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노신(魯迅)이 걸어온 문학의 길

이강기 2015. 10. 1. 21:45

노신(魯迅)이 걸어온 문학의 길

 

 ―서언을 대신하여
                                              
                                                김 관 웅(연변 문학가)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우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우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이는 1921년 로신이 발표한 단편소설《고향》의 마지막 구절이다.
로신은 《붓보다는 총칼》, 《먹보다는 피》가 요구되는 반봉건, 반식민지 현실의 어두운 장막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이러한 암흑과 절망이 깊어 갈수록 더욱 희망을 갈구하며 숨을 거둘 때까지 민족과 나라를 구하는 희망을 문학이라는 길에서 찾고자 끊임없이 모색했던 인물이다.
  
  1. 민족과 나라를 구하는 길을 모색하던 청년시대의 로신

  로신(?迅, 1881--1936)의 원명은 주수인(周?人)이고 자는 예재(豫才)이다. 로신(?迅)이라는 이 이름은 1918년 《신청년》잡지에 기고하면서부터 쓰기 시작했던 필명이다.
  
1888년 9월 25일, 로신은 절강성 소흥(??)현의 한 몰락한 봉건 중소지주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조부 주개부(周介孚)는 북경에서 벼슬살이를 했고, 부친 주백의(周伯宜)는 수재였고, 모친 로서(?瑞)는 독학으로 책을 읽는 정도에 이른 가정주부였다.

로신은 어려서부터  봉건문화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독서취미는 아주 넓어 많은 야사나 잡기, 특히는 민주주의사상과 애국정신이 담긴 책들을 탐독하였으며 민간문예에 대해서도 아주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93년, 로신의 조부는 과거시험의 부정사건에 련루되여 투옥된후 집안은 점차 몰락했고, 로신이 16세 때 부친도 병으로 사망했다. 이로 인해 주변에서 쏟아지는 랭소와 멸시는 어린 로신에게 많은 충격과 영향을 끼쳤다. 이 한 단락의 인생체험은 로신의 말을 빈다면 《세상사람들의 진면목을 알게 하였다.》

모친이 시골출신인 까닭에 로신은 농촌사회와 접촉하고 시골의 아이들과 사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였으며 이로부터 압박을 받는 농민들의 어려운 형편과 그들의 근로하고 순박한 성격을 료해할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였다.  
  
1895년 중일 갑오전쟁이후 양무파(洋?派)들의 신정(新政)이 파탄되고 자산계급개량주의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대적인 환경속에서 로신은 전통적인 봉건의 이른바 《옳바른 길(正道)》에 대해 회의와 불만을 느끼고 《다른 길을 걷고자 타고장에 도망했다.》
  
1898년 5월, 로신은 남경에 가서 강남수사학당(江南水??堂)에 시험을 보아서 입학했다. 이듬해 2월, 로신은 강남수사학당에 부설된 광무철로학당(鑛??路?堂)에 전학하였다. 광무철로학당의 총판(??, 교장에 해당됨)은 유신파인물이였기에 이 학교에는 새로운 책을 읽는 기풍이 아주 짙었다.

로신은  광무철로학당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늘 《시무보(???》와 《역학회편(????)》을 읽고 서구라파의 근대 과학, 사회학, 문학 등에 걸치는 많은 책들을 탐독하였는데, 이중에서도 엄복(?複)이 번역한 《천연론(天演?)》(영국 헉슬리의《진화와 륜리》임)을 통해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후에도 로신은 진화론에 관한 책들을 꾸준하게 읽었다. 그리하여 사회진화론은 사회현상을 관찰하고 반봉건을 반대하는데 있어서의 로신의 주요한 사상도구와 무기로 되였다. 로신이 남경에서 신교육과 신사조를 접하던 4년 동안의 수학(修?)시절에 중국에는 놀라운 격변이 일어났다.

무술변법의 실패, 의화단운동의 실패, 8국련합군에 의한 국토의 유린은 로신으로 하여금 더욱 절박하게 보다 새로운 지식과 보다 효과적인 구국의 길을 모색하게 하였다.
  
1902년 1월, 로신은 광무철로학당을 졸업하고 국비류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이 해 4월 도꾜 홍문(弘文)학원 보통과(普通科) 강남학원에 입학하였다. 당시 중국의 자산계급혁명파들은 도꾜에서 반청(反?)활동을 벌리고 있었는데, 류학생들은 반청파(反?派)와 보황파(保皇派)로 대립되여 있었다.

로신은 늘 반청집회에 참가하였고 짬짬이 근대과학, 철학과 문학 서적들을 읽고 국민성을 개조할데 관한 문제를 사고하기 시작했다. 1903년, 그는 청왕조의 통치를 상징하는 머리태를 자른 뒤에 찍은 사진 뒤면에 《스스로 조그마한 사진에 부쳐(自?小像)》라는  시를 써서 자신의 결심을 표달했다.

         이 내 마음 신(神)의 화살 피할 길 없는데
         비바람은 반석인양 고국 땅 짓누르네
         차디찬 별에 기탁한 이 마음 님은 알지 못해도
         나는 나의 붉은 피를 님에게 바치리라
         (?台无?逃神矢, ?雨如磐暗故?。
          寄意寒星筌不察, 我以我血???。)

   큐피드의 화살이 날아 와 가슴에 꼽혀 숙명적인 첫 사랑에 눈뜬 련인마냥 죽도록 사모하는 님 -- 헌원(??), 즉 조국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치겠다는 청년 로신의 피 끊는 애국주의 정감을 그대로 담은 시이다.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화에서 성공한 일본에서의 류학생활은 청년 로신으로 하여금 반봉건, 반식민지인 중국의 침체성과 락후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함과 동시에 그의 우환(?患)의식을 불러 일으켰고 나라와 민족을 침체의 수렁속에서 구해 내겠다는 그의 사명감을 더욱 굳게 하였다.
  
이 무렵에 로신은 외국작품에 근거하여 《스파르타쿠스의 혼》을 개작했으며,《중국지질략론》같은 론문을 집필하였으며, 친구와의 합작으로 중국의 지질과 광산 분포상황에 관한 저서《중국광산지》편찬하였으며, 과학환상소설 《달나라 려행》, 《땅밑 세계의 려행》을 변역하였는바 과학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청년 로신의 정신세계를 보여주었다.
  
