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발굴 원문] 김수영 시와 산문

이강기 2015. 10. 2. 11:23

[발굴 원문] 김수영 시와 산문(上)

 

“이승만 뒤나 따라가 살든지 죽든지 양자 택일하라”

 

 

글 : 月刊朝鮮 2012년 8월호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변한 것은 양장, 융기한 젖통이의 모습, 미스 킴 등이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개성의 결핍
⊙ 어용시인·아부시인들은 권력의 편에 서서 나팔을 불기 전에 자격을 상실한 자들
⊙ 1960년 4·19, 4·26사태를 정확하게 통찰하지 못하는 사람은 시인의 자격이 없어

[편집자 註]
시는 김수영의 한자 표기를 그대로 실었다. 다만 시어는 표준어규정에 따랐다. 산문은 원문을 충실히 유지하되 한글맞춤법을 따랐으며 한문으로 된 단어를 국한문체로 옮겨 썼다.
(자료 제공=공연예술자료가 김종욱씨)

 

  한강변
 
   관광도로가 곧 생긴다고 벌써 부터
  땅값이 들먹거리는
  얼음 창고 자리 옆의 큰 나무 선
  낭떠러지는 현기증이 나서 안된다.
  盧씨 지붕이 보이는
  왕년의 미두왕 조준호 네 땅이라나 하는
  전나무가 선 골짜기가 좋은데
  명동의 ‘은성’ 마담과 그의 일당들이
  이사를 왔고 유현목감독의 장인 되는
  분이 二百평 가량 땅을 사 놓았고
  이대 음악과를 나온 서울시장의
  조카딸 되는 미인이 그
  부근에 살고
  있는 것을 안지 부터는
  그쪽도 가지 않게 된다.
  四, 五年 전 까지 일본 사람들이 만든
  못 쓰게 된 風雨計가 섰던
  붉은 벽돌의 얼음창고 서쪽의
  시멘트로 된 얼음창고 두동은
  그러고 보니 그 동안에 상당히 역사가
  바뀌었다.
  영화촬영소를 하다가 납공장이 됐다가
  지금은 캐비닛 공장
  그 옆의 바라크집은 걸레 만드는 공장
  福자와 禧자를 그린 캐비닛이
  트럭이나 구루마에 실려 갯벌 길옆을 돌아 나오고
  古鐵 부스러기를 실은 트럭이
  또 그 갯벌 옆길을
  돌아 들어 간다.
  관광도로는 이 공장 앞마당을 자르고
  風雨計가 선 벽돌 탑을 부수고
  나갈 모양이다.
  잘 됐다.
  第二漢江橋를 지나서 앞으로 運河가
  생기면
  汽船이 정박할 예정이라는
  蘭芝島까지 뻗칠 예정이다.
  그러나 아직도 밤섬에서는
  땅콩들을 모래 위에 심고
  나룻배를 타고 건너오는
  국민학교 아이들이 호주머니에 넣고 와서
  동무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는
  밤섬의 이 신기로운 여름 열매.
 
  (출처=《女像》 1965년 8월)
 
 
  아침의 誘惑
 
   나는 발가벗은 아내의 목을 끌어안았다.
  山林과 時間이 오는 것이다
  서울驛에는 花環이 처음 生기고
  나는 秋收하고 돌아오는 伯父를 期待렸다
  그때 도무지 모-두가 미칠 것만 같았다
  무지무지한 坑夫는 나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것은 千字文이 되는 지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스푼과 성냥을 들고 炭鑛에서 나는 나왔다
  물 속 모래알처럼 -
  素朴한 習性은 나의 아내의 밑소리부터 始作되었다
  어느 敎科書에도 질妬의 感激은 무수하다
  먼 時間을 두고 물속을 흘러온 흰모래처럼 그들은 온다
  U.N委員團이 每日 오는 것이다
  花環이 花瓣이 서울驛에서 날아온다
  모자 쓴 靑年이여 誘惑이여
  아침의 誘惑이여
 
  (출처=《自由新聞》 1949년 4월 1일)
 
  [편집자註-2003년 민음사판 <아침의 유혹>에는 8행의 ‘탄광’을 ‘여관’으로 표기했다. 또 11행 ‘감격’을 ‘○○’라고 쓴 뒤 주석을 달아 ‘판독할 수 없어 복자(覆字)로 처리했다’고 밝혔다. 14행 ‘화환이 화판이’를 ‘화환이 화환이’라고 오독(誤讀)했다. ‘화판’은 ‘꽃잎’을 뜻하는 말이다.]
 
 
  內室에 감금된 愛慾의 탄식
 
  - 여성의 욕망과 그 한국적 비극
 
  남존여비의 철학
 
   대체로 한국 하급 사회의 부인들은 교육도 없고 취미도 없고 교양도 없고, 일본의 하류부인의 단정한 품과 중국 농가 부인들의 친절한 맛에 비해서 너무나 비교가 안 되고, 입고 있는 옷은 때가 새까맣게 절어서 흰 옷인지 까만 옷인지 분간이 안 가고 세상에 태어나서, 남의 아내가 되면 자기의 옷은 개의치 않고 다만 남편의 옷만 빨게 마련인지, 어떤 개울엔 가 보아도 천을 물에 담가서 널찍한 돌 위에 펼쳐 놓고 빨랫방망이를 양손으로 번갈아 휘두르면서 불이 나게 두들기고 있는 여자들이 어찌나 많은지, 이렇게 마구 두들긴 천은 물에 헹궈서 모래 방죽에다 말리는데 정성껏 두들긴 보람이 있어 볕을 받은 빨래는 눈이 부시도록 희고 윤이 난다.
 
  여름옷은 그대로 참을 수도 있지만, 춘추복의 바지저고리 같은 것은 솜을 넣은 것을 뺄 때마다 뜯어서 빼어 빨고 나서 또 넣고 꿰매야 하니 여자의 일생은 실로 뼈저린 고행(苦行)인 것이다.
 
  농촌의 아내들은 온 식구들의 옷 바라지를 하는 것 이외에 부엌 안 일체를 한다. 쌀 빻기, 키질, 물 긷기도 아내의 일, 무거운 짐을 머리에 얹고 장을 보러 가는 것도 아내의 일, 절구질을 하고 물동이를 이고 먼 곳에 있는 우물에까지 다니는 것도 아내들이 도맡아 하는 일이다.
 
  아침에는 제일 먼저 일어나고, 밤에는 제일 늦게 잠자리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피로한 손으로 밤에는 바느질을 하고, 실을 꼬고 베를 짜는 것도 아내라는 이름이 붙은 사람이 할 일, 그 밖에 적지 않은 아이 어미가 되면 쉴 때도 일을 할 때에도 세 살이 되기까지는 노상 등에 업고 다녀야 하는 비참한 꼴이라니, 농부의 아내가 되어서 무슨 낙이 있고 무슨 즐거움이 있는지 도시 모를 일이다. 몇 년이 지나서 며느리를 보게 되기까지는 이 고통은 도저히 면할 길이 없다. 불쌍하게도 그들은 서른만 되어도 벌써 쉰 살이나 되어 보이는 노상(老相)을 하고, 마흔이면 이가 다 빠지고 할머니 소리를 듣는다. 사랑에 취하는 젊음이 언제 있었는지, 청춘의 방황은 그들에게서는 찾아볼 길이 없고, 나날이 지옥 같은 시집살이어니, 마음에 위안을 주는 신랑은 그저 귀신을 섬기는 일 정도다.
 
  상류로 갈수록 여자는 격리되어서 절대로 세상과 관계를 갖지 못하게 되어 있다. 부인은 집에 있어서, 내실이라는 방안에 처박혀서 남자의 방을 향해 창문도 열어 놓지 못하게 되어 있고, 방문자는 몇 번을 찾아가도 내실이 어디인지 추측도 할 수가 없다. 부인의 안부를 물어보는 것은 실례가 된다. 정중한 유폐리(幽閉裡)에 있는 부인은 물론 교육도 없고, 교양도 없다. 그저 저속한 생물(生物)로서 취급되고 있다. 그러면 남자는 여자보다 무엇이 나은 게 있는가. 다만 오래된 관습으로 여자에 대해서 존경을 강요하고 있지만, 자기들이 배우고 수양하는 것은 남존여비(男尊女卑)를 가리키는 천박한 철학, 간단한 역사 그 밖의 다소의 문학뿐이다.
 
  다만 남자로 태어났다는 우연한 팔자 때문에 성년이 되면 이유 없이 여자의 존경은 일층 더 두터워진다.
 
 
  여성은 안방 재산
 
  부인의 격리유폐는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생긴 습관인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이조(李朝) 초기에 사회의 도의(道義)가 퇴색하고 음비(淫卑)의 풍조가 성한 시대에 시작된 것 같다. 그 후 5백년 동안을 면면히 전해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 기원은 남편이 그의 아내의 소행(素行)을 의심한 데에서 온 것이 아니라 남편이 그의 친구를 의심한 데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당시의 서울의 부패는 특히 상류계급의 문란한 기풍은 놀랄 만한 것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남편이 그의 아내를 감추고 딸을 감추고, 타락한 남성에게 근접하는 것을 꺼려하고, 미천한 상년이 아니면 문밖출입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 어느 틈에 풍속화되어서 법률 이상으로 무서운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인의 외출은 사람 눈을 피해서 밤에만 하게 하고, 낮에 나갈 때에는 밀폐된 가마나 조군을 타고, 그런 것에 타지 않는 것은 미천한 노동자의 계집뿐이다.
 
