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삼천리 제8권 제4호 | |||
호수 | 제8권 제4호 | |||
발행년월일 | 1936-04-01 | |||
기사제목 | 朝鮮文學의 世界的 水準觀 | |||
필자 | ||||
기사형태 | 문예평론 | |||
歷史의 짜름을 歎息 李光洙 朝鮮文學의 역사를 회고하여 보면 짤습니다. 梅月堂, 李人稙의 시대를 지나서 비로소 新文藝運動이 잇섯스니 이럭저럭 줄잡어도 약 20년이 될가 말가 합니다. 이 20년의 어린 역사를 가지고 英佛露 등 수백 년 수천 년의 文藝史로 가진 여러 先進文化國家에 비한다 함은 억지에 갓갑습니다. 박구어 말하면 우리 文壇은 연약한 늣김을 自體로 안저서 안가질 수 업습니다. 따라서 우리 文壇에 게신 여러 작가의 春秋를 보면 모다 30대, 나을 먹엇대야 40대의 人들이외다. 30, 40의 젊을 연대에 잇는 작가가 「人生」과 「世事」를 보고 늣기면 얼마나 깁히 늣겻겟슴니까. 천재는 연령을 초월한다는 말도 잇기는 하지만 그런 것은 특수한 예외다. 외국의 작가들을 보아도 만인을 감격케 하든 걸작이란 대개가 老成한 뒤에 된 것이더이다. 톨스토이도 청년시절에 몃가지 작품을 쓰기는 썻지만 정말 성숙한 대작인 「復活」이나<308> 「안나·카레니나」나 「戰爭과 平和」 가튼 것은 6, 70의 老後의 일에 屬하엿습니다. 「토-마쓰·하-디」나 「빠나드쇼-」도 마천가지지요. 그밧게 누구누구하야 文學史上 不朽의 名著를 내보낸 작가들치고 4,50을 훨신 넘지 안은 이가 잇서습니까. 문학은 「苦悶의 象徵」이라고 말한 이도 잇거니와 진실로 인생에 대하야 연구하고 고민하는 거기에서 예술이 생김니다. 깁흔 연구와 깁흔 觀照와 깁흔 고민이 업시 되어진 문학은 일시는 세상의 인기를 어들 수 잇겟지만 수백대, 수천대로 흐를 작품이 못됨니다. 이 고민과 觀照와 연구는 반드시 세상의 온갓 맛 온갓 모습을 거처낸 春秋에 富한 이의 손으로 되기가 10上 8, 9일 줄 생각함니다. 그러타고 朝鮮文學은 英佛露 등에 대비도 할 수 업게 수준이 나즈냐 하면 나는 그러케는 보지 안습니다. 가령 金東仁씨의 「笞刑」이나 「감자]가튼 것은 비록 기교에 잇서 幼穉한 점이 잇다 할지라도 英佛語로 번역되어 저쪽 文壇에 갓다가 노을지라도 일류 작가의 작품에 결코 뒤떠러지리라고 생각지 안습니다. 그 외에도 詩壇, 小說壇에 외국문단에 비하야 손색업는 이가 만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특수한 예지요. 朝鮮文壇 전체를 드러 어느 외국의 문단에 비한다면 아직은 質로나 양에 잇서 數步의 뒤저 잇슴을 늣기지 안을 수 업습니다. 莫上莫下한 我文壇 朴英熙 朝鮮文學의 질적 발전은 비교적 遲遲한 감이 잇다고 봄니다. 내가 지금 질적 발전이라는 것은 좀더 특별히 論코저 하는 바이므로 이곳에서 상세히 답할 수 없읍니다. 朝鮮의 작가들은 거진 그 才分이 사실로 우수하다고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술관이 確乎한 신념이 부족합니다. 爲先 近間 數年에 나타난 것으로 본다면 朝鮮의 문학이론은 세계적 수준을 좇아가려고 하는 듯 합니다. 작가들이 또한 이러한 이론을 좇아가려고 무리한 이론을 추종하려 하며 그러므로 무체계 무궤도의 亂步를 진행하는 작가도 잇습니다. 英米露獨佛伊등 諸國의 작가들의 수많은 작품을 전부 읽지 못한 나로서는 確乎한 회답을 피합니다마는 나의 識見을 표준으로 하고 말하면 개별적으로 보아서 朝鮮의<309> 작가도 결코 외국의 작가에 떠러지지 안는다고 생각합니다. 외국의 문화의 선진한 작가라고 擧皆가 우수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역사가 얕은 朝鮮의 작가라고 해서 열등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세계적 문호의 작품 가운데도 사실로 朝鮮의 작가의 작품보다 떠러지는 것이 있읍니다. 한 1년 만에 裟婆의 세계를 보니 朝鮮文壇에도 다소 변동이 있어 보입니다. 유망한 신진 작가들이 많어 보입니다. 기성작가들도 무체계의 길을 거러가는 이가 많어 보입니다마는 앞으로는 작가로서 確乎한 예술관의 기초 우에서 잇는 巨匠이 많이 나온다면 그 때에는 비로소 세계문단을 너머서는 우수한 작가가 나올 것입니다. 이곳에서 개별적 비교는 피합니다. 그것은 무책임한 작가론이 될까 보아서 두려운 까닭입니다. 부분적으로는 세계문단에 떠러지지 않는 조선문학이, 질적 전체적 수준에 이르지 못함은 아즉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나 이것도 시간이 해결할 줄 압니다. 외국문학의 수준을 생각하는 것 보다도 자체의 건설기에서 조선문학은 노력할 것입니다.」 外國作品의 水準엔 到達 兪鎭午 질문에 답합니다. 조선문학의 현수준은 외국의 그것에 비해 과히 떠러지지 않엇다는 의미의 말은 과거에 나 자신도 남에게 한 일이 잇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이번 질문의 취지와는 대단히 의미가 달습니다. 즉 외국의 著名한 文豪나 그의 대표적 걸작에 비견할 만한 작가와 작품은 아즉은 우리 朝鮮서는 찾을 수 업다고 생각합니다. 傑作이란 그렇게 1朝1夕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누구하는 외국의 大文豪를 들어 생각해 보아도 한 사람으로서는 정말 조흔 작품은 그리 많이 쓰지 모햇습니다. 