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유골, 그리고 죽은 시인들:
『황무지』에 나타난 정화 의식으로서의
시쓰기
- 이 정
호<서울대>
불건전한 농담이나 마찬가지로 신화적인 공포 영화는 야한 일을 담당한다. 공포
영화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극악한 본능에 의도적으로 호소한다. 공포 영화는 우리의 병적인 본능을 거리낌없이 풀어 놓은 것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비열한 본능의 발산이고, 가장 추잡한 환상의 실현이다. - 스티븐 킹, ?왜 우리는 공포 영화에 열광하는가?, 359쪽
The
mythic horror movie, like the sick joke, has a dirty job to do. It deliberately
appeals to all that is worst in us. It is morbidity unchained, our most base
instincts let free, our nastiest fantasies realized.
Stephen King, “Why We
Crave Horror Movies,” p. 359
1. 시작하는 말
20세기에 영어로 씌여진 가장
위대한 시라고 여겨지는 『황무지』가 1922년에 출간된 이후로, 이 시는 수없이 많은 비평가와 학자들의 비평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 시가
출간된 이후로 하나의 세기가 끝나고 또 하나의 세기가 시작된 지금에도 이 시에 대한 비평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을 보면, 하나의 문학 작품의
위대함은 그것에 대한 비평의 양에 비례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 싶다. 많은 사람들이 어느 특정한 작품에 대해 비평을 한다는 사실은 그 작품이
죽지 않고 독자들의 뇌리 속에 살아서 이들의 끊임없는 관심의 대상으로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황무지』가 아직도 많은 비평가의 연구 대상이
된다는 사실은 이 시의 생명력이 시간의 경과에 의해 소진되기는커녕 오히려 시간의 흐름에 의해 더욱더 풍성해지고 성장해감을 의미한다.
물론 이 시에 대한 비평이 어느 하나의 일정한 방향으로 굳어진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신비평이 문학 비평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때에는 이 시는 신비평가들의 집중적인 연구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신비평의 물결이 한물 지나고 난 후에도 이 시에 대한 비평이 끝난 것은
아니다. 신비평 이후에 나타난 포스트구조주의 비평, 해체 비평, 포스트모더니즘 비평, 그리고 라캉의 정신분석 이론에 기초한 비평이론 등의 다양한
비평적 접근법들은 오히려 이 시를 새로 읽는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함으로써 이 시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어 주고 있다.
이 시가
이처럼 여러 가지의 다양한 비평에 의해 접근이 가능한 것은 우선은 이 시의 난해성에 그 원인이 있다. 이같은 난해성은 엘리엇이 쓴 이 시의
초고가 파운드의 손은 거치면서 거의 반으로 분량의 줄어 출판되기에 이름으로써, 이 시의 초고에서 보이던 서사 구조(narrative
structure)가 무너지게 된 데에도 큰 원인이 있다. 이처럼 서사 구조가 무너지면서 이 시에서는 이야기의 흐름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된다. 그러나 이 시의 이같은 난해성은 이 시가 하나의 단일한 접근에 의해 읽기가 가능한 “즐거움의 텍스트”(text of
pleasure)가 아니라 독자의 독해 한계를 시험하는 “희열의 텍스트”(text of bliss, Barthes 14)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시는 단일한 읽기 전략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잡다한 요소로 구성돼 있다. 이에 대해 자인(Manju Jain)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 가지 다양한 체계와 장르 그리고 기법에서 가져온 요소들이 이 시에는 존재하지만, 어느 하나의 해석 방법만이 이 시의
구조를 푸는 확실한 열쇠가 되지 못한다. 『황무지』는 유일적인 읽기를 거부한다. 유일적인 원칙으로 [이 시의] 구조를 이해하려고 할 경우, 이는
하나의 원칙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찬가지로 중요한 이 시의 구성 요소들을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된다. 다른 말로 한다면,
이렇게 할 경우 이 시는 어느 하나의 이론의 틀에 맞춰져 이 시가 가지고 있는 복잡성과 전거(典據)의 범위가 제약될 수 도
있다.
Elements from different systems, genres and techniques exist in the
poem, but no single system of interpretation by itself can be used as the
definite key to its structure. The Waste Land resists such unitary readings. To
impose a unitary principle of struture would be to exclude components of the
poem which may be equally inportant but which do not necessarily fit into a
single scheme. Or, conversely, the poem would be forced into the straitjacked of
a theory and its complexity and range of reference diminished. (Jain
133)
이 시가 이처럼 다양한 요소로 구성돼 있으며, 또한 여러 가지의 접근법에 열려 있는 텍스트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한 편으로,
우리는 또한 이 시의 텍스트가 아주 괴기스런 괴담(a very uncanny horror story)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는 시체와 유골 그리고 산 송장으로 덮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는 이처럼 우리가 보통 읽는 다른 시들과는 달리 기괴한 분위기로 충만해
있을뿐만 아니라 여기서는 기괴한 일 또한 일어난다. 파울러(Fowler)는 이 시에서 이같이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에 주목하면서, 이
시를 “안내인이 달린 여러 가지 공포를 자아내는 방에로의 여행”(a guided tour down into a gallery of
phantasmagoridal horrors, Fowler 128)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시가 이처럼 공포를 자아내는 시가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황무지』에서 엘리엇은 그가 세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뇌를 공포의 형태로 드러난다. [이같은 공포는] 대단히
직접적이고 아주 진지하며 어떤 경우에는 괴기로운 정도로 고딕적이다.
In The Waste Land, Eliot's distress
with the world is cast in terms of a horror unforgettably immediate, hopelessly
sincere, and sometimes gothic to the point of freakness. (Fowler 128)
이같은
파울러의 말을 뒷받침하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읽는 이 시에 나오는 제사(題詞, epigraph)에 관한 것이다. 이
제사는 처음에 엘리엇이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엘리엇은 조세프 콘래드(Joseph Conrad)가 쓴 『암흑의 핵심』(Heart of
Darkness, 1899)의 마지막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이 시의 제사로 쓰려고 생각하고 있었다(Davidson
121).
완벽한 앎이 이루어지는 그 지고(至高)한 순간에 그는 욕망, 유혹 및 굴종으로 점철된 그의 일생을 세세하게 되살아보고
있는 것이었을까? 그는 어떤 이미지, 어떤 비전을 향해 속삭이듯 외치고 있었어. 겨우 숨결에 불과했을 정도의 낮은 목소기로 두 번 외치고
있었어.
<무서워라! 무서워라!> (이상옥 157-158)
Did he live his life again in
every detail of desire, temptation, and surrender during that supreme moment of
complete knowledge? He cried in a whisper at some image, at some vision, --- he
cied out twice, a cry that was no more than a breath ---
“The horror! the
horror!” (Conrad 85)
그러나 파운드는 엘리엇의 이런 생각에 반대하면서, 콘래드의 소설에 나오는 이 구절은 이 시의
제사로 쓰기에는 “비중이 있지”(weighty, Davidson 121)않다는 이유로 이 제사를 다른 것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엘리엇의 생각은 달랐다. 엘리엇은 콘래드의 작품에서 인용한 이 구절은 이 시의 제사로 쓰기에는 “가장 적당”(the most
appropriate, Davidson 121)하고 또한 이 시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elucidative, Davidson 121)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엘리엇은 파운드의 의견을 존중하여 결국에는 지금 우리가 보는 쿠마에의 무녀가 나오는 페트로니우스(Petronius)의
『사티리콘』(Satyricon)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여 이를 이 시의 제사로 사용하게 된다. 이러는 과정에서 이 시에 나오는 제사는 고전 작품의
진지성을 획득했을지는 몰라도, 이 시의 독자는 콘래드의 작품에 나오는 커츠(Kurtz)가 자신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해 느끼는 공포가 보여주는
“감정적인 어조”(emotional tone, Davidson 122)를 읽을 수 없게 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따라서 엘리엇이 처음에
사용하려고 했던 제사에 나오는 공포감은 우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이 시에서 유의해야 할 또 다른 것은 이 시에
암유(allusion)의 형태로 나오는 수많은 죽은 시인들의 목소리이다. 이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므로, 이들의 목소리는 유령의 목소리라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이 시에 나오는 주검들과 죽은 시인들의 목소리가 이처럼 되살아나는 것에 유의하면서, 이같은 주검과 죽은 시인들이 목소리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 보려고 한다. 이같은 필자의 작업은 결국 엘리엇에게 있어 시쓰기란 무엇인가를 살피는 작업이 될
것이다.
