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革命」 성공은 미국 주도의 타율적 海洋化 덕분
金 鎭 炫 세계평화포럼
이사장
한국은 후진국 중 유일하게 근대화 혁명에
성공 한국은 아시아에서는 물론 全세계 非서양 국가 중에서 가장 늦게 서양에 문을 연 나라다.
「西勢東漸(서세동점: 서방의 세력이 동방으로 퍼진다는 뜻)」이라는 근대화·해양화의 문명사적 大변혁기에 가장 늦게까지
開港(개항)·開化(개화)·開放(개방)을 거부하고 늦춘 나라다. 그래서 「최후의 은둔국」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또한 본래적 서양도 아닌, 서양의
대리인인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었다. 광복은, 독립운동도 격렬했지만 自力 획득이라기보다는 미국과 소련에 대한 일본 항복의 부산물같이 등장한
것이어서 분단의 형태로 왔다. 1950~1953년 전쟁의 한 고비, 큰 고통 속에서도 與野 간에 흙탕물 튀기는 정권투쟁을 하는 것을 보며, 영국
자유주의 고전 미디어 「더 타임스」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바라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고, 불가능한 꿈이라
혹평했다. 그런 모멸·조롱·하대·무시의 대상이었던 19~20세기 중반까지의 조선, 한민족이 어찌하여 분단된 한반도 남쪽에서만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후 독립한 제3세계 非서양 被식민 국가 중에서 근대화에 가장 성공한 나라가 되었을까. 이른바 후진국들 중에서 「근대
경제성장」과 「정치적 민주화」, 그리고 「사회의 다원성」이라는 근대화 혁명을 확실하게 성공한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나는 이를
「韓國革命(한국혁명)」이라 부른다. 경제적으로는 비록 1997년에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라는 실패의 경험도 있었지만, 1945년 이후
독립한 130여 개국 가운데 규모를 갖춘 나라로서 1인당 소득이 1만 달러 이상인 나라는 오직 한국뿐이다. 싱가포르,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브루나이, 쿠웨이트, 이스라엘 등 6개국이 우리나라보다 1인당 소득이 높으나 이들은 모두 500만 명 이하의 인구 小國이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매우 특별하여 비교에 무리가 있다. 이스라엘은 문화적으로 서양 전통의 나라이지 아시아 또는 非서양이 아니다.
공식·非공식적으로 해외(특히 미국과 독일)로부터 받는 원조를 일반 후진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받는, 즉 선진국이면서도 이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해외 원조를 받는(어찌 보면 원조로 해서 선진국이 된) 특별한 경우다. 이 6개국은 1인당 경제소득으로는 1만~3만 달러에
이르지만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치 민주화, 시민사회 건설에서는 현저히 후진적이다. 단순히 1인당 소득수준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재정건전도,
소득 분배 구조, 교육, 연구개발 비율 등은 중진국은 물론 선진국도 추월할 정도의 높은 수준에 있다.
자유가 滿開한 나라, 한국
현재 대한민국이라는 정원에는 민주주의의 장미꽃이 너무 많이
피어 어지러울 정도다. 휴전선이 국경선으로 엄존하고 主敵(주적)이 수도 40km 거리에서 2200만 수도권 인구를 20분 이내에 파괴할 수 있는
장사포(핵무기가 아닌)를 포진해 놓고 있는데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는 대통령과 정당이 국회의 과반수를 차지할 정도의 민주주의가
滿開(만개)하고 있다. 主敵국가의 독재자를 민족주의의 영웅으로 찬양해도 민주운동가로 용인되는 그런 정치가 가능한, 그리고 북한 간첩도
민주투사가 될 수 있는 과도한 자유가 횡행하고 있다.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그 어느 민주주의 국가에도 있어 본 적이 없는 「자유」이다.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는 물론 대학 총장, 언론의 편집국장도 직선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가 됐다.
