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명 | 삼천리 제5권 제9호 | |||
호수 | 제5권 제9호 | |||
발행년월일 | 1933-09-01 | |||
기사제목 | 朴英熙論, 푸로레타리아 文人論 | |||
필자 | 閔丙徽 | |||
기사형태 | 문예평론 | |||
前言 懷月 朴英熙 氏는 나의 존경하는 동지의 한 사람이다. 일즉히 XX적인 X爭으로 인하야 氏에 대한 「데마고끼」도 날니엿스며 攻駁도 한 일이 잇섯스나 그러나 氏에 대한 인간적으로의 우정은 아즉도 살어지지 안코 갓금 나로 하여금 氏를 생각케 한다. 그러든 참에 巴人 兄의 朴英熙 氏를 論하여 보라는 명을 밧게 되여 나는 괴로운 줄을 아지 못하고 집필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朴氏의 명예에 때나 무치지 안을가? 하는 두려움이 업지 안타. 엇제ㅅ든 명령을 바든바니 문책을 謝하기 위하야 존경하는 마음으로 氏에 대한 나의 감상만을 거짓 업시 자백하는데서 본론의 목적을 다하기로 하자! 朴英熙 氏의 社會的 地位 「愛의 晩歌」(소설) 「결혼 前日」(소설) 「貞順이의 설음」(소설)을 쓰든 당시(1920년으로부터 24년까지)의 朴氏는 다른 작가와 맛찬가지로 한 사람의 象牙塔 文士로 일반은 인정하여 왓섯고 나 역시 그럿케 알어 왓섯다. 갓금 문단소식에서 그 일홈을 차저 보앗슬 때에 한 사람의 문학청년으로서 氏의 面影을 머리ㅅ속으로 그리여 보앗슬 뿐이요 나는 氏에 대한 엇더한 존경―(물론 小헤로 잇씀에서 존경은 하엿지만-)을 크게 가젓다거나 기대를 가지고 왓든 것은 아니다. 다만 평범하게 나의 선배라는 늣김으로의 작품을 대하엿슬 뿐이엿다. 이때의 氏의 작품에서는 아모러한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하엿든 것이엿스며 氏도 다른 작가와 다름 업는 센틔멘탈이스트이엿든 까닭이엿다. 그러나 氏가 開闢紙上에 「詩의 문학적 가치」(논문)을 쓰고 「火?속에 들어가는 ?簡綴」(수필)을 쓰며 「二重病者」(소설)와 「전투」(소설)를 〈111〉 쓰고 「채페크」의 「인조인간」(희곡) 「루나챨스키」의 「실제미학의 기초」(논문)을 번역하면서 氏의 태도는 돌변하엿스며 일반의 주목을 갓게 하고 나에게 氏에 대한 새로운 기대를 갓게 하엿다. 「봄이 왓다. 새가 운다. 이런 것을 써 노코 시라고 할 수 잇스랴? 새처럼 울고 바람처럼 부는 것이 시인의 노래는 아니다. 시인은 만인의 胸中에 잇는 「心願의 曲」(A Melody of Heart's Desire)을 울닐 만한 광대한 진리의 先覺者라야만 할 것이다.(中略 筆者-) 시는 시인의 주관적 전용물은 아니다. 또한 시는 山上에서 酒興에 겨워 부르는 독점적 노래도 아니다.」 「그러나 現今 朝鮮의 시라는 것을 살피여 보건대 대다수의 시는 그 시의 문학적 가치를 상실하고 잇는 것이다. 아즉도 자기 도취의 시, 자기 유희의 시 뿐이 매일 잡지 신문지상에 滿載되여 바린다. 「적어도 그 시가 활자로 재현되여서 만인의 눈 압헤 낫타날 때에는 만인의 마음 속에 잇는 心願의 曲이 울닐 만한 무슨 광대한 진리가 잇서야 할 것이다.」 「封建時代의 제왕이 아닌 이상 자기의 생활과 자기의 고독한 감정이 무엇이 그다지 귀중해서 紙上에다 함부로 발표할 것이랴?」 「朝鮮의 시인은 속세를 떠나려는 시인이 만흔 모양이다. 길바닥에 굴머죽은 죽엄을 보면서도 山上의 구름을 찬미하며 유권자에게 학대를 밧는 사람이 몸에 피를 흘니고 떨 때에 그들의 마음에는 의연히 한적한 것이라고 한다.」 (―1925년 3월호 開闢紙 「詩의 문학적 가치」―) 우리는 여긔서 朴氏의 새로히 心向하는 곳을 발견해ㅅ다. 그리하야 象牙塔의 동굴에서 애닯흔 노래를 읇조리든 藝術至上主義派의 문인들에게 새로운 활ㅅ살을 더진 이 젊은 용사에게 커다란 기대를 가저왓스며 氏의 작품과 논문 속에서 만흔 교훈과 진리를 차젓다. 당시 氏는 「산양개」(소설)를 발표하엿쓸 때 예술지상주의자의 「그릅」이엿든 「朝鮮文壇」(잡지)合評會에서는 氏에 대한 공연한 증오로서 그를 악평하게 되엿스며 그 작품은 소설이 아니라는 참혹한 「데마꼬기」까지 날니엿다. 그러나 氏는 그들에게 대하야 용맹하게도 宣戰을 布告햇다! 뒤따라 李光洙 氏의 「文藝銷談」을 읽고란 李光洙 氏의 無節調한 예술지상주의를 예찬한 논문을 냉정히 해부비판하면서 푸로 문예운동의 선구로서 氏의 지위는 완전히 토대를 닥게 된 것이다. 이럿케 되여 在來文藝家들의게 증오감을 갓게 하엿스며 만흔 「데마꼬기」를 듯게 되엿다. 