10개 100개 凡作을 써가는 동안에 한 개의 걸작이 나오면 그 걸작으로서 그는 大文豪에 列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므로 朝鮮文學의 수준이 외국의 그것에 비해 그리 떠러지지 않엇다고는 나도 생각하나 이것은 조선문학이 벌서 세계에 자랑할 만한 걸작을 가젓다는 의미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그의 수준에 다시 말하면 보통작품의 정도에 이르럿다는 의미에서입니다. 과거의 조선문학은<310> 이 정도에도 이르지 몯햇섯습니다. 그러나 수년 내로 우리의 수준은 급격히 향상되어 인제는 그들의 수준에 거의 따러왓스며 인제 와서는 우리 속에서도 차차로 세계적 작품이 나올 만한 기초가 완성되엇다고 생각함니다. 그러므로 나는 조선문학의 수준은 외국의 그것에 과히 떠러젓다고는 생각지 않으나 누구의 작품을 외국의 누구의 어느 작품에 비하랴하는 것은 時期尙早라 생각합니다. 이런 좋은 작품을 낳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부과된 문제라 생각합니다. 以上 憑虛, 東仁의 短篇을 例로 金岸曙 고슴도치 제 자식 참, 하다고, 사람이란 어듸까지든지 제 것을 조와하고 사랑하고 그것이 누구의 것보다도 낫다는 생각을 가지는가 보외다. 아모리 그럿타 하기로니 사슴을 가르처 말이라 할 수도 업는 일이니 실로 딱한 일이외다. 姜鏞屹씨가 草堂을 아메리카에다 짓고 好奇의 중심이 되엿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소위 예술로의 작품이라고 인정할 수가 업슴니다. 그러고 張赫宙씨도 동경문단에서 朝鮮말답은 말로 사용하면서 상당히 활동하는 모양이건만은 모도 다 나로 보면 작품의 진정한 가치에 잇는 것이 아니요. 好奇로의 風土奇習的 歡迎에 지내지 아니하는 것이외다. 소위 朝鮮사람으로 넓이 알여젓다는 이들의 작품이 이러한 것에 지내지 못하니 조선문학의 세계적 수준 云云은 얼토당치 아니한 일이외다. 아모리 내 자식을 참, 하게 보랴 하여도 볼 수 업는 것을 엇지 합닛가. 그럿타고 무슨 조선문학을 욕하는 것도 아니요. 사실이 그러하니 엇지하잔 말인가 할 뿐이외다. 다른 나라의 그것에 비해 보랴 하여도 비해지지 아니하는 것을 한갓되이 뽐을 낸다고 될 것이 아니외다. 그런 지라 잇는 것은 잇고 업는 것은 업다고 하는 것이 도로혀 신사로의 체면은 상치 아니할 것이외다. 장편가튼 것은 들어서 말할 것이 업슬 만치 그야발로 유치하고 보니 단편에서나 멧멧 편을 골을 수 밧게 업는데 그것도 도로혀 해외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것이 아니고 朝鮮안에서의 작가에게 구하게 되니 새삼스러이 사람이란 東西를 물론하고 엇더케 好奇에 흥미를 가지는지 놀낼 일이외다. 나 一個의 意思를 말하라 하면 이만 햇으면 하는 정도의 작품으로는 金東仁의 「아라사버들」 「감자」 「名畵리듸아」<311> 「明文」 「狂焰소니타」 그 외 멧멧 편이요. 그 다음에는 玄鎭健의 「舍監과 러브레터」 「故鄕」 그 밧게 1,2편이요. 가물에 콩 나듯이 가다가다 개인의 작품에 한두어 편 업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마 그럿타고 이 작품들을 세계의 수준 그것에 비할 것은 아니외다. 그저 그만 햇으면 하는 정도의 것이라는 말이외다. 그런 지라 나는 발서 이들의 단편들을 에쓰語化식힌 것이외다. 이 압흐로 時日이 지내가서 조흔 작품이 나온 그 때에는 몰으거니와 아직 우리로서는 조선문학을 들어메고 세계적 수준 운운할 것이 아니외다. 그러다가는 그야말로 큰 코를 떼울 터이니 함부로 날 뛸 것이 아니외다. 이 이상 무엇을 더 말할 것인가 바라보니 봄은 하늘에 왓건만은 이 강산에는 아직 文運의 봄이 먼 듯 하외다. 世界的 水準의 規定疑問 洪曉民 조선문학이 세계적 수준에 닷느냐? 혹은 닷지 안느냐? 이것은 매우 흥미를 끌 듯 싶은 문제이나 이는 확실이 생각업는 『넌센스』의 設問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웨냐하면 朝鮮이 세계 중에 하나인 이상 벌서 조선문학도 세계 중에 들 수 잇는 것이라는 것이 하나의 이유요. 그 다음은 과연 세계적 수준이란 무엇을 지칭하느냐 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세계적 수준! 이것은 아무리 해석하드라도 이는 한 개의 풀수 없는 『넌센스』인 것이다. 곧 英, 米, 露, 獨, 佛, 伊, 愛, 印이라는 지칭을 붓치기는 할 수 잇스니 이는 총칭 세계문학이라고 할 수 잇으나 더 나아가 세계적 수준이란 과연 무엇인가. 전기 英, 米이하 諸國속에 朝鮮도 집어 넣면 훌융히 집어 넣을 수 잇을 수 잇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세계적 수준이라는 어떠한 한계를 정할 때는 이것이 퍽으나 『넌센스』로 되는 것이다. 그는 웨냐하면 이는 곧 세계적 수준이란 과연 무엇으로 측정하느냐 하는 것일 것이다. 이와 같이 막연한 말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조선문학이 세계적 수준에 닷느냐? 혹은 아니 닷느냐? 하는 것을 말하기 전에 吾人은 먼저 세계적 수준이란 것을 정해 노코서 이 論을 성립시키지 아니면 아니 될 것이다. 그러면 세계적 수준의 측정이란 어떠케 정할 것이냐.<312> 이 세계적 수준이란 극히 막연하고 麥浪한 말이니 假量 英國文學을 세계적 수준의 것이라 하여도 말이 되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米國文學이 세계적 수준에 닷는 것이라 하여도 말이 되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다. 