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한국의 대표 지성 이어령의 견해 - 중국조선족문화통신

이강기 2015. 10. 1. 22:24

한국의 대표 지성 이어령의 견해 
 
 중국조선족문화통신,  2012-1-9 18:35:00

 

문학은 언어 속에 토속성 간직함으로써 예술적 가치 가져

 

우리 문단계의 거목 박완서 선생의 죽음 앞에서 한국 대표 지성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은 “하나의 세기가 끝났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는 서사적 텍스트 문학의 종말일 뿐, 문학은 우리 삶 속에 다양한 모습으로 녹아들어 여전히 푸릇한 생명력을 뿜어낸다고 했다.

 


이어령 고문은 시대를 이끄는 키워드를 만들어내는 힘이 남달랐다. 1960년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옮겨가자는 구호로 읽혔다. 군사 독재에 눌려 암울과 좌절에 빠졌던 1970년대는 ‘신바람 문화’를 역설해 민족의 열정을 깨우고자 했다. 1980년대는 ‘벽을 넘어서’를 주제로 올림픽 개·폐회식의 초대형 국가 이벤트를 기획했다. 남북 분단과 동서 냉전의 벽까지 넘어 진정한 용서와 화합을 이루자는 다짐이었다. 그의 선언이 구소련의 몰락과 독일 베를린장벽의 붕괴로 입증됐다면 지나친 주장일까? 1990년대에는 정보화 시대를, 2006년 벽두에는 아날로그와 디지털 문명의 융합을 외치는 ‘디지로그’를 선언했다.

 


이 고문의 이같이 뛰어난 지성과 예지력의 뿌리는 바로 ‘문학’이다. 그의 화려하지만 견고한 언어는 문학적 수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는 문학적 재능으로 재능을 처음 과시하기 시작했다. 22살이었던 1956년 <한국일보>에 평론 ‘우상의 파괴’를 발표, 일약 문단의 문제적 총아로 떠오른다. 그럼에도 문학평론가로 자신의 이름을 한정 짓길 거부하고 소설가, 극작가, 국문학자, 하이쿠 연구가, 에세이스트, 언론인, 문예지 편집인, 문화부 장관, 올림픽 기획자, 대학 교수 등 숱한 일을 해오며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다. 이 고문의 천부적이었거나, 혹은 후천적으로 키워온 문학적 사고의 거미줄은 거침없이 새로운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시인 오탁번은 <상상력의 거미줄>이란 책에서 “이어령의 강연만큼 위트와 패러독스와 이미지가 있는 시를 쓰는 시인이 몇 있을까. 요즘의 시가 이어령의 강연보다 덜 시답고 덜 문학적인 것은 아닌가. 한국 현대문학에 대한 대부분의 논문은 이어령이 커피 마시면서 심심풀이로 하는 이야기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이 고문은 인생과 문학의 연관성을 누구보다 깔끔하게 설명할 만한 사람이다. 해방 전 태어나 한국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박완서 작가의 죽음을 계기로 우리 인생을 웃게도 울게도 만드는 문학의 힘을 그와 이야기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2008년 박경리 작가에 이어 올해 박완서 작가의 죽음까지, 해방 전후사를 온몸으로 살아내고 그 삶을 서사한 여류 작가들이 사라졌습니다. 이 시대 그들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소위 영향력 있는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합니다. 즉 한 세대(Epoch)를 만들었던 사람이 죽으면 ‘하나의 세기가 끝났다’고 말할 수 있죠. 아무리 시대가 발달했어도 대체로 인간들의 탄생부터 자녀 출산까지 걸리는 시간은 20년 내지 30년입니다. 세대라고 하는 글자 중 ‘세’자가 30년이라는 의미입니다. 박경리·박완서의 죽음을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전쟁 세대의 종말을 의미하겠죠. 그들은 해방 이전에 태어났지만 한국전쟁 전후 세대의 여류 작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우리 전통사회의 변동이 일어났습니다. 획기적인 젠더(Gender) 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대학에도 여대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전쟁 자체만을 보면 비극적이면서 엄청난 대가를 치렀지만, 한 새로운 세대를 만든 것은 사실입니다. 두 작가는 그 세대를 거치며 탄생한 여류 작가들입니다.”

