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시대 작가들] ‘분지’ 필화사건 소설가 남정현 |
[2007.04.22 17:38]
스탈린 사후, 철의 장막 소련에서 움튼 '모스크바의 봄'은 1954년 발간된 일리야 에렌부르크의 소설 제목에서 비롯되었다. 이후 '봄'이라는 생명과 희망의 이미지는 20세기 내내 정치 변혁의 역동성을 대변해왔다. 1968년에는 '프라하의 봄'이 있었다. 독재와 억압의 장막을 걷어낸 변혁기의 '60년대 사람들'을 소련에서는 '쉬지샤트니키'로 불렀다. 한국 현대사에 민주화 물꼬를 튼 4·19세대는 한국판 쉬지샤트니키인 셈이고 그런 의미에서 소설가 남정현(74)은 한국의 에렌부르크로 부를 만하다. 4·19 혁명기념일을 사흘 앞둔 16일, 인수봉이 내다보이는 서울 수유리의 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1960년대 초, 미국이란 존재는 내게 있어 왠지 혐오의 대상이었지요. 힘만이 곧 선이요, 정의라고 맹신하는, 험상궂은 밀림의 왕자처럼 보이더군요. 우리와 우방이 아니란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5·16군부세력과 결탁하여 민족적 자주권을 회수하려는 4·19 민주세력을 철저하게 짓밟는 길로 들어선 것이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동방의 초소를 지켜주는 일종의 효과적인 도구로 한민족을 헐값에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분지(糞地)'를 구상하기에 이르렀어요." 그에게 항상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1965년 '현대문학' 3월호에 발표한 단편 '분지'로 인한 필화사건이다. 발표 당시에도 독특한 문체와 현실 풍자로 화제가 되기는 했으나 정작 문제가 크게 불거진 것은 몇 달 뒤의 일이었다. '분지'는 주인공 홍만수의 어머니가 항일 독립운동가인 남편을 마중 나갔다가 미군에게 강간당해 미치광이가 되어 결국 죽고 만다는 줄거리. 이 작품에서 미군으로 상징되는 미국은 평화의 수호자는커녕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폭력적인 지배자로 그려진다. '분지'가 북한 신문 '조국통일'에 실리자 중앙정보부는 남정현을 나꿔챘다. 수사관의 주먹다짐 속에서 그는 원고지 120장 분량의 '분지'를 한줄 한줄 읽어나갔다. "단어 하나 하나가 함정이요 낭떠러지였지요. '네가 쓴 게 아니라 북에서 온 원고가 아니냐'고 추궁할 때는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남정현의 구속에 항의하는 비평을 언론에 기고한 평론가는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 영문과에서 막 강의를 시작한 28세 백낙청이었다. "수사당국도 이 소설이 북한의 '조국통일'에 전재되었다는 사실에 더 큰 자극을 받은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대한민국의 대부분 국민은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는 북한의 일개 신문이 우리 문단과 사회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에 시민들은 불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967년 선고유예 판결로 풀려난 지 꼭 40년. 반미소설의 발원이라 할 남정현은 한·미자유무역협상(FTA) 타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FTA는 시장원리에 입각한 것이라지만 그것은 약육강식을 토대로 한 원리지요. FTA는 일종의 경제통합인데 경쟁 상대가 되는 나라끼리 통합이라면 몰라도 이대로는 늑대와 토끼의 관계일 뿐이죠. 한쪽은 쫓고 한쪽은 쫓기고. 한·미간에 이미 군사통합은 이뤄진 것이고 이제 경제 통합을 거쳐 언어통합의 시대가 올수도 있습니다. 먹고 배설하고 노래하고 춤추고…. 모든 것을 미국식으로 하자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민족의 다양성이 무너지는 것이죠." 다시말해 '우리도 미국처럼'이란 슬로건을 걸고 뛰게되면 지구는 초라해지고 만다는 얘기다. "쇠고기라도 좀 싸게 배불리 먹자"는 찬성의 목소리도 있지 않느냐고 하자 그는 슬며시 웃음 지었다. "좋은 쇠고기를 인류에게 공급하는 데 한·미가 함께 노력하자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소를 개방하면 우리 소는 없어지고 말아요. 한우(韓牛)는 동물원에서나 보게 될지도 몰라요. 시장원리는 이렇듯 어떤 종(種)의 멸종을 초래할 수 있어요." 그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시장원리에 저항하는 패러다임으로 '인간의 원리'를 강조했다. "시장원리를 동경하는 문명을 제어할 수 있는 인간이 예술가입니다. 