곧 이러케도 말할 수 잇고 저러케도 말할 수 잇는 것으로 세계적 수준이란 얼는 생각하면 무슨 진리가 잇는 것 같이 또는 존귀한 그것 같이 생각되나 其實 그 본질에 이르러서는 한갈같이 막연하고 麥浪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보편적으로 고찰한 바의 것이나 이를 文藝比較史的으로 생각하드래도 英吉利나 佛蘭西의 문학이 명랑하고 경쾌한 것이 잇다고 생각하면 또는 露西亞와 같은 우울하고 침통한 그러한 것도 잇는 것이다. 그래서 英吉利文學이 최고 수준이라고 하면 또 露西亞文學이 최고 수준이라고도 할 수 잇는 것이다. 이러케 되고 보면 究竟 세계적 수준이라고 하는 것은 퍽으나 성립시키기 어려운 것으로 도저히 될 수 없는 이론이 되고 말게 된다. 따라서 누가 대담하게 세계적 수준이란 이러이러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오, 아울러 蠻勇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영원히 이 세계적 수준이란 確定할 수 없는 것일까. 그럿타! 이 세계적 수준이란 것은 吾人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確定할 수 없다. 따라서 이대로 논리를 달리 한다고 하면 못처럼 삼천리사에서 제안한 것은 이곳에서 묵살되고 만다. 그러나 이를 다시 돌리어 억지로라도 세계적 수준이라고 하는 것은 측정정도로 한다면 먼저 세계적으로 是認받을 만한 문인, 더 나가서는 세계적 文豪라고 지칭 받는 사람들의 작품을 가지고 논의하는 것이라야 될 줄 안다. 곧 세계적으로 알려젓고 세계적으로 시인할 만한 작품을 내엇다는 그런 사람이라야 될 것이다. 예컨댄 英國의 쒝스피어나 露國의 푸쉬킨같은 사람은 이들을 세계적으로 인정하지 아니하기에는 넘우나 畏濫한 擧措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곧 세계적으로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며 또한 吾人이 세계적으로 인정하지 안트래도 세계 각국에서 인정하고 잇다는 데는 누구나 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곧 반대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吾人이 보는 바 문학의 세계적 수준이란 쒝스피어와 푸쉬킨과 기타 세계인이 반대 못할 文人이 지어낸 작품(문학)이 곧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세계적 수준이란 막연하고 麥浪한 말이나 세계상의 諸文豪의 작품을 가지고 세계적 수준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로 可當하다는 것을 발견한다는 말이다. 곧 쒝스피어의 작품이 세계적 수준이다 하면 이에 대하야 반대할 사람은 없을 줄로 생각한다.<313> 그래서 提議하는 삼천리사에서도 註로 今日의 조선문학은 英, 米, 露, 獨, 佛, 伊, 愛, 印 등 諸國의 문학에 비하야 그 수준이 어떠함니까』하던가 또는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 문단의 어느 작가의 어느 작품은 해외 어느 작가의 어느 시대, 어느 작품에 비하야 그 우열을 논하여 주시압』하는 등의 區區한 부속적인 설명을 첨가하엿으나 원래 이 區區한 설명이 첨가된 정도로 이것은 거창한 일이 아니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웨냐하면 거의 세계문학사에 관련된 그것인 까닭이다. 世人이 흔히 英國을 치고 곧 米國을 치는 식으로 이곳에도 英과 米를 넣엇으나 米國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는 英國과 比肩하는 그것이라고 할 수 잇으나 吾人은 米國의 今日文學은 결코 우수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곳에 이 세계적 수준의 漠然且麥浪한 것이 또다시 暴落되거니와 진실로 그러한 정도로 조선문학이 세계적 수준을 잡고 나온다면 그러케 세계적으로 뒤떨어진 문학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今日의 伊太利文學이라는 것도 그럿타. 그러면 究竟 第1項의 註釋的 첨가는 벌서 필요없는 그것이 되어 잇고, 그 第2項은 어느 정도까지 생각해 낸 妥當性을 가지고 잇다. 곧 『좀 구체적으로 하야 우리 문단의 어느 작가의 어느 작품은 해외 어느 작가의 어느 시대의 어느 작품에 비하야 그 우열을 논하라』한 것이 가장 직접적이오 진실인 것을 볼 수 잇는 것이다. 말하자면 조선문단의 어떤 작품이 외국의 어느 작품과 같으냐 하는데 잇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먼저도 暫間 말하엿거니와 세계문학사에 관련되고 조선문학사에 관련되어 당장 設問에 답할 그것은 아닌 것이다. 그야 아무러케라도 무책임한 태도로써 蠻勇을 범할 우리의 대담한 조선문인이 많이 잇을 것이다. 이는 진실로 심사숙고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곧 이는 가령 朝鮮의 春園 李光洙씨를 해외작가와 비교한다고 하면 먼저 春園을 알어야 하고 또 해외 어느 작가를 알지 안으면 아니된다. 알어도 그대로 알어서는 아니된다.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것을 알지 아니하면 감히 말한다는 것은 이는 자기의 잘못을 범하기 쉬운 그것 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이곳에 누가 그것을 감히 火蓋를 뜨일 용맹을 가진 사람이 잇겟는가. 