1904년 9월, 홍문학원에서의 학업을 마친 뒤 로신은 센다이(仙臺)의학전문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의학을 배워 새로운 의학으로  《유신에 대한 국민들의 신앙을 추진시키리라》고 생각했다. 학업에 열중한 로신은 후지노 겐쥬로우(藤野?九?)선생의 뜨거운 관심과 도움을 받았다.

한번은 과당에서 로신은 일로전쟁에 관한 환등편을 보게 되였는데, 로씨야군대의 정탐군 노릇을 한 중국인이 일본침력군에게 붙잡혀 머리를 잘리지만 그 처첨한 광경을 빙 둘러싸고 구경하는 중국인들은 목석처럼 무표정했다. 이는 로신으로 하여금 의학공부를 하는것이 그다지 요긴한 일이 못된다고 생각하게 하였다.

만일 정신적으로 자각하지 못한 인간이라면 체구가 아무리 건장해도 아무런 쓸모 없는 페물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되였던 것이다. 1924년에 출판된 첫번째 소설집 《눌함(?喊)?자서》에서 로신은

《그러므로 우리들이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정신을 뜯어고치는 것이고 정신상태를 뜯어고치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것은 당시(1906~1907)에는 당연히 문예를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문예운동을 제창하리라고 작정했다 》고 술회하였다.

즉 문예를 통해 패배주의, 순응주의, 노예주의와 봉건미신사상에 물 젖어 있는 중국의 국민정신을 개조해 보리라는 것이 의사공부를 포기하고 문학에로 전향하게 된 로신의 동기였다. 그리하여 문학을 통한 구국의 길을 택한 로신은 1906년 봄에 다시 도꾜로 돌아왔다.
  
당시 도꾜에서는 손중산, 장태염을 비롯한 혁명파들은 강유위, 량계초를 대표로 하는 보황파와 날카롭게 맞서 론쟁을 벌리고 있는 무렵이였다. 로신은 장태염을 스승으로 모시고 도성장(陶成章) 등 혁명파들과 자주 래왕하면서 반청혁명조직인 광복회의 회원으로 되였다. 1907년, 로신은 문예간물인 《신생》을 꾸리려고 준비했으나 끝내 실패하였다. 로신은 이로 인해 아주 고독감을 느끼였으나 실망은 하지 않았다.

이 무렵에 로신은 《인간의 력사》,《과학사교편》을 발표했고 다윈의 진화론 학설과 서방의 과학사조의 변천사를 소개하고 《문화편지론》, 《마라시력설》 등을 발표하여 서방 자본주의문화발전의 력사적특점과 존재하는 편파성을 분석하면서 렬강들과 경쟁하려면 《먼저 인재를 양성해야 하며 인재가 양성되면 만사가 시행할 수 있게 된다》고 인정했다.

로신은 인재를 양성하려면 반드시 봉건전통사상을 반대하고《이방에서 새로운 소리를 구해야 하며》, 《반항에 뜻을 두고 행동에 옮기는》 전투적정신을 제창해야 하므로 바이론을 위수로 하는 반역정신이 강한 《마라(摩?)》시파를 대폭 소개했다. 로신은 또 동생 주작인(周作人)과 함께 《역외소설집》을 번역, 출판하여 동구라파의 피압박민족과 로씨야 사실주의 단편소설들을 소개했다.

일본에서 류학하는 7년동안 로신은 외국의 자연과학, 사회과학, 문학예술과 철학을 광범위하게 섭렵하여 조기의 사회사상과 문예사상을 형성하였으며, 반제, 반봉건의 혁명적민주주의자로 되였다. 아울러 로신은 문학을 조국의 독립과 자유 그리고 인민의 사상해방을 위해 싸우는데 있어서의 무기로 확정했으며 문학을 통한 구국의 길을 선택했다.  
  
1909년 8월,  일본에서 귀국한 로신은 먼저 항주2급사법학당에서, 후에는 소흥부중학당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폭발하자 로신은 뜨거운 정열을 안고 혁명을 맞이했으며 소흥이 광복되자 로신은 소흥사범학교 교장으로 되였다. 이 해 겨울, 로신은 문언 단편소설 《회구(??)》를 창작했다.

1912년 1월, 중화민국림시정부가 남경에서 성립되였다. 로신은 교육총장 채원배(蔡元培)의 요청을 받고 이 해 2월에  남경에 가서 교육부에 임직했다. 이 해 5월, 로신은 정부가 북경에 이전하게 되자 북경에 있는 중화민국림시정부 교육부에서 과장, 검사 등 직을 력임하면서 주로 도서관, 박물관과 미술교육 등을 관장했다.
  
신해혁명은 반제, 반봉건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혁명의 성과는 원세개에 의해 찬탈당했으며 이어서 황제제도가 복벽되는 추악한 활극이 벌어졌다. 로신은 국사(?事)에 대해 심히 실망하고 여가에 고서들을 수집, 교열하고 불경을 읽거나 옛날의 비석이나 묘지명을 베끼고 금석문의 탁본을 수집하기도 했다.  

구민주주의혁명의 혁명성이 이미 소실되고 신민주주의혁명의  혁명성이 아직 성숙되지 못한 상황속에서 로신은 심각한 사상모순과 내심적인 고통을 경험하면서 사회와 혁명이 나가야 할 새로운 길을 계속 모색하였다.
  
  2. 반제, 반봉건의 기수 -- 로신

  1917년, 로씨야의 10월사회주의혁명의 승리는 중국에 맑스--레닌주의가 널리 전파되게 했다. 1919년, 북경에서는 5. 4운동이 폭발하여 중국혁명은 신민주의시기에 들어서게 되였다. 새로운 시대조류에 고무된 로신은 봉건의 《무쇠집》을 짓부수고 깊은 잠에 빠진 사람들을 깨우려는 열망을 품고 5. 4신문화운동에 투신했으며 미구에 신문화운동의 위대한 기수로 되였다.
  
1918년 초, 로신은 진독수가 주필을 담당한 《신청년》잡지의 편집에 참여하여 민주와 과학을 제창하고 낡은 봉건례교를 반대하는 위대한 투쟁의 앞장에 서게 되였다. 이 해 5월, 로신은 첫 백화소설《광인일기》를 발표했다. 이 소설은 피해망상증에 걸린 미치광이의 심리활동을 묘사했다.

