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대일(對日) 협력과 저항의 몇 가지 양상

이강기 2015. 10. 1. 21:44

대일(對日) 협력과 저항의 몇 가지 양상 

― 재만조선인문학의 경우를 중심으로 

                                                 
                         김 호 웅(중국 연변대학교 교수)



들어가는 말

먼저 재미있는 책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라이프 제2차 세계대전―레지스탕스》라는책이다. 이 책 마지막 부분《마침내 설욕의 때가 오다》에는 프랑스 국민의 거족적인 보복장면들이 사진으로 수록되어 있다. 파리의 거리에서 바지와 신발을 벗긴 채 대독(對獨) 협력행위를 문책당하는 사나이가 있는가 하면 파리의 시민들이 욕설과 조소를 던지는 가운데 대독 협력자로 적발된 여자가 거울에 비치는 자기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한사코 외면하고 있는 장면도 있다. 전후 몇 주일 동안에 재판에 회부되는 일도 없이 1만 1천명의 대독 협력자가 즉결로 처형되고 정규 재판소가 설립된 뒤 다시 769명의 시민이 처형된 외에 3만 9천명의 투옥되고 약 4만병의 가벼운 대독 협력자가 시민권의 박탈이라는 "국민적 불명예"의 벌을 받았다.


그렇지만 해방 후에 이루어진 많은 재판은 대체로 자의적(恣意的)이고 앞뒤가 맞지 않은 판결로 끝났다. 점령군을 지지한 저명한 선전가나 저널리스트들이 잡혀 나와 극형을 선고받는 반면 독일군과 계약을 맺거나 그들에게 납품하여 치부한 경제면에서의 대독 협력자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돌려지지 않았다. 이러한 불공평한 단죄방법을 꼬집어 파리 시민들은 통렬하게 빈정댔다. "똑 같은 대독 협력자라 해도 대서양의 벽을 건설한 자들은 자유의 몸이 되고 대서양의 벽을 가리켜 훌륭한 아이디어라고 쓴 자는 감옥으로 갔다"라고. 해방 후 한국에서의 친일파 청산은 지지부진한 데 반해 "만주"에서의 일본인 및 친일파에 대한 청산은 무자비했다. 또한 한국사회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에도 구조적 식민성으로 말미암아 많은 고통을 겪어온데 비해 중국조선족사회는 완전히 공산당이 정권을 잡음으로써 일제시대의 지배구조가 이월(移越)된 한국과는 완전인 달리 일제의 잔재를 상대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한국사회의 친일문제담론의 영향을 말미암아 중국조선족사회에도 친인문제담론이 시작되고 친일문학에 대한 올바른 가치판단기준도 없이 친일문학작품선을 펴내기도 했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 펴낸 친일문학작품선이 그 보기라고 하겠다.

이 작품선은 최삼룡의《해방전 중국조선족문학에서 친일과 친일성향에 대하여》라는 해제를 싣고 나서 35편의 작품을 친일작품 내지 친일경향을 드러낸 작품으로 수록했다. 하지만 많은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 작품선에 수록된 작품들을 기본 텍스트로 삼아 재만조선인문학에 있어서의 대일(對日) 협력과 저항의 양상을 구명하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재만조선인문학은 조선 국내의 문학과는 달리 일부 특수성을 가진다. 만주국의 가면적인 성격과 일 ? 조 ? 한 세민족의 관계에 대한 문인들의 인식과정, 일제의 언론통제와 일본인, 중국인에 비해 발표지면의 제한을 받았던 조선인문인들의 모국어 창작에 의한 문화적 저항, 문학의 다층적 의미구조 등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전제로 할 때만이 재만조선인문학에 있어서의 대일 협력과 저항의 기본양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문학의 외적, 내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지 않는다면 재만조선인문학의 주류와 그 긍정적인 가치를 부정하거나 친일적인 작품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는 양 극단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1. 만주국의 가면적 성격과 대일 협력과 저항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정권이지만 중화민국과 관계를 끊은 “독립국”으로 표방했고 “민족협화(民族協和)”와 “왕도낙토(枉道樂土)”를 건국선언으로 내놓았다. 하지만 만주국이 성립된 후 일제는 이 괴리정권을 엄격히 조종하고 통제했다. 1933년 8월 8일 일본내각은 《만주국지도방침요강》을 통과했다. 이《요강》에서는 “현행체제하에서는 관동군사령관 겸 만주국 주재 전권대사의 내부관할 하에 주로 일본관리를 통하여 실제적으로 진행한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만주국에 대한 관리는 일본인들로만 구성된 총무청이 주관했고 총무장관의 직권은 국무총리를 훨씬 초월했다.
이른바 “민족협화”를 고취함에 있어서도 민족 “우열론”을 내놓고 일본민족은 세계상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으로서 기타 민족을 지도하고 계몽하고 인도하는 지위에 있는 민족이기에 “오족(五族)”의 선달자(先達者)이며 “민족협화의 핵심”이라고 하였다. “만주에서의 일본인의 지위는 교민이 아니라 주인이었다.” 일제는 저들의 최고무상의 지위와 “오족협화”를 고취하는 한편 조, 만, 몽, 한 등 여러 민족에 대해 각기 다른 정책을 실시했다. 조선인에 대해서는 주로 두 가지 정책을 폈다. 하나는 “조선인을 이용하고 회유하여 황민(皇民)으로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한 민족 간의 관계를 도발하여 “조선인들이 한족과 멀리 하게 해야지 가깝게 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황화정책과 민족분열정책이었다. 일제가 한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간도문제》를 일으키고《만보산사건》을 조작한 것이 그 전형적인 보기로 된다.

