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발굴] 해방공간 金東仁 미발굴 자료 독점 공개

이강기 2015. 10. 2. 11:22

[발굴] 해방공간 金東仁 미발굴 자료 독점 공개

 

“삼천 만의 작은 인구를 몇 조각으로 나눠야 하나”

 

글 : 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월간조선 2012년 4월호

 

⊙ ‘공연예술자료 연구사’ 김종욱씨가 수십 년간 김동인 자료 모아
⊙ 광복 이후 박순천·모윤숙이 관여한 《가정신문(家政新聞)》에 주로 발표
⊙ 이승만 박사를 비난하는 좌익세력을 ‘반역론자’라고 공격

 

 

 

 

  좌우익(左右翼) 대립이 극심했던 해방공간 김동인(金東仁·1900~1951) 선생의 내면을 알 수 있는 미발굴 자료가 빛을 보게 됐다. ‘공연예술자료 연구사’ 김종욱(金鍾旭·75)씨가 수십 년간 모은 자료를 《월간조선》에 제공했다.
 
  김동인 선생의 미발굴 자료는 1960년대 초 평화출판사에서 발행한 전 5권 《김동인 전집》, 1976년 삼중당(三中堂)에서 출간한 전 7권 《김동인 전집》, 1987년 《조선일보》가 펴낸 전 16권 《김동인 전집》에서는 빠진 산문(散文)들이다. 대부분 광복 이후 쓴 것이다.
 
  김종욱씨는 삼중당의 《김동인 전집》 간행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 인연으로 동인에 대한 관심을 이후에도 놓지 않고 국립중앙도서관과 대학도서관, 청계천 고서점을 뒤지며 자료를 모았다고 한다. 요즘도 매일 국립중앙도서관을 찾는다.
 
  “삼중당판 전집을 만들 때 평화출판사판을 텍스트로 동인 자료를 모았습니다. 그러나 ‘평화판’은 내용 거의가 오탈자, 미발굴 자료가 많았어요.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김동인’이라는 이름 외에 아호(雅號)로 발표된 작품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연 이것이 동인의 작품인지 확인을 위해 고심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시어딤(시어짐)’, ‘춘사(春士)’, ‘금동(琴童)’ 등 김동인의 것으로 밝혀진 아호 내지 필명(筆名) 외에도 다양한 이름이 등장했던 것이다.
 
  “선생이 직접 경영했던 《야담(野談)》지에는 무수한 필명이 대거 등장하는데 과연 그 글들을 모두 동인 선생의 글로 볼 것인지 여간 고심되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도 《야담》에 쓴 글 중 어떤 것이 동인의 것이고, 어떤 것이 다른 이가 쓴 것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자존심을 굽히고 닥치는 대로 글을 쓰다
 

 

 

공연예술자료 연구사 김종욱씨.

 

  이번에 공개하는 글은 삼중당판 전집이나 《조선일보》판 전집에 수록되지 않은 전혀 새로운 작품이다. 광복 이후 《大東新聞(대동신문)》과 《가정신문(家政新聞)》에 주로 실린, 그러니까 말년의 동인이 쓴 글이다. 《가정신문》은 《대동신문》이 재정난으로 문을 닫은 뒤 박순천(朴順天) 여사가 제호(題號)를 바꿔 1946년 3월 21일 창간한 신문으로, 김동인은 두 신문에 많은 글을 실었다. 당시 《가정신문》의 편집장이자 주간이 모윤숙(毛允淑) 선생이며 이후 김말봉(金末峰) 선생이 바통을 이어받아 6·25 직전까지 발행됐다고 한다.
 
  그 무렵, 동인은 소설을 쓰기보다 시국(時局)을 한탄하는 시론(時論)과 수필을 주로 썼다. 마음 편히 창작을 할 만한 상황이 못 됐기 때문이다.
 
  당시 선생은 몹시 궁핍했다. 젊은 시절, 막대한 유산을 탕진한 뒤 끼니조차 잇기 어려울 정도였다. 돈을 벌기 위해 자존심을 굽히고 닥치는 대로 글을 썼다고 한다. 신문, 잡지 등 매체를 가리지 않았다. 이 무렵 동인에게 글은 예술성의 차원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생존은 1946년 4월 3일자 《가정신문》에 실린 <한인(韓人)이기에-5>에 ‘쌀 문제’를 언급한 데서 알 수 있다.
 
 < 쌀이 없어 사람들이 굶을 지경이라, 어떤 말을 들어도 ‘부엌에 한 알의 쌀도 없어서 엊저녁도 굶고 조반(朝飯)도 못 지었다’는 급박한 사정이 아니요, ‘빨리 해결책을 세우지 않으면 굶을 호구(糊口)가 많다’는 의식 정도로 인식하는지라.>
 

 

김동인 상.