  언젠가 민비(閔妃)가 배알(拜謁)했을 때 전하(殿下)는 “나는 서울 거리를 나가 본 일이 없다우. 그 밖의 곳은 더 말할 것두 없구” 하고 말씀하셨다.
 
 < 일부러 그랬든 과실로 그랬든 간에 적어도 남자가 여자의 몸에 손을 대면 큰일 난다. (어떤 책에서 본 것인데)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의 딸을 죽이고, 남편이 그의 아내를 죽이고, 혹은 아내나 딸들이 스스로 자살을 했다. 그러나 그런 희생쯤은 예사로 생각한다. 최근의 일이다. 어떤 한 귀부인이 불에 타 죽었다. 그것을 보고 위급한 경우라 어떤 한 사나이가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가서 부인을 껴안았다. 그러나 남녀가 서로 몸을 대는 것은 관습상 일체 용납되지 않는 터이라, 이 경우에 있어서도 남자는 여자를 구명(救命)해서는 아니 되고 사나이는 이 법도를 어긴 것이 되었다. 일을 이렇게 만든 것이 시녀의 불찰이었다고 해서 시녀가 벌을 받았다. 법률이 내실에까지 미치지 않는 것은 사실이며, 모반죄(謀反罪)에 걸리지 않는 한, 남편은 아내의 방으로 피신만 하면 관헌의 손을 벗어날 수 있다.
 
  자기 집의 지붕을 수선할 때에는 먼저 옆의 집에 가서
 
  “오늘은 지붕에 올라갑니다. 어쩌다 댁의 부인이나 따님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양해해 주십시오.”
 
  하고 인사를 해 두지 않으면 아니 된다. 남녀칠세 부동석이라고 해서, 결혼하기까지는 아버지와 형제 이외에는 절대로 다른 남자와 얼굴을 대해서는 아니 된다. 결혼 후에도 얼굴을 대할 수 있는 것은 남편과 남편의 근친에 한해서이다. 아무리 친한 상(常) 사람이라도 당당하게 사람들이 있는 곳에 얼굴을 내밀 수가 없다.
 
  나는 오랜 시일의 여행 중에 6세 이상의 계집아이의 얼굴을 본 일이 없었다. 세상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처녀는 그림자도 볼 수 없는 나라이다. 그렇다고 여자는 이런 사회의 조직을 원망도 하지 않고, 자유를 동경하고 있지도 않다. 수백 년 내의 유거생활(幽居生活)은 여자의 자유정신을 마멸(磨滅)시켜 버렸다. 오히려 여자는 가정의 가장 귀중한 재산으로 정중(鄭重)하게 저장(貯藏)되고 있는 것이라고쯤 여자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
 
  이 글은 ‘버드 비숍’이라는 영국 여자의 《한국(韓國)과 그 인방(隣邦)》이라는 저서에서 따온 것이다. 이 저자는 1893년에 우리나라에 와서, 전국의 방방곡곡을 답사하고 외국 여자로서는 최초의 방대한 한국 기행문을 남겨 놓았는데 어떤 대목은 우리들이 뻔히 다 알고 있는 일이면서도 포복절도할 지경의 재미있는 데가 많다.
 
  “한국여성의 비극적인 애욕상(愛慾相)”에 대해서 쓰라는 청을 받고 보니 나는 우선 위에 인용한 구절들이 생각이 나서 좀 길지만 구태여 인용해 보았다. 사실 나보고 쓰라면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들의 생활에 대한 이처럼 간명한 조감도(鳥瞰圖)를 쓸 자신이 없다. 내 얼굴은 내가 모른다. 또 못난 얼굴은 들여다보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그저 억지로 남이 본 내 얼굴을 꾸어온 셈이다.
 
 
  性보다 돈을 숭배
 
  지금 이런 글을 읽고 과거를 회상해 보면 끔찍끔찍하게 변한 점도 많지만 끔찍끔찍 변하지 않은 점도 많다. 변한 것은 노출된 양장, 융기한 젖통이의 모습, 미스 킴, 데이트, 트위스트 등이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개성(個性)의 결핍이다.
 
  아직도 신문 4면을 요란스럽게 하고 있는 성의 개방 같은 문제도 여자의 개성의 자각이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 주위를 둘러볼 때, 정말 연애의 감정이 솟아나올 만한 여자가 없다. 판에 박은 듯한 양장, 하이힐에 핸드백은 정말 구역질이 난다. 여자가 보는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루 저녁에 백 원에 몸을 파는 종삼네 집 골방에도 핸드백만은 계절에 맞추어서 4, 5개가 걸려 있다.
 
  봉건의 노예이던 여자는 지금 금전으로 그 상전이 탈을 바꾸어 있을 뿐 상전은 여전히 상전대로 엄존한다.
 
  내가 아는 어떤 불란서까지 갔다 온 멋쟁이 여자가 있는데, 이 여자는 걸핏하면 “돈은 돈이고, 섹스는 섹스이지요” 하면서 돈 있는 늙은이하고 살면서, 가끔 오입을 하기도 하는 자신을 자못 현대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는데, 그것이 현대적이라고 보기가 좀 수상한 것은, 그 늙은 남편이 이름난 부자인데도 그 여자는 그보다 더 부자인 어떤 가정의 브로커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여복(女福)이 없어 그런지는 몰라도 나의 주위에서 보는 여자들은 돈 있는 여자나 돈 없는 여자나 모두가 돈의 귀신들뿐이다. 세계의 조류가 그렇게 되어 가고 있다면 그뿐이겠지만, 한국의 젊은 현대여성들은 성(性)보다도 비교가 안 될 만큼 돈을 숭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중류 이상의 교양 있는 계급으로 올라갈수록 더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여자들의 성 생활을-나아가서는 애정생활을 마멸시키고 있는 또 하나의 암(癌)이 있는데, 그것은 영화다. 섹슈얼한 할리우드식 영화. 그것을 본뜬 무수한 국산영화들. 이것을 보고 온 둘의 잠자리에서 실제로 재현해 보고 싶은 유혹도 생기겠지만 잘 안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골 여자들이 좀 더 행복할 것 같다. 그러나 그들도 서울에 가고 싶은 생각에 눈물을 짜고 고민을 하고 있는 한 행복하지는 않다.
 
  순천인가에 가서 오입을 해 본 일이 있는데, 서울로 치면 종삼네 집 여자들이, 손님방에 들어올 때면 다소곳이 반절을 하고 들어오는 것은 퍽 좋게 보였다.
 
  (출처=《女像》 1964년 10월호)
 
 
  책형대에 걸린 詩
 
  - 인간해방의 경종을 울려라
 
   4·26(1960년 이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편집자註) 전까지의 나의 작품 생활을 더듬어 볼 때 시(詩)는 어떻게 어벌쩡하게 써왔지만 산문(散文)은 전혀 알 수가 없었고 감히 써 볼 생각조차도 먹어 보지를 못했다. 이유는 너무나 뻔하다.
 
  말하자면 시를 쓸 때에 통할 수 있는 최소한도의 ‘캄푸라쥬(camouflage, 위장·은폐-편집자註)’가 산문에 있어서는 통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산문의 자유(自由)뿐이 아니다. 태도(態度)의 자유조차도 있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나처럼 6·25 때에 포로생활까지 하고 나온 이 사람은 슬프게도 문학단체(文學團體) 같은 데서 떨어져서 초연하게 살 수 있는 자유가 도저히 없었다. 감정(感情)의 자유 역시 그렇다.
 
  이를 테면 같은 시인끼리라도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해서 불쾌(不快)한 일이 있더라도 그런 감정을 하여서는 아니 되고 그런 태도를 극력 보여서는 아니 되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나올 수 있는 작품(作品)이 무슨 신통한 것이 있겠는가. 저주(咀呪)가 아니면 비명(悲鳴)이 아니면 죽음의 시(詩)가 고작이 아니었던가. 그렇다고 앞으로 이에 대한 복수(復讐)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사실 요사이는 시를 쓰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다. 4·26이 전취(戰取)한 자유는 나의 두 손 아름을 채우고도 남는다. 나는 정말 이 벅찬 자유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너무 눈이 부시다. 너무나 휘황하다. 그리고 이 빛에 눈과 몸과 마음이 익숙해지기까지는 잠시 시를 쓸 생각을 버려야겠다.
 
  지난날의 낡은 시단(詩壇)의 과오(過誤)나 폐습(弊習)을 나는 여기서 재삼(再三) 뇌까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렇듯 숨 막힐 듯한 괴로운 시대 속에서 과감하게 자기의 세계를 지켜 가면서 싸워 온 시인이 현(現) 시단(詩壇)의 기성인(旣成人) 중에서도 몇 사람은 있다는 것을 나는 여간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어느 나라의 시단이고 진짜 시인보다는 가짜 시인이 훨씬 더 많은 법이고, 요즈음 세간(世間)의 여론(輿論)의 규탄을 받고 있는 소위 어용시인(御用詩人)이나 아부시인(阿附詩人)들은 이미 그들이 권력의 편에 서서 나팔을 불기 전에 먼저 시인으로서는 완전히 자격을 상실한 자들뿐이다.(아니 애당초 시인이 되어 보지도 못한 자들뿐이다.) 그러니까 그까짓 것은 하등 문제거리가 되지 않는다.
 