 


―이 세대 문인들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그들이 독자들과 소통한 방식 같은 것 말입니다.

 

“리얼리즘이죠. 그들은 한국전쟁 중심의 새로운 리얼리즘(풍속소설 양식)을 기반으로 소설을 집필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죽음을 두고 ‘근육이 있는, 추상적이지 않고 현실적인 언어를 사용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도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근육과 핏줄이 살아 있는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호응을 하고 공감을 합니다. 자신들의 주변 이야기, 혹은 어머니 아버지가 겪을 수 있었던 일들을 텍스트를 통해 접하고 공감을 하는 겁니다. 이제 그런 풍속적인 리얼리즘 문학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거죠. 헤밍웨이나 톨스토이 부류의 소설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방식의 소설은 끝났다는 말씀이신가요?

 

“한 인물이 이야기를 끌어가고, 그사이에 궁금증을 유발하고, 세상 세태를 보여줌으로써 공감을 자아내는 소설이 점점 자리를 잃어간다는 거죠. 사건 중심의 스토리텔링은 연극이나 드라마를 통해 사람들이 대리만족을 느끼기 때문에 굳이 활자매체를 통해 수고스럽게 읽지 않아도 돼요. 이제 소설이 살아남으려면 만화나 연극, 영화 등 다른 매체들이 전달할 수 없는 재미를 개발해야 합니다. 전통적인 소설 양식으로는 이 시대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 거죠.”

 


   “무용지용, 잡담이 소설의 시작”

 

―새로운 형태의 문학이 생겨나야 한다는 거군요. 이런 현상이 비단 우리나라 문제만은 아닐 텐데요.

 

“서구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됐습니다. 미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헤밍웨이와 포크너 이후 세계적인 작가가 없지 않습니까? 박완서 소설은 알퐁스 도데 식 소설이에요. 이런 유형의 소설은 200~300년 지속된 양식이었지만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어요. 우리나라만 유독 전통적, 19세기의 리얼리즘, 스토리 중심적인 소설 양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거죠. 요즘 외국 문학을 보면 거의 스토리텔링은 안 하거든요. 요즘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1Q84>의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만 하더라도 스토리텔링 작가는 아니죠.”

 


―한 시대를 풍미한 리얼리즘 작가의 죽음을 통해 ‘문학의 소멸’을 얘기하면 비약일까요?

 

“기승전결이 있는 문학, 개연성과 연속성이 있는 리얼리즘 문학의 소멸은 이미 시작됐지만 문학 자체가 소멸된 건 아니죠. 문학을 요리하는 방법, 그릇이 달라졌습니다. 박완서 시절만 하더라도 객관적인 리얼리즘 소설이 주를 이뤘지만 요즘에는 판타지, SF, 반문화적인 소설이 IT를 통해 쏟아져나오는 실정입니다. 또 예전에는 신춘문예를 통하거나 기성작가들을 통해 문학계에 등단했지만, 지금은 인터넷에 소설을 쓰고 유명세만 타면 책을 내기도 하잖아요. 요즘은 어느 누구의 추천 없이 스스로 등단하고 독자들과 직접 소통을 하는 거예요. 문학뿐만이 아닙니다. 대중문화 지형도가 바뀌기 시작했어요. UCC나 유튜브를 통해 등장한 가수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이 고문은 이미 1990년대에 <구텐베르크 은하계>라는 책에서 전자영상 매체 중심의 ‘지구촌 건설’을 예언한 마셜 매클루언의 예언은 틀렸다고 했다. 아무리 오디오-비주얼 시대가 와도 문자 매체, 활자적 그래픽은 사라지지 않고 더욱 강력한 형태로 갱신된다는 주장을 폈다. 그 이후 또 10년이 지났다.

