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의 미공개 시편들] 소설가 이광수의 블라디보스토크 10일 체류
김윤식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새로 발견된 시편들을 쓴 5년 후인 1919년 무렵의 춘원. 당시 춘원의 나이 28세였다.
정 깃든 교육 위해 모국어 깊은 샘 파기
이광수의 젊은 날의 시 몇 편이 새로 발굴됐다. 그가 망국의 한을 안고 만주를 떠돌 무렵인 1914년 연해주에서 발행되던 <권업신문>에 발표한 시편들이다. <권업신문>에 대해서는 이미 몇몇 학자가 검토한 바 있으나, 그에서도 빠진 작품들이다. 그 시편들의 의미를 살려본다. 외배[孤舟]는 당시 이광수가 쓰던 호다.
<권업신문(勸業新聞)>은 연해주의 한국 교민 단체인 권업회의 기관지로 1912년 5월5일자로 창간되어 1914년 9월1일자로 폐간(총 125호)된 석판 네 면의 신문이며 김립·김하구·윤해 등이 그 중심 인물이었다. 권업회 및 <권업신문>에 관해서는 이미 전문가들에 의해 연구가 이루어졌다(박환, <권업회의 조직과 활동> <러시아 한인 민족운동사>, 탐구당, 1995). 이 신문에 실린 이광수의 논설 <독립 준비하시오>에 관해서도 이미 검토가 이루어졌다(최기영, <이광수의 러시아 체류와 문필활동> <민족문학사연구> 제9호, 1996).
그렇기는 하나 <권업신문>에 발표된 몇 편의 시에 관해서는 빠진 부분이 아직 남아 있다. 이 빠진 부분이 그 나름으로 갖는 의미는 이광수가 지사적 논객이자 문사인 데서 찾아진다. 연구자들이 이광수의 논설에만 주목하고 시편을 검토함에 소홀한 것은 아마도 논객으로서의 이광수에 비중이 더 갔기 때문이었을 터다. 그렇기는 하나 이광수를 한낱 문사로 바라본다면 사정이 조금 달라질 수 있다.
이광수의 문필 활동은 다양한 방면에 이르고 있다. 그가 문필업에 뜻을 세울 적에 내세운 명분 가운데 으뜸 항목은 지·덕·체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교육에서 소홀히 한 영역의 발견이었다. 그것은 곧 정(情)의 교육이었다. 초기 논설 <금일 아한청년과 정육>(1910) 및 <문학의 가치>(1910) <문학이란 하오>(1916)에서 한결같이 그가 강조한 것은 근대교육에서 빠져 있는 정의 교육 문제에 놓여 있었다.
논객 아닌 문사 이광수 모습
문학이 이를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 이광수의 전 생애를 지배한 기본항이었다. 이러한 시선에서 볼 때 <권업신문>에 실린 몇 편의 시편들은 비록 사소해 보여도 그에게는 논설 못지않은 의의가 있었다고 볼 것이다. <권업신문>에는 앞에서 지적된 논설 외에 <이샹타> <꼿을 꺽거 관을 겻> <나라생각> 및 시조 네 편이 실려 있다.
이들 시편이 갖는 의의는 새삼 무엇인가. 다음 두 가지 면에서 고찰해 본다면 그 나름의 의의가 부여되지 않을까 한다. 첫째,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지역 한인의 삶의 방식과 이광수의 관계라는 전체성 속에서 바라보기. 이광수는 왜 해삼위에 갔고, 거기서 무엇을 했고 또 느끼고 보았을까. 이런 물음은 이광수의 개인적 과제이자 동시에 해삼위 동포에 관련된 사항이다.
오산학교 교사이던 이광수가 이런저런 이유로 압록강을 건너 상하이(上海)로 간 것은 1913년 겨울이었다. 거기서 그는 도쿄(東京)에서 함께 공부한 홍명희·문일평·조소앙 등을 만났고, 그들은 모두 궁핍 속의 무위도식 상태였다. 그 무렵 상하이 유력인물인 예관 신규식의 요청으로 이광수는 상항(샌프란스시코)에서 내는 교포신문 <신한민보>의 주필로 가게 되었다. 그는 예관으로부터 두 통의 소개장을 받았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월송 이종호와 지린성 무링(穆陵)에 있는 추정 이갑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이광수가 보름 남짓 머무른 상하이를 떠나 러시아 함선 포르타와호를 타고 쇄빙선이 얼음을 깨기를 기다려 안개 짙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닿은 것은 1914년 1월 초순이었다. 말 두 필이 끄는 썰매로 한인마을 신한촌으로 향했고, 그를 맞이한 것은 권업회 회원 김립·김하구·윤해 등이었다. 그들을 통해 이종호를 만날 수 있었다.