2. 히스테리적 텍스트(hysterical text)로서의 『황무지』
엘리엇의 평론과
작품에서 죽은 자들과 자주 만나게 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죽은 자들의 시체로 덮여 있고 그의 시는 죽은 자들의 목소리의
메아리 방(echo chamber)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말이 아니다. 그의 대표적인 평론인 「전통과 개인의 재능」에서 엘리엇은 훌륭한
시인은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선배 시인, 즉 죽은 시인들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임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작품의 가장 훌륭한 부분뿐만 아니라 가장 개성적인 부분까지도 죽은 시인들, 즉 그의 선배 시인들의 자신들의
불후성(不朽性)을 아주 열렬하게 드러낸 부분이다.
[N]ot only the best, but the most individual
part of his work may be those in which the dead poets, his ancestors, assert
their immortality most vigorously. (SE 14)
이같은 그의 말은 그의 문학적 시체
애호증(literary necrophilia, Ellman 189)을 아주 잘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단지 문학 이론의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작품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의 작품에 나오는 dead라는 단어의 빈도수는 76회이고, deadly는
3회이다. 또한 death는 124회, death's는 9회, death-bringers는 2회, deaths는 3회 나온다(Dawson
223-227). 따라서 위에서 인용한 엘리엇의 작품에 나오는 죽음과 관련된 단어의 빈도수를 모두 합치면 217회나 된다. 이는 대단히 높은
빈도수로서 just의 빈도수와 똑같은 숫자이다. 엘리엇이 그의 작품에서 죽음과 관련된 단어를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인 just와 같은 빈도로
자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통계 수치는 우리로 하여금 엘리엇이 왜 죽음에 관한 단어를 이처럼 많이 쓰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러한 우리의 물음에 대답하는 데 있어 『황무지』는 아주 적절한 예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죽음을 주제로 한 시로서 죽음을 나타내는
시체와 유골 그리고 산송장의 이미지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를 ‘죽음을 기억하게 하는 시’(a memento mori
poem)라고 불러도 과언은 아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 시에서 얼마나 자주 죽음의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나오며, 또한 왜 이처럼 자주
그리고 반복적으로 나오는지를 살펴 볼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이 시가 삶 속의 죽음을 기억하게 하는 시라는 사실은 이 시의 처음에 나오는
제사(題詞, epigraph)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제사는 1세기 로마 네로 황제의 궁정 시인이었던 페트로니우스(Petronius)가
쓴 『사티리콘』(Satyricon)에 나오는 트리말키오(Trimalchio)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쿠마에(Cumae)의 무녀(sybil)는
희랍 신화에 나오는 무녀들 중에서도 그 예언이 적중하기로 가장 유명했다. 그녀는 아폴로 신에 의해 자신의 손 안에 든 먼지 수 만큼이나 많은
동안의 햇수를 살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거기에 상응하는 젊음을 달라는 요청을 잊었기 때문에 늙어 가면서 쪼그러 들기만 한다.
이렇게하여 새장에 갇혀 있는 그녀는 동네 개구장이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아이들은 그녀에게 “무녀야, 무얼 원하니?”하고 물으면, 그녀는 “난
죽고 싶어”라고 대답한다.
이같은 무녀의 말은 단지 시에 나오는 인물의 말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엘리엇 자신의 심경을 대신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무녀를 의미하는 단어인 sybil은 엘리엇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비비언(Vivien)과 관계가 있다. 비비언은
시빌라(Sibylla)라는 필명(筆名)으로 엘리엇이 편집인으로 있던 『크라이테리언』(The Criterion)지(誌)에 몇 편의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Southam 84). 엘리엇과 비비언과의 결혼 생활은 이 당시 아주 힘든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무녀가 말하는 “나는 죽고
싶어”라는 말은 시빌라라는 필명을 가진 비비언의 심경일 수 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말은 오히려 엘리엇에게 더 잘 어울리는 말이기 때문에 여러
번의 치환(displacement) 과정을 거쳐 엘리엇의 말이 된다. 이같은 추측의 근거는 이 시의 주제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여러 비평가들은 이 시의 주제를 “순례(巡禮), 동성애적인 사랑 노래, 성배(聖杯) 이야기, 또는 1차 세계 대전의
살륙(殺戮)으로 붕괴된 서양 문화에 대한 애가(哀歌)”(a pilgrimage, a homosexual love song, a Grail
romance, or an elegy to Western culture devastated by the carnage of the First
World War, Ellman 179) 등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엘리엇 자신은 이같은 평자들의 주장을 일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에게 있어 이 시는 단지 삶에 대한 하찮은 불평을 토로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이 시는 오직 [이러한] 불만을 운율에
맞춰 적어 본 것일 뿐이다.
To me it was only the relief of a personal and wholly
insignificant grouse against life; it is just a piece of rhythmical grumbling.
(WL Fac 1)
엘리엇이 이 시를 쓰던 1921년의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이같은 그의 말은 아주 적절한 설명이 된다. 그는 당시
과로, 경제적인 문제, 미국에 있는 부모와의 갈등, 성격 차이가 심한 비비언과의 결혼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 등이 겹쳐 신경 쇠약 증상을 보이고
있었다. 이 시는 그가 이같은 신경 쇠약 때문에 마르부르크(Marburg)와 스위스의 로잔(Lausanne)에서 요양하는 동안에
씌여졌다(Pinkney 94). 엘리럿이 이같은 극심한 고뇌 속에서 쓴 시가 1차 세계 대전을 겪은 독자들이 보기에는 전쟁의 참화에 대한 시로
읽힌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은 아니다. 엘리엇의 개인적인 고통이 독자들에게는 세상의 고뇌를 보여 주는 시로 읽힐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이 시의 시작 부분에서부터 나타난다. 이 부분은 죽은 시인인 초서(Chaucer)의 시를
패러디(parody)하여 그가 노래한 소생의 봄을 죽음의 봄으로 묘사함으로써 죽음이 이 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임을 분명히
한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가느다란 생명을 키웠다.
