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해방공간 金東仁 미발굴 자료 ②
오로지 ‘욕설’로 이름 석 자를 알린 좌익 문사들
글 : 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 좌익 계통
작가의 대부분이 ‘욕설의 축적’ 출세의 기반 삼아
⊙ 1945년 美군정 간부가 불하한 적산가옥에 살던 김동인, 1년 만에
쫓겨나
‘욕설’과 ‘일인가옥’(日人家屋)은 광복 이후
김동인(金東仁·1900~1951)의 생활과 심리상태가 잘 드러난 글이다. 좌우 극심한 혼란기 ‘군돈’ 같은 원고료로 생계를 이어야 했던
시기다.
‘욕설’은 1946년 7월 12일부터 21일까지 10차례, ‘일인가옥’은 같은 해 7월 25일부터 31일까지
《가정신문(家政新聞)》에 6차례 걸쳐 실렸다. ‘입에 풀칠을 위한 글쓰기’, ‘호구(糊口)의 문학’이라고 할 정도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쓰던
시절이었다. 날마다 글을 써야 했으나 그래도 의식은 살아 번득였다.
사실 김동인은 신문사와 인연이 깊다. 봉급생활을 40일간
한 적이 있다. 바로 《조선일보》(1934년 4월 입사)에서다. 당시 사장은 조만식(曺晩植·1883~1950), 편집국장은 시인
주요한(朱耀翰·1900~1979)이었다. 김동인은 40일간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있으며 문학청년 이기영(李箕永·1895~1984)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기영은 소설 <고향>, <쥐불(鼠火)>로 유명한 북한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당시
이기영은 소위 ‘살인·방화 소설’ 문사로 중앙 문단에서는 제외돼 있던 작가였다고 한다.
욕설로 이름 알리기
우익도 마찬가지였지만 일제시대 좌익 작가들 역시 생활이
궁핍하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기성 작가들에 비해 기법이나 필력 면에서 뒤떨어져 전업하지 않으면 굶을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당시 좌익계열의 한
맹장이던 백철(白鐵·1908~1985)도 《조선일보》에 근무하던 김동인을 찾아와 “이데올로기를 고칠 테니, 원고를 사달라”고 하면서 원고뭉치를
건네기도 했다고 한다. 김동인은 가난에 쪼들리는 문사들에게 점심 한 그릇 값이라도 내어주기 위해 경리직원과 늘 다투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지금 ‘북조선 문학자동맹위원장’이었다. 그전까지는 프로작가의 틈에서 살인, 방화소설 및 욕설 등으로 명맥을
유지하여 오던 L씨(소설가 이기영-편집자註)는 이때에 이 <쥐불>로 비로소 중앙에 머리를 내어놓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조선일보에
연재소설을 쓰게 되었고, 이리하여 오늘날의 반석에 도달한 것이다. 욕설이 직접 출세의 실마리가 된 바는 아니지만 오늘의 좌익 계통 작가의
대부분(그 시대 이후의 사람은 제하고)은 욕설의 축적으로서 출세의 모태를 잡은 것만은 사실이었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15일)
‘욕설’은 좌익 문사들의 선동적인 글, 즉 욕설에 가까운 글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좌익 문사들이 이름을 날리고
남보다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색채 다른’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게 다름 아닌 욕설이었다는 것이다.
< 어떤 이름
있는 사람을 한 사람 붙들어서 그 사람을 욕하는 글을 쓴다. 그러면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그 욕먹는 자의 이름을 보아서 그 글을 지상에 게재해
준다. 독자도 그 욕먹는 사람이 유명한 사람이니 그 글을 읽는다. 이리하여 자연 몇 번 그런 글이 거듭 펴노라면 ‘욕한 사람’도 차차 이름을
알게 된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14일)
좌익 문사들은 “이름을 얻기 위해 공연한 사람을 붙들어서 별별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붓는다”고 김동인은 주장한다. 일제시대 욕설로 등용(登庸)해 이름을 알린 이들의 행태는 8·15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광복이 되자 이들은 《조선인민보》, 《자유신문》, 《평양신보》, 《서울신문》 등의 신문에 자리 잡고서 본격적인 욕설을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동인 선생은 그들을 향해 ‘욕으로 재등용하는 작가 아닌 작가’라고 비판했다. 이런 좌익 인사들의 욕설은 2012년 한국의 정치현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나꼼수’ 출신 민주통합당 김용민 후보의 종교·여성·노인을 향한 욕설과 막말이 그 예다.