은행장·연구소장·국영기업체장이 공모하는 「참여」가 포만하고 있다. 사회의 다원성과 역동성은 단연 세계 으뜸이다. 이 지구상의 큰 종교,
일체의 외래종교가 어느 선진 개방사회보다 더 큰 포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 특히 기독교는 경이로운 기적이어서 9000명이 넘는 해외 선교사를
全세계(기독교와 상극인 이슬람과 중국, 러시아 등 공산권까지)에 파견, 영국과 유럽의 전통 기독교 국가를 모두 제치고 미국 다음의 세계 2위
기독교 선교국이 되었다. 기독교인 수로 보나 국력, 1인당 소득으로 보나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1784년 이승훈의 천주교
도입과 세계 유례없는 자발적 전도의 기적이 2세기 뒤 해양화의 물결을 타고 해외 선교 기적으로 나타난 것일까. NGO(非정부기구)운동은
불과 20여 년 만에 그 수·범위·영향력과 행동성에서 단연 세계에서 우뚝 섰다. 세계 역사에서 정당·군대·종교·외세가 아닌 NGO가 정권을
창출한 유일한 사례가 아마 盧武鉉(노무현) 정권일 것이다. 환경 등 일부 NGO는 선진국에서도 부러움을 살 정도가 됐고, 한국은 NGO 국제회의
중심지가 됐으며, NGO대학 NGO학과가 늘고 있다. 대한민국이 가꾼 시민사회의 장미꽃 역시 현란하게 만개하고 있다.
「근대화의 챔피언」
「뉴욕 타임스」 특파원 니콜라스
그리스톱 부부가 쓴 「동방으로부터의 천둥」에 의하면, 1950년대 초 서양의 아시아 전문가들이 「장래가 가장 유망한 나라」로 필리핀과 버마(現
미얀마)를 꼽았다. 서양에의 개방과 식량 자급이라는 조건을 중시한 결과였다. 그러나 半세기가 지난 「역사의 완료된 증명」은 대한민국이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 근대화의 챔피언이 되었다. 최후의 은둔국이자 최빈국인 중국보다 더 유교적이고 가장 완고한 絶域(절역)의 유교국가,
우리보다 겨우 23년 먼저 미국 구로젠(黑船) 충격에 문을 연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특이한 근대화 과정을 거쳐 온 대한민국이 어찌하여 20세기
후반부터는 후진국 중에서는 물론 非서양 세계를 통틀어 근대화의 챔피언이 되었는가. 우선, 인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李承晩(이승만)의 건국, 朴正熙(박정희)의 경제건설·자립경제 같은 것이다. 1945~1948년 상황, 1960년대 상황에서 보면 이 두
인물 주도에 의한 역사의 전환이란 어느 기준으로 봐도 획기적이고 창조적인 것이었다. 분단을 각오하면서도 건국해야 한다는 명제. 가난을 벗기 위해
보세가공 수출이라도 해야 하고, 매판자본 소리를 들으면서도 외자 도입을 해야 한다는 명제. 그 당시까지의 이른바 상식의 正統(정통), 민심의
여론, 아니 역사의 정통과 古典(고전)을 깨는 것이었다. 폐쇄 集産(집산) 일당독재의 소련 영도와 공산주의를 확고히 거부하고
자유·민주·시장·복지의 민족주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일시적 분단도 감수해야 한다는 李承晩의 결단이나, 外勢(외세)에는 피해만 받아 왔던
백성들에게 「輸出立國(수출입국)」이라는 對外거래를 통한 자립경제를 다진 朴正熙의 결의는 당시로서는 혁명적 전환이었다. 아직도 60년 전
상황에 머물러 있는 사고의 패러다임, 즉 통일지상주의, 강성대국, 우리끼리의 감상적 자립경제, 무절제한 낭만적 이상주의 관점에서는 이들이 역사의
일탈자 또는 반역자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의
단절
둘째, 遲滯(지체)와 早熟(조숙)이라는 한국적 운동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한국 근대화 과정의 지체와
조숙에 대한 나의 해석은 이렇다(좀더 자세한 것은 필자의 「歷史(역사)의 遲滯와 早熟」, 신동아, 1978년 4월호 참조). 한반도에서는
1930년대 말부터의 대규모 인구이동(만주·일본·남북한), 두 차례의 극한적인 전쟁, 분단, 절대적 가난 등 과거 유산의 멸실 또는 단절에
철저할 수 있는 조건으로 인해 그 어느 제3세계 국가들보다 새것, 외래의 수용을 쉽게 만들었다. 이같이 과거로부터의 단절이 1950년 이후
폭발적인 근대 수용, 근대 전개를 가능케 한 基底(기저)다. 아프리카, 中東, 東南亞에 이르는 서양의 식민 지배에서는 일본의 한국 지배
같은 언어 말살, 역사 말살, 최종 지역단위까지의 직접 지배를 기도하지 않았다. 통치에 편한 상태에서 현지의 과거를 온존시켰다. 이같이
과거 단절의 기저 위에 한국 특유의 강한 생존의욕(능력), 그리고 恨(한)과 신바람으로 나타나는 對極性(대극성)·兩極性(양극성)이 작용하면서
근대 개방 최후의 지체국가에서 최고의 조숙국가로 反轉(반전)될 수 있었다. 철저한 과거 단절과 분단 그리고 한국인성의 대극성·양극성이
은둔국으로부터의 反轉, 즉 한국혁명 성공의 내생적 원인, 역사 전환의 단면으로 짚어 볼 수 있다. 북한체제는 세계 공산 독재체제 중에서도
예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강고한 父子세습 1인 지배체제이고, 역사상 예외일 정도로 중세 神政(신정)체제도 따를 수 없는 완벽한 감시체제, 빅
브라더(大兄·대형) 폐쇄 사회가 됐다. 반면 남한은 대극적인 길을 걸어 자유의 파라다이스가 됐다. 이 원인을 단순히 李承晩, 朴正熙,
金日成(김일성)이라는 인물론으로만 해석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단절의 기저와 변화의 극단성, 그리고 지체와 조숙의 시계추 신드롬을 갖는
한국인성이 추가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다. 특히 폭발적인 기독교 현상, 대학 유학, 이민 현상, 도시화 현상, 아파트 문화현상 등이 그러하고
1990년대 이후 근대화 선진지역보다 더 빠른 이혼율, 노령화, 低출산율, NGO 현상 등이 그러하다.
