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와 문학 산업
- 유
승<전북대>
지금은 출구를 알 수 없는 전략적 변곡점에 놓여 있다.
디지털 시대에는 과거와는 다른 경영 전략이 필요하다. - 앤드루 그로브
Ⅰ
문화예술은 산업의 발달과 대중의 욕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런 현상은
문학의 발달과정을 살펴보더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구술이 중요한 전달 수단이었고 귀족이 중요한 독자층이었던 중세 이전에는 시가 문학의 주요
장르였다. 시는 비교적 길이가 짧아서 구술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시어도 귀족의 취향에 맞춰 기교적이고 공들인 것들이 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인쇄산업이 발달하고 일반대중이 주요 독자층으로 등장하면서 근대 이후에는 소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언어 자체도 귀족 취향에서 평민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교체되었고, 인물도 영웅호걸 일변도에서 평민 혹은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확대되었다. 서적출판이 중요한 산업 가운데 하나로
자리하면서 작가나 출판업자는 사업적인 면에서 더 많은 이익을 안겨주는 소설, 특히 장편소설 또는 대하소설에 대해 강한 유혹을 느끼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 출판산업이 황금기를 누렸던 1970년대 말과 80년대에 소설 출판이 주류를 이루고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아리랑』, 황석영의
『장길산』을 필두로 많은 아류 대하소설들이 출판되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금처럼 출판업체의 부도가 연이어지는 상황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물론 문학이라는 말과 산업이라는 말이 결합되는 것에 거부감을 보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문화산업이
21세기의 주도산업이라는 견해를 부정할 수 없다. 어쩌면 문화의 한 영역인 문학이 산업적인 측면에서 검토되는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 된
것이다. 따라서 문화산업이 그렇듯 문학산업이라는 용어에 친숙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그리고 여기서 문학산업은 단순히 출판산업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넓은 의미에서 문학전반에 걸친 인적, 물적 분야를 총망라하는 것이다.
예술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문학을 이처럼 산업화, 대중화의 의미와 연결시키는 일에 거부 반응을 보여왔다. 소위 예술지상주의자들은 예술이 독자적인 입장을 갖고 홀로 서도록
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다. 상업성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예술을 위한 예술(art for art's sake)을 추구한 이들의 노력은 현실성을
상실한 나르시시즘으로 평가절하 되기도 했지만 예술의 산업화에 염증을 내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청량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일부 예외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예술은 시대의 변화를 날카롭게 파악해내고 미리 적응방법을 찾아간다. 그리고 만약 이런 변화의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위치를 찾지
못한다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문학의 존재는 다른 사회적 현실과 얽혀 있으며 문학의 운명 또한 그것에 달려 있다. 사회적 현실이
뒤바뀔 때 문학도 움직이며, 그것이 문학의 존재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다면 존재론적인 파국을 초래할 것이다. (Kernan
194)
서구에서 19세기 중엽부터 호황을 누리기 시작한 출판산업은 20세기에도 발전을 거듭하였다. 거대한 자본력을 지닌
출판업자들이 등장하고 권위와 정통성을 내세우는 방대한 백과사전의 출판은 그들의 상징적인 업적이었다. 하지만 20세기 후기에 접어들면서 문학산업은
커다란 변화를 예고하였다. 컴퓨터(computer)가 단순한 계산기의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서 출판산업은 위기의식을 감지하게 되었다. 호화로운
장정과 비싼 가격, 그리고 서재의 일정한 공간을 요구했던 백과사전은 훨씬 싼 가격에 보통의 책 한 권의 자리도 요구하지 않는 CD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출판산업의 문제는 곧 그것과 더불어 호황을 누려왔던 문학자체 또는 작가 자신들의 위기의식으로 나타났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소위
‘문학의 죽음’ 또는 ‘작가의 죽음’에 대한 논쟁이었다. 특히 다른 장르에 비해 문학산업의 꽃이라 불리었던 소설은 그 위기 의식의 중심에
있었다. 레빈(Paul Levine)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그 신빙성을 잃었으며,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하는, 우리가 이른바 진실이라고 느끼는 것을 더 이상 이야기하지 못한다. 소설로 밀어붙일 것은 아무 것도
없다. (11)
물론 여기서 말하는 소설의 위기는 서구 소설의 한계, 즉 리얼리즘을 기반으로 한 소설의 한계와 연결된다. 이미
다양한 영상매체의 발달로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소설의 호소력은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문학의 위기는 컴퓨터와
영상산업 등 관련산업의 발전과 거기에 따른 대중의 관심전이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문학의 위기를
심각하게 논의하던 시기가 지나갔지만 그것은우려했던 것만큼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결국 이들이 이야기한 죽음은 전통적인 문학이나 작가의 죽음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이제 우리는 문학은 당연히 책의 형태로 출판된다거나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독자는 그것을 읽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고전 혹은 정전이라 불리던 작품이나 작가의 위치도 흔들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산업의
패러다임의 변화, 혹은 전세계에 걸친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패러다임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패러다임이란 특정한 지역 혹은 일정한 시대에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지배적인 경향을 말한다. 19세기 후반에 기차나 자동차가 마차를 대신하여 교통수단으로 도입되었을 때나 20세기 초에 전기가
증기를 대신해서 산업의 동력으로 도입되었을 때, 산업계에서는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기차, 자동차 혹은 전기를 남보다 먼저 받아들인
사업가가 새로운 선도 기업인으로 자리해 갔다. 오늘날은 컴퓨터가 생활의 중요 수단이 되면서 이제 모든 산업이나 사회는 컴퓨터를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인터넷(internet)의 등장은 정보교류와 생활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디지털(digital) 기술은 이런
변화를 뒷받침하는 주도 산업이다. 디지털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러한 산업기술상의 변화가 문학산업에도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필연적이다.
Ⅱ
디지털 시대의 도래는 문학산업, 즉 출판산업 자체의 변화뿐만 아니라 문학의 내용, 심지어는
문학연구의 접근방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먼저 출판산업의 변화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종이와 활자 중심에서
전자서적(e-book)으로의 전환이고, 다른 하나는 작가와 출판사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의 출판 문화로의 전환이다.
인류는 구술의
시대를 거쳐 이집트(Egypt)의 파피루스(papyrus) 혹은 중국 후한의 화제시대(88-105)에 종이의 발명으로 필경의 시대를 맞았다.
그후 아라비아(Arabia)를 거쳐 유럽에 전달된 제지술은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7-1468)의 활판 인쇄술의
개발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서적문화를 주도해 왔다. 그러나 인터넷이 중요 수단으로 등장하면서 기존의 서적 문화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우선
전자서적은 종이서적보다 출판비용이 저렴하다. 최소 3백만 원에서 2천만 원의 비용과 한두 달의 제작기간이 필요했던 종이서적과는 달리 30만원
정도의 비용과 하루 정도의 기간이면 누구나 온라인 출판사를 통해 책을 출판할 수 있다. 물론 재고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소비자가 구입하는
가격도 종이 서적에 비해 절반이하 정도이다. 그리고 서적 구입도 불과 몇 분 안에 가능하다. 작가가 받는 인세도 기존의 5-15%와는 달리
30-40%에 이를 전망이다. 한마디로 전자서적의 출판은 독자와 작가, 출판사 모두에게 이익을 준다.
