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을 외면하는 한국문학
:: 이동하
서울시립대학교 국문과 교수
1
인간의 기본적 인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우리 시대의 현실을 볼 때 참으로 절실한 고민을 야기하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로 북한 문제를 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북한의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사람들, 수백만에 달하는 아사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일단 북한땅으로부터 탈출하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탈출에 성공한 이후에도 계속해서 생존의 위험을 느끼며 제3국에서 떠돌이의 삶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이른바 탈북자들―이런 사람들의 고통이야말로, 인간의 기본적 인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우리 시대의 현실을 볼 경우, 참으로 절실한 고민을 야기하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로 대두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가슴속에 품은 채로 우리 시대의 한국 문학을 관찰해 보면, 참으로 인상적인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북한의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사람들, 수백만에 달하는 아사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탈북자들 ― 이런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조금이이라도 진지한 관심을 표명한 본격 문학작품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방금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썼습니다만, 제가 지금까지 직접 관찰할 수 있었던 범위 내에서는 그런 작품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의 개인적인 관찰을 토대로 해서, ‘우리 시대에는 그런 작품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곧장 나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 시대에 씌어지는 모든 본격적 문학작품을 제가 빠짐없이 관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렇기는 하지만, 제가 꽤 많은 작품들을 부지런히 찾아 읽는 성실한 독자임에는 틀림이 없으니까, 저의 개인적인 관찰을 토대로 해서 ‘우리 시대에는 그런 작품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정도의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조금도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이 사실이든, 아니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쪽이 사실이든 간에,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거나 굶어 죽었거나 생존의 위험을 느끼며 제3국을 떠돌고 있거나 한 북한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한국의 대다수 문학인들이 철저한 침묵 혹은 외면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이 없는 셈입니다.
어찌하여 한국의 문학인들은 그러한 북한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철저한 침묵 혹은 외면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한 번쯤 던져 볼 필요가 있는 질문임에 틀림없습니다.
만약 한국의 대다수 문학인들이 ‘북한’이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부터 아예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해 왔다면, 또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국 문학의 실상을 잠깐이라도 살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국의 대다수 문학인들이 ‘북한’이라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부터 아예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견지해 온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시의 경우를 한번 보십시오. 북한 동포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시들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모릅니다. 분단의 철조망을 걷어치우고, 북한 동포와 뜨거운 가슴으로 만나 얼싸안자고 절규하는 시들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모릅니다. 백두산, 금강산, 대동강, 청천강을 어서 빨리 가 보고 싶다고 부르짖는 시들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모릅니다. 어떤 못된 자들이 북한 동포와 우리의 만남을 방해하느냐고 외치는 시들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모릅니다.
소설의 경우에는 작품 속에 구체적인 사건과 인물을 담아야 한다는 사정 때문에 북한 동포에 대한 그리움이라든가 분단의 철조망을 걷어치우자는 소망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주제로 한 창작이 시의 경우만큼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나라의 수많은 소설가들도 그런 것들을 주제로 한 작품을 쓰고자 하는 열망만은 시인들 못지 않은 뜨거움으로 지녀 온 것이 사실이며, 장르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그러한 열망을 살려내기 위해 줄기찬 노력을 계속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이만한 정도라면, 그 동안 수많은 한국의 문학인들이 ‘북한’이라는 대상에 대하여 적극적인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 왔다는 결론을 끌어내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북한이라는 대상에 대하여 그처럼 적극적인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 왔다고 하는 한국의 문학인들이, 정작 고난의 한가운데에 던져져 살고 있거나 혹은 이미 죽음의 강을 건너가 버린 북한 사람들 ―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는 수많은 북한 사람들, 굶어 죽은 수백만의 북한 사람과 그 가족들, 생존의 위험을 느끼며 제3국을 떠돌고 있는 수많은 북한 사람들 ― 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관심도 보여주지 않고 있습니다. 최소한, 제가 직접 확인한 범위 내에서는, 단 한 편의 시, 단 한 편의 소설을 쓰지 않은 것으로 판단되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어찌하여 이런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일까요?