다시 말하면 이곳에 露西亞의 『고리키』작품이 우리의 民村 李箕永씨의 작품과 같다고 할 그러한 대담한 言說을 토할 사람이 누구인가. 만약 民村의 작품과 『고리키』의<314> 작품이 공통되는 것이 잇다고 하드래도 어느 작품 어느 장면이라는 곧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서 『民村對 고리키對 比論』같은 것이라도 써야 될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적어도 수 십장의 원고지는 소비하여야 할지니 이것이 될 뻔이나 한 일인가. 그러면 조선문학의 세계적 수준론은 불가능한 그것이고 말 것일까? 그리하야 조선문학의 세계적 수준론은 오늘에 잇어서 仰議를 청할 그 시기와 또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느꼇다. 그 이유는 먼저 煩說하엿으므로 그 更論의 필요를 이곳에 느끼지 않거니와 이러한 문제를 提議함에 잇어서는 좀더 신중히 할 필요가 잇는 것이다. 그것은 첫째로 삼천리사에서 아무리 원고의 長短을 불구하고 써달라고 하엿으나 그 期日이 촉박해잇고 또 이것을 구체적으로 쓴다고 하면 적어도 1회에 맛친다고 하드래도 (1회로 맛칠 수 없는 것이지마는)印刷하여서도 40面은(나의 표준으로) 가저야 할 정도이니 이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이곳에서 먼저 말한 『넌센스』라는 말에 다시 돌아가거니와 오늘날 우리 조선문학을 세계적 평가에 올리는 것을 전제로 하고 爲先 評定한다는 것이 이러한 擧措로 나온다면 과연 評定되리라고 믿을 수 잇는 것일까. 假使 百步를 讓하야 이것이 우리들 스스로가 評定한 그것이 세계적 수준에 닷는다든가 아니닷는다든가 하는 결론을 내림이 잇다면 이는 과연 우리들이 믿어야만 할 평정일 것인가? 결코 믿을 評定이라고 하기에는 누구나 躊躇할 것이다. 그것은 웨 그럴까? 너무 경솔한 까닭이다. 조선문학이 세계적 수준에 닷는다는 것은 진실로 누구나 말하기 어려운 바이오. 또 말할 수 없는 것이다. 究竟 이를 말한다면 『쩌날리즘』을 迎合하는 그러한 정도에 긋치고 말지니 이 아니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吾人은 생각하노니 조선문학이 세계적 수준에 닷는가 혹은 닷지 안는가를 논하기 전에 먼저 朝鮮에서 문학다운 문학을 생산하기에 힘쓰라! 그러면 그 때는 조선문학이 말하지 아니하는 가운대 세계적 수준에 다을 것이오. 만약에 조선문학이 세계적 수준에 닷는가 혹은 닷지 안는가 비교해 보고저 할진댄 眞摯한 태도로써 朝鮮의 한 작가와 또는 한 작품을 가지고 외국인 작가와 작품에 대비하여 보므로써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막연하게 1장의 設問紙의 답으로써는 전혀 불가능함인 것을 몰라서는 아니된다. 하여간 우리들은 이러한 것을 대담하게 답하기보다도<315> 먼저 세계문학을 잘 알고, 조선문학을 잘 안 뒤가 아니면 이러한 설문을 제출하는 것이나 또는 이러한 설문에 답하는 것을 謹愼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것이다. 이러한 것은 곧 『저날리즘』에 올러앉은 일시적 泡? 空論밖에 아니되는 까닭이다. (東亞一室에서) 오직 時期尙早의 感 月灘 1. 대단히 좋은 건의인 듯 싶습니다. 우선 남의 비판을 기다리기 전에 스사로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 보아 우리의 문학적 가치를 음미하야 보는 것도 아주 쓸데없는 헛짓은 아닐 것이외다. 그러나 아직 時期尙早인 감이 강하게 내 양심을 찌르고 이 건의를 취소케 합니다. 2. 先項에 간략히 말슴한 거와 같으매 우리는 겸손한 태도와 충실한 步調로 다만 孜孜히 工夫할 처지에 있어야만 될 것이매 될 수 있는 한 이 문제를 保留하였다가 뒤날의 큰소리 외우침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國際文學과는 地位不同 李軒求 1. 문학이 그 민족 그 사회의 전통을 가지고 역사를 가진 외국의 문학과 오늘의 조선 문학을 비교하기에는 다만 「핸디캡」이라는 조건만으로는 도저히 함께 論爲할 수 없을까 한다. 인간의 생리적 조건으로는 그 수명과 모든 物的 방면에서 동일한 長成 死滅을 招致한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 그의 정신적 생활, 물질적 생활에는 懸殊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번 국제 올림픽에 있어서 저렇듯 長足飛躍한 스케-팅도 모든 콘디슌 云云을 떠나 역력히 그 세계적 지위를 明指하고 있지 안는가? 문학으로의 수준도 그만큼만 갔다고 생각하면 다소 안심도 되고 희망도 미래도 가질 수 있을까 한다. 그러나 확실히 국제 올림픽에서 획득한 조선체육계의 지위가 국제문학에 있어서 조선 문학이 가질 바 지위와 동일할 수 있을까는 정확히 해답할 수 없다. 2. 현재에 있어서 이 작가의 지위와 그 작품은 문학사상에 있어서 正히 어느 시대의 어느 작가와 比肩되리라고<316> 단언하는 것은 좀 더 냉정히 생각한다면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人相家의 황당한 예언자적 판단에 盲從함과 같은 不敏性이 있을 듯 하다. 朝鮮에도 70의 老作家 XX作家 死後 10年祭쯤 하게까지 역사를 가진 때 우리의 문학 또는 우리의 작가는 이만큼 세계적 어느 작가 이상의 예술을 창조하였다고 豪言하여도 그리 늦일 것도 없고 損될 것도 없지 않을까? 