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은 전근대적 지대추구체제"
재반론 : 이태진 교수의 비판에 답한다
김재호 전남대
편집자주 : 지난호에 이태진 교수가 실례를 들며 주장한
대한제국의 '근대화 치적'에 대해 김재호 교수가 '사실의 부족, 해석의 과잉'이라는 반박문을 또 보내왔다. 김 교수는 이번 글에서 고종시대에
해당하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는 장기역사적 관점에서 인구, 산업, 자원, 정치 등을 볼 때 구조선이 소멸되는 '저점'에 해당될 뿐이라는 주장을
여전히 고수한다. 그와 반면 관전평을 보내준 김동택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고종의 보수적 개혁시도가 무시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지지기반' 부족으로 인해 내적 붕괴의 조짐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한다며 이태진 교수에게 주문하며, 김재호·이영훈 등 경제사학자들에게는 식민지
근대화를 산업화와 등치시켜선 곤란하며, 또한 근대화가 갖는 폭압적 성격을 고려에 넣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근대=발전'의 존재여부를 놓고 벌이던
'내발론'과 '근대화론'의 대립이 김동택 교수가 가세함으로써 '근대의 성격', 즉 위로부터의 개혁과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라는 중층적 관점이
보태지면서 좀더 복합화되고 있다. 다음 호에는 이영훈 서울대 교수(경제사)가 '民國'개념과 '광무양전'을 둘러싼 그간의 논쟁에
대한 회고의 글을 보내오기로 했다. <편집자주>
김재호 / 전남대 경제사
지난 글에서 본인은 왕현종 교수의 ‘근대화 지상주의’라는 비판에 대해 오랜 기간 근대화의 증거를 찾고자 하며 왜곡 없는 가상의 근대를 꿈꾸고 있다는 점에서 내재적 발전론에 그 이름이 합당하며, 가보지 않은 길보다는 근대경제성장 과정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요지의 주장을 했다. 나아가 제도의 연속성을 숙고할 때 식민지시대에 개시된 근대경제성장의 역사를 소거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장기역사에 통합해야만 한다고 주장, 아니 호소했다. 이에 대해 이태진 교수는 근대경제성장이 식민지시대가 아니라 대한제국기에 개시된 바, 근대경제성장은 “가보지 않은 길”이 아니라 “이미 들어선 길”이었으며 일본의 무력에 의해서 좌절된 것이었다고 반박했다.
경제사학계, 연구성과 수용 반가워 당부를 평하기 전에 이 교수가 제시한 증거들이 그간 경제사 연구의 성과라는 점에서 그것만으로도 논쟁의 보람을 느낀다. ‘맛질의 농민들’,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이하 ‘조선후기’)에 수록된 논문들을 인용하고 있으니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치부해 무시로 일관하던 국사학계에도 따듯한 변화가 시작된 듯해 공동연구에 미력을 보탠 본인으로서 기쁨이 없을 수 없다. 전체 경제의 동향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국민소득의 추계가 가능한 것은 식민지시대부터이기 때문에 경제사 연구자들은 그간 여러 고문서로부터 인구, 물가, 임금, 지대, 이자율 등 장기에 걸친 주요 시계열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렇게 얻은 소중한 시계열에서 19세기말 20세기초의 반전이 관찰되는 것은 이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다. 그런데, 대한제국기에 근대경제성장이 개시됐다는 증거로서 이러한 시계열을 적시한 것을 보면, 동일한 시계열이 보여주고 있는 전환점 이전의 19세기의 위기 상황에도 동의해마지 않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또 다른 과잉해석일 뿐 결론부터 말하면, 이 교수가 인구, 지대, 임금의 시계열이 보여주고 있는 반전을 두고 그것을 대한제국기에, 더욱이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의 결과, 근대경제성장이 개시된 증거로서 해석하는 것은 이 교수의 ‘고종시대’ 연구에서 보이는 일관된 경향인 “사실의 부족과 해석의 과잉”의 또 다른 사례라는 것이다. 우선 반전의 시점이 모두 대한제국기(1897~1904)에 국한된 것도 아니며 반전이 우연히 같은 시기에 겹친다고 하더라도 그 원인을 바로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에서 찾는 것도 근시안적인 것이다. 오히려 17세기부터 20세기 후반까지를 시야에 넣은 장기적인 조망 하에서 19세기말과 20세기초의 세기전환기는 그 저점에 해당하는 시기이며, 더 넓게 보면 개항기 전체가 거대한 전환기로서 이러한 전환 위에 1905년 이후의 식민지화과정을 통해 대한제국의 황실재정을 정점으로 한 ‘구체제’가 해체되고, 토지조사사업으로 대표되는 근대적 재산권제도가 확립됨으로써 근대경제성장이 개시될 제도적 환경이 갖춰졌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본인이 지난 글에서 주장했듯이 식민지시대를 우리의 장기역사에 통합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해 근대경제성장의 모든 조건이 식민지시대에 돌연히 제국주의에 의해 창조됐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것이야말로 비역사적일 것이다. 이하 왜 “해석의 과잉”인지 몇 가지 좀더 구체적으로 답한다.
근대화 근거 취약, 오히려 왕정부패에 주목해야 이상과 같이 시계열의 반전은 전면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더욱이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의 성과로 해석해야할 근거가 취약하다. 개항이후 새로운 문명과의 충돌, 개방경제로의 이행, 새로운 지식, 자본, 기술의 도입, 갑오개혁으로 대표되는 제도의 변화 등 실로 무수한 요인이 축적돼, 겨우 밑바닥을 통과하기 시작한 경제가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인가에 있어서 제도적 환경은 결정적인 조건이지만, 낙관적인 전망을 하기에 대한제국의 제도는 지대추구적 성격이 너무 강했다. 근본적으로 한 사회의 경제성장의 전망은 그 사회가 자원을 ‘생산적’인 활동에 사용하는 정도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부를 창출하는 생산자의 재산권이 보호되고 지대추구활동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가 갖춰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오히려 지대추구 체제를 방어하고 강화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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