이런 물음을 그들 문학인들 자신에게 던져 본다면, 그들은 아마 다양한 답변을 제시할 것입니다. 백 사람에게 물으면 백 가지의 대답이 나오겠지요. 그러나 외관상 제아무리 다양한 답변이 나오더라도, 그것은 결국 여덟 가지 정도로 유형화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저는 이제부터 그 여덟 가지 대답을 하나씩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이 과연 타당성을 지닌 대답으로 성립될 수 있을 것인가를 짚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우리가 첫 번째의 유형으로 묶어볼 수 있는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북한 주민의 인권을 문제삼는 것은 남한의 역대 독재정권이 상투적으로 취해 온 태도이다. 독재정권 자신의 정당성 결여를 호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를 들먹여 온 것이다. 우리 문학인들이 북한 주민의 인권을 문제삼는 것은 그러한 독재정권의 태도에 동조하는 일이 된다.’
이러한 대답은 타당한 것으로 성립될 수 있을까요? 전혀 성립될 수 없습니다.
들먹여 온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인권 문제를 ‘날조’한 것이 아닌 한, 독재정권 자체에 대한 비판의 문제와는 별도로, 인간 본연의 양심이라는 차원에서,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를 놓고 고민하며 그 개선을 촉구해야 한다는 당위는 엄연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제가 지금 직접적인 당면 주제로 삼고 있는 수용자, 아사자, 탈북자의 문제는 모두 1990년대에 들어와서야 제기된 것이니 만큼, ‘남한의 독재정권’이라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문제들입니다. 김영삼 정권이나 김대중 정권에 대해서 아무리 비판적인 사람이라도 그 정권들을 상대로 해서 ‘자신의 정당성 결여를 호도하기 위한 수단으로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를 들먹이는 독재정권’이라는 비판을 가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첫 번째의 대답이 타당한 것으로 성립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3
첫 번째의 대답이 무너진 자리에서 두 번째로 제시될 수 있는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남한에서 독재정권은 없어졌지만, 그 독재정권과 이념적 방향을 같이하는 민간의 극우·파쇼 세력은 엄연히 살아 있다. 우리 문학인들이 북한 주민의 인권을 문제삼는 것은 그러한 극우·파쇼 세력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 되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이러한 대답 역시 타당한 것으로 성립될 수 없습니다.
우선, ‘독재정권과 이념적 방향을 같이하는 극우·파쇼 세력’이라는 것이 지금 남한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요즈음 진보주의자를 자칭하는 이 나라의 많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자기네와 생각을 같이하지 않는 사람에게 덮어놓고 ‘극우파’니 ‘파시스트’니 하는 낙인을 찍어서 욕설을 퍼붓는 것이 일대 유행을 이루고 있습니다만, 참다운 의미에서의 극우파나 파시스트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 하는 점을 잠깐만 생각해 보아도, 그러한 유행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누명 씌우기 작전’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설령 많은 자칭 진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극우파 혹은 파시스트가 이 땅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치더라도, 인간 본연의 양심이라는 차원에서 볼 때,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를 놓고 고민하며 그 개선을 촉구해야 한다는 당위는, 극우파 혹은 파시스트의 존재 여부와는 별도로, 엄연히 그것 자체의 생명을 지니고 살아 있는 것입니다.
4
그 다음, 세 번째로 제시될 수 있는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현재 우리는 통일이라는 과제를 달성하기 위하여 북한 당국과 적극적인 대화를 벌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주민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북한 당국의 비위를 거스르는 일이다. 통일이라는 과제를 달성하려면 북한 당국의 비위를 거스르는 일을 자제해야 한다. 우리가 통일이라는 과제의 달성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러한 대답 역시 타당한 것으로 성립될 수 없습니다.