황민화정책은 조선에서의 황민화운동의 연장으로 실시되었다. 일제는 “내선일체(內鮮一體)”, “선만일여(鮮滿一如)”를 고취하면서 조선인은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일본과 만주국의 이중국적을 가진 민족이라고 하면서 회유술책을 쓰는 한편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조선어교육을 엄금하였으며 조선인을 대상으로 “징병령”(1943.8)을 반포하여 조선인청년들을 침략전쟁의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황민화정책의 실질은 말할 것 없이 조선인을 식민통치의 노예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협화, 왕도락토, 황민화정책은 나라를 잃고 만주땅에 흘러들어온 이민과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유혹으로 작용했다. 권중일(權中一)은 새국민의 자각》이라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朝鮮人은 여러個의 複雜한政治적 段階를過한 오늘날은 大日本帝國의 地域單位속에包攝
되야 日本帝國의 一部分으로써 無限한生長을生長하여왓다. 따라서 今日의朝鮮人은 一個의
民族單位를形成한民族이아니라 完全히日本民族으로再編成된 皇國國民인것을 自覺하지 안으
면안된다. 께―테는 〈살기爲해서하는것은 모두가 善이다> 하엿다. 우리는우리민족의生長
과發展을위해서는 또는그것의確保를爲해서는 歷史的으로보나 地理的으로보나 日本民族으로
純化되메依하서만이 可能하다는것을 徹底히自覺하지안흐면 안된다.”

얼마나 실용주의적인 친일논리인가. 하지만 이른바 “친일”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하나는 농민이민의 경우이다. 농민을 비롯한 이주민들은 만주의 원주민과 갈등을 빚을 때 자연 일본의 세력에 기대게 되었다. 이는 의지가지없는 이주민들의 막부득이한 선택이다.하지만 개인의 영달과 부귀를 위해 일제에 아부하고 지어는 일제의 개다리로 날뛴 경우는완전히 대일 협력에 속하며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이러한 두 가지 부동한 상황을 형상화한 작품으로 안수길이 소설《벼》와 김우석(金寓石)의 희곡《김동한》을 들 수 있다.

안수길의 《벼》에는 매봉툰의 조선인촌민, 원주민과 중국관헌 및 육군 편의대(便衣隊),일본인 도매상 나카모토와 일본영사관이라는 세 가지 세력이 등장해 갈등을 빚어낸다. 원주민의 분노와 중국관헌 소현장(邵縣長)의 명령으로 말미암아 조선인 촌민들이 힘겹게 세운 운봉학교가 불타버리고 이에 항의하는 조선인촌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중국 육군편의대가 출동한다. 격분한 조선인촌민들은 나카모토를 통해 일본영사를 불러오는 한편 원주민들의 마을로 짓쳐 들어간다. 하지만 제방에 이르러 육군 편의대와 마주서게 된다. 촌민들은 일제히 논밭에 엎드린다. 이처럼 이 작품은 조선인 촌민들과 원주민, 중국관헌과의 갈등을다루면서 일본의 세력에 기대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그 당시 조선인 이주민들의 실존적 상황을 사실주의적으로 반영한 것으로서 이 작품을 친일적인 작품으로 볼 수는 없겠다. 하지만 김우석의 희곡 《김동한》은 경우는 다르다. 이 희곡은 만주국시기 동만(동滿)에서 악명이 높았던 친일주구 김동한을 가송하기 위해 창작한 것으로서 《만선일보》1940년 신춘문예응모에서 1등상을 받았다.
희곡《김동한》은 3막으로 되어 있다.

제1막은 1933년 간도협조회가 설립되던 날 저녁 김동한의 저택에서 그와 일본인 삼택(三宅), 친일분자 손기환 등이 국수를 먹으면서 협조회설립을 축하한다. 삼택과 기환은 김동한의 “빛나는” 반소반공친일의 경력과 공적을 치하하고 서로 일사보국(一死報國)의 결의를 다진다. 김동한은 대일본제국은 “따뜻한 나라”라고 하면서 대일본제국국민을 ”내 동포“라고 한다. “내 동포를 위하여 내가 죽는 날까지 내 나라를 위하야“ 싸우는 것이 김동한의 유일한 신념이다.

제2막에서 김동한은 동변도 어느 깊은 산속에 있는 비적 우두머리네 집에 들어가 감언이설과 위협공갈로 그들을 귀순시킨다. 여기서 김동한은 만주국의 “휘황한 성과”를 극구선전한다.

