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한국 문인들의 이념적 편향

이강기 2015. 10. 2. 08:44
한국 문인들의 이념적 편향
:: 복거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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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한국 문인들은 좌파적 성향을 보인다. 이념적으로는 자본주의보다는 사회주의에 호의적이다. 정치적으로는 우리 사회에 대해서는 호의적이지 않거나 호되게 비판하지만, 북한 체제에 대해서는 상당히 호의적이거나 적어도 너그럽다. 그리고 한반도의 현대 역사 해석에선 좌익 세력의 잘못과 어리석음이 우익 세력의 그것들보다 훨씬 컸다는 사실과 어긋나는 평가를 내린다. 해방 뒤 좌우익의 충돌들은, 6.25 전쟁을 포함해서, 거의 모두 좌익에서 도발했고 그런 도발은 공산주의가 그 추종자들에게 강요하는 광기와 야만을 동반했다. 그러나 좌익의 도발부터 다룬 작품들은 드물고, 이야기는 으레 그런 좌익의 도발에 대한 우익의 반응에서 시작하고 그런 반응의 필연적 과도함을 문제의 핵심으로 삼는다.
우리 문인들의 그런 이념적 편향은 무엇에서 비롯한 것인가? 이것은 자체로 흥미로운 물음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무척 중요한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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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념적 편향의 근본적 요인은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자본주의에 대해서 적대적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모든 사회들에서, 아마도 자본주의가 자리 잡지 못한 공산주의 사회들을 빼놓고, 나오는 현상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한 사회들에서만 지식인들이 큰 계층을 이룬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는 어려워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본주의의 불완전한 모습들에 주목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자본주의에 적대적 태도를 지니게 된다.

이런 역설적 상황을 맨 처음 지적한 것은 조지프 슘페터였는데, 그는 자본주의에 자기 파괴의 경향(a tendency toward self-destruction)이 내재한다고 주장했다. 영국 경제학자 새뮤얼 브리턴은 슘페터의 진단을 잘 요약했다.

자본주의의 또 하나의 특질은 그것이 자신 안에서 반자본주의 문화를 키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여러 해 전에 조지프 슘페터가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설명했다. 그의 기본적 명제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업적으로 자신을 죽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문명은 무엇보다도 합리주의적이다. 그것은 반영웅주의적이고 반신비주의적이다. 그것을 활기차게 만드는 정신은 [테니슨의 시구] “이유를 추론하는 것은 그들의 일이 아니다, 그들의 일은 행동하거나 죽는 것이다”에 바로 반대되는 것이다. 성공적 자본가는 모든 것들이 행해지는 길들에 관해서 물음을 던지고 보다 나은 길들을 찾아내도록 여건에 의해 강요된다. 만일 그가 현존하는 관행들에 대한 전통적, 신비주의적 또는 의식적(儀式的) 정당화에 의존한다면, 그는 다른 누군가에게 따라잡히고 사라지게 될지 모른다. 신학적 권위의 붕괴, 과학적 정신의 흥기, 그리고 자본주의의 성장은 서로 연관된 현상들이었다. 17세기에 새로운 윤리가 일어나서 19세기에 이르러선 열매를 맺었는데, 그것은 경험적, 논리적 탐구를 축복해 주었고, 권위의 주장들을 폄하했으며 이익 추구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불행하게도, 사회적 풍습들과 기구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는 기꺼이 합리적 주장들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태도를 불러오지 않는다. 가격 기구의 배치적 기능을 이해하고, 높은 (상대)가격이 어떻게 부족을 해결할 힘들을 움직이게 하는가 알아보고, 노동자들이 파산한 기업들로부터 확장하는 기업들로 옮기는 것이 어떻게 번영을 늘리고 궁극적으로는 옮겨진 노동자들까지 혜택을 받도록 하는가 알아보는 것은 지적, 상상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도, 시장 가치 대신 상정된 장점에 따라 사람들에게 보상하는 일의 해로운 함의들을 알아보는 것이나 자본의 개인 소유의 단점들만이 아니라 장점들을, 그리고 그것을 그저 억제하려는 시도의 위험들을 알아보는 것은 상당한 통찰이나 분석력을 그리고 부러움으로부터의 드문 자유를 필요로 한다.
[경제적 자유주의의 재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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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문인들은 체제에 유난히 비우호적이다. 작가들은 대부분 개인들의 삶을, 특히 개인들의 마음을, 다룬다. 자연히, 개인들의 밖에 있는 모든 사회적 기구들은 작가들에겐 개인들에게 압제적인 존재들로 다가오게 된다. 실제로 사회적 기구들은 개인들의 행위들을 인도하고 제약하기 위해 존재하며 그런 인도와 제약은 개인들에겐 억압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작가들이 체제에 대해 비우호적 태도를 지니게 되고 사회적 기구들의 억압적 특질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다.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체제들은 자본주의였거나 그것에 가까운 것들이었다. 자본주의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체제이고 사회주의를 비롯한 대안적 체제들은 자본주의를 일부러 바꾼 것들이기 때문이다. 자연히, 작가들은 자본주의에 적대적 태도를 지니게 된다. 물론 전체주의 사회들에선, 20세기 공산주의 사회들의 경험이 가리킨 것처럼, 작가들은 체제에 대한 가장 치열한 저항 세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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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뒤 조선은 이념적으로 대립하는 두 사회들로 나뉘었다. 우리 사회 안에서도 이념적 대립은 사회의 존립을 위협했다. 이어 북한의 군사적 침략과 이념적 선전은 우리 사회를 거의 무너뜨렸다. 그런 안팎의 위협에 대해 우리 사회는 이념적 통제로 대응했다. 그런 대응은 우리 사회를 이념적으로 아주 편향되고 경직된 곳으로 만들었다. 불행하게도, 권위주의적 정권들은 그런 이념적 편향과 경직을 정권의 장악과 유지에 이용했고, 좌파 지식인들은 혹독한 압제를 받았다. 이런 사정은 우리 체제의 정당성을 크게 해쳤고 사회주의를 존중받을 만한 이념으로 만들었다. 우리 문인들의 다수가 사회주의 이념에 호의적인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우리 문인들의 작품들은 우리 사회에서 사회주의 이념과 반체제적 태도가 널리 퍼지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안정된 사회에선 대부분의 작가들이 체제에 적대적인 태도를 지니고 체제를 비판하는 작품들을 쓴다는 사실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떤 체제도 비판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완벽할 수 없고 작가들의 체제에 대한 검증과 비판은 체제가 건강을 지키는 데 큰 공헌을 한다.