< 본시부터
애족(愛族)관념이 없던 위에 좌익사상은 구연(舊緣)이 있는 관계로 ― 그들은 해방 조선에서 엉뚱한 출발을 한 것이었다. ‘애국’이라 하면
일본이고 소련이고 조선이고를 매 한 가지로 어느 것에 매번 충성을 바치면 그만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관인 듯싶다. 그리고 무슨 가죽을 얼굴에 쓴
그런 말이 나오는지…(중략)…욕설이나 선동은 그들이 오래 수련한 바의 재주다.…(중략)…그들과 동반하여 나아가는 ××당(黨)도 똑같은 코스를
밟는 것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17일)
집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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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당시 일본인이 거주하던
적산가옥. 최근 역사문화체험공간으로 변신한 경북 울릉군 도동리의 한 일본식 가옥 전경./울릉군
제공 |
1945년 광복이 되면서 한국의
주택사정은 커다란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70여만 명에 달하던 일본인이 돌아갔으나 일본·만주·중국에 살던 동포들이 대거 귀국한 것이다. 그 수가
120만명에 이른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여기다 공산체제를 피해 남하한 이북 사람까지 몰려들어 주택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일본인들이 돌아가면서 귀속재산이 된 적산가옥(敵産家屋)이 약 5만 채가량 있었으나 엄청난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이 일인가옥은
고가에 거래됐다고 한다.
< 집값도 따라 올라갔다. 처음에는 거저 버리고 도망치던 집이 시가의 약 1할(割), 2,
3, 4, 5할로 쑥쑥 올라갔다. 조선 사람이 사주지 않으면 그냥 버리고 갈 집이지만…(중략)…내버려두면 조선의 국부(國富)가 될 돈을
경쟁적으로 자기네(일인)까지 갖다 바친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25일)
그러나 미군정은 1945년
12월 6일 법령 제33호(조선 내 일본인 재산의 권리귀속에 관한 건)를 발표하며 모든 적산(敵産)을 군정하에 귀속시켰다. 그 무렵, 김동인
역시 적산가옥에 살고 있었다. 1945년 11월 미군정청 광공국(鑛工局) 부국장의 호의로 서울 성동구 신당동(現 약수동)의 적산가옥을 불하받았던
것이다. 그 집은 기역자(字) 구조로, 글 쓰는 작업실이 부엌이나 방들과 떨어져 좋았다고 한다. 또 일본식 정원이 마당에 있어 작품 활동에 지친
머리를 식힐 수 있었다.
< 해방 후 다시 서울로 오니 이 육척을 의지할 데가 없다. 그래서 집을 하나 구해보려고 쩔쩔맬
때에 그때 미군정청 광공국 부국장이던 모씨가 그 소문을 듣고 내게 집 한 채를 알선해 주었다.
“그대가 조선어와 조선문학의
길을 지키노라고 고절(苦節) 30년 조선 국가가 있으면 국가로서 마땅히 표창할 일이지만, 그건 현재 할 수 없고 집 한 칸도 없이 지금 공중에
뜬 형편이라니 역시 불안할 수 없다. 현재 군정청에서 일본인 큰 회사를 접수하여 그 사택이 백여 채가 있으니 그대 마음에 드는 것이 있거든 한
채 골라잡으라. 무론 나 개인으로 하는 일이요, 내가 표할 수 있는 최대의 호의로다.”
이리하여 어떤 일본 회사 사장의
사택이었던 집을 한 채 빌리고 이제 마음 놓고 내 가족을 데리고 살아오는 것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29일)
김동인은 당시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저 얻은 집이지만 장차는 조선 정부가 생겨서 살라 할 때에는 살 것으로
알고 마음 놓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내 집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미군정청의 일방적인 조치로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1946년 11월 불하받은 가옥이 군정청에 접수돼 부득이 하왕십리동으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 김동인은
《속망국인기》(續亡國人期)(1948)에다 이렇게 회고했다.