사회생활에 대한 랭철한 묘사와 미치광이 특유의 내심적감수에 대한 묘사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가족제도와 례교의 병페》를 폭로하고 중국 사회의 력사는 바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력사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했다. 이는 철저한 반봉건의 첫《웨침》으로서 로신의 전투적 일생에서의 새로운 발단으로 되였다.
  
이어서 로신은 《공을기》, 《약》, 《고향》, 《아Q정전》 등 10여편의 소설을 발표했는데, 이런 소설들을 묶어서 《눌함(?喊)》이라는 첫 단편소설집을 1923년 8월에 세상에 내놓았다.《눌함》은 신해혁명전후로부터 5. 4운동전후의 중국사회를 반영하였다. 특히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의 압박하에 점차 파산되고 령락해 가는 고풍스러운 농촌 그리고 소도시나 향진들의 모습을 반영했으며 몰락한 지식인이나 도시빈민이나 인력거인부나 생활난에 쪼들린 농민의 형상을 부각했다.

이런 소설들은 《심각하고도 절실한 표현과 격식의 특이함》으로 하여  젊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문학혁명의 실적을 과시했다.》로신은 중국문화 유산중의 알맹이들을 골라 내여 외국문학의 우수한 요소들과 융합시킴으로써 중국 현대소설의 걸작들을 창작해 내고 아울러 중국현대문학의 위대한 정초자로 되였다.
  
이 시기에 창작된 《아Q정전》은 로신소설의 대표작이다. 이 소설은 신해혁명전후의 농촌마을인 미장을 배경으로 하여 정신적인 해독을 깊이 받은 가난한 농민 아Q의 형상을 창조했다. 아Q는 땅도 없고, 집도 없고, 가정도 없는 시골의 날품팔이군이다. 그는 늘 남에게서 혹독한 착취와 압박를 당하고 경멸과 학대를 받으면서도 자신과 타인을 뒤바꾸어 참된 승리자는 자기라고 생각하며 늘 정신상에서는 《승리한 상태에 처해 있었다.》이것이 바로 이른바 아Q의 《정신승리법》이다.

그는 늘 자기의 과거에 대해 자랑을 하고 미래에 대한 환상에 잠겨 있었으며 스스로 자신을 위안하기도 하다가도 자기를 멸시하기도 하면서 시종 엄혹한 현실을 정시하지 못한다. 이밖에도 그는 건달군의 라태함과 교활성도 갖고있다. 소설은 신해혁명 시기에서의 아Q의 표현과 운명을 집중적으로 보여주었다.

혁명이란 바로 《반란》이라고 여긴 그는 처음에는 혁명에 대해 질색했으나 봉건통치배들이 혁명이 도래하자 무서워 벌벌 떠는 것을 보고는 기뻐하고 혁명을 동경하게 된다. 그러나 이 혁명은 농민의 힘을 홀시하고 오히려 봉건계급과 결탁한다. 미장은 모든 것이 의구했고 애오라지 죄 없는 아Q만 붙잡혀 총살당한다. 이 결말은 신해혁명과 그 령도자들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다.

소설은 아Q라는 이 불후의 전형을 부각했고 신해혁명의 력사적교훈을 반영했고 농민의 민주주의각성을 계발할데 대한 엄숙한 과제를 제기했다. 물론 아Q형상을 창조한 로신의 의도는 단지 사회정치적인 측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과거를 자랑하고 현실의 자기의 약점과 실패를 은페하려는 아Q의 《정신승리법》은 5천년의 찬란한 력사와 문화를 가진 문명고국, 중앙제국이라는 무거운 전통의 보따리를 짊어지고 있는 중국인들이 봉건사회의 붕괴기에 서방렬강들의 강력한 도전앞에서 수치스러운 패배를 거듭하는 와중에서 경험하게 된 보편적 사회심리의 상징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아Q정신은 대단한 전형성을 띠게 되였던것이다. 그리고 주관적인 환상에 사로 잡혀 객관환경의 변화와 추이를 모르는 아Q의 성격은 서방문학에서의 돈 끼호테의 성격처럼 민족과 시대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잡다한 인간성격류형중의 하나의 항구한 류형이기도 하다.  
    
로신은 중국 현대 잡문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5. 4시기 로신은 많은 잡감과 론문들을 썼는데, 이런 글들은 대부분 《신청년》잡지에 발표되였으며 후에는 《열풍(??)》과《무덤(?)》에 수록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비수와 투창처럼 날카롭고 신랄하며 형상이 생동하고 광범위한 사회비판성을 갖고 있다. 이런 잡문중의 어떤 작품은 봉건 부권사상과 정조관념을 엄정하게 비판했고, 어떤 작품은 보수파들을 신랄하게 풍자했으며, 어떤 작품은 사회의 부조리를 심각하게 해부했다.

이러한 잡문들은 하나의 정해진 틀이나 속박에 구애됨이 없이 민족과 나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보야줌과 동시에 랭철하고 준엄한 필치로 당시의 정치와 세태를 비판하고 꼬집음로써 삶의 진리를 제시했는데, 이러한 스타일을 사람들은 《로신풍》이라고 일컬었다. 로신의 잡문은 중국 현대 잡문의 새로운 풍격을 개척했으며 후세의 수많은 잡문작자들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로신은 랭철한 현실주의자였다. 현실의 각종 모순들을 대담하게 정시한 그의 소설과 잡문은 넓고도 깊고 진실한 력사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낡은 중국의 모든 것, 즉 몇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전통세력과 전통사상에 대해 동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에 비해 보다 많이 알고 있었으며  보다 투철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구세력의 진영에서 나왔지만 비타협적인 혁명자의 립장에 서서 자기가 속했던 진영을 맹공격하여 구세력에 치명상을 입혔다. 그는 낡은 세력과 낡은 사상에 대해 가장 심각하게 폭로하고 가장 견결하게 싸운 위대한 작가이다. 중국혁명사와 사상사에서의 로신의 걸출한 공헌은 5. 4 신문화운동중에서 충분하게 표현되였다.

그가 낡은 사회의 모든 것들을 무자비하게 폭로한 것은 그러한 병폐를 고칠 수 있도록 사람들의 주의력을 환기시키기 위한데 있었으며 병든 사회를 개혁하고 병든 국민성을 개조하기 위한데 있었다. 말하자면 로신은 나라와 민족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나라와 민족에 존재하는 병페들을 향해 가차없이 비판과 폭로의 메스를 들이댔던 것이다.
  