 

  또 광복 직후 작가 이태준, 김남천, 임화 등이 공산주의 사상을 고취하며 순수문학 작가들을 배척하려 하자, 그는 적극적으로 이들과 맞섰다. 북한 공산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이승만(李承晩) 박사를 비난하는 이들을 ‘민족반역자’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또 1945년 8월 17일 임화, 김남천의 주도로 발족한 ‘조선문학건설본부’에서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를 제명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고 퇴장한 일화(逸話)도 있다.
 
 < 이승만 박사의 말을 기화로 삼아 천백(千百) 가지로 얽어매어 이 박사를 무함(誣陷)해서 ‘이 박사는 북조선을 영 포기(抛棄)하잔다’ 어쩐다 한 반역론자(反逆論者)들은 결국 그들의 본시(本是)의 목적인 ‘이 박사와 한인 대중의 이간(離間)’은 성공치 못하고 이 박사가 명료(明瞭)치 못하게 발언했고 강연의 본지(本旨)를 더 구체적으로 대중에게 철저(徹底)시킬 기회를 준 것뿐이다.>(《가정신문》 1946년 6월 20일자)
 
 < 통일정부고 단독정부고 이렇게 분류하기를 언제부터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지만 정부수립에 통일이고 민족이고의 구별을 지을 필요가 어디 있을까. 겨우 삼천리의 좁은 땅, 겨우 삼천만의 작은 인구. 요것을 가지고 뭬 몇 조각에 나누어야 하는가>(《가정신문》 1946년 6월 24일자)
 
 < 1945년의 이완용(李完用)인 북조선의 영웅(英雄)을 묵살(默殺)로서 매장(埋葬)하자. 이승만 박사가 통일을 부르짖을 때에 감연(敢然) 탈퇴(脫退)한 것도 공산당이요, 북조선에 북조선국을 따로 세워서 한국의 한 귀퉁이를 떼어내고자 한 것도 공산당이요, 인민공화국(人民共和國)이란 것을 국가인지 정당(政黨)인지 구락부(俱樂部)인지 알기 힘든, 꾸며내어 또다시 부스러뜨려 보려고 동작(動作)하던 것도 공산당회 내의 관계인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이요…>(《가정신문》 1946년 6월 26일자)
 
 
  “겨우 한마디 말씀밖에 안 하셨다”
 

 

김동인과 오랜 인연을 맺은 소설가 정비석.

 

  동인은 1946년 1월 우익단체인 ‘전조선문필가협회’ 결성을 주선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이념으로 갈라진 작가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별을 선언하고 침묵을 고수했다고 한다. 침묵에는 자식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 신당동 집에서 고독 속에서 병마와 싸우며 말년을 보냈다. 그의 방은 자식이나 아내에게도 금족령이 내려졌다. 3녀 은환(銀煥)씨는 1963년 《여상(女像)》 2월호에 아버지를 이렇게 묘사했다.
 
 < 세수마저 하기 싫어하는 게으름으로 병이 없어도 누워계시는 아버지. 방은 특별한 경우를 빼놓고는 금족령이 내린 구역이었다. 특별한 경우란 어쩌다 아버지의 무료가 극에 달했을 때와 설날 세배할 때, 사면(四面) 벽과 천장으로 외계와 가로막힌 조그만 육면체 속에서,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서적으로도, 방안을 뽀얗게 만드는 담배로도, 끌 수 없으리만큼 심심한 날이면 금족령이 풀린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백과사전의 괴물들을 손가락으로 짚기도 하고 종이를 접어도 보며 제법 즐거웠지만 그 시각이 나고 나면 우린 곧 물러 나와 거의 신비에 가까운 마음으로 그 방 속에서의 아버지 생활을 그려보곤 했다.>
 
  침묵은 자신이 아끼던 소설가 정비석(鄭飛石·1911~1991) 선생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동인이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재직할 당시 신춘문예 공모에 소설 <성황당(城隍堂)>으로 등단한 인연이 있다. 정비석은 1962년 12월호 《현대문학》지에 기고한 <동인선생회고기>에서 이렇게 썼다.
 
 < 내가 《중앙신문》 문화부장으로 있을 당시에는 거의 매일같이 지나시는 길에 내 방에 들러주셨지만, 내가 몇 마디 말을 해야 선생은 겨우 한마디 말씀밖에 안 하셨다. 그러면서도 후배를 사랑하시는 마음은 극진하셔서 내가 청탁하는 원고라면 한번도 거절하는 일 없이 무엇이든지 써주셨다.>
 
 
  수의도 없이 묻히다
 
  1951년 1·4후퇴 당시 동인의 가족은 피란길에 올랐다. 그러나 병색이 깊어 자신은 피란을 떠나지 못했다. 김종욱씨의 말이다.
 