속히 榮達을 꿈꾸는 조급성도 남의 뒤를 용맹하게 추격하는 자에게는 容 或容許될 것이다. 그러나 이 一言은 실로 조선 작가의 우수성을 신뢰함에서 하는 말임을 附記한다. 主로 短篇小說의 比較 李鍾洙 1. 貴設問 1의 범위를 좁혀서 「今日의 조선 단편소설은 英, 米, 愛, 단편소설에 비하야 그 수준이 어떠한가? 를 생각해 보았읍니다. (범위를 英, 米, 愛로 설정한 이유는 小生은 英, 米, 愛 이외의 문학은 全然 모르기 때문이오. 단편소설로 한정한 것은 小生이 근래에 조선과 英, 米, 愛의 단편소론을 좀 본 것이 있고 또 단편의 수준으로 문학 전반의 수준은 짐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朝鮮에서는 시, 희곡이 소설만 못한 경향도 있지마는) 조선단편소설과 英, 米, 愛, 단편소설을 비교해 볼 때에 英米愛의 단편소설도 별 것이 없다―이러한 생각도 나지마는 이것은 英, 米, 愛의 우수하지 못한 작가의 작품과 朝鮮의 우수한 작가의 작품을 비교할 때에 나는 생각이고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역시 朝鮮의 단편소설은 英, 米, 愛의 그것을 따르지 못하지 안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確言할 수는 없으나 조선 작가는 인생을 보는 깊이와 (조선) 「말」이 英米作家에 비해서 부족하지 않은가 합니다. 조선 문학의 수준은 아직 세계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요? 더 힘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2. 아직 貴設問 2에 대답할 준비는 없읍니다. 시간이 있으면 소설로는 春園, 東仁, 民村, 玄民, 孝石, 赫宙 등(無順) 諸씨의 작품을 연구해서 英, 米, 愛의 현대작가의 작품하고 겨누어 볼까하는 생각은 가지고 있읍니다마는 무어라고 단언할 수 없읍니다. 그러나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이상의 작가가 英米와 같은 문학적 전통이 있는 땅에 낳다고 가정하면<317> 現 英米文壇의 명성있는 작가들에게 지지 안는 작가가 되었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以上) 「復活」 「레미제라불」에 不及 朴八陽 貴問에 간략히 답합니다. 諸外國의 문학적 작품을 일일이 原書에 의하야 음미하지 못하는 관계로 的確한 말슴은 드리기 어려우나 英譯 其他 등 二重譯을 통하야 받는 印象만으로도 확실히 외국의 諸文學的 작품이 일반적으로 朝鮮의 그것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는 줄로 짐작됩니다. 一例를 든다면 조선 문단에도 많이 소개된 『톨스토이』 『復活』 『빅톨·유고-』의 『레·미제라블』같은 소설이나 또는 『하이네』 『빠이론』 『꾀-테』 『타고어』 등등 외국문인의 작품들을 읽을 때 일반적으로 우리 조선 문단의 그것에 비하야 훨신 우수한 느낌이 없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문학의 발전이란 결코 一朝一夕에 되는 것이 아니오 민족과 및 그 문화의 발전에 따라 백년의 時日을 두고 진보되는 것인 줄을 아는 이상 여기에서 우리는 공연히 우리들의 문학적 성과를 과소 평가할 필요는 없을 줄 압니다. 『努力하는 곳에 발전이 있다!』 우리들에게는 꾸준이 오직 나아가는 한길이 있을 뿐인 줄 압니다. 若干의 自負心이 생겨진다 李無影 貴問은 퍽 쉬운 듯 하면서도 어렵습니다. 都是 「수준」이라는 이 말은 數字나 혹은 段階로서 이 수준의 정도를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어떤 청년을 지목하야 저 사람이 철이 났느냐 못났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주저하듯이 나는 이 貴問에도 대답에 궁해합니다. 그러고 우리 작가 중 어느 사람의 어느 작품이 외국의 어느 시대의 「어느 작가」의 「어느 작품」과 비하야 그 우열을 말슴하라 하심에도 또한 난처해 합니다. 수준이란 문자로는 표현치 못하는 일종의 개념인가 합니다. 그렇기에 生은 英, 佛, 伊, 露... 國文學과 朝鮮의 어느 시대 문학을 비교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고 다만 朝鮮의 작가들도 우에 말한 세계적 문학수준에 가까이 올라가고<318> 있다는 것을 말슴하는 정도에서 끝이랴 합니다. 우리는 외국에서 떠드는 작품을 읽고 마음의 적막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근에 東京文壇에 발표되고 있는 작품을 읽고 또한 약간의 자부심이 생길 때가 있읍니다. 마챤가지로 우리 문단에서 세계적 수준에 올랐다고 自認하는 작품이 또한 외국인이 읽을 때 적막을 느낄 경우도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지나친 東問西答을 면키 위하야 우리 작가 중에서 말하는 바 수준에 達한 작가 중에서 民村, 玄民, 花城, 孝石, 그러고 春園, 東仁, 想涉, 등 諸作家를 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끝으로 한마디 붙이고 싶은 것은 우리 말은 역사가 짧은 탔으로 母語發達의 부족으로 하야 세계문단에 수출될 기회를 갖지 못하나 대체로 보아 좌우를 막론하고 우리 작가들의 이데오로기-는 東京文壇보다 한거름 더 앞섰다고 봅니다. 이것은 장래 우리의 문학이 세계문단에 군림키에 없지 못할, 그러고 우리의 자랑할 조건이 아닌가도 합니다. 