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最近朝鮮의 轉變 25年間- (文學) 朝鮮文學의 發展, 庚戍以來 二十五年間 -李光洙

이강기 2015. 10. 1. 18:08
잡지명 삼천리 제6권 제7호
호수 제6권 제7호
발행년월일 1934-06-01
기사제목 最近朝鮮의 轉變 25年間- (文學) 朝鮮文學의 發展, 庚戍以來 二十五年間
필자 李光洙
기사형태 문예평론



庚戍年 以後 오늘까지 25年 사이에 朝鮮文學이 얼마나 發展되어 왓슬가 뭇는다면 作家의 數爻로 보아 外國에 比하야 아직도 적고 作品의 質에 잇서 그러케 大成한 傑作이 업스니 括目할 飛躍的 發展이라고는 할 수 업겟스나 그러나 이 25年 동안은 「靑年朝鮮」이 在來의 因襲이나 舊道德이나 녯 權威에 反抗하야 새 生活에 入하려 하는 高悶期요 生長期인 것만치 그에 따라 그 生活의 꼿인 文學도 새것을 짓기에 無限한 感激과 創造의 歷史를 거듭하여 왓든 것이다.
무릇 政治的으로 覺醒期에 잇는 一民族에게는 반드시 그에 따라 覺醒의 文學, 創造의 藝術이 잇는 法이다. 이러한 點에서 朝鮮文學은 비록 햇수로 보아 25年 사이가 결코 긴 것은 아니로되 4,000年의 歷史上 일즉 보기 드문 藝術的 活動期에 잇섯다고 보아 조곰도 過言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짜른 이 25年間의 文學藝術의 特徵을 擧한다면 녜전은 空想的이요 詩的 神秘的임에 反하야 이 時代의 文學은 좀더 生活的이요 現實的이요 散文的이엇다. 哀愁를 그려도 몸에 慘透하는 「哀愁」요. 苦悶을 그려도 畢民族 文學에선 發見할 수 업는 白衣人的 獨特의 「苦悶」의 姿態엿다.
이졔 最近 25年間의 文學發展의 자최를 보기 위하야 몬저 古朝鮮의 文學藝術을 一括하야 簡單히 스처보고 本論에 入코저 한다.



멀니 數百年 前에 잇서서는 新羅에 文學도 美術도 發達한 時代가 잇섯다. 헤일 수 업슬만한 戰亂과 時間의 磨減을 지낸 今日에 잇서서도 新羅의 舊都 慶州 其他에는 新羅文化의 一面을 말하는 優秀한 建築彫刻이 남어잇고 또 三國遺事 均如傳 等에는 數千篇의 當時 아름다운 詩篇이 收錄되여 잇다.
眞聖女王(1045年 前) 時代에는<68> 「三代目」이라고 하는 勅選歌集까지 잇섯다.
그러나 高麗以後 朝鮮에 漢文學이 盛하게 됨으로 本處 支那에 잇서서 칭찬을 밧게까지 된 文人 詩人을 輩出하얏스나 朝鮮語의 朝鮮文學은 전혀 돌보지 안엇다. 李朝 第4代
世宗大王때 훌륭한 한글이 發明되여 自由自在로 朝鮮語가 記하게 되고 또 大王自身 純諺文으로 「龍飛御天歌」 「月印千江之曲」 等 大敍事詩篇을 지음으로 朝鮮文學의 範을 삼게 하얏는대도 不拘하고 支那文學에 耽溺한 朝鮮人은 겨우 「時調」라는 國風詩歌 數百 篇과 小說戱曲 이약이 等 數十篇을 남겨 노앗슬 뿐으로 一民族에 相應되는 文學을 制作치 못하고 맛치엿다. 이 詩篇들은 「歌曲源流」 「靑邱永完」 「海東歌謠」 等에 收錄되여 잇다.
이 小說이라는 것은 九雲夢(漢譯 게-르博士의 英譯이 잇다. THE clond Fpeam of THE NINE 라는 標題로 런던에서 發行되여 잇다. 「春香傳」 (이것은 朝鮮人에 가장 만히 愛誦된 戀愛歌劇으로 英譯 佛譯 獨譯이 잇다. 漢譯도 잇다. 또 洪吉童傳 等이 이 代表이다. 其中에서도 春香傳은 좃튼지 납브든지 가장 잘 朝鮮人의 마음을 낫하내엿다.