April
is the cruellest month, breeding
Lilacs out of the dead land,
mixing
Memory and desire, 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
Winter
kept us warm, covering
Earth in forgetful snow, feeding
A little life with
dried tubers. (CPP 61)
이같은 이 시의 시작 부분은 마치 무성 영화 시대의 변사의 설명처럼 시작된다. 이 부분은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의 처음에 나오는 「전체 서시」(“General Prologue”)를 암유(allusion)한다. 그러나 초서가
영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울 정도로 영문학을 일으켜 세운 인물이라는 사실과 그가 쓴 「전체 서시」가 봄을 맞아 순례를 떠나는 순례자들의 활기에
넘치는 분위기로 시작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시의 처음은 “생명을 부정하는 목소리”(life-denying voice, Davidson
69)로 시작되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에 나오는 “죽은 땅”과 “잘 잊게 해주는 눈”이라는 묘사는 성장과 변화, 그리고
봄비가 가져오는 소생과는 거리가 먼 겨울잠으로의 향수를 불러 일으킴으로써, 단지 “정체에 대한 욕망”(a desire for stasis,
Davidson 69)만이 유일한 욕망임을 드러낸다. 정체에 대한 욕망은 곧 죽음에 대한 욕망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 시는 생명과
번식에 대한 동경이 아닌 정체와 죽음에 대한 욕망을 노래한 시임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이 시의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엘리엇은 초서를 이 시에서
살려 내기보다는 그의 죽은 시체를 겨울의 눈 속에 묻어 두고 싶어한다. 따라서 4월은 초서의 기억을 방부제인 겨울 잠 속에 묻어 두기보다는
시체로서의 초서의 기억을 끌어내어 이를 부패시키기 때문에 가장 잔인한 달이 된다.
이 시의 시작 부분에서 우리는 또한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의 충동(death drive)과 삶의 충동(life drive)의 대비를 볼 수 있다. 이같은 대비는 “추억과 욕망”의 대비에 의해
가장 잘 드러난다. 추억은 과거 지향적이기 때문에 죽음의 충동을 나타내는 반면에 욕망은 미래 지향적이기 때문에 삶의 충동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융합될 수 없다는 점에 문제점이 있다. 우선 과거 지향적인 죽음의 충동을 보기로 하자. 이 시 텍스트는 주로 죽은 시인들의 시구절의
인용으로 돼 있다는 측면에서 이 시는 죽음의 충동을 잘 드러낸다. 이 시가 이처럼 죽은 시인들의 시구절을 몽타쥬(montage)한 것은 또한
엘리엇이 이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가 이처럼 죽은 시인들을 계속해서 인용하는 것은 그의 반복 강박증(repetition
compulsion, Wiederholungszwang)을 드러내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그의 『쾌락 원리를 넘어서』(Beyond the
Pleasure Principle)에서 이같은 반복 강박증을 죽음의 충동(Todesbrieb)과 밀접하게 연관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같은 반복
강박증은 잊어야할 과거를 잊지 못하는 데에 그 원인이 있다. 이 시에서 눈을 가리켜 “잘 잊게 해주는 눈”(forgetful snow)라고 말한
것은 엘리엇 자신이 얼마나 잊지 못할 기억의 포로가 돼 있는지를 아주 잘 보여준다. 눈은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냉동고 역할을 하기
때문에 잘 잊게 해 준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단지 이같이 차가운 눈에 익숙해짐으로써 눈이 따뜻한 것 같은 착각을 갖게 될 뿐이다. 그러나 이같은
착각은 단지 착각일뿐 현실은 아니다. 오히려 엘리엇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그가 기억을 잊지 않고저 하는 강한 의욕이 있음을
투사(projection)한 것일 뿐이다. 과거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것은 히스테리 환자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는 사실을 유의한다면, 이
시의 필자인 엘리엇은 이 시에서 자신의 히스테리 증상을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황무지』는 “가장 히스테리적인
텍스트”(the most hysterical of texts, Ellman 179)라고 말할 수 있다. 더구나 기억은 과거의
현전(presence)이 시간의 흐름에 의해 부재(absence)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부재를 기억에 의해
재현전화(representation)시키려는 노력이므로, 이는 히스테리 환자의 증상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히스테리 환자는 기억에 대해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는 과거를 되도록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과거의
기억이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동시에 이를 잊으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이같은 기억을 억압하여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으려고
한다. 이 시에서 이런 현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위에서 본 “잘 잊게 해주는 눈”이라는 표현이다. 눈은 과거의 기억을 냉동시키기 때문에
기억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냉동돼 있기 때문에 활발하게 기억되는 것도 또한 아니다. 그러나 엘리엇은 눈이 과거를 잘 잊게 해
준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이같은 과거의 기억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을 눈에 투사한 것일뿐이다. 그는 과거의 기억이 언제나 잊혀지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이같이 기억된 과거의 기억이 그를 못살게 굴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이 소멸되기를 열렬히 욕망한다. 따라서 과거는 억압된 기억으로
무의식 속에 남아 있게 된다. 그러나 이처럼 무의식 속에 억압된 기억은 언제까지나 무의식 속에만 남아 있을 수는 없다. 이렇게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묻혀 있는 기억은 증상의 형태로 다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증상의 형태로 엘리엇에게 나타난 기억이 바로 『황무지』의 내용물이
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엘리엇이 이 시를 가리켜 단지 인생에 대한 불만을 개인적으로 토로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한 데에 있다.
이 경우 인생에 대한 불만은 무의식 속에 억압된 기억의 형태로 남게 된다. 이 시가 해석을 거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같이 무의식 속에 억압된
형태로 남아 있는 기억들이 증상으로 나타나는 과정에서 본래의 기억이 치환(displacement)과 압축(condensation) 과정을 거치는
사이에 본래의 형태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일그러진 형태의
유령들(ghosts)은 바로 엘리엇의 무의식 속에 억압되어 존재하던 기억들로서 이러한 기억들이 증상으로 나타날 때 이들은 강박증적
의식(compulsive ritual)의 형태를 취하면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강박증적 의식은 무의식 속에 억압되었던 내용들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return of the repressed)으로 이들은 이제껏 의식(consciousness)의 통제밖에 존재하던 것들이다. 따라서 강박증적
의식은 그가 말하는 악귀 쫓아내기(exorcism of the demon)의 형식을 취한다. 엘리엇은 악귀에 들려 있는 존재가 시인이며, 시는
이런 악마를 쫒아내는 일종의 주문이라고 「시의 세 가지 목소리」(“The Three Voices of Poetry”)에서 밝히고
있다.
그[시인]에게는 귀신이 붙어 있다. 이 귀신은 그것이 처음 나타날 때 얼굴도 이름도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그는 이에 대해
저항할 힘이 없다. 그리고 말, 즉 그가 쓰는 시는 이 귀신을 쫓아 내기 위한 일종의 주문이다.
[H]e is haunted by
a demon, a demon against which he feels powerless, because in its manifestation
it has no face, no name, nothing; and the words, the poem he makes, are a kind
of form of exorcism of this demon. (OPP 107)
시는 이처럼 귀신 들린 시인이 얼굴도 이름도 없는
자신에게 붙어 있는 악 귀를 몰아내어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하는 주문(呪文)이라고 엘리엇은 말한다. 이같은 그의 말은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자신에게 붙어 있는 악령이 이처럼 이름도 없고 얼굴도 없는 이유는 그 실체가 무의식 속에 가라 앉은 억압된 기억이기 때문이다. 무의식
속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기억은 의식 위로 떠올릴 수 없으므로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다. 이같이 억압된 기억은 또한
악마처럼 보이는데, 이를 글로 써 시로 만들 수 있는 것은 히스테리 환자의 억압된 기억이 시의 형태로 씌여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신체
언어(body language, 황익근 83)로 전환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황무지』에서 엘리엇의 억압된 기억들이 여러 가지 히스테리
증상, 즉 신체 언어로 전환되어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다.