民村의 「故鄕」을 例로 들어 曉 우리 문학의 세계적 수준 혹은 지위를 우리 스스로가 평가한다는 것은 지극히 의의있는 사업이면서도 현실의 사회적 정세에 있어서 우리는 그러한 사업을 履行하기에는 너무나 어러운 지위에 있읍니다. 그것은 비단 우리에게서 뿐만 아니라. 싸베-트聯邦을 除한 다른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 있어서도 문학의 진정한 발전이 制止당하고 있는 외부적 조건이 완전히 소멸되어 버리지 안는 限에 있어서는 동일한 정황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첫재 평가의 대상인 세계적 수준을 과연 현실의 정세에 있어서 如何히 규정할 것이며 또 외부적 제한 밑에서 생산되는 跛行的 文學 현상을 如何히 세계적 수준이라는 개념의 속에 총괄하야 그 우열을 논할 수가 있겠읍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부질없이 기준이 막연한 세계적 수준을 논할 性急을 범할 것이 아니라 爲先 우리들의 문학의 우에 반영된 우리 현실의 탐구! 말하자면 우리들의 문학자들이 현재 얼마나한 역량을 가지고 객관적 현실에 육박하고<319> 있는가 하는 그 형상의 緊張度를 찾을 수 있는 침착을 가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야 우리 작가의 형상의 현실에 육박하는 긴장도와 다른 나라 작가의 그것과의 대조만이 우리 문학의 세계적 평가의 최고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은 貴社에서 提言한 바의 설문형식으로는 도저히 이행할 수가 없는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해명하지 못하는 것을 지극히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억지로 말한다면 우리 작가들 중의 李箕永씨의 「故鄕」과 같은 작품은 다른 나라 작가의 작품에 비하야 그리 손색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최근 싸베-트聯邦에 있어서 문학적 달성의 최고의 典型을 保持하고 있는 쇼로호프의 『開拓된 處女地』와 같은 작품과는 대비할 수가 없지만 그 농촌현실에 대한 형상화의 진실성은 결코 싸베-트聯邦 이외의 다른 나라의 작가들보다 못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조선적 특수성이 가저온 불가피적인 악영향과 그의 평가의 기준과의 분리를 超致하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웨그러냐 하면 우리는 英, 米, 露, 獨, 佛, 伊, 愛, 印 등 諸國의 문학자들보다도 一層 더 문화발전의 외부적 제약이 있는 까닭입니다. 이만 간단히 답합니다. 「촉새가 황새」 따르는 格 閔丙徽 1. 이 문제는 너무 광대한 문제인 만큼 대답하기에 좀 거북한 감이 있다. 아직 외국에 비하야 그 해ㅅ수를 30년 밖에 갖지 못한 조선문단이 몇 천년 몇 백년의 나이를 먹은 외국과 이 수준을 비하게 된다는 것은 『촉새가 황새』를 따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나 드르니깐 朝鮮人으로 姜鏞訖씨라는 분이 米洲에서 작가적 이름을 빛내고 있고 東京文壇에서 張赫宙씨 東京의 작가들과 어깨를 견우고 있으니 우리보다 문학운동이 훨신 긴- 그분들에 비하야 오히려 뛰어나는 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우리는 이 개인 몇 사람이 어학적인 才操를 가지고서 해외문단에 海外文으로 몇 개의 작품을 발표했다고 그 수준이 그 땅의 문학수준에 도달했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다.<320> 문단 전체로서의 작가들이 세계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만한 작품을 쓴다거나 朝鮮人 작가들의 작품이 외국인 작가와 같이 문학의 형식과 내용을 완전히 가춘 뒤에 여러 나라 작품과 比準해 본 뒤에 수준의 高下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일시적으로 한편의 걸작을 내어놓은 작가가 있어서 同似한 외국인의 작가의 작품과 比準해 보고 그보다-나은 것이라고 문학수준이 同樣으로 되는 것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외국인을 들어 말해 본다면 『유-고』가 『레미제라블』이란 걸작을 내어 놓았고 『쒝쓰피어』가 『함레트』를 썻으며 『쫄라』가 『난나』를 쓰고 『입센』이 『노라』를 썼다고-이 사람의 작품 전부가 걸작은 될 수는 없다. 그 사람들의 일생을 통해서 나오는 몇 편의 작품이 걸작이 되었으므로-그들을 명작가로 이름하는 것이다- 그만큼-年조가 많은 나라일수록 문학작품에 많은 걸작이 나올 수 있을 것이요 걸작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나라의 문학수준은 높어 가는 것이다. 그런만큼-아직 조선 문학은 세계적 수준에 도달한 작가가 없고 또는 現下의 정세로서는 그러한 작가가 있어도 도저히 그 기능을 발휘할 XX가 없는 것이다. 그런만큼- 이것을 나는 아직도 미래의 문제라고 본다. 그리고-그 수준에 達하려고 애쓰는 몇 작가들의 정열만은 가장 기쁜 현상으로 보는 동시-이러한 시기에 도망해 버리는 大家라는 이들이 증오스럽기도 하다. 2. 春園, 東仁, 想涉, 등은 작품을 만들다가 野談으로 가버렸고 몇몇 中堅들은 작품을 쓴다느니보다 작품 팔려고 하는 데 失敗가 있다. 