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의 반유대주의 계보
本間長世
@ 아직도 일천한 연구의 역사
미국에서의 반유대주의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본격화 된 것은 비교적 근년의 일이다. 여기서
반유대주의(anti-semetism)라는 것은 유대인이라고 하는 이유로 개인 내지는 집단에 대한 적의를 가진 차별적 말을 사용하거나, 행동을
취하는 것을 긍정하는 입장 내지는 사상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의 반유대주의는 미국 역사를 상당기간 존재해 왔으나 유대인 자신들이 이 주제를
문제시하게 된 것은 제2차대전 후가 되어서라고 볼 수 있다. 그때까지는 반유대주의를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 시 되어 온 분위기였다.
1950대부터 60년대에 걸쳐 미국사학계에서 19세기 후반의 남부 및 서부 농민운동에서 반유대주의적
요소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하고 논의가 제기된 것도, 반유대주의 학문적 연구를 촉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또 1960년대의 공민권운동 -
이것은 현실적으로는 흑인이 백인과 평등하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이었다 - 이나, 1970년대 이후 에스닉 그릅의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주장이 높아진 것도 반 유대주의의 연구에 하나의 자극제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양한 개별적 연구가 성과를 거둔 것을 종합하여
미국에서의 반 유대주의의 통사를 최초로 쓴 것은 레나드 디나즈틴이며, 그 연구성과가 1994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의 대 전재는 미국의
반유대주의의 기저에는 기독교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전제를 받아드린다고 한다면, 미국의 역사를 보기 전에 유럽에서의 기독교와
반유대주의와의 관계에 대해서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 기독교도들에 의한 박해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나살레 예수는 유대인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나, 유대인으로서 자랐고,
유대인으로서 죽어갔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그들은 신의 아들로 숭앙 받는 예수를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게 하기까지의 책임이
유대인에 있다고 보기 때문에, 기독교의 반유대주의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095년 시작된 제1차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그 동안 미미했던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가 한꺼번에 이들에 대한 학살로 비화돼, 이해 전반에만 독일과 북 프랑스에 있던 유대인 1/4가량이 학살당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12세기 중반의 제2차 십자군 전쟁도 제1차 정도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반유대주의 감정을 크게 격양시켰다. 13세기까지 유대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죄로, 영구히 노예적인 지위에 처해야 한다고 하는 교리가 카톨릭 교회에 의해 확립되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에 의해 일종의 원죄에
처해 졌다고 볼 수 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도들로부터 차별 돼, 의복도 유대인 것이 겉으로 표시 나게 입도록 명령되었으며, 그밖에도 다양한 생활
현장에서의 속박을 받았다. 그런 한편 유대인의 전형으로 고리대금업자의 이미지가 널리 형성되어 있었다. 이것은 드디어 섹스피어의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이록에 의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게 되었다. 또 중세유럽 특히 북구에서는 유대인은 사람을 죽이는 의식을 행한다든가, 우물에
독을 넣어 흑사병을 일으키기도 한다고 등의 모략적인 이야기 마저 확산되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기는 하나, 유대인들에 관한 루머가운데는 그들은 남성에게도 월경이 있으며, 이 때문에 남자들이 정기적으로 혈액을 보충하기 위해서 기독교도들의 피를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정도였다. 프로테스탄티즘이 흥성하면서도, 독일에서는 중세 이래 반유대주의적인 유대인 상이 이어져 왔다. 마틴 루터도 과격한 말로 유대인의 존재 자체를 비난 공격했다. 선과 악, 기독교와 반기독교도들의 대립에서, 유대인은 악과 반기독교도들의 측에 선 사람들이며, 말살되어야 하는 사람들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르네상스기의 회화에서는 유대인의 모습은 명확한 형태가 부여되지 않았다.