미국 주도의 他律的 海洋化
셋째, 海洋化(해양화)가 한국혁명의 열쇠다. 대한민국
근대화의 혁명적인 성공, 1945년 이후 세계의 챔피언이 될 수 있었던 촉매는 해양화에 있다(한국, 한민족의 근·현대사 평가와 해양화에 대한
좀더 이론적 접근은 필자의 글 「강제적 해양화에서 주체적 해양화로」, 月刊朝鮮, 1999년 11월호 「매력 있는 대한민국」 별책과 「해양
21세기」(나남) 참조). 똑같이 철저한 과거 단절의 용이한 조건 속에서, 똑같은 대극성의 인성을 가진 한국 사람으로 구성된 남북한이
어찌하여 오늘날 이리도 문명사적으로 대극적·양극적으로 차이가 나며 한반도 남쪽의 대한민국이 근대화의 세계적 모범사례가 될 수 있었는가. 그
결정적이고 통합적인 열쇠는 해양화다. 1945년의 지리적 분단으로 인해 한국 역사에서는 북한만을 잊은 것이 아니라 대륙을 잊었다. 한반도에
사는 3분의 2의 압도적 다수 백성이 대륙과 단절되어 산다는 것은 역사상 경험해 보지 못한 새 경험의 시작이었다. 대륙국가 朝鮮(조선)과 고려,
대륙문화, 중화문화가 우리 역사의 준거가 되어 왔었다. 1945년 이후 38선, 휴전선은 단순히 지리적(교통)으로 철저하게 남북을
분리시켰을 뿐 아니라 한반도 남쪽은 이념, 체제, 가치관, 삶의 장, 생활양식까지 북한을 넘어 대륙(즉, 과거)으로부터 철저히 단절됐다.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해양화의 길, 섬 생활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他律的(타율적) 해양화는 그때까지의 한국사의 정통으로부터 보면
반역적인 해양화로 보일 것이다. 韓末(한말) 이전 한국사에서 해양적 발전과 성공적 해양 서술은 기껏해야 9세기경 張保皐(장보고)의 혜성 같은
명멸, 10세기 초 고려왕조의 예성강 무역뿐이다. 나머지는 일본과의 불행한 역사 거래이거나 하멜의 표류 같은 진기한 것뿐이다. 18세기
말 실학파, 특히 朴齊家(박제가)에 의한 해상무역 주장과 16세기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간 姜沆(강항)의 輕南重北(경남중북) 정책의 질책은
그야말로 아이디어에 그친 선비의 주장이었을 뿐이다. 지리적으로 반도국가이면서도 고려 이후 철저히 내륙, 대륙 국가적 이념, 문화, 생활에 한국의
원형을 찾았던 우리가 가장 대극적으로 해양화의 길 이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운명을 맞은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늦은 한국의 1876년
근대화 문호 개방이 擬似(의사) 서양인 삼류 근대의 일본에 의한 것이라면 1945년의 해양화 개방은 일본·유럽을 일거에 뛰어넘는 최일류 근대의
미국이었다는 데 첫 번째 특징이 있다. 삼류 간접 근대화에서 초일류 직접 근대화의 본격화라는 대극성이 보인다. 두 번째 특징은 19세기 말
일본에 의한 근대화 문호 개방은 조선 정부와 백성에 대한 직접적 강제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나, 1945년 이후 대한민국의 해양화 전개의 主
매개체인 미국은 해방자의 입장으로 다가왔다는 데 있다. 韓末에서부터 인접한 3强(중국·러시아·일본) 견제의 균형자로서의 기대, 기독교 선교와
일제 식민지下 한국 독립 후원자적 위치로 인해 한국 사람들에게는 미국이 주도한 근대화의 수용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근대화보다는 훨씬 덜 저항적일
수밖에 없었다. 세 번째 특징은 일본의 수탈과는 대조적으로 미국은 원조를 주어 가며, 즉 근대화 과정의 갈등을 완화하면서 진행시켰다.
