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어떤 역사적·사회적 가치를
문제삼는 예술보다 직접적으로 인간들을 관리한다. 또한 이것은 인간이 독자적으로는 절대 존재할 수 없다는 원리에서 볼 때 사회적 성격이 가장 강한
문학의 갈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문학 갈래의 출현은 역사 없는 사회란 없으며, 사회 없는 역사도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톨스토이는 이런 것을 두고 예술가의 사명은 논쟁의 여지가 없도록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존재하는 무수한 현상 가운데서
독자들이 삶에 애착을 지니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역사성과 인간의 사회성이 소설에 결합되어, 아무리 환상적인
소설일지라도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볼 때, 소설가는 작품의 質(질)과 형식을 짜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응시하고, 현재 그곳의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作家(작가)는 당대의 삶에 깊이 파고들어 그것과
대거리를 벌여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시대와 치열하게 싸우면서 그것에 대해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야 한다. 마땅히 소설가는 자신의 목전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과 그것의 총체적 모습에 제1차적 관심을 두어야 한다. 사르트르식으로 말하자면 正鵠(정곡)을 향해, 곧 사회와 역사의 핵심을
향해 長進(장진)을 해야 한다. 글쓰기는 쓰는 사람을 대변하면서 동시에 세상을 향한 발언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양면성을 지닌다.
우리의 경우 글쓰기에서 나타나는 이런 면은 현대에 와서 작가를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 또는 예언자적 자리, 혹은 사회정의의 구현자적
위치에 놓이게끔 만들었다. 1960년대 이후의 反(반)독재문학이나 민족문학, 1970년대 후반부터 나타난 민중문학에서 이런 문학의 典範(전범)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잠깐이긴 하지만, 국민소득 1만 달러와 함께 상륙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열기가 文壇(문단)으로 진입하면서
민중문학도, 그 전설적 인물 같던 몇몇 文人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런 변화 속에 지금은 문화 전반이 위기에 빠져 있고, 특히 문학은 산업시대의
첨병인 컴퓨터나 텔레비전에 밀려 존재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 대표적인 인문적 지식인이 제각기 문학의 위기를 아무리 말해도 누구 하나 귀담아 듣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한데 수천명의 文人들은 삼삼오오 떼를 지어 다니며 저마다의 깃발을 올린다. 한 시대를 앞서가던 문학은
뒷길로 사라졌고, 그 빛나던 작가 의식 또한 그 행방이 묘연하다. 지금 이렇게 한 시대의 문학은 저만큼 퇴조하고 있다.
<그날이 오늘이라면 얼마나 기뻐 파도 치겠는가 너와 나 엉겨 얼마나 기뻐
울음바다이겠는가 꽃 같은 이 강산 너무 슬펐다 쇠울짱 첩첩으로 가로막혀
그 무엇 때문에 그렇게도 미움과 반역의 세월이었던가 오 가슴팍 너른너른
이제 그날이 다가오는가 수많은 피와 눈물 헛되지 않았다고 온 세상에 새겨야 할
그날은 오는가 그리하여 아직 우리에게는 하나의 감격이 남아 있다
함부로 써버릴 수 없는 것 그것 그 감격의 날이 남아 있다 이제 우리는 더 달려가야 한다
몇천년의 조상 몇만년의 자손과 함께 저 통일의 오늘이여 거기까지-고은, 「그날이
오늘이라면」 全文> 통일의 날을 노래한 詩(시)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통일은 여전히 아득한 거리에 놓여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동요가 단조로운 가락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통일」이라는 어휘 자체가 가지고 있는 內包(내포) 때문일 것이다. 詩 「그날이 오늘이라면」 역시,
독자를 直情的(직정적) 분위기로 끌어내면서, 새로운 시대, 기대의 세계를 예보하고 있다. 이제 분단 이야기, 죽고, 헤어지고, 떠돌고,
상처받고, 행방불명되고, 살해되고, 추방당하고, 짐승처럼 싸우던 내력은 끝내야 한다. 왜 우리만이 유독 한 세기의 비극을 모두 뒤집어쓴 것을
두고두고 이야기해야 하는가. 한스런 이야기는 걷어치워야 한다. 「오늘이 그날이라면」이 비록 하나의 환상일지라도 우리는 이런 기대의 세계를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한다. 이와 같이 분단의 성벽을 글쓰기로 허물려는 사람들이 근래에 여기저기 하나 둘 나타나고 있다.