1920년 가을부터 1926년까지 로신은  선후로 북경대학, 북경녀자사범대학 등 대학들에서 교편을 잡고 중국소설사를 계통적으로 연구하고 강의했다. 후에 그는 강의안들을 정리하여 《중국소설사략》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치 책은 중국소설에 종래로 사(史)가 없었던 국면에 종지부를 찍은 개척적인 의의가 있는 학술저서이다. 로신은 이 무렵에 또 번역도 많이 했는데, 주로 로씨야와 일본의 문예창작과 문예리론들을 번역해 출판했다.
  
1924년으로부터 1925년에 이르는 사이에 로신은 단편소설 《축복》,《상서(?逝)》등 11편을 창작하여 두 번째 소설집《방황》을 펴냈다. 《눌함》에 비하면 《방황》은 작자의 당시의 우울하고 방황했던 정서를 다분하게 드러내고있기는 하지만 사회에 대한 분석과 비판은 여전히 랭철하고도 심각했다. 그리고 소설의 예술형식에 대한 파악이나 인물형상의 묘사 같은 면에서 이전에 비해 보다 원숙해졌다.
  
1925년 전후, 자산계급 우익지식인들인 호적(胡适) 등은 정치상에서 날로 보수적인 성향을 띠기 시작했으나 로신은 계속 문화분야에서 좌충우돌하면서 용감하게 싸웠다. 이 시기에 그는 어사사(??社)에 참가했고 망원사(莽原社)와 미명사(未名社)을 조직, 령도하고 《신보부간(晨?副刊)》, 《경보부간(京?副刊)》을 지지했다.

북경녀자사범대학 학생들이 교장 양음유(???)를 반대하는 데모를 일으켰을 때 로신은 진보적학생들의 편에 서서 학생들을 압제한 갑인파(甲寅派)의 죄상을 탄핵하고 그들의 복고주의의 론조를 바판했으며 《현대평론파》에 속하는 진원(?源) 등이 보수세력을 등대고 학생들을 억누르고 요언을 날조하는 비렬한 행동을 폭로했다.

5. 30운동과 3. 18참안이 일어났을 때 로신은 무고하게 희생된 사람들을 침통하게 애도하고 투쟁의 교훈을 총화함과 아울러 제국주의, 봉건군벌과 그들의 주구들을 행해 엄중히 항의했다. 로신은 《혈채는 반드시 똑같은 것으로 상환해야 한다. 빚을 갚지 않고 질질 끌수록 더욱 많은 리식을 지불해야 한다》고 하면서 진정한 용사가 되어 적들과 지속적이고 비타협적인 투쟁을 해야 한다고 청년들에게 호소했다.

이 시기의 잡문은 이미 광범위한 사회비평으로부터 치렬한 정치투쟁에로 넘어갔다. 이 시기의《〈페어플레이〉는 마땅히 천천히 시행해야 한다》는 자산계급 자유주의와 전통적인 중용지도를 반대하는 전투적인 격문이였다. 로신은 이 잡문에서 《물에 빠진 개를 호되게 때려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중대한 현실적의의를 갖고 있다. 이는 로신의 끈질긴 전투정신이 이미 성숙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주고 있다.
  
혁명정세가 변화됨에 따라 로신은 원유의 사상무기는 더는 정세발전의 수요의 적응되지 않음을 느끼게 되였다. 그는 현실투쟁중에서 부단히 사회혁명론의 사상을 수용함으로써 그의 세계관속의 신구 사상의 모순은 한층 격화 되였다. 그는 자신의 사상상의 모순을 덮어 감추려 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자신을 해부했다. 중국현대문학에서의 첫 산문시집 《야초》와 이 무렵에 쓴 일부 서신, 잡문들은 자신에 해부의 메스를 들이댄 로신의 노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924년부터 1926년 사이에 창작된 《야초》에는 도합 23편의 작품들이 수록되여 있다. 이런 작품들은 당시 사회의 암흑상을 날카롭게 폭로하고 아울러 새로운 혁명의 길을 찾으려고 하는 작자의 정신적탐구를 보여주고는 있다. 로신은 비록 합당한 길을 찾지 못함으로 인해 내심상에서 모순에 빠져 있기도 했으나 암중모색하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혁명정신을 갖고 있었다.

작품의 구상은 기묘하고 참신하며 형식은 다양하고 다채로운바 상징주의적방법을 운용한것도 있지만 잡문에 접근되는 신랄한 풍자도 있다. 작자의 사상은 주로 시적형상으로 표현되였는데, 그 숨은 뜻이 심원하고 감정적색채가 짙다. 그러나 당시 환경의 관계로 《직설을 하기 어려웠던》까닭에 일부 작품들의 숨은 뜻은 리해하기 비교적 어렵다.
  
북양군벌정부의 통집령과 박해를 피하고 아울러 남방의 혁명투쟁에 대한 동경과 개인적인 생활 면의 원인으로 하여 로신은 1926년 8월에 남하하여 하문대학교수로 임직하여 《중국문학사》 등 과목을 개설하고 후에는 그 강의안들을 정리하여 《한문학사강요》를 출판했다.

하문에 체류는 동안에 로신은 《지나간 일을 다시 화제에 올린다(?事重提)》라는 제목으로 된 다섯 편의 수필을 창작했고 이전에 쓴 5편의 수필과 한데 묶어 산문집 《아침에 핀 꽃을 저녁에 줍다(早花夕拾)》를 출판했다. 이런 작품들에서 로신은 친절한 필치와 짙은 감정으로 자신의 동년시절로부터 청년시절에 이르기까지의 단편적인 경력을 기록함으로써 고풍스러운 중국의 사회의 이모저모를 그려냈다.

흘러간 옛일들과 보모나 아버지, 스승이나 친구들에 대한 로신의 추억에는 선명한 사랑과 증오가  선명하고 반봉건적사상경향성이 뚜렷하다. 로신이 하문(厦?)에서 쓴《〈무덤〉뒤에 쓰는 글》에서는 자신의 과거의 투쟁경력과 사상발전에 대해 참다운 총화와 해부를 진행하여 처음으로 《세계는 오히려 우둔한 바보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총명한 사람들은 결코 세계를 지탱해 나가지 못한다》는 유명한 론단을 내놓았다.