  내가 여기 말하고 싶은 것은 4·26 이전의 우리나라의 시단의 작품들이 대체로 낡은 작품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시로서 합격된 작물(作物) 중에 특히 더 많았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객관적으로 볼 때 새로운 시대의 이념을 반영할 수 있는 제작(製作)상의 모험적 기도를 용납할 수 있는 시대적 혹은 사회적 여백(餘白)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한데, 이와 같은 고민을 처절히 체득한 시인이라면 4·26은 그에게 황금(黃金)의 해방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앞으로 이러한 시인들만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4·26의 역사적 분수령을 지조(志操)를 굽히지 않고 넘어온 기성시인 중에서 과연 몇 사람이 새 시대의 선수의 자격을 가질 수 있을는지는 확언하기 힘든다.
 
  ‘책임은 꿈에서 시작된다’는 유명한 서구의 고언(古言)이 있는데 이 말은 4·26을 계기로 해서 새로운 출발의 자세를 갖추고자 하는 젊은 시인들이 필히 느꼈어야 할 기본인식이다. 이 인식의 감득(感得)이 없이는 새 시대의 출발은 불가능하다. 4·26의 해방은 꿈의 해방이다. 이제야말로 꿈을 가지라. 구김살 없는 원대한 꿈을 가지라고 나는 외치고 싶다. 이와 같은 꿈은 여직까지는 맛볼 수 없었던 태도의 자유와 감정의 자유를 투박하게 요구한다. 여기에 과실즙이나 솥뚜껑 위에 어린 밥풀 같은, 달콤하고도 거룩한 시인의 책임이 있다. 시인들이여! 새로운 시인들이여! 이제야말로 인간 해방의 경종(警鐘)을 울려라.
 
  나는 4·19 전에 어느 날 조지훈(趙芝薰) 형하고 술을 마시면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시인이 되기 전에는 이 나라는 구원(救援)을 받지 못한다’고 ‘휘트먼’인가의 말을 차용(借用)하여 가면서 기염(氣焰)을 토한 일이 있었는데 요 일전에 윤돈(倫敦·런던-편집자註)에 있는 박태진(朴泰鎭) 형한테서 온 4·26 해방을 축하하는 편지 속에 ‘새로운 정부가 선물(한) 시(詩)를 모르는 녀석들이 거만하게 구는 한, 구제(救濟)가 없겠지요’라는 말이 또 있어서 요즈음은 만나는 사람마다 중이 염불하듯이 이 말을 전파(傳播)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하는 시인이면 반드시 시작품(詩作品)을 신문이나 잡지에 주기적으로 발표하는 사람만을 말하고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소위 시를 쓰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이번 4·19나 4·26을 냉담하게 보고 있는 친구들이 적지 않은 것을 나는 알고 있는데(어울리지 않게 날뛰는 친구도 보기 싫지만 그 이상으로) 나는 이런 위인들을 보면 분이 터져서 따귀라도 붙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다.
 
  나는 극언(極言)하건대 이번 4·26사태를 정확하게 파악(把握)하고 통찰(洞察)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안하지만 시인의 자격(資格)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불쌍한 사람들이 소위 시인들 속에 상당히 많이 있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 나의 친척에 모(某) 국민학교 교감이 있는데 이 작자가 4·19 날의 데모를 보고 집에 와서 여편네한테 “학생들도 이제 볼장 다 봤어. 그런 폭도(暴徒)들이 어디 있어’ 하며 밤새도록 부부싸움을 했다나. 그런 시인이나 이런 교감(校監)은 모두 다 모름지기 이승만(李承晩)의 뒤나 따라가 살든지 죽든지 양자택일(兩者擇一)하여라.
 
  4·26 후 나의 성품이 사뭇 고약해 가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너무 흥분한 탓이려니 해서 도봉산(道峰山) 밑에 있는 아우 집에 가서 한 이틀 동안을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왔는데 서울에 와 보니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이 정 고약해져서 시를 쓰지 못할 만큼 거칠어진다 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시대의 윤리 명령은 시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거센 혁명의 마멸(磨滅) 속에서 나는 나의 시를 다시 한 번 책형대 위에 걸어 놓았다.
 
  (출처=《京鄕新聞》 1960년 5월 20일)
 
  [편집자註-책형대(刑臺)는 죄인을 기둥에 묶어 세워 놓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을 행하던 틀을 말한다.]
 
 
  해운대에 핀 해바라기
 
   무더운 날은 신경질이 더 나는 법이다. 밤잠이 부족하거나 하여 머리가 휴지통같이 뒤숭숭한 아침이면 사랑에 대한 갈망이 불안한 마음과 엉키어 온 가슴을 서로 잡는다.
 
  S는 아담하고 정숙한 여자이었다. 나의 모―든 말할 수 없이 복잡한 불안도 그의 앞에서는 태양 앞에 자취를 감추는 무수한 군성(群星)이나 다름없었다.
 
  나와 그가 알게 된 것은 해운대 넓은 바닷물 속에서였다. 어느 날 나는 학교의 학생들을 데리고 수영을 하러 나가게 되었다. 그때 S도 여학생들을 인솔하여 온 부산 모 여학교 간호원이었다. S가 인솔하여 온 여학생들 중에서 자개바람을 일으키고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한 것을 내가 데리고 간 학생 중의 제일 수영을 잘하는, 반에서도 제일 키가 크고 말썽도 제일 잘 부리는 학생이 구하여 주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나와 S는 그 후 일요일이고 토요일이고 서로의 시간이 허락하는 한 번번이 바다에서 만났으며 ‘우끼(튜브-편집자註)’를 타고 될 수 있는 대로 물빛이 짙은, 뭇 사람이 잘 오지 않는 곳까지 가서는 사랑이 통하는 이성(異性)에게만 신(神)이 용납할 수 있는 말을 하고 웃음을 웃고,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조차도 천천히 잊어버리고 어린아이와 같이 놀았다.
 
  바다에다 모―든 몸과 마음의 피곤을 씻고 가벼운 걸음걸이로 산을 넘어 집을 향하여 돌아갈 때면 S의 눈에서는 눈물까지 나왔다.
 
  S에게는 여자다운 원한이 있었다. 그가 학교에서 ‘간호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학교의 교만한 여교원들 틈에 끼어서 자기 직업의 열등성(劣等性)을 그는 나에게 종종 하소연하였다.
 
  “단 한 사람을 못 만나서 이런 고생을 해요.”
 
  ‘단 한 사람’이라는 것이 그의 남편을 가리키는 이야기인 것을 어렴풋이 짐작은 하면서도 나는 재우쳐 그의 가정 내막을 물어보기를 사양하였다.
 
  나도 처자가 있기는 하였지만 그것보다도 S의 노골적인 정열(情熱)은 눈앞에 숨 가쁘게 느끼고 있는 나에게 S가 남편과 아이를 가진 여자라고는 설마 믿어지지 않았다.
 
  “어린아이 보고 싶지 않으세요?”
 
  S는 나에게 도리어 이러한 아픈 질문을 하고 놀리었다.
 
  “빨리 사모님 모시고 와서 같이 사세요. 젊은 부부가 아무리 피난생활이라 하지만 서로 떨어져 있으면 좋지 않아요.”
 
  하는 S의 말에,
 
  “나는 당신만 있으면 그만이오.”
 
  하고 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우리들의 사랑은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대포알처럼 아무 거리낌없이 깊어만 갔다.
 
  “개자식!” 이런 욕인지 애교인지 알 수 없는 S의 말을 나는 너그러운 미소로 받아들였다. 그래도 나는 그의 입술 한번 훔쳐 보지 못하였다.
 
  나중에 깨달은 일이지만 S는 나의 성격을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다. 나보다도 많은 S의 나이와 지혜가 저 허허 바다와 같은 것이었다면 나는 그 위에 깜박거리는 아침의 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S는 나를 완전히 자기의 사랑의 포로(捕虜)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났다. 여름도 가고 구월 초승 어느 날 밤 나는 환도를 앞두고 비로소 S의 집을 찾아갔던 것이다.
 
  “인사하세요. 앞으로 형님이라고 생각하고 친해 주세요.”
 
  하고 S는 방 한구석에 앉은 몸집이 큰 남자를 나에게 소개하였다. 이것이 S의 남편이었다. 그 이외에 S에게는 아들이 하나, 딸이 하나 있었다.
 
  “내년에 중학교 시험을 보아야겠는데 어떻게 될지 근심이에요.”
 
  하고 S는 돌아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자기의 아들을 가리키며 나에게 미소를 던졌다. 나도 미소로 대답하였다.
 
  S와 S의 남편인 검고 무트듬한 건축기사라는 사나이와 눈이 큰 딸아이와 나는 한상에서 저녁을 먹었다.
 
  나는 극도의 흥분과 당황과 비분과 어색하고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혀서 그의 남편이 맹인(盲人)이라는 놀라운 비극을 밥상을 받기 전까지는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딸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끌어 가리켜 주는 대로 눈이 먼 건축기사는 묵묵히 기계적으로 숟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만화를 번역해 주셔서 아이들이 여간 좋아하며 읽지 않습니다. 자주 놀러 오십시오.”
 
  하고 이 맹인은 나에게 치사하는 것이었다.
 