離散(이산)되었던 가족의 만남, 이데올로기를 넘고, 死線(사선)을 넘어 신천지를 향해 탈출하는 脫北(탈북) 소재가 문학 형식으로 등장하고 있다.
우선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실은 이런 문제가 記錄文學(기록문학)의 형태로 상당수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에는
텔레비전이 이 문제를 방영하여 성금까지 모음으로써 사회적 관심사가 되었지만 지금은 다른 세상사로 묻혀버렸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전히
진행중이다. 기아·탈출·살육의 땅 1998년 「月刊朝鮮(월간조선)」에 발표되었던
29세 脫北여성의 충격수기 「流民(유민)의 땅, 야수의 땅」(3,4월호), 그리고 올해 같은 잡지에 발표된 김상연의 「지옥으로부터 온
편지」(1월호), 전일수의 「동무도 인육국수를 먹었습니까」(5월호), 40대 한 남자의 「아버지, 아- 하세요」(7월호) 등의 手記가 그런
예이다. 이 문제를 「流民의 땅, 야수의 땅」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먼저 다음과 같은 대문을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⑴ 내가 밖으로 나가자 기춘이는 거머리처럼 따라나와 손을 잡아 끌었다. 내가 미친 듯이 대들자 그는 강제로 나를 끌고 들어갔다. 「나를
팔아 넘기든 북에 넘기든 상관 없다」며 이판사판 덤비는 나를 때리기까지 하였다.(중략) 김춘희와 기춘이가 심각한 말을
나누는 걸 듣다가, 지금 내 처지가 어떤 지경인지 알게 되었다. 알고보니 기춘이네 패가 따로 갈려 몰래 나를 빼온 것이었고, 나머지 패거리들이
나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또 한쪽에서는 승일이네 집에서 여전히 나를 백방으로 찾아다니고 있었다. 나머지 패들은 기춘이네가
자기들 몰래 나를 빼돌려 돈을 다 차지하려는 줄 알고, 나를 찾기만 하면 당장 중국에 팔아버리겠다고 난리라는 것이었다. 빌려다 쓴 돈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중략) 그런데, 김춘희가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나를 한국에 보내는 방향으로 노력하자고 기춘이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나를 나머지 패들에게 넘기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텐데 뜻밖에 그런 말을 해주니 너무 고마웠다. 김춘희가 내 한 가닥 희망이었다.
「月刊朝鮮」 1998, 4월호, p.467> 위의 인용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팔려가는 여인」 모티프. 둘째, 복잡한 사건의 발단이 되는 돈 문제. 셋째, 한국·북한·중국 3국간의 갈등 관계. 이상
세 가지 문제가 창조적 문학과는 다른 구도 속에 독자를 향한 기대감이 성공적으로 처리되고 있다. 그런데 만주·간도를 배경으로 한 문학작품으로
팔려간 여인의 모티프가 나타나는 소설은 1930년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용악이 한숨처럼 『북쪽은 고향/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라고
토로하기 이전에도 최서해, 강경애는 그 땅, 貧窮(빈궁)의 대지 韓滿(한만) 국경지대를 짐승의 땅, 야만의 대지로 묘사했다. 안수길 역시 생존을
위해 목숨을 내거는 離農民(이농민)을 통해 한 시대를 증언했다. <⑵ 『에구 룡네야! 부모를 못 만나서 네 몸을
망치는구나! 에구 이놈의 돈이 우리를 죽이는구나!』 문서방의 내외는 그 밤을 인가(印哥)의 집 울타리 밖에서 새었다. 누구
하나 들여다보지도 않는데 인가의 집에서 내놓은 개들은 두 내외를 잡아 먹을 듯이 짖으며 덤벼들었다.-최서해, 「홍염」(1927) 일절.