유대인의 여성상은 거의 나타나지 않을 뿐 아니라, 긴 코와 같은 소위 유대인적인 특징이 나타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영국사에서는 11290년에 에드워드1세에 의해 유대인이 영국에서 추방돼, 1656년에 크롬웰에 의해 다시 영국에 입국이 허가되었다고 보고
있으나, 이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이 나오고 있다. 국외추방은 반유대주의가 강화되었다고 보기보다는 국왕과 의회의 정책상 타협의 산물이며,
1656년의 결정도, 직접적으로는 유대인의 재 입국을 인정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고, 또 정식 결정이 이뤄진 것도 아니다. 실제로는 유대인은 늘
영국에 살았던 것이며, 문제 시기에도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런던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천지에서의 신앙의 자유는 기독교도도 유대교도도 아닌 사람의 입장에서 볼 경우, 중세 이래의 유럽의
반유대주의자가 기독교 신앙을 기초로, 그것에 다양한 사고들을 결합시켜, 아주 이상한 것으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이
유럽에서의 이민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인 이상, 반유대주의도 유럽에서 건너온 것이기는 하나, 유럽과는 달리, 미국은 반유대주의가 교회나 정부에
의해 제도화된 것이 아니고, 또 전반적으로는 유럽에서보다는 조용했다. 때문에 유대인들이 미국으로 건너왔던 것이다.
북미대륙에서의 영국 식민지 건설은 17세기에 시작됐다. 유럽에서 확대되고 있던 유대인에 대한
편견이나 망상은 이민과 더불어 미국으로 건너와, 반유대주의적인 노래마저 만들어 졌으나, 1690년대 말에는 미국 유대인들은 자기의 신앙을
자유롭게 믿고, 생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영국식민지가 본국에 반항하여 독립선언을 채택한 1776년에 독립파의 원로 벤쟈민 프랑클린은
새롭게 건설할 국가의 인장 디자인에, 구약성서의 모세가 홍해의 바다 물이 갈라진 가운데를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느리고 건너는 이야기 내용을
도안하여 사용하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이 안은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신 국가가 자기들의 과거 내지 전통을 창조하는데 있어서, 유대인이 계승해온
이야기에까지 소급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구약성서에 대한 존경이 있었다는 것은 하바드대학이나 예일대학에서 히브리어가 교육되고, 졸업식
연설에도 히브리어가 사용된 것으로도 짐작된다.
그러나 18세기의 미국에 반유대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구약성서를 존경하는 한편으로 유대인에
대해서 비난의 말을 던지는 일도 계속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경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말 뿐 아니라, 과격한
반유대주의적인 행동도 있었다. 북 아일란드의 뉴 포트에서는 유대인의 묘가 두 개나 파괴된 사건이 1770년에 일어나기도 했다.
이렇듯 식민지 시대로부터 독립혁명에 걸친 시기 미국사회의 유대인에 대한 태도에는 양면성이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새로운 국가건설까지 유대인은 자유롭게 자기의 신앙을 믿는 것이 가능했으며, 미국헌법의 '권리장전'이라고 부르는 최초의
수정10조가 추가되기 전부터 유럽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던 신앙의 자유를 유대인은 향유했던 것이다.
'神 不在의 헌법'
독립된 새 공화국이 탄생되는 것이 그 안에 살고있던 유대인들에게는 그때까지의 관습을 대부분
변화시키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최근의 연구물들이 미국 헌법을 '신 부재의 헌법'이라고 부르는 것을 감안하면 잘 이해 될 것이리라.
오늘날의 미국 기독교보수파들 가운데는 미국헌법이 기독교 체제를 영속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헌법에는
'신'이라든가, '위대한 통치자'라든가, '창조자'라든가, '지고의 존재'라든가 하는 표현은 일체 사용되지 않고 있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
문서인 것이다.
이런 점은 오늘날 미국헌법 주해서로 미국정치 연구의 고전으로 여겨지고 있는 'The
Federalist'라는 논문집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원래 헌법기초의 비준을 촉진시키기 위해 벤쟈민 메디슨(후에 제4대 대통령),
알렉산더 해밀톤(후의 초대 재무장관), 죤 제이 (후의 초대 최고재판소 수석판사)등 3인이 익명으로 신문에 기고한 문장을 모은 것인데, 이 책
80여 편의 내용 그 어디에도 '신'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뿐 만 아니라, 메디슨이 집필한 것이 확실시되고 있는 제10편('파벌의 폐해와 그 시정책')에서,
개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열정이나 현신이, 인간상호간의 적의를 격양시켜, 결국에는 사람들을 공통의 선을 위해 협동시키기보다는, 그들을
선동하여, 서로 압박하는 방향으로 기울게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위험한 열정이나 헌신을 만들어 내는 것 가운데는
종교적인 요인이 크다는 입장이었다. 미국헌법은 의도적으로 신 부재의 정치문서로 만들어 졌으며, 때문에 더욱 비준과정에서 이것을 기독교를 기초로
하는 공화국을 전복하려고 하는 무신론자들의 음모라고 하는 주장마저 제기되기도 했다.