  “동인 선생은 당시 대소변도 못 가릴 정도로 건강이 나빴다고 해요. 김경애 여사와 가족이 동인을 일으켜세우려 했는데 문지방을 못 넘었다고 합니다. 억지로 데려가려 했지만 불가능했습니다. 이때가 1·4 후퇴 직후였어요. 김 여사는 곧바로 수복될 줄 알고 남편을 두고 피란길에 올랐어요. 그러나 3년이 지난 1954년에야 신당동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부산 피란촌에서 김 여사가 우연히 정비석을 만나 눈물로 남편 얘기를 했다고 한다. 1952년 1월 초 정비석은 도강증을 구해 서울로 왔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동인의 집이었다.
 
  “정비석이 안방에 들어갔더니, 노인 한 분이 누워 있더라는 겁니다. 안경 쓰고 수염은 덥수룩하고 홑이불 덮고 있어서 동인인지 몰랐다고 해요. 앉아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선생이었다는 겁니다. 놀라서 코 밑에 손을 대니 온기가 없었고 손으로 일으켜세우려 하니 장작개비처럼 뻣뻣했다고 합니다. 죽은 지가 족히 1년은 됐을 텐데 정비석은 죽은 지 얼마 안 된 것처럼 느껴졌다고 해요. 그때 김 여사의 말이 떠올랐다고 해요. 1년 전 피란 갈 때 필요할 때 쓰라는 뜻에서 동인의 요 밑에 3만원을 넣어두었다는 겁니다. 정비석이 요 밑에 손을 쑥 넣으니 한뭉치의 돈이 나오는데 세어보니 꼭 3만원이었다는 겁니다.”
 
  동인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빈집에서 혼자 세상을 뜬 것이다. 이어령 장관의 부인인 문학평론가 강인숙씨는 “수의(壽衣)도 없이 언 땅에 묻힌 그의 죽음은 오스카 와일드의 최후를 연상시킨다”고 썼다.
 
  김종욱씨는 아직 동인의 글을 찾을 게 더 많다고 한다. 한창 시절, 자유분방했으며 글쓰기에 광분(狂奔)했던 그였기 때문이다.
 
  “제 평생 소원이 뭔지 아세요? 동인 선생이 한때 만주에서 기거하며 《만선일보(滿鮮日報)》에 대하 장편역사소설 <서총대(瑞蔥臺)>(연산군 시대 역사물)를 연재하였다는 확인된 사실을 접하고도 아직 그 신문의 소장처를 확인하지 못했어요. 일제 치하 동인의 최후 역작 〈서총대〉를 어떻게 하면 만나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제 평생 풀지 못할 영원한 숙제입니다.”⊙

 

 

 

 

 

 

 

[발굴] 해방공간 金東仁 미발굴 자료 ②

오로지 ‘욕설’로 이름 석 자를 알린 좌익 문사들

글 : 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좌익 계통 작가의 대부분이 ‘욕설의 축적’ 출세의 기반 삼아
⊙ 1945년 美군정 간부가 불하한 적산가옥에 살던 김동인, 1년 만에 쫓겨나
  ‘욕설’과 ‘일인가옥’(日人家屋)은 광복 이후 김동인(金東仁·1900~1951)의 생활과 심리상태가 잘 드러난 글이다. 좌우 극심한 혼란기 ‘군돈’ 같은 원고료로 생계를 이어야 했던 시기다.
 
  ‘욕설’은 1946년 7월 12일부터 21일까지 10차례, ‘일인가옥’은 같은 해 7월 25일부터 31일까지 《가정신문(家政新聞)》에 6차례 걸쳐 실렸다. ‘입에 풀칠을 위한 글쓰기’, ‘호구(糊口)의 문학’이라고 할 정도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쓰던 시절이었다. 날마다 글을 써야 했으나 그래도 의식은 살아 번득였다.
 
  사실 김동인은 신문사와 인연이 깊다. 봉급생활을 40일간 한 적이 있다. 바로 《조선일보》(1934년 4월 입사)에서다. 당시 사장은 조만식(曺晩植·1883~1950), 편집국장은 시인 주요한(朱耀翰·1900~1979)이었다. 김동인은 40일간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있으며 문학청년 이기영(李箕永·1895~1984)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기영은 소설 <고향>, <쥐불(鼠火)>로 유명한 북한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당시 이기영은 소위 ‘살인·방화 소설’ 문사로 중앙 문단에서는 제외돼 있던 작가였다고 한다.
 
 
  욕설로 이름 알리기
 
  우익도 마찬가지였지만 일제시대 좌익 작가들 역시 생활이 궁핍하긴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기성 작가들에 비해 기법이나 필력 면에서 뒤떨어져 전업하지 않으면 굶을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당시 좌익계열의 한 맹장이던 백철(白鐵·1908~1985)도 《조선일보》에 근무하던 김동인을 찾아와 “이데올로기를 고칠 테니, 원고를 사달라”고 하면서 원고뭉치를 건네기도 했다고 한다. 김동인은 가난에 쪼들리는 문사들에게 점심 한 그릇 값이라도 내어주기 위해 경리직원과 늘 다투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지금 ‘북조선 문학자동맹위원장’이었다. 그전까지는 프로작가의 틈에서 살인, 방화소설 및 욕설 등으로 명맥을 유지하여 오던 L씨(소설가 이기영-편집자註)는 이때에 이 <쥐불>로 비로소 중앙에 머리를 내어놓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조선일보에 연재소설을 쓰게 되었고, 이리하여 오늘날의 반석에 도달한 것이다. 욕설이 직접 출세의 실마리가 된 바는 아니지만 오늘의 좌익 계통 작가의 대부분(그 시대 이후의 사람은 제하고)은 욕설의 축적으로서 출세의 모태를 잡은 것만은 사실이었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15일)
 