지난 2000년 3월 14일,
스티븐 킹(Stephen King)이 『총알을 타고』(Riding the Bullet)라는 소설을 전자책으로 발간하자 하루만에 40만
카피(가격: 2.50$)를 기록하면서 전자출판은 전세계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단시간 내에 폭발적인 수요를 일으키는
블록버스터(blockbuster) 마케팅 전략의 성공인 셈이다. 그의 성공은 종이서적을 완전히 배제한 채 전자서적의 형태로만 이루어진 최초의
작업이었고, 따라서 전자서적은 문학산업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힘입어 아마존(amazon.com)이나 마이크로
소프트(Microsoft)등 대형업체들이 규모와 첨단기술을 무기로 전자서적 출판에 열을 올리고 있다. 국내에서도 문학과 지성사와 창작과 비평,
문학동네 등 30여개 출판사들이 참여하는 와이즈북닷컴(wisebook.com)이나 바로북닷컴(barobook.com),
에버북닷컴(everbook.com), 골드북닷컴(goldbook.com) 등이 전자출판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뿐만 아니라 4백 페이지 분량의 책을 50권 저장할 수 있는 로켓e북(가격: 199$)이라는 전자책 단말기가 시판됨으로써
기존의 서점이나 장서중심의 도서관 문화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현재 PC나 노트북으로 내려받아야 하는 전자서적을 휴대용 단말기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사용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특히 싱가포르가 교과서 전체를 단말기 하나에 담아 종이없는 학교 교육을 시도하면서 서적 단말기는 기존의
서적문화를 대체할 강력한 도구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문제는 가벼우면서도 값이 저렴한 단말기 개발에 있다. 국내의 벤처기업 이키온(Ikion)은
A4용지 절반보다 조금 작고 두께는 3cm 정도이며 가격은 20만원 정도의 단말기를 곧 선보일 예정이다. 호주머니 속의 작은 도서관을 실현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는 음악산업에서 MP3가 시공을 뛰어넘어 선율의 공유를 가능하게 한 것과 마찬가지
현상이다.
작가의 등장이나 출판도 자유롭다. 과거에는 복잡한 심사과정을 거쳐 출판을 결정하고 그 책이 시장성이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러나 초기 투자 자본이 줄어들게 됨으로써 부담이 크게 줄었다. 신인 작가는 추천이나 현상모집 당선에 의한 전통적인 문단 데뷔 방식을
무시하고 누구라도 글을 띄워 독자들의 반응이 좋으면 작가로 등단할 수 있다. 따라서 작가네트(www.zaca.net)처럼 적극적으로 작가를
발굴하는 인터넷 공간(site)이 생겨났다. 누구나 회원가입 절차를 통해 ID를 부여받고 자신의 글을 올릴 수 있다. 글을 올린 회원은 자신의
글에 대한 누적 조회 수에 10을 곱한 금액을 지급받는다. 그리고 월 평균 2천 회 이상의 조회 수를 기록한 작가의 원고는 작가의 부담없이
출판해 준다. 누구나 작가의 대열에 동참할 수 있고, 출판사는 일정 수준 이상의 상업성이 보장된 작품을 출판함으로써 손실을 줄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독자의 반응이 강조됨으로써 문학의 대중화 혹은 민주화 현상이 강조될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의 수준이나 인기에 초점을 맞추는
작품이 주류를 형성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대중이 주도하는 문화, 소비자가 중심이 되는 문화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 또한
명심해야 한다.
이런 식의 작가의 등장은 1999년에 조PD가 자신이 작곡한 8곡을 음반 제작사나 방송국의 도움없이 MP3 파일로
만들어 직접 컴퓨터 통신에 올려 인기 가수가 된 과정과 매우 흡사하다. MP3로 상징되는 문화현상을 문학산업에 적용시켜 보면 과거의 작가,
출판사, 그리고 독자 사이의 위상변화를 실감하게 한다. 영국에서 소설이 처음 등장했을 때, 저작권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출판업자들은 작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기들의 입맛에 맞게 소설을 각색하여 출판하였다. 『록사나』(Roxana)가 여러 가지 결말을 가진 판본을 갖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작가의 이름은 빠진 채 “표지에는 그 책을 파는 판매업자와 화자(narrator)의 지어낸 이름만 쓰여져 있었다. 그것은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었다(Mullan x).” 그 후 출판산업이 하나의 중심산업으로 자리하면서 점차 작가의 권리는 강화되었다. 특히 유명 작가는 시장의
규모와는 관계없이 직접 인세를 결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독자가 직접 선호도를 결정하고 작가의 명성이나 인세를 결정하는 시대가 올 것임을
우리는 감지해야 한다.
문학선집의 출판도 변화를 맞게 될 예정이다. 문학선집은 저작권에 관한 문제만 해결된다면 사업상의 손익면에서
출판사나 작가에게 결코 손해될 것이 없었다. 그래서 출판사들은 수상집이든 주제별이든 각종 이유로 문학선집의 출판에 신경을 써 왔다. 그리고 그
내용물은 출판관계자 혹은 일부 전문 문학가들이 주도하여 선택하였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런 선집도 소비자의 선택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블록버스터
비디오사와 IBM이 수천 개의 음악과 그림 중에서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것만을 골라 자신의 CD를 짧은 시간 안에 디자인할 수 있는 기계를
상용화한 것처럼 문학 소비자도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만을 선택해서 작품집을 꾸미는 시대가 곧 도래할 것이다. 그것도 종이라는 평면적 단계를
넘어서서 다양한 동영상 화면을 통해 입체성을 강조함으로써 독자의 강한 호기심을 끌어낼 것이다. 미리 고객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프로슈머(Pro-sumer, Producer+Consumer)의 개념이 출판산업에 도입된 것이다.
문학의 내용도 변화를 겪게
된다. 디지털 시대의 특징을 함축하는 단어인 쌍방향성과 다양성은 이를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한다. 아날로그(analogue)와 디지털
시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전자가 일방향성이라면 후자는 인터액티브(interactive), 즉 쌍방향성이다. 창작자와 소비자의 구분이 모호하게
된다. 이를 좀 더 쉽게 문학 산업의 경우에 적용해 보면 이전에는 작가와 출판사가 독자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책을 출판하였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독자의 견해가 출판 과정에서부터 크게 작용할 것이다. 독자들의 선호에 따라 출판이 결정되고 심지어 독자의 의견을 받아들여 작품의 내용이 변하는
경우도 있다.
내용이나 주제 면에서도 좀 더 가벼운 것들이 전자서적 시대의 주류를 이룬다. 컴퓨터를 통한 독서는 서면을 통한
독서보다는 사고의 여유로움을 주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전자서적이 주로 추리소설이나 탐정소설로 이루어지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리고 20세기 말에 지극히 사적이고 가벼운 소재를 다룬 서적들이 화제작이나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향을 보였던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공동창작이나, 소비자가 작품의 내용을 결정하고 작가는 그 소재를 중심으로 소비자가 원하는 작품을 쓰는 일도 시간의 문제일 뿐 머지않아 실현될
예정이다. 문학의 소재를 찾기 위한 작가의 고민이 줄어드는 셈이다. 반면에 독자의 요구를 즉시 해결해 줄 수 있는 작가의 ‘순간적으로 넘쳐
흐르는’ 역량이 중요한 문제가 될 뿐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의 차이점은 순서에서도 나타난다. 아날로그 시대에는 종이 텍스트가
중요한 매체였다. 텍스트는 작가가 의도한 순서대로 쓰여지고, 독자의 독서도 그 순서를 넘지 못한다. 순서대로 읽기를 거부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건너뛰는 일이다. 그러나 하이퍼(hyper) 텍스트나 동영상 화면은 다양한 방향의 순서를 독자의 성향에 따라 정할 수 있게 한다.