만약 위와 같은 투의 발언이 정치인이나 경제인의 입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발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자유와 인권을 말살하는 행동을 수없이 저질러 온 북한 당국의 비위를 거스를까 두려워 설설 기면서 눈치나 보는 그런 자세를 갖고서 통일이라는 과제의 수행에 임하고자 한다는 이야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은 언제나 현실적인 효용의 문제를 첫 번째 자리에 놓고 생각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위와 같은 투의 발언도 전략적인 고려의 산물로 이해되고 수용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학인들의 경우는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의 경우와 전혀 다릅니다.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이 현실적인 효용의 문제를 앞세우다 자칫 간과하거나 무시해 버리기 쉬운, 진정한 자유의 문제, 혹은 진정한 인권의 문제를 인간 본연의 양심에 입각하여 끊임없이 제기할 줄 안다는 점, 아니, 바로 그런 것을 자신의 본분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문학인들은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것입니다. 문학인들조차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을 흉내내어 현실적인 효용만 앞세우는 태도로 나간다면, 진정한 자유의 문제, 진정한 인권의 문제가 현실적 효용에 대한 고려에 밀리어 짓밟힐 때, 도대체 누가 인간 본연의 양심에 입각하여 그 문제들을 제기할 것입니까?
5
이제는 네 번째의 답변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네 번째로 제시될 수 있는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많은 북한 사람들이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거나 굶어 죽었거나 생존의 위험을 느끼며 제3국을 떠도는 중이라고 하지만, 그런 것을 소재로 삼아서 실제로 작품을 쓰는 데까지 나아가기에는, 구체적인 정보가 나에게 너무나 부족하다.’
이 네 번째의 답변은 앞에서 살펴본 세 가지 답변보다 훨씬 큰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한국까지 오는 데 성공한 탈북자들이 없지 않고, 그런 사람들이 쓴 수기나, 언론매체에서 그런 사람들을 인터뷰한 기사도 엄연히 존재합니다.
연변에 가 보면 더 많은 탈북자들을 만날 수 있지요. 그런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필름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경우를 다 모아 보아도, ‘구체적인 정보가 부족하다’는 문학인들의 변명을 근본적으로 뒤집어엎을 만큼은 되지 못하는 게 엄연한 현실입니다. 네 번째의 답변이 앞의 세 가지 답변보다 훨씬 큰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는 저의 판단은 이런 현실에 근거를 두고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다수 한국 문학인들이 고난받는 북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보여 온 철저한 침묵 혹은 외면의 태도는, 바로 이 네 번째 답변에 의하여 전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요?
이 문제에 대한 저의 견해는, 경우를 나누어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은, 소설가들의 경우와 시인들의 경우를 나누어서 판단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시인들의 경우를 다시 두 갈래로 나누어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소설가들의 경우와 시인들의 경우를 나누어서 생각해 봅시다. 위와 같은 답변을 제시함으로써 자신들의 침묵 혹은 외면을 정당화하고자 할 경우 유리한 쪽은 말할 나위도 없이 소설가들입니다. 여기에는 구태여 긴 설명을 붙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소설가들이라 해서 위와 같은 답변만 내놓으면 아무 문제없이 정당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장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정보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한국까지 오는 데 성공한 탈북자들을 찾아가 만날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쓴 수기나, 언론매체에서 그런 사람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정독할 수도 있다. 연변에 가 볼 수도 있다. 탈북자들의 삶을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기록한 사람들을 찾아가 면담하고 조력을 구할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방법들 가운데 단 하나도 실천에 옮겨 보지 않은 채, 덮어놓고 정보 부족만 탓하고 있으면 되는가?’ 이런 질문 앞에서 그들은 대답할 말이 없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제 자신이 이런 질문을 내걸면서까지 그들을 추궁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굳이 이치를 따지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소설가들의 경우는 그렇다 치고, 시인들의 경우는 어떨까요? 앞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시인들이 네 번째의 답변을 가지고 자기들의 침묵 혹은 외면을 정당화할 수 있는 소지는 소설가들의 경우에 비해 분명히 좁습니다. ‘구체적인 정보’가 결코 풍부하지 아니한 상황 ― 그래서 대다수의 소설가들이 선뜻 창작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 에서도 얼마든지 창작의 열정을 불태울 수 있고 실제로 감동적인 작품을 숱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시인들이니까요. 시라는 장르의 성격 자체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소설가들조차도 지금 아무 문제없이 정당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자신하지 못하는 판국인 만큼, 시인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이 그들의 침묵 혹은 외면에 대하여 예외 없이 준엄한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우리는 이렇게 결론지어도 좋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는 시인들의 경우를 다시 두 갈래로 나누어서 판단해야 합니다.