  ‘욕설’은 좌익 문사들의 선동적인 글, 즉 욕설에 가까운 글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좌익 문사들이 이름을 날리고 남보다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색채 다른’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게 다름 아닌 욕설이었다는 것이다.
 
 < 어떤 이름 있는 사람을 한 사람 붙들어서 그 사람을 욕하는 글을 쓴다. 그러면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그 욕먹는 자의 이름을 보아서 그 글을 지상에 게재해 준다. 독자도 그 욕먹는 사람이 유명한 사람이니 그 글을 읽는다. 이리하여 자연 몇 번 그런 글이 거듭 펴노라면 ‘욕한 사람’도 차차 이름을 알게 된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14일)
 
  좌익 문사들은 “이름을 얻기 위해 공연한 사람을 붙들어서 별별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붓는다”고 김동인은 주장한다. 일제시대 욕설로 등용(登庸)해 이름을 알린 이들의 행태는 8·15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광복이 되자 이들은 《조선인민보》, 《자유신문》, 《평양신보》, 《서울신문》 등의 신문에 자리 잡고서 본격적인 욕설을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다. 동인 선생은 그들을 향해 ‘욕으로 재등용하는 작가 아닌 작가’라고 비판했다. 이런 좌익 인사들의 욕설은 2012년 한국의 정치현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나꼼수’ 출신 민주통합당 김용민 후보의 종교·여성·노인을 향한 욕설과 막말이 그 예다.
 
 < 본시부터 애족(愛族)관념이 없던 위에 좌익사상은 구연(舊緣)이 있는 관계로 ― 그들은 해방 조선에서 엉뚱한 출발을 한 것이었다. ‘애국’이라 하면 일본이고 소련이고 조선이고를 매 한 가지로 어느 것에 매번 충성을 바치면 그만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관인 듯싶다. 그리고 무슨 가죽을 얼굴에 쓴 그런 말이 나오는지…(중략)…욕설이나 선동은 그들이 오래 수련한 바의 재주다.…(중략)…그들과 동반하여 나아가는 ××당(黨)도 똑같은 코스를 밟는 것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17일)
 
 
  집을 잃다!
 
일제시대 당시 일본인이 거주하던 적산가옥. 최근 역사문화체험공간으로 변신한 경북 울릉군 도동리의 한 일본식 가옥 전경./울릉군 제공
  1945년 광복이 되면서 한국의 주택사정은 커다란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70여만 명에 달하던 일본인이 돌아갔으나 일본·만주·중국에 살던 동포들이 대거 귀국한 것이다. 그 수가 120만명에 이른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여기다 공산체제를 피해 남하한 이북 사람까지 몰려들어 주택문제는 매우 심각했다.
 
  일본인들이 돌아가면서 귀속재산이 된 적산가옥(敵産家屋)이 약 5만 채가량 있었으나 엄청난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이 일인가옥은 고가에 거래됐다고 한다.
 
 < 집값도 따라 올라갔다. 처음에는 거저 버리고 도망치던 집이 시가의 약 1할(割), 2, 3, 4, 5할로 쑥쑥 올라갔다. 조선 사람이 사주지 않으면 그냥 버리고 갈 집이지만…(중략)…내버려두면 조선의 국부(國富)가 될 돈을 경쟁적으로 자기네(일인)까지 갖다 바친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25일)
 
  그러나 미군정은 1945년 12월 6일 법령 제33호(조선 내 일본인 재산의 권리귀속에 관한 건)를 발표하며 모든 적산(敵産)을 군정하에 귀속시켰다. 그 무렵, 김동인 역시 적산가옥에 살고 있었다. 1945년 11월 미군정청 광공국(鑛工局) 부국장의 호의로 서울 성동구 신당동(現 약수동)의 적산가옥을 불하받았던 것이다. 그 집은 기역자(字) 구조로, 글 쓰는 작업실이 부엌이나 방들과 떨어져 좋았다고 한다. 또 일본식 정원이 마당에 있어 작품 활동에 지친 머리를 식힐 수 있었다.
 
 < 해방 후 다시 서울로 오니 이 육척을 의지할 데가 없다. 그래서 집을 하나 구해보려고 쩔쩔맬 때에 그때 미군정청 광공국 부국장이던 모씨가 그 소문을 듣고 내게 집 한 채를 알선해 주었다.
 