미국의 경우는 대표적이다. 냉전이 막 시작되었을 때, 대쉴 해미트를 비롯한 여러 뛰어난 작가들이 공산당에 가입한 공산주의자들이었지만, 그 사실은 그들의 명성과 평가에 흠집을 남기지 않았다. 얼마 전에 죽은 아서 밀러만 하더라도, 그가 평생 사회주의자였고 자본주의를 거세게 비판했다는 사실은 그가 받은 ‘아마도 20세기 미국의 가장 위대한 희곡 작가’라는 평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심지어, 미국의 대표적 좌파 작가였던 수전 손택은 ‘9.11 참사’를 특정한 미국의 동맹들과 행동들의 결과로 취해진, 자임한 세계의 초강대국에 대한 공격(an attack on the world’s self-proclaimed superpower, undertaken as a consequence of specific American alliances and actions)이라고 해석했지만, 그녀의 그런 어리석음이 미국의 안전에, 실은 그녀의 문학적 명성에도, 별다른 흠집을 내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은 안정된 사회가 아니다. 우리 나라는 아직 북한과 기술적으로 전쟁 상태에 있고 늘 북한의 군사적 위협과 이념적 선전에 거의 방비 없이 노출되었다. 북한의 위협은 실질적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사회의 이념과 체제에 적의를 드러내는 문학은 우리 사회의 피륙을 약화시키는 산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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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개탄하는 것 말고는 우리가 그런 사정에 대해 할 일은 별로 없다. 작가의 사회적 기능과 책무는 체제를 지키거나 변호하거나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체제가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작가에게 무슨 사회적 기능이나 책무가 있다면, 그것은 체제의 비판일 것이다. 그리고 어떤 작가의 체제에 대한 비판이 아무리 잘못되고 해롭다 하더라도, 자유로운 사회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양심과 표현의 자유를 해치지 않고 그의 비판을 교정할 길은 없다. 사회의 유지에 검열은 필요하지만, 합리적 법과 도덕에 따른 온당한 검열도 자유를, 크게든 작게든, 해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우리가 매섭게 지적해야 할 것은 우리 체제를 그리도 줄기차게 비판해온 문인들이 거의 예외 없이 북한의 사악함에 대해선 침묵하거나 변호해왔다는 사실이다. 최소한의 양식과 양심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가 꼭 지식인으로서의 소양을 갖추지 않았더라도, 우리와 깊은 관계가 있고 바로 이웃에 있는 북한의 참상을 외면할 수 없고 그 참상의 뿌리가 북한 정권의 사악함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날마다 신문들의 지면들을 채우는 북한의 참상에 관한 보도들은 우리 작가들에겐 관심 없는 풍경일 따름이었다.

작가에게 필요한 덕성들 가운데 일반 사람들의 경우보다 특히 긴요한 것은 정직이다. 작가가 지니게 되는 튼실한 지적 정직성 덕분에, 20세기 전반에 대부분의 지식인들을 홀렸던 공산주의의 사악함을 맨 먼저 깨닫고 그것을 세상에 알린 것은 작가들이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공산주의를 종교적 신념으로 떠받들고 소련을 ‘인류의 미래’로 칭송했을 때, 앙드레 지드, 조지 오웰, 아르투르 케스틀러, 이냐치오 실로네와 같은 작가들은 전체주의의 번드르르한 외양 속에 숨은 그 본질을 살폈고 전체주의의 사악함과 위협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지금 우리 문인들의 다수가 북한의 참상을 외면하고 북한의 기괴한 전체주의 이념과 체제를 변호하는 것은 무엇으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 부끄러운 일이다. 후일 문학사가들이 이 시대를 평가할 때, 그들의 눈에 먼저 들어올 사실은 아마도 우리 문인들이 그렇게 정직하지 못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시대정신 2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