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 語學

[발굴] 김영랑의 애국시와 산문

이강기 2015. 10. 2. 11:22

[발굴] 김영랑의 애국시와 산문

 

“아! 골인, 골인, 韓民族의 챔피언”

 

 

글 : 月刊朝鮮 2012년 7월호   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이겼다 이십 억의 競走, 오천년 만의 신기록”
⊙ “청상과부는 아예 소복을 입지 말자”
⊙ “38선이 터지는 날이 진짜 통일되는 날”

[편집자 주]
시인 김영랑의 <장! 제패>는 《週刊서울》 1950년 4월 24일 자에, 시론 <열망의 독립과 냉철한 현실>은 《民衆日報》 1947년 6월 17일 자에 실렸다. 또 수필 <소복>은 《聯合新聞》 1949년 2월 22일 자에, 시론 <출판계의 당면과제>는 《聯合新聞》 1950년 2월 19일 자에 기고했다. 일제 강점기 붓을 꺾었던 시인은 해방 공간에서 절절 끓는 애국심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는 마이크로필름 상태가 나빠 의미전달이 불가능한 문자다. 공연예술자료가 김종욱(金鍾旭)씨가 영랑의 자료를 발굴해 《월간조선》에 제공했다. 일부 표현은 현대어로 고쳤다.

 

  <장(壯)! 제패(制覇)>
 
   세기의 전반(前半) 마금 사월 스무 날 새벽 세 시 수줍고 맑은 이 땅 대기(大氣)를 접고 오는 거룩한 발짓소리 조국을 걸고 뛰는 수많은 발짓소리
  나라와 나라가 민족과 민족이 인종과 인종이 그 받은 바탕과 삶의 모든 얼을 견주는 거룩한 발짓소리
  먼 만리(萬里) 보스턴 올림피아를 닫는 발짓소리 초침(秒針)소리 네 시요 다섯 시라 조이는 이 가슴을 뛰는 발짓소리 초침소리
 
  아! 귀에 익은 저 발짓 발짓 발짓 가슴 한복판 뚜렷한 태극장(太極章) 코리아 앞섰다 앞섰다 앞섰다
  다섯 시 반이라 아! 골인 골인 골인 한민족(韓民族)의 챔피언 미스터 함(咸) 송(宋) 최(崔) 결코 새벽 선 꿈이 아니다 오십만 관중이 환호입체(歡呼立體)
  이겼다 이겼다 이십억의 경주(競走)
  오천년 만의 신기록
  이겼다 이겼다 오! 한민족이다
  뭇 나라와 뭇 겨레와 뭇 종족의 참된 절을 받는다
  오! 우리의 챔피언 함군 송군 최군 형제자매의 삼천만 벗의 감사를 받으라
 
  아! 성가(聖歌) 울려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 우렁차게 울려난다
  성가 울려나면 왜 아직도 눈물이 솟느냐 이 버릇을 왜 못 놓느냐
  한민족 이겼는데 기뻐서만 우는 거냐
  전날 손(孫-손기정) 남(南-남승룡) 서(徐-서윤복) 여러 대표 세계 제패 이루던 날도
  온 겨레 남몰래 모두 다 울었더니라
  허나 그는 차라리 뚜렷한 복수감(復讐感)
  더 멀리 해아(海牙-네덜란드 헤이그) 할빈(중국 하얼빈) 미국 상해 동경 서울
  경(驚)□□사(士)의 □□명현(暝懸) 서러운 복수(復讐) 조국광복의 막다른 길
  민족 투쟁정신의 발상
  아! 그러나 서러운 복수 서러운 복수 눈물의 그 버릇이 쉽게 식으랴
  이제 우리는 싸운다 싸워서 이긴다
  오천년 인류사의 신기록
  이 바탕이 모아진 열 이십억의 챔피언
  이제 우리는 싸운다 싸워서 이긴다
  세상이 더러 수선하여도 굶주려도
  싸우고 있는 겨레 싸워서 이겨 가는 겨레 우리 불가사리
  우렁차게 부르자 동해물과 백두산이!
 