경제원조뿐 아니라 기술원조 계획을 통해 고등교육, 과학기술, 여성, 인권, 복지, 언론, 지역사회 등 民(민) 중심으로 전개함으로써 근대화의
사회 상부구조 또는 하부구조를 구축했다. 특히 民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정부 간 프로젝트뿐 아니라 기독교 교회, 풀브라이트재단, 아시아재단,
포드재단 등 종교 또는 자선기관에 의한 자발적 지원이 큰 몫을 했다. 네 번째 특징은 1945년 이후 한국의 분단과 해양화의 단초를 만든
미국이 세계 최강의 나라였기에 미국 일변도로 경사된 한국의 해양화는 한국의 세계 진출에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상품 수출, 중동 및
동남아 해외 건설 진출, 최첨단 기술, 산업정보 획득, 고급 두뇌 양성 등).
공산통일됐으면 근대화에 실패했을 것
넷째, 만일 1945년 이후 한반도가 金日成과
소련 합작의 공산주의에 의한 통일이었거나, 통일된 (분단 없는) 한국이 上海(상해) 임시정부의 건국강령(1942년 11월28일 제정 공포된
토지·무역·생산·출판·영화 등 국유화 정책)의 실천에 의해 운영되었더라면, 북한같이 「실패한 국가」의 민족이 되었거나 오늘의 폐쇄·정체된
미얀마에 머물렀을 것이다. 한국의 1945년 이후의 폭발적 근대화, 非서양에서 가장 성공적인 정치 민주화, 경제성장, 시민사회化는
▲분단에 의한 대한민국의 해양국가화, 그것도 최선진국인 미국의 촉매에 의한 해양화 ▲한국인성의 대극성·양극성이 세계 어느 非서양 국가들보다도
철저한, 과거의 멸실 또는 단절로 인해 20세기 중반 이후 대담한 정치·경제·사회적 변혁의 전개 ▲李承晩, 朴正熙의 독특한 리더십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海洋化가 역사의 새 主流
이제 중국이 大國으로
부활하고 있으며, 북한이 남한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러시아에서 파이프라인을 통해 천연가스와 석유를 수입하려 하고 있다. 시베리아
철도(TSR), 중국 철도(TCR)를 통해, 즉 북한을 경유한 유럽으로의 物流(물류)가 기획되고 있다. 마치 대륙화의 새 세계가 전개되는
듯하다. 국내에서는 미국보다 중국에 대한 호감도가 높고, 심지어 主敵 북한보다 정치·군사 동맹국인 미국이 대한민국의 위협이라 답하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여론조사가 나오고 있다. 지나간 60년간 해양화의 역사 전개가 역사의 정통으로부터의 일탈이나 반역이었고, 젊은이들의
여론조사에서 나오는 태도대로 親北(친북)·親中(친중)·反美(반미)가 역사의 정통성 회복인 것처럼 생각하는 유행이 있다. 그것이 한국 민족주의의
정상회복인 것처럼 주장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과연 그럴까. 중국은 WTO(세계무역기구) 가입을 근대화 개혁·개방의 최대 국책사업으로
추진했고, 이를 「入世(입세)」라 부르고 있다. 중국은 2008년 北京(북경) 올림픽 유치와 2010년 上海(상해) 엑스포 유치를 국운을 걸고
추진했다. 入世를 위해서다. 入世란 무엇인가. 지금까지의 중국이 머물렀던 과거의 세계에서 진짜 세계, 環球(환구·세계화)의 세계, 현재의
세계, 근대화의 세계로 들어가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였다는 것을 자백하고 진짜 세계의 중심으로
入門(입문)을 시도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세계 무역 질서, 세계 금융통화 질서, 세계 기업 질서, 세계 에너지 질서, 세계 해운
질서, 세계 스포츠 질서, 세계 교육 질서에 늦게나마 합류하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2020년까지는 머리를 처박고 미국에 대들지 않겠다고 한다.