기억이 과거로 향한 정체 지향성 때문에 죽음의 본능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욕망은 소원 성취 지향적이며 미래 지향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엘리엇에게 있어서 기억이 소망스럽지 못한 만큼이나 욕망 또한 소망스러운
것이 못 된다. 라캉(Lacan)에 따르면 “근본적인 욕망은 원초적인 대타자(大他者)인 어머니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이다”(The
fundamental desire is the incestuous desire for the mother, the primordial
Other, Evans 38). 그러나 이같은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같은 욕망은 남성의 경우 어머니 이외의
다른 여성에 대한 성적 충동으로 전이된다. 그러나 엘리엇에게 있어서 어머니에 대한 욕망에서 다른 여성에 대한 이성애적
욕망(heterosexual desire)에로의 전이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여성에 대한 성적 욕망을
단지 더럽고 타기(唾棄)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으며, 결코 동경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이같은 사실은 그가 쓴 「단테」(“Dante”)에서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남녀간의 사랑은 (남자와 남자간의 애정도 마찬가지이지만) 그것이 좀 더 높은 사랑에 의해서만 설명되고
합리화될 수 있을뿐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동물의 교미에 불과하다.
[T]he love of man and woman
(or for that matter of man and man) is only explained and made reasonable by the
higher love, or else is simply the coupling of animals. (SE 274)
엘리엇의 이같은
여성 혐오 내지는 성기피증(性忌避症)은 그가 성을 불결하게 보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며, 이같은 그의 여성 혐오 내지는 성 혐오증은 그가
동성애자(homosexual)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러 일으켰다. 이같은 의문은 그의 시에 많이 나오는 불모(sterility)와 기계적인
음욕(mechanical lust)의 이미지에 의해 더욱 증폭되었다(Ackroyd 310). 이런 대표적인 예는 「불의 설교」에 나으는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타이피스트와 여드름 투성이의 중소 가옥 중개소 사원(small house agent's clerk) 사이에 벌어지는 성접촉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 남자는 서둘러 전희(foreplay)를 하는데도, 그녀는 단지 “지루하고 피로할”(bored and tired) 뿐이다.
이들의 동물적인 교접은 다음과 같은 묘사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
얼굴을 붉히며 결심한 그는 단숨에 달려든다.
더듬는 두 손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는다.
잘난 체하는 그는 반응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Flushed and decided, he
assaults at once,
Exploring hands encounter no defence;
His vanity
requires no response. (CPP 68)
여기 나오는 “그는 단숨에 달려든다” 같은 표현은 남녀간의 성행위가 사랑의
표현이기 보다는 단지 남성 주도의 폭력에 의해 행해지는 물리적인 행위로,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이는 단지 수동적이고 참고 견뎌야 하는 하나의
무감동한 의식이며, “기계적이고 따분한”(mechanical and dull, Coote 82)작업임을 보여 준다. 엘리엇이 동성애자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그가 숨기는 게 많은(secretive)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미 1925년에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한 공식적인
평전(biography)을 쓰지 말 것을 선언했다는 사실에 의해 더욱 증폭된다. 이는 그가 자신의 시에서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자주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로 미루어 볼 때 그가 남에게 탄로날 경우 아주 곤혹스럽고 불미스러운 일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강하게 유발한다. 따라서
그의 생애에 대한 공식적인 전기가 출간될 경우 그가 감추고 있던 비밀스런 동성애 행각도 드러날까봐 겁이 나서 공식적인 전기를 쓰지 말도록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게 된다. 그러나 이같은 추측은 단지 추측의 차원에만 머무를뿐 사실은 아니라고 애크로이드는 주장한다(Ackroyd
310). 엘리엇이 동성애자인가 아닌가의 여부는 차치하고 라도, 그가 쓴 『황무지』는 그의 “기억과 욕망”의 지도이며, 이러한 기억과 욕망은 이
시를 “가장 히스테리적인 텍스트”로 만들고 있다.
3. 죽은 시인의 시체와 유골로 지어진 유령의 집에서 푸닥거리하는
무당으로서의 시인
『황무지』를 이처럼 히스테리적인 텍스트로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이 시에 수없이 널려 있는 시체와
유골, 그리고 산송장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이미지는 이같은 주검의 이미지들이다. 주검의 이미지가 나오는 대표적인 구절을 몇 개
보기로 하자.
작년 당신이 뜰에 심은 시체에 싹이 트기 시작했소?
올해엔 [그 시체에서] 꽃이 필까요?
That
corpse you planted last year in your garden,
Has it begun to sprout? Will it
bloom this year? (CPP 63)
엘리엇이 아무리 형이상학적 기상의 기법을 원용하여 자신의 시를 썼다 하더라도 이처럼
직접적으로 시체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은 독자에게는 대단히 경악스러운 일이어서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일이다. 이 구절에 대한 설명은 대개의 경우
고대 풍요제에서 신의 형상을 땅에 묻었는데, 이런 풍요제의 습관이 정원 가꾸기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설명은 정원 가꾸기라는 대단히
여유로운 취미 생활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에는 설득력이 있을지는 몰라도, 이 시에서 처럼 시체의 이미지가 섬뜩할 정도로 나올 경우에는 설득력이
크게 떨어진다. 그렇다면 이처럼 드러내 놓고 시체의 이미지가 나오는 경우에는 어떤 설명이 가능할까? 이 시에서처럼 주검의 이미지가 자주 나오는
것은 엘리엇이 죽음에 대해 억압된 욕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같은 주검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유골의 이미지가 나오는 것은 또한
충격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죽은 자들이 자기 뼈를 잃은
쥐들의 골목에 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I think
we are in rats' alley
Where the dead men lost their bones. (CPP 65)
여기서는 죽은 사람들의 이미지가 나오며, 또한 이들 죽은 사람들의 뼈는 적법하게 장사지내져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유일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해 장례를 지낸다는 사실과, 또한 이러한 장례가 단지 죽은 이들을 땅에 그저 묻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예식에 의해 장례를 지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처럼 적법한 예식에 따라 제대로 장례가 치뤄지지 않은 죽은 이들은 제대로 죽은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처럼 죽은 이들의 뼈가 우리에게는 더럽고 추하며 야비한 동물로 여겨지는 쥐들의 골목에 방치돼 있다는 사실은 이 유골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장례를 치뤄줘야 할 죽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몫을 충분히 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장례를 제대로 치루는 것이
죽고 사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은 고대 그리스의 희곡 작가인 소포클레스(Sophocles)가 쓴
『안티고네』(Antigone)에서도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 왕의 두 아들인 에티오클레스(Eteocles)와 폴리네이체스(Polyneices)는
형제간에 서로 전투를 하여 폴리네이체스가 사살된다. 그러나 크레온은 그에게 적법한 장례를 치루지 못하게 엄명을 내릴 뿐만 아니라, 이를 어기는
어떠한 사람도 사형에 처할 것임을 공포한다. 그러나 폴리네이체스의 여동생인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포고를 어기고 오빠의 시체를 몰래 가져다가
매장한다. 이를 안 크레온이 안티고네를 사형에 처하려 하지만 안티고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에서 보듯이 적법한 장례를 치루는 것은 죽은
자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인 셈이다. 그러나 이처럼 죽은 사람의 뼈가 쥐들이 다니는 길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의 비인도적이고 비도덕적인 측면을 아주 강하게 부각함으로써 인간이 다른 인간의 죽음에 대해 동물 이하의 행동을 하고 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예는 유골이 나오는 또 다른 구절에서도 나타난다.
허나 등뒤의 일진광풍 속에서 나는
듣는다
유골들의 덜컹거리는 소리와 입이 찢어지도록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를.
But at my back in a cold
blast I hear
The rattle of the bones, and chuckle spread from ear to ear.
