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정지용의 문학적 생애와 그 비극성

이강기 2015. 9. 30. 16:50

정지용의 문학적 생애와 그 비극성   - 글 쓴이 모름


     정지용(鄭芝溶, 1902.5.15 - 1950.9.25)


1. 서 론

그동안 정지용 시인의 이름 가운데 글자를 감춘 채 소개되던 정지용의 문학세계가 1988년 정식으로 해금되면서 이름이 공개되고 새 시대의 도래에 발맞추어 전집과 선집이 다시 발간되어 문공부에 의해 정식으로 납본증을 받게 되면서 신문과 잡지, 심지어 방송에까지 정지용의 문학세계 혹은 그의 가족들과의 인터뷰 기사들이 소개되었다.

고교시절 국어시간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향수」를 소개받은 이래로 대학시절 헌책방 골목에서 발견한『정지용시집』을 위시한 그이 작품집과 산문집은 일찍부터 관심을 쏟게 만들었다. 여기에는 그이 문학적 생애와 그 비극성 특히 자진 월북이라고 오해받게 된 경위에 대하여 살펴 보고자 한다.


2. 문학적 생애

1)작품활동의 시기


정지용은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읍에서 좀 떨어진 구읍의 청석교 바로 옆 촌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영일 정씨 태국(泰國)을 아버지로 하동정씨 미하(美河)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때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으며 그이 친모 사이에는 외아들이었으나 둘째 부인 문화유씨 사이에 남매를 얻었으며 남동생은 일찍 죽고 지용이 무척 아낀 여동생 계용(桂溶)은 83년까지 논산에 생존해 있다가 작고했다.
[정지용. 1930년대 초 휘문고보 영어교사로 재직할때 찍은 앨범사진. ⓒ월간중앙 ]

그 당시 풍습에 따라 12살 때(1913) 동갑의 부인 송재숙과 영동군 심천면 초강리 처가에서 결혼하였다. 이 부인 사이에 3남 1녀가 태어났으며, 그 가운데 차남과 3남은 6.25사변중에 행방불명 되었고, 현재 장남 구관(求寬,1928.2.1)과 장녀 구원(求園,1934.11.17)만 생존해 있다. 1914년 3월 25일 옥천공립보통학교 4년제를 4회로 졸업하였으며, 1918년 4월 2일 사립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는데 1914년부터 1917년까지의 행적은 한문을 자수했다고 하나 확실하지가 않다.

1922년 3월에 휘문고보 4년제를 졸업하나, 학제개편으로 지용은 1년동안 머물면서 문우회 활동을 하며 <휘문> 창간호를 부장이 되어 기획.편집한다. 1927년 <조선지광>7월호에 발표된「풍랑몽」은 1922년 3월「마포 하류 현석리」에서 창작되었다 한다. 그러므로 창작연대별로 배열시킨다면「풍랑몽」을 처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지용의 작품가운데 창작연대와 장소가 기록된 것이 32편이고, 나머지 87편은 발표당시 기록하지 않고 있으며, 6편은 발표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의 문학적 생애의 시작이 바로 휘문고보 시절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특히 다음과 같은 회고기는 이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요람』은 내 나이 16.9세 때- 그 때 나는 법전 재학중이었다- 문예에 뜻을 둔 7.8인의 동지들로 더부러 만들어 내인 등사판 문에잡지이니 이 요람 이란 이름은 기억이 확실치는 아니하나, 그 때 동인의 한 사람인 정지용씨 발안으로 명명이었는 듯하다. - 중략- 이 8인의 동인은 그 때 모두 중등 또는 전문학교의 학생이었으니 정지용,박제, 김승영 3씨가 휘문고보에 김용준씨가 중앙고보에, 김경태씨가 일고에,이새기씨와 필자가 법전에 재학중이었다. 정지용 형의 시- 일부 인용된 것 생략(인용자) - 「향수」라 제한 작을 비롯해서 얼마전에 출판된「정지용시집」중에도「압천」,「카페 푸란스」,「슬픈 인상화」,「슬픈기차」,「풍랑몽」등은 전부「요람」에 등재하였던 작품이오. 더욱 그 시집 제3편의 동시 또는 민요풍의 시작은 반수 이상이 그 당시의 작이니

-박팔양,요람시대의 추억,<중앙>-

그런데 앞의 회고기는 시기상으로 모순이 있는 것 같이 생각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앞에 열거한 작품 가운데「압천」,「카페.푸란스」,「슬픈인상화」, 「슬픈기차」는 지용의 일본유학체험 내지 경도체험이 작품의 배경이 된 것이기 때문에 휘문고보 시절의 작품이라고는 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들이 <요람>지에 발표되었다고 하면 지용이 동지사대학에 재학중일 때에도 동지는 발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은 회고기의 후반부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지고 있다.

