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無責任한 批評, -「문단의 일년을 추억하야」의 評者( 月灘 박종화)에게 抗議 - 金億

이강기 2015. 10. 1. 13:26
잡지명 개벽 제32호
호수 제32호
발행년월일 1923-02-01
기사제목 無責任한 批評, -「문단의 일년을 추억하야」의 評者에게 抗議-
필자 金億
기사형태 문예평론

비평도 아모 것도 업는 적막한 문단에 月灘씨의 「문단의 1년을 추억하야」의 評文이 잇섯슴은 우리 문단을 위하야 깃븐 일이엇습니다, 마는 나는 그 評文 때문에 생기는 이 항의는 意외에도 그 깃븐 일을 깨쳐버리지 안흘 수 업다는 고백을 하여야 하겟습니다. 그것은 다른 이유가 잇는 것이 아닙니다, 月灘씨의 評文이 비평 되기에는 넘우도 내용이 가난하고, 다만 한 감상 밧게 지내지 아니한 까닭입니다. 더욱 그의 詩評이라는데 니르러서는 거의 뜻할, 또는 가할 만한 아모러한 評文될 가치가 업섯습니다.
嚴正한, 또는 예술적 양심의 의미에서 나는 이러한 의견이라고 하는 것 보다도, 이러한 확신을 비평에 대하야 가젓습니다.ㅡ비평이라는 것은 작자의 생활내용을 第一義的으로 확장할 수 잇는 개성의 출현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기 때문에 評者는 도의적 책임과, 작자의 사상, 또는 작품에 대하야 충실한 객관적 이해가 업서서는 아니됩니다. 작자의 사상과 감정, 그리하고 환상에 대하야 평자는 가장 정밀한 분석과 가장 精細한 洞察을 소유하여야 합니다, 그리하고 그것들에 딸하, 그 대상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업서서는 아니됩니다. 그러기에 평자는 비평의 대상으로는 주관적 자기는 업시하고, 비평의 대상을 통하야 객관적 자기를 내여노치 아니하야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다시 말은, 評者는 작자의 작품과 사상에 대하야 근본적 이해를 가저야 하겟고, 그 다음에는 객관적이어야〈1〉 할 도의적 자각과 책임을 가저야 한다는데 돌아갑니다.
만일 評者가 이러한 이해와 책임이 업시, 비평을 한다 하면, 그 비평은 아모러한 의의를 가지지 못할 뿐만이 아니고, 돌이어 評者 자신의 오류의 비극을 公衆에게 보이는 희극을 연출하게 됩니다, 하고 그 결과로 評者는 「비평에 대한 노력의 報酬」로 작자의 항의와 반박을 밧게 됩니다.
도의적 책임과 작품에 대한 근본적 이해(객관의) 업시, 작품을 評한다 하면, 굀¸ 評者는 몰염치한 지위에서 자기의 서푼짜리도 못되는 讀者的 偶感을 말하는 評者ㅡ母論 그것을 評者라고 할 수 업다.ㅡ에 지내지 못합니다. 소위 評者의 비평을 보면, 대개는 작자의 內生活, 또는 작품에 대한 근본적 이해와 도의적 책임도 업시 주관적 偶感을 말하는 이가 만습니다. 어찌하야 偶感과 비평의 사이에 그들은 구별의 굵은 줄을 긋지 아니하는지, 나는 그러한 이들의 맘을 알 수가 업습니다. 私情과 편견을 根底 잡은 비평은 코레라 보다도 더 무섭은 흑사병적 위험이 잇습니다.
評文을 쓰랴고 하거든 먼저 충실하게 주관적 태도(純實한 讀者的 태도, 또는 藝術翫賞者的 태도)로 작품을 읽고, 다시 지위를 바꾸어 純實한 객관적 태도로 이해할 것입니다. 결코 자기의(讀者的) 감상과, 인상(나는 소위 인상비평의 가치를 부정합니다.)을 구체적, 또는 객관적으로 하야서는 아니됩니다.
지금 내가 문제삼는 것은 詩評에 대한 것입니다. 詩評에는 (1) 분석. (詩想의) (2) 리듬 (한데 이 리듬은 시인마다 각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업습니다.) (3) 무드, 의 세 가지가 잇슬 것입니다.
詩評을 하는 評者로는 적어도 이 세 가지 중에 분석과 무드의 두 가지는 보아야 할 줄 압니다. 시에 대한 아모러한 분석과 무드에 대한 관찰이 업시 評筆을 달려서는 결국, 무의미한 것 밧게 아니될 것입니다.