  - 四月 二十日 記 -
 
  (출처=《週刊서울》 1950년 4월 24일)
 
 
  <소복(素服) - 隨想>
 
   백의민족(白衣民族)이란 말이 어느 때부터 씌어졌는지 잘 알 수는 없되 요새 와서는 그리 많이 쓰지도 않으려니와 또 누가 써 본다 하더라도 그리 신통한 맛을 맛볼 수는 없게 됐고 우리 민족 표현 용어의 하나가 되고 말았다.
 
  기미운동(己未運動) 직후에 많이 그 말이 유행되었고 또 그 말에서 무슨 부자연함을 느끼지도 않았음은 아마 그 시대감에서 그러했을 것이리라. 자연히 절차(節次)만 있고 수천 년을 내리 살아왔으니 그 ‘백의(白衣)’에 관한 특별한 애착이 생겼을 법도 하고 그 색(色)은 자간(紫間)하게까지 될 민족적 정리(情理)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는 우리의 과학문명이 발달 못한 소치(所致)로 해서 다만 소박(素朴)한 솜틀과 베틀에서 무명을 뽑아 살을 가리는 한낱 베 조각이었을 뿐으로 생각건대 왈(曰) 화전족(火田族)이란 말로 불명예스런 거론(擧論)을 할 수밖에 없고, 요새 와서 그 말이 잘 쓰여지게 되는 것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 백의와 다른 계통이 있다. 서울은 이미 백의인이 없다 해도 좋을 만치 양복 색복(色服)을 많이 입으니 누가 어느 날 소복한 이를 보았다 하면 그는 틀림없이 여인네일 것이고, 상제(喪制) 한 지 얼마 안된 일일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날 S생과 같이 서울에서 그 번화한 명동(明洞) 지대에서 하필 소복에 눈이 부딪치고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발을 멈추고 말았으니, 그 옷감이며 맵시며 그 얼굴의 서투르지 않은 표정이며 어머님을 여의고도 벌써 몇 달이나 났을 법한 스무 살은 넘었을 자매(姉妹)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귀밑머리칼 흰 동정에서 시작되는 흰 저고리의 청초(淸楚)한 곡선(曲線), 그 아래 흰 버선, 흰 고무신, 구슬 손에 흔들리는 핸드백까지 한 점 흐림 없는 늦은 가을 하늘 볕에 오직 한 쌍의 이 소복은 청승맞다 할는지는 모르되 참으로 매력 있는 소복이었다.
 
  내 눈에는 멀리 시골 산비탈 꼬부랑길이 아른아른 떠오르고 그 편을 소복이 오르고 내리는 것이 선하게 보여 온다. 어쩌면 우리 산수(山水)와 이 소복은 그렇게도 잘 어울리는 것인가?
 
  하늘이 맑고 산천이 이름답고 원색(原色)인 소복이 잘 어울릴 수밖에 없지마는 여기엔 그 옷맵시가 인도(印度)나 파사(婆斯)와 같이 되었던들, 비록 외인(外人)의 눈으로 본다더라도 그리 어울릴 턱이 있겠는가.
 
  소복의 존재할 이유가 있다면은 이러한 특수의상전(特殊衣裳展)으로서일 것이요, 만일에 명동 일대가 죄다 소복 판이 된다든지 하다가는 큰일이다.
 
  다만 한 가지 마음을 괴롭히는 소복이 있으니 청상과부는 아예 소복을 입지 말 일이다. 비록 상기(喪期)라 하더라도 구태여 ‘나는 그이의 남은 반복(半服)’이라 널리 외칠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소복을 대할 때와 같이 마음 딱 먹는 때도 흔치 않다. 저이가 슬하에 아이도 없을 나이에 상기(喪期)가 지나면 어찌 될까? 물론 재혼(再婚)함이 가(可)할 것. 그러나 어린애는 어찌 되나. 데리고 가면 의부(義父)님 밑에서 잘 자랄까? 구식(舊式)스러운 댁(宅)이면 수절(守節)하리. 차라리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좋다 할 수 없는 이 시대 사람들이다. 특례(特例)를 제하면 수절은 허영(虛榮)이요 고통(苦痛)이 아니더냐. 그 썩은 그 도덕(道德)을 들추어낼 것은 없다. 그렇지만 소복이 돌아가신 이의 명복(冥福)을 기리는 오롯한 정신 순결을 상징하는 것이고 우리의 거리에서의 현각(懸覺)이 그러할진대 이 소복을 대할 때 도덕률(道德律) 같은 것을 뛰어넘어서서 우리는 그 소복의 순결을 요청해 보는 것이 과연 나쁘다 할 것인가. 그러므로 생각을 괴롭히는 소복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오… 청상은 소복을 하지 말아 다오.
 
