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일어나나?” 보고서를 살피던 눈길을 들어 나를 올려다보면서, 부장이 물었다. 마치 내가 이번 일에 무슨 연관이라도 있다는
것처럼, 짜증이 밴 눈길이었다. 막상 대꾸하려니, 대꾸하기 어려운 물음이었다. 게다가 내가 무슨 대꾸를 하더라도, 부장의 짜증은 더욱 커질
터였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얼버무렸다.
“글쎄 말입니다.” “세상이 어지러우니까, 별일이 다…….” 고개를
젓고서, 부장은 다시 내가 급히 만들어 올린 보고서를 내려다보았다.
요즈음 우리 은행 사람들은 모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원래
작은 은행인데다 영업 상태가 좋지 않아서, ‘유라시안 벤처 그룹’이라는 영국계 금융 그룹이 인수하기로 된 터였다. 그래서 모두 마음이 불안했다.
그런 판에 엉뚱한 사고가 터졌으니, 부장이 짜증을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옆에 선 부부장이 입맛을 다셨다. “김 대리,
도대체 이런 사고가 어떻게 일어나지? 이런 사고도 일어날 수 있나?” “그러게 말입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내사 은행에서 잔뼈가 굵었지만, 이런 사고는 처음 보네. 사람도 아니고 기계가 이런 엉뚱한 짓을
하다니…….” “IT쪽 사람들 얘기로는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고……." 그냥 있기가 무엇해서, 나는 하나마나한 얘기를
했다.
지난 주말에 서전 서방동 지점의 자동현금지급기가 오작동해서 고객들이 요구한 금액들의 곱절씩을 현금으로 지급했다. 그
자동현금지급기에 미리 들어가는 현금은 하루에 3천만 원이었는데, 마침 추석을 앞둔 주말이어서, 지점은 9천만 원을 넣었다. 요구한 금액보다
곱절이 지급된다는 것이 알려지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 많은 금액이 토요일 오전에 바닥이 났다. 비교적 늦게 현금을 인출한 고객들은 모두
일회 인출 한도인 백만 원을 꺼내갔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더니, 부장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럼, 상무님께
보고하지. 김 대리, IT쪽에 계속 알아봐, 오작동 원인을.” “예. 알겠습니다.” “요새는 기계도 못 믿을 세상이야,” 부부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2
“흠.”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만 초과 지급분을 반환했단
얘기지.” “예.” “그러면 사천 오백 만 원에서 십 만 원만 건지고 나머진 다…….
부장이 고개를 들어 나와 부부장을
번갈아 살폈다. “예. 아직까지 자진 반환된 것은 그것뿐입니다.” “이게 한국적 현실이야. 정직한 사람 하나에, 몇 명이야 도대체,
백십삼 명, 속이 검은 백십삼 명, 이게 한국적 현실이야.” 부장은 마땅치 않은 상황을 ‘한국적 현실’이라 부르곤
했다.
“반환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부부장이 무거운 목소리로 받았다. “요즘 세상에서…….” 인성에
관한 한, 부부장은 비관론자였다. 그는 지점들과 영업부에서 오래 근무했었는데, 돈이 부족하다고 항의하는 고객들은 많았지만, 천 원짜리든 만
원짜리든 한 장 더 받았다고 돌려주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고 말하곤 했다.
“지금 지점에서 전화를 걸어 사정을 얘기하고
돌려달라고 하니까, 반환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도 같습니다,” 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부부장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김 대리
순진하긴. 아, 한국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순순히 돈을 내놓을 것 같아?” “지점에서 전화로 얘기하고 공문을 띄워서 설득하면, 좀
걷히겠지. 걷히지 않는 돈은 소송으로 받아내고. 그러니까, 변호사는 소송하면 우리가 돈을 받아낼 수 있다는 얘기지?” 부장이 내게
물었다.
“예.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얘기했습니다.” 부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걸.”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면서,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주머니에 들어온 돈을 사람들이 순순히 내놓을 리
없겠지만, 소송을 하면……. 변호사가 그렇게 자신하는 근거는 뭔가?” “기록이 있으니까요. 누구에게 얼마 지급되었는가, 기록이 있고.
IT쪽에서 요구액보다 꼭 곱절씩 현금이 나갔다는 사실을 증명할 증거들을 내놓으면……” “그게 쉬울까?” 부부장이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사진도 있잖습니까? 모두 현금을 세어보고 놀라서 다시 세어보는 것이 다 사진에 찍혔는데요. 뒤에 소문을 듣고 일부러
찾아온 고객들이 정말로 곱절을 받고 나서 좋아하는 장면들은…… 일부러 그렇게 찍기도 어려울 만큼 생생하던데요.” “몰카구먼, 몰카.”
부장이 웃음기 없는 웃음을 지었다.