이는 다년간의 현실투쟁을 통해 로신의 세계관에는 한차례의 질적인 비약이 온양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즉 로신은 유심사관을 비판하고 유물사관의 대문안에 발을 들여놓았음을 보여준다.

  3. 진화론로부터 계급론에로 전향한 로신

  중국공산당의 추천을 거쳐 로신은 1927년 1월에 광주에 도착하여 중산대학의 교수와 교무주임으로 임직하였다. 이후로부터 로신은 공산당인들과 혁명적청년들과 긴밀한 련계를 갖게 되였으며 중국혁명의 길에 대하여 비교적 명확한 인식을 갖게 되였다.
  
《중국의 현재의 사회상황으로 보아서 실지적인 혁명전쟁이 있어야만 한다. 한 수의 시로써는 손전방(??芳)을 겁주어 쫓아낼 수 없지만 포 한방을 쏘았더니 손전방이 물러갔다.》
  
이는 로신이 《이이집(而已集)?혁명시대의 문학》에서 한 말이다. 이 무렵에 이르러 로신은 문학의 기능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되였던 것이다. 즉 《먹 / 피》, 《붓 / 총칼》의 대립구조속에서 문학을 통해 근대적의미에서의 각성한 자아를 확립한 주체적인간을 창조하려고 사회진화론을 제시하고 전파하는 사상개조작업의 한계성을 절감한 로신은 새로운 문학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즉 인간이라는 이 사회의 주체에 대한 개조작업은 전반 사회구조에 대한 개조작업을 떠나서 결코 실행할수 없음을 절실하게 느끼기 시작했던것이다.  
  
1927년 4월 10일, 혁명군의 승리적인 진군의 환호성속에서 로신은 《상해와 남경의 함락을 경축하는 그곳》이라는 글에서 레닌의 명언을 립론의 근거로 삼아 《자그마한 승리로 인해 개선가에 도취되는것》을 극력 경계하고 적들이《그 틈을 타서 다시 일어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로신은 《부단히 진격하여》혁명을 끝까지 진행할 것을 주장했다. 바로 이틀후에 장개석은 상해에서 구테타를 발동하였다.

4월 15일, 광주의 국민당 반동파들도 공산당인과 혁명대중들을 대거 체포하여 학살하였다. 로신은 중산대학 각 주임을 불러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채포된 학생들을 구출하려고 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다. 이에 로신은 분노하여 모든 직무를 사직하고 백색테로속에서도 계속 광주에 남아서 글을 쓰고 투쟁했는데, 이 무렵에 쓴 글들은 《이이집》에 수록되여 있다.
  
치렬하고 잔혹한 계급투쟁은 로신을 심각하게 교육했다. 이전에 로신은 청년들을 압박하고 살육하는 자들은 대부분 로인들이라고 여겼댔으나 이 무렵에 와서는 그런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되였다.  로신은 《다 같은 청년이지만 두 진영으로 나뉘여 혹자는 편지를 보내여 밀고하고 혹자는 관청을 도와서 사람을 잡는것을 목격했다.》

(《삼한집(三?集)?서언》) 이리하여 로신이 신봉했던 사회진화론은 계급투쟁의 잔혹한 현실앞에서 맥없이 허물어져 내리고 말았다. 이때로부터 로신은 계급론에로 전향하게 되였다. 무시무시한 백색테로속에서 로신은 두려움 없이 무산계급의 전투행렬에 가담하였다.
  
1927년 10월, 상해로 거주지를 옮긴 로신은 북경녀자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시절의 녀제자 허광평(??平)과 동거하면서 마지막 10년동안의 전투적생활을 시작했다. 《이 무렵에는 두가지 반혁명의 〈포위토벌〉, 즉 군사상의 〈포위토벌〉과 문화상의 〈포위토벌〉이 있었다.

그리고 두가지 혁명의 심입, 즉 농촌혁명의 심입과 문화혁명의 심입이 있었다.》《그런데 공산주의자 로신은 바로 이러한 〈포위토벌〉속에서 중국문화혁명의 위인으로 되였다.》(모택동《신민주의론》)
  상해에 온지 얼마 안되여 로신은 《어사(??)》반월간의 주간으로 잇으면서 욱달부와 함께 《분류(奔流)》월간지를 편집하기도 했다.

로신은 또 혁명호제회(互??)에 참가하여 중국공산당과 련계를 갖고 있었다. 1928년, 창조사와 태양사는 로신과 무산계급혁명문학에 관한 론쟁을 벌렸다. 문제를 정확하게 천명하기 위해 로신은 플레하노브와 루나찰스키와 같은 맑스주의문예리론을 번역하고 탐구했다.

로신은 중국혁명 및 문예운동의 실제에 결부하여 많은 옳바른 의견들을 발표하여 창조사 등의 좌경적편향에 대해 정확히 비판했는바 이는 무산계급문예운동의 건강한 발전에 아주 유리했다. 로신은 무산계급문예는 무산계급의 해방을 쟁취하는 무산계급혁명의 현실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효과적인 수단으로 간주한 측면이 크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문학예술이 선전이기는 하지만 모든 선전이 결코 다 문학예술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곧 모든 꽃이 다 색깔을 지니고 있지만, 색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 꽃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혁명이 구호나 표어, 포고, 전보, 교과서 외에 문학예술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문학예술이기 때문이다》(《문예와 혁명》)리고 인정했다. 이처럼 로신은 문학의 계급성과 혁명적공리성을 인정하면서도 문학고유의 특점과 문학의 상대적인 독립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1929년 9월, 로신과 허광평(??平) 사이에서는 아들 해영(海?)이 태여 났다. 로신은 1928년과 1929년 이 2년 동안에 쓴 잡문들을 묶어서 《삼한집(三?集)》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출판했다. 이 잡문집에는 문학론쟁과 맑스주의를 학습하는 과정에서의 로신의 사상변화가 반영되였으며 그가 점차 새로운 사상무기를 장악하게 된 경위가 반영되여 있다.
  
