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春園文壇生活 20年을 機會로 한 『文壇回顧』 座談會

이강기 2015. 10. 1. 18:09
잡지명 삼천리 제6권 제11호
호수 제6권 제11호
발행년월일 1934-11-01
기사제목 春園文壇生活 20年을 機會로 한 『文壇回顧』 座談會
필자
기사형태 대담·좌담

時日 10月2日 午後 5時로부터 10時까지
場所 市外 洗劒亭에서
出席者
李光洙 梁白華 朴月灘 金東仁 金岸曙 金東煥〈234〉

前言 先輩
李光洙氏가 「無情」을 發表한 지 約20年이 된다. 「無情」은 春園의 出世作일 뿐더러 實로 朝鮮 新文學建設의 그 첫 주춧돌이엿다. 春園은 이 「無情」을 契機로 뒤를 이어 「開拓者」를 내엿고 또 「麻衣太子」 「端宗哀史」 「許生傳」 「先導者」 「李舜臣」 「春香傳」 「再生」 「흙」等의 諸長篇을 썻스며 短篇으로도 「嘉實」 「血書」 「엇던아츰」等 10餘 篇을 내엿스며 時調, 新體詩等 純文學의 境地를 開拓함이 만헛다. 그래서 現文壇의 어느 作家보다도 그 開拓한 範圍가 넓고 量에 이르러도 斷然 만햇다. 그 동안 그가 끼처논 功績은 오직 우러러봄이 잇슬 뿐이다. 조선말의 美와 조선情緖의 眞實한 再現이 그를 엇지 못하엿든들 이러틋 均齊를 어덧슬가함애 우리들 後輩의 가슴은 오직 感謝의 一念에 차질 뿐이다. 물론 그가 저즐너 논 罪過도 그 半面에 이즐수 업슴도 안다.
엇잿든 後日 文藝批評家의 손으로 그의 文學上 地位도 分明하여 지려니와 爲先 우리는 春園을 中心으로 文壇諸作家의 一日의 會合을 지어 過去 20年間의 回想을 機會를 가지기로 하엿다. 이것이 機緣이 되야 先輩 春園을 爲하야 盛大한 20年祭가 全文壇的으로, 全社會的으로 잇서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金東煥-. 오늘저녁은 주장 春園의 말슴을 드르려 온 터임니다. 岸曙도 詩壇生活 15年밧게 아니 되엿고 梁白華, 金東仁도 아직 10數年 남짓밧게 아니되엿고 더구나 月灘等에 이르러는 먼 後輩에 屬함니다. 朝鮮文壇가치 나이 어린 文壇에서 20年이나 꾸준히 純文藝의 길로 精進하섯다는 것은 驚異할 일이외다. 이제 맨 처음 文壇에 나오기 시작하든, 말하자면 作家準備時代라고 할는지요. 그 20餘年前 먼-아득한 녯날의 말슴을 좀 들여주서요.
李光洙-. 感謝함니다. 이 변변치 못한 사람을 爲하여 늘 尊敬하든 여러 동무께서 일부러 먼 곳까지 차저 나오서 주시니- 나도 實은 日前에 어느새 「無情」을 쓴 지 벌서 20年이 되든가 하고 저윽히 놀나기를 마지 안엇슴니다. 歲月의 흐름이란 참으로 빠름니다.
무르시는 대로 몃가지 말슴하지요. 내가 열다섯살 나든 해 그때 東京에 잇섯지요. 本鄕區元町 玉眞館이라는 下宿에-.〈235〉그런데 하로는 그 近處 沐浴場에 갓는데 이마에 망건자국이 허-여케 난 靑年 한 분이 내겻헤서 몸을 씻고 잇겟지요. 암만 보여도 朝鮮사람 갓기에 姓名三字 무럿더니
「나는
洪命憙요.」
하겟지요. 이것이 碧初
洪命憙君을 처음 안 動機외다. 碧初가 그때 나보다 4年長인 열아홉살이든데 漢陽서 工夫하다가 시언치 안키에 削髮하고 東京에 뛰어 온 터입데다 그려-.
梁白華-碧初도 同時代든가요. 한참 먼-이야기들이로군.