“예. 그리고 몇 사람은 몇 백만 원씩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욕심에 눈이 멀어서, 일시
지불 한도액이 백만 원인 것을 잊었던 거죠.” “공돈을 보면, 사람들은 다 같아.” 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김 대리, 일단 소송을 할 준비를 하지.” “예. 알겠습니다.” “IT쪽 사람들은 뭐라고
하나?” “아직 별 얘기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그런 얘깁니다.” “흐흥.”
부부장이
코웃음을 쳤다. “작은 ITM의 프로그램을 점검하는 건데, 이틀이 지나도 오작동의 원인을 못 찾았다? 그 친구들 뭘 주무르고 있는 것
아냐?”
부부장은 음모론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그는 한국에서 유통되는 음모론들은 죄다 알고 대부분 믿는 듯했다. 나는 음모론에
대해 대체로 회의적이었지만, 부부장의 얘기를 가볍게 듣지는 않았다. 그에겐 은행 안에서 누구보다도 먼저 노무현 대통령의 등장을 예측한 ‘실적’이
있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노무현 후보가 떠오르리라는 그의 예측도 물론 음모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어쨌든, IT쪽에서 하는 일에
대한 그의 의심엔 나도 동의했다.
“예. 지금쯤은 원인이 밝혀졌어야 하는데…….” “이번 사고가 말야, 김 대리, 우리
ITM이 오작동한 데서 시작했다는 것이 소송에 영향을 미치진 않을까?” 부장이 물었다. “박진환 변호사 말씀은 영향이 없을 것이랍니다.
우리가 기계의 오작동으로 초과 지급되었다는 사실만 충분히 밝히면, 그리고 우리 쪽에 무슨 과실이 없다면, 이번 사고가 우리 기계의 오작동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영향을 미치진 않을 것이랍니다.” “제삼자가 기계를 조작했을 가능성은? 만일 제삼자가 기계를 조작했다면, 소송에 어떻게
영향을 미칠까?” “그러면, 우리의 입장이 강화되는 것 아닌가요?” 부부장이 말했다. “우리의 과실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니까.” “그럴 것 같은데요.”나도 조심스럽게 동의했다.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렇게 하지. 지점에서 고객들을
설득하는 일은 그대로 진행하되, 끝까지 초과지급액을 반환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고객들에 대해선 소송을 한다. 오케이?” 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게 상무님께 보고 드리지.”
3
“겨우
여섯 사람이 돈을 더 받았다고 인정했단 말이지? 백 명이 넘은 사람들 중에서?” 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게 한국적
현실이지.” “따지고 보면, 여섯 사람이라도 인정한 것이 대단한 겁니다.” 뻣뻣한 뒷목을 주무르면서, 부부장이
말했다.
“고객들의 입장에선 일단 잡아떼고 볼 상황이잖습니까?” “상황이 예상보다 어려운 것 같습니다.” 상황을 낙관했던
터라, 나는 좀 겸연쩍은 마음으로 보고했다.
“서방동 지점 차장하고 얘길 해봤는데요, 더 받은 돈을 반환하라고 얘기를 하면, 돈을
더 받지 않았다고 잡아떼고, 그러지 말라고 얘기하면, ‘아니, 당신 지금 나를 사기꾼으로 모는 거야’라고 화를 낸답니다.” “당연하지.
돈을 더 받았다고 인정하면, 주머니에 들어온 공돈을 잃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비양심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 아냐? 나라도 일단
잡아떼겠다.”부부장이 거들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진해서 반환할 사람은 적을 것 같습니다. 지금 일주일이 지났는데,
겨우 여섯이 인정했습니다. 아무래도 나머지는 소송까지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지점 차장의 의견은 그렇습니다.” 나는 부장이 다시 ‘한국적
현실’을 들먹이려나 했는데, 그는 그냥 씁쓰레하게 입맛만 다셨다.
4
다음날은 토요일이었다. 나는 아침
일찍 아파트 뒷산의 공원으로 올라갔다. 시간이 늘 부족한 은행원에겐 주말 새벽의 달리기는 가장 즐거운 일과들 가운데 하나였다. 산 중턱을 깎아
만든 공원인데, 운동장이 제법 넓어서, 달리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공원을 들어서자, 내 눈길은 공원 철책 바로 밖에 혼자 선
감나무로 끌렸다. 더러 단풍이 들기 시작한 잎새들 사이에 감 하나가 아직 그대로 달려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가벼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이제
제법 발그스레해진 그 열매는 한 주를 더 버틴 것이었다.
아직 덜 자란 감나무여서, 올해 열린 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한 스물
정도. 그래도 제법 감들이 꼴을 갖추었고, 몇 주 전부터 노르스름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츰 주황빛을 띠면서 탐스러워졌다.
그러다
지난 주에 감들이 모두 사라졌다. 꼭대기에 달린 작은 녀석 하나를 빼놓고. 더러 붉게 물들기 시작한 잎새들만 달고 있는 감나무를 보자, 가슴에
혐오, 분노, 서글픔, 그리고 체념이 뒤섞인 야릇한 감정이 고여서 달리기에서 즐거움을 앗아갔다.