로신은 청년시대부터 민족의 해방과 인민의 리익을 관심했다. 낡은 중국을 개조하기 위해 로신은 부단히 개혁의 무기의 개혁의 길을 모색하여 왔다. 로신은 제일 처음에는 생물학의 진화론적인 관점으로 세계를 관찰했고 후에는 맑스주의에로 전향했다. 그리고 로신은 처음에는 이른바《국민정신》의 개조에 착안하였지만 후에 와서는 경제와 정치제도의 개혁을 중요시하게 되였다.

사회진화론자로부터 계급론자에로의 전변, 혁명적민주주의자로부터 공산주의자에로의 전변 및 계몽주의자로부터 무산계급혁명가에로의 전변, 이것이 바로 로신의 사상발전의 길이다. 로신이 걸어온 전투적인 문학의 길은  중국문화혁명의 방향을 보여주었다.
  
《계급사회에서 문학가 스스로 〈자유〉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계급을 초월했다고 생각하더라도 결국은 무의식중에 자신이 속한  계급의 계급의식의 지배를 받게 되며 창작들도 다른 계급의 문학이 아닌 것이다.》
  
이는 로신이 1930년 《억지번역과 문학의 계급성》이라는 글에서 한 말이다. 1930년 전후로부터 로신은 바로 이러한 계급론에 립각하여 자신의 문학창작과 문학활동을 진행했다. 그리고 이러한 계급론은 그로 하여금 자연적으로 공산주의의 사상경향을 갖게 했다.  
  
1930년 1월부터 로신은 《맹아(萌牙)월간》(후에는 좌익작가련맹의 기관지로 되었음)의 주필을 맡았다. 1930년 2월, 로신은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중국자유운동대동맹》의 발기인으로 가담했다. 이런 활동으로 로신은 국민당에 의해 《타락한 문인》이라는 소위《죄명》으로《통집(通?)》대상으로 되였지만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았다. 1930년 3월, 중국좌익작가련맹이 상해에서 성립될 때 로신은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령도적위치에 있었다.

로신은 창조사, 태양사에 소속된 작가들과의 분기를 일소하고 이들과 단결하여 함께 싸웠다. 중국좌익작가련맹 성립대회에서 로신은 《좌익작가련맹에 대한 의견》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로신은 연설에서 맑스주의와 중국문예혁명의 실제를 결합하여 혁명작가들에 대한 요구와 좌익작가련맹의 사업방향을 정확하게 제기하여 중국문예혁명의 지도성적인 문헌으로 되였다.

좌익작가련맹이 성립되기전후에 로신은 많은 혁명작가들을 단결하여 자산계급문화단체 신월사(新月社)와 국민당이 부추기는 소위《민족주의문학》에 대해 견결한 투쟁을 벌렸다. 로신은 초계급적인 인성론을 비판하고 문학의 계급성원리를 천명했으며 아울러 제국주의 식민통치하의 류망정치가 파생시킨 류망문학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1931년 2월, 좌익작가련맹의 성원이며 공산당원인 유석(柔石), 은부(殷夫) 등이 국민당에 위해 채포되여 살해당했다. 로신도 국민당에게 체포될 수 있는 위험한 처지였으므로 부득이 집을 떠나 도피생활을 하면서도 창작을 지속했다. 그는 좌익작가련맹의 비밀간물 《전초(前哨)》에 글을 발표하여 희생된 동지들을 기념했으며 아울러 《암흑한 중국 문예계의 현재 상황》이라는 글을 써서 미국인 친구인 스모트레이더러 영문으로 변역하여 국외에 보내여 국민당의 피 비린 탄압을 탄핵했다.

2년후 로신은 또 《망각된 기념을 위하여》라는 글을 써서 재차 희생된 동지들을 추모하고 국만당반동파를 탄핵했다.
  
좌익작가련맹 성립전후에 로신은 자각적으로 중국공산당의 기치하에 붓을 무기로 삼아 국민당반동파들과 용감히 싸웠다. 이리하여 로신에게서 더는 개인 분투의 흔적을 볼수 없게 되였으며 오래동안 《새로운 사회가 세워질것을 바랐지만 〈새로운것〉이란 마땅히 어떠한 것이여야 함을 몰랐던》(《차개정잡문?국제문학사의 질문에 대답함》) 모순이 해결됨으로써 간거한 암중모색을 대체하여 그의 잡문에는 리상을 수호하기 위해 용감히 싸우는 내용이 주종을 이루게 되였다.

로신은 무산계급문학을 수호하고 인민의 혁명사업을 수호하고 공산주의학설 및 그 실천을 수호했다. 바로 이러한 사상적토대우에 로신의 온건하고 여유 있는 전투적풍격이 형성되였다. 문예문제에 관한 글들에서 계급론은 그의 리론의 초석으로 되였는바 문학은 마땅히 《무산계급해방의 일익으로 되여야 한다》고 명확히 선언했다. 문예와 사회, 사상과 예술, 작가와 혁명의 관계에 대해서도 로신은 과학적으로 론술하였으며, 특히 작가의 세계관문제는 그의 글들에서의  론술의 중심이였다.

로신은 좌익작가련맹의 주장(主?)이고 기수였을뿐만 아니라 혁명문학가들의 휼륭한 벗이였다. 맑스주의문예리론상에서의 로신의 성취와 공헌은 문예에 대한 중국공산당내의 좌경로선의 일부 영향을 극복하고 좌익문예운동이 나아갈 길을 가리켜 준데 있다.

   4. 전례 없는 민족영웅

  1931년 9월 18일, 일본제국주의는 심양을 진공하고 이어서 동북 3성을 신속하게 점령하여 민족위기는 날로 가심해 졌다. 로신은 많은 잡문을 써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국민당의 반동정책을 날카롭게 폭로했는데, 1930년부터 1931년에 이르는 사이에 창작된 이러한 잡문들은 《이심집(二心集)》에 수록되여 있다.

이 잡문집은 로신의 맑스주의 세계관이 성숙단계에 들어 선 뒤에 나타났다. 로신은  자신의 잡문을 스스로 평하면서 《이심집(二心集)》은 자기의 다른 잡문들에 비해  비교적 날카롭다고 인정했다.