李光洙-. 올래요. 퍽 녯날가튼 이약이들이지요. 그런데 나는 碧初의 반연으로 처음 「빠이론」을 알엇지요. 木村興太郞이 飜譯한 「카인」이라든가 「마젯빠」라든가 「海賊」이라든가 「빠리시나」等 詩集을 或은 碧初가 주는 것을 或은 그 사람의 指示밧고 冊店가서 사다가 熱中하면서 읽엇지요. 15,6 나는 少年情熱에 더구나 불과갓치 뜨겁고 壯烈한 빠이론 詩篇을 耽讀하게 되엿스니 참으로 그 당시는 가슴이 웬통 끌어 올낫지요. 이러기를 한참하는 동안에 내 性格이 變하여 집데다. 「放奔」 「粗暴」하여 젓다고나 形容할는지요. 그제부터는 나는 술도 마시고 담배도 먹으며 아츰저녁 規律지어 工夫하든 것도 다-뿌리치고 世上이란 이러쿠나하는 생각에 낫뿌게 말하자면 「墮落」의 첫 거름을 내리 드듼 섬이엇지요. 이것이 모다 「빠이론」의 影響이지요. 아직 마음이나 行實에 主ㅅ대가 서지 못 하엿든 어럿을 때 일이엿스니 「빠이론」을 崇拜키로 되어 날뛰엿다면〈236〉 밋치기 밧게 더 하겟서요. 술담배 實想 울고불고 이러느라고 學課는 뒷전이 되여서 1,2學年까지는 成績이 조와섯지만은 明治學院 卒業할 때는 아홉제로 나왓서요.
金東仁-. 우리는 「톨스토이」 影響이 크엇든 줄 알엇는대 「빠이론」이라니 意外인걸요.
李光洙-. 톨스토이는 그 다음이지요. 이럿케 밤낫 빠이론, 길 가다가도 빠이론, 눕엇다가도 빠이론 그의 詩篇속 詩歌를 외이고 한참 날 뛸때에 하로는 나와 同窓인 「山崎トシオ」라는 靑年이 加藤直士가 飜譯한 톨스토이의 「我ガ宗敎」라는 一篇을 갓다주면서 이 冊은 甚히 볼 만헤서 期於히 보라고 합데다. 山崎トシオ라는 사람은 그 뒤로도 純文學의 길노 나가서 한동안 東京帝國大學에서 내든 帝國文學과 또 三田文學誌上에서 詩와 小說을 만이 發表하여 文名이 ??하든 분임니다. 그래서 처음 톨스토이의 맛을 드렷지요. 톨스토이를 본 즉 이 사람에게는 빠이론에게서는 도모지 맛볼 수 업는 깁히와 휴-마니스릭한 큼직한 빗치 보이겟지요. 아모리 적은 小論文이나 短篇寓話갓튼 데 까지 그 求道者的 精神이 흘르는 것이 말할 수 업시 내 정신을 끄으렷서요.
자-그제부터는 빠이론은 네 갈데로 가라고 밤낫 톨스토이만 읽엇지요. 그의 「我ガ懺悔」 「我ガ宗敎」 「我ガ藝術」等 論文은 勿論 「復活」 「戰爭과 平和」 「안나카레니아」 「어둠의 힘」의 作品과 그의 寓話 書翰集 日記等을 모조리 읽엇지요. 그러고는 아조 톨스토이이즘에 폭 저저〈237〉버렷지요.
朴月灘-. 톨스토이 心醉가 아마 그 뒤로는 늘 繼續하섯슬 걸요.
李光洙-. 또한 階段이 잇섯서요. 그것은 무엔고 하니 하로는 여름인데 神田(간다) 夜店(요미세)로 散步나갓는대 冊店앞에 빨간 글자로 크게 「火の柱」라고 쓴 小說冊이 잇겟지요. 그 놈을 사다가 읽으니 엇덧케 社會制度에 대한 積極的 批判的 文明批評的 思想이 담어 잇든지요. 著者를 보니 木下尙江이라고 써습데다.
「火の柱」에서 이 作家에 對한 情熱이 다시 끌키 시작한 나는 그 길노 「良人의 自白」等 木下尙江이 쓴 冊이란 冊은 모조리 차저 읽기 始作하엿음니다. 이 作品속에서는 톨스토이나 빠이론에서 보지 못하든 社會改造的 意見이 내 마음을 붓잡은 것인 모양이지요. 참으로 조와요.
梁白華-. 「木下尙江」! 그러치 이 사람도 한동안 東京 靑年의 피를 왼간히 끌케한 사람이지요. 堺利彦과 매우 갓가운 벗으로 初期의 社會主義者이니 만치 그 사람의 影響밧는 사람이 참으로 만엇지요. 인제 아니 春園도 木下尙江에서 影響바드섯군. 나도 한동안 그 사람 作에 퍽으나 心醉하엿섯지요.〈238〉