여기에 멀티미디어가 개입되면 작가는 현재의 영화나 방송드라마 작가의 기능과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된다.
영화산업은 이미 이런
시스템을 개발하였다. 타임워너(Time-Warner)사가 등장인물과 사건을 원하는 방향으로 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개발한 것이다. ‘이 남자가
그 기차를 탈까’라는 대목에서 관객은 ‘예’ 혹은 ‘아니오’를 선택함으로써 작품의 내용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신이 선택한 사람으로 바꾸는 일도 가능해 진다. 요즘 사회문제로 대두한 인기 여자배우를 포르노 사진과 합성하는
일도 실은 이런 변화를 미리 반영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과거의 독자를 계도하는 교사나 계몽자의 위치에서 독자와 수평적인 위치에 자리하게
된다.
물론 이런 작가의 위상 변화에 거부감을 느끼는 작가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전반적인 사회의 흐름은 ‘지도
다시 그리기(re-mapping)’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각각 독립적인 위치를 지녀온 예술의 각 분야끼리, 또는 예술과 과학기술
상호간의 경계 해체와 재구성은 이제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대학에서 관련 학문 사이의 협동강의가 개설되고, 문학과 첨단기술의 만남으로
멀티미디어가 매체의 역할을 수행해 나감에 따라 문학 혹은 작가는 독립된 개별체의 위치에서 일부분의 기능을 수행하는 역할자로 자리잡아 갈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작가들이 여기에 발맞추는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다. 한국소설가협회가 3천여 편의 작품을 데이터베이스에 담아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뮤지컬 등 문화 산업의 콘텐츠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작가의 상상력과 실제 문화산업의 만남은 소재 빈곤에 시달려온 관련산업을 활성화
시켜 경쟁력을 높이는데 일조할 것이 분명하다. 너무도 당연하게 기존의 작가의 위상은 변화를 겪게 될 것 같다.
디지털 시대는
전문성과 함께 다양성을 특징으로 한다. 인터넷은 민족과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소비자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월드 와이드
웹(WWW), 지구촌(global village), 그리고 세계무역기구(WTO) 등은 디지털 시대의 성격을 대변해 주고 있다. 문학산업도
소재에서 뿐만 아니라 전개 방식에 있어서도 이런 산업의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 들였다. 20세기 후반에 논의의 중심에 선 정치적
공정성(Political Correctness), 신역사주의, 탈식민주의, 페미니즘 등은 그 동안 문학 논의의 중심에서 밀려났던 제3세계
문학이나 고급문학에 대비되는 대중문학, 여성문학을 중심부로 끌어 들였다. 이는 서구의 백인 남성을 위주로 한 좁은
콘탠츠(contents)만으로는 디지털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감을 반영한 것이다. 이제는 주변부와 중심부의 분리가 모호해지고
대중(Mass)과 문화(Culture)가 하나 되는 대중문화(Mass Culture) 시대가 열리게 된다.
특히 탈식민주의는 소수의
백인 문학가들이 선정한 고전 혹은 정전 중심의 문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네이폴(V. S. Naipaul), 루시디(Salman
Rushdie), 응구기(Ngugi wa Thiong'o), 소잉카(Wale Soyinka), 아체베(Chinua Achebe) 등 다양한
유색인 작가들이 세계문학의 중심에서 논의되고 있다. 이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관련서적들의 판매량도 급증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고심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이들의 활동이 서구의 자본이나 기관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으며 주언어도 영어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아체베가 오늘날
세계적인 작가로서 명성을 떨치게 된 것도 하이네만(Heinemann) 출판사의 경영 전략에 힘입은 바 크다. 그리고 아체베에게는 항상 “영어로
글을 쓴 최초의 위대한 아프리카 작가”(Petersen 149)라는 호칭이 붙어 다닌다. 대단한 찬사처럼 여겨지는 이런 호칭의 이면에는 서구
자본의 숨겨진 의도가 깔려 있다. 자본가들은 항상 그들의 자본을 재생산해 내는 일에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막스(Karl Marx)와
엥겔스(F. Engles)의 선언문은 이런 문제의 핵심을 지적하고 있다.
. . . 부르주아 계층은 언제나 생산의 도구를 혁명화하지
않고서는, 생산 관계 및 그것과 더불어 사회의 모든 관계를 언제나 혁명화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생산의 끊임없는 혁명화, 모든 사회
관계에 대한 방해받지 않는 교란, 영원한 불확실성과 격분 등은 그 이전의 모든 시대와 부르주아 시대를 구분한다. 고정된 모든 것, 쉽게 동결된
관계는 오래된 일련의 편견과 더불어 휩쓸려 사라져 버린다. 견고한 모든 것은 대기 속에 녹아 버리고, 신성한 모든 것은 저속한 것이 되며,
인간은 마침내 제 정신을 가지고 자신의 진정한 인생의 조건 및 자기 동료와의 관계에 직면하도록 강요받는다. (10)
사실
탈식민주의 문학이 주도 문학으로 등장한 지금도 출판산업은 역시 서구의 거대 자본이 쥐고 있다. 몇몇 작가들이 관심의 조명을 받고 막대한 판매량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그 이익은 대부분 서구의 자본으로 넘어간다. 아프리카의 어떤 출판사도, 그리고 그 출판사로 인해 어떤 아프리카 사회도 자본의
해택을 받은 일은 없다. 여전히 그들은 가난한 소비자로 남아 있다. 이처럼 자본의 힘은 냉혹한 것이다. 그들은 정전 논쟁을 일으켜 피부색을 떠나
서구화되어 있던 우리의 의식을 흔들어 놓고 지금은 그들의 생산물들을 읽도록 강요하고 있다.
하이네만 출판사가 아체베, 소잉카,
응구기 등의 작품을 중심으로 영어로 펴낸 아프리카 문학 시리즈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사실 이들의 성공은 다양성을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시대를 예감한 서구자본가들의 후원에 의해 가능했다. 서구의 자본과 기관은 이런 흐름을 먼저 파악하여 효율적인 투자를 통해 이익을 창출해내고
있다. 여기에다 그들은 회교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던 루시디 등의 예를 들면서 문학에 대한 모든 논의가 가능한 곳은 서구뿐이라는
오만함까지 내보이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허만(E. S. Herman)과 맥체스니(R. W. McChesney)가 『글로벌
미디어와 자본주의』(Global Media and Capitalism)라는 저서에서 글로벌 미디어가 지닌 긍정적인 효과에 대해 열거한 사항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글로벌 미디어가 첫째, 자기만족적이고 진부하며 수행능력이 매우 떨어지는 국가 통제 방송시스템들로 하여금 서비스를
확대, 심화시키도록 활력을 불어넣은 점, 둘째, 상업적 지배력을 가진 중심부의 발달한 대중문화가 지구 먼 구석까지 빠른 속도로 확산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셋째, 개인주의와 권위에 대한 회의주의, 여성 및 소수집단의 권리와 같은 서구의 기본 가치들이 국경을 넘어 어느 정도 소통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 등을 긍정적인 효과로 들고 있다(29-30).