  (출처=《聯合新聞》1949년 2월 22일)
 
 
  <출판계의 당면과제 - 대중적 견지에서 문화발전을 도모하라>
 
   현하(現下) 출판계는 점차 저류(低流) 일로(一路)를 밟고 있는 군중이라 아니할 수 없다.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비판 그대로 출판계에 있어서도 문화적 가치를 내포(內包)한 자비(自費)출판보다도 일반 대중의 기호(嗜好)만을 쳐다보아, 다만 상품으로서의 판로의 확대성만을 생각한 저속한 출판물이 더욱 왕성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도저히 그대로 방임(放任)할 수 없는 중대 문제의 하나인 바 출판계가 이와 같이 저질(低質) 일로(一路)를 걷게 되는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출판 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출판사를 경영하는 사람 자신만으로서 되는 것이 아니고 이와 불가분의 존엄성을 가진 저작자, 출판업자 등이 점차적으로 활성화한 결과로서 출현되는 것이며, 이에는 또 불가해(不可解)한 재료로서 용지(用紙)가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하 출판계가 봉착(逢着)하고 있는 성향도 이러한 관계를 항간(巷間)의 유기적(有機的) 활동이 부족한 데다가 용지 획득(獲得)에 적대(積大) 애로(隘路)가 있는 것이다.
 
  첫째로 저작인과 출판인 사이에는 원고·판권·인세(印稅)의 문제가 있고, 둘째로 인쇄업자와 출판업자 간에는 인쇄요금 기술 등의 문제가 있고, 셋째로 서점 판매업자와 출판업자 간에는 거래관계에 있어서의 제 문제(諸問題)가 있고, 용지와 출판인 간에는 구매획득(購買獲得)에 큰 난관(難關)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애로와 정관을 어떻게 타개(打開)하고 각 관계자가 유기적으로 잘 활동할 수 있느냐가 최근 출판계의 과제(課題)라 할 것인바 이제 그 방안(方案)으로서 당면(當面)한 문제 몇 가지를 제언(提言)하고자 한다.
 
  첫째로, 용지획득 문제인데 현재 국산품으로는 도저히 그 소비량을 충당(充當)할 수 없으므로 부득이 외지(外紙)를 수입할 수밖에 없는 형편인데, 각 출판사가 제각기 수입하려면 그 분량이 적은 관계로 더욱 구입하기 곤란하므로 각 신문사나 출판사의 절대 소요량을 종합하여 일괄적(一括的)으로 상공부(商工部)와 연락하여 수입할 수 있도록 어떠한 대행수속(代行手續)을 조직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하여 공보부에서는 물론 각 관계부처와 수시 협력하여 출판문화 개선으로서 추진할 것이다.
 
  둘째로, 출판물의 질적(質的) 향상 문제인데 저작자나 출판인은 항상 민족적 양심으로 도서출판의 목적과 기준을 우리 민족문화 향상에 두고 이익만을 노리는 비양심적인 저속 출판물을 일소(一掃)하기에 서로 경계하고 협력 추진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문장의 평이화(平易化) 운동인데 신문 잡지 기타 일반 단행본을 물론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다수인(多數人)이 읽고 소화함으로써 그 목적이 달성될 것이므로 특수한 술어(術語) 등은 부득이할 것이나 항상 문장의 평이화에 유의(留意)해야 할 것이다.
 
