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이영도의 청마연서 출판사건 - 김규태

이강기 2015. 10. 1. 22:00

시인 김규태의 인간기행 <2> 이영도의 청마연서 출판사건

 

 

20년간 5000여통 '신앙같은 사랑'

 

 

청마 이미지 훼손될까 사후 서둘러 책으로 출간

속사정 모르는 문단 후배들 "연서 상품화" 매도

 

 

청마가 사랑했던 이영도를 소개한 책

청마 유치환은 세계에서 가장 긴 연서를 쓰고 간 시인이다. 아마 기네스북도 이런 고급스러운 기록을 발견했더라면 호재로 삼았을 것이다. 그가 40대 전후의 나이에서 운명한 60세까지 5000여 통의 간절한 연서를 한 여인에게 간단없이 띄웠으니 말할 나위없다. 그것은 하나의 일과였다. 시조를 정갈하게 써 온 정운 이영도는 누가 보더라도 청초한 아름다움과 남다른 기품을 지닌 여인상이었다. 평생 한복을 입었다. 계절에 맞춰 하늘하늘한 옥색 모시적삼이나 하얀 모시옷을, 진보라나 검정 한복을 즐겨 입었다. 머리 매무새는 조선조의 여인처럼 동백기름을 발라 뒤로 땋아서 말아 올렸다.

 

그는 어느 날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만일 재혼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남으로부터 손가락질은 젖혀두고라도 더 불행해졌거나 가여움을 받았을 것이다. 자신과 재혼을 주선했던 상대들이 모두 저명한 인사들이었는데 자신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이란다. 그 가운데는 영문학자이며 시인 수필가인 이양하 교수가 있었다. 이를 두고 일찍이 타계한 예로 삼았다. 딸 하나 있는 청상으로서 불행한 재혼보다 청마와의 염결한 사랑의 지속을 다행으로 여긴다는 얘기다.

 

청마가 병마 아닌 교통사고로 운명했을 때 이왕 비극은 맞았지만 또 하나의 걱정거리가 생겼다. 이영도는 우선 다른 젊은 여인들이 청마의 연서를 책으로 묶어 내는 것이 두려웠다. 이런 여인들 문제로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서둘러야 했다. 이 지상에서 청마를 진정으로 사랑한 당사자는 자신이라는 징표를 남겨두기 위해서다. 청마가 운명하자마자 연서뭉치를 상품화하는 행위를 부도덕으로 밀어붙일 것이 염려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다. 운명한 지 불과 한달 사이다.

 

이영도는 이 때 평소 청마와 자기 사이의 다리를 묵묵히 놓아 주던 최계락의 얼굴이 떠올랐다. 최계락은 당시 국제신보의 문화부장이었다. 이영도가 최 부장을 은밀히 만나 의논한 끝에 청마의 연서를 최계락의 안목으로 가려 뽑는 조건으로 책으로 묶기로 했다.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란 표제가 붙여졌다. 청마 시의 한 구절에서 따 왔다. 연서집은 25000부가량 팔려 나갔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다. 수익금은 뒷날 '현대시학사'에 넘겨져 정운 문학상의 기금으로 적립되었다.

 

청마가 이영도에게 보낸 연서를 간추려 펴낸 연서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의 표지.

필자가 어느 날 이영도와 함께 최계락 편저자로 돼있는 책을 보고 "최 형이 하필 이 책을 만드는 악역을 맡았소" 했더니 최계락이 웃으면서 "누가 하고 싶어 했나. 그냥 두면 막무가내로 연서가 공개될텐데 청마의 체면이 어떻게 되겠나?" 그제서야 최 형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뿐만 아니다. 당시 청마의 여인관계를 일종의 스캔들로 다루고자 취재를 완료한 주간지의 기자를 만나 만류하는 일에 골몰하고 있었다. 최계락은 그 기자를 만나 특유의 친화력과 설득으로 무마시켰던 일이 연상되었다. 청마를 좋아했던 후배의 예로서 청마 사후의 궂은 뒷치다꺼리를 더러는 오해를 받아가면서 혼자서 감당했다. 시와 인간, 두 가지 면에서 널리 존경을 받던 청마의 이미지가 자칫 손상당할 뻔했던 사건이었다.

 

이런 속사정을 잘 모르고 있던 문단 후배들이 연서를 상품화한 이영도를 몹시 매도하여 부산 신문들이 담합을 해서라도 집필 활동을 거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 때 그런 결의까지 한 것으로 기억된다. 이 무렵 필자를 만난 이영도는 "김규태씨, 나를 앞으로 글을 못쓰게 한다면서요?" 목소리가 매우 격앙되어 있었다. 사실 어디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필자는 아무 대꾸를 할 수 없었다. 당시 장전동에 살고 있던 이른바 자택의 당호인 애일당 주변의 아주머니들이 은근히 존경했던 이영도에 대한 배신감에 젖었다는 후문이 날아들었다. 여생을 부산에서 살고자 했던 이영도가 청마의 묘소가 있는 부산을 떠나야만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두 사람의 20년에 걸친 열애 실상을 누가 소상히 알겠는가. 다만 청마가 작고한 한달쯤 뒤에 대구의 이윤수 시인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영도는 "20년의 열애를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그 열애를 행위하지 못하고 오직

희구로써 목마른 세월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애정을 신앙에까지 승화시켜 보지 못한 사람은, 지금의 저의 심경을 어찌 알아주겠습니까?"라고 읍소에 가까운 고백을 했다. 그는 필자에게 "그 날 차라리 전화대로 하였던들 그 때 운명하지는 않았을 것을"이라고 후회하고 있었다. 이영도는 청마가 운명한 그날, 청마가 꼭 상의할 일이 있어 자기 집 방문을 청했는데 거절했다고 했다. '그렇게만 하지 않았던들' 하고 사는 동안 회한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술이 만취하여 건 전화였다니 청마가 숨을 거둔 그날 필시 필자의 일행과 함께 마신 술이었기에 안타까움은 더했다. 정운 이영도는 청마 사후 9년 만인 1976년 뇌일혈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