(CPP 67)
이 구절에서 엘리엇은 앤드류 마블(Andrew Marvel, 1621-1678)이 쓴 「수줍은 애인에게」(“To
His Coy Mistress”)에 나오는 싯귀를 패러디하여 유골들이 음산하고 불길한 바람이 부는 곳에서 덜컹거리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입이 찢어지도록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를 내는 인물은 저승 사자이거나 염라 대왕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저승 사자가 지나 간 뒤에는
단지 시체와 유골만이 아무렇게나 어지럽게 널려 있게 마련이다. 이 시에서는 유골들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내는 묘사뿐만 아니라 발가벗은 시체들도
쥐들의 먹이가 되는 장면 묘사도 나온다. 시체와 쥐의 이미지는 유골과 쥐의 이미지나 마찬가지로 인간의 죽음이 얼마나 덧없고 가치없는 것이며,
또한 살아 남은 자들이 죽은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차리지 않는 현대인의 땅에 떨어진 윤리 의식을 드러낸다.
흰 시체들이
발가벗고 낮고 습기찬 땅속에
유골들은 조그맣고 낮고 습기찬 땅 위에 버려져
유골들은 조그맣고 낮고 메마른 다락방에 버려져
해마다
쥐의 발에만 채어 덜그럭 거렸다.
White bodies naked on the low damp ground
And bones
cast in a little low damp ground
And bones cast in a little low dry garret,
Rattled by the rat's foot only, year to year. (CPP 67)
이 인용에서 우리는 두
번째 줄과 세 번째 줄이 거의 똑같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이러한 광경이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임을 암시한다. 더구나
이같은 유골들이 음습한 땅 위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다는 사실은 묘지가 양지바르고 따뜻한 곳에 자리해야 한다는 우리의 관습적인 생각을 뒤엎는
것으로 죽은 자에 대한 예우가 땅에 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죽은 자에 대한 예우가 땅에 떨어져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살아 있는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이 극에 달해 있음을 암시한다.
이제 우리의 눈을 지상으로부터 바다로 돌려 보자. 우리는 죽은지 2주가 지난 페니키아
사람 플레버스의 유골이 바닷물 속에서 부패돼 가고 있음을 본다.
페니키아 사람 플레버스는 죽은 지 2주일
갈매기 울음 소리도
깊은 바다 물결도
이익도 손실도 잊었다.
바다 밑의 조류가
소근대며 그의 유골을 추렸다.
Phlebas the
Phoenician, a fortnight dead,
Forgot the cry of gulls, and deep sea
swell
And the profit and loss.
A current under sea
Picked his bones in
whispers. (CPP 71)
성경에는 신이 우리 인간 개개인의 머리카락의 수까지도 알고 있다고 적혀 있다. 그렇다면 장례가
이처럼 적법하게 치뤄지지 않은 것은 신의 이같은 배려가 미치지 못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의 삶은 신의 계획으로부터 일탈된 아무 의미 없는
것임을 드러낸다. 이같은 시체 유기 현상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바다 속에서 뿐만 아니라, 시체를 적법한 의식을 갖춰 안장(安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교회 묘지에서까지도 일어난다는 믿지 못할 사실에 우리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희미한 달빛 속에서 풀들이 노래하고
있다
무너진 무덤들 너머 성당 주위에서.
In the faint moonlight, the grass is
singing
Over tumbled graves, about the chapel. (CPP 73)
그러나 엘리엇은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마른 유골들은 사람을 해칠 수는 없다.
Dry bones can harm no one.
(CPP 74)
모두 433줄로 돼 있는 이 시가 이처럼 많은 그리고 끔찍한 시체와 유골의 이미지로 짜여져 있다는 사실은 이 시가
죽음에 대한 반복 강박증(repetition compulsion)을 신경증적으로(neurotically) 드러내고 있음을
뜻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시에 나타난 죽음의 이미지들을 보아 왔다. 이같은 죽음의 이미지는 죽은 시체와 유골 등 죽고 난 후에
생기는 현상들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이같은 죽고 난 후에 나타나는 것들만을 죽음의 이미지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도 산송장의 이미지로 처리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이 시에 서려 있는 죽음의 기운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가늠할 수 있다. 엘리엇은 런던에
사는 사람들을 산송장(zombie)의 이미지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한 떼의 사람들이 런던 브리지 위로
흘러갔다.
그처럼 많은 사람들을 죽음이 망쳤다고 나는 생각도 못했다.
이따금 짧은 한숨들을 내쉬며
각자 발치만
내려보면서.
A crowd flowed over London Bridge, so many
I had not thought
death had undone so many.
Sighs, short and infrequent, were exhaled,
And
each man fixed his eyes before his feet. (CPP 62)
이들이 이미 죽은 사람들이라는 근거는 숨을
내쉰다는 뜻으로 쓰인 exhale이라는 단어이다. exhale은 숨을 내쉰다는 뜻도 있지만 숨을 거둔다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숨을
거둔다는 의미를 가진 expire와 동의어이다. 그렇더면 이들은 이미 숨을 거둔 사람들, 즉, 죽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는 것은 산송장이 걸어가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들은 또한 무리로 묘사돼 있기 때문에 이들 각자는 개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집단으로 무리를 지어 런던 브리지를 건너가고 있는 이들은 산송장들이 행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당시 공해로 인해 런던의 공기는 극도로 오염돼
있었다는 사실은 런던이 산송장들이 거주하는 거대한 죽음의 도시임을 실감케 한다.
그러나 이같이 무리를 지어 걸어 다니는 산송장들이
개성이 없는 것에 비하여, 우리는 개성을 가진 산송장이 예외적으로 묘사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개성있는 산송장은 다름 아닌
릴(Lil)이다. 그녀는 31세이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이미 늙다리로 보인다. 그녀가 이처럼 늙어 보이는 이유는 그녀가 젊은 나이에 이미
아이를 다섯이나 낳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약을 먹고 자신의 아이를 유산시킨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녀는 동시에 시체를 만든 살인자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녀는 또한 다섯 번째 아이인 조지(George)를 낳을 때 죽을 뻔하기도 했으니 그녀에게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셈이다. 그녀는 살아 있는 애를 낳기도 했지만 죽은 아이를 유산했으니 시체를 낳은 사람이며, 또한 조지를 낳을 때 죽을 뻔했으니 그녀는 산송장에
아주 근접한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 위에 드리운 이같이 짙은 죽음의 그림자는 그녀가 친구를 만나 대화하던 술집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이들이 서로 작별 인사를 나누는 장면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들은 서로에게 이렇게 작별 인사를 한다.
안녕, 부인님들, 안녕,
아름다운 부인님들, 안녕 안녕.
Good night, ladies, good night, sweet ladies, good
night, good night.(CPP 66)
이 부분은 오필리아(Ophelia)가 물에 빠져 죽기 전에 하는 인사말로,『햄릿』의
4막 5장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같은 릴의 말에 죽음의 그림자가 얼기설기 얽혀 있음을 알 수 있다. 『햄릿』을 쓴 셰익스피어는 이미
죽어 있는 작가이다. 따라서 그는 혼백(魂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쓴 말을 릴이 인용하여 다시 반복하여 말하고 있으니, 릴을 죽은
사람의 말을 되뇌는 것으로 이는 그녀 자신이 곧 죽은 사람, 즉 산송장임을 드러낸다. 더구나 『햄릿』이라는 고전에 나오는 오필리아가 한 말을
런던이라는 현대 도시에 사는 무명의 여인인 릴이 다시 반복함으로써, 고전의 의미를 살리기보다는 고전이 가지고 있는 신성(神聖)함에 먹칠을 할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한갓 “낙서”(graffiti, Ellman 191)로 전락시키고 만다. 더구나 오필리어의 마지막 인사를 릴의 입을
통해 다시 반복하게 함으로써 엘리엇은 셰익스피어의 망령과 동시에 오필리어의 망령을 되살려 냄으로써 릴도 이들과 같은 망령임을 드러낸다.