그러나 각기 동서로 헤어진 후에도 우리들은 잡지를 내어 버리지는 아니하였다. 꼼꼼하게 등사에 부칠 시간과 기분의 여유들이 없게 된지라 원고를 써가지고는 그대로 책을 매여 그야말로 원고회람을 하였다. 경성에서 경도로, 경도에서 동경으로 우리들의 원고뭉텅이는 쉬일 새없이 돌아다녔다.

이상과 같은 동사판 동인지 혹은 원고의 회람지는 현재 한권도 전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문헌적으로 확인할 길은 없으나 이 회고기로 보아 지용의 문학적 생애는 휘문고보 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작품활동은 동지사대학 재학시절에 시작되었으며 그의 작품이 공식적인 잡지에 활자화된 것도 경도유학생 잡지인 <학조>창간호(1926.6)가 처음이다. 그는 1929년 영문과를 졸업할 때까지 동지사대학의 교지<동지사문학>에 일어로 된 시를 발표하고, 북원백추(北原白秋)의 시지<근대풍경>에 역시 일어로 작품이 소개되기도 하면서 국내의 잡지 <新民>, <문예시대>, <조선시대>, <조선지광> 등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2) 해방이전의 작품활동

1929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뒤 그는 학비를 제공하여 준 모교 휘문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하게 된다. 이곳에서 그는 해방이 되어 이화여전 교수로 옮겨갈 때까지 주로 하급 학년의 영어만 가르치고 열심히 시작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1930년에은 <시문학>지 동인으로 참가하게 된다. 그러나 창간호(1930.3) 발표작 4편 가운데는 한편의 신작도 없다. 그것들은 모두 1926-7년 사이에 이미 다른 문예지에 발표된 작품이었다. 2호(1930.5)에는 신작 4편과 재발표작 2편을 발표하고 있으나, 본격적인 작품은 오히려 2편의 재발표작이다. 반면에 <조선지광>에는 그의 대표작인「유리창」(1930.1)을 발표하고 있다. <신생>,<동방평론> 등에 작품을 발표하는데 지금까지의 경향과는 달리 사물시가 많아지고 있다.

「유리창」,「촉불과 손」,「난초」,「달」,「조약돌」등의 제목을 열거하여 보아도 그러한 현상은 짐작할 수 있다. 1933년 6월 그가 편집에 간여하는 『카토릭청년』지가 창간된 이후에는 발표면이 <카토릭 청년>에 한정된다. 이때부터는 사물시적인 측면보다는 신앙을 관념으로 한 관념시 그것도 자신의 신앙을 진술하는 형태의 시가 많아지고, 간혹 여행체험이 바탕이 된 시가 보이고 있다.

이렇게 해서「정지용의 신작시집」(<문장>,3월 1호,1941.1)에서 발표된 10편을 제외하고는 한곳에도 발표하지 않는다. 이 시기에는 시작보다 여행체험이 바탕이 된 산문의 발표가 빈번하여지면서 상대적으로 시의 발표가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산문 지향성은 시집『백록담』에도 5부에 8편의 산문을 수록하고 있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시도 산문시가 10편이나 된다. 이러한 현상은 다음에 상론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의 대부분이 여행체험 그것도 장수산,금강산,한라산 등의 등산체험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점도 두드러진 특색이다. 이 때의 여행체험은 조선일보의 요청과 그 자신의 취미에서 생긴 것으로 시 뿐만 아니라 산문 특히 기행문으로 많이 발표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제2시집『백록담』(1941.9)에 집대성된다. 이 시기에 정지용은 명실상부하게 한국시단의 대표적 시인이 된다.

1939년 2월에 창간되어 1941년 4월 폐간될 때까지 <문장>지의 추천제도에 시부분의 단 한사람뿐인 추천위원으로서, 1945년 해방이후의 시단을 주도하는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박남수 등의 시인을 추천하여 시단에 데뷔시키고 동지에「시의 옹호」(1939.5), 「시와 발표」(1939.10),「시와 위의」(1939.11),「시의 언어」(1939.12) 등의 시론을 발표한다.

시집『백록담』을 발간한 이후부터 해방전까지의 발표작품은 일본의 전시체계 탓으로 한글로 된 발간물이 줄어 든 사정도 있겠지만 2편뿐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전시체제에 협력한 흔적이 있는「이토」,(국민문학,1942.9),이고 나머지는 「창」(춘추,12호,1943.1)이다.


3)해방직후의 활동과 납북 경위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행사시인 「그대들 돌아오시니」(해방기념시집,1945.12.12)와 「애국의 노래」(대조,12호,1946.1)를 발표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행사시이지 본격적인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크게 주목할 필요는 없다. 정지용은 행사시 2편을 발표하고 난 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3년동안 작품을 전혀 발표하지 않고 있다가 1950년부터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곡마단」(문예,1950.2)이라는 자유시와 6.25가 발발하던 달인 50년 6월호<문예>지에 극단적인 정형시「4.4조 5수」를 발표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말하자면 해방직후의 격동기의 와중에서 대학교수로 혹은 언론인으로 격무에 시달리다가 조용히 물러난 후 시작을 다시 시작한 셈이다.