  나는 S가 자기가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한 것이라고 미국 만화를 번역해 달라는 것을 틈이 있는 대로 정성껏 번역하여 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환도 후 학교의 교편생활을 그만두고 기자생활을 하게 된 나는 S의 아름다운 이름을 나의 ‘팬 네임’으로 즐겨 쓰고 있다. S의 이름을 쓸 때마다 잃어버린 해운대의 넓은 바다가 생각이 나고, S의 어디인지 ‘모나리자’를 닮은 가냘픈 얼굴이 해바라기처럼 머리 위에 떠오르고, 그보다도 토건사고로 실명을 하고 아내가 벌어다 주는 것으로 답답한 삶을 하고 있는 가련한 건축기사의 일이 몹시 가슴에 사무친다.
 
  그리고 아예 S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은 것을 무엇보다도 다행으로 생각한다.
 
  (출처=《新太陽》 1954년 8月號)

 

 

 

[발굴] <풀>의 시인 김수영의 시와 산문

반세기 만에 빛을 본 번뜩이는 시와 산문

글 : 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1964년 여성잡지 《女像》 8월호에 시 <한강변> 실어
⊙ 사후 44년이 지나도 날카롭고 비판적인 작가정신 읽을 수 있어
  반시(反詩)의 시인, 타협하지 못했던 직선(直線)의 산문가 김수영(金洙暎·1921~1968)의 시와 산문이 세상에 나왔다.
 
  《월간조선》 8월호와 9월호에 걸쳐 공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김수영 전집》(민음사刊)에서 빠진 것으로 시와 산문, 번역문, 시월평을 망라한 것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서슴없고 가장 치열한 양심의 극(劇)”(유종호)이란 표현처럼, 날카롭고 비판적인 작가정신을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시인이 타계한 지 44년이 지났으나 지금의 시각에서 읽어도 손색이 없다.
 
  먼저, 시 <한강변>은 1965년 8월호 여성잡지 《여상(女像)》에 게재됐다. 모래섬에 불과하던 여의도에 개발바람이 일던 1960대 중반의 어수선한 시대상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여의도의 땅을 돋우기 위해 인근 밤섬을 폭파하기 직전의 이야기다. 시인은 ‘아직도 밤섬에서는/땅콩들을 모래 위에 심고/나룻배를 타고 건너오는…’이라며 추억에 잠긴다. 그러나 그 어조는 무척 쓸쓸하다.
 
  또 1949년 4월 1일자 《자유신문(自由新聞)》에 게재됐던 시 <아침의 유혹(誘惑)>의 시어(詩語)를 일부 복원해 《월간조선》에 다시 싣는다. 그동안 마이크로필름 보관상태가 나빠 의미전달이 불가능했던 오탈자(誤脫字)를 바로잡은 것이다.
 
 
  直線의 산문가
 
김수명 선생과 김수영(오른쪽).
  1964년 《여상》 10월호에 실린 산문 <내실에 감금된 애욕의 탄식>은 ‘여성의 욕망과 그 한국적 비극’이란 어깨제목을 달고 있다. 시인은 ‘남자가 여자보다 무엇이 나은 게 있느냐’고 반문하면서도 ‘내 주위에 있는 여자들은 모두가 돈의 귀신’이라고 비꼰다. 직설적이며 타협하거나 비켜 가지 않는 ‘직선의 산문가’다운 표현이다.
 
  1960년 4·19와 4·26(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 발표일) 이후인 5월 20일자 《경향신문》 4면에 실린 〈책형대에 걸린 시(詩)>는 김수영의 날카로운 산문정신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책형대(刑臺)란 죄인을 기둥에 묶어 세워 놓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형벌을 행하던 틀을 말한다. 시인은 ‘… 시대의 윤리 명령은 시(詩) 이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거센 혁명의 마멸 속에서 나는 나의 시를 다시 한번 책형대 위에 걸어 놓았다’고 선언한다. 시대에 편승하거나 권력에 기대는 작가들을 ‘아부시인’, ‘어용시인’으로 규정하며 시인 휘트먼의 말을 빌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시인이 되기 전에 이 나라를 구원받지 못한다’고 썼다.
 
  성인취향의 잡지 《신태양》의 1954년 8월호에 실린 <해운대에 핀 해바라기>는 에피소드 형식의 콩트, 혹은 단편소설 같은 이야기다. 실화인지 가공의 얘기인지 헷갈린다. 작품을 발표한 1954년은 김수영이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돼 부산·대구 등지에서 통역관, 선린상고에서 영어교사를 하던 시절이다. 실제로 이 작품 속의 ‘나’는 학교 선생이다.
 
 
  누이 김수명이 오빠의 작품을 널리 알려
 
김수영시비 앞에 선 김수명 선생.
  김수영 선생은 두 아들을 두었다. 큰아들 준(儁)은 1983년 4월 사망했고, 둘째 우(瑀)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81년과 2003년 민음사에서 《김수영 전집》을 펴낼 때, 누이동생 김수명(金洙鳴·78)씨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현대문학》 편집장 출신의 수명씨는 평생 독신으로 살며 오빠의 작품을 찾고 정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월간조선》의 발굴에 대해 그는 “평생을 오빠의 작품을 찾고 다듬는 일을 해 왔는데, 아직도 작품이 남아 있느냐?”며 놀라워했다.
 
  한국문단에서는 ‘동생 김수명이 없다면 김수영에 대한 오늘날의 평가도 없었을 것’이란 말이 있다. 그만큼 누이는 오빠의 시가 세상의 조명을 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빠가 생전에 선별해 준비해 두었던 작품들을 한 자, 한 획 다치지 않고 살려서 1981년 출간한 전집에 묶을 수 있었지요. 또 1981년판에 잘못된 부분을 고치고, 누락·발굴 작품도 보완해 2003년 한글판으로 새 전집을 펴냈습니다. 이번에 새로운 전집을 준비 중인데 새로운 작품을 찾게 됐으니 기뻐요.”
 
  그는 “시인 김수영이 한국시단에 끼친 영향은 아주 크다”며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정신, 시를 통해 실천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오빠는 언어를 통해 자유를 읊었고, 또 자유를 살았다”고 회고했다.
 
  시인의 작품에 대한 독자나 평론가의 오독(誤讀)은 없었을까. 김수명 선생은 이런 말을 했다.
 
  “처음엔 좁은 소견으로 많이 속 끓이기도 하고, 안타까워한 적도 있어요. ‘왜 그 깊은 뜻을 알려 하지 않고 껍질만 보나’고요. 이젠 원칙을 두고 있습니다.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이상, 모든 것은 독자의 몫이요 평론가의 몫이라고요.”
 
 
  김수영과 도봉산
 
김수영 조카 김민.
  시인 김수영은 도봉산에 본가가 있었고 선영도 그곳에 있었다. 김수명씨는 “수복 후 도봉산 텃골 선영에 생활터전을 삼게 됐다”며 “그곳에서 닭도 기르고 돼지도 길렀다”고 했다.
 
  “이후 오빠 묘도 그곳(도봉산)에 썼다가 1994년 폐묘하게 되어 조상 유해와 함께 화장을 해 모셨습니다. 1998년 우리 가족은 그곳을 떠났지요. 제가 그곳에서 20대에서 60대까지 살았으니 오빠 생전에도, 사후에도 함께한 공간이랄 수 있겠죠.”
 
  현재 도봉구 방학3동 문화센터 건물 1~2층에 시인의 자료관이 조성되고 있다. 시인의 육필원고, 저서, 김수영론과 관련한 자료, 시인의 작품이 포함된 서적, 시인의 애장도서와 애장품 등이 전시될 예정이다.
 
  시인 김민은 김수영의 조카다. 2001년 문학계간지 《세계의 문학》을 통해 등단, 2007년 처녀 시집 《길에서 만난 나무늘보》를 펴냈다. 김민씨는 “제가 태어나기 넉 달 전에 큰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직접적인 기억은 없지만, 도봉산 선영에서 태어나고 자라서인지 ‘김수영시비’에 자주 올라가곤 했다”고 말했다.
 
  “큰아버지 시 중 제일 좋아하는 시편이 <달나라의 장난>입니다. 이 시처럼 꾸밈이 없고 솔직하면서도 가슴이 찡해져 오는 것, 이 점이 김수영 시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요?”⊙
 

[발굴] <풀>의 시인 김수영의 詩와 산문 (中)

번역과 養鷄로 생계 이으며 글 써

글 : 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자본과 가족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
⊙ “내 시의 비밀을 알려면 내 번역을 보라”

사진 : 서정시학 제공
1960년대 초반 서울대에서 강연하던 시인 김수영.
  시인 김수영(金洙暎·1921~1968)의 산문은 문체나 어조, 메시지만큼이나 ‘김수영답다’. 《월간조선》 9월호에 소개하는 <초라한 공갈>과 <가난의 상징, 생활의 반성―변소위생>은 날카로운 ‘직선(直線)’ 시각으로 곤궁한 현실을 들여다본다.
 
  그의 글에서는 의뭉스럽고 모호한 표현을 찾을 수 없다. 타인의 시각을 그대로 옮겨 쓰는 법도 없다. 자신만의 시선으로 현실을 비켜 가지 않고 맞닥뜨린다.
 
 < 초라한 공갈>은 1954년 9월 《희망(希望)》지에 실렸다. 시인은 ‘석유궤짝보다 못한 책상 주인’이자 쥐꼬리만한 원고료로 겨우 연명하는 옹색한 처지지만, 가난한 현실과의 싸움에 물러서지 않는다. 자본과 세태의 공갈, ‘돈을 벌어 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가족의 애처로운 눈치에도 ‘구애받지’ 않는 시인은 자유(글쓰기)의 주체이자 객체이다.
 