내 마음을 그리도 어둡게 한 것은
그 감들이 그 자리에서 먹을 수 없는 땡감들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그 열매들에 손을 대도록 한 것은 목이 마르거나 배가 고픈 사람이 탐스러운
열매에 손을 뻗도록 만든 단순하고 건강한 식욕이 아니었다. 모두 따서 집에까지 가져가도록 만든 탐욕이었다.
그 자리에서 한 개
따먹는 것과 모두 따서 집에 가져가는 것 사이엔 큰 차이가 있었다. 그 점을 옛 사람들은 잘 인식했다. 초등학교 일학년 여름 방학을 외가에서
보내면서, 나는 외할머니에게서 그것을 자세히 배웠다. ‘서리’에는 섬세한 규칙들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작물들을 허락 없이 먹을 수 있는
한도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간절한 욕구를 충족하는 데 필요한 양이었다. 그 자리에서 먹은 것 말고 따로 갖고 가면, 그것은 이미서리가 아니라
도둑질이었다. 먹지 못할 땡감들을 스무 개씩이나 따서 집에 가져간 것은 ‘서리’가 아니었다. 검은 탐욕에 지나지 않았다.
청계천변에
심어진 사과나무들에 달렸던 몇 천 개의 사과들 가운데 가을까지 달린 것이 스무 개 남짓하다는 신문 기사가 생각났다. 제대로 자라지 않은 사과는
먹지 못하는 것이었다. 덜 자란 감은 우려서라도 먹지만, 덜 자란 사과는 그냥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그것은 탐욕의 문제만도 아니었다. 마음에
쌓인 울적한 기분을 풀려고 땀 흘리면서 운동장을 열심히 도는 사이, 내 마음 속엔 부장이 늘 하는 ‘한국적 현실’이란 표현이
울렸었다.
신선한 새벽 공기를 마시면서,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운동장을 돌았다. 내 생각은 어쩔 수 없이 오작동한 자동현금지급기에서
가외 돈을 받은 은행 고객들에게로 끌렸다. 그들은 거의 다 정직한 사람들일 터였다. 적어도 자신들이 정직하다고 여겼을 터였다. 그들 가운데
공원에 있는 감나무에서 익지도 않은 감들을 모조리 따갈 만한 사람은 많아도 한둘일 터였다. 만일 아이가 감을 탐내면, 하나쯤 따줄 정도였을
터였다. 그래서 오작동한 기계 때문에 정상적 방식으로 그들의 돈이 아닌 돈을 지급받은 일은 그들의 불운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이
유혹을 물리치고 일부러 은행을 찾아 돈을 반환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 해수욕장으로 가는 기차에서 지갑을
주웠는데, 상당한 돈이 들어있었다. 파출소 순경이 지갑을 받아 열어보더니, 놀라서 외쳤다, “어, 돈이 들었네.” 그때 나는
깨달았다, 파출소에 신고된 지갑들엔 현금이 든 적이 드물다는 것을.
나는 내 자신의 도덕성에 대해선 자신이 있었다. 만일 내가 그
고객들의 처지에 놓였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은행에 신고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내가 은행원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 고객들은 불운했다, 그들의 도덕성을 시험 받는 처지에 놓였다는 점에서. 게다가 그것은 보기보다는 어려운
시험이었다. 그것은 ‘한국적 현실’이 아니라 보편적 상황일 터였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런 시험을 치른다면, 과연 몇 퍼센트의 사람들이
합격할지 나는 자신할 수 없었다.
운동장을 열 바퀴 돈 다음, 가을 햇살에 몸을 말리는 열매에 마지막 눈길을 주고서, 나는 공원을
달려 나왔다.
5
“IT쪽에 공문을 하나 보내는 것이 어떨까?” 부부장이
물었다.
자동현금지급기의 오작동의 원인에 대해서 경영정보부에선 아직 공식적 설명이 없었다. 당연히, 부부장의 의심은 한결 깊어졌다.
나도 점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 경영정보부의 의견서를 빼놓고는, 소송 서류도 거의 다 갖춰진 터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야 무슨 근거가 남죠, 우리가 기술적 측면에 대해서도…….” “그렇지. 그러면, 김 대리, IT쪽에 보내는 공문을
작성해서 함께 올리지.” 부부장이 서류를 내 앞으로 밀어놓았다.
은행 안에서 오가는 문서들은 대부분 그렇게 책임을 떠넘기거나
나중에 일이 터졌을 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서류를 집어 드는데, 부장이 들어왔다. 눈길이 마주치자, 부장은
우리에게 자기 책상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회의는 끝났습니까?” 부장 책상 앞으로 다가서면서, 부부장이
물었다.
부장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의자를 돌려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소송을 하지 않기로 결정이
났는데…….” “예? 소송을 하지 않는다구요?”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초과 지급된 금액은 어떻게
하나요?” “회사가 손해 보기로…….” 여전히 창 밖을 내다보면서, 부장이 씁쓰레하게 말했다.