정지용은 이 시기에 신작의 발표보다는 지금까지 발간한 시집의 재발간작업과 산문집 발간에 힘을 쏟았던 것이다.『정지용시집』의 재판은 1946년 5월 건설출판사에서 나왔고,『백록담』은 재판(백양당 동명출판사,1946.10)과 3판까지 나왔다. 『지용시선』(을유문화사,1946) 이 박두진의 편집으로 발간되었는데 여기에 수록된 25편의 시는 이미 해방전에 나온 두 시집에서 가려 뽑은 것들이었다.

산문집은 『지용문학독본』(박문출판사,1948)과『산문』(동지사,1949)두권으로 묶여지기도 했다. 한호로 종간되기는 했지만 <문장>(1948)을 속간하기도 하였다. 그의 신변도 해방과 더불어 많은 변화가 왔다. 16년 도안 재직하던 휘문고보를 사임하고 이화여자대학교로 옮겨(1945)문과과장으로 한국어와 영시, 나전어를 담당하였다. 1946년 8월 동교가 대학으로 개칭되면서 대학교수가 되어 1948년 2월 사임할 때까지 봉직하였으며, 서울대. 문리대 강사로 출강하여 시론 시간에 「詩經」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한편 창간된 <경향신문>(1946.10) 주간으로 취임하여 47년 8월까지 재임하였며, 1948년 2월 이대를 사임하고는 녹번리 초당에서 서예를 즐기면서 소일하다가 1950. 6. 25. 당시 납북되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는 피난하지 못하고 있다가 1950년 7월경 녹번리 초당을 찾아온 좌이계 제자들에 의하여 연행되어 납북되었다.서울의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정인택,김기림,박영희 등과 같이 수용되었다.그러다가 평양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이 사실은 납북되었다가 탈출한 계광순의 회고에 의하여 확실하게 밝혀져 있다. 그 당시 이광수,계광순 등 33인이 수감되었다가 평양감옥이 유엔군의 폭격에 의하여 폭격된 후 정지용은 행방불명된 것이다. 따라서 정지용은 납북된 것이라고 보아도 틀린 주장은 아니다.


3. 결 론

지금까지 1926년부터 1950년까지의 정지용의 문학적 생애를 살펴보았다. 해방이전에 활동한 시인 가운데 비교적 오랜기간인 25년 동안의 창작기간은 이미 앞에서 부분적으로 강조죄었지만, 지용의 작품활동의 여건 변화와 작품경향 변모에 따라 다음과 같이 몇시기로 나누어서 결론을 대신하기로 한다.

①1926-1928. 일본경도 유학시절, <학조>,<신민>,<조선지광>등에 동시의 정형성,자유시지향성.44편의 작품 발표
②1930-1935. <시문학> 동인활동과 <카톨릭 청년>편집관여, 정지용시집발간,<시문학>,<신생>,<동방평론>,<카톨릭 청년>등에 사물시와 신앙시의 자유시 지향성, 44편의 작품 발표
③1936-1943.<문장>지 추천위원 시절,<백록담>발간,<조광>,<문장>,<조선일보>등에 등산체험의 자유시와 산문시의 공존, 30편의 작품 발표.
④1945-1950. 해방직후의 격동기, 이대교수및 경향신문 주간, 시집재판및 산문집 발간,<문예>, 행사시및 자유시의 극단적 정형시의 공존, 8편의 작품발표.

각 시기별 작품의 의미구조와 중층적 특질에 대해서는 서론에서 밝힌 필자의 저서를 참조하면 자세하고 심도있게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해방직후의 유일한 본격적인 자유시「곡마단」(문예,1950.2)을 통하여 자신의 생애를 되돌아 보고 있으나 그의 남북으로 인하여 시작활동은 중단되고 만다. 특히 1988년까지 그는 6.25사변으로 인하여 희생된 순수시인임에도 불구하고 민족분단이라는 이데올로기의 멍에 때문에 근 40년만에 문학사에 복권된 것 자체가 엄청난 비극이라 하겠다.


4. 주요작품

◆시 : 고향/ 발열/ 산너머 저쪽/ 석류/ 오월소식/ 향수/ 장수산1/ 카페프란스/ 풍랑몽1/ 풍랑몽2/ 유리창(1-2)/ 겨울/ 귀로/ 꽃과 벗/ 난초/ 다시 해협/ 바다(1-9)/ 바람(1-2)/ 옥류동/ 비로봉/ 태극선.

◆산문: 가람시조집 발/ 귀리부인의 서평/ 관극소기/ 귀거래/ 그리스도 본 바듬/ 기차/ 꾀꼬리와 국화/ 달과 자유/ 날은 불리며 벗은/ 동백나무/ 가장시원한 이야기/별똥이 떨어진 곳/ 조지훈에게 보내는/ 영랑과 그의/ 옛글 새로운 정(상.하).  

내용출처 : [도서] 도서:한국현대시인 특성론(국학자료원,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