하지만 우리는 이들이 생각하는 글로벌 미디어가 문화적
제국주의와 연결된 것임을 발견할 수 있다. ‘발달한’ 서구문화와 타자의 열등성은 당연시되고 한발 더 나아가서 지배력을 가진 문화의 전파, 또는
상대적으로 우월한 서구적 가치의 전달이라는 제국주의 시대의 이데올로기가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세계화라는 미명이 지닌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요구된다. 비록 그들이 서비스의 확대와 개선, 중심부와 주변부의 원활한 소통, 개인과 소수집단의 가치 존중을
내세우지만 그 과정이 이전처럼 자기 중심적 선택이라는 편리한 도구를 통해 이루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고급 문학을 선정하면서
내세웠던 선별의 틀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예술과 문학을 분별력 있게 감상하는 일은 극소수가 담당”(Leavis 3)해 왔고 그 극소수의
권위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무장되었다. 윌리암스(Raymond Williams)는 그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전통에 대한
대부분의 해석이 근본적으로 선별적이라는 사실은 즉각적으로 밝혀 질 수 있다. 한 특정한 문화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의 모든 가능한 영역들로부터
어떠어떠한 의미와 가치는 선별되어 강조되며, 또 어떤 다른 의미와 가치는 무시되거나 배제된다. 그러나 하나의 특정한 헤게모니의 테두리 안에서,
그리고 그 결정적 과정들 가운데 하나로서, 이러한 선별 작용은 전통 내지 유일한 의미 깊은 과거라는 이름으로 제시되고 또 성공적으로 그렇게
인정되어 넘어간다. 하여튼 전통에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점은, 그것이 이런 의미에서 당대의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조직의 한 측면으로서 특정 계급의
지배에 봉사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과거에 관한 한 가지 해석으로서, 그 의도는 과거를 현재와 연결시킴으로써 현재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제공하는 것은 어떤 의미의 연속성에 지나지 않는다. (115-16)
물론 지금은 기존의 문학적 전통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들이
제기되어 있는 상태이지만 또 다른 전통의 추구는 중심부에 위치하고자 하는 세력에 의해 시도될 것이다. 따라서 그 선택 과정의 공정성을 담보해내지
못한다면 세계화 시대의 문화 역시 소수문화를 ‘신기한 생활 엿보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소수문화의 정체성 확립이, 그리고
그것의 등가적 가치성립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고 있다.
그래서 디지털 시대에는 세계화에 못지 않게 문화에 대한 주체적
수용과 확산이라는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된다. 핸리 루이스 게이츠 2세(Henry Louis Gates Jr.)가 주도하고 월레 소잉카, 벨
훅스(Bell Hooks), 윌리엄 윌슨(William Wilson) 등 다수의 흑인 지성인들이 만든
아프리카나닷컴(www.Africana.com)은 서구인들의 시각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진면목을 보여주려는 신선한 시도이다. 그들은 이 사이트를
통해 중세 유럽 문화의 구심점이 됐던 가톨릭에 비견될 세계 흑인 문화의 통합을 이루어내겠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여기에는 아프리카 오지의
방송들뿐만 아니라 미국내의 흑인방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채널이 참여하고 있다.
여기에서 생각해 볼 점은 글로벌 스탠다드(global
standard)라는 디지털 시대의 생존 원리이다. 국제 표준화는 다양성이 빠질 수 있는 혼란이나 유사성을 방지하고 기득권을 내세워 이익을
지켜나가는 핵심 전략이다. 선진국들이 서둘러서 글로벌 스탠다드를 정하려는 것은 자국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전략이다. 아무리 기술개발에 앞서더라도
표준화 작업에서 뒤지면 기득권을 상실하게 된다.
일본 기업들은 고선명(HD) TV를 80년대 후반 세계에서 가장 먼저 개발했다.
하지만 이 기술을 먼저 상용화한 곳은 미국 기업들이었다. 일본의 기술개발에 놀란 미국 기업들은 90년대 들어 자신들이 주도가 돼 HD TV의
세계 표준을 제정해버린 것이다. 당연히 일본 기업들은 후발 주자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기술 우위보다는 세계 표준의 장악 여부가 더욱 중요함을
일깨워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국경제신문 뉴 밀레니엄 기획취재팀 188)
문화 면에서도 세계의 다양한 풍물들을 상품화하려는
서구자본들의 투자가 확대되고 있다. 문학산업에서도 국경 없는 경쟁체제를 대세로 받아 들여야 한다. 문학창작은 이런 흐름에 동조하여 이제는 글쓰는
방식을 세계 표준화하고 내용에서도 독특한 자기 문화를 다루어서 다양성의 욕구를 충족 시켜야만 성공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독특한 문화, 즉
소재를 세계화시키지 않고서는 상업적인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 우리 문학이 세계화하는 데에는 우리 문화의 세계화가 함께 따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 칸 영화제 경쟁부분에 오른 것은 촬영기법의 향상과 전통의상이나 판소리 등의 독특한 문화가 어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시사회가 시작될 때, 제작진은 10여분의 기립박수를 받았고 주요장면에서 다섯 차례의 박수를 받았다. 그들은 시사회가 끝나고
나서도 10여분의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기자 회견장에 나온 외국기자는 별로 없었다. 『춘향뎐』이 몇 세기 이야기인지, 판소리가 뭔지, 의상은
어떻게 만드는지, 오작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관객이 다수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 영화는 서구 관객에게서 독특한 구경거리 이상의 평가를
기대하기 힘들다. 이 작품이 시상에서 제외되고 본선에 진출한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우리 문학의 세계화를
위해 제3세계 출생으로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오른 몇 사람들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기법적인 면에서 소잉카와
마르케스(Gabriel G. Marquez), 내용 면에서 아체베와 루시디의 작품은 각각 일정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작가인
소잉카의 소설 『해설자들』(The Interpreters)은 상업적인 면에서나 문학적 성취 면에서 호평받은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천박한 가치관이 지배하는 아프리카 사회에서 방향을 잃고 떠도는 지식인들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런 사회 고발적 소설을
쓰면서 소잉카는 리얼리즘보다는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율리시즈』(Ulysses)를 연상시키는 의식의 흐름과 유사한 기법을
사용했다. 그는 소설의 부분 부분을 파편화 시키고, 시간을 뒤섞고, 복잡한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독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기법은 아프리카 작가만이 다룰 수 있는 소재와 더불어 상승효과를 냈고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하게 되었다. 소잉카는 아프리카 작가만이 다룰 수 있는
소재를 국제화된 기법과 연결시켜낸 것이다.
반면에 마르케스(Gabriel G. Marquez)는 독특한 서사기법을 창안해 냈다.