제3막에서 김동한은 새로운 지시를 받고 가목사 방면으로 떠난다. 여기서 김동한의 이른바 “덕성”과 “재능”을 부각하기 위해 동리의 노파를 등장시킨다. 김동한의 부인은 흔쾌히 목돈을 빌려 주고 노파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김동한을 치하한다. 그 날 밤 김동한의 부인은 무서운 꿈을 꾸고 남편의 출타를 두고 불길한 예감에 싸인다. 김동한은 동생과
부인의 간곡한 만류도 마다하고 “결연히” 사지로 들어간다. 김동한은 동생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은진히 국가가위기에처하여있는때이다.”, “개인의생명을앗기는곳에 국가의 안
태가업는것이다. 그러한의미로나는어느때 어느곳에서나 국가를위하야쓰러진다 하면그외의
만족 더없다. 이것이내가 로령을빠져나온후 지금까지가지고잇는 구든의지의전부다. 만주국
오족협하의왕도락토의만주국 이러한 리상국가에 치안을괴란하고 잇는 그들에게귀순공작을
하다가 그들의손에쓰러진다구하여두 나의뒤에는 또반드시 또동한이가출전하야 나의일을계
승하여줄것이라고 밋는다.”

보다시피 철두철미한 일제주구의 절규이다. 이처럼 희곡 《김동한》은 만주국이나 일본을 자기의 국가로 인정하고 거기에 충성을 다 바친 친일주구를 미화한 전형적인 친일문학작품이라고 하겠다.

2. 만주국의 언론통제와 모국어에 의한 문화적 저항

“오족협화”라고 하지만 만주국의 언론과 문예는 일본인들이 지배하고 있었고 일, 조,만, 몽, 한의 문예는 심각한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대련에서 출범한 일본인문학은 1940년 좌우에 신경으로 그 중심을 옮기게 되며 정부의 보조금과 협화회의 도움을 받아 그 조직과 활동법위를 크게 확대한다. 이를테면《만주낭만》, 《작문》,《단층(斷層)》,《고량(高粱)》,《신문학권(新文學圈)》등 여러 가지 동인지들을 갖고 있었고《만주신문》,《만주일일신문》, 《하르빈일일신문》등 신문의 예문란, 그리고《만주공론》,《예문(藝文)》,《만주행정(滿洲行政)》,《만몽평론》,《신천지》,《북창(北窓)》 등 많은 종합지와 문학지를 갖고 있었으며 그 외 여러 개소의 출판사와 도서발행회사를 갖고 있었다. 하여 한 일본인 평론가는 “만주의 작가들은 지금까지 쓰기만 하면 발표는 어렵지 않았다. 과언인지는 몰라도 일본에서는 동인지잡지에도 발표하기 어려운 작품이 만주에서는 두말할 것 없이 일류라고 하는 잡지에 당당하게 게재될 수 있다. 이는 작가에게 있어서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이로 인해 만주의 문학수준이 현저히 낮아지게 된 것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일본인문학은 발표기관이 난립(亂立)해 문학수준이 낮아지는 역작용을 일으키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당시 직업작가는 키다무라 켄지로우(北村謙次郞)뿐이었지만 만주국정부는 정책, 경제상에서 점차 일본인문인들을 직업화의 길로 나가게끔 밀어주었기에 그들은 원고비가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많거니 적거니 하면서 여유 있게 창작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다른 민족의 상황은 이와 정반대였다. 인구가 만주국 총인구의 90%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유구한 문학전통을 갖고 있은 중국인문학의 생존공간은 그 인구와 반비례를 이루었다. 일제는 만주국 초기에 벌써 대부분의 중국어 신문, 잡지, 출판업소의 경영권과 자주권을 장악, 통제하고 합병, 폐간함으로써 중국인문학의 지면을 통제, 축소하였다. 또한 반일, 애국, 민족적인 문학에 대해서는 잔혹하게 탄압하면서 그 간행물과 출판물을 차압하고 그 대신 친일문학을 적극 부추겨 주었다.

재만조선인문학의 경우는 그 생존환경이 더욱 더 열악했다. 일제는??만선일체(滿鮮一?)??를 표방하고 조선인을 만주국의 주요한 구성원이라고 하였지만 다른 한 면으로는??내선일체(內鮮一?)??를 부르짖으면서 황민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하여 조선인은??일본인??으로 되어 문화적 독립성을 갖지 못하게 되었고 민족동화(同化)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조선인문학의 생존토대라고 할 수 있는 조선문 출판물은 1937년 전에《만몽일보》와《간도일보》두 신문뿐이었으나 그것마저도 1937년에 합병되어《만선일보》하나로 겨우 남게 되었는데 이 신문의 문예란마저 일본인이 심사, 통제하였다. 뿐만 아니라《만주국 각 민족 작가 창작선집》을 비롯한 일본어로 된 만주국 문학작품집에는 조선인문학작품 한 편도 수록되지 못했고 3차례나 열린 대동아문학자대회에도 조선인대표는 한 사람도 참가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조선인문단의 평론가였던 고재기는 “발표기관이 결핍한 것이 확실히 선계(鮮系)문학의 일대 장애였고 일대 고뇌”라고 했고 황건은 “시련장이 되고 활동무대가 될 자기 기관이 없음은 문학실천에 있어서 한 개 치명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다”고 했으며 아당(啞堂)은 양심 있는 기업인의 출현을 호소하고 있다.