「조타」 「조치 못하다」 하는 주관적 감정으로는 비평이 성립되지 못합니다, 어대까지든지 날카롭은 객관적 理智로 하여야 합니다. 보통엣 말로 보아도, 이러저러하니 조코, 이러저러하니 조치 못하다고 하지 안습니까, 이러 하거든, 적어도 評文을 쓰는 評者로 어찌 「조타」 「조치 못하다」하는 갑업는 말로써 自足할 수가 잇겟습니까.〈2〉
月灘氏어, 문단의 1년을 추억하야의 評者여, 月灘씨는 그 一文을 偶感으로 썻습니까, 또는 비평으로 썻습니까? 나는 구태여 물어보랴고 합니다. 만일 偶感이라고 하면, 나는 緘口結舌하겟습니다, 마는 그러치 아니하고 비평이라고 하면, 어찌하야 月灘씨는 무책임하게도 주관적 감정의 言辭로써 남의 시를 비평하얏습니까. 객관적이어야 할 것을 주관적으로, 도의적으로 하여야 할 것을 편견으로 評筆을 잡앗습니까. 「大同江」의 詩評에 분석(詩想의)이 업섯습니다, 또 詩想과 무드에 대한 조화 부조화의 評이 업섯습니다. 만일에 작자가 「어대가 조치 안습니까?」 하는 항의를 하면 評者인 月灘씨는 「사람으로 하야금 앗질한 法悅속에 취케 할 만한 『무드』가 업스며」 하는 것으로 변명을 하랴고 합니까? 무드는 詩想과 리듬의 합일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詩想과 리듬에 대한 아모러한 말이 업시, 무드만을(母論 완전하게 무드를 말한 것이 못됩니다, 이는 詩想의 분석과 리듬에 대한 말이 업섯기 때문입니다.) 말한 것 밧게 더 의미할 것이 업지 안습니까. 이것을 評이라고 생각합니까? 나는 詩評이라고 할 수가 업습니다. 항의합니다. 그러고 「또한 그의 질겨하는 『베르렌』의 마음썩는 懊惱의 심뽈도 업다.」(심뽈은 씸볼?)한 것은 무엇을 뜻함인지, 불행히 나는 이 인용문구를 이해할 만한 힘을 가지지 못하얏습니다. 이 문구로써 評者는 작자의 경향과 內生活을 안다 함을 보임입니까, 이 문구의 뜻을 해석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예의 그 「여라」 「서라」 「러라」가 공연히 讀者를 苦롭게 한다.」한 그 「예의 그」란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이 인용문구의 배후에는 소위 評者라는 月灘씨의 비도의적 편견이 숨어슞?습니다. 만일 이 인용문구가 評者의 편견엣 조소의 뜻이 아니고, 가장 嚴正한 도의적, 또는 객관적 評者的 가치의 評句라고 하면, 나사렛성자의 「너희들 가운대에서 죄 업는 者는 먼저 돌우 이 여자를 따려라.」 하는 한 마듸를 힘잇게 들이겟습니다.
月灘씨, 「귀여운 작품」 「맘에 드는 시」 「粗作이라 함을 면치 못할 것」이 무엇입니까? 분명한 評을 한 뒤에 이러한 結辭되는 「총회계」를 할 것입니다. 「감사를 올릴 만한 작품」이라 하는 순주관적 감정의 偶感은 나는 구태여 바드랴고 하지 안습니다. 다시 이 偶感을 돌려 보냅니다. 분명한 評을 하면 어떠한 것이라도 항의업시 고맙게 밧겟습니다, 마는 그러치 아니한 한에서는 나는 밧기는 고사하고 항의하지 안흘 수 업습니다.〈3〉 나의 작품 중에 「설은 희극」이라는 것은, 그러케 칭찬을 하야 주엇습니다, 마는 작자인 나는 족음도 가치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시의 형식을 빌은 한 才談에 지내지 안는 까닭입니다. 이런 말을 하기에는 여러 해된 致富帳을 끄집어 가지고 오럔 회계를 하자는 빗이 업지 안습니다, 마는 한 마듸 하랴고 하는 것은 언젠가ㅡ지금은 거의 니젓습니다, 마는ㅡ장미촌이라는 시잡지에, 月灘씨가 나의 「엇서라」의 용어에 대한 評이 잇섯습니다. 그것은 「엇서라」가 문법상으로 말이 되지 아니하얏다는 것이엇는 듯 합니다. 그럴 리가 잇겟습니까. 「엇」은 과거이며, 「서라」는 부정법이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동사가 시간의 제한을 밧지 아니하는 「가다, 오다,」와 가튼 것입니다.