 


―문자 매체, 그 문자를 통해 창조되는 문학은 죽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그때의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문학의 위기, 문자성의 소멸이라는 주제는 이미 아주 옛날부터 나타났습니다. 1914년에 나온 앙드레 지드의 <교황청의 지하실>을 보세요. 앞으로 미래에는 책을 전부 바다에 갖다 버릴 것이다, 전화와 라디오 방송 같은 것이 생겨날 텐데 새로운 뉴미디어를 두고 누가 책 따위를 읽겠느냐고 하지 않았습니까? 매클루언은 1970년대까지 신문은 망할 거라고 주장했고요. 하지만 지금 어떻습니까?  지금의 비관론이 미래의 실상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그 활자들이 종이라는 갇혀진 틀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는 공간을 고려해 문학서적을 읽는다는 거죠. 누가 기차 안에서 박경리의 <토지>를 읽겠어요? 당연히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문학을 선택하겠죠. 문학은 절대 사라지지 않지만 시간과 장소, 사람의 역할에 따라 요구하는 콘텐츠가 다양해졌기 때문에 양식은 크게 달라질 수 있어요.”

 


―책이라는 1차원적 공간에서 2차, 3차원적 공간으로 영역이 확장됐다는 말씀이죠?

 

“책이 서고에 아무리 많아봤자 애플스토어에 올라와 있는 무료 책보다 많겠어요? 저는 앱 검색을 통해 옛날에 못 봤던 책들을 찾으면, 굶주렸던 사람이 무료 뷔페에 갔을 때처럼 군침을 흘려요. 10개의 소설을 동시에 읽을 수도 있게 됐죠. 구텐베르크 이래 문학작품은 묵독(默讀)의 문화로 나타났습니다. 혼자서 책을 펴고 어떠한 소리도 없이 눈만으로 묵묵히 읽는 시각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책 읽기가 문학작품의 존재 방식이었죠. 이제 문화의 전 영역에서 일어나는 멀티미디어화는 문학작품을 이루는 언어적 형상들을 순수하게 활자적인 요소로 국한시키지 않을 겁니다. 문학은 활자가 환기시키는 본연의 상상력 위에 영상적 상상력, 음성적 상상력, 나아가 사이버-스페이스적 상상력까지를 아우르며 그 존재 방식을 확장한다는 얘기죠.”

 


―인간이 생존하는 한 형태를 달리해도 문학은 사라지지 않겠군요.

 

“수학이 없어지지 않듯이, 언어 또한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그 언어를 매개로 탄생되는 문학도 마찬가지고요. 단지 그 형태가 카프카의 상징소설이냐, 아니면 애니메이션 스타일이냐, 마이크로 콘텐츠를 기반으로 한 UCC인지가 중요해진 거죠. 이러한 형태들의 공통점은 실용성이 배제돼 있다는 것입니다. 실용성과 필요성은 다릅니다. 무용지용, 즉 무용하기 때문에 유용하다는 거예요. 잡담이라는 것이 쓸데없는 소리잖아요? 그러나 공리사회에서는 본질이 되어버렸죠. 잡담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느끼는 거죠. 우리가 공리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은 먹고사는 리빙(Living)의 수단이고, 잡담은 그 자체가 목적이에요. 말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 잡담이잖아요. 잡담은 소설의 시작이고요.”

 


―소설과 시는 잡담의 고급 양식으로 나타나는 겁니까?

 

“잡담이 채워줄 수 없는, 좀 더 고급 상상력을 가진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을 메워주는 역할을 하죠. 지금은 소설에서 점점 내려와 생활 속에 녹아버렸습니다. 우리나라 작가 중 카프카의 상징소설 <성> 같은 작품을 쓰는 이가 있나요? 거의 없어요. 모두 획일화되고, 생활의 방식이 같아지고 젊은이나 세대적인 풍속 차이밖에 없으면 소설의 위기가 찾아오는 거죠. 부모님의 결혼 반대에 부딪힌 연인들이 바다에 빠져 죽는다는 식의 컨벤션(Convention)이 있어야 소설을 만들 수 있어요. 지금은 컨벤션이 상당히 있는 것 같지만, 무척 다양해졌기 때문에 하나로 묶을 수가 없어요. 무라카미 하루키 같은 작가는 완전한 컨벤션이 아닌, 새로 창조되는 삶의 현장들에 가서 책을 만듭니다. 대개 소설이라는 것이 커뮤니티가 없으면 소설을 만들 수 없어요. 히스토리(History)와 스토리(Story)는 똑같은 말이거든요. 프랑스뿐만 아니라 라틴 계열에서는 역사와 스토리를 구별하지 않아요. 개념적인 부분은 역사, 개인적인 상상 부분은 스토리가 되는 거죠. 역사와 소설은 가장 비슷해요. 오늘날 만들어지는 역사소설은 모두 과거 이야기들입니다. 이 히스토리를 만드는 게 커뮤니티고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은 인간의 말이죠. 인간이 언어와 말을 사용하는 한 문학은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겠죠.”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도구 ‘문학’