“… 滿洲各地에 朝鮮人文化를吸收하려는 새로운機運이 形成되여가고잇스니 이機運을一
層 常化하려면 역시出版物의刊行이업스면 안될 것이다. 이러한意味에서 滿洲內에잇는 企業
的良心을가진出版業者가 한사람쯤 登場하야도 過히時機가 늣다고 하지못할것이다. …
나오라! 良心잇는出版企業者여! 鮮系國民의 活潑한 文學運動에一臂之力을加할 勇氣잇는
이의 出現을지금기다리고잇다.

하지만 워낙 경제적 기초가 박약한 조선인들 중에는 출판경비를 댈만한 사람이 없었다.그리하여 조선인문인들은??피와 땀으로 엮은 역사를 수록할 것은 이곳에서 생장한또는 뒤이어 들어온 문화부대에게 책임이 크게 있다고 생각??하고 부동한 자세로 현세에 부응하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하면서 집요하게 문학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1942년을 전후하여 재만조선인작품집《싹트는 대지》,《만주시인집》, 《재만조선시인집》, 소설집 《북원》등 단행본들을 출판하였다. 이 단행본들의 출판은 조선인문학에 있어서 결코쉬운 일이 아니었다. 염상섭이 쓴 《싹트는 대지》의 서문만 보아도 이 점을 알 수 있다.


“…이번 이 간행은 오직 출판기록으로만 본다 하여도 만주에 있는 우리로서는 실로 획
기적사업이 아닌가 한다. 이것이 량으로 자랑할만한 소위 전집도 아니요 불과 십편미만의
단편을 모은 것이라 하여 남은 대수롭지 않게 여길지 모르겠고 혹은 근세의 조선사람이 만
주생활에 뿌리를 박은지도 반세기는 훨씬 넘었건만 문학적 소산이라고 고작 이뿐이냐고 웃
을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개척민은 실생활의 빈곤 이상으로 현대문화의 혜택에
서 멀리 떨어져있었다는 사실로 보아서는 결코 오늘의 이것을 적다하고 뒤늦다 못할것이다
. 도리여 이것이 빈 바가지 속에서 나왔고 녹쓴 호미끝에서 자라났음을 생각하면 고맙고
갸륵타 아니할수 없을 것이다.”

보다시피 조선인문인들은 열악한 여건을 이겨내고 작품발표지면을 고수, 확장했을 뿐만아니라 일제의 민족동화 및 민족말살정책에 저항해 모국어에 의한 문학창작을 견지했다. 이러한 조선인문학의 중요성을 두고 고재기는《재만선계문학》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본고에서 말하는 만주선계문학은 만주의 선계작가들이 조선어로 쓴 문학만을 가리키
고 기타는 제외로 한다. 이 견해의 정확여부는 논의할 여지가 있지만 나는 만주선계문학의
운명은 곧 재만의 조선어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모토(母土) 조선의 언어문제를 추이하
여 이렇게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고재기는 조선인문학을 조선어의 운명 나아가 민족의 운명과 관련시키고 있다. 안수길, 신영철 등도 ??국내에서 말살되고 있는 어문을 여기서 지켜야 한다, 그리고 문학을 살려야 한다.??고 하면서 문학창작과 작품집출판에 진력하였다. 물론 조선인문인들의 모국어에 의한 창작은 일제의 의혹과 질의에 부딪친다. 1940년 4월에 있은 내선만문화좌담회(內鮮滿文化座談會)에서 일본인문인 나카 겐노리(仲賢禮)가 조선인문인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朝鮮作家가 朝鮮語로大槪쓰고잇는 것은 日本語로 쓰는것이異端視되기때문입니까或은
그것이 主流로되여잇기때문입니까.”

