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대한제국은 전근대적 지대추구체제", 이태진 교수의 비판에 답한다

이강기 2015. 10. 4. 10:09

"대한제국은 전근대적 지대추구체제"

 

재반론 : 이태진 교수의 비판에 답한다

 

                       김재호 전남대

 

편집자주 : 지난호에 이태진 교수가 실례를 들며 주장한 대한제국의 '근대화 치적'에 대해 김재호 교수가 '사실의 부족, 해석의 과잉'이라는 반박문을 또 보내왔다. 김 교수는 이번 글에서 고종시대에 해당하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는 장기역사적 관점에서 인구, 산업, 자원, 정치 등을 볼 때 구조선이 소멸되는 '저점'에 해당될 뿐이라는 주장을 여전히 고수한다. 그와 반면 관전평을 보내준 김동택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고종의 보수적 개혁시도가 무시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지지기반' 부족으로 인해 내적 붕괴의 조짐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한다며 이태진 교수에게 주문하며, 김재호·이영훈 등 경제사학자들에게는 식민지 근대화를 산업화와 등치시켜선 곤란하며, 또한 근대화가 갖는 폭압적 성격을 고려에 넣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근대=발전'의 존재여부를 놓고 벌이던 '내발론'과 '근대화론'의 대립이 김동택 교수가 가세함으로써 '근대의 성격', 즉 위로부터의 개혁과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라는 중층적 관점이 보태지면서 좀더 복합화되고 있다. 다음 호에는 이영훈 서울대 교수(경제사)가 '民國'개념과 '광무양전'을 둘러싼 그간의 논쟁에 대한 회고의 글을 보내오기로 했다. <편집자주>

 

김재호 / 전남대 경제사

 

지난 글에서 본인은 왕현종 교수의 ‘근대화 지상주의’라는 비판에 대해 오랜 기간 근대화의 증거를 찾고자 하며 왜곡 없는 가상의 근대를 꿈꾸고 있다는 점에서 내재적 발전론에 그 이름이 합당하며, 가보지 않은 길보다는 근대경제성장 과정의 실상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요지의 주장을 했다. 나아가 제도의 연속성을 숙고할 때 식민지시대에 개시된 근대경제성장의 역사를 소거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장기역사에 통합해야만 한다고 주장, 아니 호소했다. 이에 대해 이태진 교수는 근대경제성장이 식민지시대가 아니라 대한제국기에 개시된 바, 근대경제성장은 “가보지 않은 길”이 아니라 “이미 들어선 길”이었으며 일본의 무력에 의해서 좌절된 것이었다고 반박했다.

 

경제사학계, 연구성과 수용 반가워

당부를 평하기 전에 이 교수가 제시한 증거들이 그간 경제사 연구의 성과라는 점에서 그것만으로도 논쟁의 보람을 느낀다. ‘맛질의 농민들’, ‘수량경제사로 다시 본 조선후기’(이하 ‘조선후기’)에 수록된 논문들을 인용하고 있으니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치부해 무시로 일관하던 국사학계에도 따듯한 변화가 시작된 듯해 공동연구에 미력을 보탠 본인으로서 기쁨이 없을 수 없다. 전체 경제의 동향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국민소득의 추계가 가능한 것은 식민지시대부터이기 때문에 경제사 연구자들은 그간 여러 고문서로부터 인구, 물가, 임금, 지대, 이자율 등 장기에 걸친 주요 시계열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렇게 얻은 소중한 시계열에서 19세기말 20세기초의 반전이 관찰되는 것은 이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다. 그런데, 대한제국기에 근대경제성장이 개시됐다는 증거로서 이러한 시계열을 적시한 것을 보면, 동일한 시계열이 보여주고 있는 전환점 이전의 19세기의 위기 상황에도 동의해마지 않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조선후기’에서 보여주는 시계열들을 일별하면 이 교수가 지적했듯이 1890년경부터 多産多死로부터 多産少死로의 인구변천이 관찰되며, 미숙련노동자의 임금은 17세기중반부터 하락해 1903년부터 상승으로 반전했다. 그리고 논 가격은 1900년을 경계로 상승으로 반전했으며, 노동생산성을 반영한다고 생각되는 지대수준은 1883~85년경 또는 1895~96년경을 경계로 상승하는 것을 볼 수 있다(일부지역은 1900년대 지속적 하락). 이러한 반전의 원인에 대해서 아직 누구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현재의 연구상황이다. 또한 희소한 자료로부터 얻은 시계열이 전체 경제의 추세를 정말 대표할 수 있느냐 하는 근본적인 의문으로부터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본인 역시 19세기 기근의 감소추세와 지대율의 급격한 하락이 시사하는 농업생산성의 하락 간의 양립가능성에 대해 고심한 바 있다. 이와 같이 ‘19세기 위기’와 그 반전을 시사하는 다양한 시계열의 의미들은 이제부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 해명을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교수의 지적은 생각을 정리할 좋은 기회가 됐다.