「無情」前의 準備時代
金東煥 - 以上의 말슴으로 作家準備時代의 來歷은 大槪 알겟음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無情」 쓰기 바로 前, 文章을 世上에 發表하든 때 말슴을 하여주서요. 「靑春」 「아이들보이」 「少年」들과는〈238〉 엇덧케 되어 因綠이 매저 젓든가요?
李光洙 - 靑春 이야기나니 六堂 일이 생각남니다. 六堂은 그때 東京 麴町區에 잇는 韓國公使館엽댕이의 朝鮮留學生 監督部 奇宿舍에서 처음 맛낫지요. 가치 文學을 즐기는대서 共鳴되여 後日 그 사람이 「靑春」이나 「少年」等 雜誌를 냄에 이르러 自然히 寄稿하게 되엇지요. 「靑春」이나 「少年」보다도 몬저 내가 글을 써 본 일은 그때 明治學院學生들이 모여 처음 原稿를 서로 써서 그것을 筆記하여 돌여보는 週覽雜誌를 始作하엿는대 거긔에다가 「어린 犧牲」이라는 한 篇의 小說을 써섯지요. 그 雜誌는 그 뒤에 좀더 規模를 크게하여 謄寫版으로 謄寫하기까지 하엿지요. 그때 編輯을 내가 마터 하엿서요.
정말 活字化하여 보기는 그 뒤 「大韓興學報」라 하여 東京留學生들 손으로 發生하든 月報 가 잇섯는대 그것을 마터 編輯하기는 그때 東京高等師範을 다니든 張膺震氏가 하고 잇섯 서요. 그래서 「大韓興學報」에 글을 내고 십허서 「가버번-」 무에라고한 小說 한?‡을 썻지 요.
梁白華 - 네 나도 한번 본 듯한 記憶이 나요. 가버린 무에라고 하여 시앗보고- 博川松林 한가가 엇저고 엇저고 한 內容의 小說이엇지요.
李光洙 - 용케 기억해 주심니다. 올해요. 內容이 그러햇지요. 넘우 오래여서 인제는 題目조차 다 이젓군요. 그 小說을 한篇 써서 張膺震氏 집으로 수차 차저 갓다가 참아 「이게 내 쓴 小說이요」하고 내어놀 勇氣가 업서 그양 도로〈239〉 가저 오고 또 도로 가저오군 하엿지요. 여러번 이러다가 마즈막엔 놀너간 모양으로 그 집으로 차저갓다가 이저버린 체하고 슬며시 原稿를 책상우에 놋코 왓지요. 그랫더니 그 뒤에 보니 活字가 되어 雜誌에 실렷겟지요. 대단히 愉快하엿서요.
金岸曙- 그때가 李寶鏡時代이엿슴니다 그려.
李光洙 - 그러치 寶鏡이라 햇지요.
金東仁 - 寶鏡이라니?
李光洙 - 내 兒名이 寶鏡이라 함니다. 우리 어르신네가 나를 나을 때에 꿈에 거울을 어더 보섯대요. 그래서 寶鏡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섯담니다.
「大韓興學報」 뒤에 얼마 잇지안어 이번에는 家族制度를 改革하자는 그런 뜻으로 「情育論」 이란 한篇의 글을 皇城新聞에 投稿하엿더니 멧칠 뒤에 그것이 글세 바로 社說欄에 낫겟지 요. 皇城新聞이라 하면 그때
張志淵氏等이 社說을 쓰고 잇섯지요.
그러치만 두篇을 이러케 내는 것만으로는 아모래도 表現慾을 滿足식킬 수 업서 악가도 잠 간 말슴하엿슴니다만은 靑山學院다니든 文學靑年들끼리 말하자면
金讚泳 玉宗鏡(이분은 米國 가 잇다), 卞鳳憲, 金一 等 여러 사람들과 더부러 謄寫版回覽雜誌를 만들고 約20名 會員이 一週日에 한번식 모여 小說과 시이약이를 하엿지요. 더구나 남들이 文藝에 趣味붓처주기 위하여 나는 一週日에 한번식 모이는 이 會合에서 혼자 演劇도 하여가며 小說이야 기를 아모조록 자미잇게 하여 들니엿지요.
이 少年會에서는 文藝以外에도 運動을 ?勵하여 나도 뻬쓰뽈의 피취 캣취를 다 하여 보앗 대요.

