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논쟁을 지켜보며 : 대한제국기의 역사적 위상

이강기 2015. 10. 4. 10:12

논쟁을 지켜보며 : 대한제국기의 역사적 위상

 

 - ‘近代의 그늘’에 대한 탐구 필요해

 

 

                                                           김동택 / 성균관대 정치사

 

고종 시대를 둘러싼 이태진 교수와 김재호 교수의 논쟁, 그리고 다른 연구자들의 논의를 지켜보면서 한국의 근대 형성 문제를 어떻게 접근해야하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쟁점이 워낙 광범위한 까닭에 그리고 지면이 제한된 까닭에, 하나하나의 문제에 견해를 표명하는 대신, 한국의 근대 경험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개항 이후 한국의 근대 경험에서 특징적인 것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돼 급격하게 변화돼갔던 사회와 그러한 변화에 제도적인 뒷받침을 해주는 데 실패했던 정치 체제 사이의 불일치라고 생각한다. 개항 이후 사회는 자본주의적 근대가 확대돼갔던 반면, 정치체제는 이로부터 초래된 사회적 동요와 외압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하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대한제국의 한계와 식민지 체제의 역사적 위상이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 교수는 이 교수의 논의에서 조선왕조(왕정)의 극복을 통한 근대 사회 수립이라는 문제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세계사적 경험 속에서 근대 사회의 형성이 왕정의 폐기를 전제했던 사례는 대단히 제한적이다. 19세기 후반 프랑스나 미국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국가들이 왕(황제)정이었다. 왕(황제)정 또한 군주와 의회의 권력관계에 따라 다양한 편차를 갖고 있었다. 영국이 인민주권에 입각하고 있었다면 독일은 의회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황제 권력이 압도적이었으며 일본은 독일의 아류였다. 국민주권에 입각한 국민국가들의 시대는 2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현실화된다. 1차 세계대전조차도 애국주의로 포장된 제국들의 전쟁이었다. 따라서 19세기 말의 시점에서 볼 때, 왕(황제)정 자체가 후진성내지 정체성을 표상한다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체제의 지향성과 제도화의 수준이었다.


왕(황제)권이 강력했던 국가들 대부분은 보수적인 근대화 경로를 추구했는데, 대한제국 또한 이에 해당한다. 보수적 근대화 경로란 왕권을 중심으로 기존의 지배세력들이 피지배계급을 억누르거나 정치적으로 동원하면서 산업화/공업화를 통한 부국강병을 추구했던 방식이다. 대한제국은 왕(황제)권의 절대성에 대한 강조가 훨씬 강했다는 점, 다른 왕(황제)정이 형식적이나마 정치적 참여를 허용하며 국민을 동원하고자 했음에 반해, 완강하게 그것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보수성이 더욱 강했던 것이 특징적이었다.

 

 

지지기반이 부재한 보수개혁의 붕괴

그러나 보수적 근대화의 추구는 고종(광무황제)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개항이후 식민지에 이르기까지, 갑오정권 동학농민군, 독립협회, 광무정권, 심지어 1905년 이후의 계몽운동세력들까지도 포함해 원리적 선언이 아니라 제도적인 차원에서 인민 주권을 주장했던 정치세력은 거의 없었다. 독립협회가 주창했던 중추원 관제개혁에서도 하원을 배제했고, 1905년 이후의 계몽운동기의 다양한 협회들도 참정권의 제한을 옹호했다. 한국의 근대 경험에서 지배층의 일관된 보수성은 특징적이며, 최소한 인민주권의 배제라는 측면에서는 고종(광무황제)이나 개화파, 계몽 지식인들 사이에는 놀라운 일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민영익 일행이 미국사행을 끝내고 귀국, 갑신정변 직전에 촬영한 기념사진. 서광범이 기념앨범을 들고 있다. 유길준, 홍영식, 김옥균, 민영익 중앙에 학모를 쓴 소년은 박용하, 최초로 학생신분으로 일본에 유학했다. 당시 이 사진은 1884년 일본으로 떠나기전 기념으로 촬영된 것이다. ⓒ koreanphoto.co.kr
왕권 중심의 보수적 근대화 과정에서 대한제국이 봉착한 문제는 독일의 융커, 일본의 사무라이들과 달리 근대화를 추구할 계급 혹은 계층적 이해를 공유하는 정치세력의 부재였다. 과거제가 폐지되고 새로운 관료 충원제도가 부재한 상황에서 황제가 의존했고 황제에 의존했던 소수 근왕주의자들의 정치적 인적 기반은 너무나 허약했다. 황실의 내장원과 국가 재정기구간의 복잡한 관계는 개혁을 실현할 인적 자원의 제도적 충원의 미비로 인해 발생했던 것이며 쉽사리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황제 중심의 소수 개혁 세력이 갖는 한계는 광무개혁의 한계이기도 했다. 둘째 대한제국기에 시도된 일련의 정책들이 근대 지향적이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은 그것을 광무개혁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하는 연구자들은 그 정책들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근대를 지향하는 정책들이 지속적으로 추구됐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들이 시행착오를 거듭했고, 일부는 시대착오적인 것들도 있었던 것 또한 분명하며, 개혁의 결과 또한 지지부진했다.