  넷째로 과학진흥의 도모(圖謀)인데 현하 우리 출판계에는 과학에 관한 도서출판이 가장 적다. 이것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 판로(販路)가 제한된 까닭에 그런지 알 수 없으나 모든 문명은 과학에 기인하는 것임에 과학의 국민생활을 위한 출판이 있기를 바라며 따라서 인쇄 그 자체에 있어서도 활자의 대소(大小), 색채의 조화를 국민건강상 과학적으로 처리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한마디 할 것은 같은 종류의 신문이나 잡지 등은 자진 통합하여 인간으로나 물적(物的)으로 그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한편, 저작자나 출판사, 인쇄업자, 도서 판매업자, 제지업자까지도 자기의 권리나 이익만을 주장하지 말고 대국적(大局的) 견지에서 문화발전의 근원이 되는 출판사업에 이바지하고 있다는 긍지(矜持)와 자부심을 가지고 오로지 양서(良書) 출판에 총진군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출처=《聯合新聞》 1950년 2월 19일)
 
 
  <열망의 독립과 냉철한 현실>
 
   - 삼천만은 반탁(反託) 일관으로 단결하자
 
  5호 성명(聲明)에 서명하여 협의의 대상이 되고 임정(臨政)이 수립 안되면 그 안에 들어가서 조선 자주독립을 주장 관철해 본다는 것이 근근(近近) 민족진영 대부분의 공위(共委)의 참가 태도인 것 같으나 작년 결렬된 공위(美蘇공동위원회를 의미·편집자註)에 말썽 많던 참(參)·불참(不參) 문제가 ‘하지(존 하지 주한 미군 사령관)’ ‘아널드(앨런 아널드 군정장관)’ 양 장군의 그 친절 공정(公正)한 보장(保障) 선언으로 겨우 민족의 체면을 유지시켰고 삼천만은 거의가 다 께름칙한 가운데에도 일루(一縷)의 희망을 품고 참가를 결정했던 일을 회고하면 1년이란 동안 국내외의 모든 정세는 상당히 급전(急轉)되어져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의 가장 정확한 해설자요, 실천자라는 ‘마셜’ 장관의 강력한 주장으로 재개(再開)된 미소공위(美蘇共委)는 그야말로 일만천리(一萬千里)의 안건(案件) 처리를 해 가는 셈이다. 그리하여 서명을 요(要)하여도 작년과 같은 보장 선언은 기어코 내놓을 성의도 시간도 없을 성싶은 인상을 주고 있다.
 
  두 달 전의 막부(幕府)에서 ‘마셜(조지 마셜 미 합참의장)’ 장관의 ‘모(몰로토프 소련 외상)’ 외상에게 보낸 서한을 싸들고 매일같이 ‘그 서한을 부연(敷衍)하여 조선인의 의사발표의 자유원칙하에서 공위는 재개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깊이 인식시킨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하지’ ‘러치’ ‘브라운’ 씨의 한두 번 발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미 본국의 진론(眞論)이 그동안 어떠했던가?
 
  자유 해방된 조선민족의 자주독립 국가를 완성시키는 책임을 미국이 지는 것을 자인(自認)하지 않았던가? 그러던 것이 정작 공위가 재개되고 보니 이 꼴이 되었다. 6월 23일 한(限) 서명할 테면 하라는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최고 수뇌(首腦)의 언명은 역시 “작년과 불변(不變)”이라는 애매한 소리일 뿐이니 그도 그러할 밖에 없는 노릇이다.
 
  이유야 간단하다. ‘하지’ 중장이 12월 24일 북선(北鮮) ‘샤’ 장군에게 보낸 회한(回翰)이 이번 공위 재개의 기초가 되는 까닭이라. 전후(戰後) 처리에 있어 미소가 세계 어느 선(線)에서나 그러하지마는 양군(兩軍) 분점(分點)하의 착란(錯亂)한 정세하에 재개되는 공위에서 보더라도 소(蘇)의 현실외교는 능히 미의 민주외교를 복종시켜 놓았음이 틀림없고, 민주주의의 명예 그런 옹호자인 ‘마’ 장관도 첫 번 장경(張硬) 화려하게 내디딘 발이 불과 이순(二旬)에 ‘하지’ 중장의 회한쯤 정도로 ‘모’ 외상에게 복종해버렸다는 그 심사의 의도를 어찌 의심 없이 본다는 말이냐?
 