물론 헌법 제정 추진론자들은 개인적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단지 종교를
강요하는 책임을 정부에 부과하는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며, 특정 신앙을 믿는 사람만이 공직이 취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를 부정한 것이,
미국헌법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미국의 유대인은 연방 수준에서는 유럽에서 받았던 차별로부터 건국기에 이미 해방되었던 것이다.
미국종교사연구의 권위인 마틴 마티교수는 건국2백년을 기념하여 1976년에 행한 한 강연의 제목으로, '미국, 신 부재의 헌법과 신을 경배하는
인민'를 내걸었다. 건국 시조들은 종교를 믿었으나, 헌법에 의해 종교를 지탱하는 것은 생각지 않았다. 마틴교수는 헌법 기초자들은 무신론자도,
인격신론자도, 인간이 만든 정부아래서의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믿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미국 헌법은 제6조3항에서 '합중국의 어떤 공직 취임의 자격으로 종교적인 심사를 하는 일은 없다'고
규정한 것은 몰론 유대인만을 위한 것은 아니나, 유대인에 있어 특히 의미가 컸다고 볼 수 있다. 1812년의 대영전쟁에서의 활약을 비롯, 미국
해군사관으로서 용맹을 떨친 유대인 유리아 필립 리비는 제퍼슨 사후 매각된 그의 저택을 다시 사드렸는데, 이는 종교적인 이유로 공직에서 배제되는
일없는 미국을 건설하는데 제펴선의 공적이 컸기 때문이었다. 이 덕택으로 오늘날에도 몬디첼로에 있는 제퍼숀의 저택은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방문,
안내인으로부터 그가 정치에서 원예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또 다양한 아이디아를 만들어 냈는가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 '올리버 트위스트'에 숨겨진 주제
미국이 탄생한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유럽에서는 이성의 시대라고 불리워진 개몽주의는
그 반동으로 옮겨가던 시기였다. 이 당시 종교적 관용의 기분이 보이지기는 하였으나,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희곡이나 소설 등에서는 반유대주의가
횡행, 그 대표적인 예가 영국 작가 찰스 디켄스의 작품 '올리버 트위스트'였다. 근년에 영화화 되고, 뮤지칼화 되기도 한 이 작품에서는
페이킨이라는 추악한 유대인이 등장, 샤이록 이래의 악인 이미지의 유대인 상을 영국만이 아니라 미국인들에게도 깊게 심었다. 특히 1948년에
만들어진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에서는 명우 알렉 기네스가 페이킨을 연기함으로서, 그 영화를 한번 본 사람은 유대인이라고 하면 페이킨을 먼저
생각해 낼 정도였다.
@ 사회적 지위를 확보했던 건국 초기
유럽에 비하면 건국 초기 미국의 유대인들은 자유 획득의 길을 잘 진척시켜 갔고, 다른 사람들과 격리되는 일도 없었다. 당시는 아직 유대인 수도 적었고, 1840년이 되어 독일에서 옮겨온 사람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미국 유대인들은 총 1만5천여명 정도로 추산될 정도였다. 수가 적지 않았다는 것은 유대인이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유리한 조건이었다. 1801년에는 조지아주 지사에 유대인으로 보여지는 사람이 당선되었을 뿐 아니라 그 밖의 주 정부나 주 의회 등 지방 수준의 정치 요직에 선발된 유대인도 늘어났다.
유럽과는 달리, 유대인은 미국 육군이나 해군의 사관이 되는 것도 가능했으며, 예일대학이나
하바드대학은 유럽의 여러 대학에 앞서 유대인 학생을 입학시켰다. 앞서 살핀데로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톤은 신앙의 자유를 강조, 유대인 및 그들의
종교에 경이를 표했다. 1788년7월4일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독립기념일 퍼레이드에서는 기독교 목사와 유대교 성직자들이 어깨를 맞대고 행진했다.
1790년부터 40년간 뉴욕과 사우즈켈롤라이나주의 찰스톤은 미국 유대인의 양대 거주지였다.