 

―그럼 지금도 문학 전성시대입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전처럼 우리가 두꺼운 고전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진 않지만 문학은 여전히 우리 생활 곳곳에 녹아 있습니다. 과거 기업 CEO들이 스토리텔링이라는 말을 썼나요? 오히려 지금이 전성시대죠. 시가 없어지니까 광고 카피가 전부 시가 되잖아요? 본격적으로 시와 소설은 와해됐지만, 오히려 와해됨으로써 그 씨앗들이 퍼져 문학의 흔적을 생활 속에 배어버리게끔 한 겁니다. 문학적 자산(Resource)은 변함이 없지만, 그 자산(Resource)에서 캐내는 물질이 달라지는 거죠. 소설은 스토리텔링이라는 말 속에, 시는 카피 속에 살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영상의 근원에는 마이크로 콘텐츠화된 시적·소설적 요소가 있어요. 과거에는 큰 콘텐츠였지만 요즘은 UCC에서 볼 수 있듯이 카피도 짧고 스토리텔링의 시간도 짧아지고, 아주 작은 파편들로 구성되어 있어요. 만화에 나오는 대사를 어린아이들은 생활 속에서 그냥 사용하거든요. 요즘 만화를 많이 읽은 애들은 말하는 스타일이 달라요. 의태어나 의성어를 상당히 많이 쓰죠. 과수원이 없어지고, 길가에 열매들이 매달렸다고 보면 됩니다.”

 


―이런 형상들을 바람직하다고 보시나요.

 

“우리 세대로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지만 젊은 애들은 다르죠. 우리 가족이 굉장히 보수적인데, 우리 딸만 봐도 만화를 읽다, 러브스토리를 읽다, 단테 <신곡>을 읽다 뒤죽박죽으로 독서를 하거든요. 우리 때만 해도 <신곡>을 읽는 사람이 만화를 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어요. 더군다나 러브스토리 같은 것은 영화로나 보는 거지, 소설로 읽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됐죠. 클래식 듣는 사람은 클래식만 들었지, 재즈나 록 혹은 발라드는 듣지 않았거든요. 지금은 그런 경계선이 사라졌어요.”

 


―인류에게 문학, 더 세분해서는 소설이라는 형태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요?

 

“시민사회가 형성되면서 생긴 것이 맞을 겁니다. 인간의 쾌락을 추구하는 양식 면에서 유럽 사람들은 희랍 사람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었는데 딱 두 가지가 앞서 있었어요. 담배 피우는 맛과 소설을 읽는 재미였죠. 희랍 시대에는 서사시만 존재할 뿐 소설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거든요. 소설이라는 양식은 시민사회가 형성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소설은 장외 소설이라고 해서 신문 보듯이 1회, 2회로 나눠서 나왔어요.

 