  우리가 2차 대전의 성격을 잘 이해한다 할 수 있을 뿐, 미국의 우리 조선에 있어서 최저한의 야망(野望)이라 할지, 강토를 세계 민주주의화의 최전선(最前線) 기지로 등정시키지 아니치 못하는 이유를 잘 이해한다 할진대, 저 숙명적인 38 비극선을 악의(惡意)와의 위험지념(危險之念)으로만 해석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강대한 연합국인 미·영·소가 세계 민주화의 명예스런 명의(名義)를 위하여 조선을 해방시키고는, 또다시 각자 국가적 이유에서는 신탁관리를 규정해 버린 뒤에 오는 것은 소위 국제협조를 위하여 약소민족쯤 희생해도 좋다는 강압적인 이론 귀결(歸結)이 오늘 공위가 오족(吾族)에게 대한 태연한 태도라 아니할 수 없다. 슬픈 노릇이다.
 
  물론 국내사정으로 보아도, 저 절망적인 민생고(民生苦)만 구원한다는 이유로도 38선 타통(打通)이 임시 실현되어야 하고, 그리하면 공위를 성립시켜 임정이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탁월한 정치가군(群)은 들어가 싸우라. 비장한 각오로 들어가 싸우라. 선인(先人)들이 어디서 어떻게 싸우셨던가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과연 한마디라도 민족의 염원을 개진(開陳)하여 설토(說吐)할 수 있을 것이냐. 그러한 분초(分秒)의 시간이 허락될 것이냐. 오늘 이 나라 수도 서울 국제무대에서 과연 이 세기(世紀)의 민주주의가 실천될 것이냐.
 
  ‘마셜’ 장관이 해석한 민주주의가 실천될 것이냐? 슬픈 노릇이다. 삼천만 민중은 모두가 낱낱이 받은 한 갈래의 피요, 뼈요, 넋이라. 거기에 길러진 민족의 정기(正氣) 불타오르던 온갖 불의(不義)와 사악(邪惡)을 태워버리고야 말았던 것이 아니냐. 여기에 민족 천년이 운명을 정해 준다는 공위가 만일에라도 민족적 염원에 어긋나는 결과를 강제로 만들어 놓는 때의 이 강산에 불같이 일어날 무서운 혼란을 상상만 하여도 눈이 캄캄해진다.
 
  38선이 터지는 날이 통일이 되는 날이런가. 두 동강 난 강토가 이 어찌 통일이오, 못 만나는 동포가 3년 만에 다시 만나니 통일이리라. 그러나 그만하면 통일이리요. 저 중국은 38선 없는 불통일로 열국(列國)의 멸시를 당하고 있지 않은가. 저 인도(印度)는 왜 분할 독립이 되고 마는가. 정부가 서기만 하면 독립이냐. 국제조약에 신탁관리를 규정하고도 정치간섭을 않는다고 사석(私席)에서 제언해 그것이 되는 독립이냐 하면 슬픈 노릇이다.
 
  도대체 막부 결정 3항(項)에 어떠한 이유로 조선을 신탁 관리해 본다는 조목은 없다. 다른 모든 성명에도 그 이유를 명시(明示)한 한 줄 문구(文句)를 본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답답하지 않단 말이냐. 협의(協議) 상대로 들어가는 사람, 밖에 앉아서 그 하회(下回)를 기다리는 민중, 다 같이 신탁을 엎어 씌우려는 데에는 단결해서 거부할 것이다. 세계 민주주의의 실현과 오(吾) 민족의 영원한 자유 번영을 위하여 우리는 공위의 좋은 결과를 기다리기에도 열심이거니와 설령 공위가 실패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실망 동요(動搖)치 않는 민족임을 가장 자랑하려 한다.
 