그러고, 思想의 표현과 기교에 대하야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업습니다, 이것은 「대개 그의 시는 전체를 통하야 앨써 넘우 기교를 취하랴 하는데 큰 흠점이 잇다.」한 評이 잇기 때문입니다. 한데 여긔 기교라는 뜻은 언어 또는 문자의 過重形容이라는 의미입니다. 웨 그러냐 하면 「詩想 그것보다도 말 맨들기에 고심초사한다.」한 月灘씨 자신의 해석이 잇는 까닭입니다.
思想을 표현하기에 가능의 문자를 우리가 가젓다고 생각합니까. 나는 사상의 표현에 대한 가능의 문자가 업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생각하는 것만큼, 그만큼하게 족음도 허물내지 안코 문자가 생각을 표현시킬 수가 업다는 뜻입니다. 사상은 완전합니다 마는 언어와 문자는 불완전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적어도 사상만큼한, 그만큼한 표현의 기교가 업서서는 그 사상은 표현되지 못합니다. 결국, 표현되지 못하는 사상은, 남에게 전할 길이 업는 사상은, 잇스나 업스나 가튼 것이 아니겟습니까. 여긔에 기교의 문제가 생깁니다. 정직하게 고백하면, 나의 작품에는 月灘씨의 소위 「그가 詩想 그것보다도 말 맨들기에 고심초사한다.」한 獨斷的 評語가 족음도 힘잇는 울림을 주지 못하얏습니다. 나는 詩想만큼한, 그만큼한 기교 밧게는 氏의 「앨써 넘우 기교」를 더한 것이 업습니다. 月灘씨의 인용한 「가을」의 2절을 「말 맨들기에」 고심초사하얏다고 할 수 업습니다, 웨 그런고 하니, 먼저 전체의 詩想을 살펴보면 알 것입니다, 그 詩想을 표현하기에는 그 詩想과 문자의 조화, 또는 그 詩想과 리듬의 조화과 전체의 무드를 허물내지 아니하랴고 함에는, 암만 하여도〈4〉 그만한 「말을 맨들기」에 형용사와 부사가 필연으로 쓰이게 됩니다.
문자라는 완전치 못한 형식을 詩想이 밟을 때, 어떠케 詩想 그것이 완전한 표현을 어들 수가 잇겟습니까. 시는 어대까지든지 표현의 예술입니다. 문자의 선택과 함께하는 기교가 잇서도 오히려 표현의 가능을 보증하기 어렵거든 하믈며 문자의 선택에 딸흐는 기교가 업슴에서겟습니까.
지금 우리 詩壇에는 외국문자 그대로 쓰는 이가 잇습니다. 아모리 拜外熱이 만키로 「人間」, 「未練」 「過卷」, 「洞窟」이라는 일본어를 그대로 조선어로 쓰랴고 할 어리석음이 어대잇겟습니까, 그런 것은 돌이어 조선어의 고유한 美와 力을 허물내이는 것 밧게, 아모러한 뜻할 무엇이 업는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이들에게 어찌하야 일본文으로 작품을 표현시키지 아니하고, 일본어적 조선어로 작품을 표현합니까, 하며 뭇고 십습니다.
사상과 표현의 기교에 대한 것은 실로 문제가 큽니다. 메러즈코우스키씨의 「프로베르論」이라는 英譯에 이러한 말이 잇습니다, 이것은 프로베르가 자기의 사상을 意志라는 鐵槌로 언어 또는 문자의 속에 음직일 수 업도록 잡아맨다는, 한 사상에는 한 문자 밧게 업다는 사상의 표현과 문자를(기교) 말한 것입니다. 지금 옴기기가 귀치 아니하야 英譯文 그대로 인용합니다.
「His head bowed, his face and brow and neck bathed in moisture, all his muscles tense, like an athlete at the height of the contest, he set himself to face the desperate strife with his ideas and words, rejecting, uniting, or forging them as in an iron grip by the power of his will, condensing them and gradually with superhuman strength working out his thought, and confining it, like a wild beast in a cage, in a definite, indestructible form.」 이것을 보고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프로베르는 산문에서도 이러케 표현의 기교를 위하야 그야말로 고심초사하엿습니다. 시문에서는 이보다도 더 고심초사를 하엿슬 줄로 압니다.
마즈막 한 마듸로 하면, 月灘씨의 「詩想 그것보다도 말 맬들기에」 한 말은 나에게는 의미도 업는 소리입니다. 웨 그러냐 하면, 나는 다만 詩想만큼한, 그만큼한 기교 밧게 더한 것이 업는 까닭입니다. 그러고 소위 대패로 민 듯한 세련된 표현을 氏는 원치 아니하는 모양인 듯 합니다. 아즉 더 말치 아니하고, 이만합니다.
ㅡ(1923년 1월 14일)ㅡ〈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