그러나 그 중에 우리가 외국인에 비할 작품을 제작한 작가를 2, 3인 찾을 수 있으니 소설로 民村 李箕永이요 시로 林和일 것이다. 물론-XX적 입장이 다름에 따라-서로 相異된 안목을 가지고 있을 것이나 民村의 『鼠火』나 『故鄕』, 林和의 여러 편의 시를 읽고서 그의 건전한 예술에는 누구나 경의를 표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 나는 『쇼-로프』의 2, 3편의 작품을 읽었다- 그것을 읽으면서 民村의 「고향」「鼠火」를 연상했던 것이다. 地方과 風俗이 다른 문제가 붙을 것이온데 民村의 농민문학도-「쇼-로프」에 도달할 날이 그 얼마의 시기를 要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에 있어서는 잘 모르지만 林和의 시로는 東京文壇에서 문제되는 몇 시인과 그 작품 수준이 떠러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321> 我文壇 歷史 쩌름을 歎 金珖燮 奇異하게도 최근 조선 문단의 일부에는 조선 문학의 외국에의 소개 번역 내지 세계 문학의 계열에서의 水準 如何를 논의하려는 경향이 보인다. 그래서 삼천리 2월호에 의하면 해외에 번역하고 십흔 작품에 따른 작가가 近 20명에 達하는 듯하다. 이 영예에 나는 暫間 박수를 멈추는 아량업는 者일런지는 몰라도 마라손과 권투에 대한 그것보담 극히 위태롭다. 나는 새삼스러히 문학도 권투나 마라손 갓치 速成速達될 수 잇는 一種이기를 祈願해 본다. 뽁싱의 역사는 짤으다. 육체의 역사는 오랫서도 우리의 마라손의 역사는 짤으다. 그래도 능히 세계적 선수가 등장되다. 30년의 新文學運動의 역사-이것은 서양문학을 日本 內地를 통하야 輸入한 경과에 불과하다. 챰피온은 누구냐? 가령 한편의 抒情詩를 완성한 시인이 업지 안코 한편의 단편소설을 완성한 작가가 업지 안타하자. 그리고 세계문학의 과거는 그만두고 현존한 데서 그 수준을 보자. 쇼-翁, H·G·웰즈, 죠이스, 헉스레-, 안드레·지-드, 포올·바레리. 프루-스트, 로만·로-랑, 골키, 타골翁, 업튼·싱크레이, 싱크레이·루이스… 등등 이 수준에 達할, 이 會合에 참여될 우리 작가가 누구인가? 나는 나의 자만심으로 말미아마 세계의 4, 5流의 시인, 소설가를 꺼내여서 우리 문학 내지 문단의 일류와 비교하고저 할 수는 업다. 이 偏狹한 단점을 헤아려 줄 수 잇다면 貴社에서 문의한 제 2의 답안―어느 시대의 어느 작가의 어느 작품이 우리의 어느 작가의 어느 작품과 엇더한가 하는 優劣 長短 美不美의 비교대조에 흥미업는 필자 자신을 憐愍히 녁일 수 잇스리라고 밋는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論이 아니고 感想된 答文임을 謝한다. 水準을 規定하고 십지 안타 沈熏 1. 歐米 諸國은 물론, 동양 어느 한 나라의 문학에도 精通하지<322> 못한 小生으로서는 조선 문학과의 수준을 규정할 엄두가 나지를 않습니다. 2. 될 수 잇는대로 다른 분의 작품도 읽습니다만은 아직 彼此의 우열을 논의할 자격이 없습을 스스로 부끄러히 생각합니다. 過大, 過小, 평가를 아울러 삼가야 할 줄 알기 때문이외다. 以上. 李箕永씨의 『인간수업』과 「셀봔테스」의 『동, 키호데』 宋影 1. 今日의 조선 문학은 아즉 완성 도중에 있아오나 역시 선진 문학의 나라의 외국 문학과 비하야 그리 비관할만치 낮은 수준에 있지는 않다고 봄니다. 나는 돌오혀 그 반대로 어늬 정도까지 높은 수준도 갖엇다고 봄니다. 대개 한 나라 한 사회의 문학의 생성은 그 경제적, 정치적 영향에 큰 관계를 갖엇으나 똑같은 실력과 가치가 있는 문학으로써도 그 사회가 가진 정치적 연관성으로 말미암아서 더 평가가 되고 덜 평가가 되는 수가 있음니다. 朝鮮의 문학이 비교적 세계적으로 문제가 안이되는 점은 조선 문학이 갖인 『自體의 不足』보다도 조선 문학이 탄생되는 조선 사회의 환경관계에 있다고 봄니다. 만일 우리들의 작품이 가진 언어가 XX的으로 무력한 朝鮮말이 아니요 좀더- XX的으로 강대한 배경을 갖인 英語나 獨語이었을 것 같으면 반드시 더-크게 성명을 세계문단에 떨지였으리라고 생각함니다. 소위 걸작이라는 외국작품을 읽을 때 우리 조선 작품만 못한 拙作이 많은 것을 발견할 때에는 一種 苦笑를 不禁하는 바임니다. 그러나 千?아래에 잠자든 우리문학도 萬里長空에 飛翔할 때도 있겠지요. 다만 문제는 점 더- 큰 위대한 창조적 활동으로써 조선 문학을 빛내여 보겠다는 결심과 실천이 우리들의 당면과제일 뿐이 아닌가 함니다. 2. 졸지에 생각이 나지 않으나 지금 中央日報에 連載되고 있는 畏友 民村의 『人間修業』이 그 표현형식에 있어서 400년전 스페인 文豪 셀봔테스의 대표작 『동키호데』와 흡사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음니다.<323> 셀봔테스는 당대 스페인 사회가 심취되여 있든 전통적 봉건의식, 즉, 시대의 뒤떠러진 武士通思想을 痛擊하고 戱諧하고 諷刺하노라고, 『武者修業』의 길을 떠난 동,키호데를 묘사하였음니다. 民村도 역시 현대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전통적 의식, 兼하야 歪曲된 현대 一部的 哲學思想을 역시 痛罵하고 諷刺하노라고 『人間修業』의 길을 떠나 『현호』를 묘사하였음니다. 이 『人間修業』이 아즉 끝나지 않었음으로 그 歸結이 엇지될는지는 몰으나 지금까지 전개된 사실과 또는 스스로 풍부한 伏線이 작품 밑에서 躍動되는 것을 보와서 推察하면 반드시 그 귀결은 적극성 띄워지리라고 생각됨니다. 동,키호데의 진실한 狂態는 그때 사회의 惡風을 어느 정도까지 一掃하였지만 民村의 『현호』는 현대의 『그릇된 哲理』를 矯正만 하는데에 끝이지 않고 점 더 나아서 새로운 哲理가 하로밥븨 再健되게 하는 動因도 되리라고 생각함니다. 