시인들 가운데에는, 오래 전부터 기본적 인권, 민족, 민주주의, 정치적 자유 등등의 주제를 자기 문학세계의 중요한 일부로 삼고 목청을 높여 온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아니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중 후자의 갈래에 드는 사람들은, 그런 주제들을 자기 문학세계의 중요한 일부로 삼지 않은 대신, 인간의 존재론적 위상이라든가, 언어의 아름다움과 한계라든가, 생명의 신비라든가, 현대 도시문명이 인간에게 미친 영향이라든가 하는 등등의 또 다른 주제들을 붙들고 씨름하면서 시인의 길을 걸어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고유한 영역에서 귀중한 작업을 수행해 오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그것 자체로서 충분히 존중받아야 합니다. 이 사람들을 향하여, ‘당신들은 왜 고난받는 북한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침묵 혹은 외면의 태도로 일관하고 있소?’라는 질문을 비난조의 어투로 던지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 난센스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자의 갈래에 드는 사람들의 경우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그들이 오래 전부터 자기 문학세계의 중요한 일부로 삼고 목청을 높여 왔던 ‘인권’이라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해 볼 때, 고난받는 북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그들의 철저한 침묵 혹은 외면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직무유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방금 ‘인권’이라는 말을 썼던 자리에 ― 그 말 대신 민족, 민주주의, 정치적 자유 ― 그 어느 말을 놓아 보아도 결론은 마찬가지로 나온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그 동안 진정으로 인권을, 민족을, 민주주의를, 정치적 자유를 노래해 왔던 것이라면, 그들의 마음이 그들의 시에 나타나 있듯 인권에 대한 사랑으로,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으로, 정치적 자유에 대한 사랑으로 그토록 절절하게 사무쳐 있었던 것이라면, 강제수용소에 갇히고, 굶어 죽고, 생존의 위험을 느끼며 제3국을 유랑하는 북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단편적으로라도 들었을 때, 관심이 가지 않을까요? 슬픔이 느껴지지 않을까요?
관심을 갖게 되고, 슬픔을 느끼게 되면서,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을까요?
더 자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 노력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더 큰 슬픔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고난받는 사람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개선하는 길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저절로 자라나게 되지 않을까요?
이러한 슬픔과 물음이 서로 얽히는 가운데, 시상이 떠오르게 되지 않을까요? 시가 씌어지게 되지 않을까요?
그들이 그 동안 써 왔던 시의 진정성을 믿는다면, 사태의 진행이 이런 순서를 밟게 되지 않는 경우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최소한 저로서는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인권을, 민족을, 민주주의를, 정치적 자유를 절절하게 노래해 왔던 시인들은, 대부분의 경우, 북한 동포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하게 노래하는 일에 앞장서 왔던 바로 그 시인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만큼, 그들이 그 동안 써 왔던 시의 진정성을 신뢰하는 자리에서 판단해 보면, 고난받는 북한 주민의 삶에 초점을 맞춘 시들이 바로 그 시인들의 손에 의하여 창작될 가능성은 특별히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첫머리에서 말씀드렸듯, 지금까지 제 자신이 확인해 온 바로는, 고난받는 북한 주민의 삶에 초점을 맞춘 한국 시인의 시라고는, 단 한 편이 없는 것입니다.