물론 그 핵심은 마술적 리얼리즘(magic realism)이다. 사실상 서구의 소설은 리얼리즘과 함께 시작되었고 독자들이 리얼리즘에 식상함을
느끼면서 한계에 부딪쳤다. 마르케스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더욱더 선명하게 인간의 실존을 보여주는 마술적 리얼리즘을 통해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았고, 그 동안 소외되었던 중남미 문학을 세계 문학의 정수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소설의 죽음을 예고하던 일부 서구인들에게
소설의 회생가능성을 일깨우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하지만 소잉카나 마르케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자신들의 문화적 유산이나
삶의 방식들을 생동감 있게 전달하는 능력에 있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든 아니면 의식의 흐름의 수법이든 우리 문학의 세계화는 이처럼 우리의 문화와
정서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기법을 찾아내는 고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내용 면에서는 먼저 아체베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는 비록
영어로 글을 쓰지만 철저하게 그들만의 방식으로 글쓰기를 고집한 작가이다. 아프리카의 구어적 전통을 풍부하게 살리고 서구적 영어 표현보다는
아프리카인들이 실제로 소화하여 사용하는 영어를 중시하였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짧은 구어체 문장이 주로 사용되고 속담과 격언 등 아프리카의
구어적 특성이 깊이 스며 있다. 그의 문학적 경향은 아프리카 문화의 우수성과 훈훈한 인간미를 보여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나의 주제는] 아프리카 민족들이 문화라는 말을 유럽인들로부터 처음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 아프리카 사회가 . . . 깊고도 가치 있으며
아름다운 철학을 가졌던 사회라는 것, 그리고 그 사회가 시와 존엄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이 바로 이
존엄성이며, 그들이 이제 다시 회복해야 할 것도 바로 이 존엄성이다. 한 민족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이 바로 이러한 존엄성과 자긍심의
상실이다. 작가의 임무는 이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고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Achebe “The Role
of the Writer in a New Nation” 8)
아체베가 자기 사회의 문화적 유산을 강조하는 것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무시되거나 사악한 것으로 왜곡된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려는 노력이다. 서구인들에 의해 아프리카 민족에게 주어진 역사관은 “역사가
없는 민족”(Hegel 99)이었다. 따라서 아체베는 “만약 내 소설―특히 과거를 배경으로 한―이 나의 독자들에게 그들의 과거 역사―그 결점에도
불구하고―가 초기 유럽인들이 신을 대신하여 그들을 구원한 기나긴 야만의 하루 밤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우쳐 줄 수만 있다면 만족할 것”(Hopes
30)이라고 밝히고 그의 작품을 통해 아프리카 사회는 역사가 있고 사회적 합의구조를 갖춘 진보된 사회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자기 사회에
풍만한 문화적 유산과 현재의 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을 인간적인 견지에서 조명하여 다양성을 살려냄으로써 세계의 독자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
반면에 루시디는 그 나라 자체만으로도 다문화 사회인 인도 태생으로 제국주의에 의해 강요된 서구문화를 자신의 작품에서 효과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는 첫 소설인 『그리머스』(Grimus)에서부터 동양과 서양문화의 상호 영향 관게에 의해 형성된 혼성성을 다루었고 1995년에
발표한 『무어의 마지막 한숨』(The Moor's Last Sigh)에서는 이를 상당히 발전된 형태로 표현해 냈다. 작품에 나타난 표현 그대로
『무어의 마지막 한숨』은 “고귀하게 태어난 한 잡종 인간(cross-breed)이 몰락해 가는 이야기”(5)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모라에스
조호비(Moraes Zogoiby), 일명 무어가 ‘잡종 인간’이라는 혼성성을 지니게 된 것은 단순히 유태계 아버지와
포르투갈(Portugal)의 항해가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1469-1524)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혼성성은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혼성 현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인도의 모습 그 자체와 유사하다. 루시디에게 있어서
인도는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와 회교와 힌두교 등이, 정치적으로는 포르투갈과 영국의 식민지 유산과 힌두 원리주의가 표방하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구
소련의 사회주의적 이념 등이,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동양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이 혼재해 있는 나라이다. 그는 어느 한 쪽을 선택함으로써 다른
것들을 배척하고 밀어내는 노력들을 노골적으로 반대한다. 그는 이러한 노력들이 인도의 역사를 분열과 파멸로 몰아가고 있음을 질타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해봄 직하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그가 『무어의 마지막 한숨』에서 주요 배경으로 설정한
봄베이(Bombay)에 대한 묘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봄베이는 중심이었다. 처음 생길 때부터 그랬다. 포르투갈과 영국의 피가
반반 섞인 사생아, 하지만 봄베이는 인도 중에서도 가장 인도다운 도시였다. 봄베이에서는 인도의 모든 것이 만나고 또 합쳐진다. 봄베이에서는 온
인도가 인도 아닌 것들과 만난다. (350)
과거 인도를 지배했던 포르투갈과 영국의 잔재가 남아 있는 봄베이/인도, 그러나 그것
때문에 인도적이지 않다는 생각은 루시디에게는 불합리한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있기에 봄베이/인도는 세계의 중심일 수 있고, 가장
봄베이/인도다울 수 있다. 결국 루시디가 자신의 작품에서 다루고자 한 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가 되었기에 종족 차별을 초월하는,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알기에 언어를 초월하는, 모든 인종이 다함께 살기에 피부색도 초월하는”(51) 조국 인도에 대한 꿈이다. 물론 여기에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는 그의 능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얼핏보면 대조적으로 보이는 소잉카와 마르케스, 아체베와 루시디의 작품 세계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우리는 결국 이들의 고민이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문화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나아가서는 그것을 어떻게 전개해 나가느냐의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들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은 기법이든 소재이든 그것을 세계의 독자가 접근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적 경험의 축적과 그것을 녹여내는 작가의 노력이 아우러져야 한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이들은
다양한 문화적 경험의 축적을 그들의 문학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창조적 원천으로 사용한다. 이들은 제국주의라는 강제 장치에 의해 토착문화와
서구문화의 혼돈을 경험한 작가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에는 하나같이 그 혼돈된 문화를 읽어내는 독특함이 발견된다. 디지털 시대의 우리 문학은
국제 표준화된 기법의 개발과 우리만의 독특한 문화를 녹여서 세계인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 때 세계 속으로 전파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들의 작품 세계를 통해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포장된 문화 제국주의, 그리고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를 동시에 돌파할 수 있는 해답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 문학의 세계화는 작가의 외국어 구사능력을 향상시키는 일도 요구한다. 현재까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들의 절대다수는
유럽어 문학권의 작가이다. 중남미나 아프리카의 수상자들의 경우도 유럽어문으로 작품활동을 했다. 예외는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かわばた
やすなり)와 오에 겐자부로(おおえ けんざぶろう)이다. 간혹 국내에서는 이들의 경우를 예로 들어 번역작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타인에
의한 번역은 간혹 적절하지 못한 어휘의 선택으로 작가의 의도를 왜곡하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작가가 직접 외국어 구사 능력을 향상시켜 자신의
작품을 외국어로 출판한다면 우리 문학의 세계화는 더욱 촉진될 것이다. 이는 번역작가에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적극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적극성은 또 다른 극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
그 좋은 예는 응구기이다. 그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케냐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영어에 능통하다. 그는 초기에는 영어로 글을 쓰다가 자기 부족의 언어인 기쿠유(Gikuyu)어로 작품활동을 하게 된다. 이런 변화는
응구기가 자기 언어의 문화적 가치를 절실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문화로서의 언어는 역사상의 한 민족의 경험이 축적되어 모이는
저장소이다. 문화는 그것을 생성, 성장, 축적, 연결시키고, 또 실제로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달할 수 있게 한 언어와 거의 분리할 수
없다. (Decolonising 15)
물론 응구기는 서구의 제국주의가 언어의 강요를 통해 영구화하고자 했던 식민주의를 배척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먼저 자기 부족의 언어로 글을 쓰고 그것을 다시 영어로 번역한다. 그는 이 과정에서 본래부터 영어로 글을 쓰는 것과, 자기
부족의 언어로 글을 쓰고 그것을 다시 영어로 옮기는 작업이 엄청난 차이를 갖고 있음을 실감한다. 그래서 그의 영어판 작품에는 케냐의 노동자나
농민들이 사용하는 영어 표현이 나온다. 예를 들어서 그는 자전거를 “철마”(metal horse Petals of Blood 16)로 표현한다.