< 일제시절에는 그래도 서로 말, 언어가 통해야 이쪽 의사를
저쪽에 알릴 수 있고 저쪽 의사를 이쪽이 알 수 있었으니 서로 오해는 없이 살아왔으나, 지금은 다만 저들의 눈에는 우리는 미개인(未開人)일
따름이요, 우리의 눈에는 저들은 다만 군인일 따름이오.>(출처=《속망국인기》, 백민, 1948년 3월)
“8·15에 느꼈던 감격과 감사는 모두가 헛것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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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월 3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좌익 측의 찬탁대회. |
김동인은 ‘일인가옥’을 통해
작심하듯 이렇게 말한다. ‘백성에게 안심을 못 주는 정치는 요컨대 실패의 정치’라고. 또 ‘강권겁탈(强權劫奪)’이란 표현도 썼다. 그 호소는
너무나 절절하다.
< 지금 이 집을 잃으면 우리 집 몇 식구는 사실 공중에 뜬 살림이 된다. 이즈음 그 문제로 며칠째
잠도 못 자고 근심에 쌓여 있다. 나뿐 아니라 다 그러하리라. 늙어가는 몸이 일생을 오직 문학과 국어 사수에 바치고 그 노력을 천하가 모르는
가운데 그래도 알아주는 이가 있어서 집 한 채 얻어 잡고 늙마에 몸 의지할 데가 생겼다고 안심하고 있었더니 권력자의 ××는 이 늙은이의 집 한
채조차 용인하지 않아 가족 데리고 한길로 나가라는 것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31일)
동인은 미군정청
광공국 부국장을 다시 찾아갔다. 그는 동인의 사정과 호소를 다 들은 뒤 천장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쉰 뒤에 이렇게 말했다. 《속망국인기》에
나오는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일껏 김 선생의 편의를 보아 드렸었지만, 군에서 쓴다면 할 수 없지요. 저 사람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고, 어서 이사 갈 집이나 물색하세요.”
김동인은 더 이상 그에게 불평이나 희망을 말하지 않고
뒤돌아섰다.
< 나는 O씨에게 더 무슨 요구나 희망이나 불평을 말하지 아니하였소. 한댓자 쓸데없을뿐더러, O씨를 괴롭게
하는데 지나지 못할 것이므로.
1945년 8월 15일에 느꼈던 감격과 감사는 모두가 헛것이었소. 다만 ‘망국인’이라는 커다란
그림자가 우리를 지배할 뿐이오.> (출처=《속망국인기》, 백민, 1948년 3월)⊙
金東仁 미발굴 자료 ②
“얼굴에 무슨 가죽을 쓰고 그런 욕설을 말하나”
글 : 月刊朝鮮
2012년 5월호
8·15로 세상이
바뀌었기에 알았지 그런 세상이 더 계속되었다가는 그들의 붓글이 조선 민족을 씨도 없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천행(天幸)으로 그런
기사(記事)에는 필자(筆者)의 이름을 쓰지 않았기에 말이지 신문 기사에 책임 필자의 이름을 썼다 하면 그(일본 충신)들은 당장 전쟁터에서 아들을
잃은 부모들에게 매 맞아 죽었을 것이다
⊙ ‘야비의 문자’가 조선에 나타난 것은 좌익 문사 지망자들의 욕설
유행이 실마리
⊙ 공격의 목표가 주로 이승만, 김구 등 우익 진영의 지도자
⊙ 백성에게 안심을 못 주는 정치는 실패의 정치
⊙
약자의 마음속에 들어앉은 원한만은 강자의 권력으로도 말살하지 못해
[편집자註]
김동인 선생은 ‘시사평론’이란
어깨제목을 단 ‘욕설’을 1946년 7월 12일부터 21일까지 10차례 《가정신문(家政新聞)》에 게재했다. 그리고 며칠 뒤 같은 신문에
‘시사문제’란 어깨제목으로 ‘일인가옥’(日人家屋)을 7월 25일부터 31일까지 6차례에 걸쳐 실었다.
마이크로 필름으로 저장하는 바람에
원문 상태가 나빠 해독이 어려운 부분은 ‘□’로 표기했다. 또 문장 속에 ‘×’가 들어간 부분이 많은데 검열에 의해 삭제된 것으로 추정된다.