망령으로서의 삶은 그러므로 산송장으로서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가 이처럼 죽음과 주검으로 뒤덮여 있는 것은 엘리엇이 가지고
있던 삶에 대한 생각이 이 시에서 표출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 시에서 이같은 그의 삶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드러낸다.
살아 있던 그는 지금 죽었고
살아 있던 우리는 지금 죽어 간다
약간씩 견디어 내면서.
He who
was living is now dead
We who are living are now dying
With a little
patience. (CPP 72)
엘리엇이 죽음을 이처럼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은 하이데거(Heideggerr)의 말을 빌리면 인간은
궁극적으로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Sein zum Tode)임을 그가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엘리엇은 우리의 “지금”을 알기
위해서는 시체와 유골로서의 과거를 되살려 우리 앞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주검은 단지 생물학적인 삶이 끝난 후 찾아 오는 사후
경직(rigor mortis)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것이라기 보다는 이같은 사후 경직을 우리 삶 속에 위치시켜 놓음으로써 이를 사후
활기(vigour mortis, Ellman 188)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는 주검과 삶은 우리의 현재 속에서
동시적 질서(simultaneous order)와 동시적 공존(simultaneous existence)을 형성하고 있다고 본 셈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그의 생각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가?
엘리엇은 우리의 현재는 우리들만의 현재가 아니라 죽은 과거가 현재 속에 살아 있음으로 해서
과거와 현재가 동시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같은 과거와 현재의 공존은 과거의 망령을 과거 속에만 묻어 둘 것이 아니라 이를 현재 속에 불러
들이기 위해 푸닥거리(ritual exorcism of demon)로서의 시쓰기를 통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시인이 망령에 씌웠다는 말은 이같은
망령들이 잊혀지기를 거부하고 현재 속에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시쓰기가 시인 자신만의 목소리에 의해 지어진 구조물이 아니라 죽은
시인들이 영생(immortality)을 누리는 유령의 집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의 시는 죽은 시인들의 혼백을 달래는 푸닥거리가
벌어지는 열린 장(場)일뿐이다. 따라서 엘리엇에게 있어서 시쓰기는 시인 자신의 목소리 내기가 아니라 죽은 시인들의 목소리 듣기이며, 이들의
목소리 되살리기라고 생각했다. 이 경우 시인은 단지 죽은 시인들의 혼백을 불러내어 이들의 목소리를 되살리는 푸닥거리를 통해 되살려 낼뿐이다.
따라서 시인은 이러한 굿판을 펼치는 영매(medium)로서의 무당이 되며, 시는 이 굿판에서 되살아난 죽은 시인들의 목소리의 기록일뿐이다.
이것이 바로 엘리엇이 시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이유이다.
시인은 표현할 “개성”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하나의 특별한 매개체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 경우 매개체는 매개체에 지나지 않을 뿐 개성이 아니며, 이런 매개체를 통해 인상과 경험이 독특하고 예측 불허의 방식으로
결합한다.
[T]he poet has, not a "personality" to express, but a particular
medium, which is only a medium and not a personality, in which impressions and
experiences combine in peculiar and unexpected ways. (SE 19-20)
위의 인용에서
medium을 매개체라고 번역했으나, 이를 영매(靈媒)라고 번역해도 같은 문맥에서는 아무런 의미상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는다. 따라서 영매로서의
시인은 죽은 시인의 영매로서 이들의 소리를 자신을 통해 독자들이 들을 수 있게 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최고의 시인은 죽은 시인의 목소리를 자신을
통해 가장 잘 전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훌륭한 시인의 자질이며, 이러한 시인의 자질에 대해 엘리엇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하여 시인은 순간 순간에 좀 더 지고(至高)한 것에 자신을 부단히 굴복시키게 된다. 예술가의 발전은 계속적인 자기
희생이며, 계속적인 개성의 멸절(滅絶)이다.
What happens is a continual surrender of himself
as he is at the moment to something which is more valuable. The progress of an
artist is a continual self-sacrifice, a continual extinction of personality. (SE
17)
이 인용에 나온 “자신의 부단한 굴복”, “자기 희생”, “계속적인 개성의 멸절” 등의 표현은 영매로서의 훌륭한 무당의
자질을 논하는 경우에도 똑같이 쓰일 수 있는 개념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엘리엇이 생각하는 훌륭한 무당과 훌륭한 시인 사이에는 그 자질에 있어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무당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얼마나 충실히 영매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이듯이, 시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 또한
그가 얼마나 죽은 시인들의 목소리를 되살려 낼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죽은 시인의 완전한 영매가 됨으로써 시인은 순간 순간마다
황홀경(ecstasy)를 경험할 수 있다. 황홀경을 의미하는 ecstasy라는 영어 단어의 어원이 희랍어에서 ‘밖으로 튕겨져 나오다’는 뜻을
가진 단어인 ek과 ‘자리하다’는 뜻을 가진 histani라는 두 개의 단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것으로, 이 둘을 합치면 ‘제 자리에서 튕겨져
나온 존재’(a being put out of its place)라는 의미가 된다. 따라서 시인이 죽은 시인들의 말을 충실하게 전하는 경우 그가
겪는 황홀경은 자신의 개성을 잃고 죽은 시인들의 목소리를 완전하게 전하는 영매가 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영매로서의 시인을 통해 드러난 죽은
시인들의 목소리는 엄밀히 따져 보면 죽은 자들의 목소리의 ‘되살려냄’(representation)이라기 보다는 언어 자체의 되살려냄이라는
측면에서 엘리엇의 이같은 시인관은 바르트(Barthes)가 말하는 시인관과 궤를 같이 한다. 바르트는 이러한 언어의 영매로서의 시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글쓰기는 우리의 주체가 사라지는 중립적이고 복합적이며 비스듬한 공간이다. [글쓰기는 또한] 글을 쓰는 사람
자신의 몸을 위시하여 모든 정체성이 사라진 텅빈 공간이다.
Writing is that neutral, composite,
oblique space where our subject slips away, the negative where all identity is
lost, starting with the very identity of the body writing. (Barthes
118)
바르트는 가장 훌륭한 언어의 영매로서의 시인의 예로 말라르메(Malllarm1)를 들면서, 말라르메가 훌륭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말라르메]의 생각으로는 [중략] 말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라 언어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이같이 필수적인 몰개성을
통해 [중략] “내”가 아닌 언어만이 행위하고 “생동”하는 지점에 이르는 것이다. 말라르메의 모든 시학 이론은 글을 쓰려는 욕구를 가진 작가를
제어하는 데에 모아져 있다.
For him . . . it is language which speaks, not the
author; to write, is, through a prerequisite impersonality . . . to reach that
point, where only language acts, "peforms" and not "me". Malllarm's entire
poetics consists in suppressing the author in the interest of writing. (Barthes
119)
엘리엇은 자신의 개성을 철저히 죽이고 그 대신 죽은 시인으로 대표되는 언어로 하여금 그를 통해 말하게 함으로써, 그는 죽은
시인들의 시체와 유골로 된 유령의 집에서 시의 푸닥거리를 하는 무당이 되기를 원한 셈이다.