그리고 現代文學의 始作은 的確히 年代順으로 말하기 困難하나 日露戰爭이 끗난 때라 할 수 잇겟다. 포스마스 日露講和條約의 結果 當時의 韓國인 朝鮮은 첫재 日本의 保護國이 되고 드듸여 明治 43年 8月 29日 日本에 倂合되엿다. 그 사히 겨우 7年 그러나 이 7餘年은 朝鮮人 마음에는 700年보다도 더한 變化을 주엇다.
이 時代에 일어난 것이 所謂 愛國歌時代이다. 그것은 愛國올 테-마로 한 ?情詩歌가 몃百 몃千인지 낫하낫슴으로 그럿타. (中?-원본) 만은 것은 아노님과 슈도님으로 主로 寫本 또는 謄寫版으로 극히 듬올게 活字印刷로 全朝鮮을 風靡한 것이다. XX XX한 詞나 調도 中?-이런 詩歌는 지금은 한 篇도 남어잇지 안타. 中?-그러한 詩歌는 다시 活字로써 나올 機會를 永久히 이러버렷다. 더구나 이곳에 引用하기까지 困難하겟다.<69>
이런 類의 詩人들의 가장 질겨하는 테마는 祖國의 녯 光榮에 대한 回顧. 滿洲나 시베리아 太平洋 저쪽의 憧憬 XX라 하는 것갓흔 것이다.
이런 詩歌가 當時 人心 특히 靑年學生의 맘을 움직이는 힘은 실로 큰 것이엿다. 또 만은 志士나 靑年들은 이런 詩歌를 吟誦하면서 事實上 시베리아나 滿洲나 太平洋 저쪽에도 漂浪의 客이 된 것은 그 數로 萬을 가지고 헤알일 것이다.



이 愛國詩歌時代에 뒤를 밧든 것은, 혹은 次代의 魁가 된 것은
崔南善의 散文詩 時代이다. 崔南善은 韓國政府가 東京에 派遺한 第1回 留學生中의 한사람으로 府立一中과 早稻田大學의 文科에서 배운 사람인 바 倂合되기 前前年 愛國的 熱情에 타올나 學業을 抛棄하고 歸國하야 「少年」이라는 月刊雜誌를 發行하얏다. 그것은 明治 41年이다. 當時 그는 18의 少年이엿다. 그는 그 誌上에 만흔 散文詩를 發表하얏다. 그의 詩形은 모름직이 트르케녭흐의 散文詩에서 배운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內容은 全然 오리디날한 것으로 同族愛, 希望力, 自己犧牲과 갓흔 것이다. 즉 愛國歌時代의 內容을 좀더 深刻하고 複雜하고 洗鍊한 것으로 自由스런 散文詩의 그 안에 담은 것이다. 이 崔南善式 散文詩로 後年의 朝鮮의 新體詩가 나온 것이다. 約言하면 單純한 4·4調나 7·5調의 千篇一律的 愛國詩歌에 대한 不滿으로 崔南善의 散文詩가 나오고 그 散文詩의 너무나 散文的 不滿으로 좀더 整理된 좀더 拘束的인 新體詩가 나왓다.
이곳에 더 한가지 重要한 것이 잇다. 그것은 좀 뒤에 일이나 崔南善이 散文詩로부터 轉回하야 時調의 形式을 取하얏다. 數十篇의 作品을 發表하얏다. 時調는 우에서 말한 것갓치 朝鮮 古文學의 根幹이 되는 詩形이나 그 녯形式에 새로운 內容을 담운 새 文學의 形式으로써 復活식힌 것도 역시 崔南善이다.
이와 갓흔 經驗을 지내 朝鮮에 새로운 詩의 形式 新體詩와 時調와의 基礎가 싸어젓스니 이 新體詩에 잇서서는
朱耀翰 金岸曙 朴月灘 金素月 金巴人 等을 나엇스며<70> 時調에 잇서서는 崔南善 李驚山 李秉? 鄭寅普 等을 나엇다.
朱耀翰은 一高에 배운 적도 잇고 川路流虹에게 칭찬도 밧엇든 사람으로 「아름다운 새벽」 「봉사꼿」 等 詩集를 내엇다. 그는 크스찬으로 職業은 新聞記者이나 그 머리 明哲, 感情의 銳敏 良心의 맑음을 가진 것을 特色으로 하고 그의 詩는 극히 明朗하며 속일 수 업는 젊은 朝鮮의 마음의 노래다.