⑶ 『이년! 너 사염(私鹽)을 팔러 다니는 년이구나, 당장 일어나라!』 순사는 그의 눈치를 채고
이것이 관염이 아닌 것을 곧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소리치며 그의 손을 잡아 낚아챘다. 별안간 그의 몸은 화끈 달며 어젯밤 산마루에서
무심히 아니(13자 가량 검열로 삭제당함) 들었던 그들의 말…(이하 결말 부분 22자 1행이 검열로 삭제당함)-강경애, 「소금」(1934)
일절. ⑷ 『생각해 봐라. 낸들 지새끼를 몹쓸 얼되놈한테 주기 좋을 턱이 있니? 하나 할 수 없는 일이로구나. 아버지
마음도 네가 곰곰이 생각해 봐라.(중략) 나는 모르지만 조선 사람이 되사람보다야 낫잖겠니. 그까짓 거야 모르겠다마는 니 하나만 거기 가서
죽었슴네 하구 하라는 대로만 해보려무나. 니 덕에 니 애비 어미가 잘 살자는 거 아이라…』-안수길, 「새벽」(1935) 일절>
인용문 ⑵는 살아길 길이 없는 離農民 동포가 딸을 되놈에게 팔아먹는 사건이고, ⑶은 천신만고 끝에 소금을 목적지까지 가지고 온 주인공
여자가 「이 소금을 팔면 8원하고 80전, 그러면 한달 집세나 마저 물고… 한달 살까. 이것을 밑천으로 소금 장사나 해야지」 하다가 순사에게
붙들려 소금 빼앗기고 몸빼앗기는 내력, ⑷는 빚 값에 딸을 팔아넘겨야 하는 부모의 고통을 다루고 있다. 한
시대를 증언·기록하겠다는 역사 의식 그런데 1930년대, 소위 빈궁문학으로 대표되는 최서해와 강경애의 소설에서
고발·비판되었던 기아, 탈출, 살육의 문제를 우리는 인용문 ⑴에서 모두 발견할 수 있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 속에서
신음하던 그 악몽 같던 현실이 지금도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물론 최서해, 강경애, 안수길은 당대 동포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고, 그것을 창조적 문학으로 형상화했다. 모든 한국문학사는 이들 작가들의 이런 작품을 事實性(사실성)에 입각한 리얼리즘의 한 전형으로
평가한다. 「流民의 땅, 야수의 땅」은 글의 소재가 실제적·경험적 사실에 기초를 둔 기록문학이다. 기록문학의 특성을 한
연구자는 이렇게 규정한 바 있다. 작품적 소재의 사실성. 창작의도가 지니는 소속 집단에 대한 현실적 효용성. 총체적 지배
원리인 실증적 현실성. 유기룡은 「한국기록문학연구」에서 이밖에도 여러 조건을 내걸고 있지만, 「流民의 땅, 야수의 땅」의
경우는 위의 세 가지 조건을 정확히 갖추고 있는 문제의 글이다. 그밖에 「지옥으로부터 온 편지」, 「동무도 인육국수를 먹었습니까」, 「아버지,
아- 하세요」도 글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정신은 휴머니즘, 동포와 민족의 난국을 극복하려는 시대 의식, 그리고 한 시대를 증언하고
기록해두겠다는 역사 의식이다. 作家들의 직무유기 현실의 可視的(가시적) 세계
안에서 특수하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지만 기록문학이 이렇게 심각하고 진지한 脫北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과는 달리, 창조문학은 거의 그 직무를
유기하듯이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페미니즘, 포스트모더니즘, 新역사주의 등의 말에서 나타나듯이 현 문단의 큰 한계는
作家의식, 주제의식의 빈곤이다. 물론 우리가 문학에서 無(무)관심적 명상, 非(비)실용적 심미적 창작 의지, 개성적 문체·표현 등이 문학의 다른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민중문학의 강한 주제의식이 사라진 자리에 지금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가.