 < 가난의 상징, 생활의 반성―변소위생>은 1962년 《민국일보(民國日報)》에 게재됐다고 하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이 작품은 똥을 누는 ‘변소’에 대한 얘기다. 시인은 ‘돼지 똥에 비하면 사람 똥이 훨씬 더 추하게 보인다’고 말한다. 심지어 ‘초가집 변소의 똥보다 고층 빌딩의 싯누런 타일 변기(便器)에 쌓인 똥이 더 불결하게 보인다’고 일갈한다. 그러나 변소위생 개선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부패한 나라’다.
 
 < … 깨끗하게 똥을 누게 하려면 우선 깨끗하게 밥을 먹어야 한다. 깨끗한 밥을 못 먹이는 나라의 변소는 언제까지나 불결하다. …>
 
 
  당대 최고 영문학자의 번역을 비난
 
김수영 시인이 종이에 옮겨쓴 외국시(lady macbeth). 생전 그는 생계를 위해 많은 번역문을 남겼다.
  시인 김수영은 많은 번역문을 남겼다. <고양이>는 네덜란드 출신 독일 작가 아드리안 모리앤이 쓴 것으로, 독일어를 영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옮겨 쓴 것이다. 시인은 <고양이>의 출전(出典)을 밝히지 않았다.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사라졌던 고양이가 종전(終戰) 후 다시 등장하면서 빚어진 세태를 그린 수작이다.
 
  시인의 부인 김현경씨의 회고에 따르면, “영어실력이 상당했다”고 한다. “당대 연희전문의 영어 강의 수준이 자신의 수준보다 그리 높지 않다고 판단해 곧바로 자퇴했다”는 것이다. 그 시절, 최고의 영문학자로 꼽히던 문학평론가 최재서(崔載瑞·1908~64)가 너대니얼 호손(1804∼1864)의 <주홍글씨>를 번역하자 “엉터리”라고 비난해 논란이 된 적도 있다고 한다.
 
  시인은 1950년 북한의 6·25 남침이 일어나자 서울의대 부설 간호학교에서 영어강사 노릇을 하다 피란을 가지 못했다. 결국 서울에 남아 있다가 인민군에 의해 북으로 끌려갔으나 천신만고 끝에 탈출에 성공한다. 이후 남한의 포로수용소에서 영어 통역을 맡은 적도 있고, 선린상고에서 영어를 가르친 일도 있다. 생전 그는 시와 산문을 쓰는 일 외에 번역과 양계(養鷄)로 힘겹게 가족을 부양했다. 번역이 시작 활동만큼이나 중요한 생계수단이었던 셈이다.
 
  시인은 곧잘 “내 시의 비밀을 알려면 내 번역을 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에게 번역이란 외국어를 우리말로 옮겨 쓰는 단순작업이나 독서체험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세계관을 번역문에 담으려 애썼다. 그의 번역문은 ‘김수영다운’ 문학작품인 것이다.⊙
 

[발굴 원문] <풀>의 시인 김수영의 詩와 산문 (中)

“석유궤짝만큼도 못한 저 책상 주인은 얼마나 무능력한가?”

글 : 月刊朝鮮 2012년 9호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가련한 책상을 혹사함으로써 미안한 마음을 위로한다”
⊙ 지금 세상에는 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너무나 많다
⊙ 전쟁 기간 중 굶주린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고양이를 잡아먹었다

[편집자註]
원문을 충실히 따르되 한글맞춤법에 맞게 고쳤다. 한문으로 된 단어는 한글로 적고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했다. 외래어 표기 가운데 의미가 모호한 표현은 원문을 살리되 그에 맞는 현대어로 적었다. (자료 제공=공연예술자료가 김종욱씨)
  초라한 恐喝
 
   책상 위는 촛농이 벗겨질 사이가 없다.
 
  책상이라 하지만 그것은 집에서 밥 소반으로 쓰던 것을 임시 책상으로 대용하여 쓰고 있는 것이다.
 
  책상이 없으니까 이것을 쓰는 것이고, 이 책상 아닌 책상―석유궤짝만큼도 못한 울퉁불퉁한 책상에 앉을 때마다 이다음에 돈이 생기면 우선 만사를 젖혀놓고라도 책상부터 사야지 하고 있는 것이 환도 이후부터이니까, 근 일 년이 다가오는데에도 여태껏 목적을 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저 책상의 주인이 얼마나 무능력한 위인인가를 증명하여 주는 것도 되지만 사실 이 책상 주인이 이 변변치 않은 책상에 남모르는 애정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니 애정이라기보다 하나의 변명 혹은 하나의 시위(示威)를 그는 이 책상을 통하여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상을 보세요. 이것이 책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요? 그러니 날 보고 돈 벌어 오라고 하지 마세요. 될 수 있으면 그러한 (돈을 벌어 와 주었으면 좋겠다는) 애처로운 눈치마저도 나에게는 보이지 마세요.”
 
  하고 이 책상을 시켜서 그는 그저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家長)(호적상에는 이 책상 주인의 가장으로 되어 있지만)인 자기 어머니에게 시위하고 공갈(恐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이 책상이 놓인 양철지붕을 한 단칸방에도 서울 대부분의 넉넉지 않은 생활지대의 예에 빠지지 않는 불편한 현상―전깃불이 잘 들어오지 않아서 이 무능력한 책상 주인은 초를 사용하고 있다. 그을음이 많이 나는 남폿불보다는 이 촛불이 훨씬 좋았다.
 
  어쩌다가 돈이 생기거나 원고(原稿)를 쓰다가 기분이 나지 않을 때에는 세개 네개씩 촛불을 켜 놓는다. 혹간 가다가 발광(發狂)이 나거나 절망에 빠지거나 할 때에는 그는 여덟 개도 무관, 아홉 개도 무관, 마음대로 촛불을 켜 놓고 물끄러미 바라다보고 있다.
 
  “엄마, 이게 뭐예요? 참 이쁘다!”
 
  문을 열고 이 광경을 본 누이동생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놀라는 것을 본 그는 당황하여,
 
  “이것이 이뻐 보이니? 정말?”
 
  “응, 참 이뻐!”
 
  누이는 ‘숏 커트’를 한 대강이를 흔들며, 여전히 이쁘다는 경악의 미소를 띠우고 한참을 들여다보고 서 있었다.
 
  한 개를 켜 놓고 있을 때는 그의 기분이 가장 소박하고 경건하여질 때, 두 개를 켜 놓고 있을 때가 그로서는 경제상으로나 정신상으로나 가장 정상 상태에 있는 때이다. 그저 늙으신 어머니는 촛불을 두 개 켜 놓은 것만 보면 역정을 내신다. 제사(祭祀) 지내는 촛불 같다는 것이다. 산 사람이 촛불을 두 개 켜 놓고 앉는 것은 불길하니 하나만 켜고 있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심리상태에 있어서는 그 말을 들은 후에도―아니 오히려 어머니의 그 말을 들었기 때문에 촛불을 두 개 켜 놓을 때가 가장 자기의 정신의 평화를 확보할 수 있는 때라고 생각한다.
 
  그의 식구는 도합 일곱 명이다. 남자 삼형제에 여자가 삼형제, 그리고 늙으신 어머니다. 이 무기력한 책상 주인공은 세칭(世稱) 맏아들이다. 이 ‘맏아들’이라는 것을 방패 삼아 혼자만 독방을 차지하고 나머지 하나밖에 없는 방을 식구 여섯 명이 쓰고 있다. ‘맏아들’이 독방을 쓰고 있는 데에 대하여 나머지 식구들은 한 번도 불평을 표시한 적이 없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미안하였다.
 
  그는 이 미안한 분풀이를 가련한 책상을 보다 더 혹사함으로써 자기의 미안한 마음을 위로하고 있다.
 
  매일 밤 쓰는 촛불에서 떨어진 촛농은 그냥 책상 위에 붙어서 ‘피라미드’와 같이 퇴적(堆積)된다. 어느 것은 납작한 것, 어느 것은 길쭉한 것, 어느 것은 뾰족한 것, 어느 것은 동그란 것―그 형용, 굴곡(屈曲), 모양, 각도(角度)가 가지각색이다. 환상(幻想)하기를 좋아하는 그는 이 촛불의 역사(歷史)가 남겨 놓고 간 유적(遺跡)에 대하여 가공적(架空的) 규정(規定)을 내리는 것으로 무료한 시간의 유희로 삼고 있다.
 
  때로는 적극적인, 때로는 소극적인, 때로는 건설적인, 때로는 퇴폐적인 철학(哲學)이 이 형형색색의 촛농의 기묘한 선(線)을 타고 나온다. 이러한 촛농 자국의 초라한 색상이 먼지 위에 차차 그 판도(版圖)를 확장하고, 급기야는 원고지를 놓아야 할 최후의 ‘스페이스’까지도 월경(越境)을 하려고 할 때 책상의 주인공은 비로소 생활의 충실감을 느낀다.
 
  “잘 써 왔다!”
 
  그는 이렇게 속으로 고함치며, 우선 국경에 근접하여 있는 급한 침입자만을 제거하여 버렸다.
 
  그는 홀로이 이렇게 자탄한다.
 
  “언제 새 책상이 생기고, 그 위에 음전한 촛대도 하나 사 놓을 수 있게 되나 ….”
 
  그는 북쪽으로 향한 유리 창문 속에서 마치 보석같이 반짝이는 녹음을 보고 길게 한숨 쉬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천국인 녹음이 마음대로 보이는 창문에도 무자비한 세태가 자연에 도전하는 도태(淘汰)가 발생하였다.
 