‘×××××’는 행을 바꾸기 위해 쓴 것으로 보인다. 원문을 중시하되 맞춤법이 틀리거나 옛날식 표현, 일본인 한자이름 등은 현대적 표기로
바로잡았다.
<‘욕설’>
(1)
우리 국가 해방의 공로자인
김구(金九) 선생이 이즈음, “욕설이 너무 유행한다. 야비한 욕설로 지도자를 공격하는 등의 일이 너무 유행한다. 삼가야 할 것이다” 하여 일부
언론기관, 혹은 일부 단체의 야비한 언사를 책망한 일이 있다. 그와 전후하여 이승만 박사도 비슷한 주의를 하였다. 어떤 청년회에서도
유사(類似)한 경고를 하였다.
어떤 신문을 통하여 어떤 정당에서 어떤 선언 ―혹은 발표를 하였는데 그 내용이 너무도 야비하고
무지하였었기 때문에 발단된 문제요, 공격의 목표가 주(主)로 우익 진영의 수령들이었던 것이다.
이승만 박사며, 김구 주석이며
우익 진영의 지도자들은 그 새 연해 좌익 진영의 공격을 받아오던 터이요, 웬만한 욕설이나 공격에는 면역이 되었을 것이요, 설사 불감(不感)의
지경까지는 아니 이르렀다 할지라도, 어울리지 않는 상대자라 치지도외(置之度外)하여 일일이 관심치 아니하던 그이(이 박사며 김 주석)들이었거늘,
이들의 공격에 비로소 꾸중을 하고 일반의 주의를 부르는 것으로 보아서 이런 것은 도를 넘친 야비(野卑)였던 모양이다.
불행히
나는 그 글이 실렸다는 ××보(報)의 그날 것을 보지를 못하여서 무슨 소리를 썼었는지는 알지 못하나 상대되지 않는 상대를 상대하여
꾸중하였으니만치 야비의 도가 과하였던 것만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공격의 근원지가 예(例)의 ××당(黨)이요, 게재되었다는 기관이 예의
××보이며 야비, 무지, 몰상식의 도수(度數)는 미루어 알 수 있다.
× × × × ×
대체 이 땅에서
언론기관으로서 인신공격 내지 욕설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경부터로서 1921년, 22년에서 차차 번성하여 가서 1926, 27년경이 그
전성기였다.
당시의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의 소위 문화정책의 덕택으로 신문이며 잡지기관, 언론기관이 연해
생겨났다. 신문 잡지가 생겨나자 자연 거기 전문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매 한 가지로 손쉽게 ‘문화인’이 되기 위하여서는
‘문사’가 되는 것이 가장 첩경이다. 게다가 문사라는 것에는 면허증이 필요 없고 졸업증서라는 것이 쓸 데 없다. 그런 것이 없을지라도 역량과
수완으로 문사가 되는 것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12일)
(2)
1919년의 만세사건 직후의 의기충천하고 기고만장한 이 민족은 제각기 문화인으로 출세해 보려고 움직이었다. 은행 사무원은 주판을 내던지고
시(詩)를 쓰고 회사원은 ‘벤또 곽(도시락-편집자註)’을 동댕이치고 소설을 쓰고, 2000만 모두가 개명(開明)하려고, 개명하기에 첩경인
‘문사’가 되려고 했었다.
형편이 이렇게 됨에, 하도 지망자가 많은지라 문사 되기도 차차 어려워갔다. 더욱이 등록의 길목은
좁은데다가 모두가 그리로만 모이니 문사로 나서기도 좀체의 일이 아니었다.
× × × × ×
게다가
공산주의가 일본을 거쳐 조선에도 수입되자 초창기의 조선 공산주의는 사상으로서보다 좌익문학으로 자리 잡으려 하였다. 주종건(朱鍾健) 군 같은 조선
공산당의 원로도 처음은 문사 ― 혹은 거기 유사한 길에서 출발하려 하였다. 이때에 문사, 혹은 문사 지망자들이 좌경(左傾)하였다. 문화인이
되려고 그 첩경인 문사가 되려 하였지만 등용의 길목은 벌써 좁아 갈팡질팡하던 문사 지망자들은
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