脫北者 수기, 일기 등이 수필의 하위장르로서 또는 소설로 가는 前(전) 단계의 논픽션으로서 아직 본격문학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근래에 나타나고 있는 이러한 문학 底邊(저변)의 현상은 무엇보다 국문학의 오랜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한국문학 작품들이 총체적으로 지니고 있는
내용상의 한계점에 대한 새로운 지평의 확대와 그 극복이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예보하고, 민족과 동포의 새로운 시대를 제시하고
탐색해 나간다는 점에서도 괄목해야 할 사회현상, 문화현상이다. 그것은 이 글을 시작하면서 말한 바와 같이 이런 면, 특히
散文(산문)문학으로서의 소설이 탐색해야 할 큰 사명의 하나가 사회 현상에 대한 점검이고, 그 진로의 비판, 예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맞이했던 가장 암담했던 시기, 1930년대 말, 1940년대 초, 깨어 있던 우리의 시인·소설가들은 北만주 벌판,
두만강반(江畔)이며 오랑캐령을 헤매는 동포들을 작품의 소재로 삼으면서 그런 재난이 결코 외면될 수 없는 민족·동포의 현실임을 詩로서 비판했고,
소설로서 검증했다. 가령 이용악은 『그가 아홉 살 되던 해/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어디론지
사라지고/이튿날 아침/북쪽을 향한 발자욱만 눈우에 떨고 있었다//더러는 오랑캐영 쪽으로 갔으리라고/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이웃
늙은이들은/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낡은 집」 일절)며 동포가 이산되는 그 현장에서, 꽃 피는 철이 와도 꿀벌하나 날아들지 않고 황폐해져
가는 민족의 삶을 묘사했다. 이수형도 『바다가 파랗게 내다보이는 고향 아라사 가까운 해풍에 열기꽃이 붉게 피여난 모래밭엔
그렇게도 원통히 죽어간 애비들이 묻혀 있었다』(「아라사 가까운 故鄕」)며 두만강 먼 구비 너머 서쪽, 하얀 눈발에 묻힌 북쪽의 고향, 국경지대,
변방의 동포를 잊지 못해 서러워했다. 그것만이 아니다. 오장환이 『눈 덮인 철로는 더욱이 싸늘하다』며 『소반귀풍이 옆에
앉은 농군에게서는 송마지의 냄새가 난다/힘없이 웃으면서 차만 타면/북으로 간다고/어린애는 운다』는 「北方의 길」을, 白石은 『아,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은 나의 자랑은 나의 힘은 없다. 바람과 물과 세월과 같이 지나가고
없다』(「北方에서」)며, 아무것도 없는 세월, 모두가 떠나버린 공간, 고향의 폐허를 恨(한)처럼 되새김질했다. 한편 이러한
문제를 안수길은 「벼」, 「새벽」과 같은 소설에서 離住(이주) 동포가 천신만고 끝에 이민족의 박해를 이기고 수전을 개척하고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민족 敍事(서사)의 드라마로 형상화시켰다. 국문학사상 최초의 大河(대하)소설 「북간도」는 이런 작품의 속편적 성격을 지닌다.
정을병의 脫北者 소설 이런 사실과 비교할 때 오늘의 문인들은 너무나 안일한 생활인이 되어
있다. 인기 있는 작품을 쓰겠다는 것이 문학적인 이유보다 경제적인 이유가 더 강하다고 한다면, 그런 작가는 이미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가 아니다.
소시민 의식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평범한 기능인, 쟁이에 불과하다. 돈만 생기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천민 자본가의 生理(생리)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다. 설사 선비처럼 한복을 갈아 입고, 자기 소설 광고 모델이 된다 해도, 그의 작가 정신은 이미 시장 한 모퉁이에 가게를
차린 장사치와 형입네 동생입네 하며 손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단 한쪽에서는 통일문학의 장을 여는 소설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런 소설에서는 분단으로 인한 가족 이산 모티프가 상봉으로 바뀌어 나타난다. 그리고 그 만남의 공간은 중국 연변인데, 남한의 혈육이
중국을 거쳐 연변으로 가고, 북한의 혈육은 두만강을 건너 연변으로 와 맺혔던 恨을 푼다. 정을병의 脫北者 소설 「남과 북」도 주요 사건의 공간적
배경은 연변이다. 이것은 많은 脫北者들의 手記의 현장이 바로 연변이라는 점과 일치한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할 때 당대
한국문학이 한 단계 발전·변화되면서 민족문학으로서 새로운 지평을 열기 위해서는 동포들의 가장 치열한 삶의 현장, 생존의 문제가 걸린
非情(비정)한 대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이 문제가 문학의 소재 또는 주제로 본격화되는 일이다. 주지하듯이 고전문학에서 일기, 수기, 기행문 같은
기록문학이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의 정신사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또한 그런 작품들이 국문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해왔다.