전기의 잡문들에 포함된 사회비평과 정치투쟁의 내용들에 비해 30년대에 급격하게 변동된 정치풍운과 문화투쟁은 《이심집(二心集)》 및 그 이후의 여러 잡문집들에 보다 전면적이고 보다 유력하게 반영되였다. 이런 잡문들은 《가장 심각하고 기세가 있을 뿐만 아니라 편면성이 없는데, 이는 이 시기에 그가 변증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모택동《중국공산당 전국 선전사업회의에서의 연설》)
  
동북을 점령한 후 일본침략자들은 전쟁을 상해에까지  확장시켜 1932년에 1. 28 사변을 발동했다. 로신은 전쟁터가 된 상해에서 잠시 집을 버리고 피난했다. 그는 모순(茅盾), 호유지(胡愈之) 등 43명의 유지인사들과  련명으로 《세계에 알리는 상해문화계의 글》을 발표하여 상해를 침략한 일본제국주의에 항의했고 정국정부의 대일 타협을 반대했다.

이 해에 로신은 또 《우리는 더는 속임수에 넘어 가지 않는다》, 《중구과 로씨야 사이의 문자지교(文字之交)》 등 잡문을 발표하여 재국주의자들의 거짓말을 발가놓고 사회주의의 기치를 수호하고 중국과 쏘련 두 나라 인민들과 작가들이 반제의 전선에서 손을 굳게 잡을 것을 희망했다. 이런 글에는 로신의 절절한 애국주의감정이 흘러 넘치는데 이러한 애국주의는 위대한 국제주의정신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었다.
  
1933년 1월 로신은 중국민권보장동맹에 참가하여 상해분회의 집행위원으로 선거되였다. 그는 송경령, 채원배 등과 함께 무고한 사람들을 마음대로 체포하는 국민당정부를 반대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구출활동을 벌렸다. 이 해 2월, 영국의 작가 버나드 쇼가 상해에 왔을 때 로신은 그와 만났고 아울러 여러 편의 잡문을 써서 버나드 쇼를 지지하고 반동여론을 폭로했다.

일본의 무산계급작가 고바야시 다끼지(小林多喜?) 가 일본반동당국에 의해 고문을 당하다가 숨 진 사건이 발생하자 로신은 친히 조전을 보냈으며 고바야시 다끼지의 유가족들을 위한 모금활동을 발기했다. 5월에 로신은 송경령과 함께 친히 상해주재 독일령사관에 찾아가 히틀러의 파쑈폭행을 반대하는 항의서를 넘겨주었다.

6월 18일, 국민당특무들이 민권보장동맹 총간사 양전(??)을 암살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 로신은 적들의 암살의 위험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결연히 양전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9월에 세계제국주의전쟁반대위원회가 상해에서 비밀리에 원동반전회의를 열었을 때 로신은 이 회의를 지지하고 협조했으며 명예주석단성원으로 선거되였다.

이 해 상반년, 로신은 하가간(何家干)이라는 필명으로 《신보(申?)》와 《자유담》에 시대와 정치를 비판하는 잡문들을 발표했다. 그러나 압력이 뒤미처 따라오자 로신은 부득이 내용을 좀씩 조절하고 보다 은페적이고 에둘러치는 수법을 사용하여 적들의 감시의 눈길을 피하려고 했고 여러 가지 필명을 엇바꾸는 방식으로 적들과 숨박꼭질을 하면서 수많은 사회의 비리와 악습을 행해 날카로운 해부의 메스를 들이댔다.

이러한 글들은 총칼이 숲을 이룬 무시무시한 환경속에서 에둘러서 기습하고 기동령활하게 대응하는 잡문의 특점을 남김없이 발휘했다. 진리를 견지하고 불의에 저항하고  완고한 적들을 멸시하는 것은 로신의 몸에 체현된 중국인민의  억센 기상과 아름다운 성격이며 아울러 로신 잡문의 전투적인 풍격인 것이다. 1933년에 창작된 로신의 잡문들은 《남강북조집(南腔北?集)》(1932년의 작품들도 포함되였음), 《위자유서(?自由?)》,《준풍월담(准?月?)》에 수록되였으며, 허광평과의 통신집 《량지서(?地?)》도 이 해에 출판되였다.
  
이 몇 년 사이에 로신과 공산당인들과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 졌다. 1932년, 로신은 쏘베트구역에서 상해에 온 홍군 장령 진갱(??)을 비밀리에 만나서 국민당군대의 《포위토벌》을 반격하는  홍군의 처절한 투쟁과 쏘베트구역 인민들의 생활형편을 료해했다. 1931년부터 1934년 1월초에 이르는 사이에 로신은 구추백과 서로 래왕하는 가운데서 두터운 우정을 맺었다. 로신은 세번이나 도피중에 있는 구추백을 생명의 위험을 무릎 쓰고 보호했다.

그들 두 사람은 좌익작가련맹의 사업을 함께 토의하고 령도했으며 문예의 대중화운동을 적극 제창하고 이른바《자유인》과 《제3종인(第三?人)》울 반대하는 투쟁중에서 서로 배합하고 응원했다. 그들 둘은 또 함께 구상한 토대우에서 구추백이 집필한 10여편의 잡문을 로신이 늘 쓰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구추백은 로신의 전투업적과 잡문을 높이 평가하면서 잡문선집을 편찬하였을 뿐만 아니라 《〈로신잡감선집〉서언》을 써서 로신의 사상발전의 과정과 그의 잡문의 전투적의의를 총화했다. 구추백이 1935년 복건 장정(?汀)에서 국민당반동파들에세 살해된 비보를 받은 로신은 비통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후에 로신은 병상에서 구추백의 역저 《해상술림(海上述林)》을 정리하여 출판에 교부함으로써 구추백에 대한 진지한 혁명적동지애를 표현했다
  
1934년, 장개석은 제5차 반혁명 군사 《포위토벌》에 배합하여 봉건교조를 준칙으로 하는 이른바《신생활운동》을 벌림과 동시에 각급 학교들에서 존공복고(尊孔複古)의 교육을 실시하고 진보적서적들을 엄금하고 문화기관들을 패쇄시키는 악랄한 소동을 벌렸다.

일본제국주의도 중국 동북지방에서 《왕도락토(王道樂土)》를 건립하고 《공자의 유교학설을 회복할것》을 고취했다.이에 비추어 로신은 《중국의 두어가지 일에 관하여》, 《유술(儒術)》등을 발표하여 력사사실들을 빌어서 국민당반동정부가 실시하는 문화전제주의와 침략자들의 복고주의의 본질을 까밝히였다.  