네 번째 답변에 대한 이야기를 완전히 끝내기 전에, 소설의 경우에 대해서 조금만 보충 발언을 해 두겠습니다. 제가 앞에서 소설가들을 극단적으로 추궁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는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만, 소설가들 가운데서도 특히 인권, 민족, 민주주의, 정치적 자유 등등의 주제에 대해 유달리 목청을 높여 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방금 그와 같은 경향의 시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제가 한 이야기를, 적어도 그 기본적인 원칙론의 차원에서는,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제가 앞에서 말씀드렸던 장르상의 차이를 무시할 수 없는 만큼 그 비판의 정도는 적절하게 완화시켜야 하겠지만요.
네 번째의 답변은 그 앞의 세 가지 답변에 비해 더 큰 설득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고난받는 북한 주민들의 삶에 대한 한국 문학인들의 철저한 침묵 혹은 외면을 전적으로 정당화해 줄 정도의 힘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알게 된 셈입니다.
6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다섯 번째 답변의 경우는 어떨까요?
‘좋은 문학작품의 창작은 체험의 절실성에 바탕을 두고 씌어질 때 가능하다. 그런데 북한 주민의 삶은 우리 한국 문학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어디까지나 남의 삶일 따름이다. 즉 체험의 절실성으로 다가오지 않는 삶이다. 그러니 한국 문학인의 입장에서는 북한 주민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서 창작을 하고 싶은 의욕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제가 보기에는, 이러한 답변 역시, 그 동안 인권, 민족, 민주주의, 정치적 자유 등등의 주제를 두고 유달리 목청을 높여 왔던 시인·소설가들의 침묵 혹은 외면을 정당화해 주는 것은 되지 못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까지 그런 시인·소설가들 중 대다수는 노동자의 삶을 그들의 가장 중요한 창작대상 가운데 하나로 삼고 그들의 창작의욕을 그야말로 뜨겁게, 뜨겁게 불태워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실제로 노동자였던 사람 ― 그래서 정말 ‘체험의 절실성’에 바탕을 두고 노동자의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사람 ― 은 박노해를 비롯한 몇 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원폭 피해자가 아닌 사람이 원폭 피해자의 삶을 소재로 해서 감동적인 작품을 써낸 예를 우리는 압니다. 광주항쟁을 직접 겪지 않은 사람이 광주항쟁을 소재로 해서 명작을 써낸 예를 우리는 압니다. 수백 년 전의 조선시대에 초점을 맞추어 창작한 작품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하는 데 성공한 예를 우리는 압니다. 아득한 미래를 배경으로 삼고 창작한 작품으로 많은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하는 데 성공한 예조차도 우리는 압니다.
이 모든 사례들은, ‘체험의 절실성’ 운운하는 논리가 궁색한 핑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로써 모자람이 없습니다.
7
지금까지 살펴본 다섯 가지 답변이 모두 무너진 다음에 제시될 수 있는 여섯 번째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한국 문학인들은 한국 내부의 문제만 다루는 것으로도 벅차다. 북한 주민의 고통까지 다룰 여력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 역시, 다른 것도 아닌 ‘민족’을 절절하게 노래해 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생각해 보면, 그리고 ‘북한 동포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하게 노래해 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생각해 보면, 아무런 설득력도 갖지 못합니다.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는 북한 주민은 바로 그 사람들이 그토록 절절하게 노래해 온 ‘우리 민족’의 일부가 아닙니까? 굶어 죽은 북한 주민은 바로 그 사람들이 그토록 절절하게 노래해 온 ‘그리운 북한 동포’의 일부가 아닙니까? 사실이 그러한 판에 새삼 ‘여력 없음’을 내세우는 태도는 거짓된 엄살이라는 판정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8
이제는 일곱 번째의 대답으로 넘어가 보기로 하지요. 일곱 번째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인권이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말라. 자유주의 사회에서 통용되는 인권의 척도를 가지고 사회주의 사회인 북한의 경우를 재지 말라. 인권의 기준은 체제에 따라 다르게 정해지는 법이며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기본적 인권의 침해로 간주되는 것이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이러한 인권 기준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자세야말로 성숙한 자세이며 냉전적 사고를 넘어선 자세이다.’