@ 남북전쟁과 반유대주의
그러나 반유대주의 풍조도 차자 강화되어 갔다. 그러나 이 시기 미국의 반유대주의는 유럽보다는 경미했으며, 유대인은 피습되기는 하였지만, 모욕되는 일은 있었다. 1840년대부터 남북전쟁이 종료된 1865년에 걸쳐, 미국에서의 유대인의 이미지는 전체적으로는 악화되어 갔다. 미국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몇 차례 종교부흥의 열기가 높았던 시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 중반도 그 하나였다. 19세기 중반에도, 종교부흥의 운동이 가열되었다.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북부도, 남부도 각각 국민들이 신에 기도하는 날을 정하기도 했다. 건국 초기 대통령 제퍼슨은 전임자 워싱톤이나 존 아담스가 신에 감사를 올리는 날을 정부가 정한 것을 폐지했다. 그러나 남북전쟁의 고양된 분위기 속에서 정부의 이니시아티브로 신에 구원을 요청하는 기도나 신에 감사하는 의례가 다시 행해지게 되었다. 1863년10월에는 링컨 대통령이 포고를 내어, 11월의 최종 목요일을 전국민이 일제히 엄숙하고 건건하게 마음으로부터의 감사를 신에게 올리는 날로 정했다. 미국 헌법이 '신의 부재'를 내용으로 하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소간의 위로가 되는 것은 역시 남북전쟁 중 체이스 재무장관이 '신에게 우리들은 모든 것을 의탁한다'고 하는 글귀를 미국 화폐에 삽입키로 한 사실이었다. 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 고리대금업자 샤이록의 이미지
종교의 세계와는 달리, 전쟁 중에 스스로는 물건을 만들지 않고 금융이나 상업으로 폭리를 취하는
집단으로서의 유대인에 대한 이미지가 다시 강해졌다. 남부연합의 수도 리치몬드 신문은 외국인과 유대인이 돈 투기로 남부를 멸망시키고 있다고 주장,
유대인들이 가진 는 것은 많은 돈과 세계에 대한 경멸심이라고 쓰기도 했다. 또 뉴올리온스 주재의 AP기자는 뉴올리온스 및 전체 남부 유대인들이
여러 가지 나쁜 일을 하기 때문에 멸망시켜야 한다는 기사를 송고 하기도 했다.
연극 무대에서는 샤이록이 나쁜 유대인으로 상징 돼, 1850년대에 테네시주의 한 '베니스의 상인'
공연 중에 관객중 한 사람이 무대위로 뛰어올라, 샤이록의 손에서 칼을 빼았었으며, 다른 장소에서 같은 배우가 같은 연기를 했을 때는 한 흥분한
관객이 무대에 뛰어올라 유대인을 저주하는 고함을 질려대기도 했다. 당시 미국에서의 섹스피어의 비극 연기 제1인자는 에드윈 푸즈였으나, 그는
샤이록이나 유대인을 아주 싫어해, 로스챠일드나 제이 굴드 등 당시의 대 금융가들을 샤이록에 비유하기도 했다. 제이 굴드는 유대인은 아니었으나,
가끔 유대인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남북전쟁은 비극적인 내전이었으며, 미국인들의 마음속이 깊이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전후 미국에서는 노예제에서
해방된 남부 흑인이 새로운 제도나 법률적 차별에 시달리는 한편 반유대주의도 또 새로운 형태를 취해 갔다.
@ 19세기 후반의 배척운동
19세기 후반 미국사회에서는 사회계층의 구별 없이, 또 프로테스탄트와 카돌릭 구별 없이 반유대주의가
강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뉴욕에서는 하층계급의 유대인 가게가 모여있던 차탐 거리의 이름을 따서, '차탐가의 유대인'이라는 말이
유행,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이 비등했다. 또 1866년 뉴욕의 의류업자들이 집중되어 있던 지역에서 일련의 화재가 일어난 것을 기화로 이는
유대인들이 보험금을 타기 위해 일부러 일으킨 짓이라는 설이 유포되어, 대형 보험회사가 유대인 기업에는 보험계약을 체결치 않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에 분개한 유대인들이 각지에서 항의 집회를 열고, 그들이 기존에 들고 있던 보험을 차례차례 해약했기 때문에 보험회사가 큰 곤란에
빠지기도 했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방화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으나, 이러한 일은 유대인들이 얼마나 나쁜 선입관으로 차별되고 있는 가를 나타내는
일이다.
