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민족' 속임수,정치적 선동대로 전락한 남북한 작가들

이강기 2015. 10. 2. 08:45

'민족' 속임수
정치적 선동대로 전락한 남북한 작가들


"우리 민족끼리"는 김정일이 한민족에게 거는 주술

 

[ 송재윤 / 2006-04-01 00:14 ]  
2005년 남북한 작가들이 모여 채택한 공동선언문에는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아래”란 문구가 등장한다. 작가란 시대정신의 성감대다. 예민하게 느끼고 섬세하게 표현하는 존재들이다. 남북한 작가들이 모여서 만들어낸 공동의 선언문이 고작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를 지상의 명제로 채택했다면, 이들은 집체적으로 문학을 모독한 셈이다. 그 모독이 의도된 것이라면 문학을 민족주의의 시녀로 삼는 정치꾼들일 것이며, 별다른 의도 없이 상투어를 삽입한 것이라면 불감증이다. 그 무딘 촉수로 어떻게 작품을 쓸 것인가?

동서독의 작가들이 모여서 “게르만 민족끼리”란 구호를 외쳤다면 어떨까? 중국, 대만 및 전세계 화교 작가들이 모여서 “우리 한족끼리”를 외쳤다면? 혹은 전세계 유태인 작가들이 모여서 “우리 유대민족끼리의 기치”를 내걸었다면? 그들을 제외한 전세계의 빈축을 살 것이다. 조금이나마 이성이 있는 작가라면, 그런 배타적인 민족 결속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했을 것이다. 그 촌스런 열정에 서슬퍼런 이념의 칼날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며, 작가의 상상력이 그런 조악한 문구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끼리” “너희들끼리” “그들끼리” “끼리끼리” “부자들끼리,” 등등. 한국어에서 “끼리”란 한 패, 한 무리를 짓는다는 뜻을 담은 접미사다. “우리 민족끼리”라는 말을 분석해 보면, “우리” “민족” “끼리” 모두가 타자를 제외한 배타적 결속의 의미를 담고 있다. 특정 부족, 특정 민족을 지상가치로 내세운 예술행위는 반드시 타락한다. 다양성이 죽고, 개별성이 침해되기 때문이다. “민족”을 절대가치로 내세우고 그 아래에 부복하는 작가들이라면, 이미 정치적 선동대로 전락한 셈이다.

“우리 민족끼리”란 말이 6.15공동선언 이후 한반도 통일담론의 지배-이데올로기로 부상한 까닭은 무엇일까? 특히 문학인들이 이 구호를 채택한 까닭은 뭘까?

북한 작가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김정일 전제정에 복무하는 자신들의 반인륜적 문학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구하는 짓거리다. 300만이 아사하는 김정일의 실정도 이족(異族)의 압박 때문이며, 최소한의 인권도 없는 참담한 생활고 역시 외적과의 투쟁에서 비롯되었다는 논리하에선, "민족자주"가 최고의 문학적 가치로 인정된다. 그들이 김정일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친독재의 문학을 생산하는 것도 “우리 민족끼리”란 테제 아래서 정당화된다.

인민 개개인의 고통은 민족모순으로 둔갑한다. 김정일의 핵개발은 민족자주의 몸부림으로 극화된다. 그 민족의 구호 아래 유린당한 개별자의 권리와 생존은 슬그머니 사라져 버린다. 김정일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민족끼리”란 구호는 인류사 최악의 세습전제정을 영속시키는 기발한 변명이 아닐 수 없다. 얼마나 쉬운가? 북한 내부의 저항세력은 그저 반민족적 분자를 한다고 몰아부치면 되며, 굶주림의 원성은 민족자주를 위한 군비확장이란 명목으로 간단히 무마된다.

남한의 작가들 역시 민족주의의 포로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식민지, 전쟁의 상처에다 80년대의 극단주의가 남긴 한국문학의 상흔이다. 장길산의 작가 황석영의 소설 “손님”은 맑시즘, 기독교란 이민족의 가치관이 서로 학살하는 죽음의 이데올로기로 변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이민족 말고 우리 민족의 가치관에 따라 주체적으로 살자는 얘기지만, 열린 마음과 포용력을 보여주기 보단 그저 배타적인 민족주의에 매몰되고 만 것은 안타깝다. 비단 문학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민족주의 과잉은 문화 전반에 퍼져 있다. 한국문학이 갈수록 비좁은 이념의 멍에를 쓴다면 그건 씁쓸한 메조키즘일 뿐이다. 광기의 80년대는 갔고, 한국문학의 미래는 민족주의일 수 없다.

문제는 다시금 정치인들이다. “우리 민족끼리”란 구호를 내걸고 있는 남북한 정권 모두 어떤 정치적 효과를 노리고 있다. 김정일 정권이 실정의 비난을 회피하고 정권의 영속을 꿈꾼다는 것은 번연하다. 핵개발과 국가범죄로 전세계의 조롱거리가 된 오늘의 북한에서 김정일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끈은 “우리 민족끼리”뿐이다. 김일성-김정일이 덩샤오핑의 실용개혁 노선을 따라 개혁개방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 개방은 그들의 정권을 무너뜨리기 때문이었다.

야릇하게도 21세기 들어와서 대한민국의 민족주의는 더 격하고 거세게 일어났다. 대한민국의 현 정부 역시 얻을 것이 많다. 정권의 비판자들을 친일이나 친미로 매도하여 “우리 민족끼리의 기치”에 저항하는 세력으로 닦아세울 수 있으며, 반통일세력으로 몰아 정권 재창출을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끼리"는 김정일이 한민족에게 거는 주술이다. 일찌기 영국의 작가 사무엘 존슨(1709-84)은 말했다. “애국심은 악한의 마지막 도피처이다(Patriotism is the last refuge of a scoundrel)"

송재윤 (하버드대 유학생, 정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