그러나 氏는 그들을 一笑하면서 그들과 게을음 업는 抗爭을 하여왓다. 당시의 朴英熙 氏의 존재는 푸로레타리아 運動線에 잇서 업지 못할 존재엿든 것이며 청년 독자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어온 것이다. 이럿케 되면서 氏는 氏의 論調에 共鳴하는 동지들을 〈112〉 차저 陣營을 굿게 만들려 노력하게 되엿스니 「文藝運動」이란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가진 機關紙를 발행하엿스며 완전한 조직적인 행동을 하기 위하야 「朝鮮푸로레타리아예술동맹」을 창립하면서 新傾向派文藝에서 맑쓰主義文學으로 진출하엿다. 당시의 朴氏는 「朝鮮푸로레타리아예술동맹」의 중요한 지도자에 한 사람이엿스며 朝鮮푸로레타리아 예술 운동의 陣營에 잇서서 가장 맹렬한 論客이엇든 것이다. 그리하야 「朝鮮푸로 문예운동의 선구자」란 말까지 듯게 된 것이다. 이러한 지위에 선 氏는 朝鮮푸로레타리아예술동맹의 모-든 「코-쓰」를 작성하기도 하엿고 동지들의 糾合에 전력을 다하여 왓다. 엇젯든 氏는 朝鮮푸로 문예운동의 선구자요 功果를 만히 남긴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의 朴氏는 그때의 날카롭든 이론도 X爭도 모-다 회피하여 바리고 서재에 뭇치여 연구에만 골몰하고 잇다니 사회는 그를 바리는 것이냐 그는 사회를 바리는 것이냐? 흥미잇는 한 개의 사건이 아닐 수 업다. 인테리의 沒落과 朴英熙 氏 이럿케 되여 생활이 안정되여 잇는 書齋派 인테리들은 감개무량하게 과거를 회고하면서 책장을 넘기며 기-다란 탄식을 토하는 것이다. 이럿케 되여 제3線에서 문필로서 활동하든 인테리들은 진보된 신인 인테리들에게 자리를 빼앗기엿스며 몰락의 길에서 자신을 감추고 말엇다. 이럿케 되여 朴英熙 氏도 자신의 인테리적인 행동을 지적밧고 자신의 自弱을 한탄하면서 「차라리 나의 연구로- 하고서 소래 업시 文化運動線에서 자신을 감추고 鬪士로서의 행동보다 학자로서히 연구를 쌋코 잇는 것이다. 그러나 朴英熙 氏는 동지들에게 원망도 갓지 안커니와 타락에서 반동으로 흐르지 안코 침묵속에서 연구에 전력하고 잇는데 그의 학자적 「타입」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며 나에게 존경을 갓게 하는 것이다. 朴英熙 氏! 이는 나의 존경하는 동무의 한 사람이다. 인간적으로 본 朴英熙 氏 인간적으로 본 朴英熙 氏는 文筆行動에서 보는 氏와 아조 판리하게 다르다. 학자적인 연구와 과학자적인 氏의 문필행동은 어듸까지 냉정하엿스나 (1930년까지) 그러나 인간적으로 그는 多情多恨한 사람이요 사교에 영리한 사람이다. 자기와 감정에 틀닌 사람을 맛나도 표정도 변치 안코 눈에 우숨을 흘니면서 악수를 하는 동무다. 이것이 氏의 사교적인 수단인지는 모르나 氏의 假짓 업는 一動一靜은 그럿치도 안타는 것을 넉넉히 증명할 수 잇는 것이다. 그럿타고 氏가 無骨漢이라고 오해하여서는 아니된다. 그의 행동은 큰 일을 위하야서는 「맵고 끈는」듯한 것이니 개인적인 일시적〈113〉 감정으로서의 두텁든 우정을 끈어 바린다거나 공연한데- 말을 날니는 경박한 젊은이가 아니란 말이다.」 내가 氏를 사귀여 지낸지 벌서 6, 7년의 세월이 흘러갓스나 氏와 얼골을 붉히여 본 일이 업섯스며 氏에게 대한 불쾌를 感한 때와 氏에 대한 증오를 가저 본 일은 한번도 업섯다. 그것은 氏의 행동이 너무나 다정하고 조리 잇스며 이론적이요 정직한 까닭이다. 책임감이 두텁고 동지의 사정에 이해가 깁흐며 시간관념이 만흐니 氏에게 불쾌와 증오의 念을 엇지 해 가질번이나 한 노릇이랴? 그러나 나는 1931년 이후 氏와의 교제를 끈어왓다. 그것은 XX적 X爭으로 인한 공연한 氏에 대한 공박과 「데마꼬기」를 날니엿든 뒤루부터이엿다. 일즉이 여비를 쓰교 서로 왕래하며 交遊하든 조직적이요 이론적이면서 다정다감한 朴英熙氏를 찻지 안케 된 XX적인 X쟁의 죄악을 저지른 과거의 흘러바린 시간이 원망스럽기도 하다. 以後의 朴英熙는? 그러면 이후로 朴英熙 氏는 天然洞 書齋에 뭇치여 哲學說을 보며 사색과 연구로서 흐르는 날을 보내고 잇스려는 것일가? (此項完)―忘言多謝― 1933, 7, 9, 於松都郊外 付言 작가로서의 氏를 논한 것이 아니라 氏의 인물에 대한 소감을 이약이 하엿슬 뿐이다. ―필자― 〈114〉 〈111-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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