이에 조선인문인 이갑기(李甲基)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文學의國籍이나 族籍을 分類할때 아즉文學槪論의課程에屬하는일이나마爲先그文學이씨
워진言語의族母이무엇보담도第一의問題가아니겟습니까. 이러케決定하면文學의民族情緖니作
家의族籍이다른言語에의한制作이니또는그素材의 如何로이야기는相當히複雜性을가지나무엇
보담 支那文學이기에는먼저支那語文學임이必要함과가티朝鮮文學이기에는爲先朝鮮語文學임
이第一의條件이겟습니다. 그런點에서朝鮮作家가 朝鮮文學을한다는의미에서朝鮮語로쓰게되
는것이며둘째는亦是제言語에對한愛着으로그런것이아니겟습니까…”

조선문학이기에 조선어로 씌어져야 하고 조선작가이기에 조선어를 애착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당당한 발언인가! 역시 이 좌담회에서 일본인문인들이 조선인문인들에게 일본어로 창작할 것을 제의하자 박팔양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點은 어떨런지요 朝鮮서는 小說을 原體純諺文으로쓰는習慣이잇습니다. 그런데 이번
金史良이 朝光이란雜誌에 漢諺純文을 試驗하는모양인데 이때까지의눈으로 서러서그런지아
주小說을對하는것갓지안아요. 늬간서먹서먹하지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作者로 讀者에게
이런印象을주게하는것은自己로서 여간손해가아니여요. 文字의 形式을 달이하는대로 이런差
異가잇는바이나 生活의相異한言語로서 그生活의在來로가졋든 微妙한 것을 讀者들에
게傳하기에는여간어려운일이아니여요. 이건結局飜譯文學이 얼마나어렵다는 一般論으로도證
着되겟지요.

박팔양은 김사량의 실패한 사례를 들면서 타민족의 언어로 자기 민족의 미묘한 정서를 표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논박한 것이다.

“살벌한 민족생존위기가운데서, 더욱이 조선어교육이 폐지된 상황 하에서 조선인문인
들이 광복의 날까지 시종 조선언어문자로 민족의 생존상황을 진실하게 반영한 문학창작활
동을 견지하였다는 것은 민족정신의 보루인 민족문학을 확보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며 이것
은 조선인문학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주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조선인의 불굴
의 문화저항의 표현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3. 문학적 저항의 다층적 의미구조

조선인문인들은 민족문학의 명맥을 지속, 확장하기 위해서는 만주국의 기성 언론지를 이용하거나 그들의 지배적인 담론구조에 순응하는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인 형식의 이면에는 민족문학에 대한 사명, 민족의 실존과 정서 및 강한 휴머니즘적 지향이 잠재해 있는 것이다. 조선인문학, 중국인문학을 비롯한 비일본인문학의 이러한 다층적 의미구조에 대해서는 문예정찰부의 언론감시를 맡은 일부 영민한 경찰들도 낌새를 채고 있었다. 1943년 5월 4일 만주국 수도경찰부 총감 미다 마사오(三田正夫)가 경무총국장 야마다 도시스께(山田俊介)에게 바친 비밀서류에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강덕 6년 6월 25일의 치안경찰 특비발(特秘發) 제545호 명령에 좇아 정찰활동을 진행
한 이래 관내대상에 대하여 측면으로 정찰을 진행하였다. … 만주좌익문학(滿洲左翼文學)
은 탄생한 날부터 이미 정치상의 형세에 주의하여 추상적이고 모호한 형식으로 창작하였기
에 이런 문학에 대한 인식이 결핍한 타민족에게 있어서 그 중심사상을 장악하자면 참으로
힘든 일이다. 특히 대동아전쟁이 폭발한 후 정부의 반만항일운동(反滿抗日運動)에 대한 검
거, 진압조치는 날로 좌익작가들의 주의(警覺性)를 불러일으켜 그들은 보다 추상화되고 애
매한 방법을 쓰고 있다. …그들은 이론적인 술어를 사용하지 않고 만주문화인의 정감을 내
포한 용어를 전문 사용하여 심사인원을 얼려 넘긴다. …또한 표면상 정부를 옹호하는척 하
면서 정부를 반대하는 정서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아래에 조선인문학의 다층적 의미구조를 평론, 시, 소설을 통해 살펴본 후 이어서 만주국의 국책에 순응하면서 어떻게 “추상화되고 애매한 방법”으로 “표면상 정부를 옹호하는 척 하면서 정부를 반대하는 정서를 불러” 일으켰는가를 보기로 하자.

우선《만선일보》에 게재된 문학평론들을 보자. 물론《만선일보》는 대체로 일제의 대동아건설이라는 야망과 만주국의 건국이념을 선양한 일제의 어용신문이다. 하지만 조선인문인들은 만선일보 학예란을 발판으로 자기의 민족문화건설을 꾀했다.《만선일보》에 게재된 문학평론들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만주국의 건국이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우리민족의 문학건설에 주안점을 두고 깊이 있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여기서 황건의《만주조선인문학의 특수성》, 윤도혁의 《만주조선인문학의 전통성과 특이성》, 김귀의 《농민문학의 방향으로》, 김춘강의 《문학정신을 창정(創定)하고 요람을 만들자》, 신서야의《만주조선문학의 성격과 특이성》, 안수길의《만주에도 일즈기 조선문학이있었다》와《간도중심의 조선문학 발전과정과 현계단》,《문단건설의 구체안과 문학인의 박력적 활동》, 송지영의《저류에서 방황하는 정열》등 평론들을 들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황건은 ??文化的萌芽期에 들엇섯다고도 볼수잇는今日에 處한滿洲朝鮮人文學의 啓蒙的使命은 너무나 큰바가잇는가한다??고 하면서 조선문학의 전통을 소화, 흡수하는 한편 만주라는??그 歷史特異한 性格만을 가질수잇는 獨自的文學“, 즉 85170;自主性이 잇는?? 조선인문학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윤도혁도 당면 조선인문학은??우리의生活을 主題로하는朝鮮文學이오 이것을어떠케 成長發展시키느냐하는 것이 여긔에 問題의 焦點이다??고 하면서 만주라는 지역적 특색이 있고 조선민족성이 있는 문학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박영준은??生活의根據가잇는곳에生活의 反映이업슬수업스며따라마음의表象이 업슬수업”다고 하면서??滿洲朝鮮人文學을建設하려함에는 文化人이다가티손을잡고 한길을것는데 비로소曙光이 잇슬것이?71;다고 주장한다. 또한 김귀는 농민문학론을 주장하여 이렇게 말한다.