말하자면 그는 서구식 영어가 아닌 케냐식 영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응구기의 예에서 작가의 자기 문화, 즉
언어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작가들도 단순히 번역 작가들에게 기대기보다는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세계에
알리는 일에 주체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식 영어 표현이 가미된다면 더욱 좋다. 이제 피진(pidgin)이나 크레올(creole)은 더
이상 어설픈 현상이 아니다. 만약 어떤 외국인 번역가가 우리의 소설 작품에 담긴 순수 우리말을 서구인들의 표준어로 번역하고 그것이 국제 표준화
된다면 우리식 표현은 설자리를 잃게 된다. 우리식 영어 표현에 대한 경멸에 앞서 그것을 보호하고 살리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요구된다.
다양성의 문제는 독특한 문화 못지 않게 퓨전(fusion) 혹은 혼성성(hybridity)에서 볼 수 있듯이 장르간 혼합과 영역
허물기를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런 현상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가 “문화는 동양과 서양과 같은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대립체로
외과수술적으로 분리하기에는 너무나 뒤섞여 있고, 그 내용과 역사들 또한 대단히 상호의존적이고 혼성적”(Intellectual xii)이라고 본
것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제 퓨전 현상은 요리에서 음악, 미술, 학문, 첨단기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폭넓게 이루어지고 있다. 예술의 영역에서 정체성의 문제는 더 이상 큰 결점이 될 수 없다.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을 통해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자는
구호인 ‘장벽을 넘어 웹의 세상으로’(Wall to Web)는 국가나 민족의 경계를 넘어선다는 의미를 초월하여 고급문화와 저급문화, 소설과 극
등 수준과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 발전해 가고 있다.
이런 현상에는 디지털 시대의 윤리가 내재되어 있다. 탈경계와 이종배합으로
표현되는 퓨전문화는 서로 다른 것들을 공존공생 시키는 새로운 윤리의식을 통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곧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공생의 윤리,
상생의 윤리이다.
나라의 경계가 무너진 세기에서는 우주적 교감, 생명체가 서로 교감하는 윤리에 뿌리를 둘 수밖에 없다. 그것이 너
죽고 나 죽자식 20세기의 전쟁패러다임이 아니라 너 살고 나 살자의 협력 상생의 패러다임 전환의 핵심이다. 그리고 거기에 천년의 문을 여는
21세기의 우리 희망이 있다. (이어령 7)
약육강식의 논리를 내세우던 제국주의 시대는 지나갔다. 내가 가진 그리고 다른 개체가
지닌 장점을 서로 살려주는 윈-윈(win-win)전략,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이 디지털 시대의 중심윤리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퓨전문화는 그 동안 문학을 갈라 놓았던 장르의 구분이나 고급문학과 저급문학의 구분을 녹여서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갈
것이다.
새로운 형식의 시도는 패러디 기법을 사용하는 작품과 기계―구체적으로는 컴퓨터―가 만드는 문학작품도 선보일 것이다. 20세기
후반기에는 기존의 작품을 다른 관점에서 쓰는 작가들의 작품이 관심을 끌었다.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를 다시 쓴
쿳시(J. M. Coetzee)의 『적』(Foe), 『제인 에어』(Jane Eyre)를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입장에서 쓴 진 리스(Jean
Rhys)의 『드넓은 사가소 바다』(Wide Sargaso Sea), 그리고 최근에는 『햄릿』(Hamlet)을 거트루드(Gertrude)와
클로디어스(Claudius)의 시각에서 쓴 존 업다이크(John Updike)의 『거트루드와 클로디어스』(Gertrude &
Claudius) 등이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다시 쓰기 작품들의 등장은 서구 작가들의 일방적인 백인 우월주의적 시각을 재정립하려는 노력의
결과이다. 예를 들어서 진 리스가 『드넓은 사가소 바다』를 쓰게 된 것은 『제인 에어』에 등장하는 동물 혹은 악마의 수준을 벗어날 수 없도록
설정된 다락방의 미친 여자의 운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나[진 리스]는 『제인 에어』를 읽고 또 읽었다. . . . 샬롯
브론테(Charlotte Bronte)의 소설 속에서 크레올 여인은 별 볼 일없는 혐오스러운 인물이며, 단 한순간도 살아 있다는 의미의 인물로
설정되지 않는다. 그녀는 이야기의 플롯에 필요한 인물이긴 하지만 항상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고, 무시무시하게 웃어대며, 아무에게나 공격을
퍼붓고는 무대에서 사라진다. 나로서는 그녀가 반드시 정상적인 인물로 무대에 등장해야 한다. 그녀는 왜 로체스터(Rochester)가 그토록
그녀를 혐오스럽게 대했는지, 왜 그녀가 미치게 되었는지는 물론이고, 왜 그가 그녀를 미쳤다고 생각했는지, 심지어는 왜 그녀가 불을 지르려 했는지
등등의 이유를 다룬 과거와 더불어 반드시 그럴듯한 인물로 설정되어야 한다. (Rhys 156-57)
진 리스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다시 쓰기는 서구인에 의해 왜곡된 등장인물의 재정립을 중요한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양성 혹은 쌍방향성과도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갖는다. 다시 쓰기가 대중 사이에 스며들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즈음 인터넷 상에서는 기존의 작가와 현재의 작가, 즉 작가와
작가의 관계를 넘어서서 기존의 작가와 다수 독자간의 다시 쓰기가 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예를 들어서 “제인 오스틴(Jane Austen)의
소설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다시 쓰는 웹 사이트[www.austen.com]가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독자들이 다시 쓴
소설이 이미 1백여 편이나 쏟아져 나왔으며, 회원만도 4천여 명이고, 조회 수는 일 년에 무려 1백만 번이 넘는다고 한다(김성곤 57).”
이러한 현상은 우리가 새로운 시각이 요구되는 시대를 살기 때문이다. 작가와 독자를 엄격하게 분리하던 시대는 지났다. 독자는 더
이상 작가의 이야기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저자와 더불어 좀 더 적극적으로 창작행위에 참여하고 있다. 특히 신역사주의나 탈식민주의는
글쓰기가 지닌 이데올로기 왜곡 현상을 직시하고 독자의 입장에서 되받아 읽기를 강조한다. 그린브랏(Stephen Greenblatt)은 한
저서에서 자신이 왜 역사를 뒤집어 보는 신역사주의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를 “나는 죽은 자와 대화하고 싶은 욕망으로 신역사주의를
시작했다”(1)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죽은 자들과 대화하고 싶은 욕망’은 소위 ‘위대한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일부 서구의 이론가들에 의해
설정된 ‘최상의 문학 작품’에 숨겨진 작가 혹은 그 작가가 속한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찾아내어 그 가면을 벗겨내려는 대화적 글쓰기의 시도이다.