“조선 공사 삼일이라더니,
원…….” 불만이 가득하면, 부부장 얼굴은 오히려 환해지는 듯했다.
“왜 그만두기로 했습니까?” “영업 쪽에서 반대야.
우리가 소송을 하면, 주민들이 적대적이 된다는 거라.”
부장이 의자를 돌려 우리를 바라보았다. “좋은 얘기가 나올 린
없잖아? 그리고 서방동은 하나의 대규모 아파트로 이루어진 동네야. 주민들이 잘 뭉칠 수 있는 동네지. 우리 은행 배척 운동이라도 나오게 되면,
우리는 거기서 영업을 못하게 된다는 거라. 지역본부장이 그걸 걱정한다는 얘기야. 일리가 있는 얘기라서, 누구도 반대하지 못했어. 돈 몇 천만 원
때문에 그런 위험을 부담할 순 없잖아?”
나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소송을 했을 때 나올 주민들의 반응은 호의적이 아닐
터였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서 불평을 해대면, 얘기가 심각해질 수 있었다. “이게 한국적 현실이야.”
부장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실정법보다 ‘떼법’이 앞서고, 헌법보다 ‘국민정서법’이 더 권위가 있는 사회잖아?”
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부장님, 이미 초과지급액을 반환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요?” 부장이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하다니?” “원칙대로 한다면, 이번에 초과 지급된 사람들은 모두
같이 취급해야 하잖습니까? 그러면, 초과 지급액을 이미 반환한 고객들에게 그 돈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얘기가 되잖습니까?” “그것도
그런데.” 부장이 이마를 찌푸렸다.
“얘기가 간단하지 않네.” “그렇지만, 일단 들어온 돈을 다시 내주는
것은…….” 부부장이 어정쩡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내줄 근거가 없잖아? 이런 상황에 대한 규정이 있을까? 내
생각엔 없을 것 같은데.” “그건 최 부부장 얘기가 맞는 것 같은데. 우리 회사 돈을 소유권이 없는 사람들에게 내준다는 것이 되잖아?
자초지종이야 어떻든. 그렇잖아?” “그렇지만……정직하게 돈을 반환한 사람이나 은행의 권고에 따라 돈을 반환한 사람들은 손해를 보고,
법적으로 은행의 돈인데도 돈을 내놓지 못하겠다고 버틴 사람은 이익을 보는 것이……제 생각엔 여러 가지로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6
“부부장님, 저 고문 변호사 사무실에 갔다 오겠습니다.” “그래?”
앞에
놓인 서류를 왼손으로 문지르면서, 부부장은 가늠하는 눈길로 나를 잠시 살폈다. “사정을 설명하고…….”
부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 그리고 말야, 김 대리.” “예?” “그 일에 대해 너무 마음을 쓰지 말아.”
그가
달래는 어조로 말했다. “김 대리 얘기 다 옳아. 형평에서 문제가 있어. 하지만, 우리가 남의 돈을 받은 것은 아니잖아?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다시 돌려주려고 해도, 규정이 없잖아? 법적으로는 엄연히 우리 돈인데. 그렇잖아?” “예. 알겠습니다.” “김 대리가
하자는 것은 일을 만드는 거야. 은행 일은 그렇게 하면, 문제가 생겨.” “예. 부부장님 말씀 잘 알겠습니다. 그럼 전…….” 나는
인사하고 돌아섰다.
승강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부부장 얘기가 옳았다. 길이 없었다. 규정은
규정이었다. ‘나도 할 만큼 했으니, 이제…….’ 나는 자신에게 일렀다.
정말로 할 만큼 한 것이었다. 자진해서 초과
지급액을 은행에 반환한 사람들의 돈을 돌려주어야 형평에 맞는다는 얘기를 벌써 부장에게 두 번이나 했고 부부장에겐 대여섯 차례나 한 터였다.
심지어 자진해서 반환한 사람들이 돈을 돌려달라고 항의하는 사태가 나올지 모른다는 얘기까지 했다. 옳은 일을 위해서도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촘촘한 규정들에 따라 움직이는 은행의 일개 대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일에서도 그리 많지
않았다.
‘여기서 접기로 하자.’ 승강기에 타면서, 나는 자신에게 일렀다. 그리고 악의가 담긴 손길로 ‘닫힘’ 단추를 힘주어
찍었다.
7
고문 변호사는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사무장에게 소송을 하지 않기로 결정된 경위를
설명했다. 사무장은 건성으로 듣더니, 고문변호사의 비서 노릇을 하는 여직원에게 얘기했다. 여직원도 간단히 알았다고 대꾸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좀 싱거운 생각이 들어, 나는 사무장에게 초과 지급액을 자진해서 은행에 반환한 사람들의 얘기를 꺼냈다. 사무장은 여전히 건성으로
듣더니, 아무 문제가없다고 잘라 말했다. 원래 은행 돈인데, 무슨 문제가 생기겠느냐는 얘기였다. 형평이나 정의의 문제엔 생각이 전혀 미치지 않는
듯했다.