1860-70년대에는 '신 부재'의 미국 헌법에 불만 가지고, 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인정하는
내용으로 헌법을 수정하려는 운동이 이어졌다. 남북전쟁의 와중에도 헌법 수정을 목표로 하는 전국개혁협회라고 하는 조직의 대표가 1864년에
대통령을 만나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수정안을 지지해 주도록 요구했으나, 이에 대해 대통령은 정중하게 헌법 수정파에 대해서 공감을 표시하면서도,
헌법을 수정하는 것은 경솔하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신중하게 거절, 그 후는 수정문제에 언급치 않았다. 그러나 일반적 풍조로서 미국은
기독교국가라고 하는 것에 걸맞게 헌법이 수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계속되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종교계 외에도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은 횡행했다. 1879년에는 미국 유대인억압협회라고 하는 단체 -
단명으로 끝났다 - 가 대회를 열어, 미국이 자유로운 국가라고 한다면 어째서 우리가 유대인으로부터 자유로워서는 안 되는 것인가 라고 주장,
유대인을 공직에 선출하지 않을 것과, 유대인이 작곡한 음악을 연주하거나, 유대인 배우가 등장하는 연극을 보이코트하는 등 유대인 배척 운동이
이어졌다. 상류사회의 사람들이 칸트리 크럽을 만들거나 스스로 사교계로부터 유대인을 축출할 것을 기도하는 것에 대해, 남부나 서부의 농민층도
1880년대 및 90년대에 생활이 어렵게 되자, 유대인들을 불만스럽게 생각하기도 했다. 농민의 이익을 착취하는 동부의 은행가와 금융업으로 돈을
벌고 있는 유대인의 이미지가 겹쳐있었기 때문이었다. 놈민 층의 지지를 배경으로 인민당이 결성돼, 19세기말에는 대통령 선거에 후보자까지 내서
웠으나, 1896년의 후보자 지명대회 분위기는 취재 기자가 놀랄 정도로 반유대주의적이었다. 대회 개최지였던 센트루이즈의 어느 호텔에 가더라도
격렬한 유대인 규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 자동차 왕 포드의 유대인 규탄
1920년대는 미국 경제가 가장 왕성한 번영을 구가하던 10년으로 불려지던 시기로 당시는 유대계
미국인들의 생활도 물질적으로는 향상되었다. 그러나 유대계 미국인의 생활이 향상되는 것과 반유대주의가 강화되는 것은 이 시기에도 병행하여 진전되고
있었다.
1920년대 미국에서의 반유대주의에 대해서는 자동차 왕 헨리 포드의 에피소트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자동차 역사에서 이름높은 '모델 - T' 의 개발로 자동차 산업의 거인이 된 포드는 데드로이트지역의 지방지 '디아폰 인디펀던트'를 매입
이 신문을 통해 격렬히 유대인 공격이 계속하었다. 포드의 반유대주의의 배경에는 금융가나 중계인들에 대한 불신감과, 샤이록이나 페이킨의 이미지가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그에 더해, 20세기 초 나타난 '시온 장로들의 의정서'가 유대인에 의한 기독교 문명 멸망 음모의 위험을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배경도 있다. '데아폰 인디펀던트'은 이 '의정서'를 권위 있는 문서로서 거론, 유대인의 워협론을 확산시켰다.
'시온 장로들의 의정서'는 처음 제정러시아에서 1905년에 나타나, 1920년대에 각지에 펴졌다.
그 내용은 19세기말에 유대인의 회의가 열려, 기독교를 타파하고 세계를 지배할 계획을 검토했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오늘날 이 문서는 러시아의
비밀경찰에 의해 쓰여졌다고 백과사전 등에서 설명되고 있다.
포드가 미국 국민의 감정을 반유대주의로 확산시켰다고 한다면, 자동차제조업에서 성공한 그의 직관은
국민심리를 읽는 것에는 정확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데아폰 인디펀던트'는 당시 급속하게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째즈가 흑인음악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국제적 음모의 일부분이라고 주장했다. 롬은 스카트도, 의복산업을 주도하고 있던 유대인들의 음모라고 여겼고, 볼세비키
혁명은 국제 유대 금융자본이 엄밀히 계획한 투자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1913년초에 돌연 반유대주의 운동을 그만 둔 후, 1924년4월부터 '디아폰 인디펀던트'는
유대인에의 비난을 재개했다. 돌연한 중단이나, 재개 모두가 포드의 정치적 고려에 의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1927년7월에는 포드는
그때까지 유대인 규탄을 사죄, 이 해를 끝으로 그의 신문을 폐간했다. 그러나 그가 '의정서'의 존재를 확산시켜, 나치즘에 영향을 끼쳤으며,
히틀러가 포드의 사진을 벽에 걸어놓고 숭배하게 된 것은 포드의 본질적인 경박한 반유대주의는 미국 국내보다도 국외에 커다란 피해를 가한 것이다.