金岸曙는 慶大의 사람 大正 9年頃 「懊惱의 舞踏」라는 譯詩集을 내여 朝鮮文壇에 뽀트레-르 뻬르레-느 等의 詩風을 紹介한 功績이 잇고 또 그 自身의 ?情詩나 아름다운 文章은 一時만히 愛讀된 詩人으로 朝鮮新詩壇 創設者의 한사람이다.
朴月灘은 「黑房秘曲」이라는 詩集을 내고 金素月은 진달내꼿이라는 詩集을 내엿다. 두 사람 다-10年來 一切 沈?을 직히고 잇스나 金素月의 民謠風의 哀調을 띄운 詩는 실노 朝鮮에 잇서 民謠詩나 童謠의 魁이며 模範도 되엿슴으로 지금까지도 生命을 일치 안는다.
그리고 金巴人이다. 그는 大正 8年의 XX運動以來 全朝鮮의 靑年을 風靡하든 데카단風潮나 「惡의 華」式 詩歌에 대하야 굵고 힘세게 反抗의 소리를 놉히 질은 詩人으로 그 「國境의 밤」이라는 詩集은 朝鮮文壇에 크다란 波紋을 그리엇다. 굵은 線 野生的 힘 反抗-이런 것은 그 精神이나 手法을 지금까지의 耽美派 藝術至上派的 傾向에 대하야 어느 意味로서는 崔南善 以前 愛國歌時代에의 廻前이라고 할 수 잇스며 또는 뒤에 푸로詩의 先驅가 되엿다고 할 수 잇는 것이다.
梁柱東은 「朝鮮의 脈膊」이라는 詩集을 내여 民族愛를 高潮하고 잇다.
그리고 時調의 이야기나 時調에 잇서서는 崔南善의 「百八煩惱」와 李驚山의 「驚山詩集」과 또 李秉? 鄭寅普의 作 어느 것도 다 愛國詩歌時代의 올소독스라고 볼만한 어느 것이나 檢閱官에 許할만한 程度에 잇서서 「民族」을 中心思想으로 하고 잇다. 특히 驚山의 詩는 現代時調의 피라밋트라고 할 수 잇다.<71>



그리고 다음은 小說이다. 小說은 그 量에 잇서서나 質에 잇서서 또는 讀者의 範圍의 廣汎한데 잇서서 今日의 朝鮮文壇에 잇서서는 主人이라 해도 좃타. 事實上 4,5年來 新體詩는 몃 사람의 새 作家를 나은 外에는 거진 자최가 업다. 다만 時調만히 李驚山 李秉? 外 數人에 의하야 進境을 보히고 잇다. 그러나 時調는 日本에 잇서 和歌와 갓치 文藝的으로 訓練된 階級만히 賞觀하는 것이다. 一般大衆에 먹일만한 性質의 것이 아니다. 大衆의 食物은 엇제든지 小說이다.
朝鮮에 歐米風의 形式의 小說이 일기 始作한 것은 지금으로 30年 以前에
李人植이라는 이의 「血淚」나 「鬼의 聲」 等의 作品이다. 그는 純粹의 朝鮮語로 現代의 朝鮮生活을 그린 것이나 단 現代的 思想의 背景이 根據를 가지지 못하얏다. 그럼으로 그의 作은 後年 新文學運動과는 何等 有機的 關係를 갓지 못하얏다.
참으로 새로운 民族意識이나 歐米思想에 覺醒된 小說의 낫하난 것은 歐米大戰이 한참 버러질 大正 5年頃이다.
當時 朝鮮 唯一의 朝鮮文新聞인 每日申報 崔南善의 「靑春」 東京學生들이 發行하든 「學之光」 其他雜誌 그리고 XX運動이 일어나 寺內武斷政治로부터 齋藤實大將의 所謂 文化政治가 잇게 되여 2,3의 日刊新聞과 十數個의 月刊雜誌가 發行하게 됨으로부터 새 文學運動은 他部門의 文化運動과 갓치 蔚然히 일어낫다. 우에 말한 詩人들도 대개 이때 나왓다.