나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법무법인 사무실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은, 법을 다루는 사무실인데도,
정의라는 개념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듯하다는 사실이었다. 그저 소송에서 이기고 지는 것만을 생각하고 얘기할 따름이었다. 하긴 정의라는 개념을
생각하면서 일을 처리하는 것은 비현실적일 터였다.
내가 처음 은행에 들어와 수원 지점에 배치되었을 때, 지점장이
말했었다. “은행원에게 돈이 돈으로 보이면, 안 되네. 은행원에겐 돈이 일거리로 보여야 되네. 돈이 돈으로 보이면, 사고가
나거든.”
아마도 정의라는 말이 자주 들리는 법률회사 사무실은 소송에서 많이 이기기 힘들 터였다. 하긴 법을 다루는 사람들만이
그러하겠는가? 어느 곳이나 각박한 세상에서 정의는 사치스러운 개념일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내가 사치를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전문가들이나 실무자들이 사치라고 여기는 정의, 형평, 너그러움, 인권과 같은 가치들이 본질적 중요성을 지녔을 뿐 아니라 그런 가치들의 추구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비현실적이지 않다고 여겼다.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내 생각엔 우리 은행이 고를 수 있는
길은 하나였다. 소송을 해서 초과 지급액을 모두 거두어들이는 길뿐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은행의 재산을 함부로
관리해서 은행의 진정한 주인들인 주주들의 이익을 해칠 터였다. 만일 소송이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한다면, 형평의 원칙을 고려해서, 초과 지급액을
자진해서 또는 은행의 독촉을 받고 반환한 고객들에게 돈을 돌려주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직하거나 사리를 아는 사람들이 손해를 보고
부정직하고 떼를 쓰는 사람들이 이익을 볼 터였다. 그렇게 정직과 합리적 행태를 벌하고 부정직과 비합리적 행태를 보상하는 것은 사회의 틀을 허무는
짓이었다. 은행이 무슨 주장들을 내세우든, 그것이 궁극적 결과였다. 부장과 부부장은 그것이 사소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어떤 뜻에선 사소한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뜻에선 그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었다. 내 생각엔 정의에 관한 문제는 어느 것도 사소할 수 없었다.
사무장하고
여직원에게 인사하고서, 나는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다보았다. 모두 심각한 얼굴로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너른 사무실 어디에도 정의나 형평이
들어설 틈은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실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나는 서둘러 사무실을 나왔다.
8
법무법인
사무실에서 나오니, 네 시 오십분이었다. 시간이 어정쩡했다. 사무실에 들어가면, 바로 퇴근하게 될 터였다. 사무실에 돌아가야 할 만큼 급한 일도
없었다. 나는 그대로 퇴근하기로 했다. 일찍 집에 들어가서, 공원에 올라가 몇 바퀴 도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었다. 땀을 흘리면, 마음에 낀
어두운 생각들의 앙금이 좀 씻길 터였다.
공원으로 들어서면서, 눈길이 감나무로 끌리는 것을 느끼고, 나는 싱긋 웃었다. 감나무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다투는 것처럼, 높은 소리들이 났다.
아무리 찾아도 감이 보이지 않았다. 열매들을 다 잃은 나무가
문득 쓸쓸해 보였다. ‘세상, 참. 그예 누가 따간 모양이구나.’ 하나 남은 열매도 얼마 못 가리라고 생각했던 터라 그런지, 체념이
쉽게 가슴에 자리 잡았다.
모인 사람들 가까이 가자, 상황이 이내 파악되었다. 나무 의자들 둘레에 음료수 상자들과 막걸리 병들이
널려 있었고, 한쪽에선 휴대용 버너 위에서 냄비가 찌개 냄새를 풍겼다. 한 스무 명 되었는데, 족구를 하고 막걸리를 들던 참인 듯했다. 언쟁은
노인과 장년 사이에 벌어졌는데, 장년의 손에 감이 들려 있었다. 족구 하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감을 땄고, 그것을 보고 노인이 나무라면서,
언쟁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경우가 경우인지라, 노인은 당당했다. 감을 손에 쥔 사람도 동료들 앞에서 밀리는 꼴을 보이지 않으려고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나는 노인이 술을 마신 사람들에게 봉변당할까 걱정이 되었다. 둘러선 사람들 가운데 말리려는 사람은 없고
한마디씩 동료를 두둔하고 있었다. 둘레엔 사람들이 있었지만, 가까이 다가올 엄두도 못 내고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 공원 저쪽 끝 철망으로
둘러싸인 풋살 경기장에서 학생들이 내는 소리들이 아련히 들려왔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틈을 보아, 노인에게
말했다. “어르신, 어르신 말씀 이 분들도 다 알아들으셨을 테니까, 그만저하고 같이 가십시다.”