  대도회(大都會)에는 한가한 창문이라고는 없는 법이다. 촛농의 유희에 지친 무기력한 시인(詩人)이 즐겨 내다보는 창문에는 하루아침에 세 개의 집이 솟아올랐다. 창문에서 내다볼 수 있는 조망도 없어졌지만 그보다 더 큰일 날 일은 창문을 가리고 우뚝 서 있는 괴물 같은 가옥 때문에 방안이 낮에도 밤중같이 어두워졌다.
 
  큰일 났다! 이제는 낮에도 촛불을 켜고 있어야 할 형편이다. 망령이 난 노파와 같이 요즈음 며칠 동안 밤늦게까지도 전깃불이 잘 들어와 친구에게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전기회사에서 일반 시민에게 주는 전깃불을 증급(增給)한다는 소식을 자네는 신문사에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나?”
 
  하고 친구에게 핀잔을 들었지만,
 
  “이제는 밤에 촛불을 켜지 않고도 살 수 있으니 얼마나 시원할까.”
 
  하고 눈을 얻은 사람처럼 반가워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이 지경이다. 이제는 밤이 낮이 되고 낮이 밤이 되었다. 단 하나 남은 방법은 천장을 뚫는 수밖에는 없다. 천장을 뚫고 유리창을 박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자외선을 머리 위에서부터 따라 내려오게 하는 수밖에는 없다. 설마 하늘로 난 창문을 막고 집을 지을 사람도 당분간은 없을 터이니까―.
 
  하여간 하늘로 난 창을 만들기까지는 인내성을 발휘하여 촛불 신세를 더 좀 져야겠고 초라한 책상과 번거로운 촛농으로 시위와 공갈은 줄기차게 계속하여야 할 것이다.(출처=《希望》 1954년 9월호)
 
 
  가난의 상징, 생활의 반성
 
  ―변소위생(便所衛生)
 
  나는 철이 나서부터는 변소가 더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에겐 똥이라는 것이 조금도 더럽지 않다. 고약한 취미라고 나무랄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 세상에는 똥보다도 더 더러운 것이 너무나 많다.
 
  우리 동네엔 밭이 많다. 그전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아직도 밤이면 똥냄새가 풍겨 온다. 여편네는 똥냄새만 나면 또 어디서 똥을 뿌린다고 이맛살을 찌푸리지마는 나는 그러는 여편네가 불쾌하다.
 
  우리 동네에서 내가 가장 친하게 지내고 있는 사람은 똥을 푸러 다니는 제대 군인 청년들이다. 문간 안에 우리를 세우고 돼지를 길렀을 때에도 나는 조금도 더럽다는 생각 없이 삼동(三冬)에도 혼자서 그 똥을 다 쳐냈다. 돼지 똥에 비하면 사람 똥이 훨씬 더 추하게 보이고 조촐한 초가집 변소의 똥보다 고층 빌딩의 싯누런, ‘타일’ 변기(便器)에 쌓인 똥이 더 불결하게 보인다.
 
  서울역 이등 대합실 옆의 변소는 깨끗하기는 하지만 출입하는 손님마다 1원씩 문턱에서 요금을 받으니, 이렇게 깨끗한 것은 깨끗하다고 볼 수 없다.
 
  대전역의 변소에서도 그전에 십 환을 빼앗긴 일이 있는데, 변소 안은 발차 전인데도 지극히 한산했다. 이런 경우에는 저주와 적개심이 든다.
 
  미국 사람들에 비해서 우리네 사람들에게 치질 환자가 훨씬 더 많은데 그것은 변소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한 치질병원 의사의 말이 생각난다. 이 말을 듣고 순진하게도
 
  “그럼, 우리나라도 서양사람 모양으로 앉아서 눌 수 있도록 변소 모양을 고치면 되지 않아요?”
 
  하고 말했더니 의사 왈,
 
  “우리야 얻어먹는 것에 바쁘니 누는 것까지 채 손이 돌아갑니까?”
 
  집에 와서 여편네한테 변소 개조에 대한 계몽을 하고
 
  “아이들은 나 모양으로 치질로 설움을 받게 하기 싫으니 나무 판때기라도 사다가 우리도 앉아 누는 변소로 고쳐 봅시다. 그리고 인제부터는 밑씻개도 신문지가 항문에 석유가 묻어서 나쁘다고 하니 신문지는 절대로 쓰지 맙시다.”
 
  했더니 헌신적인 여편네의 대답은 너무나 낙관적이다.
 
  “괜찮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면 나는―뿐만 아니라 우리 집 전체가―변소위생 개선의 반대론자 같은 인상을 줄지 모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의자식 변소를 만들 만한 문화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 오늘도 누구보다 부지런히 일하고 있으며, 완고하지 않은 아내는 신문지 대신에 풀 솜 같은 두루마기 휴지를 쓰는 생활을 누구보다도 환영할 것이다. 다만 그때까지는 몽당비가 놓여 있는 변소에나마 뚜껑을 마련해 놓는 것을 잊지 말고 이런 놈들에게는 자주 뒷물이라도 시켜 줄 정도의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나 이만한 신경이라도 쓸 만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의 도시생활자 중에 반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아직도 눈앞이 캄캄해진다. 치질의사 말마따나 일에는 순서가 있다. 깨끗하게 똥을 누게 하려면 우선 깨끗하게 밥을 먹어야 한다. 깨끗한 밥을 못 먹이는 나라의 변소는 언제까지나 불결하다.(출처=《民國日報》 1962년 ○월 ○일)
 
  [편집자註 - 《民國日報》에 1962년 무렵 게재된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
 
 
  고양이
 
  ―아드리안 모리앤 作 / 김수영 譯
 
〈고양이〉가 실린 《신태양》 표지.
  전쟁이 끝나자마자 우리들이 누구나 할 것 없이 거의 직각적으로 발견한 사실이 있었으니, 그것은 우리들의 몹시 학대 받은 거리에는 고양이의 그림자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일이다. 고양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평화로웠던 시절에 그들 고양이는 우리들이 드나드는 방문이 어쩌다 조금만 열려 있어도 고개를 쏙― 내밀며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나오지 않았던가. 이런 풍경을 우리는 전쟁이 끝이 난 초부터는 볼래야 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방문은 옛날같이 열려 있었으나 아무도 그 문 사이로 스며드는 고양이의 야옹 하고 우는 소리를 들을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고양이들을 잡아먹었나? 고양이들이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굶어 죽었나? 혹은 생식(生殖)을 하지 못하여 아주 씨가 없어지고 멸족(滅族)을 하여 버렸나? 아무도 이에 대하여 확실한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이 고양이들을 기다렸다. 여름철이 잡아들자 우유(牛乳)의 부족이 없어졌던 때였다. 모든 사람은 우유를 보고는 고양이를 그리워하였다. 이를테면 고양이는 가구(家具)의 일부분(一部分) 같은 것이었다.
 
  화가(畵家)들은 그림을 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그림 위에 옻칠을 한다. 이 광채 나는 옻칠처럼 단란한 가정에 있어서는 사람들은 고양이를 기름으로 아늑한 가정을 한층 더 아늑한 것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노인들에게 고양이는 둘도 없는 위안물이었으며, 첫 아이를 기다리는 젊은 신혼부부들에게 고양이는 앞으로 태어날 귀여운 갓난아기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 많은 가정에서 부엌 안에 놓은 우유접시가 하나 남김 없이 도적을 맞아 텅텅 비어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생쥐란 놈들의 행패가 날이 갈수록 점점 황포하여만 갔으며, 사람들은 이 정신없이 훔쳐 먹는 대식가들에게 특별한 식탁(食卓)을 마련해 놓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식구가 많아 도저히 생쥐들이 먹을 몫을 떼어 놓지 못하는 가정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지간한 가정에서는 이 염치없는 도식가(盜食家)들에게 하는 수 없이 우유를 빼앗기었다. 아직도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것은 적지 아니 골머리 아픈 일이었다. 겨우 균형(均衡)을 회복한 것 같이 생각이 들었던 살림살이가 다시 뒤죽박죽이 되었다. ― 지옥(地獄)같이 구차한 가정경제(家政經濟)에 있어서는 이렇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 그러고 보니 역시 이러한 혼란을 참을 길이 없는 것이다. 생쥐들의 도량은 날이 갈수록 자심하여만 가서 나중에는 하수구가 받아야 할 몫까지도 없어졌다.
 
  신문에서 고양이들의 문제를 떠들기 시작하였다. 어떤 사람이 고양이를 보았다는 소식을 이입 저입에서 떠들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의 회화(會話)는 으레 고양이를 본 사람이 있었다는 반가운 소식에서부터 시작되고는 하였다. 오후에 사나이들이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아직도 일을 하고 있을 때면 부인들은 집에서 같이 이야기할 사람 하나 없이 혹은 애무(愛撫)할 물건조차 가지지 못한 채로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중에도 고양이가 없어져 제일 애처롭게 보이는 것은 노인들이었다. 검은 고양이나 혹은 얼룩진 고양이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남아 있는 여생(餘生)의 쓸쓸한 그날 그날을 보내는 노인들에게 있어 고양이라는 동물은 없어서 아니 될 애완물(愛玩物)이었다. 쓰다듬어 줄 수 있는 머리, 잘록하게 앞으로 뻗치어 있는 발, 그리고 하늘로 높이 꾸부러져 올라간 꼬리― 이러한 것들이 우리들의 생활에 없어서는 아니 될 장식물(裝飾物)이었다는 것을 이때처럼 절실히 깨달아 본 일은 없었다. 아아 고양이들에게 먹일 양식만 있었더라면!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즐거운 마음으로 과자배급표(菓子配給票)를 고양이를 위하여 바쳤을 것인가.
 