  “그대가 조선어와 조선문학의 길을 지키노라고 고절(苦節) 30년 조선 국가가 있으면 국가로서 마땅히 표창할 일이지만, 그건 현재 할 수 없고 집 한 칸도 없이 지금 공중에 뜬 형편이라니 역시 불안할 수 없다. 현재 군정청에서 일본인 큰 회사를 접수하여 그 사택이 백여 채가 있으니 그대 마음에 드는 것이 있거든 한 채 골라잡으라. 무론 나 개인으로 하는 일이요, 내가 표할 수 있는 최대의 호의로다.”
 
  이리하여 어떤 일본 회사 사장의 사택이었던 집을 한 채 빌리고 이제 마음 놓고 내 가족을 데리고 살아오는 것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29일)
 
  김동인은 당시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저 얻은 집이지만 장차는 조선 정부가 생겨서 살라 할 때에는 살 것으로 알고 마음 놓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내 집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미군정청의 일방적인 조치로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1946년 11월 불하받은 가옥이 군정청에 접수돼 부득이 하왕십리동으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 김동인은 《속망국인기》(續亡國人期)(1948)에다 이렇게 회고했다.
 
 < 일제시절에는 그래도 서로 말, 언어가 통해야 이쪽 의사를 저쪽에 알릴 수 있고 저쪽 의사를 이쪽이 알 수 있었으니 서로 오해는 없이 살아왔으나, 지금은 다만 저들의 눈에는 우리는 미개인(未開人)일 따름이요, 우리의 눈에는 저들은 다만 군인일 따름이오.>(출처=《속망국인기》, 백민, 1948년 3월)
 
 
  “8·15에 느꼈던 감격과 감사는 모두가 헛것이었소”
 
1946년 1월 3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좌익 측의 찬탁대회.
  김동인은 ‘일인가옥’을 통해 작심하듯 이렇게 말한다. ‘백성에게 안심을 못 주는 정치는 요컨대 실패의 정치’라고. 또 ‘강권겁탈(强權劫奪)’이란 표현도 썼다. 그 호소는 너무나 절절하다.
 
 < 지금 이 집을 잃으면 우리 집 몇 식구는 사실 공중에 뜬 살림이 된다. 이즈음 그 문제로 며칠째 잠도 못 자고 근심에 쌓여 있다. 나뿐 아니라 다 그러하리라. 늙어가는 몸이 일생을 오직 문학과 국어 사수에 바치고 그 노력을 천하가 모르는 가운데 그래도 알아주는 이가 있어서 집 한 채 얻어 잡고 늙마에 몸 의지할 데가 생겼다고 안심하고 있었더니 권력자의 ××는 이 늙은이의 집 한 채조차 용인하지 않아 가족 데리고 한길로 나가라는 것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31일)
 
  동인은 미군정청 광공국 부국장을 다시 찾아갔다. 그는 동인의 사정과 호소를 다 들은 뒤 천장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쉰 뒤에 이렇게 말했다. 《속망국인기》에 나오는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일껏 김 선생의 편의를 보아 드렸었지만, 군에서 쓴다면 할 수 없지요. 저 사람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고, 어서 이사 갈 집이나 물색하세요.”
 
  김동인은 더 이상 그에게 불평이나 희망을 말하지 않고 뒤돌아섰다.
 
 < 나는 O씨에게 더 무슨 요구나 희망이나 불평을 말하지 아니하였소. 한댓자 쓸데없을뿐더러, O씨를 괴롭게 하는데 지나지 못할 것이므로.
 
  1945년 8월 15일에 느꼈던 감격과 감사는 모두가 헛것이었소. 다만 ‘망국인’이라는 커다란 그림자가 우리를 지배할 뿐이오.> (출처=《속망국인기》, 백민, 1948년 3월)⊙
 

金東仁 미발굴 자료 ②

“얼굴에 무슨 가죽을 쓰고 그런 욕설을 말하나”

글 : 月刊朝鮮 2012년 5월호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8·15로 세상이 바뀌었기에 알았지 그런 세상이 더 계속되었다가는 그들의 붓글이 조선 민족을 씨도 없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천행(天幸)으로 그런 기사(記事)에는 필자(筆者)의 이름을 쓰지 않았기에 말이지 신문 기사에 책임 필자의 이름을 썼다 하면 그(일본 충신)들은 당장 전쟁터에서 아들을 잃은 부모들에게 매 맞아 죽었을 것이다

⊙ ‘야비의 문자’가 조선에 나타난 것은 좌익 문사 지망자들의 욕설 유행이 실마리
⊙ 공격의 목표가 주로 이승만, 김구 등 우익 진영의 지도자
⊙ 백성에게 안심을 못 주는 정치는 실패의 정치
⊙ 약자의 마음속에 들어앉은 원한만은 강자의 권력으로도 말살하지 못해