 

하지만, 또 다른 과잉해석일 뿐

결론부터 말하면, 이 교수가 인구, 지대, 임금의 시계열이 보여주고 있는 반전을 두고 그것을 대한제국기에, 더욱이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의 결과, 근대경제성장이 개시된 증거로서 해석하는 것은 이 교수의 ‘고종시대’ 연구에서 보이는 일관된 경향인 “사실의 부족과 해석의 과잉”의 또 다른 사례라는 것이다. 우선 반전의 시점이 모두 대한제국기(1897~1904)에 국한된 것도 아니며 반전이 우연히 같은 시기에 겹친다고 하더라도 그 원인을 바로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에서 찾는 것도 근시안적인 것이다. 오히려 17세기부터 20세기 후반까지를 시야에 넣은 장기적인 조망 하에서 19세기말과 20세기초의 세기전환기는 그 저점에 해당하는 시기이며, 더 넓게 보면 개항기 전체가 거대한 전환기로서 이러한 전환 위에 1905년 이후의 식민지화과정을 통해 대한제국의 황실재정을 정점으로 한 ‘구체제’가 해체되고, 토지조사사업으로 대표되는 근대적 재산권제도가 확립됨으로써 근대경제성장이 개시될 제도적 환경이 갖춰졌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본인이 지난 글에서 주장했듯이 식민지시대를 우리의 장기역사에 통합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이라고 해 근대경제성장의 모든 조건이 식민지시대에 돌연히 제국주의에 의해 창조됐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오해하는 것이야말로 비역사적일 것이다. 이하 왜 “해석의 과잉”인지 몇 가지 좀더 구체적으로 답한다.


첫째, 지대량이 18세기수준을 회복하는 것은 1920년대 이후였다. 경주지방의 경우에 18세기중반에 1두락 당 벼10~12두 하던 지대가 1900년대에도 4~5두 정도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대체로 동학농민전쟁기간을 최저점으로 상승하기 시작했으나 토지조사사업이 끝나고 산미증식계획이 시작되는 1920년대가 돼서야 18세기말의 수준을 회복했던 것이다. 전환의 원인도 이 교수가 주장하듯 대한제국의 정책, 즉 내장원이나 수륜원의 개간 내지 수리시설 증설이었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둘째, 시장경제의 발달정도를 보여주는 높은 수준의 시장통합이 이뤄진 것은 식민지시대 이후였다. 18세기에 국가의 재분배 시스템에 힘입어 상당한 수준으로 통합돼 있던 미곡시장은 19세기에 분열돼 지역간 동조성이 크게 낮아졌으며 개항이후에도 개항장의 통합효과는 직접적 배후지에 국한된 것이었다. 본격적인 시장통합은 식민지기에 교통, 통신의 기반이 갖춰지면서 시작됐다. 셋째, 높은 수준에서 경직적이었던 이자율은 1920년경부터 하락하기 시작했다. 농촌지역에서 관행되던 이자율은 1910년대까지도 연 40%수준으로 장기 경직적으로 유지됐으며, 이자율이 낮아지고 지역간 이자율의 동조성이 강화되는 것은 1920년경부터였다. 이자율은 자본시장의 상황을 대표하는 지표로서 낮은 이자율이 산업발전에 유리한 조건이 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넷째, 농업생산성과 밀접한 관련을 보여주는 산림황폐화가 저지됐던 것은 식민지시대 이후였다. 18~19세기에 급격히 진행된 산림의 황폐화를 저지할 수 있는 제도가 갖춰지고 체계적인 조림정책이 시행되는 것은 ‘천황’의 기일에 맞춰 식목일이 제정되고 임야조사사업이 시작됐던 식민지시대이후였다.