분명한 사실은 소설도 애초에 부르주아, 장사하는 사람들의 문학이었다는 점입니다. <로빈슨 크루소>를 쓴 대니얼 디포의 소설에는 숫자가 많이 나옵니다. 절대로 담배를 그냥 받았다고 쓰는 법이 없습니다. 몇 온스들이 담배를 몇 통 받았다고 씁니다. 그의 독자들이 하루 종일 장부를 기록하는 숫자 관념이 철저한 부르주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새커리의 소설만 해도 문맹자가 많았던 당시의 술집에서 죽 둘러앉은 주정뱅이들에게 한 사람이 낭독해주던, 그런 소설입니다. 말하자면 그 시작은 천박했습니다. 그러나 그 끝은 장대해지지 않았습니까? 최첨단과 마케팅과 소비라는 상업주의적 우주 속에 탄생할 새로운 시대의 문학도 틀림없이 그 시작은 천박할 겁니다. 하지만 일단 그것이 본궤도에 오르면 오히려 지금의 소설보다 훨씬 더 다감하고 훨씬 더 사려 깊으며, 훨씬 더 지적이고, 즐겁고, 훌륭하고 감동적인 작품들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고문은 “문학은 민족이나 사회의 단위로서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살아 있는 한 인간의 개인을 읽는 것이고 그것이 전체의 공감으로 확산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문학적 사고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공감하는 것은 인류 삶의 질적 향상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분명 사회과학자나 역사학자가 보는 시각과는 다르죠. 문학적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역사를 분석하는 사람, 혹은 이데올로기로 사고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가령 <서부 전선 이상 없다>를 읽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은 그 시대의 전쟁을 얼마나 차이화하고 그 특수성을 반영했는지가 아닙니다. 그 소설의 감동은 전쟁 속에서의 ‘집단’과 ‘개인’의 삶에 대한 보편적 체험이죠. 문학이란 군대로 치면 육군입니다. 해군·공군이 아무리 첨단 미사일로 때려줘도 육군이 군화 신고 소총 들고 올라가 깃발을 꽂지 않으면 점령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뭐랄까, 인간에 대해 더 육체적이고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는 행위라 할까요?”

 


―문학이 인류 사회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보시나요?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딱 두 가지, 숫자와 언어예요. 숫자가 현대과학, 물질적 세계를 만들어냈다면 언어는 인간의 모든 것을 사고하게끔 만들었죠. 숫자의 왕이 수학이듯이, 언어의 왕은 문학이에요. 당연히 기여하는 바가 크죠. 우리나라와는 달리 서양에서는 문학이라는 단어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어요. 문자언어는 ‘Literature’, 우리가 말하는 문학은 프랑스어로 ‘Belles-lettres’, 영어로는 ‘Imaginary-Literature’, 혹은 ‘Creative-Literature’라고 표현하죠. 엄격하게 말하자면 문학에는 역사와 인문학이 다 포함돼요. 언어를 이용하는 것은 모두 문학인 거죠. 문자니까요. 우리가 예술로서 말하는 시와 소설은 넓은 의미로는 ‘Literature’에 포함되지만 엄연히 구별돼요. 버지니아 울프 같은 작가들의 소설은 문학인가, 예술인가라는 회의를 많이 하죠. 예술사로 보면, 소설은 아주 특이한 변종, 지금 판타지 소설이나 만화만큼 우스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시민사회에서 굉장한 힘을 갖게 됐습니다.”

 


―어떤 힘인가요?

 

“인간은 잡담을 하는 동물이에요. 원숭이들은 털을 골라주는데, 인간은 잡담으로 서로의 일체성(identity)을 만들어요. 사회를 만든다는 겁니다. 원숭이들이 하루에 50마리 이상 서로 털을 골라줄 수 있겠어요? 사람은 하루에 수백, 수천 명과 잡담을 하면서 서로 동질감을 느낍니다. 전화가 처음 생길 때 사람들은 용건이 있을 때만 사용해야 하는 줄 알았어요. 여론조사를 해보니 60%가 용건 전화가 아닌 잡담 전화였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화는 용건만 간단히’라는 문구도 있었잖아요. 그런데 이제 전화는 잡담을 하기 위해 있는 거예요. 소설이란 고급 형태의 언어로써 내가 모르는 사람, 즉 소설 속 주인공과 친구가 됨으로써 다양한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문학의 위대함이 있는 거죠.”

 


   “모국어 모르면 상상력 한계 온다”

 

―이어령의 천재성은 모두 문학의 자양분을 통해 키워진 것이라고 봐도 되는지요. ‘이어령의 뿌리는 문학이다’라는 말이 맞습니까?