[편집자註]
김동인 선생은 ‘시사평론’이란 어깨제목을 단 ‘욕설’을 1946년 7월 12일부터 21일까지 10차례 《가정신문(家政新聞)》에 게재했다. 그리고 며칠 뒤 같은 신문에 ‘시사문제’란 어깨제목으로 ‘일인가옥’(日人家屋)을 7월 25일부터 31일까지 6차례에 걸쳐 실었다.
마이크로 필름으로 저장하는 바람에 원문 상태가 나빠 해독이 어려운 부분은 ‘□’로 표기했다. 또 문장 속에 ‘×’가 들어간 부분이 많은데 검열에 의해 삭제된 것으로 추정된다. ‘×××××’는 행을 바꾸기 위해 쓴 것으로 보인다. 원문을 중시하되 맞춤법이 틀리거나 옛날식 표현, 일본인 한자이름 등은 현대적 표기로 바로잡았다.
  <‘욕설’>
 
  (1)
 
   우리 국가 해방의 공로자인 김구(金九) 선생이 이즈음, “욕설이 너무 유행한다. 야비한 욕설로 지도자를 공격하는 등의 일이 너무 유행한다. 삼가야 할 것이다” 하여 일부 언론기관, 혹은 일부 단체의 야비한 언사를 책망한 일이 있다. 그와 전후하여 이승만 박사도 비슷한 주의를 하였다. 어떤 청년회에서도 유사(類似)한 경고를 하였다.
 
  어떤 신문을 통하여 어떤 정당에서 어떤 선언 ―혹은 발표를 하였는데 그 내용이 너무도 야비하고 무지하였었기 때문에 발단된 문제요, 공격의 목표가 주(主)로 우익 진영의 수령들이었던 것이다.
 
  이승만 박사며, 김구 주석이며 우익 진영의 지도자들은 그 새 연해 좌익 진영의 공격을 받아오던 터이요, 웬만한 욕설이나 공격에는 면역이 되었을 것이요, 설사 불감(不感)의 지경까지는 아니 이르렀다 할지라도, 어울리지 않는 상대자라 치지도외(置之度外)하여 일일이 관심치 아니하던 그이(이 박사며 김 주석)들이었거늘, 이들의 공격에 비로소 꾸중을 하고 일반의 주의를 부르는 것으로 보아서 이런 것은 도를 넘친 야비(野卑)였던 모양이다.
 
  불행히 나는 그 글이 실렸다는 ××보(報)의 그날 것을 보지를 못하여서 무슨 소리를 썼었는지는 알지 못하나 상대되지 않는 상대를 상대하여 꾸중하였으니만치 야비의 도가 과하였던 것만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공격의 근원지가 예(例)의 ××당(黨)이요, 게재되었다는 기관이 예의 ××보이며 야비, 무지, 몰상식의 도수(度數)는 미루어 알 수 있다.
 
  × × × × ×
 
  대체 이 땅에서 언론기관으로서 인신공격 내지 욕설을 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경부터로서 1921년, 22년에서 차차 번성하여 가서 1926, 27년경이 그 전성기였다.
 
  당시의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齊藤實)의 소위 문화정책의 덕택으로 신문이며 잡지기관, 언론기관이 연해 생겨났다. 신문 잡지가 생겨나자 자연 거기 전문하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매 한 가지로 손쉽게 ‘문화인’이 되기 위하여서는 ‘문사’가 되는 것이 가장 첩경이다. 게다가 문사라는 것에는 면허증이 필요 없고 졸업증서라는 것이 쓸 데 없다. 그런 것이 없을지라도 역량과 수완으로 문사가 되는 것이다.(출처=《家政新聞》 1946년 7월 12일)
 
 
  (2)
 
  1919년의 만세사건 직후의 의기충천하고 기고만장한 이 민족은 제각기 문화인으로 출세해 보려고 움직이었다. 은행 사무원은 주판을 내던지고 시(詩)를 쓰고 회사원은 ‘벤또 곽(도시락-편집자註)’을 동댕이치고 소설을 쓰고, 2000만 모두가 개명(開明)하려고, 개명하기에 첩경인 ‘문사’가 되려고 했었다.
 
  형편이 이렇게 됨에, 하도 지망자가 많은지라 문사 되기도 차차 어려워갔다. 더욱이 등록의 길목은 좁은데다가 모두가 그리로만 모이니 문사로 나서기도 좀체의 일이 아니었다.
 
  × × × × ×
 
  게다가 공산주의가 일본을 거쳐 조선에도 수입되자 초창기의 조선 공산주의는 사상으로서보다 좌익문학으로 자리 잡으려 하였다. 주종건(朱鍾健) 군 같은 조선 공산당의 원로도 처음은 문사 ― 혹은 거기 유사한 길에서 출발하려 하였다. 이때에 문사, 혹은 문사 지망자들이 좌경(左傾)하였다. 문화인이 되려고 그 첩경인 문사가 되려 하였지만 등용의 길목은 벌써 좁아 갈팡질팡하던 문사 지망자들은 다만...