제법 점잖은 표현을 구사하고 있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가장 끔찍하고 냉혹한 대답으로 규정되어 마땅한 것이 바로 이 일곱 번째 대답입니다.
이런 대답을 내놓는 사람들의 주장을 그대로 따라가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수령의 말에 대해 티끌만큼의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는 이유 하나로 강제수용소에 갇혀서 일생을 마쳐야 하는 사람의 고통과 기본적 인권이라는 개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 사람의 고통이 기본적 인권이라는 개념과 무관한 것이라면 도대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이 기본적 인권이라는 개념과 유관한 것으로 인정될 수 있습니까?
인권의 기준은 결코 체제에 따라 다르게 정해지는 것일 수 없습니다. 인권의 기준은 체제에 따라 다르게 정해지는 법이며 우리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억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비판할 근거가 없어집니다. ‘유대인 학살은 나치 체제의 인권 기준에 따라서 행해진 것인데 그것을 왜 자유주의 사회에서나 통용되는 인권의 기준을 가지고 비판하느냐?’라는 반문에 대해서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수많은 한국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간 일을 비판할 근거도 없어집니다. ‘위안부 강제 징발은 일본 제국주의 체제의 인권 기준에 따라서 행해진 것인데 그것을 왜 자유주의 사회에서나 통용되는 인권의 기준을 가지고 비판하느냐?’라는 반문에 대해서 할 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9
논의를 진행해 오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대답을 검토해 보아야 할 단계에 이르렀군요. 마지막, 여덟 번째로 제시될 수 있는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북한 사회는 사회주의 사회다. 사회주의 사회 가운데 조금 특이한 변종에 해당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근본적으로 보면 마르크스에게서 출발한 사회주의 이념에 바탕을 두고 성립된 사회임에 틀림이 없다. 이처럼 근본적으로 사회주의 사회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북한 사회에 있어서, 강제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라든가, 굶어 죽은 사람과 그 가족들이라든가, 생존의 위험을 느끼며 제3국을 유랑하는 사람들이라든가 하는 부류는, 그 사회의 그늘진 측면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존재들이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의 고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창작에 반영하는 행위는, 사회주의 사회의 그늘진 측면을 부각시키는 행위가 된다. 이러한 행위는 옳은 행동이 아니다. 마르크스에게서 출발한 사회주의 이념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결코 버릴 수 없는 인류의 고매한 이상을 집약하고 있는 이념이다. 사회주의 사회의 그늘진 측면을 부각시키는 행위는 바로 이런 고귀한 이념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행동이 되는 셈이니, 그런 행동을 어떻게 옳은 행동이라고 볼 수 있겠느냐? 인류의 고매한 이상에 대한 관심을 버릴 수 없는 문학인으로서, 우리는 결코 옳지 못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대답은 얼핏 보기에는 상당히 그럴 듯하다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아마 지금까지 제시된 여덟 가지 대답 가운데서 가장 그럴 듯한 외양을 갖추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마지막 대답이 아닐까 여겨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 대답 역시 자세히 보면 치명적인 오류를 두 가지나 그 안에 내재시키고 있는 대답으로서, 전혀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는 대답에 불과합니다.