  (출처=《民衆日報》 1947년 6월 17일)

 

 

 

[풀이] 김영랑의 미발굴 시와 산문 3편

“서정시인 김영랑의 가슴 벅찬 애국시”

글 : 月刊朝鮮 2012년 7월호필자의 다른 기사보기 

⊙ 보스턴 마라톤 1~3등 소식에 ‘오천년 인류사의 신기록’이라 노래
⊙ 6·25 사변 당시 포탄 파편에 맞아 사망
  《월간조선》이 이번 호(516~523쪽)에 공개하는 김영랑(金永郞·1903~1950·본명은 允植) 시인의 <장(壯)! 제패(制覇)>는 서울신문이 발행했던 《주간서울》 1950년 4월 24일 자에 실렸다. 식민지와 분단, 좌우갈등의 아픔을 딛고 함기용(咸基鎔)·송길윤(宋吉允·작고)·최윤칠(崔崙七) 선수의 미국 보스턴 마라톤 1~3위 제패 소식에 헌시(獻詩)를 쓴 것이다.
 
  영랑은 ‘이제 우리는 싸운다 싸워서 이긴다/오천년 인류사의 신기록/이 바탕이 모오진 열 이십억의 챔피언/ … /우렁차게 부르자 동해물과 백두산이’라고 노래했다.
 
  지금까지 확인된 영랑의 시는 모두 86편. 《영랑시집》(1935.11)에 53편이, 《영랑시선》(1949.10)에 60편이 실렸다. 두 시집 어디에도 수록되지 않은 작품이 16편. <장! 제패>의 발견으로 영랑의 시는 87편으로 늘어나게 된다. <장! 제패>는 영랑의 시세계를 주로 연구한 서강대 김학동 명예교수의 《김영랑 전집》(1981·문학세계사)에도 수록돼 있지 않다.
 
  일제시대 영랑은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여러 차례 붓을 꺾은 강골의 서정시인이었다. 박용철·박종화·홍사용·정지용·이태준 등의 문인과 교유했으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전남 강진에서 만세운동을 도모하다 검거돼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기도 했다. 1930년 정지용·박용철과 함께 《시문학》 동인에 가입하여 여러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대표작으로 <모란이 피기까지는> <끝없이 강물이 흐르네> 등이 있다.
 
  이번에 발굴한 <장! 제패>는 민족주의적인 애국시에 가깝다. 초기 시에서 보여주었던 깨끗한 감성의 탐미주의적 서정시와는 크게 구별된다.
 
  해방될 때까지 강진에 머무르며 절필한 영랑은 1948년 5월 강진에서 제헌국회 초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일도 있다. 그해 9월 가산을 정리하고 가족들과 함께 서울 성동구 신당동으로 이사한다.
 
  앞서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강진군 선전부장과 청년단장을 맡는 등 해방 이후 좌우이념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시인은 부드러운 감성보다는 적극적인 행동과 시론(時論)으로 대항했다. <장! 제패>와 함께 《월간조선》이 소개한 <열망의 독립과 냉철한 현실>(《연합신문》 1947년 6월 17일자)이 대표적인 경우다.
 
  강진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영랑은 1949년 2월 한국예총의 전신인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의 문학위원으로 피선되었고 8월에 공보처 출판국장에 취임했다가 이듬해 4월 퇴직한다.
 
 
  6·25 사변 때 포탄 파편에 맞아 사망
 
전남 강진의 김영랑 생가.
  시인은 6·25전쟁이 일어나자 피란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은신해 있다가 수복을 앞두고 국군과 인민군의 치열한 공방전 때 포탄 파편에 맞아 9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마흔여덟 때의 일이다. 유해는 남산 기슭에 가매장됐다가 1954년 11월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장됐다. 2008년 10월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 장! 제패>는 보스턴 마라톤을 제패한 다음 날(4월 20일) 쓰였다. 그해 6월 《신천지》 5권(1950.6)에 발표한 최후의 작품 <오월한(五月恨)>보다 두 달 먼저 발표되었다.
 
  김영랑 시인 외에도 6·25 당시 많은 시인과 작가, 화가, 음악가들이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 소설가 김동리(金東里)는 집 벽장에 마치 《안네의 일기》를 쓴 안네처럼 은신을 했다. 평론가 조연현(趙演鉉)은 동대문 시장에서 옷을 사서 노천 점포를 열었다. 시인 모윤숙(毛允淑)은 경기도 광주의 어느 농가에 허드렛일을 해 주는 여자로 숨어 지냈다. 머리에 헌 수건을 쓰고 허술한 몸뻬와 앞치마를 두르고 신분을 숨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