이때에 小說에 잇서서는
金東仁 玄憑虛 廉想涉 羅稻香 等이 나왓다. 그들은 벌서 民族意識에 拘泥되지 안코 當時 世界的 潮流인 人生主義에 基本인 因襲에 대한 反抗戀愛中心의 感情의 解放 現實의 暴露 그리고 朝鮮의 現實에 대하야 XX XX XX 等를 加味한 것이다.
이 小說家들은 모두다 東京 留學生으로 大戰前後의 日本의 思想이 文藝에 影響된 것이 만타. 所謂 大震災前의 靡爛된 思想에 影響된 것이 만타.
그러나 이때에 新文藝甘味에 醉한 靑年들은 文藝에로 한때도 文藝가 아니면 밤도 낫도 새이지 못하는 狀態이엿다.<72>
金東仁은 이들 作家 中에서는 가장 優越한 手腕을 가진 作家다. 그는 만히 短篇을 쓴다. 그러나 「감자」 「발고락이 달멋다」 等은 가장 조흔 것이라고 하고 「감자」는 數年 前 新潮에 譯載되엿든 일도 잇다. 이 作者는 觀察이 奇警하며 위잇트와 유-모아에 ?富하고 因襲이나 道德이나 世評이나 그런 것에 關心치 안는 自由自在로 自己가 생각한 대로 써서 讀者의 머리를 엇질하게 한다.
玄憑虛는 「지새는 안개」라는 短篇集을 내엿는데 그의 作은 어느 것이나 실로 잘 均整된 常識에 富한 아담한 筆致로 특히 그 文章은 아름다웁다고 말들을 한다.
廉想涉은 주로 長篇作家이나 그의 作은 엇더케도 澁하며 純*하며 深刻한 늣김을 준다. 그 텁텁한 點까지도 떠스트엡스키式이라고 할 수 잇다. 그의 作은 「標本室의 靑蛙」 「萬歲前」 「해바라기」 「三代」 等이다. 지금도 作家的 生活을 繼續하고 잇서 푸로派에서는 民族主義文學의 大將으로 불은다.
羅稻香은 젊어서 죽엇다. 그의 「幻戱」 「벙어리 三龍이」는 그의 일홈을 永久히 朝鮮文學史上에서 머물게 한다. 특히 「벙어리 三龍이」는 가장 조흔 作으로 例로써 引用되며 映畵化되여 잇다. 그는 로맨티시즘의 傾向이 잇섯다.
그러나 이 作家들에게는 지금 말하는 것 갓흔 指導的 思想은 업섯다. 어느 쪽이냐 하면 藝術을 위한 藝術과 갓흔 耽美派的 데카단的 傾向이 잇서 人生에 대한 깁흔 洞察이나 高遠한 理想이라는 것 갓흔 論理的 乃至 社會的 要素가 缺하엿다. 언제든지 遊戱的이엿섯다는 것을 免할 수 업다. 이것은 詩壇에 대하야서도 同一하다.
이때에 나온 詩에 잇서서 우에서 말한 金巴人의 「國境의 밤」이고 小說에 잇서서는
崔曙海의 「脫出記」이다. 이런 作品과 前後하야 朴英熙 金基鎭 兩人의 푸로文學의 狼火가 잇섯다.
崔曙海는 小學校를 맛친 것 뿐으로 혹은 荷揚人夫도 되고 혹은 樵夫도 되며 혹은 滿洲에 放浪하며 혹은 중도 되엿든 사람으로 그 「脫出記」는 自身을 모델한 것일<73> 것이다. 間島에 잇서서 XX運動者들의 生活의 一片을 그린 것이 「脫出記」이나 그의 健實한 품 强力的인 품 線의 굵은 것은 꼬리키의 作品에서 밧는 것 갓흔 엇던 압력을 밧는 것이다. 世紀末的 變愛物的 文學에 빠젓든 靑年들은 이 「脫出記」에 잇서서 文學의 새로운 感激을 바덧슴에 틀님 업섯다. 文學은 결코 遊戱가 아니다. 그것은 피로 記錄한 人間의 惡戰苦鬪의 記錄이 아니면 안된다라는 新文學觀을 젊은 靑年에게 가슴 깁히 삭이여 주엇슬 것이다.