푸코(Michel Foucault)가 지적했듯이 작가의 기능은 “한 사회 내부에서 어떤 담론들이 존재하고 순환하고 기능하는 방식을 특징 짓는
것”(124)이기 때문이다. 즉 작가는 자신이 속한 사회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자신의 관점을 통해 써 나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작가와
사회는 쉽게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사회가 급격하게 변화해 감에 따라 과거의 모든 담론들은 재검증의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문학에서도 소위 고전 혹은 정전이라고 분류되었던 작품들에 대한 패러디 작업은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와 조금은 차이가 있지만
기계문학이 선보일 수 있다. 컴퓨터에 인공 지능의 기능이 도입되면서 기존 작가의 작품에서 새로운 작품을 유추해낼 수도 있다. 미국의 작곡가
데이빗 코프(David Coff)는 엠미(EMI: 음악적 지능의 실험)를 개발하여 컴퓨터를 통해 모차르트(W. A. Mozart
1756-91)의 41개의 교향곡을 분석하여 새로운 42번째 교향곡을 유추해내는 실험에 성공했다. 10만개 이상의 모듈을 설정하여 만약
모차르트가 한 곡을 더 작곡한다면 어떤 작품을 만들어낼 것인가를 실험한 것이다. 문학에서도 작고한 작가의 작품을 유추해내는 기계문학이 선보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이 단순히 산업의 발전을 맹목적으로 따라가지는 않을 것이다. 문학이 지닌 사회 비판적 기능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못지 않게 중요한 기능을 해왔다. 급격한 과학기술의 발달로 황폐해진 인간성 회복이나 환경의 소중함에 대한 주제가 디지털 시대의 주류를
이룰 것이라는 예상은 당연하다. 디지털 시대의 문학은 생명사상에 바탕을 둔 인간중심주의를 토대로 한 새로운 가치규범 설정에 상당한 역할을 할
것이다.
흔히 21세기를 주도할, 그리고 세상을 바꿀 세 가지 기술을 GNR기술이라고 한다. 이는 생명의 신비를 푸는 유전자
기술(Genetic engineering), 현재의 마이크로기술보다 1천 배 더 정밀한 나노기술(Nano technology),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할 로봇기술(Robot engineering)이다.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하려는 게놈 프로젝트(Genom Project)는 유전자를
조작해 자신이 원하는 아이를 갖는 맞춤가족시대를 열어 줄 것이다. 초정밀기술의 발달은 재택 근무, 재택 교육, 원격진료 등을 가능하게 만들어
인간 사이의 접촉이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그리고 땀흘리며 일하는 작업, 소위 3D업종을 중심으로 로봇이 인간의 일을 대신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21세기 과학기술의 진로는 인간성 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뿐만 아니라 무분별한 개발과 인구 폭발이 가져올
더불어 사는 자연의 소중함도 더욱 강조될 것이다. 결국 “인간다움”은 기술의 발전 속도를 조절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고 문학은 필연적으로 이
주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 토마스 핀천(Thomas Phychon)의 『중력의 무지개』(Gravity's Rainbow)는 과학기술의 맹신에
따른 오용과 생태계의 파괴가 인류를 파멸로 몰아갈 수 있음을 경고하는 문학 작품의 신호탄이었다. 특히 정보를 매개로 한 시스템 사회, 즉
컴퓨터에 들어있는 정보 조작에 의해 인간이 겪게될 고통이나 유전자 조작을 통한 혼란, 그리고 인공지능을 지닌 기계인간의 문제를 다룬 작품들이
각종 예술 장르를 통해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결국 과학기술에 대한 인간의 의식을 끊임없이 점검하도록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학은 일면으로는 산업과 사회의 변화 추세를 따라가면서 다른 측면에서는 보완적인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은 우리가 잃어버린 혹은 취해 사는 세상에 대한 비판을 중요한 기능으로 삼아 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 일을 해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전 시대의 문화에 대해 향수를 느끼는 독자들을 만족시키려는 작품들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이전의
여유로운 세상에 대한 그리움은 더 커져갈 것이다. 독서문화를 예로 들어보더라도 사이버 텍스트가 주는 속도 또는 가벼움에서 벗어나서 책장을 넘기며
진지한 사색에 빠지는 여유로움을 찾는 독자도 생겨날 것이다. 그래서 서적문화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고 진지한 문학작품도 줄을 잇게 될
것이다.
Ⅲ
지금 우리는 급격한 변화의 시기를 살고 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이 인간의 노동력보다 더
효율적으로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한 기계의 도입이었다면, 디지털 시대는 국제화된 정보 공간을 누가 더 많이 보유하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정보혁명 시대이다. 이러한 정보혁명의 시대에 문학을 포함한 문화는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문화의 생명인 창의성과 다양성은 산업의
중심축을 바꾸어 놓고 있다.
이런 변화는 문학산업에도 엄청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것이다. 문학에 대해 기존의 생각들을 가진
사람들은 변화를 요구받고 있으며, 그 변화의 종착점은 아직 확실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출구를 알 수 없는 변곡점에 서 있는 셈이다.
그러나 지난 세기까지의 문학이 소수의 유명작가를 중심으로 하는 엘리트 문화주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다수의 사람이 문화의 주체가 되는 문화
민주주의 시대가 될 것임은 부인하기 힘들다. 그리고 미래의 문학산업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로 발전해 나갈 것 또한 분명하다.
문학의 죽음에 관한 논쟁을 꼼꼼하게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것에 대해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나는 앨빈 커넌(Alvin Kernan)의 지적처럼 “실제로는 급격한 정치적, 기술적, 사회적 변화의 시기에 발생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제도의 복잡한 변환”(10)으로 보는 것이다. 20세기 후반부가 시작되면서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예고하였고, 문학도 그 변화의 급류에
휩쓸렸다. 이제 과거의 틀에 박힌 문학적 입장을 계속 유지하기에는 벅찬감을 느낀 일부 문학가들은 그것을 죽음으로 묘사했다. 다른 하나는 이들이
말하는 문학의 죽음은 실제로는 서구 중심적 문학 논의의 한계를 토로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작가인 응구기가 서구의 소설의 죽음 논란에
대해 거론한 내용은 음미해 볼 만하다.
얼마 전에 신의 죽음처럼 적어도 18세기와 19세기 형태의 소설의 죽음이 선언되었다.