그 자리에서 빠져 나올 계기가
생긴 것이 반가운 듯, 노인이 선뜻 나를 따랐다. 나는 노인을 앞세우고 술 냄새 풍기는 사람들의 적대적 눈길들을 헤쳤다.
“야, 감
맛있다.” 감을 딴 사람이 뻗대던 기세를 꺾기 싫어 땡감을 씹은 모양이었다.
“늙으면, 곱게 집에나 박혀 있지, 왜 운동장에
나와서 자기 일도 아닌데 나서는 거여?” 누가 한마디 보탰다.
노인이 고개를 돌리려는 것을 나는 서둘러 막았다.
“어르신, 그냥 가십시다.”
“자, 기분 전환하자. 한판 더 붙자.” 누가 제안했다. 서넛이 동의하면서, 그 쪽도
분위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나는 노인을 살폈다. 일흔 가까이 되어 보였는데, 마른 체구에 자세가 꼿꼿했다.
이곳 공원을 찾는 사람들의 공중도덕은 낮았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으레 술판을 벌였다. 여름이면, 식구들이 다 나와 평상들을
차지하고서 버너에 고기를 구워먹고 술을 마시는 모습이 흔했다. 아이들이 노는 데 큰 개들을 풀어 놓는 일은 하도 흔해서, 처음엔 말리던 나도
이제는 포기한 터였다.
그러나 내 마음을 어둡게 하는 것은 그런 ‘한국적 현실’이 아니었다. 그렇게 공중도덕을 어기는 사람들을
억제하려는 사람들이 그리도 드물다는 사실이었다. 모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노인처럼 용감하게 잘못을 나무라는 사람을 보면, 그리도
고마웠다. 노인과 같은 사람들은 사회의 정의나 질서 같은 공공재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공공재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에 대해서 사람들은
고마워할 줄을 몰랐다. 바로 거기에 이 사회의 문제가 있었다.
나는 흘긋 돌아다보았다. 아까 구경만 하던 사람들은 다시 열심히
운동 기구들에 매달려 있었다. 그들에게 향한 눈길에 가벼운 분노와 경멸이 담기는 것을 느끼고,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노인 혼자서 무리를 지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감을 딴 사람의 잘못을 따졌을 때, 그들 가운데 누구도 노인에게 도덕적 성원을 보내지 않았다. 누가, 어른이든 아이든, 사내든
부인이든, 노인에게 다가가서 기웃거리기라도 했으면, 노인에게 작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터였다. 그 작은 노력도 하지 않는 ‘무임승차자들’이제
마음이 쪼그라들었음은 깨닫지 못한 채 하루라도 오래 살겠다고 몸 가꾸기에 그리도 열심히 매달리고 있었다.
그 사람들에 대한 내
판단이 너무 격하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개인이 공공재를 생산하는 일은 그리도 힘들었다. 하긴 개인들이 만들어내기 힘들기
때문에 정부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노인 혼자서 그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잘못을 꾸짖을 때 바라보기만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눈길을 보내기는 힘들었다.
9
그 날 저녁 나는 은행의 내부통신망에 글을 올렸다. 먼저
사고 경위를 설명하고 은행이 초과지급금에 대한 반환 소송을 포기한 사정을 밝혔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우리 은행이
자동현금지급기의 오작동으로 초과 지급된 금액들을 포기하기로 한 것은 현실적 결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원칙에 어긋나는 편법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당연히, 그 결정은 깔끔하게 마무리되기 어렵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스스로 초과 지급액을 은행에 반환한 고객과 은행의
반환 요구를 받고 선선히 반환한 고객들에 대한 우리 은행의 태도다. 초과지급액의 반환을 거부한 고객들에 대한 소송을 포기하고 고객들이 자진해서
반환한 금액은 그대로 은행의 재산으로 삼음으로써, 우리 은행은 정직한 고객들을 벌하고 정직치 못한 고객들에겐 포상한 셈이다. 이것은 분명히
형평과 정의에서 문제가 있는 조치다.
자진해서 초과지급액을 반환한 분들은 우리 은행의 좋은 고객들일 뿐 아니라 좋은 시민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칭찬받을 행위를 그렇게 벌하는 것이 어떻게 우리 사회나 우리 은행에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
도덕적 행동은 사회의
수준을 높인다는 점에서 공공재라 할 수 있다. 서방동 지점의 훌륭한 고객들은 이 사회에 공공재를 보탠 것이었다. 남의 재산을 우연히 손에 넣었을
때, 그것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일보다 이 사회의 틀을 튼튼하게 하는 일도 드물다. 그러나 우리 은행은 그런 행위의 고귀함을 깨닫지 못하고 고마워
할 줄도 모른다. 지금 우리 은행의 직원들은 모두 규정 뒤로 숨은 ‘무임승차자들’이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렇게 정직한
고객들에게 그들이 반환한 돈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형평과 정의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
물론 이내 반론이 나올
것이다. 실제로 “그 돈은 엄연히 은행의 돈이므로, 그렇게 반환할 근거가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러나 반환을 거부한 고객들이 지닌 돈도
엄연히 은행의 돈이다. 그 돈을 반환하라는 소송을 포기한 것도 실은 은행의 재산을 지키도록 한 규정에 어긋난다. 따라서 우리가 규정 뒤로 숨을
수는 없다.