鄧小平(등소평·덩샤오핑)의 개혁·개방정책을 중국의 홍콩化, 대만化라 부른 이가 있었다. 北京에서는 목표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겠지만
개혁·개방 과정에서의 자본, 시장, 주체, 지향은 분명히 그런 것이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중국의 해양화이고, 대륙의 해양화다. 또
개혁·개방 성공 이후 세계 경제, 사회, 안보, 정치 질서에서 미국을 대신하는 새 세계체제를 만들려는 의지와 노력이 있고 그럴 만한 힘을
축적하기 전에는 대륙의 세계나 대륙화의 문명회귀는 불가능하다. 하물며 金日成·金正日의 유일사상, 주체사상, 先軍(선군)정치, 강성대국의 이념
의지와 힘으로는 대륙화는 꿈도 꿀 수 없다.
역사나 문명은 만들어 가는
것이다
대한민국 해양화의 역사는 5000년 역사의 예외나 반역이 아니라 20~21세기 문명사의 主流로 가는
정통의 역사 전개였다. 한민족 한반도의 主流 역사는 현재도 미래도 「해양화된 한민족」 대한민국의 것이다. 이 해양화 60년 동안 근대화에 가장
성공한 나라가 됐고, 1876년 문호개방 이후 가장 긴 51년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문명과 역사는 해양화의 세계화 시대로 바뀌었다.
해양성의 보편화가 해양화의 세계화다. 코스모폴리탄, 언어·인종적 다양성, 사회적 교환을 조장하는 시민문화, 시장 표준 계산을 보장하는 국제적
규칙, 다른 언어·종교·인종에 대한 관용, 政經(정경)분리에 의한 상업과 국제거래지역의 자치 허용 등을 해양성·해양화라 할 수 있다(T P 롤렌
「A Meditterranenan Model for Asian Regionalism」 1995. 스탠포드 대학). 역사 기록상의 主流인 대륙의
아시아가 아니라 해양의 아시아 무역이 16세기 이래 아시아의 主流였다는 연구(롤렌의 앞선 책, 「문명의 해양사관」 川勝平太 1997, 中公叢書.
海の 帝國, 白石隆 2000, 中共新書)가 새로 나오고 있다. 해양화의 세계화 원인을 어디에서 찾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해양화의 세계화라는
새 보편질서 위에서 미래가 전개된다는 것이 대한민국, 한민족, 한반도, 대륙과 해양의 아시아, 그리고 全지구적 인류에게 중요하다.
해양화의 세계화, 구체적으로 중국과 인도 대륙을 합친 현재 28억, 21세기 중반 41억에 이를 인구의 해양화가 몰고 올
물·토지·광물자원·에너지 생산 및 소비, 물류·교통의 공급과 수요, 도시화와 환경제약, 인구이동, 노령화, 가족해체가 몰고 올 삶의 갈등,
그리고 추락하는 통치능력 등이 한꺼번에 몰고 올 問題群(문제군)이 근대, 해양화의 세계화에 대한 근본적 도전이다.
자율적·긍정적 海洋化로
미래지향은 대륙화로의 복귀가 아니라 「해양화의 세계화 문제군」을
어떻게 극복하여 새 지구 사회, 인류공동체 문명을 창조해 내느냐는 것이다. 근대의 부정도 미래의 환상도 아닌, 서양의 모방도 동양의 복고도
아닌, 미국의 반대도 중국의 반대도 아닌, 기독교의 반대도 이슬람의 반대도 아닌 좌표에서 「해양화의 세계화 문제군」을 극복해야 하는 창조의
길이다. 대륙문화, 해양문화, 동양문명, 서양문명이란 말을 쓰고 마치 주어진 것처럼 말하지만 어느 문화, 어느 문명, 어느 역사도 그
시대 그 현재의 백성과 주역들이 만들고 가꾸어 가는 것이다. 항상적 창조의 과정이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근대화, 대극적 해양화의
길을 걸어온 대한민국은 이제 지금까지의 타율적 해양화를 자율적 해양화로 승화시키고 대극적 해양화를 긍정적·적극적 해양화로 성숙시켜야 한다.
이런 자율적·적극적 해양화에서 한반도의 통일, 한반도의 해양화가 완성되고, 인류 전체의 도전인 「해양화의 세계화 문제군」을 극복하는 데도
창조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중화주의 질서, 영국 패권 질서, 미국 패권 질서를 넘어 汎태평양 질서, 즉 汎인류 질서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한민국 한민족의 고통이면서 보람 있는 역사 개척의 과업이다.● (월간조선
2005.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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