예술가들은 인간의 원리에 서서 작업해왔고 앞으로도 그래야 합니다. 약강이 공존할 수 있는 세계가 곧 인간의 원리가 작동하는 세계인 것이죠. 예술가들은 약강이 공존하는 화해 체제를 추구해야 합니다." 20세기 초, 일본 시대를 살다가 이제는 미국 시대를 살고 있을 뿐이라는 그는 "요즘 세계사의 중심축이 바뀌는 마찰음이 들린다"고 말했다. "북·미 회담의 가능성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미국이 북한을 무력으로 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약육강식의 원리에 의해 작동되는 미국의 힘이 약해진 것이죠. 유엔도 미국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만들었는데 이제는 미국이 유엔을 통제하지 못하잖아요." 미국적 제국주의가 허물어지는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설파한 그는 예술가라면 무릇 축이 변하는 소리를 먼저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약육강식의 원리를 버리지 않으면 미국 역시 살수 없는게 현실입니다. 작가는 이렇듯 문명사적으로 세계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글·사진=정철훈 전문기자 chjung@kmib.co.kr |
반세기 미 전향작가 남정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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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4.22 11:04] | ||
[쿠키 문화] 1933년 충남 당진 태생인 남정현은 갓난아이 때부터 목숨과 관련된 대소 사건을 겪었다. 두 살 때 다나카라는 일본인이 아기가 이쁘다며 공중에 번쩍 던졌다가 놓쳐 입주위에 심한 타박상을 입었다. 입안이 퉁퉁 부어 몇 달이나 젖을 먹지 못했는데 신통하게 살아났다. 네 살 때는 누나가 요에 태워 친구와 함께 흔들다가 떨어뜨려 다시 얼굴이 피범벅이 되었다. 40도 가까운 고열속에 수개월을 헤맸는데도 죽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칡뿌리를 캐는 광경을 구경하다가 곡괭이에 뒤통수가 찍혔다. 닷새가 되어도 깨어나지 않자 장례를 준비하던 중, 부스스 눈을 떴다. 중학교때는 폐결핵 장결핵 임파결핵 등 수종의 결핵군이 일시에 그를 덮쳤다. 뼈만 남은 가사상태에서 3년동안 누워지냈다. 그에게는 학교에 다닌 기억이 별반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겨우 39㎏에서 40㎏을 오가는 자그마한 몸에 역사의 무게가 새겨져 있다. ‘분지’ 사건후 1974년 그는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남산 정보부 지하실에 끌려간다. “그때 어찌나 얻어맞았는지 잇몸이 주저앉더군요. 74년 8월 15일 육영수씨가 사망하자 박 정권은 긴급조치를 해제하는 유화책을 썼는데 그 바람에 기소를 못하고 석방하더군요.” 서대문형무소에서 7개월 복역하는 동안 그에게는 단 한 차례의 면회도 허용되지 않았다. 유일한 위로의 대상이 미전향장기수였다. “그들에게서 인간의 신념이랄까, 양심을 배웠지요. 인간의 양심이란 외부의 폭력 앞에서도 내가 지킬 것은 지킨다는 것이죠. 그들을 통해 나도 인간이 된 것이죠.” 그와 함께 4.19묘역을 찾았다. 절친한 친구였던 박봉우(1934∼90)시인과 자주 찾았다는 김주열 묘 앞에 앉았다. 잠시 감회에 젖는가 싶더니 눈동자에 살폿 물기가 번졌다. “하늘은 아름다운 사람을 먼저 데려가는 모양이야. 아내 역시 11년전에 세상을 떴지요.” 1958년 등단, 28세때인 1961년 ‘너는 뭐냐’라는 작품으로 사상계 주관의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신망 두터운 작가였다. 하지만 ‘분지’ 이후 그에게는 원고 청탁이 들어오지 않았다. 아내 신순남씨가 생계를 꾸렸다. 신씨는 KBS의 번역가로 30여년을 일하는 동안 ‘주말의 명화’ 등을 담당했다. “어머니와 아내가 나 땜에 참 고생이 많았어요. 어머니는 항시 기적을 좇는 신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곤 했지요. 언제나 지금 막 사선을 헤치고 천신만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신비한 생명체처럼 말이죠.”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4·19묘역으로 번져들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정철훈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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