다.

춘원이 이미 당시에 한물 가버린 톨스토이의 예술론을 수입했기 때문에 그의 문예가 더 이상 발전할 소지를 포기하고 한국 현대소설의 발전의 길을 막았다는 이론59)도 설 수 있겠으나, 그것이 춘원의 구미에 맞는 것이었으리라 생각하면, 아직도 도덕적 한국 전통에서 자신을 도피시길 수 없었던 체질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겠다.

  
각 주

1 이광수:<소설작가가 되려는 분에게>
2 이광수: ibid
3 이광수:ibid.
4 이광수:<예술과 인생>(1922)
5 이광수:(소설가가 되려는 분에게>·<문학과 문사와 문장>·<中庸과 徹底>
6 신약≪요한복음≫ 3장 1∼21절에는, 니고데모라는 유태 관원에게"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天國을 볼 수 없다"고 예수는 가르치고 있다.
7 이광수:<藝術과 人生>
8 이광수:《돌베개》<사랑의 길>이란 글에는"사람의 갈 길"오직하나요, 하나 밖에 없는데 그것은 곧 사랑의 길이다"고 쓰여 있다.김태준:<춘원의 문예에 끼친 기독교의 영향>(명대 논문집 3집 p.251)참조
9 이광수:<그리스도의 革命思想>(1931년 1월 <靑年> 11권)
10 이광수:<살아갈 만한 세상> 《돌벼개》중에서
11 이광수:<歸庄記>
12 이광수:<文藝鎖談>
13 이광수:<文藝鎖談>
14 이광수:<우리 文藝의 方向>1925년 11월《조선문단》13호
15 이광수:<杜翁과 나> 1935. 11. 20≪조선일보≫
16 이광수:<朝鮮文極의 現狀과 將來>1925년 1월 1일《동아일보》
17 이광수:<朝鮮의文學>1933년 3월≪三千里≫
18 이광수:<復活의 曙光>1918년3월《청춘》12호
19 이광수:<藝術과 人生> 1922.
20 이광수:<文藝鎖談>一新文藝의 가치-1925.11.2∼12.5동아일보
21 이광수:<耶蘇敎의 조선에 준 은혜) 1917.7.≪靑春≫ 9호
22 김동인:<近代小說考>
23 신약 ≪마가복음≫ 9장 36절
24 이광수:<예술과 인생>
25 이광수:<窩庄記>
26 송욱:≪文學評傳≫(1969) 自己차欺瞞의 倫理一李光洙作≪無明≫?
27 이광수:文士와 修養(1921년 1월≪創造) 8회)에 보면, ‘先入權’ 이란 말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시간적으로 먼저 들어온 사상이 뒤에 들어올 것보다 더 심각한 근거를 가지고 개인에게 영향하는 것을 말한다.혹은 先入觀
28 예술과 인생> 1922년 1월≪개벽≫ l9호
29 이광수:<문사와 수양>
30 이광수:<문학에 뜻을 두는 이에게>(1921년3월≪개벽)21호)
31 이광수:<문학쇄담>1940.2 (每日申報) 이광수 <문학과 문사와 문장> ≪문장독본≫
32 이광수:<문학과 문사와 문장> ≪문장독본≫
33 이광수:<글과 글짓는 기초 요건>1935년 7월≪學燈≫
34 이광수·양주동:<문예사상 문답> 1929년 3월≪문예공론≫창간호
35 톨스토이:≪예술론≫ 김병철역(을유문화사 간)
36 톨스토이:≪예술론≫ 제10장 김병철역 을유문화사 간 pp.101∼102
37 톨스토이:ibid. pp.78∼79
38 톨스토이:ibid.제10장 pp.98∼99
39 톨스토이:ibid. 제10장p.100
40 톨스토이:ibid. 제12장 pp.111∼112
41 톨스토이:ibid. 제12장 p.116
42 톨스토이:ibid. 제6장 pp.65∼66
43 신약성서≪요한복음≫ 17장 2l절:"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44) 톨스토이:ibid. 제16장, pp.144∼145.
44 톨스토이:ibid. 제16장, pp.144∼145.
45 톨스토이:ibid. 제16장, p.146
46 톨스토이:ibid. 제19장, p.169
47 톨스토이:ibid. Epilgue p.179.
48 톨스토이:ibid.제9장p.80
49 톨스토이:ibid, 16장 p.140
50 톨스토이:ibid Epilogue p.179
51 톨스토이:ibid. 제16장 p.143
52 톨스토이:ibid. 제16장 p.146
53 톨스토이:ibid. 제16장, pp.l53∼154
54 톨스토이:ibid. pp.60∼62, p.100, pp.163∼164, p.179 등
55 윤성범역, 乙西文化社刊p.31 p.97.
56 이러한 사상은 동양에서도 마찬가지어서≪書經≫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음은 주지의사실이다. 「天視自我民視, 天聽 自我民聽」(하늘이 보실 때는 우리 백성들을 통하여 보시며, 하늘이 들으실 때도 우리 백성들을 통하여 들으신다)≪書經≫「泰誓中」
57 선약성서≪요한복음≫ 17장 21절
58 k.Jaspers:ibid p.31 p.93
59 鄭昌範:錯覺과 게으름의 歷程(≪月刊文學)1號 新文學六○년 決算報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