문사로 알려진 이광수인지라 <권업신문>에 기고해줄 것을 부탁받았거나 아니면 자진해서 그가 기고했거나 둘 중 하나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어느 쪽이든 문사인지라 그는 논설과 거의 같은 비중으로 시가도 기고했을 터이다. 왜냐하면 정육론(情育論)이야말로 그의 글쓰기의 원점인 까닭이다.
둘째, 정육론의 방법론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있었다는 점. 방법론이라고 했거니와 그것은 정이 깃드는 가장 확실하고도 깊은 샘이 모국어라는 사실의 인식에 다름 아니었다.
소설도 그러하지만 시가에 있어서는 모국어의 호소력에 기대는 길이야말로 정에 호소하는 지름길임을 이광수만큼 확실히 알고 있던 사람은 당시로서는 오직 <시문독본(時文讀本)>의 편자 최육당이 있을 뿐이었다.
이 모국어의 호소력의 어떠함을 새삼 날카롭게 하는 것이 한자와 서양어였다. 한자나 서양어란 관념적 성격의 것이어서 정육론에서는 제일 난처한 걸림돌이었을 터다.
그의 시가는 이 문제를 염두에 둘 때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된다. 감정에 호소하는 목적에 이를 수 있기 위해서는 그 길이 최상이었다. 인간의 정이야말로 강요 사항이 아닌 자연스러운 마음의 흐름인 까닭이다. 다음 글은 그가 해삼위에서 본 모국어의 존재 방식의 어떠함을 드러낸 것으로, 그의 문학을 이해함에 한 가지 지표라고 할 것이다.
‘기차는 부술기, 전신은 쇠줄글, 여행권은 몸글, 차표는 글. 이런 것은 순 국어로 지은 것이니, 그 얼마나 총명한 조어인고. 그 밖에 우리말로 번역하기 어려운 러시아말은 발음만을 국어화하여서 빠라호드(기선)는 뾰로대, 스피치카(성냥)는 비지깨, 사뽀기(장화)는 사바귀, 이 모양이었다. 깐또라(사무보는 데)는 건드리, 구베르나뜨르(도장관)는 구부렁낙지, 대승정은 승감사라고 부르는 것 같은 것은 참으로 유머다. 만일 우리에게 한문이란 것이 없었던들 이곳 동포들이 한 모양으로 순수한 우리말로 새 물건과 새 일의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나의 고백>)
모국어 감각을 되살려
여기 소개되는 시편들이 비록 사소한 것이기는 해도 모국어에 대한 감각을 놓치지 않았다고 볼 것이다. <이샹타>는 쇄빙선의 뒤를 따라 안개 낀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가 본 겉으로 드러난 동포의 모습과 그 내면에 지닌 조선적 영혼을 함께 노래한 것이며, <꼿을 꺽거 관을 겻>에 오면 4?4조 리듬에 모국어의 감각으로 화관을 쓸 수 있는 자격을 읊었다. <나라생각>도 이에 이어졌다. 시조의 경우 ‘달군 못’의 노래는 회고적 시조 특유의 한계를 넘어서 인상적이기까지 하다.
이광수가 해삼위에서 머무른 것은 10일 정도로 추정된다. 그 다음 그의 행보는 무링에 칩거해 있는 민족지도자 이갑에게로 향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한 달간 머무르며 이갑의 비서노릇을 했고, 여기서 비로소 그는 자기를 조종한 인물이 상하이의 예관, 해삼위의 월송, 그리고 무링의 추정임을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졸저, <이광수와 그의 시대(1)>, 제4부(2), 솔).
이갑의 종용으로 이광수는 시베리아 치타주의 수도 치타에 있는 교포 신문 <대한인정교보> 편집인으로 갔다. 1914년 2월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그가 이곳을 떠나 귀국한 것은 1914년 8월이었다. 훗날 그가 바이칼호를 무대로 유명한 장편 <유정>(1933)을 쓴 것은 이런 체험에서 가능했다.
월간중앙2005년 01월호 | 입력날짜 200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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