我文壇 總集成은 아직 貧弱 金晋燮 한 문단의 수준을 결정하는 표준은 소수의 우수한 작가 속에 구할 것이 아니오. 문단을 구성하고 잇는 대다수의 成員 속에 비로소 구할 수 잇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까닭으로 조선 문학의 세계적 수준론은 잠시 保留하여 두는 것이 지극히 맛당할 것 같이 보이오. 이리하야 우리가 전체적으로 조선 문학이란 것의 總集成을 한번 考量하여 볼 때 一團으로서의 조선 문인이 세계문단에서 어들 터인 평균점수는 확실히 落第를 면치 못하리라는 우울한 결론에 우리는 도달할 수 밖에 없소. 이것은 물론 조선 문단에 우수한 分子가 업슴으로서가 아니오. 아즉은 一家에 達치 못한 稚拙한 分子가 大部를 占하고 잇기 때문이겟지요. 그리하야 물론 또 낙제를 당하는 것은 우리 朝鮮만이 아니겟지요. 웨ㄴ하면 오늘날 소위 세계문학이라 하는 것은 세계가 가질 수 잇는 모든 문학을 總括하야 비로소 될 수 잇는 것이지만 그것의 支柱가 되여 잇는 나라는 어데어데냐 하면 그것은 주로 英, 佛, 獨, 露, 伊, 米의 6大 文化國에 항상<324> 제한되여 잇는 觀을 呈하야 그 이외의 모든 ?小國은 一般으로 수준에 잇서서는 놉지 못하나 소수의 우수한 천재를 간혹 출현식힘으로 의하야 세계문단에 참가하는 드문 光榮을 가지는 까닭이다. 이것은 결코 어렵게 생각할 것이 아니오. 세계인으로서의 朝鮮人의 수준을 가지고 생각하여 본다 하여도 문제는 동일하오. 세계인으로서 수준에 도달한, 아니 그 이상의 朝鮮人이 업다는 것이 아니요. 전체로 보아 모든 朝鮮人의 평균수준이 우수한 문화국의 그것에 達치 못한 것을 나는 말하고 십소. 수준의 문제는 小數人의 문제가 아니오. 실로 全民X의 문제인가 하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문학만이 아니라 모든 것에 잇서서 한사람의 수준이상을 渴望하야 마지안음보담은 얼마나 만히 民X的 수준의 향상을 요구하는지 알 수 업소. 실로 일반적 수준의 향상 속에서라야만 수준의 개인적 突破는 잘 圖謀될 수 잇기 때문이요. 조선 문학 속에서 설사 최고 수준에 속할 무엇을 들고 나선다 하드래도 그러므로 나는 아즉은 해외의 著名한 작품에 대비식혀 그 우열을 논할 용기는 가질 수 업소. 우리는 우리가 가질 수 잇는 최고 수준을 자랑키 위해 우리가 피할 수 업는 최저 수준을 부끄러워하고 십소. 2월 7일 兒童이 成人과 身長 견우기 林和 이하 간단히 貴問에 답함니다. 1. 첫재로 諸外國文學의 예술적 사상적 수준에 대하야 우리 현대 문학의 그것을 견주어 본다는 幻想의 묵어운 짐을 나는 도저히 즐거움을 가지고 두 억개에 질 수는 업슴니다. 외국 문학에 그것을 事大的으로 誇張하는 論者에 잇서서나 또 우리 문학의 수준을 實價 이상으로 놉히금 치는 분에 잇서서나 아마도 그들의 뜨거워진 머리를 식힐 것은 오즉 우리 문학의 現狀 그것이라 밋슴니다. 물론 雜多한 諸國에 문학에 대한 전문적 교양을 그 한곳에도 갓지 못한 小生과 갓흔 者의 감히 容喙을 許하지 안흐리라 밋는 바이오나 拙見갓해서는 이러한 비교문학적 수준론이란 아즉 자라는 兒童과 임의 장성한 成人의 身長을 대어보는 것과 갓흔 노름인가 함니다. 웨그러냐 하면 우리 문학은 아즉 幼年期에 잇는 것이오. 그남아 不可形言에 酷烈한 璟境 가운데 잇는 것이여서 감히<325> 발달한 문화 국가의 그것에 비교하는 것은 그 결과가 스스로瞭然한 때문임니다. 中國, 혹은 印度 기타의 後進諸國에 비하야 우리 문학에 수준이 그리 떠러지지 안는다고 해야 만족할 것이 무엇이겟슴니까. 물론 朝鮮의 현대 문학 중 우수한 者 약간은 印度나 中國 등에 비하야 그리 떠러젓다고야 못 할 것임니다. 세계적 의미에 잇어 우리 문학이란, X治的, 언어적 특성 때문에 세계화되지 못하고 잇다고도 말할 수 잇는 것이나 이것은 우리의 즐거움도 아니오 또 북그러움도 아님이다. 다른 외국에 보잘 것 업는 작품과 우리 우수작을 비교하면 물론 우리는 一種의 우월감을 희롱할 수야 잇는 것임니다. 그러나 이러한 짓을 할야면야 우리는 굿해여 작가나 비평가가 될 필요까지는 업슬가 함니다. 그러고 往往 우리 문학의 不振, 미발달을 痛嘆하는 國際主義者를 때로 대할 수 잇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부질업는 杞憂임니다. 우리는 何等 비관할 필요가 업슴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제 땅의 문자라고 생긴 지가 불과 幾百歲에 지내지 못하고 그 말쓴 예술 문학이라는 것이 비롯한지 20세 미만에 무슨 예술적 달성을 바라겟슴니까! 더욱이 문학을 나흘 생활환경, 사상 등의 토양이 朝鮮과 갓치 비참한 곳에서 무슨 아름다운 꽃을 발서 바랄 수가 잇슴니까? 하물며 문학계라는 곳에 적지 안흔 數爻의 작가가 왕성히 이 토양으로부터 떠나가고 잇는 현재, 우리의 기대는 一層 局限되는 것임니다. 풍부한 생활의 토양 우에서 우리들의 보다 조흔 생활의 창조를 위하야 봉사하는 문학만이 장래 開花할 생명의 씨를 내포하고 있는 것임니다. 작가이든 비평가이든 결국 아모 소리말고 오는날의 眞正하 조선 문학의 開花를 위한 肥料일 것에 만족하면서 勤勉할 外 他道는 업슴니다. 2. 이 항목에 대하야는 輕輕히 붓을 놀님은 우리 작가나 또 외국 작가에게나 共히 비평의 禮儀를 직히기 어려운 것으로 단지 어린 우리 문학의 성장을 위하야 엇더한 先進諸國에 비하야서도 아즉 문자그대로 소년임을 자각함으로 割愛키로 함니다. 多謝<326> <308-3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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