“滿洲는아즉까지는 넓은 荒蕪地를開拓하여가는農民이 全人口의最多數를點하고잇서 그
生産方法이 原始的 農耕을主로 삼는 情勢에잇다고본다.
그리고또한 朝鮮의自由開拓民은 集團開拓民은 거개가 農村으로가서 土地開發에 從事하
고잇슴으로 이러한 部分的인 文學對象으로서의 농민― 더나아가선 滿洲에잇는 農民全體의
主體的인對象으로積極的인農民文學이 成立할수잇슬것이라고 생각한다.
大陸的인雄大한創造적性格은 오로지農民을볼수잇슴으로 나는이에 農民(흙)文學을提唱하
려하는者이다.

김귀의 농민문학론에는 일부 현세부응의 색채가 있기는 하지만 당시 농민문학이 조선인문학의 주조로 되여야 한다는 견해는 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이광현은 ??이땅의文學人들은 文學開拓挺身隊가되여 우리의文學開拓에로 꾸준히努力합시다??고 조선인문학을 적극적으로 개척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다음으로《만선일보》학예면을 보면 우리민족의 사상과 정서, 그리고 조선인이주민들의 피눈물 나는 수난사와 개척사를 형상화한 문학작품들을 다수 볼 수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왕도낙토》나 《오족협화》와 같은 건국이념과는 완판 다른 사상과 감정을 보여주고 있다. 천청송의 《이역의 밤》을 보자.

“고요한 밤이면/ 고즈넉히 들리는 호궁소리 더욱 애닯구나/ 함박눈 퍼붓는 새벽녘에 떠
나가신/ 사랑선비가 웬일인지 한없이 그립다/ 담사리 우거진 담밑에서 숨박꼭질하던/ 흩어
진 동무들이 보고 싶다/ 눈보라 휘날려 문풍지 떨고/ 말달리는 방울소리 요란쿠나//
옛고장 물레방아칸에서 맺어둔/ 기약을 어기고 시집간 순이가 원망스럽다/ 화로불가에
이마를 마주대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던 시절이 부럽다/ 먼동리 개짖는 소리 은
은하고/ 시름없이 눈내리는 이역의 밤은 서글프구나.

처량하게 들리는 “호궁소리”에 시적 화자는 멀리 두고 온 고향을 사무치게 그린다. 흩어진 옛 친구들, 야속하게 시집을 가버린 순이, 화로불가에 이마를 대고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듣던 일, 이 모두가 우리민족의 생활이고 정서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정을 두고 오양호는 “군국주의의 앞잡이라는 <만선일보>지만, 그 문예란에 반영된 우리문학의 실상은 이런 선입관과는 상당히 달랐고, 문학의 서정성과 순수문학의 기본항이 그대로 지속되는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20세기조선족문학사료전집》에 수록된 이포영(李抱影) 연시조《예서 기리사리다》와 최종식(崔宗植)의 서정시《밤》과 같은 시를 친일문학작품으로 볼 수 없다.

떠나온 고향이니 생각한들 멋하련만/ 荒原에 달빗기고 胡弓소리 들릴때면/ 살구꼿피는애
고향 안그럴수 없노라//
黃昏에 소를몰아 어슬어슬 돌아오면/ 휘파람 소리듯고 몰래반겨 주군하는/ 順伊는 어데
갓슬꼬 생각아득 하여라//
동생들 압세우고 동구박글 나설적에/ 삽살이 저도가자 그얼마나 지저댓소/ 지금은 뉘집
애들과 함께몰려 단니리//
그때일 생각하면 생각사록 그리우나/ 눈물로 떠난고향 다시가진 못할것을/ 情들면 고향
안되리 가서무엇 하리오//
滿洲라 널븐땅은 갈아내도 남는구료/ 밤이면 胡酒들고 아리랑에 흥도깁소/ 나라도 五族
協和(오족협화)니 예서기리 사리다
於敦化

이포영(李抱影)《예서 기리사리다》라는 연시조인데 살구꽃 피는 고향과 반겨주던 순이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 다시는 가지 못할 고향에 대한 체념을 노래한 시이다. 마지막에 “나라도 오족협화”라는 시구가 나오지만 전반 연시조의 내용과 정서와는 크게 관계가 없다. 최종식(崔宗植)의《밤》과 같은 서정시는 더더욱 친일문학작품으로 볼 수 없다.