 

[발굴] 해방공간 金東仁 미발굴 자료 ③ 끝

해방공간의 ‘괴물’ 앞에 번뜩인 비판정신

글 : 金泰完 月刊朝鮮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월간조선 2012년 6월호

⊙ 초기 소설에서 보이던 예술 지상주의 관념, 해방공간에서 사라져
⊙ 현실이 극악하자, 비판 정신은 더욱 날카로워… 우익에 대한 확고한 신념 지켜내
  해방공간 김동인(金東仁·1900~ 1951)은 궁핍했다. “명문집 귀동으로 고이고이 자라나 가난을 모르던 젊은이, 천금의 귀한 줄 모르고 만금의 많은 줄을 모르던”(김윤식, 《金東仁 硏究》, 1987) 그였지만, 가산을 탕진하고 해방이라는 충격적인 현실 앞에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일제 패망(敗亡)과 친탁(親託), 반탁(反託)의 좌우 갈등, 분단을 목도한 김동인은 신문 연재 글을 통해 사회 현실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초기 소설에서 보이는 예술 지상주의적인 관념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눈에 비친 해방공간의 현실은 ‘괴물’에 가까웠다. 일본 동요를 부르던 아이들이 광복 이후 부를 노래가 없는 현실이 별안간 도래하고(‘동해물과’), 식목일이 돼도 변변한 묘목조차 구할 수 없는 사실이 한심스럽다(‘빈땅’). 또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 대립의 탁난(託亂)을 지켜보며 “탁치 반대 운동에 불응하는 자는 삼천만 민족의 공동의 적”(‘탁치냐 탁난이냐’)이라고 목청을 높이기도 한다.
 
  현실이 극악할수록 그의 비판 정신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러나 우익(右翼)에 대한 확고한 신념만은 분명했다.
 
 < …조공(조선공산당)에서는 누차 ‘일제와 사투하여 많은 피를 흘렸노라’고 자랑하나, 과문의 것인지 조선 독립을 위하여 일점(一點) 혈의 희생을 들은 일이 없고 도리어 공산주의를 위하여 조선민족주의와 사투한 수개의 삽화들이 있을 뿐이다.…>(출처=《대동신문》 1946년 1월 15일)
 
 < …마지막으로 조공에 대하여 한두 마디 하겠다. 이승만 박사에 관한 조공의 태도를 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창건 이래 독재로 생명을 삼는 공산당의 일분자인 조공에서 이승만 박사에게 ‘파시스트’라 일컫는 것도 우습거니와 어떻게 보면 이 박사가 친일파 혹은 민족 반역자일까.…>(출처=《대동신문》 1946년 1월 17일)
 
 
  유심히 볼 때에 분명히 그는 살아 있다
 
  생활고에 시달리며 치열하게 글을 쓰던 김동인 선생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다. “전신마비로 식물인간이 되어 근근이 목숨을 이어나갔다”(박종홍, 《김동인의 삶과 욕망의 경쟁구조》, 1997)고 한다. 1951년 1·4 후퇴 당시 김동인을 데려갈 수 없었던 가족은 그를 남겨두고 피란을 떠난다.
 
  그의 죽음과 관련한 기록은 김동인의 애(愛)제자였던 소설가 정비석(鄭飛石·《김동인 선생:새해에 생각나는 사람들》, 1954)과 문학평론가 백철(白鐵·《고 김동인 선생의 인간과 예술》, 1953)의 글을 통해 전해진다. 이 중 백철 선생의 글을 인용한다.
 
 < …아무도 없는 텅 빈 방 김동인 선생이 죽은 듯이 누워 있다. 장신에다가 오랜 병으로 마르고 파리해서 해골만 남은 그 모양은 마치 그가 짚고 다니던 긴 작대기와 같이 뵌다. 혹은 정말 해골인지 모른다.
 
  그러나 유심히 볼 때에 분명히 그는 살아 있다. 가끔 경련하듯이 그의 팔다리가 작은 물결을 치며 떨리는 모양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흘째 불을 떼지 못한 방바닥은 정말 얼음장 이상으로 찬 기운이 거의 체온을 잃은 선생의 뼛속까지 스며든다. 누운 자리 옆에는 가족이 피란을 떠나면서 사다 놓은 빵조각이 그대로 말라 비틀어져 있다. 그러니까 선생은 오늘 사흘째 몽땅 굶은 셈이다.
 
  밖엔 거센 바람이 분다.
 
  어디선가 색다른 함성이 들려온다.
 