심지어는 뉴브 로망(nouveau roamn 신소설)을 추구하는 움직임이 있기도 했지만 나는 거기에 역시 새로운 신을 찾고자하는 움직임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 추구와 관련해서 결과가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확실한 것은 ‘소설’이라는 이름에 들어맞는 뭔가가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
같은 데서는 삶의 의미심장한 기호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설의 죽음은 나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64)
너무도
당당한 응구기의 태도가 의미하는 바는 다양성에 대한 촉구이기도 하다. 그 동안 세계 문화의 주도권을 행사해 왔던 유럽 중심주의적 사고는 그
단선적인 성격 때문에 한계에 부딪쳤다. 중심과 주변의 명확한 구분, 차이보다는 차별성, 그리고 서구를 제외한 타자를 보는 고정된 시각을 바탕으로
한 서구에서 소설의 죽음이 논의되었던 것은 그 적절한 예이다. 이러한 서구 중심적 사고로는 다양성을 반영할 수도 없고 독자들의 반응을 이끌어낼
만한 소재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틈에 제3세계 국가들의 작가들은 과거에 강요된 제국주의 문화와 자신들의 본래 문화를 흡수하여 문학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작품이 보여주는 다양성은 디지털 시대가 요구하는 다양성을 적절하게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국내의 문학연구자들의
문학에 대한 접근방식도 크게 세 가지 면에서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첫째는 엘리트 문화 혹은 상아탑주의에서의 탈피이다. 우리는 지금껏
논문집이라는 견고한 장치를 통해 고급과 저급을 구분해왔다. 자신들의 글쓰기를 고급에 위치시키고 그 밖의 것들은 저널리즘 혹은 삼류로 분류해
왔다. 또한 자신들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무지의 소산이라고 단정해 버렸다. 하지만 다른 예술분야에서 볼 수 있듯이 전통적인 고급문화와
저급문화의 융합이 활발한 이 때, 문학연구자들은 더 쉬운 글쓰기와 용어사용으로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 둘째는 특히 서양 문학연구자들은 소수의
서양작가에 대한 찬사를 늘어 놓는 나팔수의 기능을 버려야 한다. “제국 없이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 소설은 존재하지 않을
것”(Culture 69)이라는 사이드의 지적은 상징하는 바가 크다. 모든 글쓰기는 작가가 속한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 법이다. 따라서
독서나 작품해석은 신중해야 하며 이글튼(Terry Eagleton)의 말처럼 “다시 쓰는 일”(12)이어야 한다. 서양연구자들의 해석을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우리의 입장을 담아내는 적극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셋째는 유연성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칼과 총으로 대립하며 국경을 나누듯 문학의
영역을 나누어서는 안된다. 다양한 소재를 섭렵함은 물론이요 대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이스트호프(Antony Easthope)가 쓴
저서의 제목인 『문학연구에서 문화연구로』(Literary into Cultural Studies)가 의미하듯 문학연구는 문화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각 장의 제목을 ‘문학연구 패러다임의 붕괴’와 ‘새로운 패러다임을 향해서’라고 설정하고 사회 변화에 따른
새로운 문학연구 방법을 모색하였다. 우리가 계속 글자연구에만 몰두한다면 그것은 고립과 퇴출을 자초하는 것이다.
문학은 곧 인간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문학연구도 인간의 삶의 방식을 그 토대에 두어야 한다. 이는 문학연구가들이 사회일반의 문화적 흐름의 변화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필연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성급하게 저널리즘 정도로 매도해서는 안된다. 저널리즘은 이미 문학을 제치고 다수의 독자와 함께
호흡한지 오래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학연구가 저널리즘을 완벽한 모델로 설정해야 한다거나 그것과 경쟁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부정적인
측면을 지적하기에 앞서 긍정적인 면들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자세를 취해봄직하다. 우리의 논문은 당연히 일반 독자들의 손에서도 읽혀질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디지털 시대가 빚어내는 다양한 사회의 변화는 문학연구자들이 저널리즘과의 화해를 심각하게 고민해 볼 때임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시대는 다양성, 접근의 편이성, 경계 넘나들기 등을 그 핵심 원리로 적용하고 있다. 우리는 급격한 변화의 시기가 의미하는 바를
음미해 보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전북대>
인용문헌
김성곤. ?뉴 미디어 시대의 문학?. 『21세기문학』. 9
(2000): 45-60.
이어령. ?이어령의 밀레니엄 메시지?. 『한국일보』. 1, 1, 2000: 7.
한국경제신문 뉴 밀레니엄
기획취재팀. 『21세기 21가지 대예측』. 서울: 은행나 무, 1999.
허만, E. S. & 맥체스니, R. W. 『글로벌
미디어와 자본주의』. 강대인, 전규찬 역. 서울: 나남출판, 1999.
Achebe, Chinua. “The Role of the
Writer in a New Nation.” African Writers on African Writing. ed. G. D. Killam.
Evaston: Northwestern UP, 1973.
____. Hopes and Impediments; Selected Essays
1965-87. Oxford: Heinemann, 1988.
Eagleton, Terry. Literary Theory: An
Introduction. Oxford: Basil Blackwell Pub., 1983.
Easthope, Antony. Literary
into Cultural Studies. London: Routledge, 1991.
Foucault, Michel. Language,
counter-Memory, Practice. ed. Donald F. Bouchard. Ithaca: Cornell UP,
1980.
Greenblatt, Stephen. Shakespearean Negotiations. Berkeley: U of
California P, 1988.
Hegel, G. W. F. Philosophy of History. New York: Dover,
1956.
Kernan, Alvin. The Death of Literature. New Haven: Yale UP,
1990.
Leavis, F. R. Mass Civilization and Minority Culture. Cambridge:
Minority P, 1930,
Lenine, Paul. “Politics and Imagination.” E. L. Doctorow.
New York: Methuen & Co., 1985. 11-23.
Marx, K. & F. Engles. “The
Communist Manifesto.” Basic Writings on Politics and Philosophy. ed. L. Feuer.
New York: Anchor, 1959. 1-14.
Mulan, John. “Introduction.” Roxana. Oxford:
Oxford UP, 1996. vii-xxvii.
Ngugi wa Thiong'o. Decolonising the Mind: The
Politics of Language in African Literature. London: James Curry, 1986.
____.
Petals of Blood. Oxford: Heinemann, 1977.
Petersen, K. H. Chinua Achebe: A
Celebration. Oxford: Heinemann, 1990.
Rhys, Jean. The Letters of Jean Rhys.
ed. Francis Wyndham & Diana Melly. New York: Viking, 1984.
Rushdie,
Salman. The Moor's Last Sigh. New York: Vintage Books, 1995.
Said, Edward W.
Culture and Imperialism. New York: Vintage Books, 1993.
____.
Representations of the Intellectual: the Reith Lectures. New York: Pantheon,
1994.
Williams, Raymond. Marxism and Literature. Oxford: Oxford UP,
1977.
Digital Age and the Literary Industry
Yu, Seung
It
has been said that art has reflected the industrial development and the masses'
desire. As the digital technologies change our ways of life, so the literary
industry including publication, literary contents and studies, if it wants to
exist, must be changed. The debate over the “death of literature” begun in 1960s
was the sign of the complex transformations of a literary paradigm in a time of
radical political, technological, and social change.
It is the mark of the
new that we never know what it will be until it arrives. Of one thing we can be
sure, that the masses will take the initiative in literary industry and the
products of it will never be the outcome of existing trends. The digital age
assigns meaning to such terms as e-book, inter-action, diversity, global
standard, re-mapping, minority, hybridity and ecology. Though the traditional
literary features will remain, the literary industry should reflect these ideas
and upon which course of action
'文學, 語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의 대표 지성 이어령의 견해 - 중국조선족문화통신 (0) | 2015.10.01 |
---|---|
|춘원의 미공개 시편들] 소설가 이광수의 블라디보스토크 10일 체류 (0) | 2015.10.01 |
시인 김민부 (0) | 2015.10.01 |
백석의 수필 '마포(麻浦)' (0) | 2015.10.01 |
白石의 『사슴』을 안고 - 김기림 (0) | 2015.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