@명문대학에서의 차별
1920년대의 유대인배척의 또 다른 예로 하바드 대학을 비롯한 전국의 명문대학이 유대인학생의 입학을
일정 수 이하로 한정하려고 한 시도를 들 수 있다. 기독교 교도라야 진정한 미국인이라고 믿고 있던 로웰 하바드 대학장은 유대인 학부학생이
전체에서 점하는 비율이 1908년의 6%에서 1913년의 13%로까지 높아진데 대해 크게 놀랐다. 유대인 학생을 6명까지로 한정한 대학도
있었으며, 응모한 학생들의 부모의 성이 변경되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려 한 대학도 있었다. 하바드는 입학자 선발에 있어 지역적 다양성을 고려하려
했으나, 이것도 유대인 입학생이 많았기 때문에 취해진 방책이었다. 다트마스대학의 학장은 학과의 성적만을 기준으로 학생을 선발하면 유대인이외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까지 말하고 있다.
입학이 허가된 뒤에도, 유대인의 학생은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받았다. 후에 유명한 저널니스트가 된
월터 리프만은 평판이 대단했으나, 하바드에서는 아웃사이더적인 존재로 취급되었다. 같은 평론가 저널리스트로서 이름을 떨친 맑스 라너는 예일대학의
학생이었으나, 자기들은 유대인학생은 여러 가지 이유로 축출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 대 공황과 나치즘의 대두
1929년 뉴욕 주식시장 대 폭락으로 시작된 대 공황은 미국 국민을 심각한 불안에 빠트렸다.
1933년에 취임한 프랑클린 D. 루즈벨트는 뉴딜정책이라고 불리는 연방정부 주도형의 미국경제재건정책을 차례로 시도했으나, 제2차대전에서 미국이
참전할 때까지 실업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미국의 자본주의가 한계에 다달았다고 주장한 사람들 중 일부는 히틀러의 나치즘이나 스탈린 치하의 소련이
공산주의사회적인 대안을 채택하고 있는 것에 미국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까지 하였다. 이러한 불안정한 분위기 가운데 반유대주의는 선동가들에
이용돼, 과격한 유대인 증오단체의 활동이 활발 화 됐고, 유대인이 말로만 멸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봉변을 당하는 사건이 북동부나 중서부의
도시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독일에서의 나치즘의 언동에 비해보면 보다 온건한 것이기는 하다고 볼 수 있으나, 유대계 미국인에 있어서도 장래에 대한
공포감을 떨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38년의 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유대인이 정부 공직에 너무 많이 취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35%, 독일로부터 다수의 유대인이 미국으로 망명해 오는 것을 받아드려야 하는가 아닌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회답자의 77%가
부정적이었다. 제2차대전후 루즈벨트정부는 전시 중에 나치에 의한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의 비인도적 행위가 일어났음을 알면서 도, 속히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 비난이 일어났으나, 이는 1930년대부터 제2차 대전기에 걸쳐 미국에서도 반유대주의가 강화되고 있었던 것이 루즈벨트를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할 것인지도 모른다.
@ 반 나치, 반 유대의 모순
미국이 연합국 측에서 나치 독일과 뭇소린 정권아래의 이태리 및 일본을 주요한 적으로 싸운 제2차대전
기간은 유대 계 미국인들 역사에서는 미국 가운데 반유대주의가 크게 고양되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1927년에 대서양횡단 무 착륙 단독비행에
처음으로 성공, 일약 미국의 히로가 된 챨스 린드버그는 1939년에 제2차대전이 시작된 후 미국의 참전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결성한 조직의
적극적인 멤버로써 고립주의를 주창했다. 1941년9월에 린드버그는 한 연설에서 유대인과 영국과 루즈벨트정부가 미국을 참전시키려 하고 있다고
주장, 특히 유대인은 미국의 영화, 신문, 라디오, 그리고 행정부 등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어, 그것이 최대의 위험이 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전시 중 미국에서는 나치 독일과 싸우면서 국내의 반유대주의가 강화되는 모순된 현상이 나타났다. 연방의회에서도 공공연하게 반유대주의를 제창하는 의원들이 공화당에도 민주당에도 나타났다. 루즈벨트의 저택이 있었던 뉴욕주 다체스를 선거구로 하는 공화당 보수파 하원의원 헤밀톤 휫슈는 우익단체의 앞에서 살핀 '의정서'를 의원 특권인 우편물 무료배포 루트를 사용하여 배포 시켰다. 루즈벨트는 그에의 지지는 대단했다. 이밖에도 유대인들은 공산주의자라고 유포되기도, 할리우드는 유대인이 지탱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의원도, 반유대주의는 범죄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의원들도 있었다.