  한두 방 총소리가 가까이서 난다.>⊙
 

金東仁 미발굴 자료 ③ 끝

“동해물과 백두산이… 콱 눈물이 앞을 가린다”

글 : 月刊朝鮮 2012년 6월호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오직 조선독립 일로(一路)를 위하여 건투(健鬪)해 온 ‘이노’(李老·이승만 박사)를 ‘민족 배역자’라 부를 입이 열려진 것은 20세기의 대기적(大奇蹟)일 따름이다. 주체가 없는 모든 소단체가 친공(親共)을 본받아서 이노에게 노(老)파시스트, 배족한(背族漢) 운운하니 이는 희극(喜劇)일 따름이다

⊙ “내 생전 다시 대창(大唱)하는 이 노래(애국가)를 들을 세월이 올 줄이야!”
⊙ 과거의 혹좌혹우(或左或右)는 아집이었다. 좌도 조선인이요, 우도 조선인이었다
⊙ 격식상 있어야 할 것이니 있기는 있지만, 그 ‘있는 것’의 뒷준비가 없으니 딱하다

[편집자註]
김동인 선생은 《중앙신문》 1945년 11월 14일부터 17일까지 수필 ‘동해물과’를 실었다. 또 ‘노(老)문학도가 본 신탁통치 문제’라는 부제(副題)를 단 ‘탁치(託治)냐 탁란(託亂)이냐’를 이듬해 1월 13일부터 24일까지 《대동신문》에 연재했다.
식목일을 장려한다면서도 묘목조차 못 구하는 현실을 풍자한 ‘빈 땅’은 《민중일보》에 1947년 4월 13일과 20일에 각각 게재했다. 어린이 잡지 《소학생》에 ‘~습니다’ 체로 단편역사소설 <이 충무공과 그 아들>을 썼다. 이순신이 주인공이 아니라 아들 ‘면’이 중심인물이다.
‘×××’는 김동인이 직접 쓴 행갈이 기호, ‘□’는 원문이 담긴 마이크로 필름 상태가 나빠 해독이 어려운 부분이다.
  <동해물과>
 
  (1)
 
   두 달 전까지만 하여도 우리의 여자들이 아침 눈만 뜨면 자리 속에서부터 부르기 시작하는 노래―그리고 저녁 자리에 들어가기까지 연해 부른 무슨 노래가 모두 일본의 ‘행진곡’ ‘애국가’ 등이었다.
 
  노래의 의의(意義)가 어떤 것인지 이해(理解)할 줄 모르는 어린애에서 비롯하여, 그만 정도(程度)의 일본말은 그래도 뜻을 짐작할 만한 소학(小學) 아동에 이르기까지, 그저 진일(盡日·‘진종일’의 준말―편집자註)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이런 일본 노래들이었다. 뜻을 알아서 이해하고 그 뜻을 주창(主唱)코자 부르는 노래가 아니다. 그저 무의식으로 부르는 바이다.
 
  이것은 깨어 있을 동안은 무엇이든 흥얼거려야만 하는 소년의 본능이다. 이 본능을 이용하여 일본성(日本性)의 교육자들이 흘러 넣어준 ‘씨’의 산물이다.
 
  8월 15일이라 하는 돌개바람이 한번 세계를 뒤엎어놓자 여상(如上)한 노래들이 ‘금지’의 불문율(不文律) 아래 봉쇄를 당하여 버렸다.
 
  일장기와 일본 국가가 굴욕과 치욕 아래 인류사회에서 말살당하였다. 동시에 전 동양의 소년들에게 □□ 벌써 습관화하였던 일본의 국가, 애국가들도 비참한 □□□□ 금지(禁止)를 당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출처=《中央新聞》 1945년 11월 14일)
 
 
  (2)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저녁 자리에 들어갈 때까지 무엇이든 입으로 흥얼거리고야 견디는 욕구! 이것은 ‘어린이의 본능’이다. 싱가포르가 무너지기를 희망하는 바도 아니고, 미국인이 물러가기를 바라는 바도 아니건만, 여상의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 그것은 전혀 그들의 본능이다.
 
  일찍이 일본식 시국가(時局歌)에 대신할 만한 다른 노래를 가지지 못하고 배우지도 못한 우리의 귀여운 소년소녀들은 그들의 본능(독창하고 싶은)을 무리하게도 억압하고 불쾌한 세월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국가적 자유는 우리의 소년들에게 본능적 부자유를 갖게 하였던 것이다. 소년들의 그 가긍(可矜)한 심경이 가엾어서 그새 누차 정회(町會·주민자치 모임이라는 뜻의 일본어-편집자註), 그 밖에 기관 등에 주의(注意)하여, 여기에 대하여 무슨 용의(用意)가 있기를 종용하여 보기도 하였지만, 건국의 대업(大業)이 이런 등지에까지 고려할 겨를이 없었던 탓인지, 소년들은 여전히 벙어리의 세상을 계속하지 않을 수가 없는 가긍한 환경에 방치되어 있었다.
 
  눈코 뜰 새 없는 ‘건국의 대업(大業)’에도 조금의 여가가 생긴 양 하여 시내의 각 소학교도 개학을 하였다. 개학하면서 맨 처음 행사가(당연한 일이지만) 국문교육과 ‘애국가’(동해물과)의 교수(敎授)였다.
 
  지금은 길에 나서면 한길에서 집에 들어오면 집안에서 ‘가갸거겨’와 함께 고막(鼓膜)을 두드리는 상쾌한 음향, 그것은 ‘동해물과 백두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