 


황제권에 도전할만한 세력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새로운 시도들이 계속 시행됐지만 그 성과는 낙관하기 힘들었다는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외부로부터의 압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대한제국의 개혁은 속도는 대단히 늦고, 그 결과물 또한 과거의 것과 새로운 것이 뒤섞인 그다지 만족할만한 것이 아닌, 보수적 경로의 근대화를 경험했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의 시대는 그러한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개항 이후의 한국 사회의 변화 또한 그러한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최근의 연구 성과와 개항기 지주 경영에 대한 많은 사례 연구들은 개항 및 국제무역의 활성화와 더불어 지주 경영이 활성화돼갔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반대의 경향 또한 존재했다. 이를 두고 이영훈 교수는 소농 사회론의 특징을 생산력의 안정과 시장의 제한성 그리고 제도화되지 못한 부세 수취나 소유권 문제와 같은 근대적 제도의 결여로 규정한다. 시장의 제한성은 자본주의 세계 체제와의 다양한 방식의 접합을 통해 해소됐다. 시장의 확장으로 이윤축적의 가능성이 확보되면서 근대적 제도의 결여의 문제는 그 심각성이 더해갔다. 지지부진한 개혁은 이윤을 추구하는 세력과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세력 모두로부터 공격을 받음으로써 정치체제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대한제국 붕괴의 내적 요인은 근대성의 부재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와는 반대로 근대성의 팽창, 즉 시장과 이윤의 확대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주지도 그로부터 피해를 입은 세력들을 보호해주지도 못했던 것 때문이었다.

 

 

‘산업화=자본주의적 근대’는 편협한 해석

그렇다면 식민지 체제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식민지 체제는 근대로의 이행이라는 거시적인 과정 속에서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산업화/공업화를 자본주의적 근대와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자본주의적 근대에 대한 편협한 해석이다. 유럽의 경우에도 본격적인 기계제 대공업은 19세기 중반 이후부터 발전했다. 그러나 유럽의 근대를 19세기 중반부터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는 없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근대는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편입, 상품 연관에의 편입과 더불어 그 과정이 시작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 체제는 대한제국이 안고 있던 문제의 일부, 특히 자본주의적 근대에 요구되는 문제들을 폭력적으로 그리고 헤게모니적으로 해결했다. 따라서 식민지 체제로 인해 비로소 근대화가 시작됐다는 주장은 과잉 해석인 것이다. 식민지 체제는 기왕에 확대되고 있었던 자본주의적 근대의 확장과 그 과정에서 요구됐던 일부의 근대적인 제도들을 제공함으로써 기왕의 발전 경향에 가속도가 붙을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것도 국권상실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면서 말이다.


마지막으로 근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싶다. 논쟁 과정에서도 제기된 바 있지만, 식민지 근대화론이나 내재적 발전론은 모두 근대화지상주의라는 명칭으로 불릴만하다. 차이가 있다면 전자가 발전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반면 후자는 일국적 발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양자 모두 근대가 초래한 억압과 불평등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전자의 경우 근대 자체가 부여하는 억압과 불평등에다 인종적?민족적인 억압이 더해져 있다는 점을 무시하며 후자의 경우 보수적 근대화가 초래했을 것이 분명한 희생을 무시한다. 광무개혁이 성과를 거뒀다하더라도 그것의 보수성에 비추어 볼 때, 상당한 정도의 억압을 동반했을 것이 분명하다.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서 근대가 어떻게 형성돼왔으며, 현재가 과거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탐구하는 작업은 그 자체로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더구나 현재 국민국가들이 벌이고 있는 역사전쟁의 와중에서 그러한 작업은 현실적인 함의 면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다만 필자로서는, 자랑스러운 OECD 국가의 일원인 한국이 처한 오늘의 현실을 돌이켜 볼 때, 이렇게 발전했음에도 왜 사는 것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라는 질문 또한 놓치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한다.