4. 푸닥거리로서의
시쓰기
언어의 영매로서의 시인은 죽은 시인들을 불러 내어 이들의 말을 되살려 내는 장(場)인 시쓰기를 함으로써 이들의 혼백을 달랠
수 있다. 이같은 작업은 시인의 끊임없는 자기 희생에 의해 가능할 뿐이다. 엘리엇에게 있어 이러한 시쓰기는 죽은 시인들을 하나 하나 열거하면서
치뤄지는 “하나의 의식적인 정화”(a ceremonial purgation, Ellman 180), 즉 푸닥거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굿에는 많은 시체와 유골이 등장하여 엘리엇의 입을 통해 호명되기를 기다린다. 따라서 어느 의미에서는 엘리엇의 시는 이처럼 죽은 시인들이 그들의
후배 시인인 엘리엇에 의해 호명(interpellation)됨으로써 기억되고 씻김(정화)당함으로써 상징 질서 속으로 편입됨을
의미한다.
엘리엇의 선배 시인들에 대한 태도는 단순히 이들을 좋아한다거나 또는 싫어한다는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다. 엘리엇은 이들에게
서로 상반되는 양가적 태도(ambibalence)를 보이고 있다. 그가 높이 평가하는 형이상학파 시인들(metaphysical poets)의
경우에도 그는 이들에게 양가적 태도를 보인다. 형이상학파 시인들이 훌륭한 시인의 전범임데도 불구하고 이들이 엘리엇을 포함하는 후배 시인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데 있어 저해요소가 되기 때문에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족쇄(足鎖)가 된다. 선배 시인들이 후배 시인들에게
족쇄가 되는 이유는 선배 시인과 후배 시인이 서로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선배 시인들은 후배 시인들에게 해롤드 블룸(Harold Bloom)의
용어를 빌리면 “영향에 대한 불안”(anxiety of influence)으로 작용한다.
선배 시인들이 존재하는 방식 또한 후배
시인들에게 양가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선배 시인들은 이미 죽었지만 이들은 후배 시인들의 기억에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에 살아
있는 존재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이들은 죽어 있으면서도 살아 있으며, 이처럼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의 이같은 존재 양식이
바로 이들을 귀신(demon)으로 남게 하는 원인이 되며, 엘리엇은 이같이 눈을 감지 못하고 죽은 선배 시인 귀신들의 진혼(鎭魂)을 위해
계속적으로 시쓰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그가 시쓰기를 강박적으로(compulsively) 반복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같은 그의 반복 강박증(repetition compulsion)은 『황무지』에서는 시체와 유골, 그리고 산송장의 이미지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다. 이같은 시체 이미지 중에서 가장 괴기스러운(uncanny) 것은 다음과 같은 묘사이다.
작년 당신이 뜰에 심은
시체에 싹이 트기 시작했소?
올해엔 [그 시체에서] 꽃이 필까요?
That corpse you planted last year
in your garden,
Has it begun to sprout? Will it bloom this year? (CPP
63)
이말은 이 시의 화자들 중의 하나가 스테슨(Stetson)이라고 불리우는 사람에게 묻는 말이다. 사우덤(Southam)에
따르면 여기 나오는 스테슨은 에즈라 파운드를 가리킨다(Southam 92). 그는 영국에 살면서도 미국인 티를 많이 내서 “버펄로
빌”(Buffalo Bill)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는 솜브레로-스테슨(sombrero-stetson) 모자를 좋아하여 이를 자주 쓰고
다녔다고 한다. 이 경우 우리는 시체와 파운드를 중첩시킬 수 있다. 파운드는 엘리엇이 쓴 『황무지』초고를 수정하여 이를 반으로 줄였으며, 또한
이를 출판하게 한 선배 시인이다. 그러나 파운드가 이처럼 힘이 있는 선배시인이었기 때문에 엘리엇은 그에게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엘리엇은 파운드를 존경했으며, 또한 그 덕분에 『황무지』를 발표하여 일약 유명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같은 파운드의 위치는 다른
면에서 보면 거추장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시체는 다름 아닌 파운드의 시체라고 볼 수 있다. 파운드는 아직도 죽은
시인은 아니지만, 그가 이미 저명한 시인이라는 측면에서 그는 죽은 선배 시인들이 누리고 있는 명성을 이미 누리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그는 살아
있는 죽은 시인인 셈이다. 위에서 인용한 구절은 이러한 파운드에 대한 엘리엇의 양가적인 감정을 잘 드러내준다. 엘리엇은 파운드가 정원에서 봄이
되면 언제나 꽃이 피는 시인으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 그것이 바로 뼈를 정원에 묻은 이유이다. 반면 엘리엇은 파운드를 생매장하고 싶어 한다.
위에 인용한 구절에는 이 두 가지의 양가적인 감정이 복합적으로 합쳐져서 숨어 있다. 엘리엇은 이처럼 파운드에 대한 존경과 경쟁 의식을 이런
식으로 이 시에 심어 놓은 셈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같은 엘리엇의 표현이 파운드의 수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통과됐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같은 사실에서 엘리엇이 파운드의 눈앞에서 그를 패러디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런 예에서 우리는 엘리엇 자신의 전방위적인 유머
감각을 읽을 수 있다.
엘리엇이 죽은 선배 시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이같은 양가적 감정의 연장 선상에서 우리는 이 시에 나오는
많은 시체와 유골을 읽을 수 있다. 이 경우 우리는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가 사용한 미추(未追/未醜, 이 용어는 크리스테바가
사용한 abject/abjection을 필자가 번역한 것임---필자 주)를 원용함으로써 가능하다. 라캉(Lacan)은 어린애가 거울 단계(생후
6-18개월)에서 어머니와 가지고 있던 꿈같은 관계를 청산하고 아버지의 이름(Name-of-the-Father)이 지배하는 상징계로 진입한다고
주장한다. 유아의 이같은 상징계로의 진입은 어머니와 가졌던 이같은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 결핍(lack)의 형태로
나타나며, 이같은 결핍이 상징 질서의 대표적인 예인 언어다. 상징계로의 진입은 또한 주체(subject)와 객체(object)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형성되는 항문기(anal stage)와도 일치한다. 따라서 이 시기의 유아는 용변 가리기 교육(toilet training)으로 대표되는
청결에 대한 교육과 음식 먹는 습관의 습득 등 상징 질서에서 요구되는 여러 가지 의식을 통해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배우게 된다. 그러나
크리스테바는 라캉이 주장하는 이같은 거울 단계에서 상징 단계로의 진입이 너무 급격하고 단절적임을 지적한다(Lechte 159). 주체와 객체의
경계가 확연하게 그어지는 상징계로의 진입을 이처럼 급격한 것이기보다는 좀 더 완만하고 모호하게 이루어진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이러한 그녀의
생각을 반영한 것이 그녀가 말하는 미추(未追/未醜)의 개념이다. 거울 단계에서 유아의 삶의 근원이었던 어머니는 유아가 상징계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제 배척되고 제거돼야 한다. 이같은 제거와 배척의 대상이 바로 그녀가 말하는 미추이다. 어머니를 이처럼 제거하고 배척하면서 상징계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유아는 공포(horror)를 경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같은 공포의 대상은 지금까지는 유아의 삶의 터전이었던 어머니와 자신과의 불분명한
경계에 놓여 있던 것들이 구체화한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미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미추(未追/未醜). 그것은 우리로부터
배제되었지만 우리와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고, 우리가 이물질(異物質)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듯이 보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상상적인
괴기함이며 실제적인 위협으로서 우리에게 손짓하면서 결국에는 우리를 삼켜 버린다.