1935년, 북경과 천진이 위태롭게 되여 전반 화북 땅이 일본제국주의에게 점령당하게 되는 위급한 관두에 로신은 정세의 발전과 문화사상의 동향을 주목했다. 공농 홍군이 2만 5천리의 대장정을 거쳐 섬북에 도착하자 로신은 지대한 고무를 받고 스모트레이를 통해 빠리를 거쳐 중공중앙에 전보를 보내여 이 위대한 승리를 열렬히 축하했다. 북평에서 12. 9 애국학생운동이 폭발하자 로신은 인미대중들의 애국운동을 열렬히 찬영하면서 《부시돌이 있는 이상 불씨는 없어지지 않을것이다》라고 희망에 넘쳐 말했다.

로신은 아주 큰 위험을 무릎 쓰고 중요한 공산당인 방지민(方志敏)이 옥중에서 중공중앙에 보내는 편지와 원고들을 간수했다가 안전하게 연안에 있는 중공중앙에 전달했다. 문화계의 급격한 분화와 시비가 전도된 현상에 비추어 로신은 정면적인 세력을 적극 부추기고 엽자(?紫), 소홍(??), 소군(??) 등 문예의 새싹들을 키우는 한편 또 사악한 기풍을 탄핵하고자 8절로 이루어진 《〈제목이 정해지지 않은〉풀》과 7편으로 이루어진 《문인상경(文人相?)》을 발표했다.

이러한 글들은 바로 이해에 《차개정잡문2집(且介亭?文二集)》에 수록되였다. 나쁜 놈들의 조상의 무덤을 파헤쳐버리고 민족의 올바른 기풍을 선양하기 위해 로신은 또 《리수(理水)》 등 4편의 력사소설을 창작하여 1934년에 창작한 《비공(非攻)》과 1927년 이전에 창작한 3편을 합쳐 소설집 《고사신편(故事新?)》을 출판했다. 이 소설집은 력사제재와 현실의 투쟁이 밀접하게 결합된 걸출한 작품집이다.

로신은 이 소설집에서 한편으로는 사실주의원칙을 지켜 력사인물들의 주요한 정신을 진실하게 반영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랑만주의적상상을 대담하게 동원하여 력사제제속에 강렬한 애증과 리상을 주입했다. 이런 예술적특징은 반면적형상에 있어서는 현대생활속의 일부 전형적세부들을 대담하게 흡수하고 그가 잡문에서 늘 사용해오던 만화화의 수법을 충분히 발휘하여 작품의 현실비판성을 돌출한데서 보여진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정면인물의 형상에 있어서는 중국인민들의 우량한 전투적정신을 개괄하여 작품으로 하여금 혁명적랑만주의 정신으로 충만되여 있는데서 보여진다.
  
문단에서의 로신의  활약이 갈수록 맹렬해지고 있는 무렵에 그의 원유의 페병은 날로 위독해 갔다. 1935년 로신은 많은 친우들의 간곡한 권고에 따라 병원에 입원하게 되였다. 그는 《일을 하지 않고 몇 년을 더 사는것보다는 빨리 할 일을 다 해놓고 몇년 덜 사는게 낫다》고 말한적 있다.

1936년 로신은 비록 병상에 누워있기는 했지만 의연히 글쓰기를 멈추지 않고 많은 잡문들과 편지들을 남기였다. 《차개정잡문말편(且介亭?文末?)》은 로신의 마지막 1년동안의 글을 묶은 것이다. 《민족혁명전쟁의 대중문학》과 《국방문학》이라는 이 두 슬로건을 내건 두 파 사이의 론쟁이 점점 치려해져 가고 있을 때 로신은 《항일동일전선문제에 관한 서무용(徐懋庸) 견해에 답함》을 발표하여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관계를 정확히 처리했고 통일전선중에서도 필요한 계급투쟁과 무산계급의 령도권을 견지할 것을 주장했다.

《국방문학》의 일부 옳지 못한 견해들이 바로 잡혀 진 뒤에 로신은 《민족혁명전쟁의 대중문학》과 《국방문학》의 두 슬로건은 《병존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이 해 10월, 로신, 곽말약, 모순, 파금 등 21명은 문예계의 여러 분야를 대표하여 선언울 발표함으로써 론쟁을 결속 짓고 초보적으로 문예계에서의 통일전선을 형성하게 되였다. 이처럼 로신은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붓을 무기로 삼아 싸웠다.  
  
1936년 10월 19일, 로신은 상해에서 서거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국빈의관에 찾아와 유용(?容)을 첨앙했으며 중공중앙에서는 조전(吊?)을 보내여 애도를 표했다. 10월 22일, 로신의 장례식에 참가한 추도객은 수만명에 달했다.

로신의 유체에는 상해의 민중들이 마련한 《민족혼(民族魂)》이라는 글발이 아로새겨진 기발이 덮여 있었으며 로신의 유체는 상해 홍구(虹口)의 만국공묘(万?公墓)에 묻혔다. 1956년 로신의 묘는 상해 홍구공원에 옮겨졌는데 모택동이 묘비에 제사(??)를 썼다.
  
로신의 빛나는 일생은 중국공산당과 전국 인민들의 숭고한 평가를 받았다. 로신은 중국 현대문학의 가장 걸출한 대표일뿐만 아니라 한평생 붓을 총칼로 삼아 불의에 저항하고 나라와 민족의 나아갈 길을 모색한 사상가였다.  
    
최근 몇년동안 중국문단의 일부 사람들이 로신을 폄하하는 바람을 일킨적이 있기는 하지만 중국 현대문학사사에서의 로신의 지위는 당시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이다. 모택동은 일찍 1945년에 발표된 《신민주의론》에서 다음과 같이 로신을 평가한적 있다.
  
《로신은 중국문화혁명의 주장이다. 그는 비단 위대한 문학가일뿐만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이며 위대한 혁명가이다. 로신의 뼈는 가장 단단하다. 그에게는 추호의 노예근성과 연골증세도 없다. 이는 식민지, 반식민지 인민들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성격이다.

로신은 문화전선에서 전 민족의 대다수를 대표하여 적들을 향하여 돌진한 가장 정확하고 가장 용감하고 가장 견결하고 가장 정열적인 전례 없는 민족영웅이였다. 로신의 방향은 바로 중화민족의 새 문화의 방향이다.》
   로신에 대한 모택동의 이 평가는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