위의 대답에 내재해 있는 치명적 오류 가운데 첫 번째는,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가치에 대한 터무니없이 높은 평가입니다. 마르크스에게서 출발한 사회주의 이념은, 북한에서 만들어진 그 변종까지 포함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잘못된 판단, 노동의 가치에 대한 잘못된 평가, 증오의 감정에 대한 과도한 의존 등을 비롯, 실로 수다(數多)한 반이성적 오류와 반윤리적 문제점을 그 핵심적 교리 속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인류의 고매한 이상을 집약하고 있는 이념’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위의 대답에 내재해 있는 치명적 오류 가운데 두 번째는, 이 세상에 실제로 살아 있는 인간, 혹은 죽어 가는 인간의 고통을 문제삼는 것보다 어떤 이념의 명예를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보는 태도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마르크스에게서 출발한 사회주의 이념이나 북한에서 만들어진 그 변종은 ‘인류의 고매한 이상을 집약하고 있는 이념’과는 도무지 거리가 먼 존재이니 만큼, 그런 하잘것없는 이념의 명예를 살리기 위해서 실제로 살아 있는 인간, 혹은 죽어 가는 인간의 고통을 외면해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도 잔인한 행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만약 이 세상에 실제로 ‘인류의 고매한 이상을 집약하고 있는 이념’이라는 평가를 마땅히 받아야 할 만큼 대단한 이념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 이념의 명예’와 ‘실제로 살아 있는 인간, 혹은 죽어 가는 인간의 고통’이 서로 충돌할 경우에도 후자를 앞세우는 것이 옳은 행동일 것입니다. 아니, 그럴 경우에는 마땅히 후자를 앞세워야 한다는 사실을 흔쾌하게 인정해 줄 줄 아는 이념이라야만, ‘인류의 고매한 이상을 집약하고 있는 이념’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정치나 철학사상의 세계에서조차도 명백한 당위로 받아들여져야 마땅합니다. 하물며 정치나 철학사상의 경우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면서도 실존적인 차원에서 ‘인간’을 문제삼게 마련인 문학의 세계에는 어떻겠습니까.
10
지금까지 저는 ‘어찌하여 한국의 대다수 문학인들은 고난받는 북한 사람들의 삶에 대하여 철저한 침묵 혹은 외면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물음에 대해서 제시될 수 있는 대답의 유형을 여덟 가지로 상정하고, 그 여덟 가지 대답을 전부 검토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해 본 결과, 그 여덟 가지 대답 중 어느 것도 타당성을 지닌 대답으로 성립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사실 앞에서 제가 최종적으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한 가지입니다. 우리 시대의 한국 문학은 인간의 기본적 인권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입장에서 볼 때 참으로 절실한 고민을 야기하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를 무책임하게 방기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으며 그 점에서 엄격한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결론이 그것입니다.
물론 앞에서 구체적인 논의를 전개하는 도중에 이미 분명하게 밝힌 바 있듯, 이러한 비판이 우리 시대의 모든 한국 문학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언어의 아름다움과 한계에 대한 탐구를 자신의 과제로 삼고 그 작업에 평생을 바친 우리 시대의 시인이 있다고 할 때, 그가 고난받는 북한 주민의 삶을 다루지 않았다 하여 비판을 가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평소에 기본적 인권, 민족, 민주주의, 정치적 자유 등등의 주제를 자기 문학세계의 중요한 일부로 삼고 목청을 높여 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이들과 겹치는 부류로서, 북한에 대해 이런저런 방식으로 관심을 표명하는 것을 자기 창작활동의 중요한 일부로 삼아 온 사람들입니다.
앞으로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 누군가 새롭게 한국문학사를 기술하다가 우리 시대의 문학을 다루는 자리에까지 왔을 때, 도저히 침묵 혹은 외면해서는 안 될 문제에 대한 우리 시대 대다수 문학인들의 이 철저한 침묵 혹은 외면이라는 기이한 현상을 발견하고, 과연 어떤 평가를 내릴 것인지, 그 점을 우리 문학인들은 지금부터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시대정신 29호)
'文學, 語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족' 속임수,정치적 선동대로 전락한 남북한 작가들 (0) | 2015.10.02 |
---|---|
한국 문인들의 이념적 편향 (0) | 2015.10.02 |
문학적 천재와 정치적 바보 (0) | 2015.10.02 |
"한국 詩의 특징은 진실함과 소박함" (0) | 2015.10.02 |
이외수 인터뷰…불가사의한 이외수의 몸 (0) | 2015.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