  지나간 겨울에 전쟁이 계속되던 때에 무참하게 죽은 고양이가 몇 마리나 되며 또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확실한 통계표(統計表)는 구할 수 없었으나, 자연히 고양이들이 없어진 원인이 사람들에게 알려질 날이 왔다. 양심의 가책을 받고 눈물을 흘려 가면서 많은 굶주린 사람들이 고양이를 잡아먹었다. ― 촛불이 아니면 램프 불 옆에 앉아서 사람들은 고양이의 평화스러운 울음소리를 상상(想像)하면서 이 우울(憂鬱)한 식사를 하였던 것이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은 고양이도 적지 않았다. 고양이의 털을 벗겨 옷을 하여 입은 사람도 있었으나 그들은 이것이 차마 못할 짓이라는 것을 이내 깨달았다. 죽은 고양이가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헐벗고 떨고 있는 같은 동포들이나 친구들을 보기가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한테서도 먹을 것이 나오지 않는, 눈치를 보아 고양이들은 당황하여 자기들이 태어났으며 자라난 집―자기들이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되고 증조할머니가 된 집―에서부터 먹을 곳이 있는 곳을 찾아 달려 나갔다. 그들은 길 위에 쌓인 눈 속에 행방불명이 되거나 혹은 잡히거나 혹은 얼어 죽거나 하였으니, 이 불쌍한 고양이들이 겪은 고통은 기가 막혀 어찌 이로 말할 수 있으랴.
 
  감상적인 기분에 잠겨 있을 나이의 처녀와 눈이 어두운 늙은 노인 이외에는 아무도 고양이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란 당시에는 없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어떠한가? 모든 사람이 고양이를 그리워하며 슬퍼하고 있다. 시장(市長)이 이에 관하여 주의(注意)를 돌리게 되었다. 과거의 전통적(傳統的)인 노선(路線)을 고수(固守)하고 있는 정당(政黨)이 아닌 새로운 정책(政策)을 주장하는 정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위 ‘심중한 고려(考慮)’의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얼마간의 동요(動搖)의 시기(時期)를 경과한 후에 수립(樹立)된 새로운 정책(政策)이란, 과거의 그것이나 별로 변함이 없는 것이었다.
 
  고양이란 고양이가 전부 죽어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고양이가 아주 씨(種子)도 없어진 줄 알고 슬퍼하는 사람의 눈에 그러한 슬픔을 무시하는 듯이 하나둘 고양이는 그 자태(姿態)를 보이기 시작했다. 고양이들도 그동안의 오랜 기아(飢餓)를 겨우 면하고 나니―그들은 처음에는 빵과 묵은 우유를 먹었으나 지금은 돼지의 소장(小腸)과 생선 대강이를 먹고 있다― 비로소 익명(匿名)의 시대에서 벗어나 제법 독립된 개성(個性)을 가진 생물(生物)같이 보였다. 들창 가까운 곳에 여름 아침의 태양이 쪼이기 시작할 무렵 또는 저녁의 햇발이 가시고 세상의 모든 습기(濕氣)가 사라질 무렵, 다시 산보(散步)를 즐기게 된 어른들이나 노상(路上)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눈에 고양이의 모습이 여기저기 뜨이기 시작하였다. 고독(孤獨)한 표정을 하고 있는 고양이의 머리를 보니 금세 가슴에 애처로운 애정(愛情)이 끌어 오른다. 적연히(조용하고 고요히-편집자註) 평화는 다시 찾아왔다. 봄과 여름을 제대로 느낄 수도 있게 되었다. 세상이 애처롭고 아름답다고 느끼기에 고양이는 그리 큰 곤란(困難)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고양이는 이 세상을 보는 견지(見地)가 적지 않게 달라졌던 것이다. 고양이는 세상을 바라본다 .― 사람의 바짓가랑이 사이로 부인네의 양말 신은 발 사이로, 혹은 고양이는 지붕 위에서 가로등(街路燈)이 반짝이는 밤거리를 내려다보기도 하고 멀리 운하(運河)의 물이 불빛을 띄우고 흘러가는 것을 바라다보기도 한다. 온 세상이 잠들어 버린 밤거리에는 고양이만이 깨어서 소리를 내며 연통(煙筒)잡기와 철망(鐵網)넘기를 시작하면서 재미나게 놀고 있다. 밤이 늦어 집에 돌아온 내가 문을 열려고 자물쇠를 덜커덕거리면 놀고 있던 수고양이들이 이 소리를 듣고 놀라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발견하였다. 자리 속에 들어간 후에도 그들의 강하고 표독한 생(生)에의 갈망(渴望)은 나의 마음을 뒤흔들고 나의 잠을 깨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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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하기 1년 전의 김수영(1967년·원 안). 여동생의 고교 졸업식장에서(1961년 2월).
  그해 여름에는 수고양이들이 여간 바쁘지 않았다. 암고양이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길을 건너서 먼 곳까지 찾아갔다. 거리의 구조(構造)나 지리(地理)에 관한 지식도 그들은 여간 풍부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곁에서 훨씬 떨어져 있는 어떤 먼 거리에서 자기들의 수고양이를 만나곤 하였다. 그러할 때마다 고양이들은 스스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하는 기색(氣色)이 완연해 보였다. 뜻하지 않은 곳에서 주인을 만난 고양이는 너무 반가워서 자기들의 목적까지 잊어버리는 수가 많다. 그리고 그 주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느 고양이는 배를 곯아서 먹을 것을 찾으러 나온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으며, 어느 고양이는 동무가 그리워서 그 동무를 만나러 나온 척하는 것도 있다. 저녁때에는 의자(椅子) 위에 누워서 한껏 게으른 표정을 하고 있고, 고양이들은 집안 사람들이 잠잘 준비를 하는 것을 보자마자 곧 활동을 개시한다.
 
  도둑고양이를 가진 사람은 그의 집 앞에 일단(一團)의 수고양이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모여 있는 이 고양이들을 보면 그 속에 수컷도 있고 암컷도 있다. 아무리 보아도 서로 혈연(血緣)이 섞여 있는 것 같이 보이지 않는 이 고양이들은 불안하고 질투에 타고 있는 표정을 하고 있는가 하면, 또한 어디인지 신뢰(信賴)가 어울리지 않는 충성(忠誠)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다. 또한 어떻게 보면 우울하고도 포기적(抛棄的)인 표정을 하고 있는 것 같이도 보였다. 그중에도 가장 기분이 나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수고양이들이다. 밤이 오면 고양이들은 이 집을 온통 포위(包圍)한다. 수고양이들은 도로(道路)를 가로질러 가지고 비상선(非常線)을 편다. 이러한 광경은 마치 무슨 군사연습(軍事演習)이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처마 위의 교통이 빈번(頻繁)해진다. 수많은 세지(世智)가 사람이 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소모(消耗)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엿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낡은 여관의 고대(古代) 희랍식(希臘式) 들창 문틈을 타서 밖을 내다보는, 잠이 없는 숙박인(宿泊人) 정도일 것이다. 암고양이가 몹시 부족하였든지? 그렇지 않으면 수고양이들이 너무 방탕(放蕩)을 즐기고 있는 까닭이었는지?
 
  우리나라에 고양이가 부족하다는 말이 외국에까지 알려졌으며, 심지어는 바다 건너 있는 먼 나라에까지 이 소식이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외국에서는 처음으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보내는 소포편(小包便)에 고양이까지 몇 마리 넣어 보내 왔다. 이 외국에서 온 고양이들은 남쪽의 어느 항구(港口)에서 내렸다. 위원단의 회원(會員)들이 이 도착한 고양이들을 환영하였다. 고양이를 환영하는 위원단의 선두에는 시장(市長)이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서 있었다. 고양이들은 여러 개로 칸을 막은 장방형(長方形)의 ‘바스켓트’(바구니·basket-편집자註) 속에 넣어져 있었다. ‘바스켓트’의 뚜껑을 열고 보면 그 안은 버들가지가 격자형으로 얽어져 있고 그 밑에 고양이들이 앉아 있는데, 이 형형색색의 빛깔을 한 고양이들은 앞발을 들고 일어서서 위원단의 여러분들이 따뜻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대로 몸을 맡기고 서 있었던 것이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멸치 포대를 들고 돌아다니는 노파도 있었다. 푸른 하늘 밑에서 정열적(情熱的)인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퍼져 갔다. 모든 사람의 입가에는 천사(天使) 같은 미소(微笑)가 어리어 있었다. 무디고, 말이 없고, 강한 성격을 가진 부두노동자(埠頭勞動者)들까지 일하던 손을 멈추고 사랑스러운 눈초리로 이 동물들을 들여다본다. 사람들은 모두 이 동물을 환영하였다. 부두의 온화(溫和)한 아침 공기 속에는 코를 찌르는 듯한 고양이의 오줌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고양이의 오줌 냄새를 맡고 새삼스러이 자기들의 다시 찾은 자유(自由)를 회상하고 앞으로 다가올 가정생활(家庭生活)에의 희망을 꿈꾸는 것이었다.
 