압내/ 물소리/ 졸졸졸//
동네는/ 고요히/ 소리도 업다//
하늘에는/ 쪽배/ 말업시 흘러가고//
별들은/ 꼼박 꼼박/ 조을고//
밤은/ 고요히/ 꼿이피네.

이 시는 자연을 노래한 전형적인 서정시(詠物詩)로서 대일 협력이나 만주국에 대한 찬미와 같은 시어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일제치하라 해도 잠간 자연을 즐기거나 고요한 밤의 정취에 젖어들 만한 여유마저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서정시를 두고 최삼룡은 “이 시도 1940년 3월이라는 시대적배경속에서 보면 비전형적이며 비현실적”이라고 했는데 자연산수를 노래한 시에 대한 지나친 사회정치적 해석은 오히려 작품을 오독할 소지가 많다. 소설의 경우 박영준의《密林의 女人》과 현경준의《유맹(流氓)》(1940)은 모두 타락자에 대한 개조과정을 다룬 작품이나 전자는 철두철미한 친일문학이요, 후자는 외면적으로는국책문학의 형식을 띠고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당대 사회의 암흑상을 암시”하면서 휴머니즘의 경향을 지닌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박영준의 《密林의 女人》을 보자. 박영준의 경우 1940년 1월 22일자 《만선일보》에 《‘김동한’ 독후감》이라는 글을 발표해 그 자신의 친일적 진면목을 드러낸바 있다. 그는 일제의 주구를 노래한 희곡《김동한》을 두고 “존경할만한 사람을 내세우고 또 대중앞에 紹介하여야 할것은 후배들에게 지워진 한 책임이며 따라서 그의 남기고 간 발자취로써 이 세대의 서광을 만든다는것이 마땅히 남은 사람이 할 일이다”고 했다. 박영준은 김동한을 존경할만한 사람으로 보고 있고 그와 같은 친일주구를 선전하는 것을 작가적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그의 발자취로써 새로운 세대를 교육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작가 자신의 친일적인 정체를 드러낸 발언이라고 본다.

이러한 친일경향은 그의 소설《密林의 女人》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소설은 15살 때 공비(共匪)에게 잡혀가 10여 년간 “산속생활”을 하던 중 다리에 부상을 입고 일본군 토벌대에 의하여 포로로 잡힌 김순이라는 여자를 정신적으로 귀화시키기 위해 협화회회원인 《내》가 집에 데려다놓고 파란곡절을 겪었다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최삼룡은 이작품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박씨는 이 단어(共匪 -필자 주)를 직접 쓰고 있는데 그가 노리는 점이 무엇인가를
짐작할수 있다. 소설에서 10년간 항일한 이 녀자는 세상도 모르고 시대의 변화도 모를뿐만아니라 인간의 모든 정상적인 상식과 감정을 상실한것으로 묘사하고있다. 금반지 아까운줄도 모르고 돈이 중한줄도 모르고 녀자로서 몸단장할줄도 모르고 례의도 모른다. 그런데 인간조건을 완전히 상실한 김순이가 ‘나’라는 협화회 회원의 인내성있고 인간
적이고 희생적인 교육과 감화에 의하여 다시 인간으로 되고 인간세상으로 돌아온다는것이다. 김순이와 대조되는 ‘나’는 아주 긍정적인 형상으로 창조되고 김순이라는 항일전사와 나’라는 협화회 회원의 대결에서 ‘나’는 철저한 승리를 쟁취한다. 이 소설보다 더 반공친일적이고 더 반동적인 작품이 있을수 있을가!”