羅稻香 죽고 玄憑虛는 小說의 붓을 던지고 지금까지 小說을 쓰고 잇는 사람은 人生派라는 金東仁 民族主義派라고 부르는 廉想涉 그리고 準푸로派라 할 만한
崔曙海뿐이고 其外는 尹白南 崔獨鵑 等의 大衆作家들을 除하고는 當時 作家로 生命을 保存하고 잇는 사람은 업다.
그러면 新興의 푸로文學이다. 압헤서도 잠간 言及한 것 갓치 朴英熙 金基鎭 等은 雜誌 「開闢」을 牙城으로 안리 빠르삐스의 紹介로 始作되여 맑쓰主義의 文學理論을 紹介하며 作品도 내고 기성文壇 기성作家들을 뿌르조아 文士라고 하야 罵倒도 하며 큰 氣勢를 보혓다. 新進의
崔曙海도 그 陣營에 迎入되며 다음으로 趙明熙는 詩로써 李箕永은 小說로써 푸로陣營의 攻防力을 세웟다. 이들로 日本 푸로作家들의 作品도 多少 紹介되엿다.
푸로文學은 꼭 公式에 의한 것으로 說明할 必要를 認치 안는다. 이것이 如何히 朝鮮靑年間에 熱狂的으로 歡迎되엿다 한 것은 실로 驚異 그것이다. 푸로文學의 機關紙然이든 開闢은 놀날만한 發行部數가 增加되고 그것으로 말미아마 드듸여 當局으로 發行을 禁止 當하얏다. 開闢雜誌가 發行禁止된 后로 푸로派의 文士들은 日刊新聞의 文藝欄에 의하얏스나 그것도 버릴 수 업섯든 것이다. 그리고 最後의 堅壘인 雜誌 「朝鮮之光」도 지금(?) 去勢되여 잇다. 繼續 發行도 不能狀態인 것 갓다.
푸로文藝同盟
캅푸詩人同盟 等 (記者-이 두 가지는 「朝鮮」 푸로藝術同盟의 錯誤인 듯) 이 잇스나 푸로文學은 그리 큰 文學的 收獲 (主義的 收獲은 잇섯는지 몰으나)이 업시 停滯狀態에 잇다. 그러나 이 停滯는 반다시 檢閱의 XXX 뿐이라고<74> 할 수 업다. 作家自身의 力量과 努力과 또 그들이 把持하고 잇는 文學理論의 너무나 狹溢한 目的論的이엇는 대도 責任이 잇다 할 것이다. 이것은 저 日本의 푸로文學에 잇서서도 갓흘 것이다. 朝鮮푸로文學運動은 「文藝戰線」 「戰旗」 等의 一分派에 不過하엿슴으로-
그러나 푸로文學運動이 朝鮮의 文學에 밧친 貢獻 그 剌戟 그 이데오로기-의 影響은 不滅할 것이다. 今後의 文學은 어는 意味에 잇서서는 푸로文學의 理論 瀘過器를 透하야 造成될 것이다. 이 意味에 잇서서 朝鮮의 푸로文學은 벌서 그 役割을 遂成하얏다고 할 것이다.



却銳 限한 紙數도 벌서 다 되엿다. 朝鮮文學全體에 대하야 槪論的 若干의 考察을 하고 이 稿를 맛치기로 하자. 그것은 혹은 朝鮮文學의 今後의 傾向에 대하야의 多少 暗示를 包含하얏는지도 몰은다.
大體 朝鮮民族은 적어도 今日의 狀態로는 文學에 그다지 關心을 갓게 못될 것이라고 生覺한다. 그들에게는 文學이나 藝術 等은 잇서도 업서도 조흔 程度의 것으로 그것이 生活의 必須條件으로는 되지 안엇다. 가장 文學을 조와 할 靑年學生들까지 文學이나 藝術에 대하야 그다지 要求를 갓지 안은 것 갓다. 하물며 現社會 各部門의 指導者階級에서 잇는 40歲 以上의 사람에게는 文學은 一種의 有害한 사치品에 不過하다.
文字의 나라라는 朝鮮에 잇서 이만큼이나 文學에 冷談하다고 하는 것은 좀 異常한 늣김을 늣길 것이로대 그것에는 理由가 잇다.