일본문학의 경우에서도 그들의 한 문학사가(衫浦明平)는 일본의 근대소설 발전이 늦어지게 된 원인의 하나가 에도(江戶)時代 융성했던
기록문학의 특수성을 수용·발전시키지 않은 것에 많은 이유가 있다고 했다. 그들의 이런 문학관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 좋은 예가 북한 동포의
탈북수기 「流民의 땅…」 일본어판이 수만 부 팔린 데서 나타난다. 이것은 그런 책이 몇 천 부도 팔리지 않은 우리의 사정과는 아주 다르다.
오늘의 脫北문제를 다룬 논픽션은 오늘의 한국문학이 부딪쳐 있는 正體性 없는 문학, 민족적인 것이 사라져 버린 소위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의 작품들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면서 통일문학의 새 시대를 여는 초석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月刊朝鮮」 10월호에 게재된 「중국 조선족 여의사의 북한 오라버니 방문기」는 手記의 모티프, 배경, 인물 설정, 테마 등의 문제에서 전래의
기록문학과 닿아 있고, 그것이 또한 민족 화합, 동포 수난의 기록과 증언이라는 동포의 보편적 삶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통일의 시대를 여는 어떤
새로운 조짐이라 할 수 있다. 脫北者 手記-統一문학의 種子 脫北이 문제가 되는
기록문학이 가지고 있는 세 번째 특성은 그것이 한 시대상의 정확한 지적, 곧 분단의 장벽이 허물어지는 이 시대상의 한 특징으로서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박덕규의 「노루사냥」, 정을병의 「남과 북」은 脫北者가 서울에서 부딪치는 이질감, 소외, 그리고 귀순자를 마치
未開(미개)한 나라의 피정복인 다루듯 하는 남한 사람들의 태도 등에 소설의 플롯이 맞춰져 있다. 자신의 이익(돈) 앞에서는 안면을 몰수해버리는
현재의 한국세태를 작가는 흘러가는 이야기라며 다루지만, 그 이야기 속에는 사실 동포애를 잊은 이기주의적 통일정책에 대한 어떤 충고가
內在(내재)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남과 북」의 장인화, 황동희 박사가 제3국에서 통일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다가 한국으로 왔으나, 정작
서울에서 발견한 것은 냉대와 소외뿐임을 발견하고, 다시 조국을 떠나는 스토리에서 잘 나타난다. 月刊朝鮮 11월호의 「함경북도는 해방구가 되고
있다」라는 기사 역시 이런 주제이다. 이런 글쓰기의 의미 속에는 다큐멘터리로서의 입증성의 의미가 있고, 그 입증성은 작가적
사명감, 글쓰기의 양식과 신념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역사적 서술로서 우리 민족이 당면하고 있는 연대감, 공동 운명 등을 동포애적
인간주의에 호소하여 경각심을 부여하자는 의도이다. 또한 이것은 역사의 준거로서, 그리고 역사적 현실에 대한 선도적 역할을 하겠다는 작가 의식의
소산이다. 세태소설이 소설적으로 파악되는 사회적 현실이라고 할 때, 그리고 기록문학이 시대 정신의 반영이라고 할 때,
논픽션은 픽션으로 이행하기 위한 前 단계에 놓인 敍事 형식이라 할 수 있다. 脫北문제가 세태소설로 얼마나 형성될 것인가의
문제는 물론 미지수이다. 그러나 문학이 창조문학으로만 한정될 때, 문학의 사명이나 敍事장르의 발전은 물론 문학 본래의 역할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의 한국 소설문학이 처해 있는 어떤 한계를 보다 지양하고 극복해 나아갈 하나의 계기를 얻기 위해서는 지금 脫北者 수기 형태의
글쓰기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에 작가와 문단은 깊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 동포만이 한 세기의 비극을 뒤집어쓴 채
죽고, 이별하고, 고문당하고, 개처럼 끌려다니다가 行不者(행불자)가 된 분단, 그 비극의 역사가 주제였던 이른바 분단문학을, 만나고 화해하고
껴안고 손을 잡고 재회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통일문학의 種子를 바로 이런 류의 글쓰기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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