박영준의 《密林의 女人》에 대한 최삼룡의 견해에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여기서 한 마디 짚고 넘어야가 할 것은 유치환의 시《首》에 나오는 “비적(匪賊)”을 이른바 “공비(共匪)”와 동일시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연수현 조선족100년사》에 의하면 해방 전  유치환이 농장을 경영했던 연수현 지역의 “이주민들이 벼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했는데 무엇보다도 고통스럽고 힘들었던것은 토비와 결탁한 한족들의 민족기시였다”고 했다. “조선이주민들을 난민이라고 깔보며 무엇이든 략탈해갔는데 어쩌다 소 한 마리 판 돈이라도있으면 영낙없이 빼앗아갔다.” 하여 해방 전 연수지역에서 활동하던 조선독립군이나 해방 후 이 지역에서 토비숙청을 했던 중국공산당의 부대들은 토비들을 사살하면 그 “머리를 잘라 성밖에 내다 걸게 함으로써 토비들의 기염을 꺾어놓았다.” 이러한 역사사실을 염두에 둘 때 유치환의《首》에 나오는 “비적”을 “공비”라고 속단하고 이 작품을 반공친일작품으로 규정한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이제 현경준의 소설《유맹(流氓)》을 구체적으로 보기로 하자.
아편밀매나 아편중독의 문제는 만주국의 엄중한 사회문제의 하나였다. 조선인사회 역시아편밀수나 아편중독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음을 박영준의《중독자》,《무화지》(1939), 김창걸의《창공》(1940) 등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다. 1941년 3월 《만선일보》는 국책협력의 목적으로 《금연문예작품대현상모집》을 하게 되는데 건국1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펼친 것이라 《금연소설》1등에 300원, 2등에 150원이라는 거금을 상금으로 내걸었다. 아무튼 그 번 현상모집을 좌우로 《금연소설》이 많이 나왔는데 이를 장춘식은 “중독자소설군”이라고 지칭했고 “아편문제를 복합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소설로 현경준의 《유맹》을들었다. 이 작품에 대해 권철은 “언론자유라고는 전혀 없는 상황에서 우회적으로 당시 조선민족의 실생활의 한 단면을 증언”한 작품이라고 했고 리광일은 “저류에 민족의식을 깔”아 둔 작품이라고 하였으며 채미화는 “보도소장의 감화로 타락자의 인성이 새롭게 소생한다는 명쾌한듯한 이야기 줄거리 밑에 감추어진 심층적인 구조는 인성과 인생의 가치에대한 철학적인 탐구라고 하면서 ”더욱 은페적인 차원에서 당대 사회현실이 인정하고 있는 가치체계에 대해 비판하고 항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소설 《유맹》을 비교적 치밀하게 분석한 학자는 장춘식인데 그는 이 작품은 일제와 만주국의 전횡과 부패로 말미암아 “패배의식”에 젖은 당대 민족 엘리트들의 타락상을 통해 “당대 사회의 암흑상을 암시”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들 연구는 이 작품의 주인공에 대한 분석을 외면함으로써 이 작품이 가지는 다른 한 차원의 의미에 대해서는 홀시한 것 같다. 작가의식이나 소설의 주제에 대한 연구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물형상분석을 해야 한다. 특히 소설에서 주인공을 비롯한 중심인물들의성격과 행위는 주제해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놀게 된다.《유맹》의 중심인물은 물론 보도소 소장과 명우이다. 보도소 소장은 기로에들어선 조선인청년들이 자신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찾을수 있도록 선도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만주국의 공무원으로서 당국의 지시를 받들며 자신의 직책에 충성한다. 하지만 우리는 보도소 소장의 처사에서 만주국 공무원으로서의 외형적인 모습보다는 마치 어느 마을이나 어느 가문의 어르신과 같은 성품, 즉 그의 인내와 관용, 사랑과 헌신성을 더욱 중요시하게 된다. 그는 의지가지없는 순녀를 수양딸로 받아 키워주고 명우를 위해 생일 파티도 마련하며 그와 어머니를 상봉케 한다. 이러한 보도소 소장의 사랑과 교육을 받아 명우는 완전히 새로운 인간으로 부활해 교편을 잡고 순녀와 결혼하며 어머니를 모셔다가 봉양한다.

기실 보도소 소장의 형상은《별》과 같은 그의 전 단계 소설에서 창조한 교사형상의 연장선 위에서만이 해석이 가능해진다. 보도소 소장은 만주국 관리라는 외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지만 실제로는 인덕과 품위를 갖춘 교육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의 내면적 주제는 역시 휴머니즘으로서 이 작품에 흐르는 것은 따뜻한 인간애와 인간성의 옹호이며 승리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유맹》은 만주국의 국책문학을 내부로부터 전복시킨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맺는 말

일제의 잔재를 극복하고 민족의 정기를 살리는 일은 바람직하나 친일문학에 대한 논의는 역사주의 원칙에 준해 문학의 외적, 내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 세밀하게 텍스트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재만조선인문학의 경우 일제에 의해 조작된 만주국의 가면적 성격을 간파하기에는 일정한 시간을 요하였으며 일제의 언론통제에 지혜롭게 대응해 만주국 국책문학의 틀 속에서 모국어에 의한 민족문학을 창출하고 지켜낸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며 그것은 하나의 문학적 저항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문학은 본질적으로 메타포이며 다층적 의미구조를 가진다고 전제할 때 눈가림으로 장식한 “왕도낙토”요, “오족협화”요 하는 친일 또는 만주국 국책 영합적 언사에 촉각을 곤두세울 것이 아니라 해당 작품의 이미지나 시적 구조 내지 인물형상이나 기본 갈등의 배후에 숨어있는 작품의 보다 심오한 내면적 의미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특히 신이 아니고 인간인 이상 아무리 민족적이고 저항적인 작가라 하더라도 일부 실수나 오점을 가지기 마련이니 한 편의 작품으로 그의 전반 문학경향을 부정하는 오류는 삼가야 한다고 보며, 자라나는 세대를 위한다면 불사조와 같은 우리민족의 불굴의 투쟁사에 대한 회의와 절망을 초래하게 하는 우(愚)를 범
해서는 아니 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