第一 朝鮮에는 이 30年來 平安히 文學이나 藝術을 맛불만한 그러한 餘裕를 갓치 못하얏섯다. 그들은 그들의 民族的 運命의 急激한 變遷에 대하야 너무나 政治的 관심에 몰두하지 안으면 안되엿다. 원래 朝鮮人은 정치적이라고 하나 그러치 못하고 그러한 環境에 잇게 된 그들노써는 깁흔 政治的 關心을 갓흔 것은 當然 至極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狀態임으로 志士的 氣魂을 가진 人士들에 대하야서는 文學갓흔 것은 閑人의 일이나 無聊를 慰하기 위한 餘技 末技다. 그럼으로 아직 文藝를 가지고 終身의 業으로 生覺하는 사람은 업다. 文學은 一種의 손쉬운 副業에 不過하다.
다음에 朝鮮人의 生活의 經濟的 窮乏은 해를 따러 날을 따러 窮乏하야 진다.
文學이나 藝術를 조와 할 마음의 餘裕도 또는 經濟的 餘裕도 업다. 雜誌 一冊 小說 一冊도 살 돈이 업스며 살 힘이 나지도 안는다. 이러한 狀態임으로 詩人이나 文士가 如何히 作品을 지여도 살 사람이 업다. 그것으로 먹을 수 업게 된다. 살녀며는 金融組合 面所의 書記라도 되여 20圓 30圓의 月給이라도 밧어야 한다.
第三에 朝鮮의 檢閱制度이다. 이것은 朝鮮人이 되어 보지<75> 못하면 참으로 想像도 안된다. 今日 朝鮮人의 思想을 大分하면 民族主義者 XX主義者들노 논을 수 잇다. 가장 갓가운 近來에는 世界思潮인 파시씀에 剌戟되여 兩者를 合하얏다 할 民族社會主義갓흔 이데오로기-가 急速한 텐포로 構成되여 잇스나 이것을 合하면 三種이다. 그럼으로 作家가 가장 興味를 갓고 大衆이 가장 期待하고 잇는 것은 이 三種者의 이데오로기-에 오는 (中?) 完全히 -되여 잇다. 作家는 엇던 興을 어든 뒤 폔을 들어 原稿紙에 向하면 첫재 낫하나는 것은 (中?) 잇는 것은 아니다. 한 感作家에게 대하야는 X과 原稿의 잇는 곳 어느 곳에서든지 그의 (?)을 늣긴다. 그곳에서 第一의 感興도 第二의 感興도 사라저 버리고 (?) 테-마를 차저 맛치 看板쟁이가 그 主人의 마음에 맛도록 意匠을 하드시 (?) 筆法으로 쓰지 안으면 안된다. 今日의 朝鮮人이 쓴 文學은 이리하야 된 것이다.
또 最後에 新文學의 歷史의 짤븐 것도 他 部門의 文化 특히 敎育의 普及되지 아는 것도 또한 人材가 나오지 안는 것도 理由는 된다. 어느 便이든지 朝鮮의 今日은 文學에 잇서서 福이 업는 것은 事實이다.
然이나 朝鮮文學의 將來는 엇더한 것인가. 그것은 民族主義的일 것이다. 혹 더 適實히 民族社會主義的일 것이다. 그것은 朝鮮人 固有의 人道主義思想를 加한 더-그 民族性인 逃避的 樂天主義나 絶望的 哀調속에 佛敎式 達觀의 微笑를 석근 것이다. 밝는 날의 力과 光榮에 대한 憧憬과 逃避的 絶望的 達觀哀調와 微笑 이것은 一見 인콘파디뿔갓흐나 이것들을 合한 것이 실로 古今을 싸고 돈 朝鮮文學의 特徵이다. 그것은 오래 동안의 歷史的 民族的 生活過程의 影響인지 몰은다.
附記 朝鮮文學에 대한 筆者自身의 役割은 一切 쓰지 안키로 하얏스며 또 本稿는 年前 雜誌 「改造」에 낫든데서 그냥 引用한 箇所가 만헛다. 그것은 다시 稿를 改할 틈이 업섯슴도 一理由이겟지만 今에 三千里社에서 請하는 合倂後 25年間 文學이 또한 「改造」에 發表한 그 意味와 大差업섯든 까닭이다.

三千里 編輯者 添記
本稿에는 朝鮮 新文學史上 絶大한 貢獻을 한 筆者 李光洙氏의 地位가 全然 省?되엿슴으로
春園에 대한 稿를 補充하는 새로운 原稿를 다른 機會에 실켓슴니다.<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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