따라서 미추가 되게 하는 것은 청결감의 부족이나
위생 상태의 결여가 아니라 정체성, 체계, 질서를 교란시키는 것이다. [미추는] 경계와 위치 그리고 규칙을 무시한다. [미추는] 어중간하고
모호하고 복합적인 것이다.
Abject. It is something rejected from which one does not
part, from which one does not protect oneself as from an object. Imaginary
uncanniness and real threat, it beckons to us and ends up engulfing us.
It
is thus not lack of cleanliness or health that causes abjection but what
disturbs identity, system, order. What does not respect borders, positions,
rules. The in-between, the ambiguous, the composite. (Kristeva
157-158)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미추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미추는 주체가 독립적인 정체성을
이룩하기 위해 추방해야 하는 것이지만, [우리의] 몸이 이물질을 받아 들임과 동시에 이를 추방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미추를] 추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후자[받아 들임과 동시에 추방해야 하는 것]는 눈물, 대변, 소변, 토사물, 점액 등으로서, 이들은 유아가 성장한 후에 문화적인
금기가 되는 부위임과 등시에 성감대가 형성되는 부위이기도 하다. 미추는 불결과 청결, 오이디푸스 전기(前期)와 오이디푸스 기(期)의 경계가 되는
곳이다. [미추는 또한] 우리 몸의 내부와 외부의 불확실한 경계로서 문제 지역이기도 하다.
The abject is what the
subject seeks to expel in order to achieve an indepent identity but this is
impossible since the body cannot cease both to take in and expel object. The
latter include tears, faeces, urine, vomit, mucus, which in the infant are the
site of future erogenous as well as of cultural taboos. The abject is a troubled
marker between the unclean and clean and between the pre-Oedipal and Oedipal,
the sign of an undecidable boundary line between the inside and the outside of
the body and therefore of a divided subject. (Brooker 1)
크리스테바는 쓰레기와 대변은
객체(object)로서 청결의 경계 저편에 존재하는 타기해야 할 것이라고 정의하면서도, 시체는 미추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대변이
내가 있지 않을 곳과 있을 곳을 확정짓는 경계의 저편에 있는 곳이라면, 폐기물 중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시체는 모든 사물을 위협하는 경계이다.
[이 경우] 내가 더 이상 축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축출된다. [중략]. 시체는 [중략] 미추의 극치이다. 시체는 삶을 오염시키는
죽음이다.
If dung signifies the other side od the border, the place where I
am not and which permits me to be, the corpse, the most sickening of wastes, is
a border that has encroached upon everything. It is no longer I who expel, "I"
is expelled. . . . The corpse . . . is the utmost of abjection. It is death
infecting life. (Kristeva 157)
『황무지』에 자주 나오는 시체, 유골, 산송장 등은 따지고 보면 주체와
객체, 삶과 죽음, 청결과 불결 사이를 허물고 정체성과 질서를 허무는 미추인 셈이다. 엘리엇은 본래 청결과 질서를 천성적으로 선호하는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Ackroyd 41). 따라서 그는 이같이 경계를 허무러뜨리고 정체성이 모호한 미추를 극도로 혐오했다. 이같은 미추에 대한
엘리엇의 혐오감은 그에게 공포감을 일으킬 정도로까지 진전된다. 따라서 우리가 『황무지』에서 만나는 시체와 쓰레기 그리고 유골들은 그의 미추에
대한 이같은 혐오감과 공포감이 과장되게 표출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엘리엇의 미추에 대한 이같은 반응은 그의 신경증적 기질(neurotic
temperament)에도 그 원인이 있다. 그는 이같은 자신의 신경증을 해소시키기 위해 무의식 속에 감추어진 이같은 느낌을 반복적으로 그의
시에서 드러냄으로써 일종의 정화 의식(ritual of purgation)을 치루는 셈이다. 이같은 정화 의식은 그로 하여금 미추를 제거하여
자신에게 질서감을 주기 위한 반복 강박증(repetition compulsion)의 발로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시쓰기는 그에게는 자신에게
질서와 청결을 회복시키는 하나의 푸닥거리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이 시의 종결 부분에 나오는 어부왕(漁夫王)의 묘사는 이 시에 널려 있는 미추가
완전히 제거 되지 못함을 보여 줌으로써 그의 정화 의식으로서의 푸닥거리인 시쓰기가 계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나는 기슭에
앉아
낚시질했다. 등뒤엔 메마른 들판
적어도 내 땅만이라도 질서잡아 볼까?
런던 브리지가 무너진다 무너진다
무너진다
I sat upon the shore
Fishing, with the arid plain behind
me
Shall I at least set my lands in order?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falling down falling down (CPP 74)
여기서 보듯이 어부왕은 자신의 영토만이라도 “질서 잡”겠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땅이 이미 쓰레기와 시체 등의 미추로 가득차 이들을 제거하기에 어려움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영토를 미추가
제거된 청정 지역(clean area)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런던 브리지의 붕괴로 묘사되는 미추의 증가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신경증 환자의 대표적인 증상 중의 하나는 자신만의 청정과 질서를 유지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어부왕의 이같은
의도와 노력은 곧 엘리엇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그가 이 시에서 시체, 유골, 산송장들을 널려 놓은 것은 바로 자신의 무의식 속에 억압돼
있는 청결에 대한 욕망을 드러낸 것이며, 이같은 청결에의 의지는 그로 하여금 시쓰기라는 푸닥거리를 통해 반복적으로 지속된다. 그 중에서도
『황무지』는 가장 푸짐한 푸닥거리인 셈이다. 그는 이 시에서 미추로서의 살아 있는 시체인 선배 시인들을 불러내는 의식을 행함과 동시에 세상의
미추인 쓰레기와 시체, 그리고 유골들을 정화시키는 시의 푸닥거리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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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pses, Bones, and Dead Poets:
The Waste Land as a Ritual of Exorcism
Lee, Chong-Ho
The Waste
Land has been read in may ways. It has, for example, been read as "a pilgrimage,
a homosexual love song, a Grail romance, or an elegy to Western culture
devastated by the carnage of the First World War." What strikes the reader most,
however, when reading the poem, is that it is so much full of the images of
death: corpses, bones, and even zombies. We also note that this poem is actually
juxtaposing and superimposing various voices of dead poets in the form of
allusions. It is quite natural, therefore, for us to ask why there are so many
images of death in this poem.
One way of answering this question is to
approach this poem as a hysterical text. The hysteric is the one who doeS not,
and will not, forget his past. The hysteric at the same time wants very badly to
forget his past, but he cannot do so of his own will. This kind of ambivalent
attitude of the hysteric forces him to repress his desires in his unconscious
against his will. These repressed desires, however, will eventually surface as
symptoms OF body language.
The Waste Land, in a sense, can be read as a
hysterical text, in that Eliot's repressed desires appear as symptoms in the
poem. In this respect, we can make use of Kristeva's concept of abject in
reading this poem. She says that the abject represents the in-between entities
which disburb identity, system, order. According to her, the corpse is the
utmost of abjection, because death is infection life. Many images of death in
this poem can be the representations of the abject in this sense. Repressed
desires in the unconscious take the form of death images when they surface as
symptoms in the poem. The Waste Land, then, can be looked upon as a ritual of
exorcism by way of purgating Eliot's repressed desires. In the process of this
exorcistic ritual, dead poets are placated and can find their proper places in
the symbolic order of 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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