 

“언어를 소재로 한 상상력과 창조력이 저의 기반인 것은 맞습니다. 제가 올림픽 때도 ‘벽을 넘어서’라는 카피를 만들었잖아요? 제 아이디어는 전부 휴머니티에서 나와요. 그래서 제가 기독교 신자임을 선언했을 때 많은 논란이 있었죠. 저는 인간의 언어를 믿고, 인간이 살아 있는 삶 속에서 지적인 게임을 하는 사람이잖아요. 기독교를 믿으면, 제가 가지고 있는 상상력이나 창조력은 다 흡수되어 없어지는 겁니다. 지적인 작업이 영적인 작업으로 변환되는 거죠. 그동안 저는 좋은 붓으로 책을 집필했잖아요. 기독교인이 되는 순간, 저는 붓이 돼버리고 신이 쓰는 입장이 돼버리죠. 이 때문에 아직까진 함부로 굳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못 합니다. 문학은 아무리 종교를 다루고 있다 하더라도 언어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영역이지 신의 영역은 아니지 않습니까?”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톨스토이는 말년에 종교에 귀의하며 금욕생활을 했습니다. 이때 인류 사회에 있는 모든 예술, 즉 음악·미술·문학 등은 없어져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모두 다 허구며 인간의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해악이라는 거죠. 이 고문님도 뒤늦게 기독교에 귀의하셨는데 톨스토이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예술이 감각이라는 물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음악은 음이라는 물질 없이는 전달이 안 됩니다. 또 눈이라는 시각적인 것이 없으면 미술이 존재하지 않고, 문학은 언어, 즉 말이라는 것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아요. 하지만 종교·철학·윤리는 감각을 초월한 거죠. 톨스토이는 기독교적 신앙의 세계에서 문학을 바라본 것입니다. 새가 하늘을 향해 날아가잖아요? 예술가는 세속에 얽매어 있지 않고 날아가긴 하는데, 꽁무니는 하늘을 향하게 하고 눈은 지상을 보고 거꾸로 날아가는 새인 거죠. 성자들은 꽁무니를 하늘로 치켜세우고 하늘을 보며 날아가는 새죠. 만약 작가들이 성자처럼 날아다닌다면 삶과 죽음, 속이고 속는 리얼리티를 배제한 문학이 만들어지는 거죠. 그렇게 되면 문학이 재미있을까요? 저는 아직 꽁무니는 하늘을 보고 있는데 눈은 지상을 보고 있어요. 그래서 인간과 신의 중간 지점에서 어정쩡하게 있는 겁니다.”

 


―선진 유럽은 어릴 때부터 인문학 공부를 시키고 있습니다. 공교육 현장에서의 인문학 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문학은 사라지고 대중 속에 여과되었지만 그럴수록 공교육에서 더 가치 있는, 시·공간을 넘어서는 가장 본질적인 언어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문학은 그 민족의 정신을, 민족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공교육을 하는 학교는 아이들에게 우리 언어로 된 인문학을 가르쳐야 해요.”

 


―이 고문님이 말씀하신 대로라면 오히려 문학은 ‘세계화’와는 좀 거리가 먼 듯하네요.

 

“문학은 언어 속에 그 문화 특유의 토속성과 색깔을 간직함으로써 예술적 가치를 가집니다. 이 때문에 세계가 하나가 될수록 점점 더 국지화의 길을 걷게 됩니다. 어떤 번역기가 나와도 그 특수한 언어의 고유한 맛, 생명력은 못 살립니다. 세계화·글로벌화라는 말은 문학의 이념적 좌표가 아닙니다. ‘그로컬화’가 옳은 것입니다. 21세기의 문학은 세계화와 지역화, 글로벌화와 로컬화가 복합되는 ‘그로컬화(Glocalization)’의 역학 속에서 발전하는 것이죠.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소설을 읽을 때 우리가 남미를 느끼는 것처럼요. 박경리나 박완서의 소설을 읽으면서 한국을 느끼고요. 자신의 모국어로 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상상력의 한계가 생길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공교육에서의 언어 교육, 인문학 교육이 중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시대의 변화, 문화나 더 세부적으로 문학의 변화까지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변화라는 흐름은 뭔가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예전에 서태지의 랩이 처음 나왔을 때 새롭다거나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은 아직 이미자의 트로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패러독스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동일하게, 같이 변한다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것입니다. 문학의 변화도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고 그 점진적 변화 속에서 답을 찾아가는 것이 인류의 몫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죠.”

 

 

 

                                                             <자료 : 월간중앙(박미숙기자)>

한국미디어 2011.02.22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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