합리적 방안은 은행의 통지를 받고 초과 지급액을 반환한 고객들에게 그 돈을 되돌려주는 것이다. 아울러, 스스로 은행에
반환한 고객인 이영순 씨에게는 해당 금액과 함께 별도로 감사의 뜻을 전해야 할 것이다. 이런 방안은 좀 번잡스럽지만 그런 번잡스러움을 넘는
가치를 지녔다.
이번 일은 사소하게 보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다. 본질적으로 정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에 관한
것일지라도, 정의의 문제는 결코 사소할 수 없다.”
다시 읽어보니, 좀 과격한 표현들이 눈에 띄었다. 그것들을 좀 부드럽게 다듬고
나서, 나는 잠시 망설였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눈앞에 어이없어 하는 부장의 얼굴과 ‘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올린 부부장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눈 감고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이란 진부한 표현이 그리도 생생하게 다가왔다.
10
“나는
지금까지 검사부는 일을 처리하는 부서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일을 만드는 부서더구먼.” 상무의 높지 않은 목소리엔 야유가
가득했다.
몸을 옹송그렸던 부장이 나를 흘긋 살피더니 상무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해서…….”
내부통신망에 글을 올릴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것이 부를 폭풍을 제대로 예상하지 못했었다. 폭풍은 일찍 닥쳤다.
글을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부장과 부부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댓글이 붙기 시작했다. 퇴근한 뒤 내부통신망을 읽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을 줄은 몰랐었다. 그리고 내가 출근하자, 부장은 더 말하지 않고 상무 방으로 나를 몰고 온 것이었다.
“은행은 큰 조직이야.
조직에선 경영진이 의사 결정을 하면, 그대로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돼. 도대체 자네는 자네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경영진의 의사 결정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게?” 대꾸를 기대한 물음이 아님을 잘 알았으므로, 나는 그저 고개만 더 숙였다.
“은행은 팀웍이야, 팀웍.
팀웍이 깨진 은행은 생존할 수가 없어. 무슨 얘긴지 알겠나?” “예.” “우리 은행이 당연히 우리 돈인 돈을 그냥 보유하겠다고
하는데, 자네가 왜 나서서 왈가왈부하느냐 말야?” “정의의 문제기 때문입니다.” 나도 모르게 내뱉고서, 나는 아차
싶었다.
“뭐, 정의의 문제?” 상무가 놀라서 큰 목소리를 냈다.
“예.” “그게 무슨
얘긴가?” “정의의 문제는 특정 개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정의가 워낙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일단 정의의
문제가 나오면, 모든 사람들이 당사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친 걸음이라, 나는 상무를 바로 보면서 대꾸했다.
“그래, 자네
말대로 정의의 문제기 때문에, 경영진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통신망에 불복한다는 사실을 띄웠다, 그런 얘긴가?” “그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아니면, 뭔가?” “저는 다만 이번 사고에 대응하는 데서, 원칙이 정해지면, 그 원칙을 끝까지 적용해야 문제가 덜
생긴다고 판단했습니다. 초과지급금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한다면, 모든 고객들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스스로 반환한 정직한 고객과 은행의
요구에 순순히 응해서 반환한 고객들이 피해를 보는 것은 정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판단해서…….” “지금 내가 얘기하는 것은 자네가 무엇이
정의라고 판단했느냐 하는 것이 아니야. 자네 판단만이 옳다고 공개적으로 경영진의 결정을 비방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야. 방금 내가 팀웍 얘기를
했지?” “예.” “바로 그거야. 자네는 지금 혼자서 영웅 노릇을 하는 거야.”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버텼다. 상무의 얘기에 조목조목 반론을 펴면서. 심지어 내가 제안한 방식대로 하지 않으면, 문제가 더 커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까지 했다.
마침내 상무가 두 손을 들었다. “얘기가 통하지 않는구먼.
나가보게.”
11
어제까지 나는 비교적 한직인 검사부의 이름 없는 대리였다. 오늘 아침 나는 은행 안에선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했다. 내 글에 대한 댓글들도 대부분 내게 호의적이었다.
나는 오후엔 ‘스타’가
되었다. 서전에서 발행되는 석간 신문 ‘서전일보’가 이번 사고와 함께 내 글을 요약해서 보도한 것이었다. 이어 급히 열린 간부회의에서 내가
제안한 방안대로 반환된 초과지급금을 고객들에게 돌려주기로 결정되었다. 댓글들은 더 늘어났다. 나에게 ‘올해의 제안상’을 줘야 한다는 글까지
올랐다. 예전에 같이 근무한 적이 있는 선배 여행원의 글이었다.