 

근대화 근거 취약, 오히려 왕정부패에 주목해야

이상과 같이 시계열의 반전은 전면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더욱이 대한제국의 근대화 정책의 성과로 해석해야할 근거가 취약하다. 개항이후 새로운 문명과의 충돌, 개방경제로의 이행, 새로운 지식, 자본, 기술의 도입, 갑오개혁으로 대표되는 제도의 변화 등 실로 무수한 요인이 축적돼, 겨우 밑바닥을 통과하기 시작한 경제가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인가에 있어서 제도적 환경은 결정적인 조건이지만, 낙관적인 전망을 하기에 대한제국의 제도는 지대추구적 성격이 너무 강했다. 근본적으로 한 사회의 경제성장의 전망은 그 사회가 자원을 ‘생산적’인 활동에 사용하는 정도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부를 창출하는 생산자의 재산권이 보호되고 지대추구활동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가 갖춰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오히려 지대추구 체제를 방어하고 강화시키고 있었다.


첫째, 대한제국기에 황실재정은 팽창해 내장원의 수입은 1904년에 탁지부가 관장하는 정부세입의 과반을 점할 정도로 팽창했다. 국왕직속기관으로 정부의 관할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물론 관제상 상급관청인 궁내부의 감독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재정의 절반은 예산제도 밖에서 국왕의 재산으로 관리됐던 것이다. 내장원의 ‘會計冊’을 보면 거의 대부분의 지출이 국왕이 사용했다는 의미의 ‘內用’인데, 다소 과장하면 대한제국의 경제는 이 국왕에 집중된 자금을 둘러싼 격렬한 지대추구 경쟁으로 많은 부분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쉽게 말해 국왕에게 집중된 국가재원을 어떻게 나눠 먹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근본문제였으며, 본인은 개방경제로의 이행과 갑오개혁의 충격으로 인해 해체기로에 있었던 왕실관련 조직과 특권상인, 그리고 황제권력을 배경으로 새롭게 등장한 신흥계층이 국왕을 둘러싸고 거대한 재분배 경제를 형성했으며 이들을 지탱하기 위해서 내장원에 집중된 국가재원의 대부분이 인건비와 사치재의 구입과 선물 등의 희사로 낭비됐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궁궐건설 등 명분이 분명한 용처에는 아까운 국왕의 자금을 쓰지 않고 국가재정으로 충당했음은 물론이다).


둘째, 왕실이 특권의 공급처였으며 국왕이 매관매직의 중앙에 있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지방수령 등의 관직에는 공공연히 정가가 붙어 판매됐으며 여기에 필요한 자금의 대부를 전문으로 하는 자까지 생겼다. 이렇게 된 것은 부를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권력이 있어야 하는 사회였기 때문이었다. 영리활동을 통해서 부를 획득한 자들은 자신의 부를 지키고 더 많은 부를 획득하기 위해 지방수령이 되고자 했으며, 내장원의 봉세관으로 활동했던 자로서 거부를 축적했던 사례도 잘 알려져 있다. 지방재정으로 백성들에게 거둬들인 조세금은 사적으로 유용돼 상업자본으로 투하되는 것이 관행이 됐으며, 이에 힘입어 당시의 재산가들은 대개 관리였다. 이 과정에 만연한 관료사회의 부패와 관기문란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으며, 유용돼 몇 년이 지나도 탁지부에 납부되지 않는 세금으로 재정운영은 극히 곤란하게 됐다. 대한제국기에 많은 회사들이 설립됐지만, 황실로부터 허가를 받은 다수의 회사는 진정한 산업활동이나 상업활동이 아니라, 유통을 독점해 군소상인들을 수탈하는 收稅會社, 都賈會社들이었다. 갑오개혁기에 이런 특권회사를 폐지하고 객주들의 수세권을 폐지했지만, 대한제국기에는 황실권력을 배경으로 특권이 복구됐다. 더욱이 특권의 부여가 중상주의 정책의 체계성을 결여해 상업자본의 축적과 국가재정수입의 증대에도 실효가 없었다.


요컨대 취약한 재산권으로 인해 불안정하게 영위되는 ‘생산적’ 활동 위에 국왕을 정점으로 한 지대추구체제가 누르고 있는 형국이 대한제국의 실상이었다면, 이러한 ‘구체제’의 극복없이 근대경제성장이 개시되기를 바라는 것은 근대에 진입하기도 전에 탈근대를 꿈꾸는 것만큼이나 초현실적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