  이날 고양이들은 흰 바탕에 꽃무늬가 놓인 접시에 담겨 있는 우리나라의 우유를 처음 맛보았다. 고양이들이 우유를 핥아먹는 모양을 어린아이들과 어린아이의 양친들은 부엌 한구석에 몰려 와서 무슨 신기로운 것이나 보는 듯이 구경하고 서 있었다. 고양이는 차근차근하고도 조심성스러운 걸음걸이로 이곳저곳으로 다니며 냄새를 맡아 가면서 가족들의 거실(居室)로 향하여 걸어갔다. 그러는 고양이의 뒤를 가족들은 고양이의 동작에 발을 맞춰 가면서 따라갔다. 연하여 방안에서는 고양이들의 목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그들이 이야기하고 웃고 노래하는 소리였다. 고양이들은 안락한 곳에 드러누워 호박과 같이 몸을 둥글게 쪼그리고 쌕쌕 잠들어 버렸다.
 
  외국에서 온 고양이들은 거처(居處)가 안정이 되자 곧 자기가 살고 있는 주변(周邊)의 동네를 답사(踏査)하기 시작했다. 밖에 나가지 않고 집 안에 들어앉아 있는 고양이들에게는 밤만 되면 옆집의 지붕 위에서부터 야옹야옹거리는 소리가 들려와서 우리의 세계(世界)에 국경이 없다는 경고(警告)가 연방 알려지곤 하였다. 어느 날 외국에서 온 고양이들은 밖으로 나와서 노상(路上)에 깔아 놓은 습기 찬 포석(鋪石)을 밟아 보았다. 밖에는 항상 이러한 순간을 위하여 눈을 뚱그렇게 뜨고 기대(期待)하기보다는 오히려 증오(憎惡)에 가까운 감정에 사로잡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는 수고양이가 있었다. 언어(言語)의 장벽(障壁)이라든가 예절에 대한 관심이라든가 인간적인 수치감 같은 것에 방해됨이 없이 그들은 마치 거리에서 장난하는 철없는 아이들처럼 서로서로 사귀고 친하였다. 많은 이들은 또한 고양이의 족속(族屬)들만이 가지고 있는 기나긴 여름의 오후를 꾸준히 기다릴 수 있는 강한 인내성(忍耐性)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내 결과는 뚜렷이 나타났다.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처녀 고양이가 탄생하였던 것이다. 새로운 세대(世代)― 전쟁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자기의 부모가 건너온 먼 나라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새로운 세대, 그리고 이 세계가 불가침(不可侵)의 주권(主權)을 가진 전용물(專用物) 같은 생각이 드는 새로운 세대가 탄생하였다.
 
  그럭저럭하는 사이에 바다 건너에서 고양이를 보내줄 미지(未知)의 인물에게 더 이상 고양이를 보내지 말아 달라는 거절(拒絶)의 편지가 가게 되었다. 모자라서 걱정하던 고양이가 이제는 너무 많이 생겨나서 처치하기도 곤란하게 되었다. 본능(本能)의 활동은 장려(奬勵)가 필요 없는 것이다. 새로운 단체(團體)가 설립되고 보니 고양이위원회도 하는 수 없이 그 활동을 중지하였다. 고양이 사업은 그 목적이 무의미하게 될 때에도 그 임무(任務)를 전적으로 포기(抛棄)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 결과, 어느 노파(고양이가 항구에 도착하였을 때 멸치를 분배하던 노파라고 생각이 드는)가 기상천외(奇想天外)의 착안(着眼)을 발견해 냈다.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설사 그것은 무의식적인 소행·所行이었을는지 모르지만) 생명을 바친 고양이들을 위하여 기념탑(紀念塔)을 세워 주자는 의견(意見)이었다. 처음에는 이 생각은 어리석고 무례(無禮)한 일이라고 하여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의 일에 집착(執着)을 갖게 되면 그 일에 대해 몇백 번이고 거듭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며, 그러는 동안에 그는 보다 더 정열적으로 그 일을 욕구(欲求)하게 되는 것이다. 고양이의 기념탑을 원하는 사람이 수많이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생활을 훨씬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광적(狂的)인 충동(衝動)에까지 그들의 욕구(欲求)는 승화(昇華)되어 갔다.
 
  고양이 위원회에서는 그 자체의 목적이 변경되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디인지 주저(躊躇)하는 기색이 보였으나 결국 이 일에 착수하기로 결정하였다. 유창(流暢)한 한 자루의 만년필은 우리의 모든 주저를 깨끗이 씻어 버리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회람판(回覽板)이 작성되고 기금모집(基金募集)이 시작되었다. 뛰어난 부호(富豪)들에게서부터 지폐가 들어오는 한편, 헌 지갑 속에 한닢 두닢 양심적으로 모아 둔 모양이 없는 전전(戰前)의 동전들도 들어왔다. 어린아이들까지도 그가 가지고 있는 돈을 내놓았다. 우리의 기계(機械) 같은 생활 위에도 비록 조그마한 것이지만 정의(正義)는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시의원회(市議員會)는 이 기념탑을 시내에 제일 큰 공원 안에 건립하기를 승인하였다. 이에 대한 결정을 보기까지에 시의원들은 우레(雨雷)와 같은 논쟁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인생의 기본문제까지도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 해 여름, 어느 토요일 날 오후에 이 기념탑의 제막식(除幕式)이 거행되었다. 기념식전(紀念式典)은 그로부터 또한 일 년이 지난 후에 베풀어졌다는 것이, 거의 모든 가정에서 고양이 새끼들이 버림을 받고 그 시체가 부엌의 들통이나 운하의 물 위에 떠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식량 배급제도 없어져 갈 무렵이었다. 우유 같은 것도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고 먹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꽃이 피어 있는 ‘재스민(素馨)’ 나무 덤불과 빈틈없이 손질을 하여 놓은 풀밭 위에 내리는 비는 이러한 풍경과는 너무 대차적(對蹉的)이었던, 지난날 전쟁이 계속되던 시절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인지 우산을 받치고 나와서 일장연설을 하였다. 지성이라는 전등(電燈)불을 좀처럼 꺼 버릴 수 없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귓속에 집어넣기 어려운 우스꽝스러운 연설을, 별별 사람이 다 모였다. 이러한 유별난 일이라도 없으면 좀처럼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야외에 한장소에 모일 기회는 드문 것이다. 여름에도 불을 그리워하는 만성불외출(慢性不外出) , 묵상(默想)하는 애연가(愛煙家)와 몽상가(夢想家), 죽는 날까지 가지고 가야 할 것만 같은 수심(愁心)에 가득 찬 노파, 발을 젓는 어린아이, 언제고 물동이를 몸에서 떼어 놓은 일이 없는 총각, 의족(義足) 하나 살 돈이 없는 가난한 절름발이, 마치 자기의 눈이 보이는 것처럼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는, 억울한 일로 눈을 다친 장님, 그러나 또한 그 안에는 화려한 의복을 입고, 값비싼 가죽제품을 가지고, 지진 머리털의 빗방울을 털고 있는 아름다운 젊은 여인도 있었다.
 
  공중에는 경건한 해독(害毒)이 떠돌고 있었다. ― 마치 이 지상(地上)에서 잠시 떠나 정신주의자(精神主義者)와 채식주의자(菜食主義者)와 정치초심자(政治初心者)와 잡지편집자(雜誌編輯者)의 회합(會合)에 참가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러한 인상은 여기 모여 있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볼 때 한층 더 강한 것으로 되었다. 헝겊으로 만든 ‘캐압’(Cap·모자의 뜻인 듯 _ 편집자註), 가죽으로 만든 ‘짜케트(Jacket·재킷의 뜻인 듯-편집자註)’, 19세기식(世紀式)의 어깨걸이, 현대식 의복의 가슴에 꽂힌 어울리지 않는 시골 목도리 ‘핀’, 턱수염, 입수염, 분가루, 초라한 얼굴에 칠한 입술연지, 씻지 않은 손, ‘재스민’ 꽃향기 위에 떠도는 미지근한 고양이 냄새 등이 있었다. 청동(靑銅)으로 만든 고양이 한 마리가 대좌(臺座) 위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에 산보를 갈 때면 나는 으레 이 앞을 지나온다. 기념탑은 벌써 풍우(風雨)에 거슬러 퇴색(褪色)하기 시작하여 회색(灰色)빛으로 변해 가고 있다. 길에는 눈이 녹지 않고, 방안은 살을 에는 듯이 춥기만 하여, 따뜻한 침대에서 얼어붙은 부엌까지 걸어가는 것이 세계를 일주한 것같이 즐겁게 생각이 들던 (문맥 흐름이 갑자기 끊김 _ 편집자註) 전쟁의 연월(年月)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는 무심한 아이들은 이 기념탑을 천진난만한 희열(喜悅)과 신기한 마음으로만 보고 있다.
 
  고양이를 위한 동상(銅像)이 세워져 있는 거리에 살고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천하의 서공(鼠公) 제현(諸賢)이여 우리들을 용서해 주시기 바라노라. (獨文 번역= 제임스 홀므스氏, 디. 엠. 이. 하베마 博士 共譯)(출처=《新太陽》 27호. 1954년 11월호)
 
  [편집자註 - <고양이>는 네덜란드 출신 독일작가 아드리안 모리앤(Adrian Morrian)이 쓴 작품이다. 영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김수영이 우리말로 옮겼다. 시인은 영어판 <고양이>의 출처는 밝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