無情 쓴 動機와 經過
金東煥 - 無情은 엇던 動機로 쓰섯서요.
李光洙 - 나는 아시다십히 家庭的으로 肉親의 사랑을 못밧고 자라난 사람이외다. 어릴 때에 아버지, 어머니를 갑작이 다 여이엇스니까요. 그때 불상하게 도라가신 아버지, 어머니의 일을 늘 글노 써보고 십다고 생각하엿지요. 그래서 각금 端片 端片으로 詩의 形式으로도 쓰고 小說의 形式으로도 써봣지요. 그러든지음 東京〈240〉 早稻田大學에 잇슬 때 中學校에서 보내주든 20圓式의 學費를 가지고는 밥갑 물고 冊 사고하면 조곰도 餘裕가 업서서 늘 옷 한벌 못하여 입엇지요. 그럴 때에 沈天風君이 每日申報社長 阿部充家氏에게 紹介하여 줄 터이니 每日申報에 글 쓰라 그러면 한 달에 다만 얼마라도 學費補助가 될 돈이 생기리라고 말합데다 그려. 그래서 窮한 판에 돈준다는 생각에 그러라하고 처음에는 「東京 雜信」이라 한 題下에 隅田川 강물이 엇덧타는 이약이도 쓰고 福澤諭吉의 무덤을 가 본 이약이도 써서 原稿를 보냇더니 5圓式 每月 보내줍데다. 그때 이 돈을 퍽으나 고맙게 밧어썻지요. 그러든지음 이번에는 「小說」를 쓰라고 勸하는 片紙가 왓습데다. 그러고는 新年號부터 낼 作定이니 題目만이라도 조흐니 곳 通知하여 달나고 電報가 왓습데다. 보잘 것 업는 내 글을 電報로까지 督促하여 주는 일에 感激하여 늘 내 가슴밋바닥에 흐르는 차듸찬 情緖의 表現인 「無情」이란 表題를 擇하여 가지고 마츰내 小說을 쓸 決心을 하고 表題를 「無情」이라 하겟노라 하고 答電하고 나서 興奮하엿든 김에 곳 붓을 드러 안즌자리에서 原稿紙 72枚를 써 노앗슴니다. 그때의 愉快함이란 比할 데가 업섯슴니다.
「無情」쓰는 동안 新聞社에서 꼭꼭 10圓式 돈을 붓저줍데다.
梁白華 - 「五道踏破記도」 그때든 가요.
李光洙 - 바로 그 뒤엇지요. 역시 學費에 窮하여 잇슬 때에 沈天風이 每日申報 囑託으로 잇는 中村權太郞이라는 이에게 『 李光洙란 靑年이 글재주가 잇스니 글을 좀 쓰이게 하고 그리고 글을 쓰이되 實際로 이곳저곳 가〈241〉 求景하게 한뒤 씨우게 하면 매우 讀者의 興味를 끄을 것이라고」 勸하여서 그대로 地方旅行을 식키고 紀行文을 싯게하겟다고 곳 決定이 되여 나한테 그 뜻으로 便紙가 왓습데다. 그때는 마츰 放學이 되어 친구들은 모다 故鄕으로 나가고 나만 牛?區에서 林圭氏 마누라가 밥지어 주는 것을 먹고 잇슬 때 그도 조켓다고 곳 뛰어나와서 「忠淸南北, 全羅南北, 慶尙南道」의 五道를 旅行키로 된 것이지요. 그때도 퍽으나 愉快하엿담니다.
梁白華 - 「파리」를 쓴 것은?
李光洙 - 그보다 조곰 뒤엇지요.
朴月灘 - 「파리」라니?