당시 정치가들의 이러한 반유대주의적 발언은 후에 반유대주의자에 의한 널리 이용되었다. 전시 중에 반유대주의적인 감정이 미국 국민들 간에 널리 퍼졌고, 그에 편승하여 그것을 선동한 정치가들이 양산되었던 것이 유럽의 유대인 난민들을 미국에서 받아드리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고, 또 홀로코스트에 대한 정보가 있었음에도 루즈벨트 정부의 대응이 대단히 우유부단했던 배경이기도 했다.
@ 영화『신사협정』의 반유대주의 비판
제2차대전 후 미국사회에서는 반유대주의가 급속하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유대인을 비난 공격하는 말의 듣는 기회는 1946년 이후 격감했다. 1947년에는 반유대주의를 비판한 영화 '신사협정' - 동명의 베스트셀러를 각색한 작품 - 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획득했다. 이 작품은 논 픽숀 작가가 자기가 유대인이라고 하는 것을 공개하고 다양한 멸시를 체험, '나는 8주간 유대인이었다'라고 하는 글을 쓰는데 성공한다고 하는 줄거리다. 감독은 에리아 카쟌, 유대인으로 연기한 그레고리 팩은 예약해 놓은 리조트 호텔에 도착하자, 프론트에서 예약을 접수한 것은 실수로 실수였고 실제는 만원이라고 숙박을 거절당하고, 아이들이 울먹이며 집으로 돌아와, 동네 친구들에게 '재수 없는 유대인'이라고 놀림을 당하는 등, 유대인이 사회에서 어떤 대접을 ?는가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반유대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나치즘이 붕괴됨으로써, 전승국인 미국은 나치즘과 연결된 반유대주의는
광신적인 소수분자만이 주장하는 것이라는 공기가 급속하게 확대됐다. '신사협정'은 그러한 변화의 속에서, 할리우드의 영화 산업자들 가운데 예외적인
비유대인계인 20세기 폭스사에 의해 만들어 졌다. 반유대주의의 깊은 뿌리를 파헤친 본격적인 작품이 전후 2년만에 만들어 졌다는 것은 대단히
신속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신사협정' 가운데 묘사된 유대인을 거절하는 리소트 호텔은 1950년대 중반에는 전체의 1/4로 격감, 그 5년
후에는 거의 소멸하고 말았다. 고속도로 망이 발달하여 장거리 자동차여행이 증가, 그것에 따라 홀리데이 인과 같은 모텔 체인이 많아졌고, 커다란
단체가 대회를 열 때는, 유대인을 받아드리지 않는 호텔은 취소하고 다른 호텔을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게 된 것도 반유대주의적 사회관행을 급속히
변화시키는데 큰 힘이 됐다.
@ 반유대주의는 죽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핀 것과 마찬가지로, 반유대주의의 놀랄만한 급속한 퇴조가 보이면서도, 반유대주의는 완전히
소잔된 것이 아니고, 1950년에는 57명의 반유대주의 단체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유대인 소년이 습격 당하거나, 몸에 나치 문장을 한
고교생이 활보하고 다니는 것 또한 없어지지는 않았다. 과격한 반유대주의자 가운데는 죠지 록펠로우가 미국 나치당을 창설, 반유대주의자로서 이름을
떨쳤다(그는 1964년에 부하에 의해 살해됐다). 반유대주의는 전후 주류사회에서는 없어진 것 같았으나, 저변으로는 여전히 그 잔영이 남아, 소수
과격파가 일반인들과 연대하는 행동을 일도 이어가고 있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반유대주의는 사회문제로서 거의 표면에 나타나지 않게 되었으며, 유대인은 미국사회의 주류로 받아들려 졌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 문화의 한 요소를 이루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는 반유대주의가 죽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 유대계 미국인들의 인식이며, 불안이기도 한 것 또한 사실이다.
('ユダヤ系 アメリカ人', 本間長世, PHP신서, 1998, 4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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