연말에 나는 ‘올해의 제안상’을 받지 못했다. 은근히 기대를 했던
터라, 속으론 실망이 작지 않았다. 대신 구조 조정에 따른 감원 대상에 포함되었다. 우리 은행을 인수한 ‘유라시안 벤처 그룹’이 10%의
인원 감축을 요구한 것이었다. 새 경영진이 부임하기 전에 스스로 인원을 줄이라는 얘기였다.
부장과 부부장은 무척 미안해했다. 하지만
상무가 감원 대상자들을 고르는 기준들 가운데 하나로 ‘팀웍을 해치는 자’를 꼽으면서 전형적 인물로 ‘검사부 김성현’을 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12
비행에 딱 좋은 날씨였다. 검푸른 겨울 하늘이 유혹하듯 품을 드러냈다. 뒷짐 진
자세로 몸을 젖히면서, 나는 느긋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내 삶에서 새로운 장(章)이 시작되는 거지.’ 인천 공항에
나오면서 열 번 넘게 한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구조 조정을 위한 감원 대상에 내가 포함되었다는 통지를 받았을 때, 나는 별다른
얘기 없이 경영진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내 태도가 예상과 달리 싹싹했던지, 부장이 의아한 눈길로 내 얼굴을 살폈다. 나는 잘 알았다, 상무가
나를 지목한 터에 부장에게 항의하는 것이 부질없음을. 그리고 우리 은행을 인수한 금융 그룹이 10%를 감원하라 지시한 터라, 어차피 부서마다
줄일 사람들의 수가 할당되었을 터였고, 우리 검사부에서도 누군가 나가야 했다. ‘내가 아니면 네가 나가야 한다’는 상황에서 억울하다는 내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은 없을 터였다.
은행에서 밀려나오자, 나는 전국 해안을 한 바퀴 돌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슴을 비우는 데는
겨울 바다보다 좋은 것이 없을 듯했다.
‘한번 부딪쳐 보자’는 생각이 든 것은 동해안 북쪽까지 올라갔다 서울로 돌아올 때였다.
버스가 힘들게 눈 덮인 한계령을 넘은 순간, 문득 몸에 힘이 고이는 느낌이 들었다. 아직은 먼 봄을 먼저 느낀 겨울나무에 수액이 도는 것처럼.
서울에 닿자, 나는 새로 부임한 은행장에게 편지를 썼다. 서방동 지점의 자동현금지급기의 오작동으로 시작된 사고가 그의 퇴출로
끝나게 된 과정을 소상히 밝혔다. 나는 그 일이 궁극적으로 ‘정의의 문제’라고 주장하고 “정의의 문제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결코 사소할 수
없다고 저는 아직도 믿습니다”라는 구절로 글을 끝냈다.
그 다음 주에 은행장이 나를 보자고 했다. 인도계 영국인인 은행장은
호의적이었다. 내 편지를 꺼내놓고 몇 가지 물었다. 주로 내가 내부통신망에 올린 글과 관련된 물음들이었다.
은행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의 퇴출은 전임자가 결정한 일입니다. 그리고 나는 전임자의 판단을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 은행이 당신의
퇴출 결정을 번복하기는 어렵습니다. ”
억지로 얼굴에 웃음을 올리면서,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한번 시도해볼 만하다고 판단했을 따름입니다. 이렇게 저를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일어서려 하자,
은행장이 손짓으로 말렸다. 그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이 은행에 복직은 힘들지만, 우리 ‘유라시안 벤처 그룹’은 다른 은행들도 가졌습니다.
그리고 정의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젊은이는 어떤 조직에서도 필요한 사람입니다. 우리 ‘유라시안 벤처 그룹’처럼 범지구적 기업에선 특히
그렇습니다.”
내 가슴이 문득 부풀어 올랐다. ‘환희의 송가’가 귀를 가득 채웠다. “싱가포르에서 근무할 생각은
없습니까?” “싱가포르……은행장님, 싱가포르는 동아시아의 금융 허브입니다. 그곳에서 일한다면, 은행원인 저로서는 큰 행운일
것입니다.” “좋습니다. 내가 그동안 당신이 일할 만한 자리를 알아 봤습니다.” 새로 일할 곳에 관한 은행장의 설명을 듣고 나서,
내가 고맙다고 인사하자, 은행장은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에 대한 대우도 정의의 문제지요.”
“열한시 십 분에 싱가포르로
가는…….” 탑승 안내 방송이 나왔다. 나는 다시 몸을 뒤로 젖히면서 두 주먹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나직이 뇌었다. “정의의
문제라.”
"복거일 : 소설가·사회평론가. 1987년 장편소설 『비명을
찾아서』로 데뷔. 저서로 장편소설『높은 땅 낮은 이야기』, 『역사 속의 나그네』 등이 있으며, 사회평론집으로는『자유주의 정당의
정책(1998)』,『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2003)』,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2003)』,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2005)』등이
있음"-편집자 주
(시대정신, 200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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