梁白華 - 春園이 單行本을 낼 作定으로 約200枚나 단꺼번에 「書?し」하여 六堂이 하는 「新文館」에 주엇는데 그것이 檢閱에 드러가서 그만 ?務總監部에서 한 장도 안 남기고 XX되여 버렷는데 그것이 크게 名文이엇더래요. 들니는 말에 警務總監部에서도 XX는 하면서도 참 잘 쓴 글이라고 稱讚하드래요.
李光洙 - 六堂은 그 뒤에도 늘 「파리」가튼 글을 다시 쓰라고 작고 졸느지요.
金東煥 - 詩, 小說, 戱曲, 文藝評論等 各方面으로 活躍하시는데 그 중에 어느 것을 本領으로 삼슴니까.
李光洙 - 亦是 小說입데다. 나는 小說家라는 名詞가 몹시 듯기 실흐면서도 結局 小說쟁입데다. 前日도 여러 달 동안 붓이라고 잡아보지 안타가 오래간만에 붓을 드럿더니 亦是 小說이 써집데다그려. 그래서 나는 亦是 小說家구나 하고 혼자 苦笑하엿담니다.
金東仁 - 여러小說 中 第一會心의 作은?
李光洙 - 「無情」은 처음 쓴 것임으로 조흐나 구즈나 늘 愛着이 가며 그러고는 「端宗哀史」외다. 短篇으로는 「嘉實」이고.
金東仁 - 내가 쓰면 端宗을 그러케 아니 꾸미겟서요. 좀더 死六臣을 살녀노치요.
朴月灘 - 그것은 見解의 相違지요. 史實을 史實대로 쓰느냐 또는 藝術家의 想像力에 맷기어 그 性格과 그 事件을 自由롭게 制作하겟느냐 함이.
金岸曙 - 今後로는 엇든 길로 나가시려 하서요.〈242〉
李光洙 - 劇作에 努力해 보려고도 함니다. 小說보다도 詩歌보다도 戱曲이 藝術形式으로서는 더 한層 進步한 것으로 늣겨저요. 그래서 나는 그 동안 녯날 후-머이러앗트로부터 최근은 썩스피어 것을 거진 다 보고 잇슴니다. 今后 朝鮮文壇에 劇運動과 劇作熱이 全盛할 날이 올줄 멋슴니다. 나는 微力하나마 그 方面에 힘써 보고저 함니다.
金東煥 - 이밧게도 뭇고 십흔 말슴이 만흐나 그 以后의 朝鮮文壇 이약기는 大槪 누구나 짐작하는 常識이 되기 쉽겟고 「無情」 以后의 文壇史는 누구나 普遍化하여 잇는 智識이기에 여기서는 더 話題를 삼지 안켓슴니다.
또 오늘 저녁 會合의 主要目的이 先輩
春園으로 더부러 愉快하게 一夕의 談話를 논으려함에 잇섯슴으로 말슴은 以上으로 끗치고 이제는 詩壇多士 모엿스니 酒杯나 논우면서 詩吟이나 하기로 합시다. (繼續하야 酒宴 及 詩會)〈243〉

洗劍亭詩席에서
李光洙
煩惱無盡誓願斷
衆生無邊誓願度

梁白華
廬山烟雨浙江潮
未到千般恨未消
到得還來無別事
廬山烟雨浙江潮

金岸曙
잔노코 하는말이
모다 녯날情

라듸오 자즌가락
더욱 조와라

金東仁
小說을 쓰기에는 조히가 적고
小說 以外에는 딴 재조업노라

朴月灘
酒國然
論己?
明日有意抱琴來

金東煥
洗劒亭上磨一劒
此劒何時光茫發〈243〉
〈234-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